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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통사

2. 고구려인으로 추정되는 도상(圖像) 등을 통한 고구려 인식

2. 고구려인으로 추정되는 도상(圖像) 등을 통한 고구려 인식

고구려인들은 건국 초기부터 무덤을 만들 때 돌을 쌓아 만들었는데, 이를 적석총(積石塚)이라고 한다. 고구려 무덤 양식에 관한 문헌자료로는 『삼국지(三國志)』 위서 동이전이 있는데, “돌을 쌓아서 봉분을 만들고 소나무와 잣나무를 봉분 주위에 심는다”고 하였다. 또 『양서(梁書)』에는 무덤을 만들 때 덧널인 곽(椁)을 사용하지만, 관(棺)은 사용하지 않는다고 했다.
고구려 무덤의 큰 특징인 적석총은 고구려의 영역이었던 곳에서 발견되어서 그 강역을 짐작할 수 있다. 강이 가까이 있던 곳의 무덤은 강돌을 모아 쌓아서 만들었으며, 산돌을 깨서 만들기도 하였다.
고구려인들은 죽은 자의 안식처인 무덤 널방의 벽에 다양한 주제로 그림을 그렸다. 지금까지 발견된 고구려 고분의 벽화는 3세기 중엽에서 7세기 전반에 걸쳐 제작된 것들이며, 고구려인의 사상, 문화, 일상생활에 대한 많은 정보를 담고 있다. 『삼국지』 고구려전에 따르면, 고구려는 돌을 쌓아 봉분을 만들고, 무덤 둘레에 소나무와 잣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적석총은 대개 강변 대지나 구릉 기슭에 수 기 또는 수백 기로 열지어 있다. 그 분포 범위는 동쪽으로 중국 길림성 장백(長白), 서쪽으로 요령성 관전(寬田), 남쪽으로 북한 황해도 신원(新院), 북쪽으로 환인(桓仁)·통화(通化) 일대에 이른다. 특히, 길림성 집안(集安)의 통구(通溝)분지에 군집을 이루고 있다.
적석총은 지상에 주검이 안치되므로, 분구 가운데에 매장부를 둔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적, 인위적 변형에 쉽게 노출되어 석실을 매장부에 만들지 않은 상당수의 소형 적석총은 돌무지 상태로 남아있게 된다. 적석총의 형식은 분구 형태로 분류하기도 하고 매장부만을 기준으로 분류하기도 하는 등 여러 분류안이 있다. 연구자 간의 기준 차이도 있지만, 잔존 상태가 나빠 원형 파악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고구려의 초기 무덤 형태는 돌무지무덤이다. 고구려인들은 강돌이나 산자갈들을 모아 무덤을 만들었는데, 시간의 흐름에 따라 무덤 아래 가장자리에 단을 만들기도 하고, 나중에는 계단처럼 여러 층의 단을 쌓은 돌무지무덤을 만들기도 하였다. 이러한 초기 돌무지무덤은 구조상 벽화와는 무관한 것이었다. 중국에서는 한대에 이미 무덤 안을 벽화로 장식하는 문화가 있었다. 그들은 시신을 넣는 널과 덧널에 그림을 그리고, 널방 안에 그림으로 장식된 비단을 걸었으며, 널방 벽에 직접 그림을 그리기도 하였다. 낙랑군에 이러한 문화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낙랑군을 병합한 고구려인들은 낙랑군이 있던 평양 지역에 돌방 흙무덤을 만들고 그 내부를 화려한 그림으로 장식하기 시작하였다(강현숙, 2005).
초기의 고구려 고분벽화는 돌로 쌓은 벽면에 회(灰)를 칠하고 그림을 그려 넣는 기법을 사용하였다. 이를 화장지법(化粧地法)이라고 하는데, 밑그림 도면을 벽 위에 대고 그림의 선을 옮겨 베낀 후에 채색을 하는 것이었다. 화장지법에는 회가 마르기 전에 그림을 그리는 기법과 마른 후에 그리는 기법이 있는데, 고구려인들은 일반적으로 회가 마르기 전에 그리는 기법을 사용하였다. 회가 마르기 전에 그린 벽화는 안료가 백회(白灰)에 스며들어 오랫동안 보존할 수 있었다. 회가 마른 후에 그리는 기법은 부분적으로 사용되었다. 회가 마른 후에 채색을 하여 그림을 그리면 선명도가 뛰어나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림을 오랫동안 보존하는 데에는 취약하였다.
후기 고구려 고분벽화는 벽에 회칠을 하지 않고 다듬은 돌의 표면에 직접 그림을 그렸다. 이 기법은 채색이 벽면에 잘 스며들어 오랫동안 보존되도록 광물성 가루를 안료로 사용하였다. 해초를 달여 제작하거나 동물성 아교를 섞어 사용하기도 하였다. 이 방법은 안료가 돌 표면의 사이에 스며들어 박히게 되어 있다.
고구려 고분벽화의 초기라고 할 수 있는 4~5세기의 주제는 생활풍속에 관한 것이었다. 생활풍속은 주로 무덤의 주인이 생전에 누렸을 상황에 관해서 재현하였을 것이다. 묘주(墓主) 부부가 시중을 받거나 나들이하는 모습, 사냥이나 연회를 하는 모습을 묘사하였다. 6~7세기에는 일상도(日常圖)에서 벗어나 왕자(王字)무늬, 연꽃무늬 등 장식무늬를 그렸는데, 특히 연꽃무늬 그림은 불교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벽화고분 3기로 구분되는 6~7세기에 축조된 고분의 벽화에는 주로 사신도(四神圖)를 그렸다. 평양 지역의 벽화는 사신(四神)에만 집중하였다면, 집안 국내성의 사신도는 배경이 매우 화려하고 복잡한 양태이다. 이러한 점으로 비추어 볼 때 지역적인 차이를 보인다. 평양 지역과 국내성 지역의 벽화는 인물 그림에서도 차이가 있다. 즉 평양 지역 고분의 인물 복장은 옷의 여밈 상태가 오른쪽으로 여미는 것으로 묘사하여 중국계 옷차림으로 보기도 한다. 반면 국내성 지역의 고분벽화에 보이는 인물도에는 왼쪽으로 여미고 있어 차이를 보이고 있다.
고구려는 압록강 유역에서 건국한 이래 국가가 성장하고 발전하는 과정에서 영역을 확장하면서 주변 국가들과 갈등관계를 갖게 되었다. 국가 발전 과정에서 사신을 통한 평화적인 교류관계도 유지했으나 전쟁을 하면서 인적·물적 교류를 해야 했다. 이러한 교환이나 교류가 문화적인 측면에서도 남아 있다. 또한 비슷한 문화권과 교류했을 뿐 아니라 모용선비나 탁발선비, 중국의 남·북조와 많은 접촉을 하였다. 이러한 접촉은 자연스럽게 문화의 전달 또는 수용 과정을 거쳤다.
고구려의 고분벽화는 고구려 문화를 대표하는 상징성을 가지고 있다. 고구려는 건국 초기부터 주변 세력과 화전(和戰) 양면의 모습으로 외교관계를 유지하였다. 고구려의 벽화는 고분을 장식하는 장치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것은 미적인 측면만 있는 것이 아니라 피장자에 대한 기록의 의미도 있었을 것이며, 사후세계에서의 극락왕생을 위한 염원도 담았을 것이다. 고구려인들은 이 염원을 구현하기 위해 정교하고 과학적인 방법으로 안료를 채취하여 세밀하게 벽화를 그리고 석실을 견고하게 구축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고구려 벽화는 문서를 통해서 확인할 수 없는 사실을 풍부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고구려 벽화의 소재는 일상사를 표현하기도 했고, 종교적인 측면에서도 세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보통 고대 사회의 왕릉이나 귀족 분묘는 당시 생활상을 유추하기에 자료가 풍부하지 않은 편이다. 그러나 고구려 고분의 벽화는 그들의 이웃과의 교류나 문화적인 양태, 사후세계에 관한 의식, 신선사상 등을 잘 표현하고 있다. 이를 통해서 고구려 사람들이 매우 개방적인 사고를 지녔으며 외국과 문화를 주고 받았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특히 벽화에 나타난 서역인 묘사는 이들이 초원지역과도 활발하게 교류하였음을 사진을 찍듯이 보여주고 있다.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한 벽화는 고구려 상류사회의 생활문화를 이해하는 첩경이 된다.
고구려 고분의 벽화에서는 서역 문화요소도 볼 수 있다. 안악3호분벽화에서 유명한 수박희(手搏戱)에 묘사된 인물들은 모두 서역계 인물이다. 측면의 얼굴을 묘사한 부분에는 뚜렷하게 코가 유난히 높게 그려졌다. 눈도 크게 묘사하여 서역계 사람의 특징을 잘 묘사하였다. 같은 안악3호분의 고취악대(鼓吹樂隊) 행렬도에는 뿔나팔이 묘사되어 있는데, 이 뿔나팔은 보통 유라시아 초원 유목지대에서 사용된 것이라고 한다. 유목사회에서 목동이 양을 비롯한 동물들을 이끌고 다닐 때 유용하게 사용했었던 듯하다. 각저총에 그려진 씨름하는 모습의 벽화에는 웃통을 벗은 두 인물이 씨름을 하고 있는 긴장된 모습을 그렸다. 씨름하는 인물 중 한 사람의 코는 수박희 그림에 나오는 서역계 인물의 코와 비슷하다. 이들 수박희를 하는 사람들이나 씨름을 하는 사람들의 얼굴 묘사는 금방 이들이 서역계통의 인물임을 알아볼 수 있게 하였다.
고구려가 주변의 국가와 교류를 한 것 중에서 활발한 이동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시기는, 4세기 초반 전연의 환도성 공격과 그 결과 고구려인들이 포로로 끌려갔을 때이다. 342년 전연 모용황의 침략으로 고국원왕 12년에 겪었던 왕모(王母)의 납치, 남녀 5만여 명이 포로로 끌려갔던 것은 건국 이후 최대 사건이었다. 이들은 355년에 돌아오는데, 이 많은 사람들이 10여 년간 전연에서 겪었을 고초와 문화·문물 체험은 전쟁이라는 비극을 겪으며 인적·물적 자원의 교류가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고구려 벽화에 서역인들이 묘사되어 있는 것과 달리 우즈베키스탄의 사마르칸트에 묘사된 조우삽관(鳥羽揷冠)을 하고 환두대도를 걸친 인물은 고구려와 너무나 먼 곳의 벽화에 기록된 것이어서 놀랍다. 이 벽화 인물들에 관해서는 아직 이렇다 할 정설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사서에서 조우삽관과 환두대도는 고구려의 상징과도 같은 의미를 지니는 것이어서 그 의미가 남다른 측면이 있다. 이들이 고구려의 사신일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은 고구려가 지금의 중앙아시아에 존재했던 국가들과도 교류했던 사실을 염두에 둔다. 인물 벽화가 고구려 사신이 아니라면 고구려 계승의식을 가지고 있던 발해 사신을 묘사한 것일 수도 있다고 상정하고 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의하면 고구려는 기원전 37년에 압록강 유역에서 건국하였으며 668년에 멸망한 고대 국가이다. 705년이라는 기간 동안 존재하면서 동아시아에서 뚜렷한 족적을 남긴 것이다. 고구려가 668년에 멸망한 후 당의 내지로 이주했던 보장왕은 당의 조치에 의해서 요동으로 돌아와 안동도독에 임명되었다.
고구려는 국가가 존재할 동안에는 하나의 국가 이름이었으나 멸망한 이후 유민을 통하여 계승된 의식 속에서는 하나의 상징이 되었다. 고구려의 유민들은 발해 건국 이후 고구려 계승의식을 계속 강조하였다. 고구려가 멸망한 후 230여 년이 지난 901년 궁예는 고려를 건국하였다. 궁예는 “지난날 신라가 당에 군사를 요청하여 고구려를 깨뜨렸기 때문에 평양의 옛 도읍이 풀만 무성하게 되었으니 내가 반드시 그 원수를 갚으리라”고 하였다고 한다. 궁예는 신라의 왕자 출신이면서 고구려의 계승을 표방하였다. 궁예가 나라 이름을 고려라고 한 것은 견훤을 의식하였기 때문이다. 견훤은 900년 완산주(전주)를 도읍으로 삼고 의자왕의 원한을 갚겠다고 하고 후백제를 건국하였다. 궁예 역시 견훤과 비슷한 입장에서 신라와 대립하는 형세를 취하면서 국호를 고려라고 하였다. 궁예는 예성강 이북의 패강진(浿江鎭)에 기반을 두고 호족인 송악(개성)의 해상세력 왕건의 집안과 제휴하여 건국하였다. 이 지역은 고구려의 영역이었기 때문에 고구려의 문물제도를 알고 있던 유민들이 살고 있었다. 따라서 이들의 호응을 이끌어내기 위해서 국호를 고려라고 하였다. 이후 궁예는 국호를 마진(摩震), 태봉(泰封)으로 바꾸었다. 그러나 정변으로 정권을 잡은 왕건은 다시 국호를 고려(高麗)라고 하였다. 최승로는 태조가 “금계(金鷄) 즉 김씨의 계림(鷄林: 신라)이 스스로 멸망하는 때를 만나고, 병록[丙鹿: 麗의 파자(破字)]이 다시 일어나는 운세를 타고” 건국하였다고 언급하였다. 왕건이 고구려의 계승을 표방하면서 국호를 고려라고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은 고구려의 수도였던 평양이 황폐화된 것을 안타깝게 여겼다. 918년 9월에 “평양은 옛 서울인데 황폐한 지 오래되어 가시나무가 무성하고, 오랑캐가 그 사이에서 사냥하며 침략하니 마땅히 백성들을 옮겨 이를 채움으로써 울타리(藩屛)를 굳게 해야 한다”라고 하고, 황주(黃州) 등 황해도 일대의 민호(民戶)를 평양으로 이주시켰다. 또한 왕식렴(王式廉)을 대도호부로 삼아 평양을 지키게 하였다. 왕건은 이처럼 평양을 국방의 주요 요지로 인식하였다. 이후 919년 10월에 평양에 성을 쌓고 921년 10월에는 평양으로 행차하였다. 그해 태조 왕건은 평양을 서경(西京)으로 승격하였다. 도읍인 개경(開京)과 함께 중시하고 있음을 천명한 것이다.
고려는 서경을 경영하고 북방정책을 추진하면서 북방 대륙으로부터 침략을 막을 수 있는 근거지를 확보하였다. 이를 두고 충선왕(忠宣王)은 동명왕(東明王)의 옛 땅을 되찾아가고자 하는 노력이라고 평가하였다. 고려 태조부터 후기의 충선왕에 이르기까지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하고 있다는 의식을 면면이 지니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는 다른 나라에도 자신들이 고구려를 계승하였음을 강조하였다. 993년 고려를 침략한 요의 소손녕(蕭遜寧)에게 서희(徐熙)는 고려가 고구려의 옛 땅에 세워진 나라이기 때문에 국호를 고려라고 이름하고 평양에 도읍하였음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1057년 3월과 1065년 4월 요에서 고려에 보낸 책문에 문종(文宗)이 고려가 주몽(朱蒙)의 나라를 계승하였다는 표현을 써서 답장을 보냈다.
고려를 다녀간 이후 『고려도경(高麗圖經)』에도 고려의 개국에 대한 역사적인 배경을 잘 표현하였다. 송 사신인 서긍(徐兢)은 고려 예종(睿宗)의 조의를 위해 고려를 방문했다. 서긍은 개경에 있는 사신(使臣) 숙소에 몇 개월간 머물렀다고 한다. 머무른 동안 보고 겪었던 것을 그림과 글로 보고한 책이 『고려도경』이다. 이 가운데 고려의 건국에 관한 역사적 배경을 다루었는데, 고구려, 발해, 검모잠과 안승의 부흥운동, 고려의 순으로 서술하였다. 이는 고구려를 잇는 계승성을 가지고 있는 나라가 바로 고려라는 당시 고려인들의 인식을 반영하고 있다.
서긍의 『고려도경』과 같은 기록에 의거하여 송에서 편찬된 사서들에는 고구려의 역사적 건국 배경을 고구려가 당에 망한 후 고씨 왕통이 끊겼으나 점차 회복하여 당 말에 왕 노릇을 하였으며, 왕건이 이를 계승하여 고려를 건국한 것으로 정리하였다.
한편 797년에 편찬된 『속일본기(續日本記)』에는 고구려인·백제인·신라인들이 일본 열도로 이주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이들이 집단적으로 살던 지역을 고려군(高麗郡), 백제군(百濟郡), 신라군(新羅郡)으로 표기하고 있다. 이들은 보통 촌(村)을 형성하여 한곳에 마을을 형성하였고, 그것을 고려촌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삼국사기』는 고구려 사람들의 일상에 관한 기록을 많이 남기지는 않았다. 반면 무덤의 벽화는 묘주와 관련된 것으로 짐작되는 일상생활이나 관념세계에 관하여 잘 묘사했다. 특히 고구려인들이 즐겨 입었던 옷의 형태, 종류 등을 짐작할 수 있다. 고구려인의 복장에 관해서는 중국 사서에 남아있다. 『삼국사기』에 악공인(樂工人)의 복식에 관한 기사가 실려있다. 이 악공인들은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으로 아마도 다양한 의복을 입고 있었을 것이다. 이 자료 역시 『통전(通典)』의 내용을 인용한 것이다.
『삼국지』에도 고구려의 사회상을 전하면서 지배계층에 대가(大加)와 소가(小加)가 있으며, 각각 머리에 책(幘)을 쓰거나 절풍(折風)을 썼다고 한다. 고구려 당시 상위의 남자들이 자신의 신분을 드러내는 것을 머리에 써서 서로를 알아보게 하였다고 전한다. 고대 신분제 사회에서 모자나 의복 등은 관직이나 관위 등 신분의 높고 낮음을 나타내는 수단으로 작용했음을 잘 보여준다.
문헌에 기록된 복식 기사가 관모(冠帽) 등 주로 눈에 띄거나 신분을 드러내는 부분에 설명을 집중했다면 고분벽화의 인물도는 생활상이나 관념세계를 그려내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120기에 이르는 고구려 벽화고분 가운데 인물도를 확인할 수 있는 고분벽화는 46기 정도이다(전호태, 2015). 고분벽화의 인물도는 피장자 당대의 모습을 거의 그대로 묘사했을 것이란 점에서 자료적인 가치가 높다. 고구려 역사에서 425년간 수도였던 길림성 집안 지역에는 많은 벽화고분이 산재해있다. 그 가운데 인물도가 확인된 유적은 우산하고분군이다. 우산하고분군은 집안 지역에서 가장 많은 고분이 분포해 있다. 잘 알려진 고분으로는 각저총, 무용총, 삼실총, 통구12호분, 장천1호분 등이 있는데, 인물상은 모두 411명에 이른다.
장수왕 15년(427) 도읍을 평양으로 옮긴 후, 평양이 정치·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평양이 도읍지로서 가진 지리적인 이점은 넓은 평야와 식량 생산력, 원활한 교통망이 갖추어져 있다는 점이었다. 국내성 지역은 지형이 협소하였기 때문에 발전해가는 고구려의 입장에서는 한계가 있었다. 아울러 평양을 중심으로 지배계층이 집중하게 되었다. 도읍지로서 평양이 차지했던 시간은 집안 지역보다는 짧았지만 이 일대에서 확인된 벽화고분의 인물도는 훨씬 많다.
수적으로 차이가 있을 뿐 아니라 벽화에 묘사된 인물들의 의복에서도 집안 지역과 평양 지역의 벽화 인물은 다른 특색을 가지고 있다. 집안 지역 고분인 무용총이나 각저총에 그려진 남자 주인공의 일상복은 유(襦: 저고리)와 고(袴: 바지)를 입고 있다. 여자들도 바지를 입고 있다. 남녀 구별 없이 소매가 좁고 길이가 긴 저고리와 통이 좁은 바지를 입었다. 집안 지역에서는 상(裳: 치마)을 입은 위에 반드시 포(袍: 웃옷)를 입었는데, 평양 지역에서는 웃옷 없이 저고리와 상을 입었다. 여밈 형태도 집안 지역에서는 왼쪽 여밈이었다면, 평양 지역에서는 좌임과 우임을 함께 하였다.
고분벽화에 보이는 여자의 치마는 길이가 다양하여 신발도 보이지 않을 정도의 긴 것과 속바지가 보일 정도의 짧은 길이도 있다. 형태는 주로 허리에서 밑단까지 곱게 잔주름을 잡은 치마가 많았다. 평양 지역 고분벽화에는 벽화 인물들의 옷에 무늬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평안남도 남포(南浦) 대안리1호분 벽화에는 여인이 직조기에 앉아 옷감을 짜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는데, 당시 고구려에서 직조기술이 발달했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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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고구려인으로 추정되는 도상(圖像) 등을 통한 고구려 인식 자료번호 : gt.d_0007_0030_0030_0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