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고구려 성의 기원
1. 고구려 성의 기원
고구려를 비롯한 동북아시아의 고대국가는 성을 축조하고 군대를 양성함으로써 영토를 방어하고 백성을 통치하였다. 한은 군현제(郡縣制)를 실시하여 각 지방을 다스렸는데, 환인(桓仁) 지역의 외곽에도 통화(通化) 적백송고성(赤柏松古城)이나 신빈(新賓) 영릉진고성(永陵鎭古城) 등과 같은 군현 토성이 설치되었다(지도2).
고구려는 일찍부터 한의 토성을 접했음에도 불구하고 건국 초기부터 산성을 축조하였다. 이는 〈광개토왕릉비〉에 주몽이 “비류곡 홀본 서쪽 산 위에 성을 쌓고 도읍을 세웠다”라는 기록이나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대무신왕 11년(28년) 한의 요동태수가 쳐들어왔을 때 왕이 위나암성(尉那巖城)에서 항전할 당시의 기사 등을 통해 확인이 가능하다.
고구려가 건국 초기부터 산성을 축조한 이유에 대해 진대위(陳大爲, 1995)는 혼강(渾江) 유역에 거주하던 청동기시대의 주민이 산 위에 취락을 이루어 살던 풍속을 고구려 산성의 기원과 연결시켜 설명하였다. 그의 견해는 환인 오녀산성(五女山城)에서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의 문화층이 확인된다는 점에서는 일견 타당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요령 지역의 일부 고구려 산성에서만 확인된 주거용 원형 수혈(高麗坑)을 길림의 구태(九台) 상하만(上河灣) 지역의 청동기시대 산상 주거유적과 연결시켜 고구려 산성이 청동기시대의 고지대 취락에서 발전하였다는 주장은 논리적 비약이 심하다.
왕면후(王綿厚, 1997)는 고구려 산성이 하가점하층문화(夏家店下層文化)에서 하가점상층문화(夏家店上層文化)로 이어지는 요서 지역의 청동기시대 석성(高山型石城)을 계승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즉, 선민족인 예맥족(濊貊族, 주로 맥족)의 석축담(城壇)과 적석묘의 전통을 고구려가 계승, 발전시킨 것으로 이해한 것이다. 고구려의 석성이 적석총의 발전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것은 분명하나, 시기적인 차이가 크고 거리도 먼 요서 지역의 청동기문화를 혼강과 압록강 중류 지역의 고구려 전기 문화와 직접적으로 연결 짓는 것은 무리한 해석으로, 고고학적인 근거가 부족하다.
이러한 문화계통론적인 접근방식으로는 고구려 산성의 등장배경을 설명할 수 없으며, 오히려 자연지형적 요인과 전략적 판단에 따라 자연스럽게 산성이 등장했다고 보는 것이 현재로서는 더 합리적이다. 고구려가 발원한 혼강 및 압록강 중류 지역은 『삼국지(三國志)』 위서 동이전에 “큰 산과 깊은 계곡이 많으며, 벌판과 호수가 없다”라고 기록되어 있을 만큼 산악지대가 대부분으로, 한나라에 비해 상대적으로 세력이 약한 고구려는 험준한 산 정상부에 성을 쌓아 전력의 열세를 극복하고자 했을 가능성이 있다. 특히 절벽이나 험준한 자연지형을 천연 성벽으로 활용할 수 있는 산을 택하여 방어력이 약한 일부 구간에만 성벽을 쌓음으로써 축성에 소요되는 노력과 기술을 최소화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비교적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인 석재가 자연스럽게 성벽의 축조에 이용되었을 가능성이 크다(양시은, 2013).
실제로 고구려가 건국한 환인 지역의 오녀산성과 그 외곽에 분포하고 있는 고구려 전기의 방어성은 신빈 흑구산성(黑溝山城)이나 전수호산성(轉水湖山城)처럼 험준한 지세를 가진 산 정상부에 축조된 산성이 대다수이다. 이들 산정식 석축 산성은 자연절벽 등을 천연 성벽으로 삼아 별도의 인공 성벽을 쌓지 않더라도 방어가 용이한 것이 특징이다(사진2).

사진2 | 신빈 흑구산성 - 1. 위성사진(ⓒ구글 어스)

사진2 | 신빈 흑구산성 - 2. 전경(ⓒ양시은, 2010년)
그리고 고구려 중기 이후에 축조된 중대형 산성 중에는 철령(鐵嶺) 최진보산성(催陳堡山城)이나 개주(蓋州) 고려성산성(高麗城山城, 청석령산성)처럼 지형에 따라 구간별로 토축, 토석혼축, 석축 성벽이 모두 확인된 예가 있는데, 이는 고구려인들이 지형에 따라 축성재료를 선택하였음을 보여준다. 이 밖에도 집안 국내성(國內城)이나 연천 호로고루, 당포성 등과 같이 고구려 중기 이후에 축조된 성에서는 석축 성벽의 기저부나 내면을 흙으로 채우거나, 평양 안학궁이나 연천 은대리성처럼 토루 외면에 일정 높이까지 석축을 부가한 경우도 발견되고 있어, 고구려 성은 하나의 축성재료만을 고집한 것이 아니라 자연환경에 따라 또는 토축과 석축의 장단점을 적절히 혼용함으로써 성벽 축조의 효율성을 극대화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자연지형적 요인에 따른 축성재료의 선택은 중국에서도 확인된다. 용산문화기(龍山文化期)의 취락방어용 성은 중국 전역에서 발견되는데, 토성이 대다수이나 내몽고 지역만 특이하게도 석성이다. 평야지대인 중원 지역에는 평지 토성이, 내몽고 지역에는 높은 구릉에 석성이 축조되었다. 중원 지역의 토성은 이른 시기부터 판축공법으로 축조하였는데, 전체 둘레가 1km 이상인 것이 대다수이다. 반면 내몽고 지역의 석성은 강안대지나 구릉지역에 입지하고 있으며,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돌로 성벽을 쌓고, 평지 토성에 비해 규모가 작다. 내몽고 지역의 이러한 양상은 하가점하층문화 단계에도 이어진다. 반면, 같은 내몽고 지역이라고 하더라도 황하 유역의 하투(河套) 지구에는 150여 기가 넘는 전국시대에서 진·한대의 평지 토성이 분포한다. 이는 평지 토성을 기반으로 한 군현제와도 깊이 연관되어 있겠으나, 성의 입지와 지형적 요인에 따라 축성재료가 좌우됨을 보여주는 또 다른 증거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