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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통사

3. 고구려의 관방체계

3. 고구려의 관방체계

고구려가 혼강과 압록강 중상류에서 발원하여, 중국의 고대 중원 왕조와 그 주변 국가의 끊임없는 견제에도 불구하고 서쪽으로는 요하(遼河)를 경계로 요동반도 전체, 북쪽으로는 송화강(松花江) 유역의 길림 일대, 동쪽으로는 두만강 유역, 남쪽으로는 금강 유역까지 그 영역을 확장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우수한 기술로 축조한 많은 성과 이를 기반으로 한 탄탄한 방어체계에서 찾을 수 있다.
고구려는 국가를 건국할 당시부터 성을 축조하였는데, 평지성을 쌓아 도시를 방어했던 고대 중국과 달리 산성을 기반으로 한 방어체계를 갖추었다. 고구려의 산성은 험준한 지세를 최대한 활용하였기 때문에 점령이 쉽지 않았으며, 왕도로 향하는 주요 교통로를 통제할 수 있는 지점에 축조하여 효율적인 방어체계를 구축할 수 있었다.주 004
각주 004)
최근에 고구려 방어체계의 운용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을 봉수에 대한 초보적인 연구가 이루어진 바 있다(이성제,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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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성은 영역의 확장과 도읍의 위치에 따라 분포양상에서 차이를 보인다.
『삼국사기』 지리지에는 고구려의 도읍을 졸본, 국내성, 평양성, 장안성으로,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졸본, 국내, 환도, 평양 동황성, 평양, 장안성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문헌기록과 현재까지의 고고학 연구결과를 직접적으로 연결하기가 쉽지 않아, 그동안에는 왕도의 위치를 기준으로 졸본·국내·평양 도읍기로 구분하여 고구려 성의 관방체계를 살펴본 예가 많았다.
우선, 진대위(陳大爲, 1995)는 요령성 내 고구려 산성을 광개토왕대를 기준으로 전기와 후기로 양분하여 검토하였다. 전기는 산세가 험한 곳에 조성된 비교적 작은 규모의 산성이 많지만, 후기가 되면 영역의 확장으로 요동 남부 전역에 산성이 축조되고, 그 규모 또한 확대된다고 하였다. 중국 동북지역의 고구려 산성만을 놓고 보면 광개토왕을 기준으로 시기를 구분해볼 수도 있겠으나, 평양 천도로 인해 왕도로 향하는 교통로가 바뀌면서 관방체계 역시 변화할 수밖에 없었을 것인데, 그의 분기 설정은 이와 같은 내용을 설명하기에 부족하다.
왕면후(王綿厚, 2002)는 중국 경내의 고구려 산성을 전기, 중기, 후기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전기는 흘승골성 축조부터 신성(國北新城)이 축조되는 3세기 말까지, 중기는 신성의 축조 이후부터 427년 평양 천도까지, 후기는 평양 천도 이후이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전기의 산성은 험한 산세와 자연절벽을 의지하여 축조하였고, 성벽은 대형 석재를 기초로 삼고 계단식으로 쌓아올리되 쐐기형 성돌이나 얇은 장방형 성돌을 끼워 넣는 방식(干揷石)을 이용하였다. 중기에는 고구려 영역이 북으로는 송화강 중상류, 서로는 요하, 동북으로는 두만강, 남으로는 한강까지 확장되었다. 이 시기에는 성돌의 가공이 좀 더 정밀해졌을 뿐만 아니라, 토석혼축과 판축기법이 새롭게 출현하였으며, 옹성의 형태가 완비되고, 치와 각루, 여장 등이 보편적으로 설치되었다. 후기에는 토축 성벽과 치의 설치가 크게 증가하였다. 그렇지만 그의 주장 중에 고구려 중기에 옹성의 형태가 완비되었다거나 한강 유역까지 영역이 확장되었다는 등의 내용은 잘못된 것이다.
정원철(鄭元喆, 2010)은 전체 고구려 산성의 분기를 4기로 구분하였다. 1기는 고구려 건립부터 3세기 말, 2기는 3세기 말부터 4세기 말, 3기는 4세기 말부터 6세기 중엽, 4기는 6세기 중엽부터 7세기 중엽이다. 그는 고구려 산성의 기본구조가 2세기 말에서 3세기 초에 환도성이 축조되면서 완성되었으며, 도성 주변의 산성은 3세기 이후에 본격적으로 등장한다고 파악하였다. 2기에는 기존의 나부체제(那部體制)가 해체되면서 중앙집권통치제도가 성립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신성이 축조된 것으로 판단하였다. 3기는 요동 지역 점령, 4기는 장안성 천도를 분기의 기준으로 삼았다. 3기에는 요동 지역으로의 영역 확장과 함께 대규모 산성이 축조되며, 군사 목적의 산정식 산성뿐만 아니라 지방 통치와 관련된 포곡식 산성이 증가하고, 옹성과 치, 장대와 같은 고구려 성의 주요시설이 완비되는 것으로 판단하였다. 4기에는 토축 성벽이 증가하고 천리장성이 축조됨으로써 고구려의 관방체계가 완성되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렇지만 고구려 산성의 분기는 장안성 천도보다는 평양 천도를 기준으로 하는 것이 성의 분포양상이나 방어체계를 검토하는 데 합리적이다.
한편, 정치사에 입각한 기존 연구에서는 고구려사를 대체로 3기로 구분한다(노태돈, 1999; 임기환, 2003). 초기는 국가형성기부터 3세기까지로 초기 정치체제의 성립기이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고구려의 국가 형성과 단위정치체로서의 5부체제가 성립되는 시기를 의미한다. 중기는 4~5세기로, 중앙집권적 정치체제가 확립되는 단계이다. 고구려에는 4세기 이후에 관등제가 정비되면서, 나부제가 소멸하고 중앙집권체제로의 정비가 이루어졌다. 특히 태왕호(太王號)의 사용은 왕권이 강화되고 중앙집권화가 이루어진 5세기대 고구려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후기는 6세기부터 고구려가 멸망하는 시기이다. 기존의 중앙집권체제가 붕괴되고 귀족연립체제, 즉 귀족을 중심으로 하는 정치가 운영된 시기이다. 그런데 이러한 정치사적인 분기 구분으로는 고구려 성의 변천양상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 다만 고구려가 성을 기본단위로 지방을 지배했음을 고려하면, 중앙집권화 이전과 이후라는 정치사적인 구분은 고구려 성의 분기 설정에도 어느 정도 참고가 될 만하다.주 005
각주 005)
고구려 성의 현황을 통해 고구려 지방지배방식에 대한 이해를 시도한 국내 연구로는 여호규(2002), 양시은(2013), 임기환(2015), 이경미(2017) 등의 연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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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의 내용과 그간의 고고 조사내용을 종합해보면, 고구려 성의 축조와 운영에 대한 분기는 크게 3기로 설정해볼 수 있다. 도읍의 위치와 활용기간을 고려하여 환인·집안도읍기와 평양도읍기로 나눈 다음, 고구려 정치사의 기존 연구성과에 따라 환인·집안도읍기를 중앙집권화 이전과 이후로 세분한 것이다(양시은, 2013).
Ⅰ기는 고구려가 건국하여 환인과 집안 일대에 성을 축조하고 활용하던 시기로, 중앙집권화가 이루어지기 전인 3세기 말까지이다. Ⅱ기는 4세기부터 평양 천도 이전까지로, 고구려가 요동과 평양 지역으로 진출을 시도하며 영역을 확장한 시기이다. 5세기 초반 광개토왕이 단기간에 요동과 길림 그리고 황해도 지역까지 영역을 급속도로 확장시켰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장수왕이 평양으로 수도를 옮겼기 때문에, 성의 방어체계는 평양 천도 이후에 완성된 것으로 판단된다. Ⅲ기는 평양으로 천도한 이후부터 멸망까지이다. 6세기 후반 장안성으로 천도하면서 도성제는 획기적으로 변화하지만, 왕도가 평양이라는 점에는 변함이 없어 독립적인 분기를 설정할 필요는 없다.
 
1) Ⅰ기(국가 성립~3세기)
Ⅰ기는 국가 성립에서 3세기까지로, 당시의 도읍은 환인과 집안 지역이다. 이 시기는 중앙집권화 이전의 5나부체제가 확립되는 시기이기도 하다.
고구려의 건국지인 졸본은 현재 환인 지역으로, 오녀산성을 비롯한 초기 유적이 다수 분포하고 있다. 졸본도읍기에는 오녀산성이 왕성으로 사용되었는데, 평지 거점은 환인댐 건설에 따른 수몰로 인해 아직까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상황이다.
고구려의 두 번째 도읍은 〈광개토왕릉비〉가 있는 집안 지역으로, 국내성과 환도산성(산성자산성)이 있다. 국내로의 천도 시점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존재하나, 왕이 졸본에 가서 시조사당(始祖廟)에 제사를 지냈다는 신대왕대의 기록으로 볼 때, 적어도 2세기 중엽에는 집안 지역이 도읍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환도성은 산상왕 2년(198년)에 축조 기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발굴조사에서 5세기대 이후의 유구와 유물만 발견되었다. 국내성은 성벽과 내부 건물지에 대한 발굴조사를 통해 고국원왕 12년(342년)의 축조 기사가 전하는 4세기에 축조되었음이 확인되었다.
지금까지 고구려는 평지성과 산성의 결합이라는 독특한 도성제를 구축한 것으로 알려져 왔으나, 현재까지 밝혀진 바에 따르면 국내성이 축조되는 4세기 중엽 이전까지 이러한 도성체제는 성립할 수 없다. 오히려 최근에는 전기 평양성시기에도 평지성 없이 대성산성만이 왕성으로 사용되었을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고구려는 건국 초기부터 한의 침공에 대비하여 산성 중심의 방어체계를 구축하였는데, 환인이나 집안 지역에도 왕도의 방어를 위한 산성이 우선시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환인과 집안 지역의 외곽에는 수도로 향하는 주요 길목을 통제할 수 있는 지점에 다수의 성이 분포하고 있다.주 006
각주 006)
이하의 교통로 분석은 기존 연구성과(임기환, 2012; 여호규, 2012; 王綿厚·李健才 저, 동아시아교통사연구회 역, 2020)를 바탕으로, 위성사진과 『中國文物地圖集』 등을 통해 주요 하천과 고구려 성의 위치를 확인하여 작성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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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건국 초기에는 환인에서 멀지 않은 곳에 영릉진고성과 적백송고성과 같은 한대 군현성이 있었다. 이들 성은 고구려 도읍지로 향하는 주요 길목에 자리하고 있으며, 수도와도 그리 멀지 않다. 일찍부터 한과 고구려가 경합을 벌였으며, 1세기 말에서 2세기 초에 현도군(玄菟郡) 치소가 무순(撫順) 지역으로 옮겨간 것으로 볼 때, 이들 지역은 2세기에 고구려의 영역으로 편입된 것으로 추정된다.
고구려 성은 환인 외곽에 부이강을 이용한 길목(경로1)에는 전수호산성과 흑구산성이, 태자하(太子河) 내지는 소자하(蘇子河)에서 육도하를 거쳐 환인으로 들어오는 길목(경로2)에는 고검지산성이, 혼강을 따라 환인 또는 집안으로 향하는 교통로(경로3)에는 건설산성(建設山城)과 패왕조산성이, 한대 서안평현(西安平縣)이 있는 단동에서 압록강을 거쳐 혼강을 거슬러 환인으로 들어오거나 또는 환인에서 압록강을 거쳐 집안으로 향하는 남쪽의 교통로(경로4)에는 소성자산성(小城子山城 또는 평정산산성), 성장립자산성(城墻砬子山城) 등이 있다(지도2).
지도2 | Ⅰ기의 주요 교통로와 관방체계(ⓒ양시은)
이들 성은 패왕조산성과 고검지산성을 제외주 007
각주 007)
고검지산성과 패왕조산성은 산 중턱 위에 축조된 산상형 포곡식 산성(산복식 산성)으로, 산정식 산성과 포곡식 산성의 중간 단계에 해당한다. 고검지산성에는 고구려 전기와 중기 토기가 모두 출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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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면 모두 산정식 석축산성이다. 산 정상부에 입지하고 있으며, 절벽이나 험준한 자연지형을 천연 성벽으로 활용하면서 필요한 일부 구간에만 석축 성벽을 쌓았다. 다만 처음부터 정연한 석축 성벽을 쌓지는 못했을 것이고, 자연지형을 최대한 활용하다가 돌을 다루는 기술이 어느 정도 수준에 오른 이후에야 본격적인 축성이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산성으로의 접근이 쉽지 않고 성 내부가 넓지 않다는 점을 고려하면, 군사방어적인 목적이 우선이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산성 주변으로 적석총이 분포하는 경우도 다수 확인된다.
고구려가 이른 시기부터 산정식 석축 산성을 이용하여 방어하였음은 문헌을 통해서도 확인이 가능하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신대왕 8년(172년) 한이 공격해왔을 때 명림답부(明臨荅夫)가 왕에게 “도랑을 깊이 파고 보루를 높이며 들을 비워서 대비하면, 그들은 반드시 한 달을 넘기지 못하고 굶주리고 궁핍해져서 돌아갈 것입니다”라고 조언하여 승리한 내용이 전한다. 고구려의 청야전술(淸野戰術)은 특히 산성에서 효율적인 전략으로, 산정식 석축 산성을 이용한 Ⅰ기 고구려 군의 방어체계와 전략을 잘 대변해주고 있다.
 
2) Ⅱ기(4세기~평양 천도 이전)
Ⅱ기는 4세기부터 평양 천도 이전 시기까지로, 고구려의 영역 확장기에 해당한다. 4세기는 고구려 정치사에서 나부체제가 해체되고 왕권이 강화되며 중앙집권화가 이루어지던 시기이다. 미천왕은 서안평(311년), 낙랑군(313년), 대방군(314년), 현도성(315년)을 차례로 점령하여 영역 확장의 기초를 마련하였고, 고국원왕은 고구려 서북방어선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신성(335년)을 축조하여 요동에서 혼강 유역까지 하천 교통로를 따라 연결되는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당시의 도읍은 집안 지역으로, 환도산성 외에도 342년에 축조 기록이 있는 국내성이 왕성으로 기능하였다. 통구분지의 외곽에는 노령산맥이 지나가고 있어, 외부에서 수도로 들어올 수 있는 길이 한정되어 있다. 고구려는 국내 도읍으로 진입이 가능한 주요 협곡에 관애를 축조하여 교통로를 차단했는데, 이처럼 관애가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는 곳은 집안 지역이 유일하다. “우리나라는 산이 험하고 길이 좁아, 한 명이 관(關)을 지키면 만 명이 당할 수 없다”는 『삼국사기』 신대왕 8년조(172년) 기사는 고구려가 주변의 자연지형을 최대한 이용하여 효율적으로 방어하는 전략을 십분 활용하였음을 보여준다. 관애를 축조하여 수도 외곽을 통제하는 방식은 졸본이나 평양 도읍과는 구별되는 국내 도읍만의 독특한 특징이다.
한편, 이 시기 국내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하천과 계곡을 따라 형성된 6개의 교통로를 이용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지도3). 경로1은 백두산에서 압록강을 따라 집안으로 들어오는 것으로, 수로를 이용한 교통로이다. 이 교통로에는 십사도구고성, 십이도만관애, 동마록포자고성, 협피구고성, 화피전자고성, 임강고성 및 장천고성 등 많은 평지성이 강안대지 위에 축조되어 있다. 경로2는 통화에서 대라권구하를 따라 집안으로 들어오는 길로, 이도구문관애와 석호관애가 위치한다. 경로3은 통화에서 혼강을 거쳐 청하를 따라 집안으로 내려오는 교통로인데, 이 길은 지금도 이용되고 있다. 관련 관방시설로는 자안산성과 대천초소, 관마장관애가 있다. 경로4는 통화에서 혼강을 따라 내려오다가 신개하를 따라 집안으로 들어오는 것으로, 패왕조산성과 망파령관애가 있다. 경로5는 환인 남쪽에서 집안으로 향하는 교통로로, 현재 환인-집안 간 도로가 개설되어 있다. 여기에는 북구관애, 성장립자산성, 와방구산성 등이 집안으로 향하는 길목을 통제하고 있다. 경로6은 단동에서 압록강을 거슬러 올라오는 길이다. 단동에서 육로 또는 수로를 이용하여 혼강과 압록강이 만나는 지점까지 이동한 후에 다시 육로를 이용하여 집안으로 진입하게 되는데, 경로5와도 연결된다. 혼강과 압록강의 합류 지점과 집안으로 향하는 육로를 차단할 수 있는 지점에 칠개정자관애와 노변장관애가 축조되어 있다.
사진14 | 통화 대라권구관애(석호관애) - 1. 위성사진(ⓒ구글 어스)
사진14 | 통화 대라권구관애(석호관애) - 2. 전경(ⓒ양시은, 2009년)
이상의 교통로 중에서 경로1을 제외한 5개의 교통로에는 관애가 설치되어 있다. 경로1은 다른 교통로와는 달리 수로를 이용하는 노선으로, 일찍부터 고구려에 복속된 동해안 일대의 물자 수송과 관련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둘레가 200m 내외의 소규모 성들이 압록강을 따라 분포하고 있어, 여호규(2008)는 이들 성의 성격을 동해로(東海路)와 연결되는 압록강 상류의 수로를 관리하는 역참(驛站)으로 추정하였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고구려는 4세기 초반 요동과 평양 지역까지 그 영역을 확장하였다. 이로 인해 주요 교통로에 산정식 석축 산성을 축조하여 방어하던 Ⅰ기와는 달리 추가적인 방어체계가 필요하게 되었다. 그 결과 요동평원에서 집안 지역으로 진입할 수 있는 소자하와 태자하를 따라 형성된 교통로에 새롭게 축조한 성을 활용한 1차 방어, 환인 외곽에 이미 축조되어 있던 산정식 산성을 이용한 2차 방어, 집안으로 진입이 가능한 협곡에 설치된 관애를 활용한 3차 방어, 도읍 내에서의 최종 방어로 이루어진 다중방어체계가 구축되었다.
지도3 | Ⅱ기의 주요 교통로와 관방체계(ⓒ양시은)
고구려는 광개토왕이 요동 지역을 완전히 장악하는 5세기 이전까지 모용선비가 세운 전연(前燕) 및 후연(後燕)과 끊임없이 다투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고국원왕 12년(342년) 11월에 모용황(慕容皝)이 고구려를 침입할 당시 “고구려에는 두 길이 있는데, 북도(北道)는 평탄하고 넓고(平闊), 남도(南道)는 험하고 좁다(險狹)”는 기록이, 『위서(魏書)』 고구려전에는 “남도의 목저(木底)에서 전연이 고구려를 대파하고 환도에 이르렀다”는 기록이 전한다. 이를 통해 4세기 중반 요동에서 집안으로 가기 위해서는 크게 두 경로가 있었음을 짐작해볼 수 있다.
이 밖에도 『삼국사기』에는 광개토왕 9년(399년)주 008
각주 008)
『자치통감(資治通鑑)』을 비롯한 중국 사서에는 400년으로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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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모용성(慕容盛)이 고구려를 침입하여 신성과 남소성(南蘇城)을 점령하고 돌아갔다고 하며, 『신당서(新唐書)』에는 647년 이적(李勣)의 군대가 영주도독(營州都督)의 군사를 거느리고 신성도(新城道)를 따라 남소와 목저로 진격했다는 기록과 668년 부여성을 공략한 설인귀(薛仁貴)가 다시 남소·목저·창암(蒼岩) 세 성을 점령하고 이적의 군대와 합류하여 압록강을 건너 평양으로 향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이상의 내용을 종합하면, 4세기 중반 이후 고구려에는 신성도, 즉 신성-남소-목저-창암-환도로 이어지는 교통로가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모용 세력이 요동에서 고구려의 수도인 집안으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당시 소자하 내지는 태자하의 교통로를 이용해야만 했다(지도4). 이와 관련하여 경로1은 혼하-소자하 유역의 교통로로, 심양에서 무순과 신빈을 거치는 길이다. 여기에는 고이산성과 철배산성, 오룡산성과 구노성(비아랍성) 등이 분포한다. 경로2는 태자하 유역의 교통로인데, 요양에서 본계(本溪)를 거치는 길이다. 이 경로에는 연주성, 변우산성, 유관산성, 하보산성, 태자성과 삼송산성 등이 분포한다. 소자하와 태자하 유역에 새롭게 축조된 산성은 환인 외곽에 있는 기존의 산정식 산성과는 달리 계곡을 끼고 성을 축조하여 접근이 용이하고 보다 많은 병사가 주둔할 수 있게끔 규모가 확대되었다. 이들 산성 중에는 기와가 출토되고 있어 행정관청의 존재를 상정해볼 수 있는데, 이는 4세기 이후 요동평원에서 혼강으로 연결되는 주요 하천변에 축조된 성이 방어적인 목적 외에도 행정치소의 기능을 겸비하였음을 짐작케 한다.
지도4 | 요동-집안 간 고구려 성의 분포(ⓒ양시은)
이 지역에 분포하는 성을 커널밀도추정법(Kernel Density Estimation)을 이용하여 검토해보면, 분포밀도가 높은 구간은 소자하 유역의 교통로를 따라 축조된 고이산성, 비아랍성, 오녀산성임을 알 수 있다. 소자하 유역은 강을 따라 비교적 낮은 산지와 평지가 펼쳐져 있고, 태자하 유역은 강을 따라 비교적 험준한 산이 위치하며 그 사이가 매우 좁다. 지리분석학적으로 볼 때, 남도는 태자하 유역, 북도는 소자하 유역일 가능성이 높다. 다만, 그 경로가 소자하-부이강-신개하-집안인지, 아니면 소자하-육도하-신개하-집안인지에 대해서는 추가 검토가 필요한데, 현재로서는 전자일 가능성이 높다(홍밝음・강동석, 2020).
소자하 유역의 교통로는 고이산성을 기점으로 심양 또는 무순에서 신빈으로 이어지며, 태자하 유역의 교통로는 요양에서 본계를 거치는 경로로, 요동성에서 시작된다. 다만, 요동성은 5세기 이후에 활용된 것으로 추정되므로, 4세기에는 태자성이 중심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Ⅱ기에 중국에 대한 방어체계에서 핵심적인 기능을 담당한 성은 고구려의 최전선에 축조된 신성, 즉 고이산성이었다.
고이산성은 무순시의 북쪽에 있는데, 동성을 중심으로 서성, 남위성, 북위성 및 동남쪽의 세 개의 작은 성(小城)으로 구성되며, 전체 둘레는 4km에 달한다. 요동평원과 동부 산간지대의 접경지대에 위치하고 있어 혼하와 소자하 일대에서 가장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이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서 “신성은 고구려 서쪽 변방의 요해지로 먼저 점령하지 않고서는 나머지 성들도 쉽게 빼앗을 수 없다”라는 이적의 언급은 고이산성의 중요성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둘레가 2.8km인 동성은 토성으로, 토루는 토축 또는 토석혼축으로 이루어져 있다. 성문은 남문지, 북문지, 동문지가 있는데, 남문이 정문이며 U자형의 옹성 구조이다. 동성의 성벽 안쪽 사면에는 주거용 온돌 건물지가 마련된 계단상의 대지가 조성되어 있다. 산성에서는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철기로는 투구, 갑옷 파편, 화살촉, 창, 칼 등과 같은 무기 및 방어구류, 도끼·삽·낫·보습 등과 같은 철제농공구류, 차축두와 등자 등의 마구류가 있다. 토기는 주로 고구려 중기와 후기로 편년되는, 니질태토의 호, 옹, 동이, 시루, 완, 뚜껑, 원통형사족기 등 생활 용기가 대부분이다. 기종 구성 및 기형과 제작기법상에서 남한의 아차산 일대 고구려 보루군에서 출토된 6세기대 토기와 유사한 특징을 보인다.
Ⅱ기의 산성은Ⅰ기와는 달리 주요 하천변을 따라 평지 부근에 위치한 경우가 많고, 요충지의 성에서는 고구려 기와가 출토되기도 한다. 고구려는 과거에 비해 넓어진 영토를 효과적으로 다스리기 위해, 주요 교통로에 축조한 군사요충지인 성을 활용하여 지방통치를 강화한 것으로 보인다. 치소로 활용된 성은 주로 포곡식 산성이나 강안평지성으로, 고이산성(혼하 유역), 오룡산성과 한대 토성이었던 영릉남성지(이상 소자하 유역), 태자성(태자하 유역) 등인데, 이곳에서는 모두 기와가 출토되었다. 이 밖에도 압록강 하구에 위치한 서안평의 치소였던 애하첨고성과 북쪽 길림 지역에서 집안으로 들어오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통화 자안산성에서 고구려 기와가 출토되었다. 이상의 성은 서로 일정한 거리를 두고 각 지역의 중심지에 자리하고 있어, Ⅱ기에는 고구려가 중앙집권화된 군사 및 지방 지배체제를 갖추었음을 시사한다.
표1 | 고구려 남도와 북도에 관한 여러 견해(홍밝음·강동석, 2020, 표3 수정)
연구자남도북도남소성목저성창암성
王綿厚·李建才(동아시아교통사연구회 역, 2020)무순(혼하)-소자하-신빈현 목기성(목저성)-신빈현 왕청문-부이강-전수호산성-흑구산성-패왕조산성(환인)-망파령관애(신개하)-천구문-소판차령-환도산성(집안)무순(혼하)-소자하-신빈현 목기성(목저성)-신빈현 왕청문-남태고성-태평구문고성-영액포산성-적백송고성-위사하-대청하-대천초소-관마장관애-서청구하-환도산성(집안)
佟達(1993)혼하-소자하-부이강-혼강-신개하-(집안)혼하-영액하-유하-휘발하-혼강-위사하-(집안)오룡산성목기진 동남
손영종(1998)무순(혼하)-소자하-영릉-육도하-환인-신개하-집안무순(혼하)-청원-유하-통화시-집안철배산성(목기)구로성
여호규(1995)혼하-소자하-신개하-집안혼하-일통하·삼통하-용강산맥-혼강상류-위사하(청하)-노령산맥-집안철배산성목기진 일대두도립자산성, 구로성
공석구(2007)영릉진-소자하-환인-혼강-신개하-판차령-환도산성(집안)영릉진-소자하-신빈-왕청문-통화-환도산성(집안)철배산성구로성
임기환(1998)태자하고이산성-혼하-소자하-부이강/환인-(집안)철배산성구로성
기경량(2017)요양-태자하-목저성-육도하-환인-신개하-집안무순(혼하)-소자하-영릉진-육도하-환인-신개하-집안철배산성고검지산성오룡산성
정원철(2011)태자하-(집안)혼하-소자하-부이강-신개하-집안 고검지산성
田中俊明(1999)태자하-육도하-(집안)혼하-소자하-부이강-(집안)구로성고검지산성오룡산성
도면11 | 고이산성 평면도(三上次男·田村晃一, 1993, 도2)
사진15 | 고이산성 전경(ⓒ전성영, 2010년)
반면, 고구려의 도읍이었던 환인 지역의 성에서는 기와가 출토된 사례가 없다. 초기 왕성이었던 오녀산성에서도 기와 건물지가 발견되지 않았는데, 이는 국내 천도 이후 오녀산성이 치소성이 아니라 군사방어 목적으로만 이용되었음을 의미한다(양시은, 2020).
이상에서 살펴본바, 고구려 중기에 새롭게 축조된 치소성은 입지나 규모, 축성재료 등 여러 측면에서 이전 시기의 산성과 구별된다. 우선 규모가 크고, 산 정상부 대신 평지에서의 접근이 용이한 지점에 입지한다. 물론 이 시기에도 필요에 따라 군사방어를 주목적으로 하는 산정식 산성은 지속적으로 축조되었을 것이다. 치소성으로 활용된 포곡식 산성의 내부에는 행정기능을 갖춘 관청이 세워졌고, 일부 산성에는 주거 건물이 들어설 수 있도록 안쪽 사면을 깎아 계단상대지를 조성한 곳도 발견되었다. 그리고 Ⅰ기의 산성이 모두 석성이었던 것에 비해, 중기에 는 고이산성과 같은 토성도 새롭게 등장하였다.
Ⅱ기에는 대중국 방어를 위한 서북지역 방어체계 외에도 백제를 대상으로 한 남쪽 방어체계도 운용되었을 것이다. 4세기 중엽 백제는 황해도 일원까지 진출하였고, 더군다나 371년에는 평양성을 공략하여 고국원왕이 전사하는 일까지 발생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평양을 비롯한 북한 지역은 평양 천도 이전 시기의 고구려 자료를 찾아보기 쉽지 않을뿐더러, 북한 내 고구려 성 대다수가 고려 및 조선 시대에 개축된 것이 많아 더 이상의 논의는 불가능한 상황이다.
고구려의 동북지역이었던 연변 일대에도 다수의 고구려 성이 분포하고 있으나, 발굴조사된 유적이 거의 없어 자세한 내용을 파악하기 쉽지 않다. 지금까지 확인된 연변 지역의 10개 성 중 8개가 평지성으로, 다른 지역과 달리 평지성이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크다(이성제, 2009). 규모를 정확히 알 수 없는 동흥고성을 제외하면, 가장 작은 규모인 태암고성의 둘레는 0.3km, 석두하자고성과 하룡고성은 1km가량이고, 나머지 평지성은 모두 1.6km 이상이다. 연변 지역은 고구려의 동북단에 위치하나, 일찍부터 책성(柵城)이 설치될 정도로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연변 지역의 고구려 성은 요동 지역처럼 다중방어체계를 갖추고 있지 않지만, 대부분의 성이 평야의 중심에서 외곽으로 빠져나가는 길목이나 외부에서 중심지역으로 들어올 수 있는 길목의 초입부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문헌기록과 성내에 행정관청으로 활용된 기와 건물지가 존재하고 있는 평지성이 다수 분포하고 있다는 점에서 연변 지역의 고구려 성들은 조세 확보를 위한 기능을 수행하였을 가능성이 크다(양시은, 2012b).
이 밖에도 5세기 초에 고구려로 편입된 북쪽의 길림이나 요원 일대는 요동 지역과 달리 각 요충지에 중심성과 위성으로 이루어진 방어체계를 갖추었다. 길림 지역은 용담산성이, 요원 지역은 용수산성이 중심이 되었는데, 모두 토성으로 성내에는 연화문와당을 비롯한 기와가 출토되었다. 그리고 집안에서 통화를 거쳐 휘발하와 송화강으로 연결되는 북쪽 교통로에도 산성이 구축되어 있으나 중국 세력에 대한 다중의 방어선을 구축한 요동 지역의 방어체계와는 확연한 차이가 있다. 이는 북방 지역의 여러 정치체가 고구려 중기 이후부터는 위협이 될 만큼 큰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3) Ⅲ기(평양도읍기)
Ⅲ기는 집안에서 평양으로 천도한 이후부터 멸망까지이다. 광개토왕의 활발한 정복활동으로 고구려의 영토는 5세기에 비약적으로 확장되었다. 광대한 영역을 확보한 고구려는 427년에 평양으로 천도하였고, 도읍의 이동에 따라 교통로가 변화하면서 새로운 방어체계와 지방지배체제가 필요하게 되었다. 『삼국사기』에는 평원왕 28년(586년)에 다시 장안성으로 도읍을 옮긴 사실이 기록되어 있으나, 같은 평양 지역 내의 천도였기에 도성 외곽의 관방체계는 그대로 유지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당시의 방어체계는 크게 대중국 방어체계와 대백제·신라 방어체계로 구분된다. 대중국 방어체계에서 1차 방어는 요하를 경계로 한 국경방어선이었다. 요하 일대에 대한 방어체계는 광개토왕이 요동 지역을 완전히 장악한 5세기 초반부터 구축되었다. 요동반도의 남단인 금주(錦州)부터 개주, 요양, 심양, 철령을 거쳐 요원까지 산성을 쌓음으로써 요하와 요동반도의 서쪽 해안가를 따라 국경 방어선, 즉 서부전선을 구축한 것이다.
특히 요하의 평원지대가 천산산맥(千山山脈)과 만나는 중심 거점에 요동성과 같은 대형의 평지성이나 최진보산성, 고이산성, 영성자산성, 고려성산성 등 중형급 이상의 포곡식 산성을 축조하고, 그 주변에는 다시 중소형의 산성을 추가 배치하여 이들 성이 비상시에 유기적으로 운영되도록 하였다. 이들 요하 유역 방어선의 핵심은 요양의 요동성(遼東城)이었다. 수나 당의 군대가 요하를 건넌 뒤 이 성을 점령하기 위해 가장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는 점은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한다.
물론 이 시기에도 군사방어적인 목적의 산정식 산성과 중형의 산상형 포곡식 산성(산복식 산성)도 지속적으로 축조되었다. 심양 석대자산성은 요동 지역의 대표적인 산상형 포곡식 산성이다. 성의 둘레는 약 1.36km이고, 성벽에는 대략 60m의 간격으로 9개의 치가 설치되었다. 성 내부에 기와 건물지가 확인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지방지배보다는 군사방어를 담당한 것으로 보인다. 군사 목적의 중형 산성은 입지에서 차이를 보일 뿐만 아니라 기와가 출토되지 않는다는 점에서도 치소성으로 활용된 하곡평지형 중대형 포곡식 산성과 분명하게 구별된다.
한편, 7세기 중반인 영류왕 때 동북의 부여성부터 서남쪽 바다에 이르기까지 천 리에 걸쳐 축조하였다는 장성 또한 요하 방어와 관련된 것이다. 당시 서북 변경지역을 가로지르는 천리장성의 축조는 최전방 영토 방어를 위해 매우 중요한 일이었을 것이다. 요하를 경계로 한 고구려 서북전선의 1차 방어선은 천리장성의 축조로 완성되었다.
천리장성의 실체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존재한다. 천리장성이 실재한 것으로 보기도 하지만(李健才, 2000; 馮永謙, 2002), 장성을 변경에 설치된 하나의 독립적인 방어시설물이 아닌 길림성 농안(農安)에서 요령성 개주의 발해만에 이르는 고구려 서부 변경의 주요 성을 연결한 보조시설물로 파악하거나(王健群, 1987), 천리장성의 실체를 인정하지 않고 기존의 고구려 산성을 연결하는 일종의 개념적인 방어선으로 이해하기도 한다(陳大爲, 1989; 梁振晶, 1994; 申瀅植, 1997). 또한 길림성 덕혜(德惠)에서 요령성 영구(営口)의 해안가까지 이어진 토축 장성과 관련하여 노변강토장성(老邊崗土長城)을 고구려의 천리장성과 연관짓기도 한다(여호규, 2000; 張福有 외, 2010). 그렇지만 노변강토장성은 현재 훼손이 심해 일부 구간을 제외한 대부분의 구간에서 그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다. 1971년 조사 당시 보존상태가 비교적 양호한 구간의 경우, 토축 성벽의 규모는 기단부 너비 6m, 잔고 1m 내외였다고 한다(王健群, 1987). 이와 관련하여 여전히 성격이 불문명한 이들 유구를 장성으로 추정하고 그 잔존 현상을 토대로 천리장성의 형태를 논하는 것은 무리이며, 고구려의 서부 방어선이 요서 동부에서 요하 유역으로 후퇴하는 과정에서 16년이라는 장기간에 추진되었다는 점에서 천리장성은 고구려 서쪽 변경 전 구간에서 방어시설의 수축을 의미하는 것으로 봐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이성제, 2014).
이상과 같이 고구려는 5세기 이후 요하와 요동반도의 서쪽 해안가를 따라 1차 국경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그리고 압록강을 건너 평양도성으로 향하는 요동의 모든 교통로에 성을 축조함으로써 2차 방어선을 마련하였다. 국내도읍기에 구축한 기존 방어체계는 요동에서 집안으로 향하는 교통로를 중심으로 이루어져 새롭게 수도가 된 평양을 효과적으로 지킬 수 없었기 때문에, 요하부터 압록강을 거쳐 평양으로 향하는 육상 교통로와 산동반도에서 평양으로 향하는 해상교통로를 통제할 수 있는 곳에 다수의 성을 축조함으로써 수도로 향하는 요동의 방어체계를 대대적으로 개편하였다. 강폭이 넓은 요하 하류로는 수와 당의 군대가 건널 수 없었기에, 고구려는 요하 중류부터 압록강 하구까지 이어지는 주요 하천교통로를 중심으로 산성을 축조하였다.
경로1은 요하에서 압록강으로 이어지는 주요 교통로이다. 요하를 건너온 적군을 막는 1차 방어선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요하를 따라 축조된 요동성, 백암성, 석대자산성, 고이산성, 탑산산성 등이 담당하였다. 그런데 요동평원에서 압록강을 건너기 위해서는 반드시 봉성을 거쳐야만 하는데, 이 교통로에는 이가보산성과 봉황산산성, 그리고 호산산성이 있다. 경로2는 요하를 건넌 후 압록강으로 향하는 대신 소자하 또는 태자하를 따라 만들어진 기존의 교통로를 통해 진격하다가 집안 쪽에서 다시 우회하여 압록강으로 합류하는 노선이다. 이 경로의 방어에는 요동성이나 고이산성을 시작으로 국내도읍기에 축조된 산성이 활용되었다. 경로3은 요하를 건너 남쪽으로 이동한 후 수암(岫岩)을 거쳐 압록강에 도달하는 것으로, 영성자산성과 낭랑산성이 있다. 이 교통로에는 단동의 서북쪽 산악지대에 집중 분포하고 있는 소규모의 보루들 역시 일정 기능을 담당하였다. 경로4는 요하 하구의 개주 고려성산성(청석령산성)에서 바로 수암을 거쳐 단동으로 진입하거나 장하로 남하하여 단동으로 진입하는 것이다. 상당히 우회하는 경로라서 비효율적이지만, 이 교통로에도 다수의 성이 분포한다. 경로5는 산동반도에서 평양으로 향하는 해로인데, 고구려는 요동반도 끝에 비사성(대흑산산성)을 축조하여 해상교통로를 통제하였다. 『삼국사기』에는 수나 당의 군대가 항상 비사성을 점령한 후에 이동하였음이 기록되어 있다.
도면12 | 석대자산성 평면도(遼寧省文物考古硏究所, 2012b, 도3)
지도5 | 천리장성 개념도(ⓒ양시은)
요동 지역에서 압록강으로 향하는 각 교통로의 군사적 요충지에는 중대형 포곡식 산성을 축조하고, 그 주변에는 중소형의 산정식 산성이나 보루를 배치하였다. 압록강으로 향하는 2차 방어선에서 가장 중요한 곳은 욕살이 파견된 오골성(烏骨城)으로, 지금의 봉성 봉황산산성이다(사진1). 봉황산산성은 둘레가 16km에 달하는 대형 성곽으로, 내부에는 행정관청으로 사용된 기와 건물지가 들어서 있었다.
요동 지역의 고구려 성이 유기적으로 운영되었다는 점은 668년 당이 부여성(扶餘城)을 공략하자 인근의 40여 성이 항복했다는 기록이나, 645년 요동성(遼東城)을 구원하기 위해 신성과 국내성에서 보병과 기병 4만 명을 보냈다는 기록, 648년 박작성(泊灼城)을 구원하기 위해 오골(烏骨)과 안지(安地) 등 여러 성의 군사 3만 명이 모였다는 『삼국사기』의 기록 등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고구려의 박작성으로 비정되는 관전(寬甸)의 호산산성(虎山山城)은 애하(靉河)와 압록강이 합류하는 지점의 돌출된 독립 구릉 위에 입지한다. 중국이 주장하고 있는 소위 ‘명대 만리장성 동단 기점’ 하부에 있어 훼손이 심한 관계로 분명하지는 않지만 전체 둘레는 1.2km에 달한다. 압록강 하구지역임에도 불구하고, 강물이 분산되어 수심이 다른 지역보다 얕고 하중도가 있어 압록강을 쉽게 건널 수 있는 곳인 만큼 전략적으로 중요한 곳이다.
지도6 | 평양도읍기 서북 방면의 교통로와 고구려 성 분포(ⓒ양시은)
사진16 | 요동 지역의 주요 고구려 산성 - 1. 장하 성산산성(ⓒ임기환, 2007년)
사진16 | 요동 지역의 주요 고구려 산성 - 2. 장하 후성산산성(ⓒ임기환, 2007년)
사진16 | 요동 지역의 주요 고구려 산성 - 3. 백암성(ⓒ동북아역사재단, 2006년)
사진16 | 요동 지역의 주요 고구려 산성 - 4. 대흑산산성(ⓒ전성영, 2009년)
이상과 같이 요하를 경계로 한 국경 방어와 압록강을 건너 평양으로 향할 수 있는 요동의 모든 교통로에 성을 축조한 고구려의 방어체계는 수·당과의 전투에서 매우 효과적이었다. 산성은 적군이 쉽게 함락시키기 어려웠고, 이를 지나쳐 가더라도 후미의 보급이 차단될 우려가 있어, 결국 성을 점령하지 않으면 사실상 진군이 불가능했다. 고구려의 산성은 지형적인 특성상 방어가 쉬웠는데, 특히 요동 지역에 있는 대형 산성은 계곡을 끼고 있어 수원 확보가 용이하므로 오랫동안 항전할 수 있어 대군을 맞아 적은 병력으로도 효과적인 운용이 가능했다. 고구려는 산성의 장점을 정확히 인식하고 수·당과의 전쟁에서 이러한 이점을 최대한 이용하였다.
한편, 요동 지역을 통과한 수·당 군대가 평양으로 진격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압록강을 건너야 했다. 그런데 압록강 하구는 강폭이 넓어 배를 이용하지 않으면 건널 수 없었고 다른 지역은 『구당서』에 따르면 군대가 이동하기에 험한 지형이었다. 결과적으로 압록강은 요하에 이어 또 다른 자연적인 방어벽 구실을 했다.
이제 압록강을 넘은 수·당의 군대가 평양으로 가기 위해서는 서해안을 따라 남하하거나 내륙교통로를 이용해야 했는데, 고구려는 두 경로에 모두 중대형 포곡식 석축 산성을 축조하였다.주 009
각주 009)
서북한 지역의 고구려 산성에 대해서는 徐日範(1999),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2009), 동북아역사재단(2017) 등을 참고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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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안 교통로는 의주-룡천-선천-정주-안주-숙천-평양으로 이어지며, 주요 지역마다 백마산성-걸망성-룡골산성-통주성-릉한산성-안주성-청룡산성이 자리하여 길목을 차단하고 있다. 이들 성에도 고구려 기와가 출토되고 있어, 치소성의 기능을 겸한 것으로 보인다. 평안북도의 교통로는 고려와 조선시대에도 외적의 침입경로였기 때문에, 이 지역의 고구려 산성은 고려 이후에도 많은 개축이 이루어지면서 지속적으로 이용되었다.
사진17 | 호산산성과 그 주변(ⓒ구글 어스)
한편, 평안북도 지역에는 집안 지역에서 압록강을 건너 강계를 거쳐 남하하는 내륙교통로도 있다. 이 경로는 강계-전천-회천-영변-개천-순천-평성-평양으로 이어지며, 평야지대가 시작되는 영변 지역에 롱오리산성과 철옹성이 있다. 그 남쪽으로, 다시 평양으로 내려가는 교통로에는 안주성, 청룡산성, 흘골산성이 분포하고 있다.
서북한 지역의 이들 성은 서해안이나 내륙교통로 모두 안주성을 거쳐 다시 평양 외곽의 청룡산성으로 연결된다는 특징이 있다. 그리고 접근이 어려운 내륙보다 많은 병력이 이동할 수 있는 서해안 교통로에 방어력이 집중되어 있는 것도 특징인데, 특히 압록강 남안에 집중 배치되어 있는 백마산성, 걸망성, 룡골산성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고구려의 3차 방어선은 평양도성 외곽에 네 방향으로 분포하고 있는 중대형 산성이 담당하였다. 평양 북쪽에는 압록강을 건너 해안가 또는 내륙을 통해 내려오는 적군을 막을 수 있도록 청룡산성이, 북동쪽에는 북쪽에서 내륙으로 남진하거나 동해안쪽에서 평양으로 접근하는 것을 차단할 수 있도록 흘골산성이, 서쪽에는 황해로부터 대동강을 거슬러 평양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을 수 있도록 황룡산성주 010
각주 010)
이와 관련하여 황룡산성 주변에 분포하는 우산성, 동진성(관애), 늑명산성, 보산성이 황해에서 대동강을 따라 고구려 평양성으로 진격할 수 있는 연안교통로를 방어할 수 있도록 긴밀히 연결되어 있음을 지적한 연구도 있다(이성제,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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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구월산성이, 그리고 남쪽에는 한반도 중부에서 개성을 거쳐 재령평야를 넘어 올라오는 적군을 막을 있도록 황주성이 배치되었다.
평양 지역의 성들은 고구려의 최종 방어선으로, 대동강의 넓은 평야지대에 위치하고 있어 상대적으로 사방에서 적의 공격을 받기가 쉽다. 이에 고구려는 평양과 평양 외곽에 여러 성을 축조함으로써 최종 방어체계를 갖추었다.
평양 내에서는 처음에는 대성산성이 도성의 최종 방어를 담당하였을 것이며, 후기에는 현재의 평양성(장안성)이 최종 방어를 담당한 것으로 보인다. 평양은 대동강 수로를 통해서도 접근이 가능하므로, 이 시기에는 평양성의 외성을 이용한 방어전략도 새롭게 추가되었다. 612년 수의 내호아(來護兒)가 이끄는 수군이 바다를 건너 대동강 하구로 들어와 평양을 단독으로 공격하다가 크게 패한 기사는 이를 뒷받침한다.
사진18 | 평안북도 지역의 주요 고구려 산성 - 1. 철옹성(ⓒ동북아역사재단)
사진18 | 평안북도 지역의 주요 고구려 산성 - 2. 릉한산성(ⓒ동북아역사재단)
한편, Ⅲ기의 대백제·신라 방어체계는 시기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황해도 지역의 중대형 포곡식 산성과 남한 지역의 고구려 성으로 구분해볼 수 있다.
황해도 일대에는 예성강이나 해안가를 따라 평양으로 북진할 수 있는 길목에 고구려 산성이 분포하고 있는데, 소규모인 남한의 성과 달리 대부분 중대형 포곡식 산성이다.
개성에서 평양까지 예성강을 따라 난 교통로에는 치악산성, 태백산성, 휴류산성, 황주성이 분포한다. 치악산성은 예성강으로 인해 수로와 육로교통이 모두 편리한 배천에 있는데, 예성강 하류를 방어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해주에서 평양으로 통하는 길목은 수양산성, 장수산성이 차단하고 있다.
지도7 | 평양 이남 지역의 고구려 성 분포(ⓒ양시은)
북한 학계는 장수산성을 국내성과 함께 고구려의 별도(別都)로 알려진 남평양(南平壤)으로 비정하고 있다(최승택, 1994). 장수산성은 전체 둘레가 10.5km인 포곡식 산성으로, 내성(4.7km)과 외성(7.95km)으로 이루어져 있다. 산성에는 성문과 장대지, 그리고 내부 건물지에서 연화문와당을 비롯한 고구려 기와가 출토되었다. 그리고 남문지 부근에는 제철유구도 발견되었다. 인근의 아양리 평지성과 함께 도시유적을 방어하는 산성으로, 황해도 일대에서 중심적인 기능을 하였다. 성 인근에는 고구려시기의 석실봉토분 1,000여 기가 분포한다. 장수산성은 고려와 조선시대까지 지속적으로 사용된 관계로 성벽의 기초 부분을 제외한 나머지는 대부분은 개축되었다.
이 밖에도 황해도 일대의 해안가에는 남쪽부터 수양산성, 옹진고성, 자매산성(오누이성), 구월산성 등의 산성이 확인된다. 특히 구월산성은 황해에서 대동강을 따라 평양으로 향하는 적군을 1차로 막을 수 있는 지점에 축조되어, 대동강 북안의 황룡산성과 함께 평양 외곽 방어를 중점적으로 담당하였다.
이상과 같이 황해도 주요 거점 성들은 평양의 남쪽 방어를 담당하였으므로, 둘레가 2km 이상인 중대형이 대부분이며, 평지와 연결된 포곡식 산성이 많다.주 011
각주 011)
황해도 일대의 고구려 산성에 대해서는 徐日範(1999),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2009), 신광철(2011), 동북아역사재단(2015) 등을 참고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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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성에서 고구려 기와가 수습되고 있어 각 성에는 해당 지역을 관할하는 관청이 설치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 산성은 4세기대에 백제와의 대치 과정에서 축조되기 시작하였을 것이기에, 427년 고구려가 평양으로 천도할 당시에는 이미 기본적인 방어체계는 갖추어져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장수산성 일대를 중심으로 한 황해도 일대는 고구려 남부전선 확장의 중요한 배후거점으로 활용되었을 가능성이 크다(신광철, 2011).
사진19 | 황해도 지역의 주요 고구려 산성 - 1. 장수산성(ⓒ동북아역사재단)
사진19 | 황해도 지역의 주요 고구려 산성 - 2. 구월산성(ⓒ동북아역사재단)
사진19 | 황해도 지역의 주요 고구려 산성 - 3. 태백산성(ⓒ동북아역사재단)
사진19 | 황해도 지역의 주요 고구려 산성 - 4. 수양산성(ⓒ동북아역사재단)
이 밖에도 남한 내 고구려 성의 분포는 임진강·한탄강 유역, 양주 일대, 한강 유역, 금강 유역의 4개 분포 영역으로 구분된다. 남한 내 고구려 성은 중국, 북한처럼 중대형 성곽이 아니라 소규모 산성과 보루가 중심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실제 임진강 유역의 3개 강안평지성과 금강 유역의 남성골산성을 제외하면 성벽의 둘레가 200~300m인 보루가 대부분이다.주 012
각주 012)
남한 지역의 고구려 성에 대해서는 7장에서 다루므로, 여기에서는 생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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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4)
    최근에 고구려 방어체계의 운용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을 봉수에 대한 초보적인 연구가 이루어진 바 있다(이성제, 2016). 바로가기
  • 각주 005)
    고구려 성의 현황을 통해 고구려 지방지배방식에 대한 이해를 시도한 국내 연구로는 여호규(2002), 양시은(2013), 임기환(2015), 이경미(2017) 등의 연구가 있다. 바로가기
  • 각주 006)
    이하의 교통로 분석은 기존 연구성과(임기환, 2012; 여호규, 2012; 王綿厚·李健才 저, 동아시아교통사연구회 역, 2020)를 바탕으로, 위성사진과 『中國文物地圖集』 등을 통해 주요 하천과 고구려 성의 위치를 확인하여 작성한 것이다. 바로가기
  • 각주 007)
    고검지산성과 패왕조산성은 산 중턱 위에 축조된 산상형 포곡식 산성(산복식 산성)으로, 산정식 산성과 포곡식 산성의 중간 단계에 해당한다. 고검지산성에는 고구려 전기와 중기 토기가 모두 출토되었다. 바로가기
  • 각주 008)
    『자치통감(資治通鑑)』을 비롯한 중국 사서에는 400년으로 기록되어 있다. 바로가기
  • 각주 009)
    서북한 지역의 고구려 산성에 대해서는 徐日範(1999),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2009), 동북아역사재단(2017) 등을 참고하기 바란다. 바로가기
  • 각주 010)
    이와 관련하여 황룡산성 주변에 분포하는 우산성, 동진성(관애), 늑명산성, 보산성이 황해에서 대동강을 따라 고구려 평양성으로 진격할 수 있는 연안교통로를 방어할 수 있도록 긴밀히 연결되어 있음을 지적한 연구도 있다(이성제, 2011). 바로가기
  • 각주 011)
    황해도 일대의 고구려 산성에 대해서는 徐日範(1999),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2009), 신광철(2011), 동북아역사재단(2015) 등을 참고하기 바란다. 바로가기
  • 각주 012)
    남한 지역의 고구려 성에 대해서는 7장에서 다루므로, 여기에서는 생략한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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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고구려의 관방체계 자료번호 : gt.d_0008_0020_00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