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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통사

1. 졸본

1. 졸본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동명왕 즉위년(기원전 37년)에 주몽이 “졸본천(卒本川)에 이르러, 그 토양이 기름지고 아름다우며, 산하가 험하고 견고한 것을 보고 마침내 도읍하려고 하였으나, 궁실(宮室)을 지을 겨를이 없었으므로 일단 갈대를 엮어 비류수(沸流水) 위에 살았다”, 그리고 얼마 후(기원전 34년)에 “성곽과 궁실을 지었다”고 한다. 또한 〈광개토왕릉비〉에는 “비류곡(沸流谷) 홀본(忽本) 서쪽 산 위에 성을 쌓고 도읍을 세웠다”고 하고, 『위서(魏書)』에는 “흘승골성에 이르러 마침내 자리를 잡았다”라고 한다.
고구려의 첫 번째 도읍이었던 졸본은 중국 요령성(遼寧省) 환인현(桓仁懸) 일대로 비정된다. 졸본은 고구려 성곽과 적석총을 비롯한 이른 시기의 고구려 유적과 유물이 집중적으로 분포하는 곳이어야 하는데, 무기단적석총과 기단적석총이 대규모로 군집하면서 성곽이 함께 존재하는 곳은 현재 환인과 집안(集安) 지역밖에 없다. 그런데 〈광개토왕릉비〉와 〈집안고구려비〉가 소재한 집안이 국내성이므로, 환인을 졸본으로 파악하는 것이 타당하다. 실제로 환인 일대에는 평지성인 하고성자토성(下古城子土城)과 산성인 오녀산성(五女山城)은 물론 혼강(琿江)을 따라 망강루고분군(望江樓古墳群), 상고성자고분군(上古城子古墳群), 고력묘자고분군(高力墓子古墳群, 고려묘자고분군) 등 이른 시기의 고구려 유적이 다수 분포하고 있다.
지도1 | 환인 지역의 고구려 유적 분포(ⓒ구글 어스)
환인 지역에서 고구려 초기 왕성의 후보지로 거론되는 곳은 오녀산성, 하고성자토성, 나합성(喇哈城)이다.
오녀산성은 환인 시가지에서 동북쪽으로 약 8.5km 떨어진 오녀산(해발 806m)에 위치한다. 오녀산의 정상부는 남북 길이 600m, 동서 너비 110~200m가량의 넓은 평탄지로, 사방이 험준한 절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산성은 정상부와 완만하게 경사진 동쪽 산비탈을 이용하여 조성하였는데, 정상부의 넓은 평탄지에 대형 건물지와 주거지, 저수시설 및 망대(장대)를 비롯한 대부분의 유구와 서문지 등이 위치한다. 성의 전체 둘레는 4,574m에 달하지만, 대부분은 절벽을 그대로 이용하여 천연 성벽으로 삼았고, 돌로 인공 성벽을 쌓은 곳은 남벽과 동벽의 남단으로 565m에 불과하다(도면1).
도면1 | 오녀산성 평면도(遼寧省文物考古硏究所, 2004, 도 11)
산성에 대한 고고학 조사는 20세기 초 일본인 관학자들에 의해 시작되었으나, 본격적인 조사는 신중국 성립 이후에 이루어졌다. 1985년 오녀산에 TV 송신탑을 세울 때 많은 유물이 출토되어, 이듬해인 1986년에 발굴조사가 이루어졌으나 정식 보고서는 발간되지 않았다. 1994년에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全國重點文物保護單位)로 선정된 이후, 1996~1999년과 2003년에 요령성문물고고연구소(遼寧省文物考古硏究所) 등에 의해 발굴조사가 이루어졌으며, 2004년에 보고서가 발간되어 중요한 연구자료로 이용되고 있다. 현재 세계문화유산인 오녀산성은 산 아래에 있는 오녀산성박물관과 함께 매년 많은 관람객이 찾고 있다.주 001
각주 001)
2004년 ‘고구려 왕성·왕릉 및 귀족무덤(Capital Cities and Tombs of the Ancient Koguryo Kingdom, 高句麗王城·王陵及貴族墓葬)’으로 세계문화유산에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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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1 | 오녀산성(ⓒ양시은) - 1. 전경(2009년)
사진1 | 오녀산성(ⓒ양시은) - 2. 서문지로 향하는 절벽 사잇길(2009년)
사진1 | 오녀산성(ⓒ양시은) - 3. 동벽(2008년)
산성에는 5개의 문화층이 발견되었는데, 조사단은 제1기 문화층은 신석기시대 후기, 제2기 문화층은 청동기시대 후기, 제3기 문화층은 양한(兩漢)시기에 즈음한 고구려 초기, 제4기 문화층은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에 해당하는 고구려 중기, 제5기 문화층은 금대(金代)로 판단하였다(遼寧省文物考古硏究所, 2004).
제3기 문화층에는 1호 대형 초석 건물지와 평면형태가 원형 혹은 말갈장방형인 수혈주거지 4기, 수혈(灰坑) 3기가 확인되었다. 주거지에는 노지나 간단한 부뚜막시설만 발견되었으며, 제4기 문화층의 주거지와 달리 쪽구들은 설치되지 않았다. 출토유물로는 잔석립이 혼입된 회갈색 수제(手製)토기, 철제농공구, 동전 등이 있다. 토기는 종위대상파수(縱位帶狀把手)가 부착된 심발(罐)이 주를 이루고 있는데, 모두 조질 태토로 소성온도는 낮은 편이다. 철기는 삽날(鐵鍤)과 괭이(鐵钁)가, 동전은 1호 대형 건물지에서 출토된 오수전(五銖錢)과 대천오십전(大泉五十錢), 그리고 1986년 조사 당시 수습된 전한시기 반량전(半兩錢)과 왕망(王莽)시기(8~25년) 화천(貨泉) 등이 있다. 이상의 유물로 볼 때 제3기 문화층은 고구려 초기에 해당한다.
한편, 발굴조사단은 서문지 일대를 제외한 대부분의 석축 성벽을 제3기 문화층과 관련된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그러나 성벽의 회절부 처리와 장대석 기초, 쐐기꼴 성돌의 석재 가공 수준과 성벽의 축조기술 등이 집안의 환도산성(丸都山城)이나 국내성과도 유사하다는 점에서 이 성벽은 고구려 초기가 아닌 중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王志剛, 2016). 일정 높이 이상의 석축 성벽을 축조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수준의 석재 가공 및 토목건축 기술이 필요한데, 환인 지역에서 당대 최상위 무덤으로 비정되는 망강루 4호분이나 6호분의 경우 한 변의 길이가 13~15m임에도 불구하고 강돌 등과 같은 미가공 석재로 울타리를 돌리듯이 쌓은 것을 보면, 고구려 초기에는 인공 성벽을 쌓을 만큼 석재 다루는 기술이 축적되지 못하였을 가능성이 크다(강현숙, 2015).
다만, 서문지에서 확인되는 자연절벽을 이용한 초기 형태의 옹성 구조나 고구려 중기 산성에 비해 정연하지 못한 성돌의 겉쌓기 방식은 오녀산성 석축 성벽의 축조시기가 고구려 중기에서도 약간 이를 가능성이 있음을 보여준다. 이와 관련해서는 오녀산성을 고구려 초기에 조성된 정상부의 유구와 이보다 늦은 위진시대(魏晉時代, 220~420년)에 해당하는 사면부의 석축 성벽으로 나누어 본 이신전(李新全, 2009)의 견해가 주목된다.
또한 발굴단은 오녀산성이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까지만 사용된 것으로 판단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고구려 후기의 유물도 다수 확인된다. 그렇지만 이들 토기는 제작기법과 세부형태에서 고구려 중기 토기의 특징을 공유하면서도 아차산일대보루군에서 출토된 고구려 후기 토기와는 일정한 차이를 보인다. 고구려는 중기 이후부터 행정관청을 비롯한 중요 건물에 기와를 사용하였는데, 기와가 전혀 발견되지 않은 오녀산성의 경우에는 국내 도읍으로 천도한 이후부터는 방어성으로만 기능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평양 천도 이후 오녀산성은 건국지라는 상징성을 지닌 졸본의 방어를 위해 계속 유지는 되었으나 왕도로 향하는 주 방어선에서 멀어지면서 활용도가 국내도읍기에 비해 현저히 낮아진 것으로 보인다(양시은, 2020).
한편, 제3기 문화층에서 가장 주목되는 유구는 1호 대형 건물지이다(도면2-1). 길이 13.8m, 너비 6~7.2m인 6칸 규모의 초석 건물지로, 초석은 대체로 자연석을 이용하였지만 일부 가공한 것도 있다. 건물지 주변에서 기와가 전혀 발견되지 않아 기와지붕 구조는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내부에 쪽구들이나 노지와 같은 별도의 난방시설도 발견되지 않았다. 이 건물지는 고구려 전기의 다른 주거유적과 비교하여 그 규모나 건축구조가 월등하기 때문에 초기 왕궁건축일 가능성이 크다.
도면2 | 제3기 문화층의 주요 유구와 유물(遼寧省文物考古硏究所, 2004, 도70, 77, 79)
사실 환인 지역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오녀산성은 별도의 성벽을 쌓지 않고도 충분히 방어가 가능한 천혜의 요새이자, 환인분지 어디에서나 조망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고구려 초기 도성으로 상징성을 갖기에 충분하다(사진1-1). 그리고 발굴조사를 통해서도 고구려 초기에 활용되었음이 밝혀진 만큼, 건국 당시 산 위에 성을 쌓아 도읍주 002
각주 002)
고구려의 산상 도읍에 대해서는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동명왕편에 소개된 『구삼국사(舊三國史)』 인용문에 “7월에 검은 구름이 골령(鶻嶺)에 일어 사람들이 그 산을 볼 수 없었다. … 7일이 지나 운무(雲霧)가 스스로 걷히자 성곽과 궁실 및 누대가 저절로 만들어졌다”는 내용에서도 확인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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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삼았다는 흘승골성주 003
각주 003)
고구려의 첫 도읍은 졸본이지만, 흘승골성은 첫 도성으로서 실재했던 것이 아니라 후대에 명목상의 설정에 지나지 않는다는 주장도 있다(권순홍,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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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보기에 무리가 없다.
그렇지만 오녀산성이 험준한 산 정상부에 위치해 있어 접근이 쉽지 않다는 점 때문에 평상시 왕이 머무는 거처로 적합했을까 하는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지금도 겨울이 되면 눈과 추위 때문에 오녀산을 등반하는 것이 쉽지 않아 산성에서의 정주(定住)는 사실상 불가능해 보인다. 따라서 평상시 왕이 거처하며 정무를 보는 곳이 평지에 따로 마련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동일한 이유로 고구려 중기 이후에도 오녀산성은 치소성이 아닌 방어성으로만 기능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강현숙(2015)은 산성 내에서 고구려 초기의 유구가 거의 확인되지 않는다는 점을 들어 오녀산성은 정주성보다는 비상시에 일시적으로 사용한 성이며, 주몽이 처음에 비류수가에 집을 짓고 살았다는 문헌기록으로 볼 때 혼강 유역에 평상시 정주적 성격을 가진 평지 토성이 별도로 존재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고구려의 도성이 왕이 평시에 거주하는 평지 도성과 비상시 사용하는 방어용 산성으로 구성되었을 것이라는 견해는 세키노 다다시(關野貞, 1914)에 의해 처음 제기된 것으로, 그간 학계의 통설로 자리 잡았다. 그렇지만 지금까지의 고고학 조사결과와 연구성과로 보건대, 고구려 도성이 평지성과 방어용 산성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적어도 국내성이 축조되는 4세기 이후에나 가능한 것이어서 세키노 다다시의 주장은 그대로 수용하기 어렵다(양시은, 2021).
환인 일대에서 고구려 초기 도읍과 관련하여 언급되는 평지성은 하고성자토성과 나합성이다(지도1).
혼강과 부이강(富爾江)의 합류 지점에 위치한 나합성은 한 변의 길이가 200m가량인 평면 방형의 석축 평지성이다. 오녀산성에서 동쪽으로 약 12km가량 떨어져 있다. 유적은 댐 건설로 인해 수몰되었지만, 갈수기에는 성벽이 지면에 드러나기도 한다. 1909년에 간행된 『회인현지(懷仁縣志)』에 성의 존재가 기록되어 있는데, 2003년 환인현문물관리소가 이를 확인하였다. 오녀산성의 동쪽에 위치한다는 점에서 〈광개토왕릉비〉의 기록을 근거로 졸본의 평지 도성주 004
각주 004)
국내에서는 노태돈(2012), 심광주(2005), 권순홍(2015) 등이 졸본을 나합성 일대로, 오녀산성을 위나암성으로 비정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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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보기도 한다(王從安·紀飛, 2004). 그렇지만 지표에 노출된 석벽이 좁고 작아 성벽으로 보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유적에서 채집된 회청색 기와편 모두 중화민국시기라는 점에서 고구려 성으로 보기 어렵다는 주장도 있다(梁志龍, 2008).
하고성자토성은 환인 시가지에서 서북쪽으로 3km 떨어진 육도하자향(六道河子鄕) 하고성자촌에 있다. 성의 동쪽에는 혼강이 북쪽에서 남쪽으로 흘러간다. 오녀산성과는 약 10km 떨어져 있다. 마을 내에 자리하고 있어 훼손이 심한데, 전체 둘레가 0.8km인 평면형태 장방형의 토성이다. 현재는 서·남·북벽만 잔존하고 있다.
위존성(魏存成, 1985)은 산세가 험한 오녀산성은 일상생활이 불편할 뿐만 아니라 행정기구 전체를 수용할 수 있는 면적도 아니어서 정권의 기틀과 거주민들이 모일 수 있는 별도의 거점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이로 인해 혼강변에 있는 하고성자토성이 오녀산성과 함께 초기 도성을 구성하였을 것으로 주장하였는데, 고구려 건국기에는 토성을 축조하는 전통이 없었기 때문에 한대 성을 연용하였을 것이라고 추정하였다. 이러한 위존성의 주장은 이후 학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는데, 왕면후(王綿厚, 2002), 이신전(李新全, 2008), 박순발(2012) 또한 졸본이 하고성자토성과 오녀산성으로 구성된 것으로 본다.
그렇지만 기저부 너비 15.2m, 상단부 너비 8.4m, 잔고 1.4m인 토축 성벽(서벽)에 대한 1998년도 시굴조사(遼寧省文物考古硏究所, 2004) 당시 성벽보다 먼저 조성된 수혈(H1)에서 종위 대상파수와 심발형토기 파편 등 고구려 전기 유물들이 출토되면서 하고성자토성은 위존성의 주장과는 달리 고구려가 축조했음이 밝혀졌다(도면3).
도면3 | 하고성자토성(遼寧省文物考古硏究所, 2004, 도3, 4)
졸본의 평지 도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하고성자토성의 축성 시기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한데, 발굴조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관계로 현재는 간접적인 추론만 가능하다. 우선 토성 인근에 자리한 상고성자고분군은 기단적석총이 대다수이면서 계단식적석총이 확인되지 않는 점과 2006년에 조사된 4호묘에서 니질회색태토에 점열문 또는 중호문과 점열문이 시문된 토기가 출토되었다는 점에서 조영연대를 3~4세기까지 내려보기도 한다(梁振晶, 2008). 토성 거주 집단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상고성자고분군의 조영연대는 기단적석총 중심의 묘제로 볼 때 고구려 건국 시점보다는 다소 늦을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광개토왕릉비〉에는 홀본의 서쪽 산 위에 도읍을 세웠다고 하므로, 오녀산성의 서쪽에 위치한 하고성자토성은 여러 면에서 졸본의 평지 도성으로 비정하기 어렵다. 이로 인해 하고성자성을 “골천(鶻川)에 이궁(離宫)을 지었다”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기사를 근거로 유리왕 3년(기원전 17년)에 축조되었다는 이궁으로 보기도 한다(李殿福, 2004; 梁志龍, 2008).
한편, 국력이 약했던 고구려 건국 당시에는 대규모 노동력과 재력을 투입하기 쉽지 않았을 것이므로, 평상시 거점에 성곽을 축조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다. 고구려 초기에는 산상의 군사방어성이 평상시 거점보다 중시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여호규, 2015). 고구려의 도성이 평지성과 방어용 산성으로 구성되었다는 기존의 인식에서 벗어난다면, 고구려 초기의 대내외적인 상황과 함께 졸본 도읍의 경관을 이해하는 데도 효과적일 수 있다.
이에 양시은(2014)과 여호규(2014)는 오녀산성의 동쪽, 대규모 고구려 고분군이 조성되어 있는 고력묘자촌 부근의 수몰지구를 졸본의 평지 거점으로 보고 있다. 고력묘자고분군은 1956년 조사에서 240여 기의 고분이 확인되었다. 고분군은 다수의 적석총과 소수의 봉토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무기단·기단·계단 모든 형식의 적석총이 발견되었다. 또한 적석총에서 손으로 제작한 심발과 초창기 형태의 호가 출토되어, 고구려 초기부터 고분군이 조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萬欣·梁志龍, 1998). 환인 지역에서 규모가 가장 클 뿐만 아니라 고분군의 조영 기간도 가장 길고, 또 대형 적석총도 다수 확인된다는 점에서 고력묘자고분군 일대는 인근의 오녀산성과 함께 고구려 초기 도읍을 구성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최근에는 고구려 초기의 도읍이 산성으로만 이루어졌을 것이라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왕지강(王志剛, 2016)은 하고성자토성의 건립시기가 고구려 초기라는 증거가 충분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국내로 천도하기 전 고구려는 국력이 약했기 때문에 막대한 인력을 동원하여 방어에 불리한 평지 토성을 구축할 수 없었을 것으로 판단하였다. 이에 오녀산을 도읍으로 하였던 시기에는 평지에 도성이나 대형 예제(禮制) 건축물 등은 조영되지 않았을 것으로 보았다. 기경량(2019) 또한 유리왕이 여러 이궁을 지어 옮겨 다닌 것을 볼 때 졸본시기에는 평지의 거주공간을 정궁(正宮)으로 인식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으므로, 졸본도읍기의 왕성은 고구려 왕도 경관의 최정점이자 신성성이 강조되는 오녀산성이었고, 정궁 역시 산성에 위치하였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 각주 001)
    2004년 ‘고구려 왕성·왕릉 및 귀족무덤(Capital Cities and Tombs of the Ancient Koguryo Kingdom, 高句麗王城·王陵及貴族墓葬)’으로 세계문화유산에 지정되었다. 바로가기
  • 각주 002)
    고구려의 산상 도읍에 대해서는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동명왕편에 소개된 『구삼국사(舊三國史)』 인용문에 “7월에 검은 구름이 골령(鶻嶺)에 일어 사람들이 그 산을 볼 수 없었다. … 7일이 지나 운무(雲霧)가 스스로 걷히자 성곽과 궁실 및 누대가 저절로 만들어졌다”는 내용에서도 확인이 가능하다. 바로가기
  • 각주 003)
    고구려의 첫 도읍은 졸본이지만, 흘승골성은 첫 도성으로서 실재했던 것이 아니라 후대에 명목상의 설정에 지나지 않는다는 주장도 있다(권순홍, 2019). 바로가기
  • 각주 004)
    국내에서는 노태돈(2012), 심광주(2005), 권순홍(2015) 등이 졸본을 나합성 일대로, 오녀산성을 위나암성으로 비정한 바 있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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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졸본 자료번호 : gt.d_0008_0010_0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