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국내도성
2. 국내도성
고구려의 두 번째 도읍인 국내는 중국 길림성(吉林省)의 집안 지역으로, 이 일대에는 〈집안고구려비〉와 〈광개토왕릉비〉를 비롯하여 국내성과 산성자산성(환도산성), 그리고 태왕릉과 장군총 등 왕릉으로 비정되는 초대형 적석총이 분포하고 있다.
집안 지역은 압록강 중류 일대에서 가장 넓은 평지가 펼쳐져 있는 곳으로, 만주의 소강남(小江南)이라고 불릴 정도로 따뜻하고 강수량도 풍부하며 서리가 내리지 않는 날이 많아 농사짓기에 알맞은 곳이다. 북쪽에 있는 노령산맥(老嶺山脈)에서 뻗어내린 용산(龍山, 해발 507m), 우산(禹山, 762m), 칠성산(七星山, 706m) 등이 집안의 분지 지형을 감싸며 천혜의 자연방어벽을 형성하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압록강이, 서쪽으로는 통구하(通溝河)가 흐른다. 내륙 교통로 외에도 압록강 수로를 이용한 물자 수송과 통행이 가능하다(지도2).

지도2 | 집안 지역의 주요 고구려 유적 분포도(강현숙 외, 2020, 그림V-5)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유리왕 22년(3년)에 “왕은 국내로 천도하고, 위나암성(尉那巖城)을 쌓았다”고 하지만, 『삼국지』 위서동이전에는 건안(建安) 연간(196~219년)에 “이이모(伊夷模)가 다시 새로운 도성을 건설하였다(更作新國)”고 한다.
국내 도읍의 위치에 대해서는 별다른 이견이 없으나, 졸본에서 국내로의 천도 시점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존재한다. 대체로 ① 유리왕대(기원전 19~기원후 18년 재위) 천도설(박순발, 2012), ② 태조왕대(53~146년 재위) 천도설(여호규, 2005; 강현숙, 2015; 권순홍 2019), ③신대왕대(165~179년 재위) 천도설(임기환, 2015; 기경량, 2017), ④산상왕대(192~227년 재위) 천도설(심광주, 2005; 노태돈, 2012)로 나누어볼 수 있다. 이 중 중국과 북한 학계는 유리왕대 천도설이, 일본 학계는 산상왕대 천도설이 통설이다. 남한 학계에서도 한동안 유리왕대 천도설이 주류를 차지하였으나, 집안 지역의 왕성유적과 왕릉 및 귀족무덤이 2004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는 과정에서 주요 유적에 대한 발굴조사 보고서들이 전격적으로 발간되면서 다양한 의견이 제기되고 있다.주 005
집안 지역의 성곽유적으로는 국내성과 산성자산성(山城子山城)이 있다. 물론 유적의 분포현상만을 놓고 보면 국내 도읍이 평지성과 유사시의 산성으로 이루어졌다는 세키노 다다시(關野貞, 1914)의 주장이 일견 타당해보일 수도 있으나, 개별 왕성유적의 축조 및 활용 연대에 따라 도성 구조가 달라진다는 점에서 문제가 된다.
위존성(魏存成, 1985)은 유리왕대인 기원후 3년에 국내로 천도하면서 현 국내성 석축 성벽 아래에 있던 전한시기의 토성을 왕성으로 이용하고, 동시에 수도의 방어를 위해 위나암성(산성자산성)을 축조한 것으로 보았다. 이후 공손씨의 출병으로 토성이 완전히 폐허가 되자 산상왕이 환도성(산성자산성)으로 천도하였으며, 3세기 중엽 관구검(毌丘儉)에 의해 환도성이 파괴되어 도읍으로 삼을 수 없게 되자 평양성을 쌓고 백성과 종묘, 사직을 옮겼는데, 당시는 평양 지역에 낙랑이 존재하고 있었으므로 문헌에 기재된 평양성이 바로 지금의 국내성이라고 하였다.
웨이춘청의 주장은 이후 여러 연구자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중국에서 간행된 최초의 고구려 고고학 개설서인 『高句麗 考古』(魏存成, 1994)에도 약간의 논지와 자료만 보강되었을 뿐 기본 내용은 동일하다. 고구려 도성의 구조를 평지성과 산성으로 파악하여 논지를 전개한 그의 주장은 당시까지의 고고학 조사내용을 문헌기록에 최대한 맞춰 해석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2000년대 초반 국내성 북벽에 대한 발굴조사(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 2004a)에서 토성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으며, 석축 성벽과 내부의 토축부가 국내성의 축조시점에 함께 조성된 것임이 밝혀졌다(심광주, 2005). 그리고 2000년대 후반에 실시된 동벽 조사에서도 토축의 기초부와 석축 성벽의 축조시기는 4세기 초를 상회하기 어렵다는 보고가 있었다(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 2012).
사실 1970년대 중반 조사에서 발견된 토축 다짐층(너비 7~8m, 높이 1.7~2m: 도면4-1의 2번 토층)은 전한시기 현도군(玄菟郡) 소속의 토성이 아니라 고구려가 국내성 성벽 축조를 위해 조성한 기초 성토층으로, 이러한 다짐층은 남한의 호로고루나 당포성 등에서도 확인된 바 있다(사진2-2). 그리고 이 토축 다짐층에서 청동기시대의 석기와 함께 고구려 전기로 편년되는 종위대상파수가 부착된 심발형토기(도면4-2)가, 북벽과 서벽의 내부 토층에서 고구려 중기로 편년되는 회전대로 제작한 니질태토의 토기(도면5-2)가 출토된 것으로 볼 때, 국내성의 석축 성벽은 고구려 중기에 축조되었음이 분명하다(양시은, 2013).

도면4 | 국내성 남벽 - 1. 국내성 남벽(Tr.4) 단면도(集安縣文物保管所, 1984, 도13, 12)
- A: 1차 건축(고구려) B: 개축(고구려) C: 근대
1: 교란층 2: 황갈색 사질점토층(토루 추정) 3: 황색 사질점토층 4: 황색 사질점토층 5: 갈색 사질점토층 6: 사질자갈층
- A: 1차 건축(고구려) B: 개축(고구려) C: 근대
1: 교란층 2: 황갈색 사질점토층(토루 추정) 3: 황색 사질점토층 4: 황색 사질점토층 5: 갈색 사질점토층 6: 사질자갈층

도면4 | 국내성 남벽 - 2. 다짐층(2번 토층) 출토 심발형토기(集安縣文物保管所, 1984, 도13, 12)

도면5 | 국내성 북쪽 성벽과 출토 토기 - 1. 국내성 북벽 평·단면도(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 2004, 도11, 12)

도면5 | 국내성 북쪽 성벽과 출토 토기 - 2. 북벽 내 고구려 토기(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 2004, 도11, 12)

사진2 | 국내성과 당포성의 기저부 비교(ⓒ양시은) - 1. 국내성 남벽 기저부(2007년)

사진2 | 국내성과 당포성의 기저부 비교(ⓒ양시은) - 2. 당포성 동벽 기저부(2006년)
사실 〈관구검기공비(毌丘儉紀功碑)〉를 제외하면 관련된 고고자료가 거의 없어 국내로의 천도 시점을 논하기가 쉽지 않지만, 『삼국사기』 신대왕 3년(167년)에 “왕이 졸본에 가서 시조사당(始祖廟)에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어 적어도 2세기 중엽에는 졸본이 아닌 국내가 도읍이었음을 짐작해볼 수 있다. 고구려는 일찍부터 한 군현과 대립해왔기 때문에 비록 평지에 성곽을 쌓지 않았더라도 왕도였던 국내에는 방어를 위한 산성이 갖추어져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대무신왕 11년(28년)에는 한의 공격에 고구려가 위나암성에서 농성을 한 기록이 전한다. 『삼국사기』에는 위나암성이 물이 전혀 나지 않을 것으로 여겨질 만큼 지세가 험한 바위산에 있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문헌에 묘사된 지형적인 조건만을 고려한다면, 포곡식 산성인 산성자산성보다는 산정식 산성인 오녀산성이 위나암성에 부합한다(노태돈, 2012). 이로 인해 임기환(2018)은 국내 위나암으로의 천도 기사는 실제 당시의 천도가 아니라 후대에 국내 지역을 기반으로 한 왕실이 졸본 지역을 기반으로 한 초기 왕계와 결합하면서 유리왕을 주몽왕의 아들로 편입하고 유리왕대에 국내로 천도한 것처럼 분식한 결과로 이해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위나암성의 비정 문제는 환인과 집안 지역의 고고자료가 추가로 확인되지 않는 이상 해결하기가 쉽지 않다.
한편, 『삼국사기』에는 산상왕 2년(198년)에 환도성을 쌓고, 산상왕 13년(209년)에는 환도로 도읍을 옮겼다(移都)는 기록이 있다. 환도성은 국내성에서 북쪽으로 2.5km가량 떨어져 있는 산성자산성으로 비정된다. 현지에서 환도산성으로 불리는 산성자산성은 남쪽 계곡 입구를 정문으로 삼고 주변의 험준한 산 능선을 따라 석축 성벽을 쌓아 전체 둘레가 7km에 달하는 전형적인 포곡식 산성이다(도면6, 사진3-1). 지대가 가장 낮은 남쪽은 압록강 지류인 통구하로 인한 자연해자와 수직 절벽이 형성되어 있어 남문 외에는 접근이 쉽지 않다.

도면6 | 산성자산성 평면도(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 2004b, 도3)

사진3 | 환도산성 - 1. 전경(2005년) (ⓒ1: 최종택, 2~4: 양시은)

사진3 | 환도산성 - 2. 정비된 남문지(2016년) (ⓒ1: 최종택, 2~4: 양시은)

사진3 | 환도산성 - 3. 동벽 여장과 돌구멍(2010년) (ⓒ1: 최종택, 2~4: 양시은)

사진3 | 환도산성 - 4. 북쪽 성벽(2010년) (ⓒ1: 최종택, 2~4: 양시은)
2001~2003년에는 길림성문물고고연구소 등이 문지와 장대, 초석 건물지(궁전지) 등을 발굴조사하였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2004년 이후에는 성벽과 성 내부에 대한 지속적인 정비복원작업이 이루어져 현재는 관람로를 따라 전체 성벽을 둘러볼 수 있게 되어 있다. 성내의 산비탈에는 무기단적석총 30기와 기단적석총 6기가 분포하고 있으며, 성 바깥에는 통구하를 따라 산성하고분군이 분포하고 있어 장관을 이룬다.
산성은 동벽의 남단과 서벽의 북단 그리고 북벽이 비교적 잘 남아 있는데, 잔고는 5m 이상이다. 성벽은 쐐기꼴 돌을 이용하여 능선의 바깥 경사면은 내탁식(內托式)으로, 평탄한 능선은 협축식(夾築式)으로 축조하였다. 남벽 동단을 포함한 일부 구간에서 여장과 돌구멍도 확인되었는데, 여장의 폭은 0.73~1m, 잔고는 0.78~1.3m이다(사진3-3).
성문은 7개 이상이며, 정문인 남문(사진3-2)은 ‘凹’자형의 지세를 이용한 일종의 장방형 옹성 구조로 되어 있는데, 통로 좌우의 양쪽 성벽에서 너비 10m, 길이 15~20m, 잔고 15m인 장방형의 평대가 확인되었다. 남문과 그 주변에는 성벽 하단부에 배수를 위한 수구가 별도로 마련되어 있다. 남문지 주변에 고구려 기와편이 집중되고 있어 성문 위로 문루가 있었음을 짐작해볼 수 있다.
남문에서 성 내부로 진입하면 길이 6.7m, 너비 4.5m, 잔고 4.5m 규모의 석축 장대가 있다. 장대는 들여쌓기 방식으로 축조하였으며, 상부로 올라설 수 있는 계단시설도 갖추었다. 장대에 올라서면 성 바깥의 통구하 일대가 한눈에 조망된다. 장대 주변으로 기와가 집중 산포되어 있어, 누각이 세워져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산성 내부의 동편에는 남북 91~96m, 동서 70~75m 범위의 4단으로 구성된 대지에 조성된 대규모 초석 건물지(도면7-1)가 발견되었다. 석축 담장 안으로 규모가 다양한 초석 건물지 11동이 조성되었는데, 중간 단의 동편에는 8각 건물지 2동이 나란히 배치되어 있다. 온돌시설은 확인되지 않았으며, 각 건물지의 상단부에는 배수로가 길게 설치되어 있다. 와당과 기와를 포함한 다수의 유물이 출토되었는데, ‘소형(小兄)’이라는 고구려 관등명이 새겨진 기와도 발견되었다.

도면7 | 환도산성 추정 궁전지 - 1. 평면도 (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 2004b, 도41, 104)

도면7 | 환도산성 추정 궁전지 - 2. 궁전지 출토 양이부호 (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 2004b, 도41, 104)
발굴조사단은 이 건물지를 342년 전연(前燕: 337~370년)의 침입으로 환도성이 함락되었을 때 소실되어 폐기된 궁전지로 추정하고 있다(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 2004b). 그러나 이 건물지에서 출토된 연화문와당과 유사한 모티브의 와당이 6세기대로 편년되는 연천 호로고루에서, 양이부호(도면7-2) 또한 5세기 중후반의 남한 내 여러 고구려 유적에서 발견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6세기대 문헌에서도 여전히 환도성의 명칭이 등장하고 있어 4세기대 폐기설은 인정하기 어렵다(양시은, 2016).
그리고 산성에 대한 지금까지의 발굴조사에서 5세기대 이후로 편년되는 유물만 출토되었을 뿐 3~4세기대의 유물이나 유구는 확인되지 않았다. 집안 지역의 국내성이나 초대형 적석총에서 발견되는 4세기대 권운문와당 또한 산성에서는 전혀 발견되지 않고 있으며, 5~6세기대의 연화문와당이나 귀면문와당 등이 주를 이루고 있는 상황이다. 이러한 고고학적인 양상은 환도성이 일찍부터 도성으로 활용되었다는 문헌 기록과 차이를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성자산성은 2세기 말부터 존재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은데, 1906년에 집안분지의 소판차령(小板岔嶺)에서 발견된 〈관구검기공비〉에는 244년에 관구검이 고구려를 공격한 기록이 남아 있어 당시의 문헌기록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문헌에 따르면, 환도성은 3세기 중엽에 조위(曹魏: 220~265년)의 관구검과 4세기 중엽에 전연의 모용황(慕容皝)에 의해 대규모로 파괴되면서 여러 차례 개축되었다. 지금까지의 발굴조사는 남문지 일대와 장대, 궁전지 등 특정 구역을 중심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앞으로 추가 조사를 통해 3세기대의 고고자료가 확인되기를 기다려보는 수밖에 없다.
이상과 같이 집안 지역의 왕성유적에 대한 발굴조사가 진행되면서 국내 천도 시점부터 도성의 구조가 평지성과 방어용 산성으로 이루어졌다는 기존의 주장은 더 이상 성립할 수 없게 되었다. 이로 인해 초기 국내 도읍은 졸본과 마찬가지로 평지성이 아닌 평지 거점과 비상시 군사방어성으로 구성되어 있었을 것이라는 새로운 견해가 등장하였다.
강현숙(2015)은 환인과 집안 일대의 초대형 적석총에 대한 비교 검토를 통해, 2세기 전반경에는 국내 지역이 이미 왕도로 자리하였을 것으로 주장하였다. 특히 초대형 무기단적석총인 마선구(麻線溝)2378호분이 위치한 마선구고분군 일대에 국내 위나암의 왕궁이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유력한 후보지로 건강(建疆)유적을 주목하였다. 여호규(2005) 또한 3면이 산줄기로 둘러싸여 있어 별도의 성곽을 축조하지 않아도 평상시 거점으로 삼기에 충분한 천혜의 요새지인 마선구 일대를 국내 초기 도성으로 보았다. 그리고 이 지역에서 성곽유적이 발견되지 않는 것은 정치적 중심지로서의 성격만을 가지고 있을 뿐, 일반적인 도성 경관은 당시까지도 본격적으로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더욱이 평상시 거점은 산상왕대에 공손강(公孫康)의 침공으로 파괴된 이후, 244년 조위 관구검 침공 시까지 환도성을 임시 왕성으로 삼은 관계로 수십 년간 방치되었을 것이기에 관련 유적이 잔존하고 있을 개연성은 매우 낮다고 보았다. 그렇지만 마선구 평원지대와 현 집안 시내의 평원지역은 그 넓이에서 상당한 차이가 있어, 국내로 천도할 시점에 굳이 좁은 마선구 지역을 천도지로 삼았다고 보기 어렵다는 임기환(2018)의 비판도 있다.
기경량(2019)은 우산의 완사면과 칠성산 산기슭에 분포하는 적석총이 가장 이른 시기에 형성되었다는 점에서, 두 고분군 사이에 위치한 집안의 평지성 일대가 처음부터 중심 주거지였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기도 한다. 왕지강(王志剛, 2016) 또한 국내로 천도한 이후 통구평야의 중심부를 ‘평지 도읍(平地都邑)’으로 삼았던 고구려가 4세기 중반이 되어서야 국내성을 축조함으로써 도읍을 보완하고 방어를 강화한 것으로 추정한 바 있다. 즉 평지 도읍을 대표하는 국내성이 축조되면서 환도산성과 함께 산성과 평지성의 결합이라는 고구려의 독특한 도성제가 시작된다고 판단한 것이다.
한편, 통구분지의 서쪽 넓은 평야에 자리한 국내성은 방형의 평면 형태를 지닌 둘레 2.7km가량인 석축 평지성이다(도면8). 남쪽의 압록강과 서쪽의 통구하가 자연해자를 이루며, 북쪽의 우산(禹山)은 자연방어벽을 형성하고 있다.
1910년대에는 통구성(通溝城)으로 알려져 있었으며, 6m 높이의 성벽에는 일정한 간격의 치(雉)가, 북벽 바깥쪽에는 해자(濠)가 남아 있었다. 1921년에는 집안현성(輯安縣城)이었던 국내성을 대대적으로 수리하면서 상당한 변형이 이루어졌다. 1975년에는 성벽의 여러 지점에 대한 시굴조사가 있었고, 2000~2003년에는 국내성의 북벽과 서벽 그리고 성 내부의 중요 지점에 대한 발굴조사가 대대적으로 이루어졌다. 2004년에 환도산성(산성자산성)과 함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이후, 2006년 남벽과 동벽 일부 구간에 대한 정비작업 과정에서 추가 조사가 진행되었다. 2012년에는 펜스를 설치하고 성벽의 출입을 금지하면서 유적 보존·정비작업은 완료되었으나, 그 이후에도 신규 안내판을 설치하는 등 꾸준히 관리가 이루어지고 있다(양시은, 2017).

사진4 | 국내성 - 1. 서북 모서리 성벽과 각루(2009년) (ⓒ양시은)

사진4 | 국내성 - 2. 서문지(2009년) (ⓒ양시은)

도면8 | 국내성 평면도(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 2004a, 도5)
국내성의 규모는 동벽 554.7m, 서벽 702m, 남벽 751.5m, 북벽 730m로, 전체 둘레는 약 2,738m이다. 쐐기형 성돌로 성벽을 축조하였으며, 1960년대 시가지 개발로 인해 동벽과 남벽이 많이 훼손되었다. 성문은 2000년대 조사에서 동문 2개, 서문 1개, 북문 4개, 남문 2개로 총 9개가 확인되었는데, 북문지 2곳에는 적대(敵臺)가 설치되어 있다. 서문지는 두 석축 성벽이 서로 이어지지 않고 어긋나 마치 11자와 같은 어긋문 구조로, 한정된 인원만이 성벽을 우회하여 좁은 통로로 들어와 성문을 공격할 수밖에 없게끔 되어 있어서 옹성과 비슷한 방어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성벽의 각 모서리에는 각루(角樓)가 존재하며, 치는 1913년 조사 당시 42개가 확인되었다.
지금까지의 발굴조사결과에 따르면 국내성은 여러 차례에 걸쳐 수축(修築)이 이루어졌는데, 고구려시기에도 한 차례 이상 개축되었다. 그동안 국내성의 초축(初築)과 관련한 여러 견해가 있었으나,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발굴조사를 통해 현재의 석축 성벽은 고구려 중기에 축조되었음이 밝혀졌다.
그리고 2003년도에 조사된 체육장 지점의 가장 아래 문화층에는 권운문와당과 시유도기, 동진(東晉: 317~420년)기의 절강(浙江)지구에서 제작된 청자 등이 출토되어 4세기대 중요 건물지가 있었음이 밝혀졌다. 국내성에서 3세기대에 해당하는 유구가 발견된 사례가 없고, 성 내부 최하층에서 발견된 ‘태녕(太寧) 4년’(327년)명 권운문와당을 비롯한 각종 유물로 볼 때, 현재의 국내성은 축성 기사가 전하는 고국원왕 12년(342년)에 완공되었다고 이해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