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고구려 성의 구조
2. 고구려 성의 구조
1) 성벽
고구려 성은 체성벽(體城壁)을 구성하는 주 재료에 따라 크게 목책성·석성·토성 등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대체로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를 사용하여 성벽을 축조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1) 목책성
목책성은 나무를 이용하여 울타리와 같은 방어시설을 만든 것이다. 단기간에 설치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으나, 화공에 약하고 내구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임시적인 방어시설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문헌에는 고구려가 일찍부터 목책을 축조하였음이 확인된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태조왕 46년(98년)과 50년(102년), 산상왕 21년(217년)에 책성(柵城)에 대한 기사가, 보장왕 4년(645년)에 안시성(安市城)전투 당시 당(唐)의 공격에 맞서 성안에 목책을 세워 무너진 곳을 막았다는 내용이, 그리고 보장왕 27년(668년)에 압록책(鴨綠柵)에 대한 기사가 전한다.
지금까지 목책과 관련된 유적은 남한에서만 확인되었는데, 연천 호로고루와 전곡리 목책유구, 안성 도기동산성, 청원 남성골산성 등이 있다. 남성골산성의 경우 내측과 외측의 목책으로 구성된 복곽식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목책은 2열로 구축되어 있으며, 그 간격은 2.5~3m 내지는 4~4.5m로 지형에 따라 차이가 있다. 목책은 대체로 깊이 1.5m 이상의 구덩이를 파고 직경 20~30cm가량의 나무기둥을 세운 다음, 구덩이를 팔 때 나온 흙과 돌로 그 주변을 덮고 단단하게 다져서 세웠다(중원문화재연구원, 2008). 도기동산성 역시 내외 이중의 목책 구조로, 외벽에는 외목책에 소형의 할석을 점토와 함께 덧대어 보강한 후 불을 질러 단단히 하였다(기남문화재연구권, 2018). 그렇지만 도기동산성에서 확인된 석축 부가방식은 석성인 연천 무등리2보루의 성벽 기초부에서도 발견된 바 있어 향후 추가 검토가 필요하다. 다만 이중 목책 구조는 대전 월평동유적에서도 확인되고 있는바, 고구려에 목책성이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사진3 | 안성 도기동산성의 목책(ⓒ양시은, 2015년)
한편, 과거에는 남한의 고구려 보루에서 발견된 2~3열의 목주열이 석축 성벽에 선행하는 목책의 흔적으로 보기도 하였으나(양시은, 2012a), 서울 홍련봉2보루에 대한 발굴조사에서 확인된 목주열은 얇은 석축 성벽으로는 내부의 토압을 견딜 수 없기에 성벽의 축조 과정에서 이를 지탱할 수 있도록 한 영정주(永定柱)임이 밝혀졌다(심광주, 2018).
(2) 토성
고구려 토성은 하고성자성과 같은 평지성뿐만 아니라, 심양(審陽) 탑산산성(塔山山城)이나 요원(遼源) 용수산성(龍首山城)처럼 요동 지역의 중대형 포곡식 산성에서도 확인된다. 성벽의 축조방식으로는 흙을 쌓아올려 축조하는 성토법(盛土法), 흙을 깎아서 축조하는 삭토법(削土法), 흙을 층층이 단단하게 다져 쌓아올리는 판축법(版築法)과 교호성토법(交互盛土法) 등이 있다. 산성에는 지형이나 필요에 따라 각기 다른 방식을 채택하였는데, 능선이나 경사면에는 삭토법과 성토법을, 성문이나 계곡 입구처럼 방어력을 강화해야 하는 곳에는 많은 공력이 들지만 훨씬 견고한 판축공법이 주로 채택되었다.
판축은 단위 구간별로 판재를 대고 안쪽으로 흙을 부어 달구질을 하거나 발로 밟아 층층이 다져 올라가는 공법이다. 이와 같은 과정을 무수히 반복하여 흙을 여러 번 다지면 굉장히 단단해져서 토축 벽체가 장기간 버틸 수 있게 된다. 판축을 위한 기본구조물에는 목주(木柱, 영정주)와 판목(板木), 횡장목(橫長木), 종장목(縱長木) 등이 있다. 기본 나무 기둥인 목주를 우선 설치하고, 목주와 목주 사이는 종장목과 횡장목으로 결구하여 기본구조를 갖춘 다음, 판축토가 밀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판목(협판)을 설치한다.
고구려 성에서의 판축 흔적은 성벽 절개면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개주 고려성산성(청석령산성), 해성(海城) 영성자산성(英城子山城), 길림(吉林) 용담산성(龍潭山城)의 성문 일대 성벽에는 판축의 흔적이 잘 관찰된다(사진4). 토축 성벽에서 세로로 갈라지는 곳은 판축 당시 영정주나 종장목을 세웠던 부분이고, 가로로 여러 겹 쌓여 있는 것은 흙을 여러 번 다져 판축한 결과물이다. 개별 판축 토층의 두께는 10cm 내외이며, 세로로 나누어지는 부분은 유적마다 다르나 대체로 1.5m 내외이다.

도면1 | 판축공법 개념도(李湞, 2006; 박원호·서치상, 2009 재인용)
무순(撫順) 고이산성(高爾山城)의 동성에는 문지 주변의 성벽에서 판축기법이, 능선을 따라 축조된 성벽에는 흙과 돌을 섞은 토석혼축방식과 판축기법이, 동성과 서성의 경계 지점 남단에서는 토축 성벽 안쪽에 비교적 큰 석재로 기단을 구축하고 그 위에 흙을 덧쌓은 기단 석축 부가방식이 확인되었다. 동성 남문의 서벽 역시 할석으로 30~50cm 높이의 기단 석축을 하고 그 위에 토축 성벽을 쌓았다(徐家國·孫力, 1987). 다만 고이산성은 요금시기까지도 활용되었기 때문에 산성에서 확인되는 축성기법을 모두 동시기의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한편, 노변장관애(老邊墻關隘)를 비롯한 집안 일대의 여러 관애와 일부 고구려 성은 흙과 돌을 이용하여 성벽을 축조한 토석혼축성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지만 관애를 제외한 대부분의 성은 엄밀한 의미의 토석혼축보다는 토루를 축조하는 과정에서 주변의 잔돌이 섞여 들어간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외관상 토성과의 구별이 불가능한 경우가 많아 토석혼축성은 토성의 범주에 속하는 경우가 많다.

사진4 | 개주 고려성산성 - 1. 서문지 일대 전경(ⓒ양시은, 2007년)

사진4 | 개주 고려성산성 - 2. 서문 일대 판축 흔적(ⓒ양시은, 2007년)
그리고 토성 중에는 토루 외벽을 일정 높이까지 석축으로 보강하거나 또는 기단 내부에 석렬 또는 석심을 부가하기도 한다. 평양 안학궁이나 연천 은대리성은 토루 외면에 일정 높이까지 석축을 부가하였는데, 토루의 외면 전체를 석축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토성으로 분류된다. 중심 토루에 기단 보강 석축 또는 외면 보강 석축이 부가된 토성은 평양 천도 이후에 축조된 성에서 주로 발견된다.
(3) 석성
석성은 고구려 성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데, 축조방식에 따라 내탁식(內托式, 단면축조법)과 협축식(夾築式, 양면축조법)이 있다. 내탁식은 경사면을 정리하여 석축을 쌓고 그 안쪽을 흙과 돌로 채워 넣는 방식으로, 석축부와 토축부(뒷채움구간)로 구분된다. 산성에 구축된 성벽은 대부분 내탁식으로 축조되었으나, 지형에 따라 협축식으로 쌓은 경우도 있다. 협축식은 성벽의 내외면 모두를 돌로 쌓는 방식이다. 주로 평지나 얕은 경사면, 그리고 성문 인근의 성벽을 축조할 때 이용된다.
석축 산성에서 협축식 성벽은 성벽 전체를 돌로 쌓는 것이 일반적이나, 국내성이나 연천 호로고루, 당포성과 같은 석축 평지성은 성벽의 내면 혹은 내벽을 흙으로 쌓기도 한다. 심광주(2018)는 성벽의 기저부나 중심부는 흙으로 쌓고, 외벽만 석축하거나 또는 내외 벽을 모두 석축으로 쌓는 이러한 축성기법을 ‘토심석축공법(土芯石築工法)’이라고 부르며, 고구려 후기 축성법의 가장 중요한 특징으로 본다. 토성은 석성에 비해 축성이 용이하지만 외벽의 경사가 완만하여 방어에 취약하다. 석성은 수직에 가깝게 외벽을 쌓을 수 있지만 토성에 비하여 축성에 지나치게 많은 인력과 비용이 소모된다는 단점이 있다. 토심석축공법은 토성과 석성의 장점을 결합한 공법으로, 성벽은 두꺼운 토축부와 얇은 석축부로 구성된다(도면2). 토축부는 성벽의 안정성을 유지해주고, 석축부는 성벽의 외벽경사를 유지시키고 빗물로 성벽이 침식되는 것을 막아주는 역할을 한다. 이러한 토심석축공법은 국내성 외에 아차산일대보루군과 연천 무등리보루군 등과 같은 남한 지역 고구려 보루의 성벽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사진5).

도면2 | 토심석축공법 축조 모식도(심광주, 2018)

사진5 | 구리 시루봉보루(ⓒ서울대학교박물관, 2010년)
한편, 석축 성벽을 축조하기 위해서는 석재의 하중을 지탱할 수 있도록 지반을 다지는 기초공사가 필수적이다. 기초부 조성방식은 지반의 상태에 따라 달라진다.
지반이 암반이 아닌 경우에는 일정 깊이까지 파서 점토를 다져 성토하거나 또는 점토와 잡석을 채워 넣어 평탄한 기초부를 조성하는 것이 보통이다. 국내성 남벽에도 기저부에 기초를 튼튼히 하기 위한 다짐층이 확인되는데(1장 사진2-1), 이처럼 기초부를 성토하는 방식은 연천 당포성이나 호로고루와 같은 평지성에서 주로 발견된다.
지반이 암반일 경우에는 상황에 따라 성토를 하여 기초부를 조성하거나 암반 위에 바로 성돌을 쌓는다. 구리 시루봉보루에는 경사진 기반암 위에 점토를 깔아 성돌의 수평을 유지시키면서 지면에 고정되도록 하였으며, 기단부에는 비교적 편평하고 큰 석재를 놓고 한 층마다 조금씩 들여쌓아 성벽이 높이 올라가더라도 무너지지 않고 균형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리고 환인 고검지산성(高儉地山城)이나 보란점(普蘭店) 위패산성(魏覇山城, 오고성)에는 기반암이나 바위를 직접 다듬은 후에 성돌을 쌓아올리거나, 암반의 형태에 맞추어 치석한 성돌을 쌓아 올리는 방식도 확인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심양 석대자산성(石臺子山城)에는 발굴조사에서 다양한 방식의 기초공법이 확인되어 주목된다. 비교적 평탄한 곳에서는 성벽 벽체 너비로 암반층까지 땅을 판 다음 잔 할석이나 점토를 채워 넣어 기초를 쌓는 구덩이기초법(基槽基礎法)이, 큰 바위가 지면에 돌출되어 있어 성벽 기초작업이 어려운 곳에서는 바위에 홈을 파거나 다듬는 착암기초법(鑿岩基礎法)이, 경사가 가파른 산비탈에서는 산의 지세에 따라 여러 구간으로 나눈 뒤 각 구간의 최저 지점부터 석축을 쌓기 시작하여 아래쪽 한 단의 수평선을 초과하게 되면 다시 전체 석축을 쌓아가는 버팀축조법(戧築法)이 적용되었다(遼寧省文物考古硏究所, 2012b).

사진6 | 고구려 석성 기초부 조성방식 - 1. 착암기초법(위패산성, 2007년)(ⓒ양시은)

사진6 | 고구려 석성 기초부 조성방식 - 2. 버팀축조법(고검지산성, 2008년)(ⓒ양시은)

사진6 | 고구려 석성 기초부 조성방식 - 3. 그랭이기법(위패산성, 2007년)(ⓒ양시은)

사진6 | 고구려 석성 기초부 조성방식 - 4. 들여쌓기(백암성, 2007년)(ⓒ양시은)
이 밖에도 다수의 고구려 석축 산성에는 그랭이기법도 찾아볼 수 있다(사진6-3). 『한국고고학전문사전-성곽·봉수편』에 따르면, 그랭이기법은 성벽을 축조하는 과정에서 하단 석재의 상면에 맞추어 상단 석재의 하면을 깎아 내거나, 줄눈을 맞추기 위해 하단 석재의 상면을 깎아내어 빈틈이 없도록 쌓는 방식이다. 다시 말해 성벽 기초부에 큰 바위나 암반이 있을 때에는 바위를 깨뜨리지 않고 그대로 놔둔 채 성돌을 바위 모양대로 깎아 맞추는 방법이다. 그렇지만 그랭이기법으로 축조한다고 해서 꼭 바위나 암반 면을 다듬지 않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착암기초법과 그랭이기법은 함께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고구려 석축 성벽의 하단부는 들여쌓기가 일반적이지만, 위패산성의 경우처럼 필요한 경우 기단부에 보축 성벽을 쌓아 성벽의 하중을 견딜 수 있도록 하기도 한다.
이상과 같은 석축 성벽 기저부의 조성방식은 고구려의 계단식적석총, 지상 건물지 기단부와 대형 석축 저수시설 등에도 동일하게 적용되고 있어, 축성기법은 당시 건축 및 토목 기술의 발전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짐작해볼 수 있다.
체성벽은 성의 핵심시설로, 축성 시 가장 많은 공력을 들이는 부분이다. 성벽의 축조에서 특히 주목할 것은 성돌 형태, 치석방법, 성돌 간의 짜임새와 뒷채움 방식이다.
고구려 석축 성벽의 외면은 바깥쪽을 잘 다듬은 돌이 정연하게 쌓여있는 경우가 많은데, 정면에서 바라볼 때 ‘品’자형 또는 6합(六合) 구조가 일반적이다. 하나의 성돌에 위아래로 각각 2개, 좌우로 1개가 맞물리게 쌓아 1개의 성돌이 6개의 성돌과 한 단위로 서로 접하는 방식이다. 6합 구조로 성벽을 축조하면 치를 쌓는 경우에도 성벽과 치의 성돌이 서로 엇갈려 맞물리기 때문에 구조가 허술해지지 않는다(사진7). 다만 남한의 고구려 보루는 주변에서 구하기 쉬운 화강암을 치석하여 1~2겹으로 체성벽을 축조하기 때문에 이러한 쌓기방식은 적용되지 않는다.

사진7 | 장하 성산산성의 성벽 축조방식 - 1. 성벽의 6합 구조(ⓒ양시은, 2007년)

사진7 | 장하 성산산성의 성벽 축조방식 - 2. 쐐기꼴 돌을 이용한 겉쌓기(ⓒ양시은, 2007년)

사진7 | 장하 성산산성의 성벽 축조방식 - 3. 쐐기꼴 돌과 북꼴 돌의 결합(ⓒ양시은, 2007년)

사진7 | 장하 성산산성의 성벽 축조방식 - 4. 쐐기꼴 돌과 북꼴 돌의 결합(ⓒ양시은, 2007년)
겉쌓기에 쓰이는 성돌은 쐐기꼴 혹은 장방형의 평면형태로 치석하였는데, 특히 쐐기꼴 돌(楔形石)이 많이 사용된다. 성벽의 바깥쪽에서 보면 잘 다듬어진 장방형 형태이지만, 위쪽에서 보면 쐐기꼴 형태로 앞 부분에 비해 뒷부분의 뿌리쪽이 좁고 길쭉하다. 성벽 안쪽에 사용하는 성돌은 쐐기꼴 돌에 맞물릴 수 있도록 앞부분은 얇고 전체적으로는 길쭉한 모양으로 다듬는데, 마치 베를 짤 때 쓰는 북의 형태와 유사하여 북꼴 돌(棱形石) 혹은 마름모형 돌(菱形石)이라고 한다.
오녀산성의 경우 쐐기꼴 돌은 그 길이가 대략 50cm, 북꼴 돌은 70cm 전후이다. 북꼴 돌이 쐐기꼴 돌에 비해 상대적으로 긴데, 이는 북꼴 돌이 앞쪽이 무거운 쐐기꼴 돌을 안쪽에서 잘 지탱해줄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쐐기꼴 돌로 첫 번째 단을 쌓게 되면 장방형 머리 부분은 성벽의 겉면에 노출되어 있고 뾰족한 꼬리 부분은 안쪽을 향해 있어 두 쐐기꼴 돌 사이의 안쪽 공간은 삼각형의 빈틈이 생기게 된다. 이제 북꼴 돌을 그 사이에 끼워 넣음으로써 쐐기꼴 돌과 북꼴 돌을 맞물리게 한다. 그다음으로 두 개의 쐐기꼴 돌과 북꼴 돌이 맞물려 있는 곳의 위에 두 번째 단의 쐐기꼴 돌을 올려놓게 되면, 쐐기꼴 돌의 꼬리 부분은 첫 번째 단의 북꼴 돌을 눌러주게 된다. 이러한 방식으로 쌓기를 반복하면 성벽이 견고해지는 효과가 있다. 또, 쐐기꼴 돌과 북꼴 돌이 맞물리는 지점 인근의 빈 공간에는 할석이나 진흙 등을 채워 넣어 성돌이 서로 단단하게 고정될 수 있도록 하였다. 이처럼 쐐기꼴 돌과 북꼴 돌을 맞물려 축조한 성벽은 겉의 쐐기꼴 돌 일부가 빠지더라도 안쪽의 북꼴 돌이 그대로 남아(사진7-4) 성벽의 형태와 방어력이 유지되고, 후에 상대적으로 수월하게 성벽을 수리할 수 있다.
한편, 중국 학계는 지금까지 성돌의 가공과 치석의 정도를 축조집단이나 시간적인 속성으로 간주해 왔다. 리전푸(李殿福, 1998)는 쐐기꼴 돌로 정연하게 성벽을 쌓아올리는 방식(打壘法)을 고구려 산성의 성벽 축조에서 가장 먼저 등장하는 특징으로 보았다. 성벽에는 여장과 불규칙하게 배치된 방형의 돌구멍도 확인되고 있는데, 환인 오녀산성, 신빈 흑구산성, 집안의 환도산성(丸都山城)과 패왕조산성(覇王朝山城) 등을 대표 사례로 들었다. 이들 산성이 고구려 초기 도읍이었던 환인과 집안 일대에 분포한다는 점을 들어 쐐기꼴 성돌로 축조된 성벽을 이른 시기로 판단한 것이다.

도면3 | 집안 환도산성의 동벽(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 2004b, 도37)
그렇지만 돌을 가공하여 일정 높이 이상으로 성벽을 축조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수준의 석재 가공 및 토목건축 기술이 필요하다. 환인 지역의 당대 최상위 무덤으로 비정되는 망강루고분군(望江樓古墳群)의 4호분이나 6호분은 적석총 한 변의 길이가 13~15m임에도 불구하고 가공되지 않은 석재(강돌 등)로 쌓았다. 이를 통해 본다면 고구려 초기에는 인공 성벽을 쌓을 만큼 석재 다루는 기술이 축적되지 못하였을 가능성이 크다(강현숙, 2105).
그리고 쐐기꼴 돌과 북꼴 돌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석축 성벽은 등탑(灯塔) 백암성(白巖城)이나 평양성 등 고구려 중기와 후기 유적에서도 확인되고 있으므로, 성돌의 가공 및 축성 방식만으로 그 시기를 판단하는 방식은 문제가 있다. 리롱빈(李龍彬, 2008) 또한 이와 유사한 문제를 제기한 바 있다. 크고 길쭉한 장대석을 기초로 삼고 쐐기꼴 돌로 성벽을 쌓아올린 서풍(西豊) 성자산산성(城子山山城), 개원(開原) 마가채산성(馬家寨山城)이나 심양 석대자산성 등에서는 고구려 중기 및 후기 유물이 출토되고 있기 때문에 단순히 쐐기꼴 돌을 이용하여 성벽을 축조했다는 사실만으로 이른 시기로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이다.
2) 성문
성의 안과 밖을 통행할 수 있도록 한 출입시설인 성문은 적에게 첫 번째 공격대상이 되는 만큼, 성문과 그 주변은 방어를 강화하기 위한 다양한 축성기법이 적용된다.
(1) 성문의 구조
성문은 출입방식에 따라 평문(平門)과 현문(懸門)으로 구분할 수 있고, 그 외 유사시 은밀한 출입을 위하여 잘 보이지 않는 곳에 축조하는 암문(暗門)이 있다.
평문은 가장 일반적인 구조의 성문으로, 개구부 윗부분을 아치형으로 둥글게 만든 홍예식(虹霓式), 윗부분에 장대석이나 판석을 수평으로 걸친 평거식(平据式) 그리고 개구부에 별도의 상부구조 없이 바로 누마루를 올리는 개거식(開拒式)으로 세분된다(손영식, 2011).
홍예식 성문은 조선시대 성에서 주로 확인되며, 북한의 주장과는 달리 고구려의 것으로 명확히 밝혀진 사례는 없다. 평거식 성문은 양쪽 벽 위에 큰 판석을 올려놓아야 하기 때문에 성문의 너비가 좁은 것이 보통인데, 개주 연통산산성(煙筒山山城)에서 발견된 사례가 있다. 그리고 용강대묘를 비롯한 고구려 고분벽화에 그려진 성곽도에는 개거식 구조의 성문만이 묘사되어 있어(도면4), 고구려는 개거식 성문을 주로 사용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화재로 인해 전소된 석대자산성의 문지에서도 성문의 상부구조에 사용될 만한 대형 석재가 발견되지 않은 점 또한 이를 뒷받침한다.

사진8 | 고구려의 성문 구조 - 1. 개주 연통산산성의 평거식 성문(2009년)(ⓒ양시은)

사진8 | 고구려의 성문 구조 - 2. 통화 자안산성의 복원된 현문(2016년)(ⓒ양시은)

도면4 | 용강대총에 묘사된 성문과 문루(『북한의 문화재와 문화유적』 Ⅰ)
현문은 성벽 위에 문이 있어 사다리 등을 이용하여 출입할 수 있도록 한 일종의 다락문 구조로, 포천 반월산성, 양주 대모산성, 하남 이성산성, 이천 설성산성, 보은 삼년산성 및 단양 온달산성 등 6세기 중엽 이후에 축조된 신라 성에서 주로 발견된다. 고구려에는 봉황산산성, 위패산성, 자안산성 등에서만 현문 구조가 확인되었을 뿐이다.
성문은 기본적으로 문짝, 문짝을 지탱하는 기둥과 확돌(문비석), 그리고 이를 감싸고 있는 석축 구조물 등으로 구성되며, 성문 위에는 문루가 축조되기도 한다. 발굴조사에서 성문 구조가 비교적 잘 밝혀진 유적으로는 심양 석대자산성과 집안 환도산성이 있다.

도면5 | 환도산성 제2호 문지(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 2004b, 도14, 17)
환도산성의 제2호 문지는 문길 길이 8.4m, 안쪽 너비 5.4m, 바깥쪽 너비 5.2m로, 문길의 양쪽 벽과 바닥은 판석으로 마감하였다. 문길의 양 끝으로는 벽을 따라 1열의 석단을 만들었으며, 그 중간에 문비석을 두었다. 문비석(돌확)은 문 안쪽에서부터 대략 2.5m 떨어진 곳에 있는데, 한 변 길이 15cm인 방형 홈이 파인 문설주(문기둥)와 직경 15cm인 원형 홈이 파인 문장부(문지도리) 초석으로 구분되어 있다. 문지 주변에서는 귀면문과 연화문와당을 포함한 고구려 기와편이 다량으로 출토되어, 당시 성문에 기와를 올린 누각(문루)이 축조되어 있었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약수리고분이나 용강대총, 삼실총 등의 고구려 고분벽화에는 단층이나 2층 구조로 된 문루가 묘사되어 있다.
(2) 성문 보호시설
고구려에서 확인되는 성문 보호시설로는 옹성(甕城), 적대(敵臺), 해자(垓字) 등이 있다.
옹성은 성문 바깥쪽에 장방형이나 반원형의 성벽을 덧대어 쌓아, 성문이 직접 노출되지 않으면서 한정된 수의 적군만이 들어올 수 있게 하여 측면과 후면에서도 적을 공격할 수 있도록 만든 효과적인 방어시설이다.
고구려에서 옹성을 축조하기 시작한 시점은 분명하지 않지만, 오녀산성 서문에서 자연절벽을 이용한 초기 형태의 옹성 구조가 확인되고 있고, 환도산성의 제2호 문지에는 옹성이 부가되어 있는 것을 볼 때, 고구려 중기부터는 옹성이 본격적으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다만 연길 성자산산성(도문 마반촌산성)의 서문지, 봉황산산성의 북문지 및 백암성의 서문지 등에 대한 최근 발굴조사결과, 후대 개축 과정에서 옹성이 추가되었음이 밝혀진 만큼 옹성 구조에 대한 연구는 보다 신중한 접근이 필요해 보인다.
한편, 국내성 서문지와 대성산성의 소문봉 문지 등에는 옹성의 기능과 유사한 어긋문 구조가 발견되었다. 어긋문 역시 한정된 인원만이 어긋난 성벽을 우회 진입하여 좁은 통로에서 성문을 공격할 수밖에 없어 옹성과 비슷한 방어효과가 있었다. 그리고 국내성 북문지에는 적대가 확인되었는데, 적대는 성문 양쪽에 설치한 치(雉)로 성문을 공격하는 적군을 측면에서 공격할 수 있어 방어에 효과적이다.

도면6 | 고구려의 옹성 - 오녀산성 서문지(遼寧省文物考古硏究所, 2004, 도35)

도면6 | 고구려의 옹성 - 환도산성 제2호 문지(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 2004b, 도14)

도면7 | 국내성의 성문 보호시설(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 2004a, 도20, 16)
이 밖에도 남한의 아차산일대보루군에는 출입시설과 관련된 특이한 구조의 치가 발견되었다(양시은, 2013). 아차산4보루의 2중 구조 치, 용마산2보루의 3중 구조 치를 비롯하여 시루봉보루에서 발견된 체성벽과 일정한 간격을 두고 축조된 치 등으로, 이들 보루에서는 별도의 출입시설이 확인되지 않았다.
아차산4보루의 치는 평면형태가 방형이고 남벽에 부착된 원래의 치와 다시 2.5m가량 떨어져 구축된 방형 석축 구조물로 이루어져 있다. 치와 방형 석축 구조물 사이의 빈 공간에는 중앙에 1개의 기둥구멍 흔적, 내부공간으로의 접근을 차단하기 위해 추가로 설치한 보축 석단 4개가 확인되었다. 보루로 향하는 주 등산로에 위치하면서 내부로의 접근을 어렵게 한 폐쇄적인 구조물과 내부의 기둥 흔적으로 볼 때 사다리 등을 이용한 출입 구조물이 마련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사진9 | 아차산일대보루군의 출입시설 - 1. 아차산4보루(ⓒ국립문화재연구소, 2007년)

사진9 | 아차산일대보루군의 출입시설 - 2. 시루봉보루(ⓒ서울대학교박물관, 2009년)
시루봉보루의 서남쪽 치는 북쪽면은 추가로 돌을 덧대어 체성벽과 연결되어 있지만, 남쪽면은 별다른 시설 없이 체성벽과 치 구조물 사이로 드나들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체성벽과 마주보고 있는 치의 단벽에는 불 맞은 점토 벽체와 함께 그 주변에서 탄화된 각재의 흔적이 발견되는 것으로 볼 때, 보루 내 출입을 위한 시설이 갖추어져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3) 성벽 부속시설
(1) 치(雉)
치는 성벽에 방형으로 돌출시켜 쌓은 성벽 구조물로, 적을 관측하기 쉬운 곳이나 추가 방어가 필요한 곳에 설치한다. 치는 일자형 성벽과 달리 ■ 형태로 돌출되어 있어 성벽에 접근하는 적을 정면과 양쪽 측면에서 공격할 수 있어 방어에 효과적이다. 성문 방어를 위해 성문 옆 성벽에 축조한 것을 적대, 성 모서리에 축조한 것을 각루(角樓)로 별도 구분하기도 한다.
산성에서 치는 주로 주변을 관측하기 쉬운 곳이나 등산로처럼 적의 집중 공격이 예상되는 지점에 축조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국내성이나 백암성과 같이 평지 또는 평탄한 능선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여러 개의 치를 설치하여 방어력을 극대화하기도 한다.

사진10 | 백암성의 치(ⓒ전호태, 2007년)
치는 성의 규모나 위치한 지형에 따라 규모가 매우 다양하다. 국내성에서 확인되는 치는 평면형태가 옆으로 긴 장방형으로, 정면 너비 9~10m, 길이 5.5~6.5m인 것이 대부분이다. 석대자산성이나 아차산일대보루군의 일반적인 치는 방형 또는 장방형의 평면형태로, 너비는 5~ 9m이다.
석대자산성에서는 모두 10개의 치가 발견되었는데, 그중 6개는 기초부에 별도의 석단을 마련하였다. 석단을 갖춘 치는 평면형태 방형의 기초부에 모서리가 각진 것(方形方角式)이 5기, 방형에 모서리가 둥근 것(方形圓角式)이 1기이다. 석단이 있는 제1호 치의 기초부는 정면 너비 8.6m, 측면 길이 9m이고, 몸체는 너비 6.4m, 길이 7.4m이다. 제1호 치로부터 60m 떨어진 곳에 있는 제2호 치는 기초 석단이 확인되지 않으며, 너비 8.9m, 길이 6.2m이다(遼寧省文物考古硏究所, 2012b).
성벽의 전체 둘레가 200~300m가량인 아차산일대보루군에도 여러 개의 치가 설치되어 있다. 홑겹으로 된 체성벽에 비해 큰 돌로 기단부를 만들고 그 위에 치석된 석재들을 조금씩 들여쌓거나, 3~4겹의 성돌을 이용하여 담장식(양면쌓기)으로 쌓았기 때문에 비교적 견고하다. 내부는 돌로 채워진 것과 흙으로 채워진 것으로 구분된다. 치가 덧붙여진 성벽은 다른 구간에 비해 보존상태가 양호한 경우가 많은데, 이는 치가 성벽을 지지하는 보축의 역할도 함께 수행하였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한편, 서풍 성자산산성의 북벽 망대와 서북모서리 망대를 용도(甬道)주 001로 보기도 한다(白種伍, 2017). 이들 망대는 돌출부의 길이가 15.6~18.4m 정도로 길쭉한 형태인데, 2000년대 후반 조사 당시에는 치로 보고된 바 있다(周向永·許超, 2010).
(2) 여장과 돌구멍
여장(女墻)은 적의 공격으로부터 몸을 숨길 수 있도록 성벽 위에 쌓아올린 담장시설로 성가퀴라고도 한다. 성벽의 가장 상면에 축조되기 때문에 대부분 훼손되어 남아 있지 않거나 그 흔적만 확인할 수 있다.
고구려시기의 여장이 남아 있는 성으로는 환인 오녀산성과 고검지산성, 집안 환도산성, 장하 성산산성(城山山城), 대련(大連) 대흑산산성(大黑山山城) 등이 있다(1장 사진3-3, 2장 사진11). 여장의 너비는 0.8~1.2m로 일정한 편이며, 모두 평여장이다. 북한의 평양성, 황룡산성, 장수산성, 능한산성 등에서도 여장이 보고되었으나, 모두 후대까지 사용된 성이어서 고구려의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오녀산성, 고검지산성, 환도산성, 대흑산산성에는 여장 안쪽으로 평면형태 방형의 돌구멍(石洞)이 남아 있다(1장 사진3-3, 2장 사진11). 흑구산성, 봉황산산성, 후성산산성, 당포성 등에서는 여장은 발견되지 않았지만, 바깥 성벽으로부터 안쪽으로 약 1m 들어온 곳에 돌구멍이 확인된다. 돌구멍의 한 변 길이는 0.25~0.5m이다. 깊이는 다소 얕은 것도 있지만 0.5~1m인 것이 대부분이다. 돌구멍은 1.5~2m 정도의 일정한 간격으로 배치되어 있는 것이 보통인데, 구간에 따라 한두 개만 확인되는 경우도 있다.

사진11 | 대흑산산성의 여장과 돌구멍(ⓒ전성영, 2009년)

도면8 | 오녀산성 동벽의 여장과 돌구멍(遼寧省文物考古硏究所, 2004, 도22, 26)
오녀산성 동벽에는 매우 양호한 상태의 여장과 돌구멍이 발견되었다(도면8). 여장의 너비는 1m, 잔고는 0.2~0.4m이다. 여장 안쪽에는 2m가량의 일정한 간격을 두고 평면형태 방형의 돌구멍 11개가 확인되었다. 크기는 대략 0.3×0.2×0.5~0.8m이며, 돌구멍 입구를 판석으로 덮은 것도 있다.
봉황산산성의 북벽에서도 여장과 함께 연속적으로 분포하고 있는 30여 개의 돌구멍이 발견되었다. 돌구멍의 한 변 길이는 0.25m, 깊이는 0.5~1.2m이다. 돌구멍 바닥에서는 돌확(圓鼓形)과 편평한 형태의 초석이 발견되었다고 한다(李龍彬, 2007).
이러한 돌구멍의 용도에 대해서는 물을 빼는 배수구(關野貞, 1914), 성벽 바깥쪽으로 굴릴 통나무를 매달았던 나무기둥 구멍(撫順市博物館, 1985) 내지는 목책을 세워 성벽의 방어력을 강화하기 위한 기둥 구멍(채희국, 1985), 성을 방어하기 위한 노포(弩砲)를 세운 구조물(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 1975), 투석기나 쇠뇌 등의 장비를 일시적으로 고정시키는 시설(심광주, 2005), 방어용 그물망을 고정시키기 위한 기둥구멍(趙俊杰, 2008) 등 다양한 견해가 존재한다.
돌구멍은 석축 성벽 상단부에 열을 이루어 분포하고, 여장과 바로 인접해 설치된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접근이 쉽지 않은 급경사면에 축조된 성벽에서도 돌구멍이 확인되고 있는 점을 볼 때, 방어력 강화를 위한 시설물을 설치하기 위한 구조물보다는 성벽의 축조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3) 수직기둥홈
고구려 석축 성벽에는 1.5~2m 간격으로 한 변의 길이가 20~30cm 가량인 방형의 수직기둥홈주 002이 발견되기도 한다(사진12). 이들 수직기둥홈은 모두 겹성벽에서 확인되는 것이 특징이다.
대성산성의 수직기둥홈은 소문봉의 바깥쪽 성벽에서 안쪽으로 3.8m 들어온 중간 성벽에 있다. 기둥홈의 크기는 한 변이 30~40cm이며, 홈의 간격은 약 2m이다. 채희국(1964)은 지하수의 압력을 완화시키기 위한 장치로, 서길수(1999)는 경사가 급한 곳이나 무너지기 쉬운 곳의 축성공법으로 이해한 바 있다.
남한의 당포성과 호로고루에도 대성산성과 동일한 구조의 수직기둥홈이 발견되었다. 호로고루의 수직기둥홈은 바깥 성벽에서 안쪽으로 1.2m 들어온 지점에 있다. 기둥홈이 있는 내성벽은 대성산성과 마찬가지로 바깥쪽 성벽보다는 부정형의 성돌을 이용하여 축조하였다. 홈은 길이 30~34cm, 너비 22~24cm이며, 간격은 2.15m이다. 기둥홈은 성벽의 기초부까지 연결된다. 그리고 수직기둥홈의 바깥은 외벽으로, 외벽의 기초부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놓인 돌확이 발견되었다. 돌확은 외성벽과 보축 성벽의 사이로, 체성벽 하단부의 지대석 외면에 1.85m 간격으로 놓여 있었다. 직경 25cm, 깊이 7cm가량의 홈이 있으며, 인근의 당포성에서도 확인되었다. 호로고루의 돌확과 수직기둥홈은 모두 축성 과정에서 나무기둥을 세우기 위한 보조 구조물로 추정되며, 석축 성벽을 견고하게 유지해주는 역할도 담당하였던 것으로 보인다(양시은, 2013).

사진12 | 수직기둥홈 - 1. 호로고루(2012년)(ⓒ양시은)

사진12 | 수직기둥홈 - 2. 홍련봉1보루(2013년)(ⓒ양시은)
홍련봉1보루에도 겹성벽 안쪽에서 기둥홈이 확인되고 있는데, 간격은 약 1.5m이다. 바깥 성벽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기둥홈이 발견되고 있는데, 외성벽을 지지하던 기둥의 흔적으로 판단된다.
수직기둥홈이 확인된 고구려의 성은 모두 평양 천도 이후에 축조된 것이어서, 이러한 축성방식은 고구려 후기에 새롭게 등장하였음을 알 수 있다. 수직기둥홈은 춘천 삼악산성, 보은 호점산성, 단양 독락산성, 문경 노고성, 제천 와룡산성 등과 같은 남한 지역 고려 산성에서도 발견되고 있어, 고구려의 축성기법이 후대에 영향을 준 것으로 추정된다.
(4) 등성시설
고구려 산성에서는 성벽을 오르기 위한 등성시설(坡道)도 확인된다. 고검지산성에서는 북벽과 남벽에 각각 2개, 동벽에 1개 등 모두 5개의 등성시설이 발견되었다(遼寧省文物考古硏究所, 2012a). 보존상태가 양호한 제2호 등성시설은 북문에서 동쪽으로 약 16m 떨어져 있는데, 성벽 내벽의 돌과 서로 맞물려 있어, 성벽 축조 당시에 함께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등성시설의 전체 평면형태는 삼각형에 가까운데, 길이 9m, 너비 3m, 높이 3m이다. 경사로는 계단 형태로 되어 있는데,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지면에서부터 약 3.1m까지는 비교적 완만한 3단의 경사로이며, 이후에는 성벽 상단부까지 6단의 계단으로 되어 있다(도면9).

도면9 | 고검지산성 제2호 등성시설(遼寧省文物考古硏究所, 2012a, 도6, 7)
이 밖에도 흑구산성과 봉황산산성에서는 성의 내벽과 ‘T’자형으로 맞물려 있는 등성시설이 발견되었다. 흑구산성 등성시설의 규모는 길이 6.1m, 너비 1.6m, 잔고 0.5m이다. 봉황산산성은 계단식 구조이다.
(5) 성벽 배수시설
고구려 성에는 성 내부의 물이 바깥으로 빠져나갈 수 있도록 성벽이나 성문 아래쪽에 수구(水口)와 같은 배수시설이 잘 갖춰져 있다. 산성의 경우 큰 비가 내렸을 때 빗물이 성벽을 포함한 성 내외의 여러 시설물을 파괴할 수 있기 때문에, 사전 대비책의 일환으로 배수시설을 마련해놓고 있다. 배수시설은 성벽의 하단부에 위치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성 관련 시설 중 가장 먼저 축조된다.
국내성 서벽 하단부에서 발견된 배수로는 성 안쪽에서 성벽 바깥으로 8.8m 떨어진 곳까지 이어진다. 배수로의 잔존 길이는 약 16.25m, 너비 0.7~0.8m, 뚜껑돌을 포함한 배수로 높이는 1.9~2.1m이다. 판석재를 이용하여 바닥을 만들고 그 위에 2단의 돌로 벽을 만든 다음 큰 돌을 이용하여 뚜껑을 덮은 구조로 되어 있다. 배수로는 동쪽이 약간 높고 서쪽이 낮아 자연스럽게 배수가 될 수 있도록 하였다.
환도산성 남문지 주변에는 성벽 하단부에 4기의 배수시설이 있다. 제1호 배수로는 문지 동쪽 성벽의 기초부에 설치되어 있는데, 배수로의 외부 및 내부 입구에 모두 장대석을 3단으로 축조하였다. 배수로는 너비 0.8m, 높이 1.4m이며 전체 길이는 13m이다. 배수구의 단면은 방형이고 상면(뚜껑돌)은 장대석으로 덮었다. 환도산성의 정문이자 산성에서 가장 낮은 지점에 위치한 제2호 배수로는 문지 아래에 마련된 수구로, 현재는 훼손이 심해 확인이 어렵다. 제3호와 제4호 배수로는 제1호와 동일한 구조이다(도면10).

도면10 | 환도산성 남문지 일대 배수로(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 2004b, 도6, 8)
배수로는 아차산일대보루군과 같은 작은 규모의 성에도 설치되어 있다. 시루봉보루나 홍련봉2보루에는 성 내부의 집수정이 배수로와 연결되도록 하여 성벽 바깥으로 빗물이 자연스럽게 빠져나갈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산상식 포곡식 산성인 심양 석대자산성의 경우에는 내부 계곡부 시작부에 대형 집수시설을 갖추고 있다. 이 집수시설은 평면형태 원형의 석축 집수지주 003로, 성내의 물이 자연스럽게 계곡부에 자리한 집수지로 모일 수 있도록 하였다. 이처럼 보란점 위패산성이나 환도산성 등을 비롯한 중대형 포곡식 고구려 산성에는 계곡부에 대형 집수지가 마련되어 있는 경우가 많아 성내의 물길을 계획적으로 통제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밖에도 장하 성산산성이나 보란점 위패산성에는 계곡을 막아 쌓은 성벽에 누조(漏槽)와 같은 배수시설을 별도로 갖춰, 큰 비가 내릴 때 성벽 위로 물이 넘쳐흐르도록 하였다.
(6) 외황
외황(外隍)은 홍련봉2보루와 시루봉보루 등에서 확인된 일종의 도랑 형태의 방어시설이다(사진13). 평지성에서 확인되는 해자와 유사한데, 물이 차 있는 해자와는 달리 외황은 물이 고여 있지 않고 배수로를 통해 바깥으로 내보낸다는 데에서 차이가 있다.

사진13 | 홍련봉2보루와 시루봉보루의 외황 - 홍련봉 2보루(ⓒ한국고고환경연구소, 2013년)

사진13 | 홍련봉2보루와 시루봉보루의 외황 - 시루봉보루(ⓒ서울대학교박물관, 2010년)
홍련봉2보루의 외항은 성벽에서 2~3m가량 떨어져 보루를 감싸고 있는데, 폭은 1.5~2m, 깊이는 0.6~2.5m, 단면형태는 U자형 또는 V자형이다. 외황에는 배수시설이 별도로 설치되어 물이 고이지 않도록 하였으며, 일부 지반이 약한 구간은 석축으로 보강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보루에 축조된 외황은 성벽의 접근을 막는 것 외에도 성내의 빗물을 효과적으로 처리하는 역할도 담당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성의 상부에 마련되어 있는 집수정에서 배수된 물이 낙수받이용 석축유구를 통해 외황으로 들어가게끔 되어 있는 구조에서도 확인이 가능하다.
- 각주 001)
- 각주 002)
- 각주 0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