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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통사

2. 시기별 변화양상

2. 시기별 변화양상

1) 초기 고분벽화
현재까지 발견된 고구려 고분벽화는 3세기 초부터 7세기 전반에 걸쳐 제작된 것이다(전호태, 2004). 이 가운데 3세기 초부터 5세기 초까지 제작된 고분벽화가 초기 작품으로 분류된다. 초기 고분벽화는 대부분 벽과 천장에 석회를 바르고 그 위에 그림을 그린 것이다. 석회 채색층은 오랜 기간 심한 온습도 변화를 겪으면 벽과 천장에서 떨어져 나오기 쉽다. 이런 까닭에 초기 고분벽화는 온전한 것이 드물다.
초기 고분벽화 가운데 발견 당시 보존상태가 매우 좋았던 안악3호분이나 덕흥리벽화분은 북한의 문화재 관리 당국이 벽화 보존에 상당한 주의를 기울였음에도 조사 뒤 10년 이상이 지나자 채색층에 곰팡이가 피고, 벽화층이 벗겨져 일어나거나 조각조각 떨어져 내리는 현상이 나타났다. 벽화가 보존되는 데에 적합한 환경이 조성되지 못했던 까닭이다.
초기 고분벽화의 대표적 주제는 생활풍속이다(전호태, 2012). 평양 지역 생활풍속계 외방무덤 가운데 태성리2호분, 장산동1호분, 장산동2호분, 안악 지역 외방무덤계열 생활풍속계 벽화고분 가운데 봉성리1호분, 안악1호분, 복사리벽화분은 초기 벽화고분이다. 두방무덤 가운데 동암리벽화분, 덕흥리벽화분의 벽화는 생활풍속이 주제이다. 안악 지역의 여러 방무덤 가운데 초기 벽화고분을 대표하는 유적은 357년 축조된 안악3호분이다.
생활풍속계 고분벽화에는 무덤주인 부부, 행렬, 사냥, 가무(歌舞), 연회(宴會) 장면이 주로 그려졌다. 그러나 생활풍속을 주제로 한 고분벽화라 하더라도 지역에 따라 제재 구성방식이 다르다. 수렵도는 어느 지역 고분벽화에서나 쉽게 확인된다. 그러나 행렬도는 평양 지역 고분벽화에서는 주요한 제재로 자주 등장하지만, 집안 국내성 지역에서는 삼실총 벽화 정도 외에는 제재로 선택된 사례를 찾아보기 어렵다.
생활풍속계 고분벽화는 문화권이나 지역에 따라 제재를 표현하는 방식에서도 차이를 보인다. 생활풍속계 벽화의 공통된 주요 제재인 무덤주인 부부도 평양 지역에서는 신상(神像)처럼 그려지는 게 일반적이지만, 집안 국내성 지역에서는 일상생활 속의 인물로 묘사된다. 제재 구성과 표현에서 확인되는 이와 같은 공통점과 차이점은 고분벽화 제작 과정에 지역에 한정되지 않는 보편적인 관념, 지역에 따라 다른 문화전통이 동시에 작용했기 때문일 것이다.
생활풍속계 고분벽화는 현세와 내세를 관습과 질서가 크게 다르지 않은 세계로 여기는 계세적 내세관을 전제로 구성되고 표현되었다고 할 수 있다(전호태, 1989). 이런 까닭에 생활풍속이 벽화 주제인 고분의 내부는 현실세계의 질서와 가치, 관계와 관념을 다시 담아내는 장소이자, 이전보다 나아진 삶의 조건을 보여주는 공간이다.
357년이라는 기년명(紀年銘)이 있는 안악3호분 벽화는 생활풍속을 주제로 한 초기 고분벽화를 대표하는 작품이다(전호태, 2016a). 안악3호분은 묵서명(墨書銘)의 주인공인 전연(前燕) 망명객 동수(佟壽)가 실제 피장자(被葬者)인지, 묵서명의 동수는 호위무관에 불과한지, 피장자가 고구려의 왕이라면 미천왕인지, 고국원왕인지로 논란이 있는 벽화고분이다(전호태, 2004; 정호섭, 2008; 정호섭, 2010).
안악3호분은 널길칸, 앞방과 좌우 곁방, 널방, ‘ㄱ’자 회랑으로 이루어진 여러 칸무덤으로 천장은 삼각고임이며 무덤 방향은 남향이다. 널길칸 벽에서 앞방의 입구인 남벽의 좌우벽에 걸쳐 의장대와 고취악대가 그려졌고, 앞방 동벽에 수박희(手撲戱), 앞방 서벽에 호위문무신(護衛文武臣)과 7행 68자의 묵서명이 남아 있다(그림4). 서쪽 곁방 서벽에는 무덤주인과 신하들이, 북벽에는 무덤주인의 부인과 시녀들이, 동쪽 곁방의 각 벽에는 방앗간, 용두레 우물, 마구간, 외양간, 차고, 고기창고, 부엌 등이 그려졌다. 널방 서벽에는 무악(舞樂) 장면이 묘사되었다. 널방 천정에는 연꽃이 그려졌으며, 널방을 둘러싼 동쪽과 북쪽 회랑에는 250명 이상의 인물이 등장하는 대규모 출행도(出行圖)가 표현되었다. 각각의 벽화 속 인물과 시설 옆에는 설명 형식의 묵서(墨書)가 쓰여 있다. 무덤칸 구조와 벽화 배치방식을 함께 고려하면 안악3호분은 4세기 고구려 대귀족의 저택을 무덤 속에 재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림4 | 안악3호분 앞방 서벽 벽화 - 묵서묘지명
안악3호분 벽화에 적용된 회화기법은 앞방 서쪽 곁방의 무덤주인 부부 그림과 회랑의 대행렬도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회랑의 대행렬도는 행렬 일부만 그린 것이어서 생략된 후열(後列)까지 고려하면 행렬 전체는 500여 명에 이르는 대규모였을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황욱, 1958). 회랑 행렬도에서 특히 눈에 들어오는 부분은 행렬의 인물을 겹쳐 그려 화면에 공간감을 주려 했다는 사실이다. 대상을 겹쳐 그려 공간적 깊이를 드러내는 기법은 고대 회화에서는 상당히 높은 수준의 표현기법이다.
벽화 속 인물들의 얼굴은 대부분 4분의 3 측면관으로 자세나 복장은 다르나 표정은 거의 같다. 대상의 개성 표현은 회화기법의 발전 외에 대상에 대한 인식과도 관련이 깊다(전호태, 2004). 개인을 부족이나 씨족의 구성원으로서가 아니라 가문을 대표하는 존재로, 혹은 독립적인 인물로 인식하고 있음은 남북국시대 후기의 기록에서 비로소 확인된다(盧泰敦, 1981). 따라서 비교적 세련된 표현기법에도 불구하고 안악3호분 벽화의 인물들이 몰개성적으로 그려진 것은 표현 대상을 여전히 집단의 구성원으로만 인식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서쪽 곁방의 무덤주인과 부인은 각기 양 귀퉁이와 한가운데의 꼭대기가 연봉오리와 반쯤 핀 연꽃으로 장식된 탑개(榻蓋) 안에 앉아 있다(그림5). 정좌한 무덤주인을 중심으로 좌우의 인물들은 지위와 거리에 따라 점차 작아져 화면 전체가 삼각형의 구도를 이룬다. 무덤주인의 옷 주름은 태서법(泰西法)이나 요철법(凹凸法)에 비견될 기법으로 표현되었다(安輝濬, 1988). 등장인물들의 얼굴은 행렬도에서처럼 몰개성적이다.
그림5 | 안악3호분 앞방 서쪽 곁방 서벽 벽화 - 무덤주인과 신하
안악3호분 벽화의 무덤주인의 모습은 중국 서진대(西晉代)의 작품인 요양(遼陽) 상왕가촌묘(上王家村墓) 우이실(右耳室) 정면 벽 무덤주인과 매우 닮았다(東潮, 1993; 강현숙, 2005). 안악3호분의 무덤주인이 상왕가촌묘 무덤주인보다 세련되고 정리된 필치로 표현되었으며, 복식으로 보아도 위계가 더 높은 것으로 추정되는 점이 다를 뿐이다. 무덤칸 구조 및 벽화 구성상 안악3호분이 상왕가촌묘가 대표하는 요양 고분벽화의 한 흐름을 잇고 있다는 점은 확실하다(전호태, 2016a). 구도 및 표현기법으로 보아 상왕가촌묘 벽화 무덤주인이 후한시기의 작품인 하북(河北) 안평(安平) 녹가장전실묘(碌家莊塼室墓) 벽화의 무덤주인 초상을 모델로 삼은 것으로 보인다는 사실까지 함께 고려하면, 안악3호분 벽화의 구성과 표현은 후한시대 이후 하북, 요양으로 이어지는 벽화 전통을 계승하여 발전시킨 결과라는 해석도 가능해진다.
408년 기년명이 있는 덕흥리벽화분은 묵서명에 의해 확인된 피장자인 진(鎭)이 선비족 모용씨가 세운 연(燕) 출신 망명객으로 실제 유주자사를 역임한 인물인지, 아니면 고구려인으로 광개토왕대 유주 경략과 관계 있는 인물인지로 논쟁이 있는 유적이다(孔錫龜, 1990; 정호섭, 2011). 덕흥리벽화분은 널길, 앞방과 이음길, 널방으로 이루어진 두방무덤으로 천장고임은 궁륭식이며 무덤 방향은 남향이다. 무덤칸 벽과 천장고임 하단에 목조가옥의 골조를 그려 넣은 다음, 그 안에 생활풍속의 각 장면을 묘사했다.
널길 벽에는 괴물수문장, 연꽃 및 인물을, 앞방 벽에는 무덤주인 출행도, 13군태수배례도(十三郡太守拜禮圖), 무덤주인의 막부업무도(幕府業務圖) 등을 그렸다. 앞방의 천장고임에는 해와 달, 60여 개의 별자리, 상상 속의 존재들과 사냥 장면 등을 배치하였다. 이음길 입구와 닿는 앞방 북벽 상단에는 묵서로 묘지명을 써넣었다. 이음길 벽에는 무덤주인의 부인이 나들이하는 장면을 묘사하였다. 널방 벽에는 연못과 무덤주인의 칠보공양행사(七寶供養行事), 마사희(馬射戱), 우교차(牛轎車), 무덤주인의 정면 좌상, 마구간, 외양간, 누각, 고상창고(高床倉庫)와 같은 가내시설을 표현하였다. 널방 천장고임에는 활짝 핀 연꽃과 구름을 그렸다. 덕흥리벽화분 벽과 천장고임에 그려진 인물과 시설, 행사 장면 옆에는 설명 형식의 묵서가 쓰여 있다.
덕흥리벽화분 벽화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무덤주인 초상의 표현과 위치, 다양한 벽화 제재의 표현 기법과 양식, 묘지명의 내용이다(전호태, 2016a). 먼저 무덤주인 초상의 표현과 그 위치에 대해 살펴보자. 두방무덤인 덕흥리벽화분 무덤주인의 초상은 곁방이 아닌 앞방 북벽과 널방 북벽에 묘사하였다. 무덤주인을 앞방 안벽인 북벽에 묘사한 것은 곁방의 소멸이라는 무덤구조의 변화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무덤주인을 널방 북벽에도 그린 것은 새로운 방식이다.
중국의 한·위·진대 고분에서 무덤 앞방의 오른쪽 곁방, 곧 서쪽 곁방은 혼전(魂殿)으로 여겨졌다(土居淑子, 1986). 벽화고분의 서쪽 곁방에 무덤주인이 그려진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런데 덕흥리벽화분에서는 무덤 앞방에 곁방이 마련되지 않고, 무덤주인의 초상도 앞방 안벽인 북벽으로 옮겨졌다(그림6). 앞방 안벽인 북벽의 무덤주인 초상 앞에 상석(床石)이 놓인 것으로 보아 무덤 안의 혼전에 대한 개념은 여전히 남아 있다. 그러나 널방 북벽에도 무덤주인 초상이 표현된 데에서 알 수 있듯이 전통적인 혼전 인식과 표현에는 혼란이 왔다. 혼전에 대한 관념을 담은 널방 북벽 무덤주인 초상 표현의 전통은 쌍영총, 약수리벽화분, 수렵총으로 이어져 내려간다.
그림6 | 덕흥리벽화분 앞방 북벽 벽화 - 무덤주인
안악3호분 벽화의 무덤주인 그림에 적용되었던 삼각형 구도는 덕흥리벽화분 벽화에서는 약화된다. 하지만 신분과 지위에 따른 비례적 인물 표현방식은 바뀌지 않고 오히려 강화되는 듯이 보인다. 신분과 지위의 차이를 인물의 크기로 나타내는 회화기법은 당시에는 상식이었다. 하지만 덕흥리벽화분의 무덤주인과 시종 표현에서 이러한 기법이 과장되게 적용된 것은 유주자사를 지냈다는 주인의 지위를 강조하려는 의도 때문인 듯하다.
덕흥리벽화분 앞방 서벽의 13군태수배례도에 보이는 인물 표현은 여전히 몰개성적이다(그림7). 표현 기법과 수준은 오히려 앞 시기보다 낮아진 듯 보이기도 한다. 거칠고 뻣뻣한 필선(筆線)으로 묘사된 인물과 동물의 움직임은 어색해 보이며, 옆으로 길게 펼쳐진 인물들은 이들이 자리한 곳의 공간적 깊이를 느끼기 어렵게 한다.
그림7 | 덕흥리벽화분 앞방 서벽 벽화 - 13군태수(일부)
그러나 이런 변화는 안악3호분 벽화로 대표되는 4세기 중엽의 회화 기법 및 경향에서 탈피하려는 노력의 결과이자, 5세기 고구려식 회화의 성립을 위한 움직임의 한 과정일 수도 있다. 안악3호분 벽화보다 고구려적 분위기를 많이 띤 덕흥리벽화분 벽화 등장인물의 얼굴과 복식이 이와 같은 해석의 타당성을 어느 정도 뒷받침한다. 볼과 턱이 풍만한 안악3호분 벽화 여주인과 시녀들이 걸친 통옷 계통의 복식과 달리 덕흥리벽화분 벽화 시녀들의 얼굴은 갸름하며, 속바지 위에 걸친 주름치마는 전형적인 고구려 복식이다(전호태, 2016b).
널길 벽에서부터 나타나는 연꽃, 널방의 연못 및 칠보공양도, 묘지명의 “釋迦文佛弟子”라는 구절로 보아 덕흥리벽화분의 무덤주인은 생시에 각종 공양을 통해 정토왕생(淨土往生)을 기원하던 독실한 불교신자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묘지명 후반의 “孔子擇日 武王選時 … 周公相地” 등의 문구로 볼 때, 중국의 전통적인 장의관(葬儀觀)도 아울러 지닌 인물이었다(全虎兌, 1993). 이처럼 덕흥리벽화분의 구조, 벽화 속 묘사대상의 표현 내용, 방식, 기법 등은 안악3호분과 구별되며, 요양 상왕가촌묘의 그것과는 현격한 차이를 보인다. 벽화의 표현기법은 후퇴하는 기미를 보이고, 무덤구조와 벽화 속 인물의 복식 등은 고구려적 분위기가 뚜렷하다. 이는 안악3호분의 축조와 벽화 제작 이후 반세기 동안 진행된 ‘고구려화’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덕흥리벽화분 벽화에서 외래 장의미술의 소화 단계를 넘어선 새로운 고구려식 회화양식을 읽어내기는 어렵다. 두 갈래 이상의 내세관이 정리되지 못한 상태로 뭉뚱그려 담긴 무덤주인의 묘지명에서 잘 드러나듯이, 5세기 초의 고구려 사회는 새롭게 접하거나 영역화한 다양한 사회와 문화를 수용하거나 소화하는 단계에 머물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全虎兌, 1998).
중국 집안과 환인 지역 초기 벽화고분으로는 만보정1368호분과 각저총 정도를 들 수 있다. 두 벽화고분 가운데 초기의 회화적 특성을 파악하기에 적절한 유적은 5세기 초로 편년되는 각저총이다. 집안의 우산(禹山) 남쪽 기슭에 무용총과 나란히 축조된 각저총은 퇴화형 앞방, 정방형에 가까운 널방을 지닌 두방무덤으로 앞방 천장고임은 궁륭식, 널방 천장고임은 변형팔각고임이며 무덤 방향은 서남향이다.
각저총 벽화에서 주목되는 것은 개별 제재의 표현기법, 배치방식 및 화면구성이다(全虎兌 1996; 전호태 2014a). 무덤 안의 벽과 천장고임을 독립 화면으로 나누는 목조건축의 골조 그림, 널방 각 벽의 그림을 주제별로 나누어 보게 하는 커다란 나무, 매부리코의 서역계 인물과 고구려인의 씨름 장면, 두 부인을 거느린 무덤주인, 널방 천장고임을 장식한 넝쿨무늬와 해, 달, 별자리 등에서 이런 부분을 확인할 수 있다.
각저총 무덤칸 안의 벽 모서리, 벽과 천장고임이 맞닿는 곳에 그려진 기둥과 들보는 안악3호분에서 공간을 나누는 역할을 맡았던 돌기둥과 고임돌을 대신하는 제재이다. 덕흥리벽화분에서 실물이 그림으로 대치되는 데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기둥과 들보’는 생활풍속이 주제인 초기 고분벽화에 거의 빠짐없이 등장하는 제재이다.
각저총 벽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볼에 군살이 없고 얼굴선이 깔끔하게 내려오는 고구려인 특유의 길고 갸름한 얼굴을 지녔다. 이목구비 표현에도 변화가 있어 인물의 개성과 나이의 차이도 느낄 수 있다. 408년 묘지명이 있는 덕흥리벽화분 벽화의 인물을 그린 화공보다 각저총 벽화의 인물을 그린 화공이 표현 기량에서 뚜렷이 앞선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각저총 무덤칸 벽면 나무들은 가지는 자색(赭色)으로, 잎은 연녹색으로 채색되었다. ‘X’자로 교차하며 얽힌 가지, 버섯의 갓처럼 덩어리진 잎 등은 집안 일대에서 생장하는 나무 가운데 5월경 가지 끝에서 잎이 덩어리지듯이 돋는 가래나무의 모습과도 닮았다. 중국 한대 화상석 표현에서 유래한 수목 표현기법이 위·진시기 요양을 거쳐 고구려에 전해지고, 집안 국내성 지역 가래나무 가지와 잎이 5월이 되면 어떤 모습을 보여주는지 잘 알고 있던 고구려 화공이 나름의 방식으로 이 둘을 아우른 각저총 벽화의 나무 표현을 창안해냈을 수 있다. 각저총 벽화의 나무는 요양에서 집안으로 이어지는 벽화 수용과 소화의 경로가 있었다는 해석을 가능케 한다.
각저총 벽화의 씨름 장면도 눈길을 끄는 벽화 제재 가운데 하나이다(그림8). 고구려에서 유행한 힘겨루기 기술 가운데 씨름으로 불리는 장면은 집안의 각저총과 장천1호분 벽화에, 수박희(手搏戱)로 칭하는 격투기 장면은 평양권의 안악3호분 벽화와 집안권의 무용총 벽화에서 각각 볼 수 있다. 각저총 벽화에서 씨름에 열중하는 두 역사 가운데 한 사람은 보통의 고구려인이나, 다른 한 사람은 눈이 크고 코가 높은 서역계 인물이다(임영애, 1998). 안악3호분 앞방 남벽의 수박희 장면에 등장하는 두 남자, 무용총의 널방 천장고임에 그려진 수박희 중인 두 남자도 한 사람은 전형적인 고구려인이고 다른 한 사람은 서역계 인물이다.
그림8 | 각저총 널방 동남벽 벽화 모사도 - 씨름
전통적으로 동아시아에서는 서역계 인물이 ‘힘’의 상징으로 여겨졌던 점, 내륙아시아의 여러 민족에게 장례 때에 씨름을 행하는 풍습이 있었다는 민족지 자료, 『일본서기』의 백제사절 씨름기사가 장의행사의 하나로 이해되고 있는 점 등을 함께 고려하면, 고구려 고분벽화에 표현된 씨름, 수박희 등은 일상생활 장면의 표현이라는 측면 외에도 장의행사의 하나로 행해졌을 가능성도 검토할 수 있다(齊藤忠, 1979; 寒川恒夫, 1993).
널방 안벽인 동북벽의 무덤주인 부부 가내생활도에서 무덤주인은 다리가 높은 탁자에 정면을 향해 앉았으며 배 앞에 두 손을 모아 왼손으로 오른 팔목을 잡았다(그림 9). 무덤주인보다 작게 그려진 두 부인은 바닥에 놓인 깔개 위에 앉았는데, 머리에는 두건을 썼고 주름치마 위에 깃이 달린 긴 치마를 입었다.
그림9 | 각저총 널방 동북벽 벽화 모사도 - 무덤주인 부부
각저총 벽화에서 무덤주인 부부가 널방에만 표현되는 것은 무덤구조의 변화 및 그 변화에 깔린 인식의 문제와 관련이 있다. 화면 속의 무덤주인 부부는 장방 안에서 시종들의 시중을 받으며 여유 있는 한때를 보내고 있는데, 이런 식의 표현은 같은 시기 평양 지역 생활풍속계 고분벽화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각저총 벽화는 무덤 안의 혼전에 대한 인식과 표현이 5세기 초의 집안에서는 사실상 소멸단계에 들어갔음을 알게 한다.
널방 씨름 장면에 등장하는 커다란 자색 나무의 가지 사이에는 여러 마리의 검은 새가 그려졌고, 나무 밑동에는 곰과 호랑이가 표현되었다. 각저총 벽화의 나무들이 하늘과 땅을 잇는 우주목이자 화면을 나누는 경계목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나무 밑동의 곰과 호랑이는 하늘 기둥의 역할을 하는 거대한 나무에 의지하여 지상세계 생명의 소망을 하늘세계에 전하려는 존재이며, 검은 새는 이들의 꿈을 듣고 하늘세계에 전하려는 전령인지도 모른다(전호태, 2014a). 이러한 점에서 각저총 벽화의 곰과 호랑이는 고조선의 건국신화인 단군신화를 연상시키는 존재이다.
각저총 벽화에서 나뭇가지의 새는 각기 다른 자세를 취하고 있으며, 사람처럼 나무에 기대어 엉거주춤 선 듯한 자세의 곰과 호랑이의 얼굴에는 표정이 있다. 벽화에서 이들은 씨름 등의 다른 제재와 어울려 한 편의 풍속화를 연출한다. 이런 까닭에 각저총 벽화 널방 화면 구성에서 요양 위·진 고분벽화의 화면을 떠올리기는 어렵다. 5세기 전반에 고구려에서는 고분벽화의 독자적 화면 구성이 이루어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집안의 초기 고분벽화를 대표한다고 볼 수 있는 각저총 벽화는 집안을 중심으로 성립한 고구려 사회의 전통신앙과 이에 근거한 재래의 계세적 내세관이 생활풍속계 고분벽화의 제재 선택과 구성에 큰 영향을 끼쳤음을 확인시켜 준다(전호태, 2000). 이러한 사실은 성스러운 나무에 대한 신앙, 개와 같은 영혼 인도 동물에 대한 관념의 표현이 각저총 벽화 구성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데에서 잘 드러난다. 성스러운 나무 및 영혼 인도 동물은 현세 삶과 차별성을 지니지 않는 내세 삶의 성격과 관련 있는 존재이다.
각저총 벽화에 채택된 개별 제재의 표현양식은 중국의 한에서 삼국·위·진에 걸쳐 산동(山東) → 하북(河北) → 요양(遼陽)으로 이어지는 장의미술양식의 전파 과정과 맥락이 닿는다(전호태, 2007). 고분벽화가 고구려의 바깥에서 시작되어 고구려 사회에 받아들여진 장의미술의 한 장르라는 사실을 고려하면 이해할 수 있는 현상이자 과정이다.
 
2) 중기 고분벽화
중기 고분벽화는 초기 작품보다 주제가 다양하다. 중기 고분벽화에서는 생활상을 재현한 것 외에 상징성이 높은 장식무늬를 주제로 한 것, 천문신앙을 바탕으로 성립한 사신(四神)을 주제로 삼은 것이 모두 발견된다. 중기에는 세 종류의 큰 주제가 비중을 달리하며 서로 섞인 상태의 고분벽화도 다수 확인된다.
중기 고분벽화에는 생활풍속, 장식무늬, 사신을 중심 주제로 삼는 경우도 발견되고, 여러 주제를 다양한 비중으로 혼합한 사례도 확인된다. 장식무늬 고분벽화는 5세기 중엽에 많이 제작되는데, 대부분 연꽃을 소재로 삼은 것이다. 환인 미창구장군묘나 평양 전동명왕릉은 무덤 내부가 연꽃무늬와 몇 가지 장식무늬로만 장식된 벽화고분이다. 순수 장식무늬 벽화고분은 고구려에서만 특이하게 나타나는 현상이다(전호태, 2012).
무용총 벽화는 집안문화권 중기 고분벽화의 흐름을 읽기에 좋은 길잡이가 될 수 있다. 두방무덤인 무용총은 널방 벽의 가무배송도(歌舞徘送圖), 사냥도, 묘주접객도(墓主接客圖), 천장고임의 수박희 장면과 사신(四神), 선인들과 상금서수(祥禽瑞獸), 하늘로 떠오르는 연꽃과 연봉오리, 해, 달 및 별자리로 가득한 하늘세계 그림으로 잘 알려진 유적이다. 무용총 벽화에서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널방 천장고임에 연꽃 등 불교와 관련한 장식무늬와 선계(仙界)의 존재인 선인 및 상금서수가 함께 표현된다는 사실이다. 계세적 내세관의 초점이 계세(繼世)에서 승선(昇仙)으로 옮겨가는 것과 관련되어 나타나는 현상으로 해석 가능한 부분이다(全虎兌, 1997).
무용총 벽화는 5세기 중엽에 이르면 고구려 회화가 독자적인 화면구성이 가능한 수준에 이르렀음을 잘 보여준다. 무용총 널방 동남벽의 가무배송도는 말을 타고 나가는 무덤주인과 시동, 무덤주인을 배웅하는 무용수들과 합창대로 이루어졌다(그림10). 무용수 가운데 다섯 사람은 비스듬한 선을 이루는 세 사람과 수평으로 나란히 선 두 사람으로 나눌 수 있다. 앞의 세 사람 가운데 두 번째, 세 번째 사람의 두루마기 빛깔을 다르게 표현하고, 네 번째와 다섯 번째 사람의 저고리와 바지의 색을 서로 엇바뀌게 그려 춤출 때의 역동성과 조화로운 느낌을 고려하였음을 알게 한다. 아랫줄의 합창대로 추정되는 일곱 사람 가운데 세 번째 사람은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고 있다. 이는 화면에 변화와 생동감을 부여하려는 화가의 의도 때문으로 그에 상응하는 적절한 효과를 자아낸다. 무용수들은 한결같이 두 팔을 ‘一’자로 펴면서 뒤로 젖힌 듯한 자세이다. 하지만 화면상으로는 두 팔이 한쪽 겨드랑이에서 돋아난 듯이 표현되었다. 화공이 제재의 배치와 구성, 배색 등에서는 충분한 효과를 거두게 그렸지만, 특수한 표현에서는 어려움을 느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全虎兌, 1998).
그림10 | 무용총 널방 동남벽 벽화 모사도 - 가무
무용총 널방 서북벽의 사냥 장면도 고구려 나름의 회화적 성취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이다. 화공은 힘 있고 간결한 필치로 사냥꾼과 짐승들 사이에 쫓고 쫓기는 관계를 현장감 있게 잘 나타냈다(그림11). 놀라 달아나는 호랑이와 사슴, 말을 질주시키며 활시위를 당기는 기마 사냥꾼의 역동적인 자세는 물결무늬 띠가 겹을 이룬 산줄기에 의해 한층 속도감과 긴장감을 부여받는다(전호태, 2019b). 사람과 짐승의 자세와 동작은 비교적 정확하면서도 세련되게 표현되었지만, 산줄기는 공간감이 부족하고 산봉우리의 나무는 고사리순 같은 느낌을 주는 등 어설프게 묘사되었다.
그림11 | 무용총 널방 서북벽 벽화 모사도 - 사냥
가까운 산은 흰색, 그 뒤의 산은 붉은색, 먼 산은 노란색을 바탕색으로 삼은 것은 보는 사람에게서 멀어짐에 따라 백(白)-적(赤)-황(黃)의 차례로 채색하는 고대 설채법(設彩法)의 원리에 따른 것이다(安輝濬, 1980). 화면구성, 배색효과 등 구성적 측면에서는 향상되고, 제재의 형태, 자세의 묘사와 같은 기법적 측면에서는 한계를 드러내는 5세기 중엽 집안 국내성 지역 고구려 화공의 표현기량이 이 그림에서도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널방 동북벽의 무덤주인과 승려 두 사람의 대화 장면에서 눈길이 가는 것은 무덤주인이 더는 신상(神像)처럼 정좌하지 않고 특정한 장면의 등장인물로 묘사된다는 사실이다(전호태, 2004c). 이와 같은 구성과 표현으로 말미암아 각저총 벽화에도 흔적을 남기고 있던 무덤 안의 혼전에 대한 인식을 무용총 벽화에서는 느끼기 어렵다. 무용총 벽화의 이 장면은 내세관을 둘러싼 새로운 인식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무용총 널방 천장고임의 사신(四神)은 집안문화권 국내성 지역 생활풍속계 고분벽화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사례에 해당한다. 벽화의 청룡과 백호는 각종 동물의 특징이 어색하게 배합된 모습이며, 주작 자리에는 한 쌍의 닭이 등장하였다. 주작이 봉황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나타났고 봉황의 형상에 대한 인식이 금계신앙(金鷄信仰)과 닿아 있음을 고려하면, 벽화의 닭은 주작을 나타낸 것으로 보아야 한다(全虎兌, 1993).
5세기 중엽 집안문화권에서는 장식무늬, 특히 연꽃무늬가 주제인 고분벽화가 크게 유행한다. 이는 국내성(國內城)이 왕도(王都)인 상태에서 불교가 공인되고, 왕명으로 불교신앙이 장려된 것과 관련이 깊다. 집안의 연꽃 장식 고분벽화의 세계는 죽은 이의 정토왕생 소망과 관련이 깊다(全虎兌, 1990; 전호태, 2000b). 연꽃무늬를 주제로 한 고분벽화는 같은 시기 중국 남북조에서 만들어진 벽화고분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것으로 고구려 독자의 창안이다.
5세기 중엽 집안문화권 벽화예술의 흐름을 보여주는 다른 벽화고분으로는 삼실총(三室塚)과 장천1호분을 들 수 있다. 세 개의 널방이 ‘ㄷ’자형으로 이어진 삼실총의 제1널방 벽은 생활풍속, 천장고임은 쌍(雙)사신과 별자리로 장식되었고, 제2널방과 제3널방 벽은 역사(力士), 천장고임은 쌍사신과 연꽃, 연화화생(蓮花化生), 선인, 해, 달, 별자리 등으로 채워졌다. 삼실총 벽화에서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제2널방과 제3널방벽에 가득 차게 그려진 역사들이다.
제2널방 서남벽 외의 세 벽에 그려진 역사들은 두 다리는 기마자세를 취하고 두 팔로 천장고임 아래쪽을 받쳐 든 모습이다(그림12). 각 벽의 역사는 눈이 크고 코가 뚜렷하며, 날씬한 허리를 지녔다. 붉은빛 얼굴의 서북벽과 동북벽 역사의 두 다리에는 각기 뱀이 한 마리씩 감겼으며 온몸에서는 상서로운 기운이 뻗어 나온다. 제3널방 서남벽 역사는 뱀이 감긴 오른팔로 천장고임 아래쪽을 받치고, 왼팔로 기둥을 밀어내는 자세이다(그림13). 위와 옆에서 가해지는 무게와 압박을 두 팔로 강하게 버티고 있음을 나타내려는 듯 눈은 부릅뜨고 이를 악물었다.
그림12 | 삼실총 제2널방 벽화 모사도 - 우주역사
그림13 | 삼실총 제3널방 벽화 모사도 - 역사
크고 둥근 눈, 오뚝한 코, 짙은 구레나룻 등 삼실총 벽화의 역사들은 이목구비에서 서아시아 및 중앙아시아 지역 사람들의 인종적 특징을 드러낸다(전호태, 2016a). 두 소매 끝의 연꽃잎무늬, 두 다리를 감은 뱀에서 불교 및 토속신앙과 관련한 인도 및 서아시아 종교문화의 흐름이 느껴진다. 장천1호분 앞방 천장고임 네 모서리 각 삼각석 측면에도 삼실총 벽화의 역사와 같은 인물들이 묘사되었다. 5세기 중엽 고구려에 전해져 받아들여지는 서역계 문화, 불교와 함께 흘러든 서아시아적 관념과 회화기법, 이로 말미암은 고구려 사회의 변화를 읽게 한다(全虎兌, 1993).
장천1호분은 전형적인 두방무덤이다. 앞방 서벽 좌우에 문지기 장수, 남벽에 가무진찬(歌舞進饌), 북벽에 백희기악(百戱伎樂)과 사냥, 동벽 좌우에 문지기, 앞방 천장고임에 사신(四神), 전투, 보살, 여래(如來)와 예불공양(禮佛供養) 중인 귀족 남녀, 비천(飛天)과 기악천(伎樂天), 연꽃과 연화화생을 그렸고, 이음길 좌우 남벽과 북벽에 시녀, 널방 벽과 천장고임에 연꽃, 천정석에 해와 달, 북두칠성 등을 묘사하였다.
장천1호분 벽화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실물 크기로 그려진 인물들이다. 앞방 동벽 좌우에 그려진 실물 크기의 문지기 두 사람은 얼굴뿐 아니라 자세에서도 개성을 드러내어 더 눈길을 끈다. 군살이 없는 둥근 얼굴, 부드러운 눈매, 두 손을 가슴 앞에서 모아 쥔 공손한 자세로 말미암아 문인(文人)을 연상시키는 동벽 북쪽의 인물과 달리 남쪽의 인물은 길고 각진 얼굴, 날카로운 눈매, 두 손을 배 앞에 대고 상대를 위압하려는 듯한 자세가 무인(武人) 기질을 느끼게 한다(전호태, 2016a). 각저총과 무용총 벽화에서 싹튼 인물의 개성 표현이 5세기 중엽을 전후하여 인물을 실물 크기로 묘사하는 변화를 동반하면서 더 구체적으로 되고 있다.
고분벽화 인물 묘사에서의 이런 변화는 구성원의 개성을 인정하고 수용하는 새로운 사회현상과 관련 있다(全虎兌, 1998). 사회구성원 각인의 개성을 인정한다는 것은 신분과 지위로 인간을 차별하던 고대적 사고와는 어긋난다. 회화에서 인물의 개성 표현은 이런 점에서 사회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장천1호분 벽화에서 주목되는 것은 대상에 부여한 비중에 따라 크기를 조절하는 위계적 표현도 정도가 현저히 누그러진다는 사실이다. 예불공양, 백희기악, 가무진찬 등의 장면에 등장하는 사람과 동물 사이에는 특별한 의미가 부여된 흰말 외에 표현비례의 차이가 그리 엄격하게 적용되지 않았다. 무덤주인을 기준으로 했을 때, 표현비례의 차가 최대 1:16에 이르렀던 각저총과 무용총 널방 동북벽 벽화의 등장인물 표현과 대조적이다(전호태, 2000a).
인물의 개성이 구체적으로 표현되고, 대상 비중에 따른 표현이 지양되는 새로운 흐름과 관련하여 하나 더 검토할 것은 널방 안벽인 동벽에 무덤주인이 묘사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평양권 고분벽화에서 5세기 후반에도 여전히 무덤주인의 정면상이 제재로 선택되는 현상을 고려하면, 집안에서 나타나는 이 새로운 흐름은 그 사회·문화적 의미와 관련하여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장천1호분 벽화에 무덤주인의 초상이 그려지지 않은 것은 사람이 죽으면 조상신이 된다는 기존의 인식이 윤회적 전생(轉生)이나, 정토왕생을 상정하는 불교적 내세관으로 대체되면서 일어난 현상으로 이해될 수 있다(全虎兌, 1990; 전호태, 2000b). 무덤의 널방을 연꽃으로만 장식한 사례가 같은 시기 중국의 고분벽화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점까지 염두에 둔다면, 무덤주인 초상의 소멸이라는 이 새로운 현상은 고분벽화라는 장의미술의 고구려적인 소화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장천1호분 벽화에서 더 주목할 부분은 외래문화요소의 고구려적 소화 및 재창조 와중에도 외부로부터의 새로운 자극에 민감했고, 필요에 따라 수시로 이를 받아들였음을 알게 한다는 사실이다. 장천1호분 앞방 천장고임의 예불공양도, 보살도, 비천도 등은 이전의 고분벽화에서는 나타나지 않던 새로운 제재이다. 여래와 보살의 얼굴, 복장 등은 5세기까지 중앙아시아에서 제작되었던 석굴사원 벽화의 영향을 고려하게 한다. 앞방 천장고임 4/5층의 정면에서 내려오는 비천(飛天)을 나타내는 데에 적용된 단축법(短縮法)은 다른 벽화에는 보이지 않는 기법으로 중앙아시아에서의 영향을 고려하게 하는 사례이다(전호태, 2016b).
새로운 제재, 양식, 기법이 수용되면서 기존의 관념과 새로운 양식 및 기법 사이에 발생하는 모순과 맞닥뜨린 화공의 고뇌를 읽게 하는 표현도 찾아볼 수 있다. 앞방 천장고임 2/3층의 남녀 공양자가 행하는 오체투지(五體投地) 예불 장면이 그 사례이다. 화공은 엎드리면서 가려진 남녀 공양자의 얼굴을 드러내야 한다는 강박감 때문에, 어떤 방향의 시점에서도 표현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공양자의 얼굴을 90도 돌려놓고 그렸다. 새로운 양식이나 기법을 수용하여 소화하기가 쉽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하는 단적인 사례이다.
장천1호분 앞방 북벽의 백희기악도에서는 어느 정도 적용된 대상 비중에 따른 위계적 표현이 천장고임에 등장하는 여래와 공양자들, 비천과 기악천에는 적용되지 않았다. 중국의 북조 석굴사원 벽화에 보이는 비천들과 구별되는 안악2호분 벽화의 아름다운 비천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 알려주는 그림이 장천1호분 벽화에 보인다.
장천1호분 앞방 천장고임과 널방 천장고임에 그려진 남녀쌍인 연화화생은 고구려 나름의 방식으로 소화된 외래종교 관념의 구체적 표현이다(그림14). 불교에서 연화화생이란 업(業)과 인연(因緣)의 매듭을 풀지 못하고 전생(轉生)을 거듭할 수밖에 없는 중생이 윤회(輪回)의 수레바퀴에서 벗어나 불교의 이상세계인 정토(淨土)에서 태어나는 방식이다(전호태, 2000b). 하늘연꽃이라는 이상적인 매개체를 통한 정토에서의 새 삶은 모든 불교도의 꿈이었으므로 연화화생 표현은 인도로부터 동아시아로의 불교 전파경로에 있는 여러 불교유적에서 발견된다.
그림14 | 연화화생 - 1. 성총
그림14 | 연화화생 - 2. 삼실총
그림14 | 연화화생 - 3. 천수국수장
그림14 | 연화화생 - 4. 장천1호분
고구려 고분벽화에서도 연화화생과 관련된 표현은 비교적 자주 발견된다. 집안의 삼실총, 오회분5호묘, 오회분4호묘, 평양의 성총(星塚), 진파리1호분, 진파리4호분, 강서대묘 등에서 연화화생이 완성된 모습, 연화화생의 각 과정을 담은 장면을 볼 수 있다. 일본의 천수국수장(天壽國繡帳)은 제작 과정에 고려화사(高麗畵師)가 참여했음이 기록되어 고구려 회화의 일본 전파를 알려주는 작품이다(안휘준, 2000), 여기에 묘사된 연화화생은 고구려 고분벽화의 화생 표현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들 벽화와 장식무늬에서 연꽃은 예외 없이 한 생명이나 어떤 특수한 물체를 탄생시킨다. 이와 달리 장천1호분 벽화에서 연꽃은 두 생명, 곧 어린 남녀를 한꺼번에 정토에 왕생시킨다. 여성의 깨달음에 회의적이던 고대 불교세계의 관념과 거리가 느껴질 뿐 아니라, 모든 인연에서 자유로워야 하는 정토 삶의 원리에도 맞지 않는 표현이 장천1호분 벽화에 남아 있다. 이 장면은 이혼을 터부시하고 부부합장의 전통을 강하게 유지하던 고구려적인 사고와 관습이 불교 특유의 논리와 관념을 넘어선 결과로 해석할 수 있다.
장천1호분 널방 벽과 천장고임을 장식한 연꽃은 5세기 중엽을 전후하여 고구려 사회를 풍미하던 불교신앙, 이로 말미암은 불교적 내세관의 유행을 실감케 하는 사례이다(전호태, 2000). 집안 국내성 지역의 중기 벽화고분 가운데에는 통구12호분 벽화와 같이 줄기와 잎, 꽃봉오리까지 모두 표현된 연(蓮)이 널방의 천장고임을 장식하는 사례가 있는가 하면, 활짝 핀 연꽃으로 널방 벽 전체를 가득 채우다시피 한 환인 미창구장군묘 벽화와 같은 사례도 있다.
5세기 중엽부터 평양문화권 고분벽화에서는 생활풍속과 사신이 함께 등장하는 새로운 흐름이 나타난다. 초기에는 사신이 무덤칸 천장고임에 하늘의 별자리와 함께 그리 크지 않은 비중으로 그려지다가 일정한 시간이 흐른 다음에는 생활풍속 장면과 함께 벽에 묘사된다. 이후 시간이 흐름에 따라 사신은 벽면에 가득 차게 표현된다. 이런 변화에 맞추어 생활풍속 그림이 벽화에서 지니는 비중은 점차 낮아진다.
외방무덤인 안악2호분은 중기 벽화고분 가운데 재령강 유역의 안악 지역을 대표하는 유적이다. 5세기 후반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안악2호분 벽화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널방 벽에 그려진 비천, 벽 모서리와 상부에 묘사된 기둥과 도리, 천장고임을 가득 메운 화려하고 세련된 장식무늬이다. 무덤칸의 장식 기둥과 도리, 벽에 그려진 비천 및 공양자(供養者) 행렬은 무덤칸 내부가 불교사원인 것처럼 느끼게 만든다.
약간은 어색하고 긴장된 필선으로 그려진 까닭에 화면에 붙잡혀 있는 듯이 느껴지기도 하는 장천1호분 벽화의 비천들과 달리 안악2호분 널방 동벽의 두 비천은 부드러움을 몸과 표정에 담고 있다. 잘생긴 고구려 미소년을 연상시키는 얼굴에 입을 살짝 벌려 미소 지으며 팔을 조금 들어 올린 채 왼손의 엄지와 검지로 오른손에 받쳐 든 연화반의 연꽃잎을 집어내는 비천의 자태는 우아하고 자연스럽다. 5세기 집안 고분벽화에 보이는 인물의 사실적 표현이 안악 지역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갔음을 알 수 있다(전호태, 2016a).
안악2호분 널방의 벽 모서리와 벽 상부를 장식한 기둥과 도리는 크기가 과장되었고 무늬가 화려하다. 변형구름무늬, 넝쿨무늬, 연꽃무늬, 보륜무늬, 기하학적 도형무늬로 채워진 기둥과 도리, 들보는 무덤주인 부부의 내세 삶이 펼쳐지는 별세계의 배경장치처럼 느껴진다(그림15). 현세 삶을 재현하기 위해 생활풍속이 그려지던 시기에는 볼 수 없던 현상이다. 비천과 공양자, 천장고임을 가득 메운 연꽃무늬에서 잘 드러나듯이 무덤칸 벽화와 관련된 이들의 관심은 불교에서 말하는 내세 정토로 옮겨지고 있으며, 그 과도기적인 정황이 장식무늬로 가득한 기둥과 도리로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그림15 | 안악2호분 널방 동벽 벽화 모사선화 - 비천과 공양자
5세기 말로 편년 가능한 쌍영총(雙楹塚)은 벽화의 사신 비중이 높아지면서 생활풍속의 후퇴가 뚜렷이 진행되던 시기의 유적이다(전호태, 2016a). 널길 좌우 동벽과 서벽에 행렬, 앞방 남벽 좌우에 문지기 장수, 앞방 동벽과 서벽에 청룡(靑龍)과 백호(白虎), 북벽 좌우에 문지기를 그렸다. 앞방과 널방 사이에 세워진 두 8각 돌기둥에는 용을 묘사했으며, 널방 남벽 위 소슬 사이에 암수 주작(朱雀) 한 쌍, 동벽 위에 귀부인 공양행렬, 북벽에 무덤주인 부부의 정좌상과 쌍현무(雙玄武)를 나타냈다.
쌍영총 벽화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인물과 사신, 연꽃의 배치와 묘사이다. 쌍영총 널길 벽과 널방 동벽에는 깔끔하고 세련된 필선으로 묘사된 갸름한 달걀꼴 얼굴의 인물들이 배치되었다(그림16). 남자들은 머리에 고구려 특유의 모자인 절풍(折風)을 썼고, 선(襈)을 덧댄 왼쪽 여밈저고리에 통 넓은 바지를 입었다. 여자는 선을 덧댄 저고리에 주름치마를 입었다(전호태, 2016b). 모두 전형적인 고구려인의 모습 그대로이다. 5세기 후반으로 편년되는 수산리벽화분이나 팔청리벽화분 벽화에서도 이런 모습의 인물들을 볼 수 있는데, 인물에 따라 표정에 변화를 주어 개성을 드러내려 한 화공의 의지가 읽힌다. 쌍영총 등의 벽화에서 고구려식 인물표현의 전형이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그림16 | 쌍영총 널방 동벽 벽화 모사도 - 공양행렬
그런데 널길과 앞방 벽의 인물들과 달리 쌍영총의 널방 안벽의 무덤주인 부부는 개성 없는 신상형(神像形) 인물로 그려졌다(그림17). 표정이 풍부한 인물을 그릴 수 있음에도 화공이 무덤주인 부부를 신상 모습의 정좌상으로 묘사한 이유는 무엇일까? 고구려 사회에 풍미하던 불교의 전생적 내세관 및 정토왕생신앙의 영향으로 현세 재현 중심의 계세적 내세관이 후퇴하는 와중에도 형식적으로나마 무덤칸 안에 무덤주인 부부를 그려 넣게 된 때문일까? 무덤주인 부부는 이전처럼 내세에 조상신과 비슷한 존재로 다시 태어난다고 믿었던 까닭이 아닐까?
그림17 | 쌍영총 널방 북벽 벽화 모사도 - 무덤주인 부부와 쌍현무
쌍영총 벽화에는 인물의 위계적 표현은 이전보다는 약화하였으나, 상당히 뚜렷하게 반영되었다. 쌍영총보다 이른 시기의 작품으로 여겨지는 수산리벽화분 인물행렬에서도 위계적 표현이 확인된다. 이로 보아 평양권에서는 인간을 신분과 지위에 따라 차등적으로 인식하고 묘사하는 관습이 5세기 후반에도 상당히 강하게 유지되고 있었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쌍영총 앞방과 널방 천정석에는 활짝 핀 연꽃이 그려졌다. 불교 승려가 이끄는 귀부인의 공양행렬이 시사하듯이 이 연꽃들은 무덤주인이 불교에서 말하는 이상세계에서의 삶, 곧 정토왕생을 간절히 소망했음을 알려준다. 5세기 말로 편년되는 덕화리1호분 널방 천정석 연꽃이 천제를 상징할 가능성이 큰 것과 달리 쌍영총 천정석의 연꽃은 같은 시기 중국 석굴사원 천장부에 표현된 연꽃이나 안악2호분 널방 천정석 연꽃처럼 여래의 깨달음, 혹은 불교의 이상세계를 나타낸다.
쌍영총 벽화의 활짝 핀 연꽃은 5세기 집안권과 평양권으로 나뉘어 지역적 특성을 뚜렷이 드러내며 표현되던 서로 다른 연꽃양식의 혼합형이다(전호태, 1990; 전호태, 2016a). 쌍영총 널길 벽화의 기마인물이 덕흥리벽화분 사냥도의 기마인물과 무용총 벽화 사냥도의 기마인물이 보여주는 지역적 특색을 뭉뚱그려 담아내는 것과 비슷하다.
쌍영총 벽화의 두 연꽃은 427년의 평양 천도 이후, 새로운 왕도인 평양을 중심으로 추진되던 남북 문화의 통합 노력이 일정한 성과를 거둔 증거라는 해석도 가능하게 한다. 귀부인 공양행렬의 일부 인물이 고구려 특유의 점무늬 바지와 저고리 차림인 것도 이와 관련하여 주목된다. 점무늬 바지와 저고리는 5세기 전반까지 집안 고분벽화 인물도에 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널방 천장 삼각고임 밑면에 묘사된 해 안의 세발까마귀와 달 속의 두꺼비 역시 집안의 각저총과 무용총 벽화에서 확인되는 세발까마귀 및 두꺼비의 표현방식에 세련미와 운동감을 더해 고구려적인 맛을 강하게 드러낸다는 점에서 고구려 남북 미술양식의 통합 과정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全虎兌, 1992).
이런 사실을 염두에 두면 쌍영총 벽화는 안악3호분 이래 진행되어온 고분벽화라는 외래 장의미술의 소화가 일정한 성과에 다다른 결과물이자, 집안권과 평양권이라는 고구려 남북 문화권 통합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쌍영총 벽화는 문화사적으로도 상당히 의미 있는 고분벽화인 셈이다.
이상에서 잘 드러났듯이 평양권 중기 고분벽화에서는 생활풍속이 벽화 제재 구성에서 일정한 비중을 지닌다. 같은 시기 집안의 고분벽화가 연꽃장식무늬 위주로 제재가 단일화된 것과는 사뭇 대조적이다. 사신이 지니는 벽화 제재로서의 비중이 집안 고분벽화들보다 빨리 높아지는 점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사실 평양권 고분벽화에서는 초기부터 존재를 드러내는 몇몇 제재 가운데 하나가 사신이다.
중기 평양권 고분벽화에서 연꽃이 중심제재로 등장하는 사례가 빈번하게 보이지 않는 것은 평양의 문화적 전통에서 그 원인을 찾아볼 필요가 있다. 중국 한에 의해 옛 고조선의 중심지에 낙랑군이 설치된 이래, 평양 일대는 일종의 국제문화지대가 되었다. 한의 외군(外郡)으로서 낙랑(樂浪)의 지위는 오래 유지되지 못하였지만, 중국 왕조들과 직접, 간접적으로 연결된 세력이 낙랑의 지배층에 영향력을 행사하였던 까닭에 중국문화의 중개지로서의 낙랑의 기능은 고구려의 평양 경영 이후에도 어떤 의미에서는 상당 기간 유지되었다(全虎兌, 1997). 고분벽화 역시 평양이 지니고 있던 이와 같은 독특한 지위, 기능, 역할을 기반으로 하여 고구려에 수용된 새로운 장의미술 장르 가운데 하나였다고 해야 할 것이다.
불교적 관념과 관련이 깊은 것으로 여겨지는 연꽃이 평양 지역 고분벽화에서는 중국에서 발달한 천제(天帝) 관념과 연결된 상징으로 나타나는 사례가 있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전호태, 2000b). 평양 지역의 고분벽화에서 연꽃은 불교적 깨달음의 세계, 정토나 여래의 상징이기도 하지만, 천제에 대한 인식의 표현으로도 쓰였다. 사신과 신선신앙, 별자리신앙 관련된 제재, 생활풍속계열 제재가 평양 지역 고분벽화에서는 복합적으로 나타나고, 집안 고분벽화와 달리 제재 구성이 한쪽으로 치우치거나 극적인 변화를 보이는 사례가 상대적으로 적은 것도 평양문화의 복합적인 성격과 관련하여 이해해야 할 것이다.
제재 구성의 변화양상을 포함한 고분벽화 전개에서의 전체적인 흐름은 집안 국내성 지역과 평양이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특정한 시기나 지역별 분류를 바탕으로 구성내용을 분석하면 평양과 집안의 문화적 차이는 뚜렷하다. 평양 중기 고분벽화에서 생활풍속계 제재는 마지막까지 일정한 비중을 유지한다.
안악2호분, 쌍영총 외에 평양권 중기 벽화고분으로 주목되는 유적은, 널방 벽은 사방연속무늬 안의 연꽃으로 장식되었으면서도 천장고임이 천왕(天王), 지신(地神), 천추(千秋), 만세(萬歲) 등으로 장식된 천왕지신총, 벽면 전각도 위 목조가옥 골조 그림 사이로 커다란 연봉오리들이 배치된 용강대묘, 기둥 그림을 대신하여 역사(力士)가 그려진 대안리1호분 등이 있다. 천왕지신총 벽화에 등장하는 사람 머리의 새 천추는 안악1호분, 덕흥리벽화분, 무용총 벽화에도 보이는 것으로 하늘세계로 날아오르고자 하는 소망, 장생불사를 이룰 수 있게 한다는 선계로의 승선(昇仙) 관념을 잘 드러내는 존재이다(정재서, 2010).
 
3) 후기 고분벽화
후기 고분벽화는 6세기 초부터 7세기 전반 사이에 제작된다(전호태, 2004). 후기 고분벽화의 무덤양식은 매우 단순하다. 외방의 돌방무덤으로 사실상 통일되기 때문이다. 벽화 주제도 사신으로 한정된다. 사신 가운데 동쪽의 수호신 청룡, 서쪽의 수호신 백호는 주로 사악한 기운을 물리치는 역할을 하는 신수이다. 이와 달리 남쪽의 수호신 주작과 북쪽의 수호신 현무는 음양의 조화를 이루어 우주적 질서가 회복되게 하는 존재이다. 주작이 암수 한 쌍으로 표현되고 현무가 뱀과 거북이 얽힌 모습으로 묘사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후기 고분벽화의 무덤구조는 외방의 돌방무덤으로 단순하지만, 잘 다듬은 커다란 판석을 축조재료로 사용한 대형 무덤이 대부분이다. 대형 무덤은 큰 비용과 인력이 동원되어야 축조될 수 있다. 후기 벽화고분의 무덤주인이 왕이나 왕족임을 짐작하게 하는 부분이다. 후기 벽화고분의 벽화가 석회를 바르지 않은 돌벽 위에 직접 그려진 것도 이전보다 높은 수준에 이른 아교 배합기술 및 고급 안료 덕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외부문화요소를 나름의 구성과 양식으로 재창조하던 고구려에 새로운 자극을 준 것은 6세기 전후 중국을 풍미하던 남북조 양식이다(이태호, 2003; 전호태, 2004; 김진순, 2009; 정병모, 2013). 중국 남북조 미술양식의 영향은 6세기 전반에 제작되는 평양의 진파리1호분과 진파리4호분 벽화에 반영되고 있다.
남향의 외방무덤인 진파리4호분에는 널길 벽에 연못, 널방 벽에 사신, 천장고임에 인동연꽃, 천정석에 별자리가 그려졌다. 진파리4호분 벽화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널길 벽의 연못 그림이다(그림18). 널길 벽에는 중첩한 높은 산과 빽빽이 솟은 소나무에 둘러싸인 연못을 그렸다. 잔물결이 일고 있는 수면 위의 산호(珊瑚), 연못 한가운데로 뻗어 오른 연 줄기와 활짝 핀 연꽃, 그 좌우로 대칭을 이루며 치뻗은 인동잎과 연잎, 바람에 날리는 듯 연못 위 허공에 뜬 수염털 인동연봉오리, 소나무 사이로 빛나는 금빛의 십자꽃잎무늬, 산 밑의 암괴(巖塊) 등이 서로 어울리면서 연못에 신비스러운 분위기가 감돈다. 불교에서 말하는 천수국(天壽國)의 하늘연못이 이런 모습일지도 모른다(전호태, 1990). 연못 주변 산과 나무의 표현에 도식성이 엿보이기도 하지만, 선의 굵기와 색의 농담(濃淡)으로 대상의 부피감을 드러내려 했으며, 좌우 대칭구도 속에서도 세부표현에 변화를 주었다.
그림18 | 진파리4호분 널길 서벽 벽화 모사선화 - 하늘연못
남향의 외방무덤인 진파리1호분에는 널길 벽에 문지기 천왕, 널방 벽에 사신, 천장고임에 구름과 인동연꽃, 천정석에 해와 달, 인동을 나타냈다. 진파리1호분 벽화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바람에 휘날리는 구름과 인동연꽃, 수염털 봉오리로 가득한 들판의 현무와 좌우의 산, 나무이다(그림19). 농담이 있는 나무 밑의 바위산과 선묘(線描)된 수목은 소박하게나마 이 산수에 공간감을 부여한다. 바람에 크게 흔들리는 듯한 화면 좌우의 큰 나무 두 그루는 몰골법(沒骨法)으로 실재감 있게 그려졌다(안휘준, 1980; 이태호, 2020). 고구려 화공의 수목 표현능력이 진파리4호분 벽화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그림19 | 진파리1호분 널방 북벽 벽화 모사도 - 현무
진파리4호분의 연못과 진파리1호분의 현무 그림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좌우에 산과 나무를 배치하고, 그 사이 공간에 중요한 소재를 그려 넣는 대칭적인 화면 구성, 배경에 하늘을 흐르는 구름과 바람에 휘날리는 인동연꽃 등을 그려 화면 전체에 생동감을 불어넣는 표현기법이다. 이는 모두 6세기 중국 남북조에서 유행한 회화양식 요소이다(吉村怜, 1985). 두 고분의 벽화에 중국 남북조미술의 양식과 기법이 상당한 영향을 끼쳤음을 알 수 있다(전호태, 2016a).
앞의 4~5세기 고분벽화의 분석에서 드러났듯이 고구려에서 외래 문화요소는 선택적으로 수용되며, 이후 그것에 수정이 가해져 고구려적 정체성이 담긴 새로운 문화요소로 재탄생한다. 6세기 중국 미술양식의 수용과 소화 과정에도 고구려의 이러한 방식이 적용되었음을 진파리1호분과 진파리4호분 벽화에서 확인할 수 있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진파리1호분의 현무도를 비롯한 사신의 표현방식이다. 중국 북조 고분벽화 및 남조 고분의 석각선화(石刻線畵)에 등장하는 사신이 도교 선인(仙人)의 종속적 존재처럼 보이는 것과 달리, 진파리 고분벽화의 사신은 널방 각 벽면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진파리1호분 벽화의 현무도는 중국 남북조 미술양식의 주요기법은 받아들이면서도 제재 구성에는 변화를 주었으며, 세부표현에는 특유의 힘과 생명력을 더하여 고구려화를 이룬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전호태, 2016a).
후기의 사신계 벽화고분인 호남리사신총은 널방 벽의 사신 외에는 다른 제재가 남아 있지 않다. 눈길을 끄는 것은 호남리사신총 벽화의 사신이 진파리1호분이나 진파리4호분 벽화의 사신이 보여주는 중국 남북조 회화양식적인 요소를 지우고 강서대묘와 강서중묘 벽화에 보이는 고구려 특유의 신수(神獸)의 세계를 여는 징검다리 역할을 한다는 사실이다. 호남리사신총 벽화의 사신들은 별다른 배경이나 동반하는 존재 없이 벽면의 주인공이자 유일한 제재로 그려졌다는 점에서 전형적인 고구려 사신계 고분벽화의 세계를 펼쳐냈다고 할 수 있다.
그림20 | 내리1호분 널방 천장고임 동북쪽 벽화 - 산수와 넝쿨
내리1호분 널방 천장고임 벽화는 6세기에 들어서면서 고구려의 화공들이 산수라는 제재를 어떻게 인식하고 소화했는지를 잘 드러낸다(그림20). 집안권, 평양권의 초기 및 중기 고분벽화에서 산수는 사냥도의 배경으로 그려졌다. 사냥이라는 실용적이면서 종교적인 행사가 진행되는 무대 겸 무대장치로 기능했을 뿐이다. 평양권의 덕흥리벽화분, 약수리벽화분, 집안권의 무용총, 장천1호분 등에서 산수는 쫓고 쫓기는 짐승과 사냥꾼들 사이에 세워진 무대장치였다.
그러나 6세기 벽화에서 산수는 독립적 제재가 된다(이태호, 1987). 내리1호분 널방 천장고임에 그려진 달 속의 계수나무, 천장고임 모서리의 산수는 이러한 새로운 흐름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이다. 산과 나무가 구체적인 형태를 갖추었다. 강서대묘 벽화에 보이는 온전한 산수의 출현을 예감하게 하는 작품이다.
강서대묘와 강서중묘의 벽화는 중국 남북조 회화양식이 수용된 뒤, 반세기 동안 고구려에서 나름의 새로운 회화세계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잘 보여준다(전호태, 2018b). 강서대묘는 남향의 외방무덤으로 널방 벽에는 사신, 천장고임에는 선인과 신산(神山), 상금서수, 기화요초 등이 표현되었다. 천정석에는 황룡(黃龍)이 그려졌다. 강서대묘보다 상대적으로 늦은 시기에 축조, 제작된 강서중묘 널방 벽에는 사신, 천장고임에는 인동연꽃, 천정석에는 연꽃과 서조(瑞鳥)가 표현되었다.
강서대묘와 강서중묘에서 사신은 아무런 배경 없이 벽면에 그려졌다. 두 고분벽화의 사신은 세련된 필치와 선명한 채색으로 상상적 동물임에도 실재하는 존재처럼 그려졌다. 벽화에서 사신이 획득한 ‘실재성’은 무배경에 가까운 벽면에 깊은 공간감을 주어 화면이 아득한 하늘세계인 듯이 느껴지게 한다. 같은 시기 중국의 회화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표현과 효과이다. 특히 강서대묘의 현무와 주작, 강서중묘의 청룡과 백호는 회화적 완성도가 대단히 높다.
물론 이 시기에 이르러서도 특정한 대상이 지닌 부피감이 효과적으로 표현되지 못하는 듯이 보이는 부분도 있다. 당대 최고의 작품으로 평가되는 강서대묘의 현무에서도 이러한 한계를 읽어낼 수 있다. 그런데도 벽화를 그린 고구려 화공은 현무의 뱀과 거북이 우주적 질서를 되살리기 위해 음양의 기운을 교환하는 순간을 강한 필선으로 잘 그려냈다(그림21). 네 다리로 버티고 선 거북에게서는 강한 기운이 뿜어나오고, 거북을 감은 뱀은 탄력과 긴장감으로 가득하다(全虎兌, 1993). 이는 중국 수·당시대 고분벽화의 현무의 뱀과 거북이 부피감은 드러내면서도 우주적 신수(神獸)가 자아내야 할 강한 기운은 뿜어내지 못하는 것과 비교된다(전호태, 2004c).
그림21 | 강서대묘 널방 북벽 벽화 - 현무
후기 고분벽화 사신도에서 확인되는 독자적 세계와 함께 보는 이의 관심을 끄는 것은 벽화의 산수도이다. 사냥 장면이나 사신의 배경으로만 그려지던 산수가 독립된 회화 주제가 될 조짐이 이 시기 벽화에 보이기 때문이다. 강서대묘 널방 남벽 주작 아래에 그려진 산악은 산 능선을 따라 엷게 담채(淡彩)를 가하여 제한적이나마 산의 부피감을 나타냈으며 가까운 산은 크고 뚜렷하게, 먼 산은 가까운 산과 거리를 두고 작고 희미하게 묘사하여 산의 원근을 알 수 있게 했다(그림22). 널방 천장고임 제3층 산수도에도 대상이 지닌 원근감과 공간감을 나타내는 기법은 그대로 적용되었으며 산 주름을 나타내는 준법(皴法)이 시도된 흔적도 있다(安輝濬, 1980). 산 능선에 나 있는 나무도 간략한 필치로 묘사되었으나 제법 사실적이다.
그림22 | 강서대묘 널방 천장고임 벽화 - 선계의 산과 선인
강서중묘 널방 북벽 현무 아래 그려진 산의 능선 표현에는 농담의 변화가 있고, 산에는 담채가 가해졌다. 이런 종류의 산수는 두 무덤보다 약간 앞서 제작된 내리1호분 널방 천장고임 제1층 동북 모서리에도 보인다. 이 벽화의 산수는 산 능선을 따라 그려진 수목에 원근 및 비례 개념이 적용되고 있는데, 여기에서 더 나아간 것이 강서대묘와 강서중묘 벽화의 산수라고 할 수 있다.
사신도와 산수도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강서대묘와 강서중묘 벽화를 제작할 즈음의 고구려 회화는 원근비례 개념을 바탕으로 대상을 묘사하고, 화면 안에 거리와 공간을 부여하는 표현에 이미 상당히 익숙해 있다. 그러나 아직 괴량감, 부피감 표현은 익숙하지 않았던 듯이 보인다. 화공은 산수와 같이 평면상에 정지한 상태이거나 상하좌우 어느 한 방향으로 움직이는 물체가 지닌 부피감은 실감 나게 잘 묘사해냈다. 하지만 현무의 뱀과 거북처럼 여러 각도로 운동 방향을 바꾸는 물체가 지닌 부피감은 효과적으로 표현해내기 힘들어했던 듯하다.
통구사신총, 오회분5호묘와 오회분4호묘로 이어지는 6세기 집안 국내성 지역 고분벽화에서 먼저 살펴볼 유적은 통구사신총이다. 6세기 전반 축조된 것으로 보이는 통구사신총은 남향의 외방무덤이다. 널길에 불교의 천왕(天王)을 연상시키는 수문신장(守門神將)을, 널방 벽에 빠르게 흐르는 구름을 배경으로 사신을(그림23), 천장고임에 해신과 달신을 비롯한 문명신, 천인, 상금서수, 일월성신, 인동연꽃 등을 그렸다. 천정석에는 황룡을 묘사하였다.
그림23 | 통구사신총 널방 북벽 벽화 모사도 - 현무
통구사신총 벽화 널방 벽 사신의 배경을 이루는 빠르게 흐르는 구름은 당시 동아시아를 휩쓸던 중국 남북조 미술양식의 한 요소이다(전호태, 2016a). 그런데 중국 남북조 양식의 가장 특징적인 요소로 여겨지는 바람에 휘날리는 듯한 인동연꽃과 키 큰 나무는 통구사신총 벽화에 보이지 않는다. 이는 6세기 집안 국내성 지역 화가들이 중국 남북조 회화양식을 선택적으로 수용했음을 뜻한다.
오회분5호묘와 오회분4호묘 역시 남향의 외방무덤이다. 두 무덤 모두 널길 벽에는 수문신장을, 널방 벽에는 사방연속 변형귀갑문을 배경으로 사신을, 천장고임에는 문명신과 천인, 상금서수를 그렸다. 천정석에는 오회분5호묘는 청룡과 백호를, 오회분4호묘는 황룡을 묘사하였다.
두 무덤의 벽화에서 먼저 살펴볼 것은 널방 벽의 사신과 배경을 이루는 사방연속 변형귀갑문, 귀갑문 안의 장식이다. 널방 벽의 사신은 인동과 불꽃으로 장식되거나 인동연꽃에서 화생하는 천인으로 채워진 변형귀갑문 위에 세련되고 숙달된 필치로 묘사되었다(그림24). 청룡과 백호는 입을 크게 벌리고 눈을 부릅뜬 채 상대를 덮쳐 내릴 듯한 자세로 하강하고 있으며, 주작은 크게 나래 치고, 현무는 대지 위에 힘있게 버티고 서 있다. 사신은 몸 세부까지 세밀하게 묘사되었고, 오색(五色)으로 화려하게 채색되었다.
그림24 | 오회분5호묘 널방 서벽 벽화 - 백호
그러나 지나치게 선명한 윤곽선, 엄격하게 구분된 채색띠, 규칙적이고 도식적인 세부표현은 사신이 신수로서 지녀야 할 신비성과 사실성을 오히려 약하게 한다(全虎兌, 1993; 전호태, 2004c). 화려한 배경 그림은 벽지(壁紙) 같은 효과를 가져와 이런 종류의 화면이 지녀야 할 공간감을 약하게 만들어 결과적으로 사신의 힘과 운동력을 떨어뜨린다. 평양권 후기 고분벽화의 사신이 배경 표현을 생략한 채 그려져 오히려 공간적 깊이감을 확보한 것과 대조적이다.
벽지 효과를 가져온 화려한 사방연속 변형귀갑문은 6세기 고구려의 대외문화교류, 특히 새로운 미술양식과의 접촉을 시사한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회화적 제재라고 할 수 있다. 사방연속 귀갑문은 집안의 산성자귀갑총(山城子龜甲塚), 순천의 천왕지신총(天王地神塚) 등 5세기 고분벽화에도 보인다. 그러나 오회분5호묘 및 오회분4호묘 벽화에 보이는 사방연속 변형귀갑문과는 표현 기법과 내용, 수준이 다르다.
오회분5호묘 및 오회분4호묘 벽화의 변형귀갑문을 이루는 오색띠, 변형귀갑문 속 팔메트(Palmette)풍 장식무늬, 중국 북조 관인(官人) 복장을 한 화생천인(化生天人), 막대기 끝으로 팔괘(八卦)를 가리키는 도사(道士), 북조 석굴사원에서 발견되는 것과 유사한 벽 모서리의 역사형 괴수 등은 기존의 벽화 전통 외에 중국 남북조 및 내륙아시아, 서아시아 등 외부세계 여러 곳에서 고구려가 받은 문화적 자극도 함께 고려하게 한다(김진순, 2003).
고구려문화권 외부로부터의 문화적 자극의 과정과 내용은 아직 충분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벽화의 사방연속 변형귀갑문은 고구려 국내성 일대의 문화전통, 국내성을 중심으로 한 문화교류의 통로가 평양과는 차별성을 지녔음을 시사한다(李松蘭, 1998; 김진순, 2009). 이와 관련하여 살펴보아야 할 것은 통구사신총을 포함한 6세기 집안 벽화고분 널방 천장고임 벽화의 제재 구성과 표현이다.
오회분4호묘 널방 천장고임 제1층에는 인동문, 연속교룡문, 제2층에는 밑면에 활짝 핀 연꽃, 옆면에 해신과 달신, 상서로운 새와 짐승을 탄 천신, 수레바퀴의 신, 대장장이신, 숫돌의 신, 불의 신, 농업신 등이 그려졌다. 3층에는 밑면에 하늘세계를 받치는 용을 묘사하고, 옆면에 연속교룡문, 기악천(伎樂天), 해와 달, 별자리, 흐르는 구름 등을 나타냈다.
벽화를 보면 이런 다양한 제재 사이에 공간적 여유를 두어 화면 구성에 질서를 부여하는 한편, 필요에 따라 제재 사이에 나무나 용, 구름 등을 그려 넣어 화면 전체의 밀도를 조절하고 있다. 이런 까닭에 개별 제재의 독자성이 확보된다. 동시에 제재 사이의 유기적인 관계도 살아나고 있다.
오회분4호묘 천장고임 2층에 배치된 신들 사이의 나무는 잎이 가지 끝에 둥근 부채처럼 모여 있고 각기 색깔이 달라 상상 속에서 변형된 존재임을 알 수 있다. 잎에는 농담이 있으며, 천장고임 3층의 흐르는 구름에도 음영이 있다. 화공이 대상이 지닌 입체감, 괴량감에 관심을 가지고 이를 표현해내려 노력한 결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천장고임 2층의 사지를 꼿꼿이 세우고 등으로 하늘을 떠받친 용의 탄력 있는 자세, 천장고임 3층의 옷자락을 나부끼며 악기 연주에 몰두하는 기악천들의 유연한 몸짓, 천장고임 2층과 3층에 그려진 신과 천인들의 길고 갸름한 얼굴은 화공의 정확한 관찰력과 뛰어난 묘사력을 잘 보여준다.
집안권 후기 고분벽화 천장고임 벽화 구성 및 제재와 관련하여 진지하게 살펴볼 것 가운데 하나는 천장고임에 그려진 여러 문명신이다. 복희와 여와의 모습을 한 해신과 달신을 비롯한 신들은 문화적 기원이나 조형적 연원에서 고구려에 알려진 경로가 명확하지 않다(전호태, 2004). 현재 전하는 고구려 관련 문헌기록에 사람 얼굴에 용의 몸인 해신, 달신에 대한 언급은 보이지 않는다. 불의 신, 대장장이신 등도 마찬가지이다.
그렇다고 하여 이들 문명신을 중국 전래의 신화전설에서 비롯된 존재로 해석하기도 쉽지 않다. 실제 중국 전래의 신화전설이 성립되는 과정도 단순하지 않을 뿐 아니라, 벽화에 모습을 드러낸 신 가운데 6세기까지 중국에서 조형된 수많은 신화, 전설상의 존재와 비교될 마땅한 사례도 없는 까닭이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벽화에 적용된 기법과 수준으로 보아 이들 제재는 이미 상당한 기간 고구려에서 내적 소화 과정을 거쳐 고구려적 힘과 분위기를 지닌 존재로 재창조된 상태라는 사실이다. 오회분4호묘 벽화의 복희형 해신과 여와형 달신에서 그런 측면이 잘 드러난다(權寧弼, 1984; 全虎兌, 1992).
오회분4호묘 널방 천정석에 그려진 황룡은 오행신앙과 관련이 깊다(전호태, 1993). 오행의 중심을 상징하는 신수인 황룡은 벽화의 사신도를 오신도로 바꾸는 존재이기도 하다. 고분벽화에서 널방의 천정석에 그려진 것이 지니는 비중이나 의미까지 고려한다면 벽화의 황룡을 무덤주인의 정체성, 생전의 사회적 지위나 신분과 관련 짓는 것도 가능해진다(최택선, 1988a,b; 손수호, 2001). 다만 고분의 규모에서 큰 차이가 나지 않는 통구사신총과 오회분4호묘에 그려진 황룡이 오회분5호묘에는 그려지지 않았다는 사실, 강서중묘 널방 천정석은 활짝 핀 연꽃으로 장식되었다는 점도 함께 고려하면 무덤주인의 신분과 지위에 대한 해석을 다시 시도할 필요가 있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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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시기별 변화양상 자료번호 : gt.d_0008_0050_0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