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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통사

2. 석실봉토분의 출현과 변천 과정

2. 석실봉토분의 출현과 변천 과정

1) 석실봉토분의 출현
석실봉토분은 일찍부터 고구려 묘제였던 적석총과는 구조와 장법이 전혀 다르다. 가시적으로 드러나는 지상의 분구가 돌과 흙이라는 축조 재료에서의 차이뿐 아니라 매장방식과 그에 따른 매장부 구조도 다르다. 일제강점기에 적석총과 석실봉토분 두 무덤의 기원이 다르다고 생각한 것도 두 무덤의 차이 때문일 것이다.
이처럼 적석총과 석실봉토분을 별개의 묘제로 인식하였기에, 석실봉토분의 등장과 관련하여 지석묘 기원설, 서역 영향설, 그리고 중국 영향설 등 여러 견해가 제기되었다. 지석묘 기원설은 북방식 지석묘의 실질적 매장부 역할을 하는 지석의 형태와 매장방식이 석실과 유사하다는 점이 근거가 되었다. 실제 북방식 지석묘와 유사한 형태를 보이는 판상석 1~2매를 이용하여 축조한 석실은 황산의 남쪽 기슭에서 보인다. 그러나 판상석으로 축조한 횡구식 구조의 석실은 고구려에서 유행한 보편적인 석실은 아니다. 북방식 지석묘와 석실봉토분을 연결시키려면, 북방식 지석묘에서 석실봉토분으로의 시간적 공백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서역의 영향을 강조하는 설(도유호, 1959)은 안악3호분 조사가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안악3호분의 기둥을 세운 석실 구조와 평행삼각고임 천장 가구 또는 벽화에 묘사된 눈이 크고 코가 높은 서역인의 모습이나 서역계 기물 등 벽화에 표현된 제재에 근거하여 서역과의 관련을 설명한다. 고구려와 서역의 교류는 문헌기록뿐 아니라 고구려 벽화분 여러 곳에서 확인된다(박아림, 2008; 전호태, 2012). 그러나 서역이라는 개념이 모호하여 서역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배경이나 경로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따라서 고구려의 물질문화에서 서역과의 교류가 있었음은 충분히 상정되지만, 서역의 영향으로 석실봉토분이 등장하였다고는 단정하기 어렵다.
중국 영향설도 마찬가지이다. 일제강점기부터 낙랑을 염두에 두고 고구려 석실봉토분의 등장이 중국 한 문화의 영향을 받을 것으로 보았다. 횡혈식 장법이 일찍부터 중국에서 유행하였기 때문에 중국과의 관련성을 인정할 수도 있다. 그러나 고구려의 석실봉토분은 중국의 벽돌무덤이나 낙랑의 벽돌무덤과는 무덤 축조와 그에 반영된 관념에서 차이가 있다. 먼저 축조재료에서 돌과 벽돌이라는 차이가 있다. 무덤을 축조하는 데 있어서 중국이나 낙랑의 벽돌무덤은 지하에 벽돌방이 위치하므로 지상의 봉토 분구와 벽돌방이 서로 분리된다. 이에 비해 고구려의 석실무덤은 지상이나 반지상에 석실이 놓여서 지상의 분구 중에 석실이 위치하게 된다. 이는 주검 안치가 지하로 들어가는지 혹은 지상에 놓이는지의 차이이기도 하며, 매장 관념의 차이이기도 하다. 따라서 관념의 수용과 석실의 축조는 구분해서 볼 필요가 있다.
한편, 중국 동북지방, 특히 요양 일대 석실봉토벽화분을 고구려 석실봉토분의 등장과 연결시키기도 한다(東潮, 1997). 요양 일대는 중국 동북지역에서 후한대 이후 위·서진대 벽화분의 중심지이며, 요양 일대의 벽화분은 벽돌무덤이 아닌 석실분이다. 특히 요동성총이 요동 일대 벽화분과 유사구조여서 고구려 석실봉토분을 요양 일대 석실벽화분의 영향으로 보았다. 그렇지만 요동성총은 고구려에서 예외적인 석실 구조이고, 요양 일대 석실벽화분은 관실이 병렬 배치된 구조로 현실와 연도로 구성된 고구려와는 차이가 크다(강현숙, 2002). 따라서 고구려 석실봉토분의 등장을 요양 일대 벽화분과 결부시켜 중국 동북지방의 영향이라고 설명할 수 없다. 따라서 서역이나 중국 어느 특정 지역에서 단선적으로 전해졌을 것이라는 전파론적 해석은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적석총에서 석실봉토분으로의 변화가 자생적이라는 주장은 주로 북한 연구자에 의해 제기되었고 북한 학계의 공식 입장이다(손수호, 2001; 정백운, 1957; 정찬영, 1967; 주영헌, 1963). 매장부 구조에 초점을 두자면, 적석총 수혈식 장법의 매장부 구조(목관, 목곽, 목실, 목개석실) 등에서 석실로의 계기적 발전이 설명된다. 따라서 적석총에서 봉토분으로의 변화를 일률적으로 설명하기보다는 해당 지역의 선행 묘제와 관련하여 살필 필요가 있다. 따라서 적석총의 중심 분포지가 아닌 서북한과 적석총의 중심 분포지인 집안 일대 등 지역을 나누어 볼 필요가 있다.
고구려 고분에 대한 조사가 늘어남에 따라 돌로 기단을 만든 후 흙으로 덮은 기단봉토석실분이 확인되었고, 적석총 중에서도 석실을 매장부로 한 무덤이 적지 않게 확인되었다. 석실은 횡혈식 장법을 전제로 한 구조로, 고구려의 횡혈식 장법 무덤은 석실 외에 벽돌로 축조하거나 벽돌과 돌을 함께 사용하여 축조된 경우도 있다. 적석총이 중심 묘제였던 국내도성 일대에서는 석실적석총과 석실봉토분이 함께 축조되었고, 서북한 지역은 고구려가 진출하기 전인 2세기부터 횡혈식 장법의 벽돌무덤이 축조되었다. 이렇듯 서북한 지역과 중국 집안 국내도성 두 지역에서 석실은 선행 묘제와의 관련 속에서 출현하였으므로, 고구려 석실의 출현을 어느 한 지역에서 먼저 등장하여 다른 지역에 영향을 주는 단선적인 과정으로 설명할 수 없다.
 
2) 석실봉토분의 변천 과정
석실봉토분은 해당 지역의 선행 묘제와의 관련하에 출현해서, 초창기에는 지역별로 구조상 차이가 있으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서 차이가 줄어들면서 전 영역에서 비슷한 구조의 석실봉토분이 축조되었다. 따라서 석실봉토분의 변천은 고구려 무덤의 전형이 마련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국내도성 일대에서 확인 가능한 이른 시기의 석실은 계단적석총에서 먼저 확인되며, 이어 봉토분에서 확인된다. 계단적석총으로는 만보정242-2호분을, 석실봉토분으로는 만보정1368호분을 들 수 있다. 만보정242호분은 4기의 계단적석총이 연접된 무덤으로, 그중 두 번째 조성된 만보정242-2호분은 천장이 확인되지 않았지만 방형 현실, 우편재연도를 가진 목개석실이다. 무덤에서 출토된 덮개방울이나 재갈로 미루어 연대는 3세기 말이나 4세기 초로 비정된다. 만보정1368호분은 장방형 현실, 우편재연도를 가진 석실이며, 석실 내부에 기둥과 들보를 그려 넣은 벽화분으로 4세기 중엽으로 비정된다.
이와 달리 서북한 일대의 석실 가운데 연대를 알 수 있는 무덤은 평양 영화9년명 동리묘(353년)와 황해도 안악 로암리무덤(342년)과 장무이무덤(348년) 그리고 석실봉토벽화분인 안악3호분(357년) 등이 있다. 안악3호분은 회랑을 가진 두칸구조의 석실이고, 로암리무덤과 영화 9년명 동리묘는 벽돌이 주 축조재료이며, 장방형 현실, 우편재연도의 단칸구조이고, 장무이무덤은 배가 부른 방형 평면의 현실과 연도 좌우에 횡장한 측실을 가진 유사두칸구조이다.
이처럼 비슷한 시기에 지역을 달리하며 축조되었던 석실 혹은 전실(塼室)의 다양한 양상은 해당 지역 선행 묘제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적석총이 선행 묘제인 국내성 일대에서 전통적으로 행해졌던 수혈식 장법의 목곽에서 횡혈식 장법을 받아들여 목실로 변화하고, 목실이 적석총의 매장부로 자리하면서 차츰 목개석실, 석실로 변하는 과정을 겪었을 것이다. 한편, 만보정1368호분처럼 서북한 지역 벽돌무덤의 영향으로 완성된 석실봉토분이 새로운 묘제로 등장하였을 것이다. 반면, 낙랑군과 대방군하에 있었던 서북한 일대는 고구려 진출 이전부터 횡혈식 장법의 벽돌이나 돌로 축조한 봉토분이 축조되었던 곳이다. 이 지역에서는 4세기 중엽 돌이 벽돌을 대체하면서 석실봉토분이 주로 축조되었다. 황해도와 일부 지역에서는 벽돌을 사용한 전실봉토분이나 벽돌과 돌을 함께 사용한 전석혼축실봉토분이 5세기 초까지 축조되면서 석실봉토분과 병존하였다.
따라서 고구려에서 석실봉토분은 횡혈식 장법이 수용되고, 낙랑군과 대방군이 축출되는 4세기를 경과하면서 출현하였고, 석실이 적석 분구와 봉토 분구의 매장부로 채용되면서 묘실 벽화도 수용되어 고구려의 성장과 함께 각 지역으로 확산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적석총에서 석실봉토분으로의 전환은 단절적이지 않고 계기적이었다고 할 수 있으며, 어느 특정 한 곳의 영향으로 석실봉토분이 등장한 것도 아니다.
석실봉토분이 등장하여 확산되기 시작하는 4세기는 고구려가 낙랑군과 대방군을 축출하고, 서북한 일대로 본격적으로 진출하기 시작한 시기이다. 선행 묘제가 서로 달랐던 국내도성과 서북한 지역의 등장기 석실이 차이가 있듯이, 국내도성이 있는 집안 통구분지와 고구려 영역에 새로 편입된 서북한 지역의 석실봉토분은 대략 세 단계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다(그림8).
그림8 | 석실봉토분 전개 과정(ⓒ강현숙)
첫 번째 단계는 국내도성에서 횡혈식 장법을 수용하는 시기이다. 이 시기는 횡혈식 장법을 수용하여 석실봉토분이 등장하기 전까지로 대략 3세기 말부터 4세기 중엽까지이다. 석실은 방형과 장방형 현실, 중앙과 우편재연도의 단칸구조이다. 서북한 일부 지역에서는 전실봉토분이나 전석혼축실봉토분이 축조되기도 하지만, 대체적인 경향은 벽돌에서 돌로 축조재료가 변화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 단계는 석실봉토분의 확산기이다. 4세기 중엽에서 5세기 말까지의 긴 기간으로, 석실적석총과 석실봉토분, 여기에 묘실 벽화가 더해진 벽화분이 병존하는 횡혈식 묘제의 병존기라고 할 수 있다. 국내도성에서는 석실을 매장부로 하는 여러 형태의 무덤이 병존하지만, 5세기를 경과하면서 차츰 석실적석총은 줄어들고 석실봉토분이 확대되어간다. 서북한 일대에서는 벽돌무덤을 축조하였던 기술적 기반 위에서 석실봉토분에 벽화 요소가 더해져 석실봉토분과 석실벽화봉토분이 병존한다. 특히 석실벽화봉토분은 석실의 평면 구조와 공간 배치가 다양해서 단칸구조 외에도 여러 칸 구조가 축조되었다. 이러한 다양한 양상은 5세기를 경과하면서 국내도성 일대에서는 초대형 계단석실적석총을 정점으로 계단석실적석총과 석실봉토벽화분이 상위 무덤으로 자리하였고, 지방 각지에서는 석실봉토벽화분이 대형분으로서 최상위 무덤이 되었다.
세 번째 단계는 6세기 이후로, 확대된 고구려 전 영역에서 석실봉토분이 축조되고 현실과 연도의 단칸구조로 석실봉토분에서 제일성이 확립된 시기이다. 이 시기에는 국내도성이 자리한 집안 통구분지에서도 대형 석실적석총이 더 이상 축조되지 않는다. 또 왕도와 지방 각지에서 축조된 석실봉토분은 모두 현실과 연도로 이루어진 단칸구조여서 분구 뿐 아니라 매장부 구조에서도 정형화된 모습을 보인다. 특히 사신도가 그려진 석실봉토분이 계단석실적석총을 대신하여 최상위 무덤으로 자리하였다. 최상위 무덤에서는 방형 현실과 중앙연도, 평행삼각고임구조가 선호되었으며, 이와 유사한 구조의 석실봉토분이 지방 각지에서 축조되었다. 따라서 왕을 정점으로 묘제에서의 제일성이 확립되었다고 할 수 있다.
요컨대, 고구려에서 석실봉토분은, 선행 묘제인 적석총에 횡혈식 장법이라는 관념의 유입, 이를 구현할 수 있는 축적된 기술의 바탕 위에 석실, 봉토, 묘실 벽화라는 새로운 요소가 결합되어 다양한 양상을 띄고 등장했다가, 차츰 석실봉토분이 확대된 고구려 전 지역에서 축조되는 방향으로 확산됨으로써 고구려 후기 묘제로서 정착되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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