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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통사

2. 적석총의 기원과 변천 과정

2. 적석총의 기원과 변천 과정

1) 기원
〈광개토왕릉비〉와 함께 태왕릉, 장군총 등의 거대한 계단적석총이 알려지면서 일제강점기에서는 적석총을 거석문화의 하나로 인식하였다. 당시 생각하는 거석문화는 유럽의 스톤헨지나 이집트의 피라미드로, 높고 큰 적석총도 거석문화의 하나로 이해하였다. 따라서 장군총과 같은 거대한 적석총을 동방의 금자탑으로 불렀지만, 정작 중국이나 유라시아 등 북방의 여러 지역에서는 적석총과 같은 묘제가 확인되지 않았다. 따라서 당시의 전파론적 시각에서 적석총의 기원을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없었다.
적석총의 기원에 관한 구체적인 견해는 북한과 중국이 합동으로 실시한 중국 동북지방의 고고학 조사가 계기가 되었다. 당시 요동반도 남단의 강상과 누상 두 곳에서 비파형동검이 부장된 청동기시대의 적석묘가 조사되었다. 두 적석묘는 구조와 장법에서 고구려 적석총과 공통점이 있어서 적석총의 기원으로 주목하였다.
현재까지도 적석총의 기원에 대한 가장 우세한 견해는 중국 요동반도 남단의 청동기시대 적석묘에서 적석총이 기원하였다는 단선론이다. 요동반도 남단의 여순-대련 지구는 신석기시대 말에 적석묘가 출현하기 시작하여 청동기시대에 지속적으로 적석묘가 시간적 선후관계를 갖고 축조된 곳으로, 선사시대 적석묘가 집중되어 있다는 점에서 요동의 여타 지역과 구별된다. 구조적으로도 요동반도 남단의 청동기시대 적석묘는 여러 기의 무덤으로 이루어진 집단무덤이며, 주검은 지상에 놓이고 돌을 덮어 매장을 마감한 무덤이라는 점에서 고구려 적석총과 유사하다. 특히 매장한 후 무덤에서 행해진 화장이 요동반도의 청동기시대 적석묘와 고구려 초기 적석총에서 관찰되어서 장법에서의 특징도 공유한다. 이런 이유로 요동반도 남단에 위치한 청동기시대 적석묘의 연장선에서 고구려 적석총을 이해하고 있으며, 요동반도 남단의 적석묘를 고조선의 묘제로 보고 있는 북한에서는 고구려가 고조선의 묘제를 계승한 것으로 해석한다(정찬영, 1967).
그러나 중국 요동반도 남단의 청동기시대 적석묘에서 고구려 적석총이 기원하였다는 입장은 몇 가지 해결해야 할 문제를 갖고 있다. 중국 요동반도의 청동기시대 무덤은 적석묘와 석붕(북방식 지석묘), 그리고 석개묘(개석식 지석묘)가 있는데, 서북한의 지석묘는 요동반도의 석붕과 같은 무덤 형식이다. 중국 요동반도의 적석묘는 석붕이나 석개묘와 달리 제한된 범위에서만 확인된다. 따라서 분포지역을 달리하는 석붕과 석개묘를 포함하여 요동 지역 청동기시대의 여러 무덤 형식 사이의 관계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아울러 요동반도 남단의 적석묘와 압록강 중하류 유역의 고구려 적석총 사이 지역에서 청동기시대 적석묘에 후속하는 고구려 이전의 적석묘가 발견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청동기시대 적석묘와 고구려 적석총 사이의 300~400년 이상의 시간 공백이 설명되지 않는다.
이후 환인과 혼강 유역의 조사성과에 따라서 고구려 적석총을 혼강 유역과 압록강 중하류 유역을 나누어 각각의 기원을 설명한(李新全, 2009) 다선론도 등장하였다. 즉, 압록강 중하류 유역에서 현재 가장 이른 시기로 비정되는 장백 간구자고분군의 적석총이 요동반도의 청동기시대 적석묘에서 연원하였고, 이 적석총이 고구려의 압록강 중하류 유역 적석총과 연결된다는 것이다. 한편, 혼강 유역의 환인 일대 고구려 적석총은 석개석광적석묘와 연결된다고 보았다. 석개석광적석묘는 요동반도 남단의 청동기시대 적석묘의 영향을 받은 석개묘가 석개석광적석묘로 발전하였고, 석개석광적석묘에서 덮개돌이 사라지면서 환인 일대의 무기단석광적석묘가 출현하였다고 보고, 그 예로 환인 망강루고분군의 적석총을 들었다. 환인 일대의 경우 시간적인 공백이 조금 줄어들기는 했지만, 여전히 공간적으로는 납득할 만한 설명을 되지 못한다. 간구자는 압록강 상류 유역에 자리하고 있는 반면, 압록강 중하류 유역에서는 아직 간구자와 같은 적석총이 확인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편, 다선론은 아니지만 환인 지역의 풍가보자유적 석개적석묘와 고구려 초기 적석총을 연결지으려는 견해도 있다(오강원, 2012). 결국 혼강 유역의 고구려 초기 무기단석광적석총은 청동기시대 적석묘와 석개묘가 결합하여 석개석광적석묘가 되고 석개석광적석묘는 무기단석광적석묘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 외에 예계와 맥계의 무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고구려 적석총으로 발전하였다는 견해도 있다. 이는 통화 만발발자유적의 대석개묘, 석개적석묘, 토광석곽묘, 석관묘에서 관찰된 화장에 근거한 것이다(王綿厚, 2005). 춘추전국시대 다인합장의 토갱묘와 토갱석곽묘, 토갱석곽석관묘는 서단산문화의 영향을 받은 예계 문화이며, 전국시대 말에서 전한 초를 거치면서 출현한 화장을 한 대개석묘, 대개석적석묘와 적석묘는 맥계의 무덤으로 보아서, 고구려 적석총은 맥계 묘제와 예계의 요소가 결합하면서 자체 발전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대개석적석묘는 대개석묘와 고구려 적석총의 과도기 묘제로 설명하였다.
이러한 단선론이나 다선론 또는 예계와 맥계의 결합설 등 고구려 적석총의 기원을 보는 여러 해석은 결국 그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청동기시대 요동 지역의 무덤과 요동반도 남단의 적석묘로 연결된다. 그럼에도 청동기시대 요동반도를 포함한 요동 지역의 청동기시대 무덤들과의 관계가 구체적으로 설명되지 않고 있다. 따라서 현재까지 논의된 고구려 적석총의 기원에 대한 여러 입장(그림9)은 아직 가설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고구려 초기 영역인 환인, 신빈 일대의 풍가보자(馮家保子), 대전자(大甸子) 외에 무순 등지에서도 적석석개묘가 조사되고 있어서, 요동반도 남단과 고구려 사이의 공백을 해결해줄 수 있는지 신중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도 적석총의 기원은 고구려 족속과 결부된 문제이므로, 객관적이고 구체적인 논증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림9 | 적석총의 기원과 관련된 여러 무덤(ⓒ강현숙)
그림9 | 적석총의 기원과 관련된 여러 무덤(ⓒ강현숙): 요동반도 남단 여순 - 대련 지구의 적석묘
그림9 | 적석총의 기원과 관련된 여러 무덤(ⓒ강현숙): 고구려 적석총
 
2) 변천 과정
적석총이 언제, 어느 곳에서 출현하여 어떠한 과정을 거쳐 고구려의 중심 묘제로 자리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하지만 장백, 환인, 집안과 초산, 만포 등지의 무기단적석총을 볼 때 적석총은 기원전 2세기를 경과하면서 혼강과 압록강 본류의 중하류 유역과 그 지류 유역을 중심으로 축조되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적석총은 고구려의 성장과 발전, 새로운 장법의 수용 등 사회 변화와 함께 돌을 다루고 쌓는 기술의 발전에 따라서 높고 크게 축조되었다. 4~5세기대의 높고 큰 계단식적석총을 정점으로 평양 천도 이후에는 잘 쌓은 높고 큰 계단식적석총이 차츰 줄어든다. 그러다 6세기 이후가 되면 높고 큰 계단식적석총은 더 이상 축조되지 않고 압록강 중하류 유역 일부 지역에서 봉토분과 함께 등장하는데, 이때의 적석총은 무기단의 소형분으로 고구려 멸망 이후까지 지속적으로 축조된다. 따라서 적석총은 700여 년을 넘는 고구려의 역사와 함께하였다고 할 수 있다.
고구려의 긴 역사 속에서 적석총은 높고 크게 축조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어 갔다. 분구는 무기단식에서 기단식으로 축조되면서 방형 평면으로 분구 형태에서의 정형성을 갖추었고, 다시 계단식이 축조되면서 높고 큰 거대한 분구 축조가 가능하게 되었다. 따라서 분구는 계단식, 기단식, 무기단식 순으로 위계 분화를 보여준다. 한편, 대형분은 계장식에서 계단식으로 변화해서 계단식적석총이 가장 발달된 형태이자 가장 상위의 무덤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적석총의 분구 형태는 사회 내 분화 정도를 드러내어 보여준다. 매장부 구조는 1인이 안치되어 매장이 마감되는 수혈식 장법에서 시차를 두고 2인 이상이 추가로 안치되는 횡혈식 장법으로 변화함에 따라 목관(곽)에서 목실, 목개석실, 석실 등으로 변화하였다(그림10). 돌을 다듬고 쌓은 기술의 발전과 수혈식에서 횡혈식으로의 매장방식 변화를 기준으로 볼 때 적석총은 대략 세 단계의 변천 과정을 거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림10 | 고구려 적석총의 변천 과정(강현숙 외, 2020)
Ⅰ단계는 적석총이 출현하여 고구려 적석총이 성립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단계는 혼강과 압록강 중하류와 그 지류 유역에서 적석총이 축조되기 시작하는 기원전 2세기경부터 3세기까지의 긴 기간이다. 목관이나 목곽에 주검 1인이 안치되며, 분구는 무기단과 기단 그리고 대형분의 경우 계장식으로 축조되었다. 이때의 무덤을 중국에서는 석광적석총으로 부르거나 적석묘로 부른다. 이 단계는 무기단적석총만 축조되었던 시기와 기단적석총이 축조되면서 무기단과 기단적석총이 병존하는 두 시기로 나눌 수 있고, 계장식은 Ⅰ단계 전 기간에 걸쳐 축조되었다.
Ⅰ단계는 다시 크게 두 단계로 나눌 수 있다. 전반은 가공하지 않은 돌로 쌓은 무기단적석총이 중심이 되는데, 기원을 전후한 시기가 되면 서부터는 무덤을 높고 크게 쌓기 위해서 울타리 쌓듯이 계장식으로 축조한 계장식적석총이 축조되면서 무기단적석총과 병존한다. 계장식무기단적석총을 대표하는 것은 환인 망강루 4호분과 6호분이다. 여기에서 출토된 금제귀걸이와 이전(耳琠) 등 부장품으로 볼 때 기원을 즈음 하여 무기단적석총은 피장자의 사회적 지위에 따라서 무기단과 계장식으로 분화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Ⅰ단계의 후반은 기단적석총이 출현한 시기로 생각하지만, 현재 보고된 자료로 기단적석총의 출현 시기를 확정하기는 어렵다. 다만, 중국에서는 기단적석총이 늦어도 후한 초인 1세기경에는 출현한 것으로 보고 있다(魏存成, 1994). 이 기간 중에 방형 평면으로 정형성을 가진 기단적석총이 축조되면서 무기단, 계장식, 기단 적석총이 병존하며, 최상위 무덤은 계장식으로 축조한 무기단적석총이다. 중국의 보고서(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集安市博物館, 2004)에 의하면, 집안 통구분지의 마선구2378호분, 마선구626호분, 칠성산871호분 등은 2세기경부터 3세기까지의 고구려 왕릉급 초대형분으로 보고 있다.
Ⅱ단계는 적석총이 크게 유행하였던 중심시기는 4~5세기대로, 이 시기의 특징은 계단식 분구와 횡혈식 장법의 매장부이다. 돌을 다듬고 쌓는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서 가공한 석재를 이용하여 높고 큰 규모의 계단식 축조가 가능하게 되었고, 횡혈식 장법의 수용에 따라서 매장부는 추가 합장이 가능하도록 목곽은 규모가 커진 목실로 바뀌며, 목실은 목개석실을 거쳐 석실로 변화한다. 따라서 이 시기는 최상위 무덤의 구조 변화에 따라서 두 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전반은 3세기 말부터 4세기 전반까지의 기간이다. 적석총은 기술의 발전에 따라서 부분 가공한 석재를 이용하여 높고 크게 분구를 쌓게 되었다. 따라서 분구는 계장식에서 방형 평면의 계단상으로 정형화된 모습이 완성되었다. 적석총의 매장부는 횡혈식 장법의 수용 정도에 따라서 목실, 목개석실이 병존하며, 최상위 무덤은 계단목실적석총이다. 계단목실적석총으로는 임강총, 우산하2110호분과 서대총, 우산하992호분 등이 대표적이며, 이 무덤들은 국내성시기의 왕릉급 무덤으로 비정된다. 임강총은 3세기 말, 서대총은 4세기 초이며, 우산하992호분은 4세기 전반으로 비정된다.
Ⅱ단계의 후반은 4세기 후반에서 5세기대에 걸친 시기이다. 횡혈식 매장부에 봉토 분구, 묘실 벽화 등 새로운 요소가 더해지면서 여러 형태의 무덤이 병존하며, 중앙과 지방의 무덤 형식도 차이를 보이기도 한다. 4세기 중엽 국내도성의 계단적석총 중에는 목개석실도 있고, 우산하3319호분처럼 전석혼축실의 계단적석총도 있다. 석실의 구조와 매장방식도 다양해서 칠성산1096호분은 하나의 분구에 세 기의 매장부가 있는 동분이혈의 계단석실적석총이며, 우산하3319호분, 절천장총, 위원 사장리1호분은 현실 중앙과 외부를 연결시켜 주는 통로(연도) 양쪽 벽에 작은 측실이 대칭되도록 있어서 마친 현실 앞으로 방이 하나 더 있는 것처럼 보이는 유사두칸구조이다. 유사두칸구조의 우산하3319호분과 절천장총에서는 묘실 벽화도 검출되었다. 매장부는 천추총과 태왕릉은 목곽, 석곽, 석실의 3중 구조이며, 장군총은 석실 내에 목관이 놓이는 관, 실의 2중 구조이다. 한편, 평안북도 운산 용호동에서도 대형 계단식적석총이 자리하며(강현숙, 2020), 평양 대성산성 부근에서도 평양 천도 이전에 기단식이나 계단식 적석총이 축조되었다. 따라서 Ⅱ단계의 후반은 다양한 형식의 적석총이 넓은 지역에서 축조된 최성기라고 할 수 있다.
Ⅲ단계는 6세기 이후로 적석총의 쇠퇴기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국내 도성시기 최상위 신분의 무덤 형식이었던 계단석실적석총이 더 이상 축조되지 않는다. 평양도성 일대에서도 6세기대의 적석총은 확인되지 않으며 압록강 중하류 유역의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는 적석총이 더 이상 축조되지 않는다. 오직 압록강 중하류 유역을 중심으로 한 일부 지역에서만 적석총이 축조된다. 이 일대는 고구려의 출발지라고 할 수 있는 곳으로, 많은 수는 아니지만 무기단석실적석총이 동실묘, 봉석묘, 토석혼봉묘의 형태로 고구려 멸망 이후까지도 축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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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적석총의 기원과 변천 과정 자료번호 : gt.d_0008_0030_0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