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평양도성
3. 평양도성
『삼국사기』에는 장수왕 15년(427년)에 “평양으로 도읍을 옮겼다(移都)”고 한다. 주변이 넓은 평야지대인 평양 지역은 낙랑이 오랜 기간 세력을 유지하였던 곳이었던 만큼 고구려가 점령할 당시에는 이미 도시의 기반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었을 것이다. 357년에 조성된 안악3호분의 묵서명으로 보건대, 313년 미천왕이 낙랑을 축출한 이후부터는 고구려가 평양을 다스려왔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광개토왕 2년(392년)에는 “9개의 절을 평양에 창건하였다”는 기사도 전하고 있어, 평양 지역은 고구려의 도읍으로 활용되기 전부터 중요한 곳이었음이 확인된다(양시은, 2013).
6세기 중엽 북주(北周)의 역사를 기록한 『주서(周書)』 고려전에는 “치소(治所)는 평양성이다. 그 성은 동서가 6리이며 남쪽으로는 패수(浿水)에 닿아 있다. 성내에는 오직 군량과 무기를 비축하여 두었다가, 적(寇賊)이 침입하면 모두 들어가 굳게 지킨다. 왕은 그 곁에 별도의 집(宅)을 지었는데, 항상 거기에 머무르지 않는다”라고 전한다. 해당 기사는 고구려의 도성제가 평상시의 평지성과 방어용 산성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보여주는 주요 근거자료로 이용되어 왔다.
이와 관련하여 세키노 다다시(關野貞, 1928)는 안학궁에서는 늦은 시기의 와당이 그리고 청암리토성(청암동토성)에서는 대성산성 출토품과 유사한 고식의 연화문와당이 출토되고 있다는 점을 근거로 고구려의 전기 평양성은 대성산성과 청암리토성으로 구성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과거 안학궁을 평양성과 짝을 이루는 평지성으로 추정하였으나, 와당의 편년을 근거로 청암리토성을 왕성으로 비정하면서 안학궁은 고구려 후기의 별궁으로 본인의 견해를 수정하였다.

지도3 | 평양 지역의 왕성유적 분포도(朝鮮總督府, 1929, 지도1)
평양의 왕성유적에 대한 발굴조사는 1930년대 중반에 이루어졌는데, 평양부립박물관 관장이었던 고이즈미 아키오(小泉顯夫)는 1935년과 1936년에 평양성(장안성)을, 1938년과 1939년에는 요네다 미요지(米田美代治)와 함께 청암리토성을 조사하였다. 그 결과 전기 평양성의 왕궁터로 추정된 청암리토성의 중앙부에 대한 조사에서 8각탑을 비롯한 금당으로 추정되는 건물지가 발견되었다. 고이즈미 아키오(小泉顯夫, 1940)는 지역전승과 주변의 지명조사를 통해 이 절터를 498년(문자왕 7년)에 창건된 금강사(金剛寺)로 보았다. 이러한 조사결과는 이후 연구에서 청암리토성이 고구려의 왕성이 될 수 없다는 주장의 핵심 근거가 되었다.

도면9 | 청암리토성과 청암리사지 - 청암리토성의 평면도 (小泉顯夫, 1940, 도2, 9)

도면9 | 청암리토성과 청암리사지 - 청암리사지의 평면도 (小泉顯夫, 1940, 도2, 9)
해방 이후 북한 학계는 고구려 평양성의 모습을 기술한 『주서』의 기록을 근거로, 전기 평양성을 대성산성과 안학궁의 조합으로 보고 있다(채희국, 1964). 김일성종합대학을 중심으로 1958년부터 1961년까지 대성산성과 안학궁에 대한 대대적인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는데(김일성종합대학 고고학및민속학강좌, 1973), 안학궁의 경우 평양 천도 시점의 유물이 출토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주장은 계속되었다. 반면, 대성산성과 마찬가지로 국내성시기의 연화문와당이 출토된 청암리토성의 경우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였다.

도면10 | 대성산성 평면도(『조선유적유물도감』 3, 도83)

사진5 | 고구려 연화문와당 비교
- 1. 천추총 출토 와당(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 외, 2010, 57쪽)
2. 대성산성 출토 와당(김일성종합대학 고고학및민속학강좌, 1973, 85쪽)
3. 청암리토성 출토 와당(井內古文化硏究室, 1976, 53번)
- 1. 천추총 출토 와당(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 외, 2010, 57쪽)
2. 대성산성 출토 와당(김일성종합대학 고고학및민속학강좌, 1973, 85쪽)
3. 청암리토성 출토 와당(井內古文化硏究室, 1976, 53번)
대성산성은 평양시 대성구역 대성산(해발 274m)에 있는데, 6개의 봉우리와 그 능선에 석축 성벽을 쌓아 전체 둘레가 7km에 달하는 대형 포곡식 산성이다(도면10). 지형에 따라 구간별로 약간씩 다르게 성벽을 축조하였다. 소문봉 구간의 성벽은 너비가 8m로, 협축식 성벽을 덧대어 쌓았다. 보통의 성벽과는 달리 내벽과 외벽 사이에 중간벽이 있는데, 중간벽에는 수직기둥홈이 약 2m 간격으로 확인된다. 수직기둥홈은 연천 당포성과 호로고루 그리고 서울 홍련봉1보루에서도 발견되었다. 주작봉 구간은 경사면에 2중 성벽을 축조하였고, 내탁식 구조로 흙과 잔돌을 이용하여 뒷채움하였다.
산성에는 총 20개의 문지가 확인되었는데, 주작봉과 소문봉 사이 계곡에 위치한 남문이 정문이다. 남문은 남북 길이 20m, 동서 너비 13.8m 가량의 장방형 석축 기초를 성벽 바깥쪽으로 내어 만든 뒤, 그 위에 성문을 조성하였다. 문지 주변에서 와당을 비롯한 고구려의 적갈색 기와편이 다량으로 출토되어 문루(門樓)가 있었음을 짐작해볼 수 있다. 산성에는 65개나 되는 치가 발견되었는데, 그 규모는 길이 12m, 너비 10.3~9.8m, 잔존 높이 3.3m이다.
산성에는 많은 수의 건물지가 발견되었는데, 기와 건물지는 20여 곳이다. 장수봉 서남쪽 계곡에서 초석 기와 건물지가 확인되었는데, 산성 내에서 규모가 가장 클 뿐만 아니라 금자경(金字經)이 출토되어 고구려의 행궁지로 추정된 바 있다. 다만, 금자경이 담겨 있던 석함과 유사한 형태의 석함이 소문봉 성벽에서도 발견되었는데, 이 석함에는 고려시대에 유행한 지장보살상이 담겨 있어서 행궁지 시기와 성격에 대한 주의가 요구된다(김현봉, 2021).
이 밖에도 불경(묘법연화경)과 불상을 비롯한 청동마구, 청동완, 토기, 기와 등 다양한 유물이 산성에서 출토되었다. 연화문와당 중에는 천추총이나 태왕릉 등의 출토품과 유사한 양식도 있어 대성산성은 평양 천도 이전에 축조되었음을 짐작해볼 수 있다.
한편, 북한에서 전기 평양성의 왕궁으로 판단하고 있는 안학궁은 평면형태가 마름모꼴에 가까운 방형 토성으로, 전체 둘레는 2.5km가량이다. 평양 대성구역 안학동에 있으며, 대성산 소문봉 남쪽 기슭의 평탄한 곳에 입지하고 있다. 1958년부터 1971년까지 김일성종합대학에서 성벽과 궁성에 대한 여러 차례의 발굴조사를 실시하여 축성방식과 내부구조 등이 밝혀졌다(김일성종합대학 고고학및민속학강좌, 1973).
성벽 기저부의 너비는 8.2~10m이고, 토루의 내외 면은 다듬은 쐐기꼴 돌로 2m 내외까지 들여쌓기 하였다. 성벽의 잔고는 6m이다. 성문은 모두 6개가 확인되었는데, 남벽 중앙의 문이 정문으로 너비는 18m이다. 문지에는 잔돌을 깔아 만든 평면형태 원형의 초석이 3개씩 8줄로 배열되어 있다. 성 밖에는 너비 1m 내외의 해자를 설치하였다. 성벽의 네 모서리에는 각루의 흔적이 남아 있다.
성내에는 남북 중심축을 중심으로 5개의 건축군이 분포한다. 남궁·중궁·북궁·동궁·서궁으로 구분되는데, 각 궁전들은 회랑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도면11). 모두 21기의 건물터와 31기의 회랑터가 발견되었으며, 그 외에도 정원과 연못, 우물 등이 확인되었다. 양정석(2008)은 안학궁 중앙 건축군의 배치구조가 한나라 고대(高臺) 건축제도를 채택한 국내성의 궁궐 구조를 계승한 것이며, 남궁은 위진남북조시기의 태극전(太極殿)과 동서당제(東西堂制)를 채용한 것으로 보고 있다.

도면11 | 안학궁 평면도(『조선유적유물도감』 3, 도3)
그렇지만 안학궁의 축조시기에 대해서는 그동안 많은 논란이 있었다. 특히 안학궁 축조 이전에 이미 조성되어 있었던 고구려 석실분과 안학궁에서 출토된 와당에 대한 연대 문제가 논의의 핵심이다.
다나카 도시아키(田中俊明, 2005)는 안학궁이 5세기 말에서 6세기 초로 편년될 수 있는 고구려 횡혈식석실분을 폐기하고 축조되었고, 출토 기와 또한 고려로 추정되는 만큼 안학궁은 고려시대의 궁전건축일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박순발(2012) 역시 안학궁이 고구려 석실분을 파괴하고 조성된 점, 2호 석실묘 출토 토기가 고려시대로 편년되는 점, 그리고 출토된 막새의 형식이 통일신라 내지는 고려 이후의 것이라는 점을 들어 7세기 이후에 안학궁이 조성되었을 것으로 보았다.
반면 민덕식(2003)은 안학궁이 고구려가 멸망할 때까지 기와건물의 개와(改瓦)가 한 번도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단정하기 어려운 만큼, 후기 평양성(장안성)으로 천도한 후에 별궁으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임기환(2007)은 평양 천도 이후 도성을 정비하는 과정에서 문자왕대인 5세기 말에 안학궁을 왕궁성으로 조영함과 더불어 청암동토성에는 왕실사찰(금강사)을 건립하였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지금까지 안학궁에서는 연화문와당, 귀면문와당, 치미 등 다양한 기와가 수습되었는데, 평양시기 고구려의 전형적인 붉은색 기와보다는 회색 계통의 기와가 다수를 차지하고 있어 특징적이다. 채희국(1964)은 안학궁 출토 연화문와당(사진6-1)이 대성산성 출토품(사진5-2)과 유사하다는 점을 들어 안학궁 축조시점을 4세기 말 내지는 5세기 초로 보았다. 그렇지만 이 와당은 구획선 없이 6입의 연화 사이에 간엽이 있는 회청색 계통의 와당으로, 대성산성에서 출토된 2조의 구획선이 있는 적갈색 계통의 연화문와당과는 큰 차이가 있다. 집안이나 평양 지역에서 출토되는 5세기대 와당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문양 구조이며, 이와 유사한 문양 구조의 와당 중에는 뒷면에 반원형의 1조 홈(사진6-2)이 있거나 주연부가 연주로 장식(사진6-3)되는 등 늦은 시기의 특징을 가진 것도 있어 채희국의 주장은 성립할 수 없다(양시은, 2021). 특히 주연부에 연주문이 부가된 (청)회색 계통의 와당은 안학궁을 제외한 다른 고구려 유적에서 전혀 확인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고구려 와당과는 달리 내면에 1~2조의 깊은 홈이 반원형으로 파져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점에서 고려시대의 것으로 추정된다.

사진6 | 안학궁 출토 연화문와당
- 1. 김일성종합대학 고고학및민속학강좌, 1973 2. 고구려연구재단, 2006, 사진12 3.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 2009, 사진40
- 1. 김일성종합대학 고고학및민속학강좌, 1973 2. 고구려연구재단, 2006, 사진12 3.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 2009, 사진40
지금까지 보고된 안학궁 출토 토기 역시 통일신라시대 이후의 것들이 많다. 리광휘(2006)는 안학궁에서 출토된 토기와 기와를 모두 고구려시대의 것으로 파악하고 있으나, 그가 논문에서 제시한 2-3부류(격자타날 토기), 4-5부류(파상문 시문), 5-7부류(타날+돌대), 6-8부류(회청색 타날문 토기), 7-9부류(타날+돌대, 내면 타날), 8-10부류(유약)는 고구려가 아닌 통일신라 및 고려 시대에 해당한다. 또 『대성산의 고구려유적』(김일성종합대학 고고학및민속학강좌, 1973)에 제시된 안학궁 출토품 중 전면이 타날된 토기편, 돌대와 타날흔이 있는 동체부편, 그리고 T자형 구연부를 가진 토기편 역시 통일신라시대 이후의 것이다. 그렇지만 『고구려 안학궁 조사 보고서 2006』에는 소량이지만 고구려의 승문 타날 암키와나 연화문와당, 토기편도 제시되어 있어 주의가 필요하다.
그렇다면 안학궁은 언제 축조된 것일까? 이와 관련하여 안학궁 조성 이전에 조성된 석실분 3기는 안학궁의 축조시기를 결정짓는 중요한 자료가 될 수 있다. 그렇지만 3기의 석실분 모두 상부구조가 훼손되어 기초부만 남아 있는 상황이다. 1호분은 우편재연도에 장방형 현실을, 2호분은 중앙연도에 방형의 현실을 갖추었고, 3호분은 쌍실분으로 좌측은 우편재연도에 장방형 현실을, 우측은 우편재연도에 방형 현실을 갖추고 있다. 그렇지만 유사한 형태의 석실분이 대성산성을 비롯한 고구려 전 영역에서 확인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무벽화 석실분의 경우 특정 형식의 출현과 지속 시기에 대한 연구가 부족하여 직접적인 대입도 어렵다.
따라서 현재로서는 석실분에서 출토된 유물의 연대를 밝히는 것이 중요하다. 『대성산의 고구려유적』 보고서에는 2호분과 3호분에서 유물이 출토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3호분에서 출토된 3점의 토기에 대한 기술과 함께 도면이 게재되어 있다. 토기는 반구형 구연을 가진 회색 계통의 호 1점과 비슷한 크기의 회청색 호 1점, 그리고 회색 계통의 뚜껑 1점으로, 박순발(2012)은 반구형 구연의 호(도면12-2)를 구연부가 발달하고 내면에도 물레흔이 뚜렷하다는 점에서 고려시대의 토기로 판단한 바 있다. 다만 후대의 반구형 호는 경부가 세장하거나 구연부와 경부가 확실하게 구분되는 데 반해, 안학궁 석실분 출토품은 그렇지 않다. 사례가 드물기는 하지만, 한강 유역의 구의동보루나 아차산3보루에서도 반구형 구연을 갖춘 병이나 호가 출토되었다는 점에서 해당 토기를 무리하게 고려로 늦춰 볼 필요는 없다. 뚜껑받이 턱을 갖춘 뚜껑 또한 남한 내 고구려 성에서 유사한 형태를 찾아볼 수 있다. 유물을 실견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연대를 판단하기 쉽지 않지만, 제작기법 등을 고려해볼 때 고구려 후기 토기로 보아도 큰 문제는 없으리라 생각한다.

도면12 | 안학궁3호분과 출토 토기(김일성종합대학 고고학및민속학강좌, 1973)
- 1. 3호 석실분 2. 반구형 구연 호 3. 뚜껑
- 1. 3호 석실분 2. 반구형 구연 호 3. 뚜껑
그렇다고 하더라도 안학궁이 고구려 중기의 석실분을 파괴하고 축조되었다는 점, 출토 와당의 형식이 대성산성이나 청암리토성 출토품보다 늦다는 점, 국내성과는 달리 문지에 별도의 방어시설을 갖추지 않은 점, 그리고 토루의 기단부 외면을 석축한 점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한다면, 안학궁은 고구려가 평양으로 천도한 427년보다는 그 이후에 축조되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한편, 안학궁과 함께 전기 평양성의 후보로 거론되는 청암리토성은 반달모양의 평면형태를 띤 토성으로, 성벽의 전체 둘레는 약 3.5km이다. 고구려 전기 평양성에 대한 북한 학계의 확고한 입장으로 인해 일제강점기 고구려 왕성의 후보지 중 하나였던 청암리토성에 대한 조사와 연구는 해방 이후 북한에서 큰 관심을 받지 못하였다. 전기 평양성이 대성산성과 안학궁이라는 기본 틀은 유지하면서도 도읍을 구성하는 주요 요소 중 하나로 청암리토성을 인식하거나 평양 천도 이전의 평양성으로 비정하는 정도였다.
청암리토성에 대한 발굴조사는 1990년대 중반이 되어서야 이루어졌는데, 그마저도 고구려 왕성보다는 북한에서 새롭게 주장하는 대동강문화론의 영향으로 인해 고조선에서 고구려로 이어지는 문화의 흐름이 강조되었다. 청암리토성의 성벽 축조기법과 토루 내에서 발견된 유물을 근거로 고구려 성 하부에 고조선 시기의 성(왕검성)이 있었을 것이라는 새로운 주장이 제기된 것이다(남일룡·김경찬, 1998).
토성의 서쪽 구역에는 길이 50m, 너비 20m 규모의 벽화가 그려진 초석 건물지가 발견되었다. 그간 고구려 건축에 벽화가 발견된 사례는 청암리토성이 유일하다. 건물지 기초시설로는 자갈과 점토를 교대로 다져 만든 방형의 적심시설과 직경 70~80cm가량의 원형 초석이 확인되었다. 벽화는 점토 벽체에 가는 모래와 점토를 섞어 얇게 바른 다음 연화문, 원문 등 다양한 문양을 나타낸 채색벽화로, 금가루를 입힌 벽화편도 발견되었다(남일룡·김경찬, 2000).
또한 토성에서는 고구려 중기와 후기의 기와들이 다량으로 확인되었다. 대성산성과 마찬가지로 국내도읍기 고구려 왕릉에서 출토된 것과 유사한 형식의 연화문와당도 다수여서 평양 천도 이전에 축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왕궁지로 추정되던 토성 중앙부에서 발견된 절터로 인해 왕성 여부에 대한 논란이 있었지만, 사찰의 축조시기 또는 사찰의 성격에 따라 전기 평양성으로 기능하였을 가능성 또한 여전히 유효하다.
최근에는 졸본과 국내 도읍뿐만 아니라 전기 평양성에서도 평지성이 반드시 필수적인 요소인가라는 고구려 도성제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가 제기되면서, 평상시의 평지성과 비상시의 산성이라는 도식적인 논의에서 벗어나 대성산성만을 왕성으로 비정하는 새로운 견해도 등장하였다. 기경량(2017)은 『주서』에 치소인 평양성이 산성으로 묘사되어 있고, 왕은 그 옆에 따로 집(宅)을 지어 놓았다는 기록만 전할 뿐이어서 평지 거소가 꼭 평지성일 필요는 없으므로 전기 평양성을 대성산성으로만 봐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권순홍(2019) 또한 사료 분석을 통해 장수왕대의 평양 천도는 귀족 평의적 전통을 극복하고 대왕의 전제화와 귀족의 관료화를 위한 것으로, 귀족에 대한 배타화된 왕권을 표출하기 위해 당시 대성산성만을 왕성으로 활용하였을 가능성이 있다고 하였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고구려 도성제에 대한 연구는 도성 내 성곽유적의 분포현황과 『주서』의 기록을 바탕으로 고고학 조사가 시작된 일제강점기부터 본격적인 논의가 이루어졌다. 그렇지만 개별 왕성유적에 대한 발굴조사가 어느 정도 진행된 지금에 와서는 기존의 통설을 뒷받침하던 근거의 상당수가 사실이 아니라고 밝혀졌다. 현재까지의 고고학 조사내용만을 놓고 본다면, 고구려의 도성이 평지성과 방어용 산성으로 구성되었다는 기존의 견해는 적어도 국내성이 축조되는 4세기 이후에나 적용이 가능한 것이다. 물론 일부 연구자의 경우 전기 평양성마저도 대성산성만 왕성으로 사용되었고, 평지에는 별도의 성곽이 없었을 가능성도 제기하고 있는 상황이다. 물론 향후 논의 과정에서 여전히 검토해야 할 많은 문제가 남아 있지만 새로운 견해 역시 선행연구결과와 함께 주요하게 다루어질 것임이 분명하다.
한편, 고구려의 도성제는 6세기 후반 장안성으로 천도하면서 기존의 도읍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하였다. 도시를 감싸는 외성의 조영과 도로를 기반으로 거주민을 통제하는 데 적합한 방리제(坊里制)의 실시 등이 그것인데, 장안성에 투영된 중국식 도성제의 영향은 무시할 수 없겠으나 그 적용 과정에서 보이는 고구려만의 특징 또한 분명이 남아 있음이 확인된다.
『삼국사기』에는 양원왕 8년(552년)에 장안성을 쌓기 시작하여, 평원왕 28년(586년)에 그곳으로 도읍을 옮겼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축성 관련 내용이 기록된 성돌과 그 연대가 일치하는 현재의 평양성이 바로 당시 고구려의 장안성이다. 전기 평양성과의 구분을 위해 후기 평양성으로 편의상 구분하기도 한다. 평양성은 북쪽의 모란봉(해발 96.1m)과 을밀대, 만수대의 험준한 지형을 이용하였으며, 나머지 3면은 대동강과 그 지류인 보통강을 자연해자로 활용하면서 절벽과 능선에 성벽을 쌓았다.
평양성은 북한의 국보유적 제1호로 지정되었으나, 최근까지 지속적으로 사용하면서 훼손되거나 개축된 부분이 많아 고구려 당시의 흔적을 찾아보기 어려우며, 성벽의 기초부나 발굴조사를 통해 부분적인 확인만 가능한 상황이다. 조선시대에는 외성이 석성과 토성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북한 학계의 조사를 통해 외성의 토루는 고려시대에 대동강의 범람을 막기 위해 고구려가 축조한 석축 성벽 상부에 토루를 덧쌓거나 성벽 바깥쪽에 토벽을 추가한 것임이 밝혀졌다(최희림, 1978).
평양성에서 발견된 글자가 새겨진 성돌의 내용이나 기존의 발굴조사결과를 종합해보면, 평양성은 축조 당시부터 성벽 전체를 석축으로 조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 외면은 다듬은 성돌로 겉쌓기 하였고, 중성과 외성 일부 구간의 성벽 내부는 점토와 작은 할석 및 기와를 섞어 다진 것으로 밝혀졌다. 이러한 토심석축 성벽은 평양성보다 이른 시기의 대성산성과 국내성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대체로 내부의 토심과 석축을 동시에 축조한 것이다(최종택, 2020).
성벽 외곽의 전체 둘레는 약 16km이며, 안쪽 성벽까지 포함하면 성벽의 총연장 길이는 23km이다. 산성과 평지성이 합쳐진 평산성 구조로, 기존의 고구려 도성과 달리 주민의 거주지역이 포함된 도시를 방어할 수 있도록 하였다는 점에서 획기적이라 할 수 있다.
평양성에는 축성시점과 축조구간, 관리감독자 등이 기록된 성돌(刻字城石)이 여러 개 발견되었다. 내용을 분석해보면, 주로 소형(小兄) 정도의 관리가 축성을 감독하였으며, 축성구간은 일정하지 않음이 확인된다. 성돌에 기재된 간지를 552년에 장안성을 축조하기 시작하였다는 『삼국사기』 기록에 따라 배열해보면 566년(병술)과 589년(기유)에 축성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통해 552년에 공사를 시작한 장안성은 566년에는 내성을 쌓고, 천도한 이후인 589년에는 외성을 쌓고 있었음이 확인된다. 그리고 『평양속지(平壤續志)』에 북성에서 ‘本城四十二年畢役’이 새겨진 성돌을 발견되었다는 기록이 있어, 외성과 북성을 포함한 장안성의 축성공사는 착수한 지 42년이 지난 593년에 종료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최근 연구에서 위성사진과 근대 지도를 기초로 각자성석에 새겨진 축성거리를 검토한 결과, 장안성 축성에는 35.6cm인 고구려 척(尺)이 사용되었고, 1리는 1,000척에 해당하는 척리법(尺里法)이 이용되었음이 밝혀졌다(기경량, 2017).
현재의 평양성은 북성·내성·중성·외성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중성의 남쪽 성벽이 고구려시기에 축조된 것인지에 대해 논란이 있다. 일제강점기에 중성과 외성 사이의 성벽 하단부에서 고구려시기로 추정되는 원형 초석 2개가 발견되었는데, 세키노 다다시(關野貞, 1928)는 성벽 하단부에 고구려 건물 초석이 존재한다는 점에서 중성 벽은 후대에 쌓은 것으로 보았다. 반면 최희림(1978)은 이를 문루의 초석으로 보고 그 위치에 고구려시기의 성문이 존재하였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기경량(2017) 역시 중성과 외성 내부의 격자형 구획이 고구려 때의 것이 분명하다면 중성 남쪽 성벽 역시 고구려 당시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이 밖에도 평양성의 외성과 중성에는 도로로 구분되는 격자형 구획이 확인되고 있어 고구려 당시에 리방제(里坊制) 또는 방리제(坊里制)가 실시되었음이 확인된다. 도로는 대·중·소로 나뉘는데, 대로는 14m 내외, 중로는 4.8m 내외로 추정된다. 또한 도로에 의해 구획된 방형 구획은 한 변이 177.08m이고, 그 내부는 한 변이 88.54m인 4개의 소구획으로 구성된다(기경량, 2017).

도면13 | 평양성(장안성)의 구조(ⓒ최종택)
김희선(2006)은 평양성에서 확인되는 리방제(가로구획방식)는 북위의 도성이었던 낙양성(洛陽城)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았다. 중국에서 주민의 거주지역인 리(里)를 방(坊)으로 구획한 것은 422년에 축조된 북위 평성(平城)이 처음이다. 평성은 전체 길이가 32리에 달하는 외곽에 방을 축조하고 그 내부에 항(巷)을 배치하였다. 방은 주변이 담장으로 둘러진 평면 방형인 공간으로, 평성에 도읍을 정한 뒤 도성 인구를 늘리기 위해 유목민이나 농경 한족(漢族)을 사민(徙民)하는 과정에서 주민 통제를 위해 탁발선비족(拓拔鮮卑族)이 고안한 방식이었다.
박순발(2012)은 리방제가 북위 낙양성은 물론 수·당 장안성으로 이어져 고대 동아시아 도성제의 전형으로 정착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리방제는 도성 내에서의 택지 반급(班給)에 대한 율령제도가 뒷받침되어야 가능한 것인데, 통구분지 내에 왕릉이 혼재하고 있는 집안 지역과 달리 평양 지역에는 왕릉이 도성 외곽에 분산 배치되어 있다는 점에서 도성지역 주변 공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반영된 결과라는 견해를 제시하기도 하였다. 이 밖에도 기경량(2017)은 고구려에서 격자형 구획이 중성과 외성이 축조된 589년 무렵에 나타난다는 점에서 북위 보다 수의 대흥성(大興城)에서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고 추정하였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고구려는 장안성 축조 이전까지는 고대 중국의 중원 왕조와 구별되는 독특한 도성제를 운영하였다.
고구려의 건국지인 졸본은 현재의 중국 요령성 환인 지역으로, 이른 시기의 고구려 유적이 다수 분포하고 있다. 발굴조사를 통해 고구려 전기 초석 건물지가 확인된 오녀산성은 초기 도성인 흘승골성으로 판단된다. 그렇지만 아직까지 졸본의 평지 거점은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는데, 여러 정황상 환인댐으로 수몰된 고력묘자고분군(고려묘자고분군) 인근으로 추정된다.
고구려의 두 번째 도성이었던 중국 길림성 집안 지역에는 고구려 중기 도성으로 활용된 국내성과 환도산성이 있다. 환도산성은 문헌이나 〈관구검기공비〉 등을 통해 볼 때 2세기 말에 축조되었을 가능성이 큰데, 지금까지의 발굴조사에서 모두 5세기대 이후 유물만 출토되었다. 현재의 국내성은 성벽과 내부 건물지에 대한 발굴조사결과로 볼 때, 고국원왕 12년(342년)의 축성 기사에 부합한다. 이러한 고고학 연구결과는 유리왕 22년(3년)에 국내로 천도하였다는 문헌기록과 맞지 않아 앞으로 추가적인 조사와 연구가 필요한 상황이다. 그리고 집안 일대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해당하는 초대형 무기단적석총이 있는 마선구 일대를 국내 초기 도성으로 보고, 별도 성곽이 없는 평지 거점으로 이해하려는 최근 연구들은 지금까지 밝혀진 고고학자료의 틀에서 국내 초기 도성을 찾기 위한 노력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고구려의 세 번째 도성은 427년 장수왕대에 천도가 이루어진 평양성이다. 문헌에는 평양성은 대동강 북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성에 군량과 무기를 비축해 두었다가 비상시에 방어를 하지만, 왕은 성 옆 별도의 집에 거주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장안성으로 천도하기 이전까지의 전기 평양성은 대성산성과 청암리토성, 안학궁이 도성 후보지로 거론되고 있다.
발굴조사결과 대성산성에서 다수의 고구려 기와 건물지가 확인되고 있고, 집안 지역의 태왕릉과 장군총 출토품과 유사한 연화문와당이 발견되고 있다는 점에서 전기 평양도성과 관련되어 있음이 분명하다. 반면 안학궁의 경우에는 고구려 중기에 조성된 석실분을 파괴하고 궁성이 조영되었다는 점, 그리고 출토유물이 고구려 이후 시대의 것이 주를 이룬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청암리토성 역시 중심부에 절터가 발견되어 논란의 여지가 있으나, 태왕릉이나 장군총, 대성산성에서 출토되는 연화문와당이 확인된다는 점에서 여전히 전기 평양성으로서의 가능성이 남아 있다.
다만, 고구려의 도성체계가 평지성과 방어용 산성으로 조합되었을 것이라는 기존 견해와는 다른 양상이 졸본이나 국내성 지역에서 확인되고 있으므로, 평양 전기 도성에서도 그러할 가능성 역시 무시할 수 없다. 이로 인해 최근에는 전기 평양도성기에 왕은 치소인 대성산성(평양성)에 머물되 인근 평지에 마련된 궁성을 오가며 생활하였을 것이라는 새로운 주장도 제기되었다. 다만 이 경우에도 평지 거점에 대한 실체가 밝혀지지 않아 고고학적으로 전기 평양성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기 쉽지 않은 상황이다.
한편, 고구려는 586년에 평지성과 산성이 조합된 평산성 구조의 장안성(현 평양성)으로 도읍을 옮기게 된다. 기존 도성과는 달리 도시를 방어할 수 있는 대형 성곽으로 성벽의 전체 둘레는 16km에 달한다. 축성 기사가 새겨진 성돌과 문헌기록을 종합해보면, 552년에 성을 축조하기 시작하여 566년에는 내성을, 천도 이후인 589년에는 외성을 쌓았던 것으로 보인다. 외성에는 주민 통제를 위한 리방제가 실시되었는데, 북위나 수, 당의 도성이 방형의 평면형태를 취하고 있었던 것과는 달리 지형에 맞게 변형시킨 점은 고구려만의 특징이라 하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