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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통사

1. 기원

1. 기원

중국은 동아시아에서 가장 다양한 장르의 장의미술(葬儀美術)을 발전시키며 그로 말미암은 결과물을 이웃 사회에 전했다. 그러나 중국에서 시작된 장의미술의 어떤 장르가 어느 지역에 언제, 어떻게 영향을 주었는지는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다르다. 중국의 한(漢) 왕조에서 크게 유행한 화상석은 남북조시대 이후에도 띄엄띄엄 만들어졌지만, 동아시아의 다른 사회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동아시아의 다른 지역이나 사회에는 이런 장르가 뿌리내릴 수 있는 사회적 수요도 없었을뿐더러 전문 제작집단도 존재하지 않았다. 더욱이 화상석의 중심 주제였던 승선신앙(昇仙信仰)이 수용되지 않은 상태에서 굳이 과도한 비용이 소요될 이유도 없었다.
화상석과 달리 고분벽화는 중국에서 동아시아의 다른 지역으로 전해져 장기간 유행한 대표적인 장의미술 장르이다. 고분벽화는 동북아시아와 중국의 서북 경계지역에 수용된 뒤 지역에 따라 독자적인 발전이 이루어졌다. 물론 벽화 제작에 능한 화공이 무덤칸 내부를 장식해야 했으므로 고분벽화는 고구려와 같은 특정한 국가에서는 크게 유행했지만, 이외의 동북아시아 국가들에서는 적극적으로 제작되지 않았다. 고분벽화는 동북아시아의 고구려와 백제를 매개로 일본열도에도 전해졌다. 7세기 말 일본 기내(畿內) 지역에서 제작된 2기의 고분벽화는 제재 구성과 표현 면에서 고구려와 백제 장의미술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중국 남북조시대의 석각선화(石刻線畵) 및 석굴사원 장식에 적용된 제재와 기법 일부는 한 세기 동안 동아시아 여러 나라가 공유하는 문화 요소가 되었다. 중국 남북조의 미술은 7세기 중엽을 경계로 동아시아의 새로운 중심으로 떠오른 당(唐)의 문화가 범(汎)동아시아 문화의 호수 역할을 하도록 그 바탕을 마련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고구려는 중국에서 펼쳐지던 문화·예술의 흐름에 비교적 민감하고 적극적인 반응을 보인 나라이다. 그러나 고구려가 외래문화요소를 수용하고 소화하는 방식은 선택적이며 제한적이었다. 일단 새로운 문화 요소가 받아들여졌다 하더라도 ‘고구려화’라는 나름의 원칙에 바탕을 둔 재해석과 소화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고구려 사회에 뿌리내리지 못했다. 고분벽화는 고구려에 성공적으로 뿌리를 내린 외래문화요소 가운데 하나이다.
3세기부터 5세기 초에 이르는 고구려의 초기 고분벽화에는 중국의 화상석이나 고분벽화에서 자주 발견되는 제재가 보인다. 초기 고분벽화가 고구려의 변경이던 요동과 평양 일원에서 출현하였음을 고려하면 이는 당연한 현상이다(전호태, 2002; 강현숙, 2005; 박아림, 2015). 고구려는 고분벽화라는 새로운 장의미술을 받아들이는 단계부터 제재를 적극적으로 취사선택했다(전호태, 1999).
고구려의 초기 고분벽화에는 중국 한대의 화상석뿐 아니라 중국 위·진시대 요양지역 고분벽화에서도 주요한 제재이던 연음백희(宴飮百戲) 장면이 생략되거나 간략하게 처리되었다. 이와 대조적으로 무덤 주인의 위세를 보여주는 행렬도는 빈번히 그려졌다. 중국 서북지역에서 유행한 화상전에서는 평범하고 일반적인 제재인 사냥도가 고구려 고분벽화에서는 중요한 제재의 하나로 취급된 것도 고구려식 취사선택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초기의 고구려 벽화고분은 새로운 장의미술의 도입단계라는 사실을 반영하는 듯 정형화된 구조를 지니고 있지 않다. 안악3호분이나 요동성총과 같이 요양 위·진 벽화고분과의 친연성을 드러내는 회랑(回廊)이나 다관실(多棺室) 설치 사례도 볼 수 있고(강현숙, 2005; 전호태, 2007), 태성리2호분에서 볼 수 있듯이 널방 좌우에 벽화와 직접적 관계가 없는 감(龕)이 달린 것도 있다. 무덤칸 천장고임의 구조도 다양한 편이다. 삼각고임, 궁륭식, 꺾음식, 평행고임 및 둘 이상의 고임방식이 혼합된 유형이 모두 나타난다.
중기인 5세기 중엽에 제작된 고분벽화의 주제는 생활풍속, 장식무늬, 사신(四神)이 여러 방식으로 어우러진 사례가 많다(전호태, 2004). 무덤구조도 다양하며, 천장고임도 복합적이다. 통구12호분은 한 봉분 안에 사아궁륭식 천장고임이 있는 북분, 평행고임으로 마무리된 남분이 공존한다. 천왕지신총은 좌우로 긴 앞방의 천장 3칸이 각각 평행고임, 꺾음식, 삼각고임으로 처리되고, 널방 천장은 4각고임 및 8각고임으로 마무리된 특이한 사례이다. 대안리1호분은 앞방을 삼각고임 및 평천장으로, 널방을 8각고임으로 처리하였다. 연화총은 앞방에 평행고임, 널방에 평행삼각고임을 올렸으며 앞방에 4개의 감이 달렸다.
후기 벽화고분으로 이행하는 5세기 말부터 6세기 초 사이, 고구려에서는 널길이 널방 입구 가운데에 설치되고, 널방이 정방형을 띠는 등의 특징을 지니는 전형적인 외방무덤이 축조되었다. 무덤칸 천장고임도 정형화하여 널방 천장은 평행삼각고임이나 삼각고임으로 마무리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돌방무덤이 주류인 벽화고분의 축조방식은 시기와 규모에 따라 변화를 보인다. 대형 돌방무덤일 경우, 봉분 주변에 강돌을 까는 등의 방식으로 묘역을 구분할 수 있게 하였다. 봉분은 대개 방대형으로 고구려의 전통적인 돌무덤 축조방식의 연장선에서 이해할 수 있는 형태를 보인다. 돌방 위에 흙으로 봉분을 쌓으면서 흙에 회를 섞거나, 흙무지 안에 석회 덩어리를 넣기도 하였는데, 이는 봉분의 형태 유지에도 도움을 주고 무덤칸 안의 벽화 보존에도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李鐘祥, 2003; 전호태, 2004). 흙무지에 자갈을 섞고, 흙무지 위에 자갈과 기와를 덮는 것은 흙무지를 보호하는 동시에 습기와 빗물이 가능한 한 적게 무덤칸 안으로 흘러들게 하려는 조치이다. 무덤칸 외부를 크고 작은 돌을 섞어 덮은 뒤 진흙에 회와 숯을 섞어 다지며 덮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이다.
벽화고분 무덤칸의 벽과 천장부는 초기와 중기에는 벽돌 정도 크기의 돌을 쌓아올린 다음 회죽으로 돌 틈을 메우고 다듬는 방식으로 처리하였다. 후기의 대형 돌방무덤에서는 잘 다듬은 커다란 석회암이나 화강암 판석을 축조재료로 사용하였다. 무덤칸의 바닥은 흙과 숯, 강돌, 모래, 회 등으로 두텁게 덮고 다졌다. 바닥에는 무덤 안으로 흘러든 빗물 등을 배수하기 위한 시설도 마련하였다.
널방에는 1~3개 정도의 돌로 만든 관대를 놓았으며, 중기까지는 관대에도 회를 발랐다(전호태, 2000). 무덤칸 내부의 장치로 관대 외에 돌로 제상(祭床)을 만들어 놓기도 했다. 집안 만보정1368호분과 같이 널방의 한 벽에는 돌관대를 놓고 다른 벽에는 돌아궁이를 설치한 뒤 그 위에 백회를 바른 사례도 있다. 무덤칸의 입구에는 외짝이나 두 짝으로 된 돌문을 달았다. 무덤으로 들어서는 널길 입구는 보통 회와 막돌을 섞어 다지면서 쌓아 막았다. 태성리3호분에서 보듯이 회와 막돌로 통로를 막고 그 안쪽을 두꺼운 화강암 판석으로 막은 사례도 있다(전호태, 2020).
벽화를 그리는 방법에는 벽이나 천장 면에 별다른 물질을 덧입히지 않은 채, 그 면에 직접 그림을 그리는 조벽지법(粗壁地法)과 회를 고르게 입혀 잘 다듬어낸 면을 화면으로 사용하는 화장지법(化粧地法)이 적용되었다(安秉燦, 2003; 전호태, 2004; 남북역사학자협의회·국립문화재연구소, 2007). 화장지법은 화면에 입힌 회가 마르기 전에 그림을 그리는 습지벽화법(濕地壁畵法)과 회가 마른 뒤 화면에 그림을 그리는 건지벽화법(乾地壁畵法)으로 나눌 수 있다.
건지벽화법에 의한 벽화는 선명도가 매우 높으나 빛과 공기에 장기 노출되거나 습기의 침투를 계속 받으면 안료의 특정 성분이 산화되어 변색되고, 채색층이 백회에서 분리되는 탈색이 빨라질 수 있다. 이와 달리 습지벽화법에 의한 벽화는 그림의 선명도가 떨어질 수는 있으나, 안료가 백회에 스며들므로 안료의 산화와 퇴색이 덜하다. 이런 까닭에 오랜 시일이 흘러도 처음의 명도와 채도가 유지될 수 있다. 초기와 중기의 고구려 고분벽화는 대부분 습지벽화법으로 그려졌다. 장천1호분 벽화처럼 습지벽화법과 건지벽화법이 모두 적용된 사례도 있다(전호태, 2016a).
화장지법 벽화는 보존상 온도와 습도의 변화에 약하다. 고분벽화에서는 이러한 약점이 더 뚜렷이 드러난다. 초기와 중기 벽화고분 상당수가 벽화가 그려진 백회층이 무덤칸 바닥에 떨어졌거나, 떨어져 나간 상태로 발견된 것은 벽화가 무덤칸 벽이나 천장 면에 덧입힌 백회층 위에 그려진 까닭이다. 사계절의 교차가 뚜렷하고, 계절별 일교차의 폭이 큰 만주와 한반도 일대의 기후환경이 벽화가 그려진 백회층을 벽면과 천장에 붙어 있지 못하게 만든 것이다.
본래 무덤의 천장 중심부와 바닥 면에 가까운 벽면 하부는 계절교차, 일교차에 따른 결로(結露)로 말미암아 다른 부분보다 벽화층이 약해져 일찍 벗겨져 나갈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도굴 과정에서 무덤칸에 구멍이 뚫린 뒤 그대로 방치된다면 무덤칸 안으로 토사가 흘러들고 외부 공기의 출입이 이루어져 무덤 안 벽화의 보존환경은 급격히 나빠진다. 시간이 흐르면 벽화층이 퇴색되고 벗겨져 나갈 수밖에 없다. 만약 무덤칸의 벽과 천장에서 벽화층이 전부 떨어져 나간 다음 발굴조사 과정에서 바닥의 벽화 조각들이 발견되거나, 수습되지 못한다면 그 무덤이 원래 벽화분이었더라도 무(無)벽화분으로 인식될 수도 있다(리창언, 1988; 전호태, 2004).
고구려의 후기 고분벽화는 대부분 석면을 잘 다듬은 뒤 그 위에 직접 그림을 그리는 조벽지법으로 그려졌다. 조벽지법으로 벽화를 제작할 때에는 목필(木筆)이나 죽필(竹筆)에 접착제가 거의 혼합되지 않은 무기질의 비수용성(非水溶性) 안료를 묻혀 석면에 찍어누르다시피 그림을 그리게 된다. 이 때문에 안료는 요철(凹凸)이 있는 석질의 입자 사이에 박히다시피 하므로 채색층과 바탕층은 사실상 일체가 된다. 이런 화면 위에 얇은 석회 피막층이 형성되면 벽화의 보존성은 극히 높아지게 된다. 실제 조벽지법 벽화는 보존환경이 나빠지더라도 오랜 기간 원래의 모습을 잃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집안 국내성 오회분4호묘와 오회분5호묘의 사례처럼 무덤의 입구를 수시로 열어 외부의 공기가 무덤칸 안으로 쉽게 드나들 수 있게 하고, 사람의 출입을 자유롭게 해 무덤칸 내부가 사람이 내뿜는 이산화탄소에 무방비상태로 장시간 노출되면 채색안료의 산화와 퇴색, 안료에 대한 생물학적 침투가 빠른 속도로 이루어질 수 있다. 실제 집안 오회분4호묘와 오회분5호묘 벽화는 비교적 짧은 시간 안에 거의 완전히 퇴색되어 원래의 벽화 상태를 알 수 없게 되었다.
고분벽화를 그릴 때는 습지벽화법의 경우 점성이 높은 붉은 점토가 주성분인 소석회 반죽을 얇게 발라 초벌층을 이루게 한다. 다시 그 위에 볏짚이나 갈대류를 잘게 썰어 넣고 모래를 더하여 반죽한 회를 두어 차례 두껍게 발라 재벌층을 만든다. 마지막으로 순도가 매우 높은 소석회를 묽게 반죽하여 얇게 덧입힌다.
이렇게 만들어진 바탕층에 미리 준비된 모본(模本)을 덧대고 묵이나 목탄, 먹바늘 등으로 밑그림을 그린다(安秉燦, 2003; 전호태, 2012). 그런 다음 채색이 이루어진다. 혹, 밑그림이 어설프거나 벽화 제재를 바꾸게 될 때는 화면에 얇게 회칠을 한 번 더한 다음 밑그림을 새로 그렸다.
습지벽화법이 적용된 사례는 아니나 안악3호분의 무덤주인은 얼굴 세부가 세 번 이상 고쳐 그려졌다(그림2). 이로 말미암아 무덤주인의 눈과 눈썹 사이는 처음보다 크게 벌어졌고, 눈과 눈 사이도 넓어졌다. 이런 수정작업을 통해 안악3호분의 무덤주인은 당시 동아시아에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던 관후인자(寬厚仁慈)한 느낌을 주는 얼굴상에 가까워졌다(전호태, 2004). 안악3호분 벽화를 자세히 살펴보면 여주인과 시녀들이 입은 옷깃의 위치도 몇 차례씩 고쳐졌음을 알 수 있다. 안악3호분 벽화는 밑그림의 수정이 벽화 제작 과정에서 수시로 이루어졌음을 알려주는 좋은 사례이다.
그림2 | 안악3호분 앞방 서쪽 곁방 서벽 벽화 - 무덤주인
습지벽화법으로 제작된 집안의 환문총은 벽화의 주제가 완전히 바뀐 경우이다(그림3). 춤추는 사람들을 비롯한 생활풍속의 제재로 장식되었던 무덤 안의 벽화가 어떤 이유에서인지 동심원문 위주의 장식무늬 벽화로 완전히 바뀌었다. 무덤주인과 그의 일족의 내세관이 커다란 변화를 겪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생생한 사례에 해당한다(金元龍, 1980; 전호태, 2014).
그림3 | 환문총 널방 벽화 - 무용수
벽화 채색에 사용하는 안료는 송연(松煙)먹, 석청(石淸), 석록(石綠), 석황(石黃), 자황(雌黃), 백록(白綠), 주사(朱砂), 자토(紫土), 금(金), 연분(鉛粉)과 같은 광물질 가루를, 투명성이 높고 점액성이 낮아 수화성(水化性)이 높은 까닭에 높은 습도를 견뎌낼 수 있는 해초를 달여 만든 태교(苔膠)나 동물성 아교(阿膠)에 개어 썼다. 색채는 갈색(褐色)조를 바탕으로 흑색, 황색, 자색, 청색, 녹색 등을 자주 썼다. 무덤의 내부를 화려하면서도 부드럽고 차분한 분위기의 공간으로 만들기 위해서이다. 갈색은 벽사(辟邪)와 재생을 상징한다는 점에서 장의의 기본 목적에 잘 부합하는 색깔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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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원 자료번호 : gt.d_0008_0050_0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