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평양도성시기의 왕릉
3. 평양도성시기의 왕릉
고구려는 427년 국내도성에서 평양으로 천도하였다. 평양도성기는 양원왕 8년(552)에 장안성을 축조하였고, 평원왕 28년(586)에 장안성으로 천도하였다는 기록으로 미루어볼 때 장안성 축조와 천도를 계기로 두 시기로 나눌 수 있다.
전기 평양도성기는 427년부터 586년까지로, 국내시기와 마찬가지로 왕성이 평지성과 산성의 도성체계를 갖추었을 것이다. 이 중 산성은 대성산성이었다는 점에 이견이 없다. 평지성에 대해서는 안학궁 또는 청암리토성, 또는 청암리토성에서 안학궁으로 이궁하였다는 등 여러 견해가 있는데, 북한에서는 안학궁을 평지성으로 보고 있다(한인호·리호, 1991). 후기 평양 도성은 586년부터 고구려가 멸망한 668년까지로, 평지와 산성이 결합된 장안성(평양성)이다.
대성산성과 안학궁 혹은 청암리토성이나 평양성 일대에서는 왕릉으로 비정할 만한 초대형 적석총이 확인되지 않는다. 따라서 평양 천도를 즈음하여 왕릉의 형식에도 변화가 있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고대사회에서 왕릉은 왕의 무덤일 뿐 아니라 국가를 상징하는 역할을 했을 것이므로, 통념적으로 왕릉은 당시 조성된 무덤 중 가장 높고 컸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실제 국내도성 일대에 있는 천추총이나 태왕릉, 장군총 등은 ‘왕 중의 왕’인 태왕의 무덤으로서 위용을 잘 보여주고 있다.
고구려 고분에서 왕릉임을 말해주는 고분은 “願太王陵安如山固如岳”이 찍힌 명문벽돌이 출토된 태왕릉 한 기뿐이어서 고총고분(高塚古墳)으로 불리는 높고 큰 분구를 가진 무덤 가운데 가장 월등한 무덤을 왕릉 혹은 왕릉급 무덤으로 판단하고 있다. 이를 평양 일대에 적용시켜보면 평양도성시기의 고총으로 볼 만한 무덤은 석실봉토분이다. 그중에 많은 비용이 들어간 무덤은 벽화분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사신이 그려진 석실봉토벽화분은 가장 많은 비용이 투입된 무덤일 뿐 아니라 수적으로도 희소하여 평양도성시기의 왕릉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평양도성시기의 왕릉을 비정하기 위해서 먼저 살펴보아야 하는 것은 귀장(歸葬)과 수릉(壽陵) 여부이다. 귀장은 타지에서 죽은 경우 고향에 데려와 장사를 지내고 무덤을 쓴 풍습이다. 만약 고구려에서 귀장을 했다면 427년 이후 얼마간 고구려 왕릉은 국내도성이 자리한 통구분지나 졸본에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졸본으로 비정되는 중국 요령성 환인 일대에는 고구려 왕릉으로 비정할 만한 초대형 무덤이 없다. 환인의 망강루4호분을 동명왕릉으로 비정하기도 하지만(張福有, 2005) 고고학적으로 검증된 것은 아니다. 북한에서는 안악3호분을 백제와의 전쟁에서 전사한 고국원왕의 능으로 비정하지만, 그렇게 하기에는 문헌기록의 장지명과 왕호, 국내도성 일대의 왕릉으로 비정된 초대형 적석총과의 관계 등 해결할 문제가 있다. 따라서 고국원왕도 귀장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다고 평양도성시기의 왕들을 모두 귀장했다고 볼 수는 없다. 장군총보다 늦게 조성된 초대형 적석총 중에 왕릉으로 비정할 만한 무덤이 없기 때문이다.
수릉은 왕이 즉위하면서부터 생시에 자신의 무덤을 미리 만든 것을 말한다. 『삼국사기』 기록을 볼 때, 만약 고구려에서 수릉을 했다면 동명왕과 국내 천도를 한 유리왕의 무덤은 졸본에 있어야 한다. 대무신왕부터 광개토왕의 능은 국내도성이 자리한 통구분지에 있을 것이며, 평양도성으로 천도한 장수왕릉도 통구분지에 있어야 한다.
고구려 왕릉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귀장이나 수릉을 일률적으로 적용할 수는 없지만, 귀장이나 수릉이 왕릉 비정에 중요한 이유는 국내도성이 자리한 통구분지에도 평양도성 주변과 마찬가지로 6세기대 이후의 사신도 석실봉토벽화분이 자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왕릉 비정은 문헌기록과 동 시기 백제나 중국 등의 사례를 종합하여 판단해야 하는데, 고구려에서 귀장의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고, 수릉 또한 획일적으로 적용하기도 어렵다(강현숙, 2008).
1) 왕릉급 무덤의 입지
평양도성시기의 고구려 왕은 장수왕에서 보장왕까지 9명이다. 보장왕을 제외한 8명의 왕은 귀장이나 수릉을 하지 않았다면 능은 평양도성 근처에 있을 것이다. 고대사회에서 왕릉은 왕성과 함께 국가의 권위를 드러내는 도성 경관의 중요한 요소이다. 국내도성기의 왕릉급 초대형 적석총은 국내성을 중심으로 동서 양 방향으로 5~7.5km 거리에 자리하며, 왕릉 조성에서도 시간에 따른 일정한 순서를 보여준다. 즉, 서쪽 마선구고분구역에 마선구2378호분이 조성되기 시작하여, 3세기 말이 되면 동쪽 우산하고분구역에 임강총이 조성되고, 다시 서쪽 마선구고분구역에 서대총, 천추총이 조성되고, 이어 동쪽으로 우산하고분구역에 태왕릉이 조성된다. 태왕릉에 이어 축조된 장군총은 국내성에서 가장 동쪽으로 멀리 떨어진 곳에 자리한다.
평양도성시기의 왕릉으로 비정되는 무덤은 벽화가 있거나 커다란 분구를 가진 무덤으로, 분구는 한 변 길이 20~30m 정도로 추정된다. 같은 시기 무덤에 비해 월등한 규모이지만, 국내도성시기의 왕릉급 초대형 적석총에 비하면 분구는 작아졌다. 이는 석실봉토벽화분 자체가 적석총처럼 분구 규모와 형태에 사회적 위계를 드러내는 무덤이 아니라 가시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매장부를 지향하는 무덤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묘실 벽화의 주요 제재가 생활풍속에서 사신으로 변한 것처럼 사후관념의 변화와 관련 있을 것이다.
현재 평양도성시기의 왕릉으로 추정되는 무덤으로는 경신리1호분, (전)동명왕릉, 토포리대총, 호남리사신총, 진파리1호분과 진파리4호분, 그리고 강서대묘와 강서중묘 등 8기이다. 중국에서는 통구오회분 4호분과 5호분, 사신총을 왕릉으로 비정하기도 하지만(張福有, 2005), 이 경우 귀장이 전제되어야 하므로 신중할 필요가 있다. 여하튼 이 무덤들의 입지조건은 조금씩 다르다. (전)동명왕릉은 구릉 사면에 위치하며, 진파리 1호분이나 4호분은 능역을 같이한다. 한편, 토포리대총이나 호남리사신총은 대동강변의 평탄화된 대지에 자리하며, 강서대묘와 강서중묘도 마찬가지이다. 통구 오회분 4호분이나 5호분, 통구사신총 등도 평탄화된 대지에 단독으로 또는 한 줄로 나란히 있거나 삼각상으로 자리한다. 따라서 장지 선정에서 지형조건이 먼저 고려되었다기 보다 배타적 점유가 우선되었다고 할 수 있고, 이러한 점은 국내도성시기 왕릉급 무덤과도 공통된다(그림9).

그림9 | 평양도성시기 왕릉급 무덤의 입지와 분포
평양도성시기의 왕릉으로 이견이 없는 무덤들은 대성산성 동쪽으로 광대산 일대와 대동강 이남의 진파리 일대, 그리고 평양에서 남쪽으로 내려간 강서 일대에 자리한다. 광대산 일대의 고분군에서 가장 동쪽에 자리하는 것은 호남리사신총인데, 안학궁, 대성산성에서 동쪽으로 7.5km 정도 떨어져 있다. 북쪽으로 평성시의 경신리1호분은 평양으로부터 대략 직선거리로 약 28km, 남쪽으로 진파리고분군은 대동강 너머에 자리하며, 남서쪽으로 강서대묘는 더 멀리 떨어져 있다. 국내도성과 마찬가지로 도성의 외곽에 왕릉이 자리하였다면 평양도성시기의 왕도는 국내성시기에 비해 그 범위가 더욱 확대되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2) 왕릉 비정안
평양 부근에서 왕릉으로 비정할 만한 초대형 석실기단봉토분과 석실봉토벽화분은 평성시, 평양 대성산성의 동편인 토포리, 호남리 일대, 그리고 남쪽으로 대동강 너머의 진파리 일대와 대동강 하류의 강서 일대에 자리하며, 집안 통구분지에 분포한다(그림10).
석실기단봉토분은 적석총과 마찬가지로 기단을 축조한 후 내부에 흙이나 돌을 채우고 그 위에 석실을 안치한 후 다시 흙을 덮어 분구를 형성한 것으로, 기단적석총의 기단 축조방식이 적용된 봉토분이라는 점에서 적석총과 봉토분이 결합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전)동명왕릉, 경신리1호분, 토포리대총, 호남리사신총과 통구분지의 오회분 4호분과 5호분 그리고 통구사신총 등이 이에 해당된다. 석실봉토벽화분으로는 진파리 1호분과 4호분 그리고 강서대묘와 강서중묘가 있다.

그림10 | 평양도성시기 왕릉으로 비정되는 고분 - 통구분지(강현숙, 2019)

그림10 | 평양도성시기 왕릉으로 비정되는 고분 - 평성시(강현숙, 2019)

그림10 | 평양도성시기 왕릉으로 비정되는 고분 - 광대산(강현숙, 2019)

그림10 | 평양도성시기 왕릉으로 비정되는 고분 - 진파리(강현숙, 2019)

그림10 | 평양도성시기 왕릉으로 비정되는 고분 - 강서(강현숙, 2019)
(전)동명왕릉은 고려시대 이래 동명왕릉으로 전해져오면서 조선시대 들어 전각이 세워지고 관리되어 왔다. 이 무덤은 진파리 일대 고분 조사 당시 진파리10호분으로 편호되었던 것으로, 석실은 방형 현실, 종장방형 전실, 전실 좌우의 벽감, 그리고 중앙연도로 이루어졌다. 현실은 방형 평면의 절천장 구조이고, 전실은 종장방형으로 폭은 연도와 비슷하며, 전실 좌우 벽에 작은 벽감이 있다. 이러한 구조는 마선구1호분이나 고산동7호분과 유사하며 서북한 일대 두칸구조 벽화분과는 차이가 있다. 벽화는 현실 벽과 천장에 연꽃을 그린 장식무늬벽화분이다. 부대시설은 확인되지 않았지만, 무덤의 동남쪽으로 120m 거리에서 정릉사터가 확인되었다. 정릉사는 정릉(定陵), 능사(陵寺) 등의 명문토기로 능사임이 확인되어서 (전)동명왕릉과 관련이 있는 능사 또는 사당과 불교건축이 결합된 묘사(廟寺)로 보고 있다. 무덤의 연대는 구조와 벽화 내용으로 미루어 평양 천도 직후인 5세기 중엽으로 비정된다. (전)동명왕릉의 주인공은 장수왕릉으로 보는 견해도 있지만(永島輝神眞), 다수의 견해는 동명왕릉이지만 실묘가 아니라 허묘로 보고, 고구려가 축조한 동명왕의 기념물 또는 상징물이었을 것으로 보기도 하며(전제헌, 1994; 강현숙, 2008), 장군총을 광개토왕릉으로 비정하는 견해에 따라서 평양으로 천도한 장수왕의 무덤으로 보거나(강진원, 2014; 정호섭, 2008), 문자왕의 무덤으로 보기도 한다(기경량, 2017).
경신리1호분은 평양에서 28km 떨어진 평성시에 위치한다. 마을 사람들이 한왕묘(漢王墓) 또는 황제묘(皇帝墓)로 불렀던 무덤이다(朝鮮總督府, 1914). 평양 일대에서 가장 큰 분구를 가진 무덤으로, 1978년 북한에서 전면 재조사한 결과, 벽화분임이 확인되었으나 벽화 내용은 알 수 없다. 분구는 기단봉토 분구이고, 분구 아래에서 석실 전체를 덮은 기와와 와당이 확인되었다. 석실은 장군총의 석실과 같은 방형 현실과 중앙연도로 이루어진 단칸구조이다. 석실 내에는 관상 세 기가 놓여 있고, 석실의 벽면과 관상 모두 10~15cm 정도 두께의 백회를 발랐다. 관상 위에서 관못과 칠관편이 출토되었다. 능원의 담장이나 배총 등의 부대시설은 확인되지 않았다. 무덤의 연대는 출토된 와당과 구조로 미루어 (전)동명왕릉과 비슷한 5세기 중엽 혹은 후엽으로 비정된다. 장군총을 광개토왕릉을 이장한 것으로 보거나(강경구, 1995), 장군총을 장수왕의 허묘로 보는 입장에서는 경신리1호분을 장수왕릉을 비정하며(東潮,1997), 장군총을 장수왕릉으로 보는 입장에서는 경신리1호분을 문자왕릉으로 비정한다(강진원, 2014).
토포리대총은 광대산 남쪽의 평지에 대형분들과 함께 무리지어 있다. 석실기단봉토분으로 석실은 방형 현실, 중앙연도의 단칸구조이고, 연도는 12.8m로 매우 길다. 일제강점기 조사 당시 현실 내에서 두침과 견좌가 표현된 석침과 관못, 장막걸이쇠 등의 장구와 동물다리모양의 석제상다리가 출토되었다. 이 외에도 금동제화살촉과 시유장경병과 뚜껑, 토제장경병과 채회토기뚜껑, 동물다리모양의 삼족반 등이 수습되었다. 무덤의 연대는 출토된 장경병으로 미루어 6세기 초로 비정된다. 토포리대총은 벽화가 없지만, 석실 구조가 장군총, 경신리1호분처럼 긴 연도가 있어서 사신도 벽화분보다 먼저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토포리대총의 피장자에 대해서는 문자왕으로 비정되기도 하지만, 조성 시기가 6세기 초로 비정되므로 안장왕일 가능성이 있어서 문자왕릉 또는 안장왕릉으로 비정한다(강인구, 1990; 東潮, 1997).
호남리사신총도 광대산 남쪽의 평지에 자리하는데, 대성산성으로부터 가장 동쪽에 있는 초대형분으로 석실기단봉토벽화분이다. 분구는 방형 평면이며 기단 주위에 3m 폭으로 묘역을 만들었다. 석실은 방형 현실과 중앙연도로 이루어졌고, 무덤 내부에서 금동금구 잔편과 금도금한 관못이 수습되었다. 현실은 대리석으로 쌓았으며, 대리석 벽면에 직접 사신을 그렸다. 무덤 연대는 토포리대총과 비슷하거나 조금 늦은 6세기 전반으로 비정된다. 호남리사신총은 양원왕릉(東潮, 1997) 또는 안원왕릉(강진원, 2014)로 보기도 하지만, 안원왕과 양원왕 모두 6세기 중엽에 해당되므로 왕릉으로 특정하기 어렵다.
표1 | 평양도성시기의 추정 왕릉
| 추정 왕릉 | 분구 | 매장부(m) | 부대시설 | 벽화 | 왕 (비정) | |||||
| 규모(m) | 형태 | 시설 | 위치 | 현실 | 전실 | 연도 | ||||
| (전)동명왕릉 | 22, 8.15 | 방형 | 기단 | 지상 | 4.21, 4.18, 3.88 절천장 | 3.09, 1.69, 1.87 평천장 | 4.26(4.67), 2.25(1.63), 1.32(1.42) | 분구 주위 5m 폭 묘역 | 연꽃장식 | 동명왕, 동명왕허묘, 장수왕 |
| 진파리1호분 | 30, 7 | 방형 | 지상 | 3.4, 2.5, 2.54 평행삼각고임 | 3.5, 1.5 | 사신 | 안장왕, 양원왕 | |||
| 진파리4호분 | 23, 6 | 방형 | 지상 | 3.04, 2.53 평행삼각고임 | 3.15, 1.5 | 사신 | 문자왕, 평원왕 | |||
| 경신리1호분 | 54, 12 | 방형 | 기단 | 지상 | 3.37, 3.45, 3.46 평행삼각고임 | 길이 7.4 | 분구 중 기와, 와당 | 미상 | 광개토왕(이장), 장수왕, 문자왕 | |
| 호남리사신총 | 20, 4 | 방형 | 기단 | 지상 | 3.1, 3.6, 2.9 평행삼각고임 | 2.5, 1.3, 2.5 | 분구 주위 3m 폭 묘역 | 사신 | 안원왕, 양원왕 | |
| 토포리대총 | 29.4, 7.8 | 방형 | 기단 | 지상 | 2.7, 3, 3.45 평행삼각고임 | 길이 12.8 | 분구 주위 표역 | 문자왕, 안장왕, 양원왕 | ||
| 강서대묘 | 51, 1.9 | 방형 | 반지하 | 3.15, 3.5, 4 평행삼각고임 | 3, 1.8, 1.7 | 대묘, 중묘, 소묘가 삼각형으로 배치 | 사신 | 평원왕, 영양왕 | ||
| 강서중묘 | 45.5(추정) | 방형 | 지상 3.29, 3.09, 2.55 평행삼각고임 | 3.47, 1.71~1.77, 2.04 | 평원왕, 영양왕, 영류왕, 대양왕 | |||||
| 통구사신총 | 35, 8 | 방형 | (기단) | (지상) | 3.55, 3.5, 3.3 평행삼각고임 | 2.1, 1.8, 1.8 | 주변 기와 | 사신 | 평원왕 | |
| 오회분1호분 | 30, 8 | 방형 | 미조사 | 미조사 | 주변 기와 | 미상 | 안장왕 | |||
| 오회분2호분 | 55, 15 | 방형 | 미조사 | 미조사 | 주변 기와 | 미상 | 안원왕 | |||
| 오회분3호분 | 35, 8 | 방형 | 미조사 | 미조사 | 주변 기와 | 미상 | 영양왕 | |||
| 오회분4호분 | 28, 8 | 방형 | (기단) | 3.68, 4.2, 1.92 평행삼각고임 | 1.88, 1.75, 1.75 평천장 | 주변 기와 | 사신 | 영류왕 | ||
| 오회분5호분 | 25, 5 | 방형 | (기단) | 3.56, 4.37, 3.94 평행삼각고임 | 1.93, 1.62(1.87), 2.86 평천장 | 주변 기와 | 사신 | 대양왕 | ||
강서대묘는 남쪽의 대묘를 중심으로 서북, 동북으로 세 기의 무덤이 삼각형으로 배치되어서 통상 강서삼묘로 불리는 무덤이다. 대묘와 중묘는 사신도 벽화분이며, 소묘는 벽화가 없는 무덤이다. 대묘와 중묘는 모두 잘 다듬은 석재를 이용하여 축조하였으며, 벽면에 직접 사신을 그렸다. 강서대묘는 잘 다듬은 벽면에 직접 사신을 그렸으며, 천장 막음돌에 황룡을 그렸다. 강서대묘는 사신도 벽화분 가운데 가장 발달된 것으로 보고, 다른 사신도 벽화분과의 선후관계를 고려하여 6세기 말이나 7세기 초로 비정되며, 평원왕(이병도·강진원, 2014) 또는 영양왕(강인구, 1990)의 무덤으로 비정된다. 강서중묘는 대묘에 비해 사신의 운동감이나 신비감이 줄어들었지만 강서대묘와 비슷한 시기로 비정되어서 피장자는 평원왕, 영양왕, 영류왕으로 비정된다.
통구분지의 사신도 벽화분으로 통구사신총과 오회분 4호분과 5호분이 있다. 오회분은 모두 평지에 자리하며, 서쪽에서 동쪽으로 가면서 5기가 나란히 확인되어 1호분에서 5호분으로 편호되었고, 그중 4호분과 5호분이 사신도 벽화분이다. 통구사신총은 오회분 4호분과 5호분 사이에 자리한다. 현재는 석실봉토분처럼 보이지만, 조사 당시 기단 일부가 유실되고 봉토가 기단을 덮고 있는 것이 확인되어서 원래 모습은 기단봉토분으로 추정한다. 귀장을 전제로 중국에서는 통구 오회분과 사신총을 평양도성시기의 고구려 왕릉으로 비정해서 통구 오회분1호분을 안장왕릉으로, 오회분2호분을 안원왕릉으로, 오회분3호분을 영양왕릉으로, 오회분4호분을 영류왕릉으로, 그리고 오회분5호분을 보장왕릉(대양왕릉)으로 비정하고, 통구사신총은 평원왕릉으로 비정하였다(張福有, 2005). 그러나 이러한 비정안은 귀장이 전제되어야 설명 가능한 견해로, 논증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평양 일대의 사신도 벽화분과의 관계에 대해 설득력 있는 설명이 필요하다.
이 중 그 내용이 알려진 것은 통구 오회분 4호분과 5호분, 통구사신총 정도이다. 모두 잘 다듬은 화강암을 이용하여 석실을 축조하였고, 횡장방형 현실에 중앙에서 약간 편재된 연도를 가진 단칸구조이다. 잘 다듬어진 현실 벽면에 직접 사신을 그리고 천장부에 해와 달, 별자리, 용과 인동 당초문과 연꽃 등 장식무늬, 그리고 천인과 신선을 그려 넣었다. 사신의 배경무늬로는 화염문이 배치되어 있어서 평양 일대의 사신도 벽화분과 구별된다. 연대를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대략 6세기 전반에 세 무덤이 조성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따라서 같은 시기 평양 일대 사신도 벽화분과의 관련성이 설명되어야 왕릉 비정이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평양으로 천도한 이후에도 환도산성이나 동대자유적에서 볼 수 있듯이 국내도성이 별도로서 상당한 위상을 유지했을 것이므로, 국내도성에 남아 있는 상당한 유력자의 무덤일 가능성도 생각해볼 수 있다.
이상에서 정리한 바와 같이 평양도성시기의 왕릉 비정에 여러 견해가 있는 것은 무덤의 연대를 판단할 수 있는 구체적인 자료가 확보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국내도성시기의 경우 장지와 왕호, 고분의 입지조건 등을 결합하여 왕릉을 도출하지만, 평양도성시기의 경우에는 쉽지 않다. 특히 토포리대총이나 호남리사신총이 있는 광대산 일대에는 내리1호분에서 동쪽으로 가면서 초대형 석실봉토분이 분포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평양 주변의 무덤 8~9기를 대상으로 왕릉을 비정하는 것은 신중을 기해야 한다. 이 외에도 조사하지 않은 왕릉급 무덤이 더 있고, 조사된 왕릉급 무덤에서 왕릉을 비정할 수 있는 증거는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3) 왕릉 관련 시설
능사는 무덤 제사와 불교가 결합된 것으로, 대개 무덤 가까이에 조성된다. (전)동명왕릉 앞쪽에서 조사된 정릉사가 현재 보고된 유일한 고구려의 능사인데, 발굴조사에서 정릉(定陵), 능사(陵寺) 등 명문이 있는 토기편이 확인되어 정릉사로 불린다(그림11).
정릉사는 1탑3금당식의 가람 배치를 하고 있으며, 탑은 8각의 다층탑으로, 현재 7층 석탑을 중심으로 가람의 일부가 재현되어 있다. 정릉사는 국내성시기에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와당이 출토되지 않는 점으로 미루어볼 때, 평양 천도 이후 (전)동명왕릉 조성 이후에 조성되었을 것이다. 능사로서 정릉사는 왕들의 명복을 빌던 원찰이면서 왕릉을 관리, 보호하는 기능을 함께하였을 것이다.
평양도성시기의 왕릉으로 비정되는 무덤들에서는 국내도성시기 초대형 적석총에서 보이는 여러 구조물은 확인되지 않는다.
배장묘와 관련하여 북한에서는 (전)동명왕릉 배후에 일렬로 있는 석실봉토분(동명왕릉 4호분, 5호분, 6호분)을 주몽과 함께 남하한 인물들이 배장된 것으로 설명하였다. 만약 이 무덤들을 배장묘라고 한다면 국내 도성의 능원 내 초대형 적석총 주위에 있는 배장묘의 성격과는 다를 것이다.

그림11 | (전)동명왕릉 능각과 정릉사 복원도
- * 능각의 수치는 발굴조사된 내용을 근거로 북한의 복원도를 수정·보완하였음.
- * 능각의 수치는 발굴조사된 내용을 근거로 북한의 복원도를 수정·보완하였음.
기단봉토분인 (전)동명왕릉의 경우 북한에서는 능각을 그림으로 복원한 바 있다(그림11). 도상 복원된 전각은 능각이라기보다는 분구를 보호하는 상징적 구조물로서, 모든 기단봉토분에 이러한 구조물이 있었다고 할 수 없다. 기와가 출토된 기단봉토분인 경신리1호분은 석실을 기와로 한 겹 덮고 그 위에 분구를 쌓은 것으로, 묘상 건축물과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전)동명왕릉의 능각은 방수와 방습 등으로부터 무덤을 보호하기 위한 기능적 역할뿐 아니라 가시적 상징물로 기능하였을 것이며, 무덤 제사와 관련된 능각은 아닐 것이다.
한편, 토포리대총, 호남리사신총 외에도 통구분지의 오회분 주위에서도 기와가 출토되었다고 한다. 대개 서남쪽에서 기와가 주로 확인되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능묘와 관련된 건물지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