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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통사

4. 통구분지의 초대형 적석총

4. 통구분지의 초대형 적석총

1) 초대형 적석총과 왕릉 비정안
『삼국사기』에 의하면 국내도성은 유리왕이 졸본에서 국내로 천도한 3년부터 장수왕이 평양으로 천도한 427년까지 고구려의 왕도였다. 유리왕이 천도한 국내가 어느 곳인지에 대해서는 연구자마다 견해를 달리하지만, 3세기대에 집안 일대가 국내도성이었다는 점에는 별 이견이 없다. 중국에서는 유리왕이 천도한 국내가 현재의 집안 일대이고, 도성 주변에 왕릉이 있을 것이라는 전제에서 통구분지의 초대형 적석총 13기를 국내성시기의 고구려 왕릉으로, 대형 적석총과 봉토석실벽화분을 귀족묘로 비정하였다.
중국에서 본 왕릉의 조건은, 높고 개활한 곳에 단독 자리하며, 같은 시기 무덤 중 가장 큰 규모와 매장시설의 완비, 그리고 분구 위의 상당한 범위에서 기와나 와당의 출토였다. 이 외에도 무덤 주위의 배장무덤과 제대시설, 능원의 담장과 능침과 같은 건물터, 왕족 지위에 상당하는 부장품 등을 왕릉 판단의 조건으로 들었다(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 外, 2004).
이러한 조건에 부합되는 적석총으로 마선구2378호분, 산성하전창36호분, 마선구626호분, 칠성산871호분, 임강총, 우산하2110호분, 칠성산211호분, 서대총, 우산하992호분, 마선구2100호분, 천추총, 태왕릉, 장군총 등 13기를 들었고(표2), 이 중 산성하전창36호분을 제외한 12기 적석총이 국내성시기 고구려 왕릉으로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표2 | 통구분지 내의 왕릉급 초대형 적석총
고분명분구매장부부대시설비고
규모*형식계단 수묘상시설형식규모*(석실)
우산하992호분38.5, 36.1, 6.5계단7층(가공석재)판와, 통와, 와당석광17, 9, -2.3동·서 양측 제대(배장묘?)특대형 계단 적석석광묘
2110호분66.5, 45, 5.5(장방형)계단13~14층판와, 통와석광(2개) 제대, 묘역특대형 유단적석석광묘
임강총76, 71, 10계단21~23층 또는 30~34층판와, 통와, 척와석광17, 10, -2제대특대형 계단적석석광묘(미가공 석재)
태왕릉66, 62, 14계단11층(추정)기와, 와당석실, 3단평행고임천장, 가형석곽, 목관석실 3.24, 6, 3,
묘도 길이 5.4,
너비 1.8
버팀석, 배수시설, 제대, 배총, 능원특대형 계단적석석실묘
장군총32.6, 31.7, 13계단7층기와, 와당석실, 평행고임천장, 관대5.4, 5.4, 5.1제대, 배총, 능원특대형 계단석실묘
산성하전창36호분37, 28, 4.5계장?판와, 통와, 용석석광 전원후방형(보단)계단적석석광묘(파괴됨)
칠성산871호분48, 40(48), 9.2계장 기와석광 묘역시설, 배장묘(제대?), 건물지특대형 계단적석석광묘
211호분66, 58, 7계단3층판와, 통와석광 배장묘(제대?)특대형 적석석광묘
마선구2378호분46, 30, 4계장?판와, 통와, 용석석광(3개 추정)전원후방형(보단)화장 흔적, 특대형 계단적석석광묘
626호분48, 41, 6계장6층 20줄판와, 통와, 용석석광 전방후원형, 제대, 산수시설, 배장묘특대형 계단적석석광묘
2100호분33, 29.6, 6계단4층(가공석)기와, 와당석광 능원, 산수특대형 계단적석석광묘
서대총62.5, 53.5, 11계단14층통와, 판와, 와당석실(미가공 석재) 제대, 배수, 능원특대형 계단적석석광묘(가공 석재)
천추총71, 60, 11계단잔존 5층, 원래 10층 추정(가공석)판와, 통와, 와당석실석실, 석곽(파괴, 추정)배수시설, 능원, 8각 초석특대형 계단적석석광묘
* 규모는 길이, 너비, 높이임.
마선구 2378호분은 작은 구릉의 정상부에 자리하는 계장식으로 축조된 무기단적석총이다. 주검이 안치된 무덤은 방형 평면이며, 여기에 반원형의 부석시설이 덧대어져서 전체 평면형태는 전원후방형이다. 덧대어진 부석시설은 무덤을 보호하는 시설로서 중국에서는 보단으로 부른다. 적석 분구와 무덤 주변에서 다량의 암·수키와가 출토되었다. 주변 무덤에서 출토된 토기로 미루어 보고서에서는 1세기경의 무덤으로 비정하였다. 무덤 주변에 있는 3기의 무덤 가운데 동쪽으로 규모가 작은 마선구2379호분과 마선구2380호분을 배장무덤으로 보았다. 그리고 북쪽으로 50cm 정도 사이를 두고 인접한 마선구2381호분과는 일정한 관계를 가진 것으로 보고 있다. 무덤의 주인공에 대해서는 차대왕(張福有, 2007)으로 보거나 봉상왕(桃崎祐輔, 2009)으로 보기도 하지만, 무덤의 연대를 확정할 만한 증거가 충분하지 않아 주인공 비정의 근거 또한 확실하지 않다.
마선구626호분은 구릉 사면에 단독으로 자리한 계장식으로 축조된 무기단적석총이다. 무덤은 전원후방형으로, 방형 평면의 아래쪽으로 반원형의 부석시설이 있다. 적석 분구와 무덤 아래에서 암・수키와가 다량으로 출토되어서 무덤 상부에 건축물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며, 매장부는 구조를 알 수 없지만 광실로 비정하였다. 무덤의 주변시설로는 석대와 돌을 깐 시설, 배장무덤 등이 보고되었다. 석대는 무덤 동쪽으로 20m 떨어져서 위치하며, 석대에서 철체차할과 토기 구연부편이 출토되었고, 중국에서는 이를 제대로 비정하였다. 돌을 깐 시설은 무덤의 동쪽, 무덤과 석대 사이에서 확인된다. 돌은 길이 30~40cm 크기로 묘역을 표시하거나 또는 물방울이 튀는 것을 방지하는 산수석으로 보기도 한다. 무덤의 서측으로 북쪽에 치우쳐 있는 원형 적석총 한 기를 배장무덤으로 비정하지만 확실하지 않다. 무덤의 연대는 보고서에서 1~2세기로 비정하였고, 대무신왕의 무덤으로 비정하였고(張福有, 2007), 장지명과 재위 기간을 고려하여 산상왕릉(임기환 2009; 桃崎祐輔, 2009)으로 비정하기도 하지만, 연대를 확정할 만한 무덤 자료는 확실하지 않다.
칠성산871호분은 칠성산 남쪽 구릉 사면에 단독으로 자리한 계장식 무기단적석총이다. 무덤의 서북쪽으로 판석을 깔아서 묘역석으로 보고 있으며, 무덤의 북쪽으로 11m 떨어진 곳에 배장무덤 또는 석대로 추정되는 시설이 남아 있다. 한편, 무덤의 서북쪽으로 22m 떨어진 곳에서 암・수키와와 불에 녹은 돌 여러 점과 맞배지붕 형태의 토기편과 동물머리모양의 모서리 장식 등이 출토되어서 능사 또는 능원의 문지로 추정하지만, 보고가 자세하지 않아서 칠성산871호분과의 관계는 판단하기 어렵다. 적석 분구와 무너져 내린 돌 사이에서 동제 보요와 장식, 그리고 철제 갑옷편과 화살촉 등과 다량의 암・수키와가 수습되었다. 무덤의 연대는 동제 보요나 장식편, 철제갑옷편 등으로 미루어 3세기대로 비정하는 것이 합리적이라 할 수 있다. 입지와 배장무덤, 능원, 묘역시설 등으로 보고서에서는 2세기대의 고구려 초기 왕릉으로 보았으며, 무덤 주인에 대해서는 태조왕(張福有, 2007), 산상왕(魏存成, 2007), 신대왕 또는 고국천왕(임기환, 2009) 등의 견해가 있다.
임강총은 용산 자락의 작은 구릉 정상부에 자리하며, 일제강점기에 압록강 가까이 있는 큰 무덤이라 하여 임강총으로 불리게 되었다. 다수가 가공하지 않은 돌로 축조해서 분구는 계단의 모습이 잘 남아 있지 않고, 계단의 수도 각 변마다 차이가 있다. 매장부는 함몰갱에서 출토된 꺾쇠와 관못 등으로 미루어 목실로 추정된다. 분구 상부에서 암・수키와와 등성마루기와 등 많은 기와가 출토되었다. 무덤에서 동쪽으로 13.5m 떨어진 곳에 제대로 보고된 석대가 있으며, 석대 상부의 함몰구덩이에서 사람얼굴 형상의 차할과 철제재갈, 토기, 금환, 철제띠고리와 마노구슬, 금동장식편 등이 출토되었다. 보고서에서는 임강총의 하한 연대를 3세기 말로 비정하였다. 동천왕릉(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 2002; 여호규, 2006; 임기환, 2009), 산상왕릉(張福有, 2007)으로 비정한 바 있으며, 무덤의 연대와 입지, 장지명 등을 고려해볼 때 동천왕릉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
우산하2110호분은 우산의 남쪽 말단면과 이어지는 평지에 자리하며, 일제강점기에 온화보 서대총, 서강 남대석릉, 온화보 남대총 등으로 불렸다. 부분 가공된 돌과 가공하지 않은 돌로 분구를 축조하여 남아 있는 계단의 수가 6~12단으로 각 변마다 차이가 있다. 분구의 중앙에 동서 방향으로 석렬이 있어서 매장부를 두 공간으로 분리하였다. 무덤에서 출토된 철제 꺾쇠와 관못, 장막걸이쇠 등으로 미루어 매장부는 목실로 추정된다. 무덤 주위에 돌을 깔아서 묘역을 만들었으며, 무덤 동쪽으로 장방형 평면의 적석유구를 제사 관련 시설로 추정하고 있다. 분구에서는 암・수키와, 등성마루기와 등이 출토되었고, 무덤의 동쪽 내부에서 청동제 사람얼굴 형상의 차할이 출토되었다. 이 청동체차할은 임강총에서 출토된 것과 매우 비슷하여 임강총과 비슷한 시기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무덤의 주인공에 대해서는 고국천왕(張福有, 2007), 중천왕(魏存成, 2007; 임기환, 2009) 등으로 비정한다.
칠성산211호분은 칠성산의 평탄화된 말단면에 위치한다. 도굴과 후대의 훼손으로 분구 내부 채움돌이 계단을 완전히 덮어서 낙타등과 같은 형상이다. 분구에서는 다수의 암·수키와가 출토되었다. 매장부는 청동제 관못, 꺾쇠, 장막걸이쇠 등으로 미루어 목실로 추정된다. 무덤의 북쪽으로 12m 떨어진 곳에서 적석총으로 추정되는 돌무지(칠성산212호로 편호)가 있었으나 파괴되어 잔존하지 않으며, 무덤의 북변과 나란하게 석대가 있어서 보고서에서는 제대 또는 배장묘로 추정한다. 무덤에서는 보요와 장식판 등 금동제장식구가 출토되었다. 보요는 원형과 규형 두 종류가 출토되었고, 철제 갑옷편과 재갈, 마노구슬과 청자편 등이 출토되었다. 통구하 서편에 자리해서 서천왕릉(魏存成, 2007; 張福有, 2007; 임기환, 2009)으로 비정된다.
서대총은 완만한 구릉 사면에 자리하며, 국내도성으로부터 가장 서쪽에 있는 커다란 무덤이어서 서대총으로 명명되었다. 일찍이 도굴되어서 무덤 내부의 채움돌이 분구를 완전히 덮었다. 계단은 가공된 석재를 이용하여 축조하였고, 14단 정도가 확인되었다. 매장부는 완전히 파괴되어 알 수 없으나, 출토된 철제 관못, 꺾쇠, 장막걸이쇠 등으로 미루어 목실임을 알 수 있다. 무덤시설로는 북쪽 계단 위에 녹색을 띠는 얇은 판석을 깔고 세워서 상으로 놓은 입석판이 있으며, 북쪽 계단 1층 밖으로 배구수시설이 확인되었다. 무덤의 북쪽으로 40.5m 떨어진 곳에 무덤을 둘러싼 담장 석렬이 확인되었고, 동쪽으로 40m 지점에는 제대로 추정되는 석대가 있다. 유물로는 규형과 원형 보요, 장식판을 포함한 각종 금동장식구와 철제재갈 등이 출토되었다. 분구에서는 암·수키와와 권운문와당이 출토되었고, 권운문와당의 연호문 사이에 기축(己丑) 간지가 있어 329년으로 연대 비정되므로 미천왕릉으로 비정된다.
우산하992호분은 우산의 말단면과 이어지는 평지에 자리하는 계단목실적석총으로, 일제강점기에 온화보 중대총, 서강 북대총으로 불렸다. 밖으로 드러난 면을 가공한 석재로 축조한 계단적석총으로, 계단은 7층이 확인된다. 매장부는 남아 있지 않으나 청동제 관못, 꺾쇠, 장막걸이쇠 등으로 미루어 목실로 추정된다. 무덤 외 시설로는 제대로 보고 있는 석대가 무덤의 동·서 양측에서 확인되었다. 또한 서측 제대에 있는 4개의 돌무지를 배장묘 또는 건물유적으로 추정하고 있으나 자세하지 않다. 무덤에서는 금동제 보요와 장식구, 그리고 금동제 화판형 운주 등 장식마구와 철제 말얼굴가리개(馬胄) 외에도 토기와 지석 등이 수습되었다. 분구에서는 암・수키와와 권운문와당이 출토되었고, 연화문와당 잔편 1점이 출토되었다. 권운문와당의 무술(戊戌)명 간지로 미루어 338년으로 비정된다. 무덤의 주인공으로는 고국원왕으로 비정하거나(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 2004; 魏存成, 2007; 張福有, 2007; 임기환, 2009), 왕릉이 아닌 왕족이나 귀족의 무덤으로 비정하기도 한다(여호규, 2006).
마선구2100호분은 평탄한 대지 위에 단독으로 자리한 계단목실적석총이다. 기초석을 놓은 후 계단을 축조하였으며, 계단석은 가공 석재로 현재 4단이 남아 있다. 매장부는 남아 있지 않으나 관못, 꺾쇠, 장막걸이쇠로 미루어 목실로 추정된다. 무덤 외 시설로는 배수를 고려한 산수석이 깔려 있고, 무덤의 동북 모서리 부근 산수석과 계단 기초석 사이의 입석판에서 금동장식물이 발견되었고, 무덤의 남쪽으로 30m 떨어진 곳에서 능원의 담장 석렬이 확인되었다. 무덤의 서남쪽으로 200m 떨어진 평지에 있는 건물지를 능침과 관련된 건물지로 추정 보고하였으나, 보고가 자세하지는 않다. 무덤에서는 금, 금동, 청동, 철기와 토기, 기와 등 다량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특히 분구에서 출토된 암・수키와와 권운문와당은 서대총이나 우산하992호분보다 퇴화된 무늬여서 4세기 중엽으로 추정되며, 밀집파상선문이 시문된 시유도기(施釉陶器) 호도 4세기 중엽으로 연대가 비정된다. 보고서에서는 마선구2100호분을 소수림왕릉으로 비정하였고, 위존성(魏存成, 2007)도 같은 입장이다. 이 외에도 봉상왕릉(張福有, 2007)으로 비정하거나 개장된 미천왕릉의 무덤으로 보기도 한다(東潮, 2006).
천추총은 평지에 단독으로 자리한 계단석실적석총이다. 일찍이 ‘千秋萬歲永固’가 찍힌 벽돌에 따라서 천추총으로 명명되었고, 중국의 고분번호에 따르면 마선구1000호분이다. 분구는 잘 다듬은 장대석으로 축조하였고, 현재 서남 모서리에서 5층이 확인되며 원래는 10층으로 추정된다. 분구를 돌아가면서 분구에 비스듬히 기대어 돌을 세워 분구를 보호하였고, 이를 중국에서는 호분석(護墳石)으로 부른다. 분구 상부에서 출토된 석재가 태왕릉의 가형석곽 석재와 같고, 관못과 꺾쇠 등이 출토되어서 매장부는 태왕릉과 같은 목관, 가형석곽, 석실의 3중 구조로 추정된다. 무덤의 서쪽으로 돌을 깔아 묘역을 만들었고, 분구에서 남쪽으로 40m 떨어진 지점에서 능원의 담장 석렬이 확인되었다. 한편, 무덤의 서남쪽으로 300m 떨어진 마선구하 강변대지에서 건물지가 확인되어 제사건물로 추정하고 있다.
무덤에서는 금, 은, 금동제의 각종 장식구와 금동제 화판형 운주 등 마구, 금동제갑옷편, 청동방울, 철제 갑옷편과 도, 마노구슬 등과 토기가 출토되었다. 분구에서 다량의 암・수키와와 퇴화된 권운문와당, 회색조의 구획선이 있는 6판 연화문와당과 ‘千秋萬歲永固’, ‘保固乾坤相畢’명이 찍힌 명문벽돌이 출토되었다. 기와 가운데 ‘未在永樂’명이 확인되어서 무덤의 연대는 을미(乙未, 395년) 또는 정미(丁未, 407년)로 비정되나, 연화문와당이 출토되어 마선구2100호분과 태왕릉 사이에 위치 지을 수 있으므로 무덤의 연대는 4세기 말로 비정된다. 이에 따라 중국 학자들은 무덤의 주인공을 대개 고국양왕으로 비정하며(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 2004; 魏存成, 2007; 張福有, 2007; 東潮, 2006), 장군총을 광개토왕릉으로 보는 입장에서는 천추총을 소수림왕릉으로 비정하고 있다(여호규, 2006; 임기환, 2009),
태왕릉은 우산 남쪽에서 뻗은 작은 구릉에 위치하는 계단석실적석총이다. 일찍이 무덤에서 출토된 ‘願太王陵安如山固如岳’이 새겨진 벽돌로 태왕릉으로 불리게 되었고, 〈광개토왕릉비〉와 함께 광개토왕릉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잘 가공된 석재를 이용하여 계단을 축조하였고, 거대한 계단에 돌을 기대어 세워 분구 보호석 역할을 한다. 계단은 8층 정도가 확인되는데, 원래는 11층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계단의 남쪽 1층에 얇은 청록색 응회암을 상으로 계단 위에 놓은 입석판시설이 확인되며, 분구 아래에는 산수석과 배수시설이 있다. 매장부는 방형 현실, 중앙연도를 가진 석실 내에 조립해서 만든 가형석곽이 놓이고, 가형석곽 내에 관받침 두 개가 있는 관, 곽, 실의 3중 구조이다.
무덤 주위에 강자갈을 깔아서 묘역을 삼았고, 무덤으로부터 남쪽으로 100m 떨어진 곳에서 능원의 담장 석렬이 확인되었다. 무덤의 동쪽으로 50~68m 떨어진 곳에 석대 2개가 나란히 있는데, 중국에서는 이를 제대로 보고 있다. 무덤은 남쪽 1층 계단에서 3m정도 떨어진 곳에 석붕묘(북방식 지석묘)와 비슷한 배장묘가 있었다고 하지만 자세하지 않으며, 무덤의 동북쪽으로 120m 떨어진 곳에 건물지가 있었다고 하지만 그 성격을 알 수 없고, 태왕릉에서 〈광개토왕릉비〉까지의 길도 확인되지 않아서 둘의 관계는 확실하지 않다.
무덤에서 출토된 유물은 금, 은, 금동의 각종 장식구와 함께 청동제화덕, 금동제 만가 및 상다리, 등자와 행엽, 청동방울 등 마구류 등 다종다양하다. 특히 청동방울 중에 ‘辛卯年 好太王 □造鈴 九十六’이라는 명문이 음각되어서 주인공과 관련지어 해석되기도 한다. 분구에서는 구획선이 있는 6판 연화문와당이 출토되었고, 그중 연봉우리 모양의 와당은 태왕릉식 연화문와당으로 불리기도 한다. 무덤의 연대는 출토된 등자로 미루어 4세기 말이나 5세기 초로 비정되며, 권운문와당이 출토되지 않아서 천추총보다는 늦을 것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태왕릉에 대해서는 광개토왕릉으로 비정하거나 고국양왕릉으로 비정하기도 한다. 주로 중국 학자들이 광개토왕릉으로 보는 입장이고(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 2004; 魏存成, 2007; 張福有, 2007), 〈광개토왕릉비〉를 태왕릉과 관련지을 수 없다는 입장에서 고국양왕릉으로 비정하기도 한다(여호규, 2006; 임기환, 2009).
장군총은 용산 기슭에 자리하는 계단석실적석총이다. 원래 모습이 잘 보존된 고구려 최고의 기술로 축조된 적석총으로, 계단은 잘 가공한 석재를 이용하여 7층을 쌓고, 거대한 석재를 1층 계단에 기대어 세워서 분구를 보호하였다. 석재는 1,146매가 사용되었고, 21매가 결실되었다. 매장부는 5층 계단에 위치하며, 방형 현실, 중앙연도의 단칸구조이고, 현실 내에 관대가 두 개 놓여 있는 관, 실의 2중 구조이다. 무덤 외 시설로는 2기의 배장묘와 제대, 능원 담장, 제사건물로 추정되는 건물지가 조사되었다.
1호 배장묘는 무덤의 서북 모서리에서 43m 떨어져 자리하는 계단석실적석총이다. 2호 배장묘는 1호 매장묘의 서북쪽으로 35m 떨어져 있는데, 계단석실적석총으로 많이 파괴되었으나 호분석이 확인된다. 중국에서는 2호 배장묘와 인접한 석대를 제대로 보고 있으나, 일제강점기 조사에서 배장묘가 4~5기였다고 하여 석대를 배장무덤으로 보기도 한다.
건축지는 서남쪽으로 100m 떨어진 곳에서 확인되었고 여기서 출토된 연화문와당은 무덤에서 출토된 것과 달리 구획선이 없는 적색 와당이다. 장군총에서는 금동제 장식과 신발바닥, 철제연결쇠 등이 출토되었다.
특히 철제연결쇠는 최상층인 7층 계단석의 둘레에 직경 10cm, 깊이 15cm 정도의 작은 구멍이 돌아가며 있어서 이와 결부시켜 7층 계단 위에는 중앙에 기와를 얹은 목조건물이 있고, 그 주위에 난간을 돌렸을 것으로 추정한다. 중앙의 목조건물은 향당 또는 제의와 관련되거나 상징적인 건물로 보기도 한다.
적석 분구에서는 구획선이 있는 연화문와당이 출토되었는데, 이는 모두 8판으로 태왕릉의 연화문와당보다 크다. 태왕릉을 고국양왕릉으로 보는 입장에서는 장군총을 광개토왕릉으로 비정하고(여호규, 2006; 임기환, 2009), 태왕릉을 광개토왕릉으로 보는 입장에서 장군총을 장수왕릉으로 비정한다(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 2004; 魏存成, 2007; 張福有, 2007).
이와 같이 국내도성의 동·서 양 방향으로 자리하는 초대형 적석총을 국내도성시기의 왕릉급 무덤으로 보는 데에는 이견이 없지만, 무덤의 구조와 장지명, 당시 환경 등을 고려하여 비정한 왕릉안은 연구자마다 견해 차이를 보인다(표3). 왕릉 비정을 위해서는 무덤에 대한 안정적인 편년안 마련이 선결되어야 하나, 현재 확보된 고분 자료만으로는 무덤의 연대 추정이 어려워 왕릉 비정 문제 또한 쉽게 해결되기 어렵다.
표3 | 왕릉 비정에 대한 여러 견해(강현숙, 2013)
왕호재위 기간장지왕릉 비정
地內宏(1938)吉文考硏(2002)吉文考硏(2004)張福有(2005)東潮(2006)여호규(2006)정호섭(008)
東明王기원전 37~기원전 19龍山 망강루4 망강루4
瑠(琉)璃明王기원전 19~18豆谷東原 우산하0000
大武神王18~44大獸林原 마선구626
閩中王44~48閩中原石窟
慕本王48~53慕本原 마선구2381
太祖大王53~146 칠성산871
次大王146~165 마선구2378
新大王165~179故國谷 산성하전창36
故國川王179~197故國川原 우산하2110
山上王197~227山上陵장군총 임강총
東川王227~248柴原 임강총 호자구1 임강총
中川王227~248中川之原 산성하전창1 우산하2110
西川王270~292西川之原(故國原) 서대총칠성산211칠성산211 칠성산211칠성산211
烽上王292~300烽山之原 마선구2100 임강총
美川王300~331美川之原 서대총서대총서대총 마선구2100(개장) 서대총, 마선구2100(개장)
故國原王331~371故國之原 우산하992우산하992우산하992
小獸林王371~384小獸林 마선구2100천추총태왕릉
故國壤王384~391故國壤 천추총천추총우산하540천추총태왕릉태왕릉
廣開土王391~412山陵태왕릉광개토왕광개토왕태왕릉장군총장군총장군총
長壽王412~491 장군총장군총장군총장군총
文咨王492~519 우산하2115토포리대총
安臧王519~531 오회분1
安原王531~545 오회분2
陽原王545~559 우산하2114호남리사신총
平原王559~590 통구사신총강서대묘
嬰陽王590~618 오회분3강서중묘
榮留王618~642 오회분4
寶藏王642~668唐京師頡利墓 왼쪽
왕호재위 기간왕릉 비정비고
張福有(2007)魏存成(2007)이도학(2008)임기환(2009)이병도 외(1954)永島輝神眞(1988)
東明王기원전 37~기원전 19 鄒牟王
瑠(琉)璃明王기원전 19~18 孺留王, 儒留王
大武神王18~44마선구626 大解朱留王, 大朱留王
閩中王44~48 國祖王
慕本王48~53
太祖大王53~146칠성산871
次大王146~165마선구2378
新大王165~179산성하전창36 칠성산871
故國川王179~197우산하2110 칠성산871 國襄(壤)王
山上王197~227임강총칠성산871 마선구626
東川王227~248 임강총 임강총 東襄(壤)王
中川王227~248 우산하2110 우산하2110 中襄(壤)王
西川王270~292칠성산211칠성산211 칠성산211 (西)襄(壤)王
烽上王292~300마선구2100 雉葛王
美川王300~331서대총서대총 서대총 好襄(壤)王
故國原王331~371우산하992우산하992 우산하992 國岡上王
小獸林王371~384천추총마선구2100 천추총 小解朱留王
故國壤王384~391 천추총태왕릉태왕릉
廣開土王391~412태왕릉태왕릉장군총장군총 태왕릉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 國岡上廣開土地好太王, 永樂大王
長壽王412~491장군총장군총, 한왕묘(실묘) (전)동명왕릉
文咨王492~519 文咨明王, 明治好王
安臧王519~531
安原王531~545
陽原王545~559 陽岡上好王
平原王559~590 강서대묘 平岡上好王
嬰陽王590~618 平陽王
榮留王618~642
寶藏王642~668
 
2) 초대형 적석총의 구조와 형식
중국은 분구의 한 변 길이가 30m를 넘는 초대형 적석총 가운데 개활한 입지, 무덤의 분구 위 기와나 와당, 그리고 제대나 배장묘, 능원의 담장 등 무덤시설 등에서 다른 무덤들과 차이를 보이는 12기의 무덤을 국내성시기의 ‘고구려 왕릉’으로 보고, 세계유산에 등재시켰다. 그러나 왕릉으로 비정된 무덤에서 왕릉의 구성요소가 일률적으로 확인되지 않았고, 시간에 따라 방향성을 갖고 전개되지도 않는다.
초대형 적석총은 석재의 가공 여부와 그 정도, 축조기술, 그리고 매장부 구조에 따라 몇 가지 형식으로 나뉜다. 분구는 계장식과 계단식으로 나뉘며, 계단식은 석재의 가공기술에 따라서 다시 나눌 수 있다. 매장부는 목곽과 목실, 석실로 나뉘며, 목실과 석실은 횡혈식 구조로 추정된다. 따라서 초대형 적석총은 계장식목곽적석총, 계단목실적석총, 그리고 계단석실적석총으로 나뉜다. 계단목실적석총은 부분 가공된 석재로 계단을 축조하였고, 계단석실적석총은 전면 가공된 석재로 계단을 축조해서 각 형식은 시간에 따른 선후관계를 가진다(그림14).
그림14 | 왕릉으로 비정되는 초대형 적석총의 분포(ⓒ강현숙)
그림14 | 마선구2100호분
그림14 | 마선구626호분
그림14 | 마선구2378호분
그림14 | 칠성산211호분
그림14 | 칠성산871호분
그림14 | 서대총
그림14 | 우산하2110호분
그림14 | 우산하992호분
그림14 | 장군총
그림14 | 임강총
그림14 | 태왕릉
그림14 | 천추총
계장식목곽적석총은 마선구2378호분, 마선구626호분, 칠성산871호분이 있고(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 外, 2004), 왕릉으로 세계유산에 등재되지는 않았지만 산성하전창36호분도 이에 해당될 것이다. 이 중 마선구2378호분과 산성하전창36호분, 마선구626호분은 방형 평면 앞에 반원형의 부석시설이 있어서 전체 평면은 전원후방형이며, 칠성산871호분은 부석시설이 없는 방형 평면이다. 분구에서 암・수키와와 함께 불에 탄 돌들이 확인되어서 매장이 끝난 후에 번소의식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계단목실적석총은 임강총, 우산하2110호분, 칠성산211호분, 서대총, 우산하992호분, 마선구2100호분 등으로, 계장식무기단목곽적석총과는 달리 방형 평면으로 정형화된 모습을 보이며, 분구에서의 번소 의식은 관찰되지 않는다. 이중 임강총과 우산하2110호분은 분구에서 암・수키와만 출토되었고, 서대총, 우산하992호분과 마선구2100호분에서는 암・수키와와 함께 권운문와당이 출토되었다. 무덤에서 관못, 꺾쇠, 장막걸이쇠 등이 출토되어서 주검은 휘장을 둘러친 목실의 목관에 안치되었을 것이며, 목실의 한쪽 벽을 이용하여 추가 합장이 행해졌을 가능성도 있다. 따라서 계단목실적석총은 축조석재와 권운문와당으로 미루어볼 때 임강총과 우산하2110호분이 비슷한 시기로 가장 이른 형식이며, 이어 칠성산211호분, 그리고 서대총과 우산하992호분이 4세기 전반으로 선후관계를 가지며, 가장 늦은 것은 퇴화된 무늬의 권운문와당이 출토된 마선구2100호분이다.
왕릉이라는 것에 이견이 없는 천추총, 태왕릉, 장군총은 계단석실적석총이다. 잘 다듬은 장대석을 이용하여 계단을 축조하였으며, 방형 평면 분구의 기저부 네 면에 거대석을 세워 분구를 보호하였다. 주검은 목관에 안치한 후 석실이나 석실 내 가형석곽에 안치하였다. 천추총과 태왕릉의 매장부는 목관, 가형석곽, 석실의 3중 구조이고, 장군총은 목곽과 석실의 2중 구조이다. 이 세 무덤에서는 회색조의 구획선이 있는 연화문와당이 출토되었는데, 천추총에서는 퇴화된 무늬의 권운문와당과 6판 연화문와당이 출토되었고, 태왕릉에서는 연화문와당과 함께 연봉우리무늬와당이, 장군총에서는 8판 연화문와당이 출토되었다.
 
3) 초대형 적석총의 시설
초대형 적석총의 분구시설로는 묘상 건물, 계단 위에 ■ 상으로 얇은 판석을 놓고 기댄 시설, 무덤 기저부와 연결된 묘역과 호분석, 산수석과 배수시설 등이 확인된다.
 
(1) 분구 건물 - 능각(陵閣)
초대형 적석총의 무너져 내린 돌 사이에서는 상당량의 암・수키와가 출토되었고, 4세기를 경과하면서 암・수막새기와와 등마루기와 등이 출토되어 분구 위에 기와건물이 었었을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따라서 중국에서는 적석 분구에서 출토된 기와를 왕릉 판단의 기준으로 삼았다.
왕릉은 아니지만, 왕릉 후보군으로 비정된 바 있는 초대형 적석총인 우산하3319호분에서도 권운문와당이 출토되었다. 이 권운문와당은 와당 둘레를 돌아가면서 글자가 찍혔다. 그 내용은 “정사년 5월에 중랑과 부인을 위하며 무덤을 덮을 기와를 만들고 또 백성 4천…만세를 누리시라(太歲在丁巳五月 日爲中郞及夫人造盖墓瓦又作民四千□□…用(盈)時興詣得(享)萬世)”는 것으로, 기와로 무덤을 덮었음을 알려주는 자료이다.
그러나 기와를 어떻게 덮었는지 알 수 없고, 기와가 출토된 무덤을 모두 왕릉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가령, 계장식으로 축조한 적석총인 경우 분구에서 불로 태운 번소의식이 있었서 불에 녹은 돌과 기와와 함께 응결되어 있다. 이는 분구 위 건물의 존재를 부정하는 근거가 된다. 매장부가 목실로 추정되는 중국에서 광실로 보고한 계단적석총도 마찬가지이다. 매장부가 목재인 경우 시간에 따른 목재의 부식으로 적석총 분구의 상부가 함몰되므로, 설사 건물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누대에 걸쳐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기와로 무덤을 덮었지만, 계장식이나 계단식의 광실적석총에서 출토되는 기와가 분구 위의 건물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분구 위의 건물은 천장까지 돌로 잘 쌓은 계단석실적석총에서는 가능하다. 가령, 장군총의 석실은 5단에 위치하며 거대한 판상석 한 매로 천장을 덮었다. 판상의 거대한 천장석은 7층 계단석의 중앙에 자리해서 분구 위 건물의 초석이나 돌기단 역할을 했을 것이다. 한편, 7층 계단석 가장자리를 돌아가며 같은 간격으로 있는 원형 평면의 홈은 장군총에서 출토된 유물 중 난간으로 추정되는 철제연결쇠로 미루어 계단석 가장자리의 난간을 세웠던 구멍으로 유추해볼 수 있다(그림15). 따라서 7층 계단을 돌아가며 난간이 있었고, 난간 안에는 지붕을 얹은 건물이 있었을 것이다. 석실 매장부를 가진 천추총이나 태왕릉도 장군총과 마찬가지로 분구 위에 지붕을 얹은 건물이 있었을 것이다.
그림15 | 장군총과 출토유물 및 추정 능각(강현숙 외, 2020)
분구 위 건물의 성격에 대해서는 중국의 향당과 같이 무덤 제사와 관련짓기도 한다. 그러나 실제 제사가 행해졌던 곳이라기보다는 무덤을 장엄하는 구조물로서, 침전의 상징이자 왕릉을 다른 계단적석총과 구별시키는 상징이었을 것이다.
 
(2) 입석판
중국에서 얇고 편평한 판상석을 계단적석총의 층단에 ■ 상으로 깔고 세운 구조물을 입석판이라고 한다. 서대총과 마선구2100호분, 태왕릉의 계단에서 확인되는 입석판은 대개 녹색을 띠는 돌로 만들었고, 편평한 입석판의 다른 한쪽 면에는 회가 발라져 있다. 서대총의 북측 둘째 계단과 태왕릉의 남측 1층 계단에서 확인된 입석판은 녹색을 띠는 장방형의 얇은 판상석이며, 마선구2100호분에도 이와 비슷한 시설이 있다고 한다(그림16).
그림16 | 입석판 - 서대총
그림16 | 입석판 - 마선구2100호분
그림16 | 입석판 - 태왕릉 평・단면과 사진
현재 그 용도를 알 수 없지만, 『수서(隋書)』 고구려전에 사람이 죽으면 생시에 사용하였던 의복과 수레를 무덤 옆에 두고 장사 지낸 사람들이 이를 가져간다는 기록으로 미루어볼 때, 매장 시 행해졌던 특정한 의례와 관련지어 볼 여지가 있다.
 
(3) 분구 버팀석(호분석)과 묘역
계단석실적석총의 계단 분구 아랫단 네 면에 기대어 세운 분구를 보강해주는 거대한 돌인 분구버팀석을 중국에서는 호분석(護墳石)이라고 하는데, 천추총, 태왕릉, 장군총에서 보인다. 이러한 시설은 계장식적석총의 분구 외연을 돌아가며 분구가 무너져 내리는 것을 방지하는 장백 간구자고분군의 적석총이나 이른 시기의 계단적석총인 만보정242호분의 울타리돌에서 연원했을 가능성이 있다. 집안 만보정242호분을 보면 분구에 기대어 세운 돌의 축조상황으로 미루어 호분석의 기능보다는 울타리 기능이 더 컸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4세기 말 이후에 조성된 천추총이나 태왕릉, 장군총은 호분석으로서의 역할이 가능했을 것이며, 장군총 2호 배장무덤에서도 확인되어서 왕릉에만 국한된 시설물은 아닐 것이다.
 
(4) 산수석과 배수시설
산수석(散水石)은 원래 기와 낙수면에서 떨어지는 물이 지면에 튀는 것을 방지하는 위해 잔돌을 깐 시설로, 적석총의 분구 주위를 돌아가며 배수 역할을 겸하기도 한다. 마선구626호분, 칠성산871호분, 마선구2100호분에서는 산수석만 확인되며, 서대총, 천추총, 태왕릉, 장군총 등에서는 산수석과 배수시설이 함께 확인된다. 태왕릉에서는 황토층 위에 판석을 깔고 그 위에 다시 냇돌을 깔아 산수시설을 만들고, 산수시설 일부에 배수관이 있기도 하다.
 
(5) 능원
초대형 적석총에서는 무덤과 일정 간격을 두고 무덤 주위를 돌아가면서 석렬이 확인되어서 이를 능원의 담장으로 추정한다. 능원은 우월한 입지의 배타적 점유를 확인시켜 주는 동시에 누대에 걸쳐 안정적으로 왕릉이 관리되고 있음을 시사하는 시설이다. 능원의 담장이 완전하게 남아 있지는 않지만, 서대총, 마선구2100호, 천추총과 태왕릉, 장군총에서 일부 담장렬이 확인된다. 무덤과 담장렬 사이의 거리를 통해 능원의 한 변 길이를 추산해보면, 서대총은 150m, 마선구2100호분은 100m, 천추총은 150m, 태왕릉은 260m를 상회할 것이며, 장군총은 100m 정도로 여겨진다.
 
(6) 석대(제대)
중국에서 제대로 보고 있는 시설은 초대형 적석총의 측면이나 후면에 일정 거리를 두고 자리한다. 돌로 장방형 또는 세장방형 평면이 되도록 돌을 돌리고 그 내부에 작은 돌을 채운 높이 1m 내외의 석대시설이다. 석대 위에는 별도의 상면시설이 되어 있지 않아서 상면을 이용했다고 보기 어렵다. 더욱이 구릉의 사면에 자리한 경우에도 경사가 그대로 유지되어서 석대의 상면이 수평을 유지하지 않는다. 따라서 무덤 앞에서 행해지는 무덤제사와 관련된 제대로 보기 어렵다. 특히 적석총의 시간에 따른 치석과 축조기술의 발전이 제대 축조에 반영되어 있지 않아서 왕릉 구성의 중요한 시설로 보기도 어렵다.
한편, 무기단적석총의 한 변에 잇대어 있는 반원형이나 장방형 부석시설을 제단으로 보기도 한다. 부석시설은 초대형 적석총뿐 아니라 무기단, 기단, 계단 적석총 등 여러 형태의 무덤에서 확인되어서 적석총의 전체 평면형은 전원후방형, 전방후방형, 전방후원형을 띤다. 적석총에 잇대어진 전원부 혹은 전방부 시설은 제대라기보다 산사면에 자리한 경우 분구가 흘러내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분구 보강시설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며, 이러한 시설을 묘설(墓舌)로 부르기도 한다(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 1993).
 
(7) 배장무덤
배장무덤은 주 무덤에 딸린 별개의 무덤으로, 가야의 순장이나 수릉이 전제되는 중국의 배장과는 다르다. 집안 마선구626호분과 태왕릉, 장군총에서 배장무덤이 보고되었고, 칠성산871호분, 칠성산211호분, 우산하992호분에서는 제대로 보고했으면서도 배장무덤일 가능성이 있다고 하였다. 현재 남아 있는 가장 확실한 배장무덤은 장군총의 1호와 2호 배장무덤이다. 장군총의 1호 배장무덤은 장군총 축조에 사용된 돌과 축조기술이 같고, 2호 배장무덤은 부분 가공된 석재로 쌓은 계단과 분구버팀석 등 구조적으로 장군총과 유사하다. 장군총과 배장무덤이 서로 유사구조여서 장군총 능역 조성 시 배장무덤에 대한 고려가 있었을 것이므로, 배장무덤은 장군총과 비슷한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생각된다. 배장자의 성격은 밝혀지지 않았다.
 
(8) 능묘
능묘(陵廟)는 무덤 제사를 위한 건물이다. 능묘 또한 잘 남아 있지 않지만, 능원 밖에서 건물지가 확인되어서 이 건물지를 무덤 제사와 관련된 능묘로 추정한다. 현재 능묘로 볼 수 있는 건물로는 장군총 서남쪽에 있는 건물지를 들 수 있다.
장군총의 서남쪽으로 100m 떨어진 곳에서 확인된 건물지는 장군총과 같은 방향으로 남북 길이 100m, 동서 너비 40m의 대형이다. 1,800㎡ 범위에서 담장의 벽체, 산수시설, 배수구, 문지 등이 확인되었고, 여기서 출토된 암・수키와를 포함한 막새기와는 환도산성이나 국내성에서 출토된 것과 비슷해서 보고자는 제사 관련 유적이나 침원(寢園) 또는 능묘로 추정한다. 환도산성이나 국내성과 비교해볼 때 귀면문이나 인동문 수막새 등은 보이지 않고, 연화문수막새도 문양이 다양하지 않아서, 건물지의 존속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 외에도 마선구2100호분의 서남쪽으로 200m 떨어진 곳에서 건물에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장대석이 확인되었고, 천추총의 서남쪽으로 300m 떨어진 곳에서 장대석과 냇돌로 쌓은 담장이 확인되었다. 남아 있는 흔적만으로 단정하기 어렵지만, 무덤의 서남쪽으로 떨어져서 건물지가 있다는 공통점이 있어서 능묘일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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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통구분지의 초대형 적석총 자료번호 : gt.d_0008_0030_00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