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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통사

3. 벽화를 통해 본 생활상

3. 벽화를 통해 본 생활상

1) 복식
『삼국지』 기사는 3세기 중반까지 고구려에서 ‘가(加)’로 불리던 지배층은 책과 절풍으로 상하, 대소를 구별할 수 있었음을 알려준다.주 001
각주 001)
『삼국지(三國志)』 권30 위서30 오환선비동이 고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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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까지 대동강 유역에는 낙랑이, 요동을 지배하던 정치세력의 후원을 받으며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평양 금옥리1호분 벽화에 남아 있는 조우절풍(鳥羽折風)을 쓴 노인의 모습은 이 시기에 낙랑이 요동세력과 고구려 사이에서 정치적 줄다리기를 하면서 정치체제를 유지하려 애쓰고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4세기 초 미천왕대에 이르러 낙랑, 대방 등이 소멸하고 대동강과 재령강 일대가 고구려의 지배 아래 들어갔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주 002
각주 002)
『삼국사기(三國史記)』 권17 고구려본기5 미천왕 14년 10월 및 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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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안악을 포함한 대방 지역은 3세기 후반까지 고구려와 백제 사이에 영역 편입을 둘러싼 갈등의 장으로 남게 된다. 반면 평양을 중심으로 한 낙랑 고지는 고구려 남방 경략의 전진기지로 정비·개발된다. 주목되는 것은 이와 같은 정치적 격랑을 겪으며 이 지역은 주민 구성의 변화와 문화변동을 동시에 겪게 된다는 사실이다. 그 과정과 결과는 주거와 복식을 포함한 생활양식 전반에 크고 작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이경희, 2012; 전호태, 2015a).
평양과 남포 일원은 4세기 초 고구려의 영역에 편입되면서 사회적 변화가 컸던 곳이다. 주민의 상당수가 이 지역을 떠났고 빈자리는 고구려에서 보낸 새로운 이주민들로 메꿔졌다. 이런 변화에도 불구하고 이 일대에는 토착문화와 한계(漢系)문화가 혼합하여 성립한 ‘낙랑문화’가 여전히 남아 일정한 정도 영향력을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전호태, 2003). 고분벽화 인물 복식에서 확인되는 지역적 차이는 낙랑 고지의 각 지역에 미치던 낙랑문화의 영향력 정도와 연관하여 이해할 수 있다.
벽화 인물에서 볼 수 있는 평양식 복식의 특징인 여밈의 방향이 자유로운 무늬 없는 옷은 집안 국내성 유형 복식과는 뚜렷이 구별된다(이경희, 2009; 2010). 평양식 복식을 중국적 성격을 전제한 외래형으로 규정하기 모호한 부분이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는 결국 4세기 초 이후 새로운 북방문화가 기존의 낙랑문화를 부분적으로 대체하거나 기존 문화에 섞여 들고 덧씌워지던 과정과 관련하여 이해할 수밖에 없다. 이런 식의 이해를 전제로 할 때 순천 동암리벽화분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입은 옷은 집안 유형 복식의 남하 과정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로 볼 수 있다(전호태, 2016b).
집안과 평양 인물 복식의 특징이 한꺼번에 나타나는 남포 지역 고분벽화 인물도는 낙랑 고지 안에서도 남포 일대에 성립했던 경계문화, 곧 점이지대 문화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고조선, 낙랑에 이어 고구려시대에도 대외교섭 창구로 기능하는 남포는 평양보다 기존 문화의 해체 속도가 빨랐고 그 과정이 고스란히 고분벽화 인물 복식에도 반영되었다. 408년 묵서명이 남아 있는 덕흥리벽화분이나 5세기 전반 이른 시기의 작품인 감신총 벽화 등장인물에게서는 평양식 복식의 특징만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고분벽화보다 제작시기가 크게 뒤지지 않는 옥도리벽화분이나 대안리1호분 벽화 인물도에서는 집안 복식 특유의 요소를 쉽게 찾아낼 수 있다. 이들 고분보다 늦은 시기에 제작된 수산리벽화분이나 쌍영총에서는 집안 복식과 평양 복식 요소가 어깨를 나란히 하는 현상이 보이기도 한다(전호태, 2016a). 이들 고분벽화만으로도 경계적 성격이 강한 남포 지역 복식문화의 변화 과정을 알 수 있다.
안악문화권에서는 지역문화의 혼합보다는 부분적 대체 과정이 더 뚜렷하게 나타난다. 고분벽화에서 확인되는 복식문화의 성격도 개별적이라 할 정도로 차이를 보인다. 그러나 대체적인 흐름을 짚어내자면 안악3호분 벽화 인물도가 보여주는 낙랑문화의 성격이 5세기 후반 평양, 남포 지역에서 정착의 징후를 보이는 집안식 복식과 평양식 복식의 혼합, 융화를 거쳐 새로운 복식문화로 바뀐다고 할 수 있다. 안악2호분 벽화 인물의 복식이 이런 흐름의 한 단계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이다.
5세기 후반의 늦은 시기로 편년되는 남포 쌍영총 널길 벽 기마인물이 머리에 쓴 조우절풍은 “(고깔모양의 절풍에) 새깃을 꽂아 귀천의 다름을 나타낸다”는 『위서』의 기사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설명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쌍영총 벽화에는 상대적으로 이른 시기의 남포 및 평양 지역 고분벽화 인물도에 빈번히 등장하는 책(幘)이 보이지 않는다.
『주서』 복식 기사에 언급된 골소(骨蘇)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것은 6세기 초 편년 개마총 벽화 개마행렬 인물들이 머리에 쓴 모자이다(그림25). 행렬에 등장하는 7명 모두 머리에 절풍을 썼다. 행렬에서 두 번째 인물이 쓴 절풍에는 새깃 형태의 장식 두 개가 더해졌다. 가장 크게 묘사된 제일 앞 사람은 작은 보요(步搖)가 달린 높이 솟은 깃대 형상 장식, 좌우로 넓게 펼치면서도 끝이 뾰족하게 처리된 날개 형태의 장식이 붙어 극히 화려해 보이는 절풍을 머리에 썼다. 자색의 라(羅)로 만들고 금은으로 장식하며 관품이 있는 자는 새깃 두 개를 위에 꽂아 지위를 나타낸다는 골소가 이런 형태의 모자였을 가능성이 크다.
그림25 | 개마총 널방 천장고임 벽화 모사도 - 행렬
개마총 벽화 개마행렬에서 한 가지 주목되는 것은 머리에 절풍 쓴 7명 모두 무늬 없는 옷을 입었으며 벽화 모사도로 남은 다른 인물 중 원점무늬의 포를 입은 여자 1명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5세기 말 작품으로 추정되는 대동 덕화리1호분 벽화 행렬도의 인물 8명 가운데 시종으로 묘사된 마지막 2명이 원점무늬 저고리, 바지 차림인 것을 함께 고려하면, 6세기 전후 고구려의 주류 복식은 집안식 절풍, 평양식 무늬 없는 옷의 조합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수서』에는 『주서』의 기사를 짧게 정리하면서 귀자(貴者)의 금은식자라관(金銀飾紫羅冠)과 사인(使人)의 조우피관(鳥羽皮冠)을 나누어 언급한 기사가 있다.주 003
각주 003)
『수서(隋書)』 권81 열전46 동이 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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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사』에는 앞의 기사를 종합 정리하면서 귀인의 소골, 사인(士人)의 조우절풍을 소개한 기사가 있다.주 004
각주 004)
『북사(北史)』 권94 열전82 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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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서』와 『북사』 기사만으로 보면 높은 신분의 사람이 사용하는 금은 장식 소골(蘇骨)과 평범한 관인이 사용하는 조우절풍은 재질과 형태상 뚜렷이 구분되는 모자이다. 그러나 개마총 개마행렬 선두의 인물이 머리에 쓴 화려한 장식의 절풍은 『주서』에 언급된 골소 가운데 가장 고급스러운 수준의 관모임이 확실하다. 그렇다면 이들 사서에서 언급된 골소와 소골, 소골과 절풍은 같은 종류의 모자일까?
명칭만으로 보아도 『주서』의 골소와 『북사』의 소골은 같은 모자를 가리키는 용어임이 확실하다. 『수서』는 관(冠)의 명칭을 나누지 않고 재질의 차이만을 언급한다. 문장의 전개방식으로 보아 기록자 혹은 관찰자의 눈길을 끈 것은 평범한 관인과 달리 귀한 신분의 사람은 자라(紫羅)로 만든 것을 사용한다는 사실이다. 관의 형태, 종류가 같아도 재질의 차이가 뚜렷해서 한눈에 그 차이를 알 수 있었다. 그에 더하여 모자에 금은 장식까지 더한다면 그 귀천의 차이는 보는 이의 눈에 더욱 또렷이 다가올 수밖에 없다.
6세기에 이르러 고구려인이 사용하는 모자와 의복이 이전보다 다양한 재질의 옷감으로 만들어지고 귀천에 따라 금은 등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었음은 『북사』가 편찬되던 시기의 기록인 진대덕(陳大德)의 『고려기』를 포함하여 『구당서』, 『신당서』 기사를 통해서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고구려의 귀족들이 금은으로 장식한 금수(錦繡) 의복 차림으로 공회(公會)에 참가했다는 『삼국지』 기사부터 금으로 장식한 관복을 입었다는 연개소문에 대한 『신당서』 기사까지 고구려인이 의복에 금은장식을 덧붙이는 관습이 있었음도 오래전부터 알려져 있다.주 005
각주 005)
『삼국지』 권30 위서30 오환선비동이 고구려; 『신당서(新唐書)』 권220 열전145 동이 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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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모자의 재질과 장식이 점차 화려하고 다양해지기 시작한 것은 4세기 후반부터 단계적으로 이루어진 고구려 관등의 분화와 관련이 깊은 별개의 문제이다. 알사, 태사, 대형, 소형 등의 관등명을 전하면서 이를 절풍장식과 직접 연계시켜 언급한 『위서』 기사는 고구려에서 관등에 따라 관모 장식의 형태, 내용이 달랐음을 구체적으로 전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그림26).주 006
각주 006)
『위서(魏書)』 권100 열전88 고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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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26 | 고구려 남자가 쓴 여러 종류의 모자
1. 안악3호분
2. 쌍영총
3. 수산리벽화분
4. 동암리벽화분
5. 안악3호분
6. 안악3호분
7. 안악3호분
8. 덕흥리벽화분
9. 무용총
10. 쌍영총
11. 마선구1호분
12. 동암리벽화분
13. 개마총
14. 삼실총
15. 덕흥리벽화분
16. 동암리벽화분
소수림왕대 율령 반포를 계기로 공식화한 관등 분화는 고구려의 영역이 확대되고 인구가 증가하며 대내외적 위상이 높아지면서 계기적으로 이루어졌을 것이다(임기환, 2004). 물론 분화된 관등을 제도적으로 정비하는 별도의 과정, 혹은 계기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남제서』에는 489년 북위가 고구려 사신과 남제 사신을 나란히 앉게 하자 남제 사신 안유명(顔幼明)과 유사효(劉思斆)가 북위 조정에 공식적으로 항의한 사건이 소개되었다.주 007
각주 007)
『남제서(南齊書)』 권58 열전39 동남이 고려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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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건 전부터 동아시아 여러 나라 사이에서는 현실로 인식되고 있었음에도 공식화되지는 않다가 북위가 이를 국제외교의 현장에서 공개적으로 기정사실로 만들자 남제로부터 큰 반발을 산 경우이다. 이 기사에 이어 남제에 온 고구려 사절이 중서랑 왕융(王融)에게 머리에 쓴 관모가 이상하게 생겼다는 희롱의 말을 듣고 이에 대해 차분하고 자신 있게 대응하는 과정이 소개되었다.
장수왕 통치 말년에 일어난 이 사건은 5세기 후반 고구려의 국제적 위상, 고구려인의 자의식, 고구려인의 복식에 대한 정보를 동시에 전해준다. 475년 한성을 공략하여 백제를 일거에 제압하면서 대내외적 위상을 더욱 확고히 한 고구려에서는 관제 정비가 한 차례 더 이루어져 관등, 관복의 등급에 따른 조합으로 구체화되었을 가능성이 크다(전호태, 2000a). 관복의 등급화가 이루어졌다면 관모의 형태, 재질, 장식 등도 역시 이에 맞추어졌을 수밖에 없다. 고구려인임을 알리는 표식처럼 인식되었던 절풍이 관모의 기본형으로 채택되어 절풍 재료와 장식 내용에 의해 상하귀천을 가리게 된 것도 이때부터였을 수 있다.
개마총 개마행렬 인물들이 머리에 쓴 다양한 장식의 절풍, 유물로 남아 전하는 고깔 형태의 금동관모와 커다란 새깃 형태의 금속제 관모 장식, 고구려인의 상징으로 인식되어 석굴사원 벽화나 선각화로 남아 전하는 당대 유적, 유물 속 인물들 머리에 쓴 조우관, 곧 조우절풍을 함께 고려하면 『구당서』, 『신당서』에 왕과 대신들이 머리에 썼다고 소개된 라관의 형태에 대해서도 재고할 필요가 있다. 백제의 사례를 보아도 고구려 후기 최고 관등 귀족들의 관모를 굳이 혜문관(惠文冠)이나 농관(籠冠) 형태라고 상정할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삼국사기』에 인용된 『통전』의 고구려 악공인 기사와 당 이백(李伯)의 시 「고구려」는 고구려 무용에 사용되는 무용복이 어떤 색상, 어떤 형태의 저고리, 바지, 치마, 허리띠, 신발로 이루어졌는지 알게 한다.주 008
각주 008)
『삼국사기』 권32 잡지 제1, “樂: 金花折風帽 白馬小遲回 翩翩舞廣袖 似鳥海東來.”; 『악부시집(樂府詩集)』 권78 잡곡가사18 당 이백 고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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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의 구절을 무용총, 장천1호분, 마선구1호분, 태성리1호분, 고산동10호분, 옥도리벽화분 벽화의 무용도와 함께 음미하면 고구려 무용의 특징과 직업별 복식의 존재를 구체적으로 알 수 있다(전호태, 2013b).
 
2) 화장과 장신구
고분벽화 인물도만으로 고구려인의 화장기법이 얼마나 다양했는지 알기는 어렵다. 고분벽화 및 신라인의 화장 기사를 아울러 고려할 때 백분(白粉)을 사용한 분칠로 얼굴을 희게 보이도록 한 뒤 그 위에 붉은 색으로 연지, 곤지를 넣어 얼굴이 두드러져 보이게 하는 식의 화장법이 일반적이었음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전호태, 2015b, 그림27, 표2). 옥도리벽화분 인물도의 사례 등으로 볼 때 볼연지를 둥근 점의 형태로만 넣지 않고 상현달 형태 등 변화를 주었고, 이마의 곤지 화장도 꽃모양으로 장식하는 등의 방식을 썼음을 알 수 있다.
그림27 | 고분벽화 인물도에 보이는 본 화장의 사례 - 1. 동암리벽화분 귀부인
그림27 | 고분벽화 인물도에 보이는 본 화장의 사례 - 2. 수산리벽화분 귀부인
그림27 | 고분벽화 인물도에 보이는 본 화장의 사례 - 3. 쌍영총 시녀
그림27 | 고분벽화 인물도에 보이는 본 화장의 사례 - 4. 장천1호분 무용수와 연주자
표2 | 고분벽화에 보이는 화장의 사례
문화권벽화고분명편년화장한 인물화장 내용비고
평양권안악3호분357귀족부인과 시녀 3인아랫입술연지(?)앞방 서쪽 곁방 서쪽 장방 안 시중 받는 장면, 이 외 회랑행렬도 등장인물 들의 입술을 붉게 칠했으나 입술연지인지 여부는 확실하지 않음.
동암리벽화분4세기 후반귀족부인과 시녀입술연지, 볼연지널방 바닥 벽화 조각 부분, 일상생활의 한 장면(?)
옥도리벽화분5세기 전반귀족부인과 시녀 3인입술연지, 볼연지, 곤지(?)널방 북벽 장방 생활도의 무덤주인의 부인
송죽리벽화분5세기 전반마부입술연지(?), 얼굴에 옅은 홍조 분칠(?)널방 벽 생활 장면 중 말과 동반
천왕지신총5세기 중엽귀족부인볼연지, 입술연지, 꽃모양 곤지널방 북벽 귀족 부부의 안채 생활
수산리벽화분5세기 후반귀족부인 2인과 시녀 2인입술연지, 볼연지, 곤지널방 서벽 곡예 관람 인물행렬
여인곤지
쌍영총5세기 말시녀 2인입술연지, 볼연지, 눈화장널길 벽 인물행렬
귀족부인입술연지, 볼연지, 곤지널방 북벽 장방생활도의 무덤주인의 부인
집안권장천1호분5세기 중엽무용수얼굴에 진한 홍조 분칠앞방 북벽 백희기악 중 오현금 연주에 맞춘 무용을 위한 분장
연주자입술연지, 볼연지, 곤지, 얼굴에 흰 분칠앞방 북벽 백희기악 중 오현금 연주를 위한 분장
귀족부인입술연지, 얼굴에 흰 분칠앞방 천장고임 동면 예불 공양
고분벽화 인물도로 확인되는 연지 화장의 재료가 무엇이었는지를 알려주는 기사는 전하지 않는다. 그러나 고분벽화의 인물도로 확인되는 옷감의 염색기법 및 색채로 볼 때, 붉은색 염료의 생산에 사용되던 잇꽃(홍화)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전호태, 2021). 잇꽃에서 얻는 홍색 색소에 초를 넣어 연지를 만드는 것이 한국 전래 민간기법의 하나인 까닭이다. 홍색을 포함한 다양한 색으로 염색된 고구려의 라(羅)가 중국에도 알려졌고 고구려인이 옷감에 무늬를 넣을 때 채화법을 쓴 것으로 보이는 사례가 벽화에서 자주 발견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고구려인이 연지를 만들 때 사용한 천연재료가 홍화였다고 보아도 무리는 아니라고 하겠다.
『구삼국사』 동명왕본기는 고구려의 시조 주몽이 졸본 송양국의 왕과 활쏘기 실력을 겨루면서 활로 옥가락지를 맞혀 깨뜨렸다는 이야기를 전한다.주 009
각주 009)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권3 동명왕편 소인 『구삼국사(舊三國史)』 동명왕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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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에서 사용되던 장신구에 대한 가장 오랜 기록이다. 그러나 고구려 유적에서 금제, 은제 반지는 여럿 출토되었지만, 옥가락지는 수습된 예를 찾기 어렵다. 이는 고구려인이 선호하고 무덤 속에도 껴묻던 장신구 가운데 반지는 주로 금제나 은제였던 데에 비롯한 현상일 수 있다.
근래까지 이루어진 고구려 유적에 대한 조사와 발굴결과로 볼 때, 고구려에서 지배층이 선호하는 금속제장신구가 적극적으로 만들어지거나 수입되어 유포되기 시작한 시기는 4세기 전후이다(전호태, 2016b). 4세기에 들어설 즈음 고구려는 대동강과 재령강 유역 한계(漢系) 군현에 대한 압박 수위를 높이고 요동 지역 진출도 적극적으로 모색한다. 4세기에 들어서면서 고구려는 교통의 요충 서안평을 점령한 뒤 낙랑군과 대방군을 잇달아 멸망시킨다.
이 시기 중국은 통일왕조인 서진(西晉)이 멸망한 뒤, 대분열기에 접어들었다. 이로 말미암아 4세기 초 동아시아에서는 인적, 물적 이동이 더 광범위하고 활발하게 일어났다. 고구려도 이런 상황의 한가운데로 발을 들여놓았다. 고구려가 동아시아 차원의 인적, 물적 교류의 장에 적극적으로 개입한 시기와 귀족층을 주된 수요자로 삼는 금속제장신구의 제작, 유통시점이 어느 정도 교집합을 이루는 셈이다.
4세기 초부터 정치·사회적 혼란이나 계속되는 재해 등을 이유로 외부세계의 사람들이 고구려에 흘러들거나 망명 오는 사례가 잦아졌다(전호태, 1993a). 고구려가 서로는 선비족 모용씨 세력, 남으로는 백제와 국경을 맞대게 된 이후 겪게 된 일이다. 전연이나 후연에서 고구려로 망명 온 이들 가운데 일부는 고구려 남부의 평양, 안악 일대로 새 삶터가 정해져 그들이 살던 흔적을 남기기도 했다(공석구, 2003; 여호규, 2009). 4세기 내내 북중국의 정세가 안정적이지 않았으므로 고구려와 북중국 왕조 사이의 사절 교환도 적지 않게 이루어졌고 크고 작은 전쟁도 여러 차례 일어났다. 4세기 초 이후에는 고구려와 백제의 관계에서도 갈등과 충돌이 계속되었다. 이런 사례도 넓은 의미에서는 인적, 물적 교류의 한 양상이라고 할 수 있다.
4세기 고구려의 대외교류에서 주목되는 것은 요동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놓고 갈등과 화해를 반복한 선비족 모용씨 세력, 곧 연(燕)과의 관계이다. 역사기록에는 남아 있지 않으나 4세기 중엽부터 연과의 접촉이 계속되는 가운데 고구려에는 무덤의 껴묻거리 중에 연으로부터 비롯되거나 연의 영향 아래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문물이 나타난다(강현숙, 2013). 이와 관련하여 참고되는 것은 고구려가 건국 후 오래지 않아 한의 군현과 본격적으로 교섭하면서 한이 보낸 ‘조복의책(朝服衣幘)’과 ‘악공기인(樂工技人)’을 받았다는 기사이다.주 010
각주 010)
『삼국지』 권30 위서30 오환선비동이 고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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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가 연과 의제적으로나마 조공책봉 관계를 맺었다면 연으로부터 이런 관계를 확인시켜주는 차원의 ‘의책기물(衣幘器物)’을 받는 것은 자연스러운 과정이었을 것이다.
고구려 유적에서 진식(晉式) 띠고리와 띠꾸미개 중 일부 형식이 4세기 후반이나 그 이전부터 출현하는 것은 서진 및 연과의 교류 결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관모를 장식하는 보요나 그 외의 보조물도 서방의 문물이 고구려에 직접 전해지거나 고구려가 서방과의 교류를 통해 자극받은 데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아도 무리는 아닐 듯하다.
372년, 고구려에는 공식적으로 불교가 전해졌다.주 011
각주 011)
『삼국사기』 권18 고구려본기6 소수림왕 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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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중국을 사실상 통일한 전진의 부견(符堅)이 보낸 승려 순도(順道)와 불상, 경문은 고구려가 새로운 종교문화 복합체에 구체적 관심을 가지는 계기를 제공했다. 더하여 고구려 사회는 이전과 다른 차원의 인간관, 세계관을 받아들일 것인지를 고민하게 하였다. 소수림왕대 국내성에서의 불사(佛寺) 창건을 시작으로 고국양왕대 왕명에 의한 불교신앙 장려책, 광개토왕대 평양 9사 창건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은 고구려가 북중국 왕조들처럼 불교를 국가통합의 새 이념으로 삼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고구려에서도 불교의 전륜성왕(轉輪聖王) 이념에 바탕을 둔 대왕의식의 성립과 확산이 시도되었음을 뜻한다(전호태, 2011a).
고구려가 선비족 모용씨 세력의 내분을 틈타 요동 진출과 지배에 성공한 4세기 말부터 북연 멸망을 둘러싼 북위와의 갈등을 군사적 충돌 없이 마무리하여 동북아시아의 패권(覇權) 국가로서 위상을 확고히 하는 5세기 전반 사이는 고구려의 왕과 귀족도 대내외적 위신이 높았던 시기이다. 평양 천도를 둘러싸고 장수왕과 국내성 보수 귀족세력 사이에 갈등이 빚어졌음에도 지속적이고 성공적인 대외군사활동은 왕과 귀족 모두에게 재부(財富)를 증가시키는 좋은 기회로 작용하였다.
5세기를 전후하여 고구려에서는 다양한 형식의 귀걸이가 등장했다(그림28, 29). 고구려의 굵은고리 귀걸이와 가는고리 귀걸이 대다수가 5세기 말부터 6세기 초 사이를 하한으로 편년되는 유적에서 출토된다. 이 시기에 허리띠를 장식하는 띠고리와 띠꾸미개 가운데 새로운 형식이 거의 출현하지 않는 점과도 비교되는 현상이다. 관모장식의 경우, 봉황모양장식 같은 이형장식의 일부만 새롭게 모습을 드러내는 것과도 대조된다.
그림28 | 고구려 유적 출토 굵은고리 귀걸이의 주요 사례
- 1. 남포 용강 용흥리7호분 2. 남포 강서 보림리대동6호분 3. 서울 능동 4. 집안 산성하고분군 5. 대동군 6. 집안 마선구고분군
그림29 | 고구려 유적 출토 가는고리 귀걸이의 주요 사례
- 1. 집안 산성하고분군 2. 집안 산성하고분군 3. 남포 강서 보림리대동19호분 4. 집안 산성하고분군 5. 남포 강서 약수리벽화분 6. 대동 덕화리3호분
고구려에서 국가 차원으로 추진된 불교장려책이 귀족과 백성들 사이에 받아들여져 내세관에까지 널리 영향을 끼치는 시기는 5세기 중엽 즈음이다. 연꽃이 불교적 깨달음 혹은 불교의 내세공간을 상징하는 기호처럼 여겨지는 것도 이 시기이다. 연꽃만으로 장식된 벽화는 이 시기 고구려 고분에서만 발견되는 고구려적 현상이기도 하다(전호태, 2004).
5세기 중엽을 전후하여 고구려에서 불교가 크게 유행하기 시작하여 사회 여러 분야에 영향을 끼치게 되었음은 불교미술품의 출현양상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김진순, 2008; 양은경, 2011). 흥미로운 것은 고분벽화의 제재 구성으로 볼 때 5세기 중엽 이후 고구려에서 불교가 크게 유행하였음은 확실하나, 불교미술의 꽃인 불상은 6세기 중엽을 전후한 시기의 것이 다수 남아 전한다는 사실이다(金理那, 1996). 어떤 이유에서일까?
이와 관련하여 우선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불교신앙이 널리 퍼졌음에도 불구하고 고구려인에 의한 불상 조성이 더 늦은 시기에 활성화되었을 가능성이다. 중국에서도 불교신앙의 수용 이후 불상 조성을 포함한 불교미술활동이 활발해지기까지 상당한 시일이 소요되었다. 법흥왕대에 불교가 공인된 신라에서도 황룡사 창건, 장육존상(丈六尊像) 주조로 대표되는 대규모 불사는 7세기 중엽에 이르러서야 본격화한다. 고구려에서는 5세기 초에 이미 국왕의 명으로 평양에 9사를 창건하는 대규모 불사가 있었다. 그렇지만 귀족과 백성들이 대거 참여하는 불상 조성은 이로부터 1세기 정도의 시간이 흐른 뒤에야 낯설지 않은 일이 되었을 수 있다.
다음으로 동명성왕 주몽을 시조로 한 고구려식 성왕론(聖王論)과 고구려 중심의 천하관이 유효한 상태에서 고구려의 왕실과 귀족은 6세기 초까지도 금제 혹은 금동제 장신구를 위신재(威信財)로 적극 사용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흥미로운 현상은 6세기 초를 하한으로 고구려에서 더는 새로운 형식의 금제귀걸이가 만들어지지 않았고, 이미 만들어졌던 형식의 귀걸이도 유적에서 출토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李漢祥, 2004; 전호태, 2016b). 이는 이 시기 이후로 편년되는 유적에서 금동제관모장식이 수습되고 허리띠를 장식하는 띠고리와 띠꾸미개가 출토되는 것과 비교된다.
이것은 위신재로 쓰이던 장신구에도 기능과 의미에 무게가 주어지는 정도가 다른 데에서 비롯된 현상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귀족 및 관인의 신분과 지위를 나타내는 위신재로 관모와 허리띠가 구체성을 띠는 데에 반해 귀걸이는 그렇지 않았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시의 관례에 비추어 볼 때 관모와 허리띠를 놓고 다시 그 중요도를 매긴다면 아마도 관모에 우선권이 주어질 것이다.
645년 완공된 경주 황룡사 목탑지 심초석 아래에서 7세기 전반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금동제귀걸이와 동제허리띠꾸미개가 발견되었다(李漢祥, 2004). 진단구(鎭壇具)로 묻힌 물품들이다. 이 금동제귀걸이는 7세기에 들어서면서 쇠퇴하는 신라 황금문화의 흐름을 읽게 하는 좋은 사례로 이해된다(전호태, 2019a). 신라의 왕실과 귀족사회에서 위신재로 사용되던 장신구의 재료인 금이 사원에 바쳐져 불상이나 사리공양구(舍利供養具) 제작에 쓰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고구려에서도 일어났던 것으로 보인다. 6세기 전반에 이르러 고구려식 불상 조성이 본격화하고 불교미술활동이 활발해지자 고구려에서도 관모나 허리띠장식에 부분적으로 쓰이는 외에 장신구 제작에 금을 쓰는 일이 드물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3) 음식
고구려에서 어로로 물고기와 자라를 비롯하여 하천과 바다의 다양한 산물을 수확하거나 성안의 연못 같은 곳에서 물고기를 길렀음은 관련 기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주 012
각주 012)
『삼국사기』 권14 고구려본기2 대무신왕 11년 추7월; 『삼국사기』 권15 고구려본기3 태조왕 7년 하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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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안지역에서는 음식의 조리와 보관에 필수적인 소금이 생산되었다. 산야에서는 다양한 방식의 사냥을 통해 멧돼지, 사슴, 노루, 토끼 등의 들짐승, 꿩과 같은 야생 조류가 수확되었다(박유미, 2015). 가축으로 기르던 돼지, 소, 말, 양, 염소, 닭도 음식재료로 쓰였을 것은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일부 채소류는 재배되었고 이 외에 다양한 종류의 산나물, 도토리를 비롯한 견과류, 마를 비롯한 뿌리식물류, 느릅나무 껍질과 같은 구황식물도 음식재료로 채취되었다. 때에 따라 고래나 바다표범 같은 해양동물도 사냥하여 고구려 왕실이나 중앙귀족에게 바쳐졌음이 기록으로 확인된다.주 013
각주 013)
『삼국사기』 권14 고구려본기2 민중왕 4년 9월; 『삼국지』 권30 위서30 오환선비동이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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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풍토나 고고학적 발굴결과로 볼 때 고구려에서는 농경의 주된 방식이 밭농사였으며, 오곡으로 일컫는 조, 콩, 수수, 기장, 보리가 주로 경작되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고구려가 한반도 중부지역으로 영토를 확장한 뒤 밭농사와 논농사로 쌀도 여러 곳에서 다량 수확되었음을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박태식, 2007). 그러나 생산량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확실치 않다. 다만 임진강 유역 연천 무등리2보루 유적에서 탄화미와 탄화조가 대량 출토, 수습된 점을 고려할 때 6세기 전후 고구려 남부지역에서 국경지대의 병사들에게도 보급할 수 있을 정도로 쌀과 조의 수확이 이루어졌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심광주·김주홍·정나리, 1999).
고구려에서 수확된 곡물은 다양한 크기의 옹(甕)이나 호(壺) 같은 저장용기에 담겨 별도로 보관되었다. 부경과 같은 창고에 넣어두었던 곡물은 필요에 따라 꺼내 디딜방아로 찧거나 절구에 넣어 빻았다. 고분벽화에 여러 차례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디딜방아는 가호마다 갖추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약수리벽화분에 보이는 디딜방아 곁 키질 장면은 디딜방아가 주로 곡식을 찧는 데 쓰였음을 시사한다(그림30). 근래까지 대부분의 농가는 디딜방아와 절구, 맷돌을 갖추고 있었다. 이를 고려하면 고구려에서도 찧은 곡식을 가루 내는 데에 주로 맷돌이 사용된 듯 하다.
그림30 | 약수리벽화분 앞방 동벽 벽화 모사선화 - 방앗간
음식재료를 다듬고 조리하여 완성된 음식을 상에 담아내는 과정은 부엌에서 이루어졌다. 고구려에서 음식 조리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것은 조리시설인 부뚜막의 형태이다. 현재까지 벽화로 확인되거나 유적에서 수습된 고구려의 부뚜막은 아궁이 위에 솥을 걸기 위한 확 하나만 뚫렸다(그림31). 이는 크고 작은 확이 여러 개 뚫려 솥 외에 조리용 기구 여러 개를 동시에 올릴 수 있는 중국 한~당대의 부뚜막과 차이를 보인다. 부뚜막의 아궁이와 굴뚝 구멍이 뚫린 방향도 중국 한~당대의 것은 일직선을 이루지만 고구려의 것은 90°의 각을 이루어 서로 구별된다(궁성희, 1990).
그림31 | 약수리벽화분 앞방 동벽 벽화 모사선화 - 부엌
고구려 부뚜막의 이러한 형태적 특징은 음식문화 및 난방방식이 중국과 달랐던 데에서 비롯되었다. 부뚜막의 구조와 형태로 보아 고구려에서는 주식을 만들기 위해 부뚜막 위에 뚫린 확에 솥을 걸어 놓을 뿐 아궁이에 땐 불로 다른 요리를 하지 않았다. 아궁이에 연료를 넣고 태워 발생시킨 열의 상당량은 취사용으로 소모되기보다 구들을 데우는 난방용으로 사용되었다. 아궁이와 굴뚝 구멍이 90°의 각을 이루도록 뚫린 것도 부뚜막 안의 열이 장시간 보존되면서 구들을 데우는 데에 쓰이게 하려 함이었다.
중국에서는 부뚜막 아궁이와 굴뚝 구멍이 ‘一’자를 이루게 뚫어 아궁이 안에 넣은 땔감이 잘 연소될 수 있도록 하였다. 연소열이 곧바로 취사용으로 쓰일 수 있게 한 것이다. 중국에서는 주식과 부식 구별 없이 여러 개의 일품요리를 내어 즐기는 식으로 식사가 진행되었다. 한꺼번에 2개 이상의 확을 사용하여 빠르게 동시에 조리하는 것이 선호되었을 수밖에 없다. 중국에서도 일반 백성은 따뜻한 일품요리 하나로 식사를 마치거나 미처 데우지 못한 차가운 음식으로 끼니를 때우는 경우가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귀족의 식사방식은 이와 달랐을 것이 틀림없다.
벽화에서 알 수 있듯이 고구려에서는 솥 위에 시루를 얹어 뜨거운 증기로 쪄낸 음식을 주식으로 삼았다. 물론 이런 조리법 및 식사도 고구려 유적에서 시루와 솥이 자주 출토되는 4세기 이후의 일일 것이다(사공정길, 2014). 심발이 주로 출토되던 4세기 이전에는 곡식가루를 죽처럼 끓여 먹는 일이 보다 일반적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떡이나 밥이었을 이런 쪄낸 음식의 재료는 조나 기장, 보리, 그 외에 콩, 팥 등의 몇 가지 곡물에 견과류 및 뿌리식물의 가루가 약간씩 더해졌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물론 경제적 여유가 있던 대귀족 집안에서는 쌀이 주식재료로 많이 쓰였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이는 이런 종류의 곡식을 대량으로 재배하고 수확하여 세금으로 거둘 수 있었던 평양 천도 이후의 일이었을 것이다.
조나 기장, 혹은 쌀과 보리를 증기로 쪄낸 주식은 수분 함량이 적어 이를 보완하는 음식과 짝을 이루어 식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음식고고연구회, 2011). 고두밥에 가까운 쪄낸 음식과 짝을 이룰 수 있는 것이 국이다. 국에 어떤 음식재료가 사용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고구려에서 음식상에 국을 올려놓았음은 왕의 옷에 국을 엎질렀다는 동천왕대 기사로 확인할 수 있다.주 014
각주 014)
『삼국사기』 권17 고구려본기5 동천왕 원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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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인의 일상 식탁에서 밥과 국은 모두 발, 완 및 대부완(臺附盌)에 담아 상에 올렸을 것이다.
고구려에서 상에 반찬으로 올리는 것은 대개 소금에 절인 근채류였고 해안지역에서는 해초류였을 것이다. 때에 따라 사냥으로 얻은 짐승 고기, 어로를 통해 구한 물고기가 더해졌다고 해야 할 것이다. 고고학적 발굴결과를 정리하면 6세기 이후 종지, 접시, 구절판 등 반찬을 올릴 수 있는 배식용기의 기종이 다양해진다(사공정길, 2013). 이를 고려할 때 왕실이나 상급 귀족 집안이 아니더라도 경제적 여유가 있는 계층의 음식상 구성은 일반 백성에 비해 다채로웠을 수 있다.
고구려인은 술이나 장과 같은 발효음식을 만들어내는 데에 능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종지에는 콩을 재료로 빚어낸 장류를 담아 상에 올렸던 듯하다.주 015
각주 015)
『삼국지』 권30 위서30 오환선비동이 고구려; 『양서(梁書)』 권54 열전48 동이 고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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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배류(耳杯類)는 중국에서처럼 술잔으로 주로 쓰였을 것이다. 고분벽화 속의 상차림으로 보아 음료는 장동호(長胴壺)에 담았을 것이나 고구려 술로 알려진 곡아주(曲阿酒) 같은 술 외에 어떤 음료가 더 있었는지는 알기 어렵다.
고구려에서도 멧돼지나 노루 고기를 소금에 절인 뒤 훈제하여 고리에 걸어두거나 특정한 장소에 보관하다가 내어 손님에게 대접하는 일은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왕실 또는 귀족 집안에서나 가능했을 것이다(崔南善, 1943; 윤서석, 1997). 간장과 같은 맛 재료를 더해 재운 고기를 불에 구워내는 요리로 추정되는 맥적(貊炙) 역시 일반 민가에서는 맛보기 어려운 음식 중 하나였다고 보아야 한다(윤서석, 1997; 박유미, 2013).주 016
각주 016)
『고사통(故事通)』 소인 『수신기(搜神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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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에 평원왕의 사위로 입신한 온달의 경우에서 보듯이 평양 인근에 거주하더라도 경작할 밭 한 뙈기 없는 집안에서는 흉년으로 날품팔이도 어려워지면 산에 올라가 느릅나무 껍질을 벗겨와 가루를 내어 쪄먹을 수밖에 없었다.주 017
각주 017)
『삼국사기』 권45 열전5 온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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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차림은 보통 부엌의 한편에서 이루어졌을 것이나 안악3호분 벽화에서 볼 수 있듯이 부엌 안의 구분된 공간에서 진행되기도 하였다(그림32). 상차림에 사용된 소반은 다리가 안으로 휘어든 낮은 것이어서 상을 받는 사람이 바닥이나 평상, 좌상 등 어디에 앉더라도 무릎 앞 가깝게 놓을 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무용총 벽화에서 보듯이 일자로 곧추 내려오는 다리가 긴 소반은 평상에 걸터앉은 사람이 식사하기에 불편하지 않도록 높이가 맞추어져 만들어진 것이다. 벽화로 보아 고구려에서는 때에 따라 쟁반처럼 다리가 없는 그릇받침도 사용되었다.
그림32 | 안악3호분 동쪽 곁방 벽화 - 음식 조리와 상차림
부엌에서 안채나 사랑채로 내가는 음식상은 모두 한 사람이 들고 갈 수 있는 크기의 것이다(그림33). 이는 대부분의 음식상이 개인 상이기 때문이다. 여럿이 함께 먹을 음식을 그릇에 담아 내갈 때도 작은 상이 쓰였다. 음식 시중을 드는 사람이 이 음식을 작은 그릇에 덜어 각 사람에게 나누어준 까닭이다. 고구려에서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상다리가 휘도록’ 크고 넓은 상에 한꺼번에 많은 음식 그릇을 올려놓고 함께 식사하는 일은 없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림33 | 무용총 널방 벽화 모사도 - 음식상 나르기
귀족의 식사를 위한 상차림에 어떤 원칙이 있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각저총 널방 동북벽의 두 부인은 각각 발과 완이 3개 놓인 상을 받았다. 무용총 널방 동북벽의 무덤주인은 발과 완이 5개, 두 승려는 발과 완이 4개 놓인 상을 받았다(그림 34). 같은 무용총 널방 동남벽 북쪽의 부엌에서 상을 내가는 두 여인이 두 승려의 상에 음식 그릇을 더하기 위해 각각 작은 완이 두 개 놓인 상과 발 두 개가 놓인 쟁반을 받쳐 든 것이 아니라면 각저총과 무용총 벽화로 볼 때 고구려에서 주인 남자와 승려들, 부인의 음식상에 오르는 음식 그릇의 수가 달랐다고 해석할 수 있다.
그림34 | 무용총 널방 벽화 모사도 - 음식상 앞에서의 대화
고구려의 음식문화 관련 유물자료 가운데에는 4세기와 6세기를 경계로 변화를 보이는 것이 여럿 있다. 심발은 4세기 이전의 유적에서 주로 발견되지만, 장동호는 4세기부터 본격적으로 확인된다. 솥과 시루도 4세기 이후 자주 발견되며 무덤 안에 부뚜막이 적극적으로 부장되거나 시설되는 것도 이때부터이다. 한강 유역과 그 이남의 고구려 유적에서 출토되는 배식용기의 종류가 많아지고 접시류가 많이 늘어나는 것은 6세기이다. 땅을 깊이 갈 수 있게 고안된 고구려식 쟁기는 4세기 이후 널리 보급되어 고구려에서 농업생산력을 높이는 데 크게 기여한다(김재홍, 2005).
고구려에서 4세기는 동북아시아의 지역세력에서 중심국가로 발돋움하는 시기이다. 미천왕의 즉위 이후, 고구려는 요동과 한반도를 잇던 중국 군현의 잔여세력을 제압하거나 포섭했다. 이 과정에서 압록강 하구의 서안평을 점령하고 대동강 유역에 자리 잡은 낙랑을 병합했다. 재령강 유역의 대방 지역으로도 진출하였다. 미천왕과 고국원왕대의 고구려는 서쪽으로는 요동, 남쪽으로는 임진강 일대로 진출을 도모하였다. 하지만 선비족 모용씨가 세운 요동의 전연, 한강 유역에서 북으로 세력을 확장하던 백제의 저지를 받았다.
이처럼 4세기는 혼강과 압록강 중류 유역을 기반으로 성장한 고구려가 요동평야와 대동강 유역 평야지대로 세력을 확장하던 시기이다. 주목되는 것은 이 두 지역이 선진적 농경기술을 기반으로 주변 지역과 구분되는 높은 생산력을 유지한 곳이라는 사실이다. 기록에서도 확인되듯이 본래 고구려 사람들은 생산력에 한계를 보일 수밖에 없던 산간지대 계곡지역의 선상지 평야에서 밭갈이를 중심으로 농사를 지었다. 이로 말미암아 상시적인 식량부족에 시달렸다.주 018
각주 018)
『삼국지』 권30 위서30 오환선비동이 고구려; 『후한서(後漢書)』 권85 동이열전75 고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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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까닭으로 고구려 사람들은 평소에 음식을 아껴 먹고 집마다 부경(桴京)이라 불리는 작은 창고를 지어 그 안에 식량을 모아 놓는 등 검소한 생활기풍을 유지했다. 부족한 식량자원은 채집, 수렵, 어로 외에 약탈, 공납 등에 의존하였다. 이를 고려할 때 4세기에 고구려의 영역이 넓은 평야지대로 확장되자 음식문화를 포함한 사회 전반에 변화가 일어났을 것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음식문화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것은 농경지역이 크게 확대되고 곡물 생산량이 증대되었으리라는 점이다. 고구려의 영역에 평양 일원을 포함한 쌀농사 지역이 대폭 추가되면서 곡물 생산에서 오곡(五穀) 외에 쌀의 비중도 크게 높아졌을 것은 확실하다. 당연히 고구려 왕실과 귀족 가문의 주식 구성에서 쌀의 비중이 높아지고 음식조리법에도 변화가 뒤따랐을 것이다. 이 과정에 음식재료의 구성과 소비에서 일반 백성과 귀족 사이, 하급 귀족과 상급 귀족 및 왕실 사이에 거리가 벌어지기 시작했으리라는 추정도 가능하다(전호태, 2016b). 4세기 이후 고구려 유적에서 솥, 시루, 부뚜막이 빈번히 발견되고 이전보다 다양한 기종의 토기가 출토되는 것은 음식문화의 변화를 반영한다고 보아도 무방할 듯하다. 고구려 영역에서 곡물 수확량이 크게 증대되어 식량자원의 확보도 더 수월해지자 나타난 현상이다. 신분과 지위에 따라 식량자원을 확보하거나 분배받는 데에 차등성이 뚜렷해졌다고 해도 사회 전반이 누리게 된 상대적 풍요와 여유는 4세기 이전과 구분될 수밖에 없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고구려의 음식예법과 관련하여 주목되는 것은 고분벽화에 등장하는 칠기(漆器) 및 상차림이다. 고분벽화에는 칠기를 올린 음식상이 여러 차례 등장한다(주영하, 2003). 벽화로 볼 때 귀족 남자와 부인, 승려가 받는 상차림은 다르다. 기록상 고구려 사회에서 신분이나 지위에 따라 상차림이 어떻게 달랐는지 확인되지 않는다. 그러나 『삼국사기』의 ‘기용(器用)’에 대한 간단한 기사로 볼 때 고분벽화에 보이는 상차림의 차이는 기존의 음식예법에 따른 것일 가능성이 크다.주 019
각주 019)
『삼국사기』 권33 지2 기용(器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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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세기 이후 고구려가 커다란 문화적 변화를 경험할 수밖에 없는 정치·사회적 조건과 맞닥뜨렸음을 고려할 때 5세기 전반에 제작한 고분벽화에 이전보다 정교해진 음식예법에 바탕을 둔 상차림이 표현된다고 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고 하겠다.
4세기 이래 영역이 크게 확장되고 다른 관습과 전통 아래 살던 여러 민족을 사회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서방에서 기원한 불교문화와 본격적으로 접하게 되자 고구려의 음식문화는 이전보다 훨씬 다채로워졌을 것이다. 불교문화가 전해지고 널리 퍼지면서 고구려 귀족 사이에 차를 마시는 풍습이 생겼으리라는 추정도 가능하다. 무용총 벽화의 무덤주인이 두 스님에게 설법을 듣는 장면 중 탁자 위 음료용기가 차와 관련되었다는 견해도 제기될 수 있다.
4세기를 경계로 고구려의 음식문화는 이전보다 다채로워지고 조리법도 발달한다. 조리와 상차림에 사용되는 용기의 종류도 매우 다양해졌다. 그러나 그 영향은 국내성과 평양을 비롯한 고구려의 중심도시에 한정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 유적, 유물에 대한 근래의 고고학적 발굴 및 연구성과가 한강 유역 외에 평양과 집안 중심으로 축적되는 경향은 있다. 주요 지역을 벗어난 곳에 대한 간헐적인 학술보고 및 유적 분포 밀집도를 보더라도 고구려시대에 존재했던 중심과 주변의 사회문화적 격차는 일반적 비교가 어려울 정도로 크게 벌어져 있었음이 확실하다.
고구려의 음식문화는 생활문화권별로 뚜렷한 차이를 보였을 것으로 보인다(전호태, 2016b). 구체적인 것은 고고학적 출토유물의 지역별 비교를 통해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알려진 자료로는 중심과 주변의 관계에서처럼 발굴성과의 차이가 지나치게 벌어져 객관적인 비교연구가 어렵다. 다만, 자료 축적의 양으로 볼 때 고구려 남북 문화권 사이의 상호 비교검토는 어느 정도 가능하다. 이와 관련하여 국내성 지역을 중심으로 한 북방문화권이 조, 기장, 수수를 주곡으로 할 수밖에 없는 밭농사 중심지역인 반면, 평양을 중심으로 한 남방 문화권은 쌀과 보리를 주곡으로 할 수 있는 밭과 논의 혼합농사지역인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주곡에 따라 음식 구성 및 상차림의 내용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국내성 및 졸본성 지역을 중심으로 발전하던 고구려 전기의 생활양식 및 음식문화에 대한 『삼국지』 기사는 고구려 식량 생산의 한계를 지적하였다.주 020
각주 020)
『삼국지』 권30 위서30 오환선비동이 고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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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평양을 중심으로 한 고구려 후기 음식문화와 관련된 다른 기사에는 고구려에서 사용되는 다양한 기종의 음식그릇이 언급된다.주 021
각주 021)
『구당서(舊唐書)』 권299하 열전149상 동이 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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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두 기사에 배식용기의 종류가 많아지고 접시류가 많이 늘어난다는 6세기 한강 유역 고구려 유적 출토 고구려 토기 분석결과를 함께 고려해 역사적 해석을 시도해보기로 하자(사공정길, 2013).
5세기 초 평양으로의 천도를 본격 추진할 즈음 고구려는 동북아시아 패권 국가로 지위를 굳혀가고 있었다. 서로는 요동에 대한 지배권을 확고히 하고 남으로는 임진강 유역까지 영역을 넓힌 상태였다. 천도를 전후한 정치적 불안정을 극복한 뒤 고구려의 영역은 남으로 더 확대되었다. 5세기 후반에는 한강 유역 대부분과 소백산맥 이남의 상당 부분이 고구려의 영역에 포함되었다.
4세기 말부터 5세기 후반에 걸쳐 고구려가 확보한 영역의 상당 부분이 평야지대로 밭농사와 논농사에 적합한 지역이었다. 이 시기 고구려 영토에 새로 편입된 지역에서는 개량된 고구려식 농기구가 집중적으로 투입되어 농경이 이루어졌다. 그 결과 농업생산력이 크게 향상되었다(김재홍, 2005). 고구려가 새롭게 확보한 농경지는 조, 보리, 밀 외에 쌀농사에 적합한 지역이 많았다. 고구려의 새로운 영토는 곡물뿐 아니라 대체식량의 채집과 생산에도 유리한 지역이었다.
고구려 후기에 요동 지역과 대동강과 재령강, 한강 유역에서 생산된 곡물은 평양성 일원뿐 아니라 국내성 일대를 포함한 고구려 북방의 주요 도시에도 일정량 공급이 가능할 정도였을 것이다. 이 시기 고구려 남쪽 국경지대의 성과 보루에는 주변 지역에서 생산된 쌀과 조 등이 군량으로 제공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6세기 고구려 관방(關防)유적 출토 배식용기들이 이전보다 다양해질 수 있었던 것도 국경지대의 성과 보루에까지 비교적 풍족하게 음식재료가 보급될 수 있었기 때문이라 하겠다.
5세기 전반부터 동아시아 4강의 일원으로 전성기를 구가하게 되자 고구려의 수도 평양은 동북아시아의 중심이자 실크로드 동아시아 거점 도시의 하나가 되었다. 5세기 중엽 이후 왕실과 상급 귀족 가문이 주도하는 새로운 문화적 흐름이 평양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주변 지역으로 번져 나갔다. 그 내용 중 일부는 고분벽화에 남겨졌다(전호태, 1997a). 『구당서』에 언급된 변두(籩豆), 보궤(簠簋), 준조(罇俎), 뢰세(罍洗) 등의 음식 그릇은 비록 기자(箕子)의 유풍이라고 하나 천도 이후 형성된 평양 중심 문화의 흐름에서 비롯된 현상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고구려의 귀족들이 연원이 오래인 제기(祭器)에서 유래한 식기를 사용했다는 언급은 6세기를 전후하여 고구려의 중앙귀족 사이에 번잡한 예법이 전제된 음식문화가 유행했으며 음식조리법과 요리의 종류도 매우 다양해졌다는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평양을 중심으로 유행한 새로운 음식문화는 왕실과 상급 귀족 일부의 전유물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고구려가 전성기에 들어서면서 곡물 위주의 식량 생산이 크게 늘고 이에 힘입어 곡물 중심의 주식과 장류 및 근채류, 소량의 어류나 육류를 곁들인 부식으로 이루어진 식단이 일반화되기도 했을 것이다. 한강 일대 고구려 관방유적에서 배식용기의 비중이 높아진 것도 이와 관련된 현상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4) 주거
고구려 백성의 주거는 ‘一’자형 초가가 기본형이었다. 방에 ‘ㄱ’자나 ‘一’자 고래의 쪽구들을 설치하여 겨울의 추위에 대비했다. 쪽구들 외의 바닥은 흙다짐 위에 짚이나 돗자리 등을 두껍게 깔아 냉기를 막았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고구려 민가에서 실내생활은 좌식과 입식이 혼용된 반(半)좌식, 반입식이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몇몇 발굴사례로 보아 마을 둘레로는 얕은 담을 설치하여 경계로 삼았다.
고분벽화 제재의 배치방식은 고구려 귀족저택은 사랑채 역할을 하는 바깥채와 살림집인 안채로 구분되었음을 알게 한다. 『삼국지』 고구려전에 언급된 대옥(大屋), 소옥(小屋)이 벽화의 바깥채와 안채에 해당한다고 하겠다.주 022
각주 022)
『삼국지』 권30 위서30 오환선비동이 고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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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악3호분과 덕흥리벽화분의 벽화 제재 배치는 그 전형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전호태, 1999b). 안악3호분은 무덤주인 부부가 서쪽 곁방에 그려지고, 안채의 살림시설인 부엌, 고기창고, 우물, 방앗간, 외양간, 마구간 등은 동쪽 곁방에 묘사되었다(전호태, 2004). 널방에는 서벽에 가무 장면이 그려졌다. 이 경우 서쪽 곁방과 널방은 사랑채와 안채, 동쪽 곁방은 사랑채와 안채의 살림시설이 된다. 널길방은 대문과 좌우에 달린 행랑채에 해당하고 앞방은 바깥뜰과 안뜰이 된다. ‘ㄱ’자 회랑은 안채의 회랑 및 후원이라고 할 수 있다.
덕흥리벽화분에는 무덤주인이 앞방 북벽에 그려지고, 널방 안벽에도 묘사되었다. 이는 앞방이 사랑채, 널방이 안채로 상정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앞방 북벽 서쪽에 그려진 무덤주인과 앞방 서벽의 13태수배례도는 귀족저택의 사랑채가 관사로서의 성격도 지니고 있었음을 구체적으로 알게 한다(한인호, 1995). 살림시설은 모두 널방 각 벽에 표현되어 이런 시설이 주로 안채에 배치되었음을 알려준다. 널방 동벽과 남벽 동쪽에 그려진 연못 및 칠보공양 행사 장면은 안뜰의 동쪽 구역이 연못이 있는 정원이었음을 뜻한다. 서벽 남쪽의 마사희 장면은 안뜰 서쪽 구역이 여러 가지 놀이와 행사가 이루어지는 공간이었음을 시사한다. 앞방과 널방 사이의 이음길은 중문간, 앞방 남쪽의 널길은 대문간이라고 하겠다.
벽화로 볼 때 귀족저택 건물 뼈대를 이루는 기둥, 두공, 도리에는 다양한 장식무늬를 넣었고, 지붕은 기와로 덮었다. 살림채 부속건물은 맞배지붕이며 사랑채와 안채에 해당하는 중심건물은 우진각지붕이다. 사원뿐 아니라 귀족저택이나 관사, 궁궐 건물지에 사용되는 기와에는 다양한 무늬를 넣었다. 기와의 무늬가 고구려 귀족과 왕실의 사유세계와 일정한 상관관계가 있는지도 관심 둘 만하다(백종오, 2008).
성곽도 및 유적 발굴결과로 보아 사원이나 관청, 궁궐의 주요건물 가운데에는 중층 건물이 적지 않았다. 귀족저택을 포함하여 고급 주거와 주요한 건물 사이에는 전돌길이 만들어졌다(그림35). 고구려 귀족저택이나 궁궐 등에서 연못을 동쪽에 두는 관습이 성립했는지는 확실치 않다(徐廷昊, 2004). 덕흥리벽화분의 경우, 앞방 남벽의 동쪽과 서쪽, 널방 동벽의 북쪽 등 여러 곳에 연못이 보인다.
그림35 | 안악1호분 널방 북벽 벽화 모사선화 - 귀족저택
일반 민가 및 일부 귀족저택, 제사용 건물 이외 귀족저택, 사원, 관청, 궁궐의 주거용 건물에는 온돌이 설치된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송기호, 2019). 이런 건물에서는 입식생활을 가능하게 하는 화로와 같은 이동성 난방기구가 사용되었으리라 추정된다(전호태, 2016b). 바닥 난방을 택하지 않은 건물에 설치된 평상에는 겨울 추위를 이겨낼 수 있도록 두꺼운 침구가 마련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보온성이 높은 침구를 마련할 수 없는 일반 백성은 차가운 겨울 날씨를 견디기 위해 취사용 부뚜막에서 고래를 길게 내 만든 쪽구들을 기본 난방수단으로 삼았다고 보아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고구려에서는 귀족이 입식생활에 편리하도록 지어진 기와집에 거주한 것으로 보인다. 이와 달리 일반 백성들은 입식과 좌식을 겸할 수 있는 쪽구들 온돌 초가에서 지냈다고 하겠다. 그런데도 고구려에서 신분, 지위와 관계없이 좌식생활에 적합하지 않은 저고리와 바지 위주의 복식문화가 유지된 것은 고구려인이 처음부터 정주 농경 위주의 문화를 가꾸어오지는 않았기 때문일 수 있다. 복식문화에서 바지는 수렵, 목축 위주 생활양식과 관련이 깊다.
이와 관련하여 한 가지 더 주목되는 것은 귀족들이 좌식생활에 적합한 주거조건을 갖추지 않았음에도 실내에서 평상이나 좌상 위에 신발을 벗고 올라가 온돌방에 앉듯이 편안하게 책상다리 자세로 앉는 경우가 잦았다는 사실이다(그림36). 이는 귀족들이 입식생활에 익숙한 사람에게는 쉽게 찾아보기 어려운 자세로 앉는 데에 별다른 어려움을 느끼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저고리와 바지 차림의 수렵, 목축 민족이 의자에 앉기를 즐기고 이를 편하게 여기는 것과 대조적이다. 이는 고구려 백성과 귀족이 일상생활 중 평상을 자주 사용하는 좌식생활에 익숙했거나 익숙해지는 상태였음을 시사한다.
그림36 | 수렵총 널방 북벽 벽화 모사도 - 신발을 벗고 평상 위에 앉은 무덤주인 부부
무용총 벽화의 예로 보아 귀족들은 실내에서 신발을 신은 채 걸상에 걸터앉아 식사하거나 대화를 나누는 데에도 익숙했음이 확실하다. 귀족저택 안에는 온돌이 설치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를 고려하면 고구려의 귀족에게는 이런 방식의 입식생활이 낯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고분벽화에 걸상보다는 평상이나 좌상이 자주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입식 위주 주거에서 생활하던 귀족들도 알게 모르게 온돌문화에 바탕을 둔 좌식생활이 몸에 배고 있었음은 부인할 수 없다고 하겠다.
고분벽화에서뿐 아니라 무덤에 부장된 모형에서도 형태와 기능을 짚어볼 수 있는 고구려의 부뚜막은 조리할 그릇을 올리는 확이 하나이다. 이는 확이 세 개이거나 그 이상인 중국 한~당시기 유적 출토 부뚜막과 대조된다. 고구려 부뚜막의 용도 및 구조, 음식문화의 특징을 알 수 있다. 부뚜막 아궁이에 불을 땠을 때 조리에 소모되는 열량을 줄여 이를 난방에 사용하려는 의도가 바탕에 깔리면서 고구려 부뚜막의 아궁이 방향, 부뚜막 확의 수, 부뚜막의 긴 고래, 굴뚝의 방향이 결정되었다고 하겠다.
난방을 겸하도록 만들어진 부뚜막에 조리를 위한 확을 하나만 뚫음으로써 고구려인은 죽이나 밥 같은 주식만 따뜻하게 익혀 조리하고 부식으로 사용되는 그 외의 음식, 곧 국과 반찬은 부뚜막 외의 다른 이동용 조리기구에서 임의로 끓이거나 익힐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러나 당시의 음식 조리 조건이나 관습을 고려할 때 여름을 제외하면 따뜻하게 먹는 국 이외의 음식은 별도로 열을 가하는 과정을 거의 거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적절할 듯하다. 한 번 익혔던 것을 버무려 무치거나, 이미 소금으로 절인 밑반찬을 약간 더하는 수준에서 부식이 마련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중국과 달리 주식과 부식으로 구분되는 고구려 음식문화의 특징과 원인을 여기서 찾아볼 수 있다고 하겠다.
벽화로 그려졌거나 고분에서 출토된 모형 부뚜막과 다른 형태의 부뚜막이 고구려에서 사용되었을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 있다. 안학궁과 같은 궁궐 건물지에서 쪽구들 시설이 전혀 발견되지 않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고구려의 민가나 귀족저택에서 사용되던 것과는 다른 형태의 조리용 부뚜막이 존재했음을 고려하게 하는 까닭이다. 궁궐 부엌에서 왕과 왕실 사람들을 위해 음식을 조리할 때 난방기능이 전혀 없는 여러 개의 확이 뚫린 별도의 조리용 부뚜막이 만들어져 사용되었다고 보아야 쪽구들이 전혀 없는 궁궐 건물지의 용도에 대한 자연스러운 해석이 가능하다(전호태, 2016b). 이 경우 궁궐의 음식문화는 주식, 부식이 뚜렷이 구별되는 민간과는 다른 방식으로 전개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5) 음악과 무용
고구려에서 고취악이 먼저 발전하며 음악의 흐름을 주도한 것은 건국 초의 대내외 환경으로 말미암은 면이 크다. 무리 지어 노래하고 춤추기를 좋아하는 것으로 잘 알려진 고구려 사람들이주 023
각주 023)
『삼국지』 권30 위서30 오환선비동이 고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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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국중대회로 일컫는 동맹과 같은 정기적인 행사에 북과 나팔 등 각종 악기의 연주와 어우러지는 집단 가무와 각종 놀이를 즐겼을 것은 미루어 짐작하고도 남는다. 더욱이 고구려에는 장례 때에도 북을 치고 춤을 추며 고인을 떠나보내는 관습이 있었다.주 024
각주 024)
『수서』 권81 열전 제48 동이 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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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사회문화적 전통이 있는 사회를 이끄는 세력이 고취악이 군사활동에도 큰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면 이들에 의해 이런 음악이 어떻게 활용되었을지는 명확하다.
실제 한 군현 세력의 압박과 부여로부터의 압력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고구려 건국 주도세력은 고취악의 역할과 효과를 뚜렷이 인식하고 있었던 까닭에 주변 세력과 크고 작은 전투에서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유리왕대 선비와의 전투에서 고구려군이 북을 울리며 나아갔다는 기사는 이를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주 025
각주 025)
『삼국사기』 권13 고구려본기1 유리명왕 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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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무신왕대에 낙랑과의 전쟁에 앞서 왕자 호동을 앞세워 낙랑의 무기고에 있던 북을 찢고 뿔나팔을 부수게 한 것 역시 위와 마찬가지 효과를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다.주 026
각주 026)
『삼국사기』 권14 고구려본기2 대무신왕 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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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사실로 보아 고구려에서 고취악대의 구성과 훈련은 중앙정부 및 지방행정 단위에서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크며, 그 계기는 한과의 교류에서 마련된 것으로 보인다(전호태, 2016b). 문헌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한은 고조선을 멸망시킨 뒤 옛 고조선 땅에 설치한 군현에 관리와 고취기인을 함께 보냈다.주 027
각주 027)
『삼국지』 권30 위서30 오환선비동이 고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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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건국세력의 영역에 속했던 고구려 현에도 고취기인이 보내졌고, 이 지역은 이들의 새로운 활동무대가 되었다. 고구려가 건국될 즈음 고구려 사람들은 이미 한의 고취악에 대해 알았고 이에 어느 정도 익숙해져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고구려가 국가적 발전을 이루는 과정에서 고취악에 쓰이는 악기의 종류는 점점 많아졌고 형태와 기능상의 변화도 뒤따랐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악사들에 대한 훈련과 전문화 과정도 함께 일정한 변화를 겪었을 것이다. 특히 주의되는 것은 고구려가 한 군현의 중심으로 자처하면서 주변 지역에 강력한 사회문화적 영향력을 행사하던 낙랑을 세력권에 넣고 영역화한 데 이어 중국 중앙 왕조의 위력을 주변에 과시하던 위·진과 본격적으로 접촉하면서 고구려의 음악 및 놀이 문화가 겪게 되었을 변화와 그 내용이다.
안악3호분 대행렬도의 대규모 고취악대는 이와 관련한 여러 정보를 전해준다(그림37). 앞에서 인용한 대무신왕대 고구려의 낙랑 정벌 관련 기사에 따르면 낙랑에는 “스스로 울리는 북과 뿔나팔”이 있었다고 한다.주 028
각주 028)
『삼국사기』 권14 고구려본기2 대무신왕 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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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군사적 활용도가 높던 고취악이 낙랑에서는 인접국의 우려를 자아낼 정도로 발전해 있었다는 기사로 읽을 수도 있다. 낙랑이 한에서 동방으로 전해진 고취악을 유지, 발전시키는 중심이었기에 가능했던 현상으로 보아야 할 듯하다. 낙랑이 고구려에 흡수되는 4세기 초까지 낙랑에서 이런 전통은 유지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런 점에서 안악3호분 대행렬도의 고취악대를 고구려가 낙랑을 영역화한 뒤 기존의 고구려 고취악에 낙랑 고취악을 흡수 발전시킨 결과물이라고 해석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 듯하다(전호태, 2016b).
그림37 | 안악3호분 회랑 벽화 - 무덤주인과 고취악대
고구려와 위·진의 접촉은 고구려 귀족들이 주요한 행사 참가나 업적을 기념하는 대행렬로 행렬 주인공의 지위를 과시하는 습성에 관심을 기울이는 계기가 된 듯하다. 안악3호분 대행렬도를 시작으로 평양·안악 일대 고분벽화에 고취악대가 포함된 행렬도가 빈번히 묘사되는 것도 이런 흐름과 관련하여 이해할 수 있다. 완함(阮咸)을 비롯한 새로운 형태의 현악기가 고구려에 전해진 것도 이런 종류의 악기가 적극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중국 위·진과의 교류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새로운 현악기의 전래는 고취악 중심으로 발전하던 고구려 음악에 관현악이 새롭고 독립적인 갈래로 자리매김하는 계기로 작용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고취악의 주요한 구성요소인 관악기가 고구려 초기부터 적극적으로 사용되었고 고조선시대에 사용되었던 것으로 전하는 현악기인 공후(箜篌)가 고구려에도 있었을 것을 고려하면 관악기와 현악기의 조합에서 비롯되는 관현악 역시 고구려 초기부터 음악의 한 갈래를 이루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그러나 공후가 와공후, 수공후로 개량되고 분화되었음이 『수서』에 처음 기록된 것으로 보아주 029
각주 029)
『수서』 권15 지 제10 음악하(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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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초기부터 고구려 사회에서 관현악의 음악적 비중이나 유행의 정도가 높았다고 보기는 어렵다. 유리왕이 불렀던 것으로 전하는 「황조가(黃鳥歌)」와 같은 서정적인 가요를 위해 공후와 같은 현악기가 사용되고, 혹 이런 노래가 춤과 어우러져 불렸다면 안악3호분의 3인 악대 반주와 같은 관현악 연주도 이루어졌을 것으로 짐작될 뿐이다.
고취악과 어우러지는 가무는 고구려의 오랜 문화전통이기도 했으므로 여러 형태의 집단활동의 한 부분처럼 여긴 것으로 보인다. 고분벽화 행렬도에 고취악에 맞추어 춤추는 모습이 자주 등장하는 것도 이런 전통을 반영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행렬 고취악에 등장하는 춤이 대개 칼이나 창을 손에 쥐고 추는 무사의 춤이라는 사실은 고취악에 부여된 군사적 성격으로 말미암은 현상이자 고구려가 위·진에 이어 5호16국시대의 강력한 호족(胡族) 국가들과 교류하면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관습일 수도 있다.
북위가 북연을 멸망시킨 436년을 기점으로 고구려는 동아시아 4강으로서 지위를 확고히 하게 된다. 이로부터 거의 1세기 동안 평양은 고구려의 독자적 세력권으로 인정받은 동북아시아의 정치·사회·문화의 중심으로 기능하게 된다. 평양성은 이제 평양문화라는 용어가 쓰일 수 있을 정도로 나름의 사조가 형성되어 유행하다가 새로운 것으로 대체되기도 하는 도시가 된 것이다. 이러한 사회문화적 흐름에 힘입어 5세기 평양에서는 귀족사회를 주요 후원자이자 수요자로 하는 춤과 노래가 크게 발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고분벽화는 3인 이하의 무용수와 작은 악단이 동원되는 소규모 공연이 귀족의 초대로 귀족저택에서 빈번히 이루어졌음을 미루어 짐작하게 한다(전호태, 2013b). 4세기 중엽 제작된 안악3호분 벽화의 1인무를 제외한다고 하더라도, 마선구1호분의 2인무, 태성리1호분과 고산동10호분의 3인무는 모두 무덤주인의 관이 놓이는 고분 널방의 벽에 묘사되어 이런 저간의 흐름을 잘 보여준다. 도구를 동반하지 않는 이런 춤은 현악이나 관현악 반주와 함께 이루어지는 것이 일반적이었을 것이다. 장천1호분의 1인무가 앞방 벽에 그려진 것은 백희기악도가 펼쳐진 앞방 벽이 무덤주인과 초대받은 귀한 손님의 야외나들이 공간인 점과 관련된 듯하다.
귀족의 초대로 이루어진다고 해도 주로 야외에서 공연되던 군무는 무용총과 장천1호분의 예로 보아 악기 반주 없이 합창과 함께 펼쳐지는 것이 일반적이었던 듯하다. 실제 합창은 성격상 반주 대신이 될 수도 있다. 고취악이 중요한 역할을 했을 동맹과 같은 대규모 야외행사가 아니면 중소 규모의 합창과 군무(群舞)는 오히려 어우러지기에 적절했을 수도 있다. 더욱이 무용총이나 장천1호분에서 공연되는 것과 같은 긴 소매가 너풀거리도록 우아한 움직임을 보여야 하는 군무는 고취악을 특징짓는 강하고 빠른 박자와 어우러지기 어렵다. 물론 현악기로 이런 춤에 적합한 곡조를 반주하는 것은 가능할 것이다.
4세기 중엽부터 시작된 서방에서의 불교 전래는 고구려가 동아시아 바깥 세계의 관념 및 문화와 농도 짙게 접촉함을 의미했다. 불교는 고구려 사회로서는 이전에 겪어보지 못한 낯선 관념과 문화였다. 그러나 불교에 담긴 서아시아·인도의 관념과 문화는 이미 5호16국시대의 시작과 함께 다양한 경로로 고구려에 흘러들고 있었으므로 고구려의 지배층으로서는 국가적·사회적 차원에서 방안을 마련하여 대응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정치적·사회적 여건상 이미 크게 넓힐 수밖에 없었던 대외접촉과 교류의 통로로 삼는 것이 효과적인 대응이 될 수도 있었고 실제상황이 그런 방향으로 흘러갔다.
전연을 공략하기 위한 후조(後趙)와의 접촉, 전연을 멸망시킨 전진(前秦)과의 통교 등 사건을 계기로 고구려에는 중국에서 크게 유행하던 불교신앙과 문화가 본격적으로 전해졌다. 소수림왕이 전진에서 전해진 불교를 공인한 지 20년이 채 못 되어 고국양왕이 불교를 믿어 복을 구하라는 왕명을 내린 것은 이런 저간의 흐름을 국가 차원에서 공식화한 선언이라고 할 수 있다.주 030
각주 030)
『삼국사기』 권18 고구려본기6 고국양왕 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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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헌에 언급된 고구려의 호선무(胡旋舞)는 한동안 서방에서 동방으로 흐르던 문화전파의 물결을 타고 고구려에 전해져 자리 잡은 문화예술의 한 장르라고 할 수 있다. 서북인도 및 중앙아시아 출신 승려들이 불교를 널리 전하고자 동방으로 오는 노정은 이 지역문화와 관념이 동방에 전해지는 길이기도 했다. 이런 사실을 고려하면 동서교통의 지역 거점 중 하나였던 고구려의 국내성이나 평양에 서역의 사마르칸트를 중심으로 번성하던 강국(康國)의 호선무가 알려진 것을 이상히 여길 일은 아니라 하겠다(趙世騫, 1997).
눈길을 끄는 것은 호선무가 고구려 고유의 춤이 아님에도 고구려를 대표하는 춤의 하나로 문헌에 기록되었다는 사실이다.주 031
각주 031)
『신당서(新唐書)』 권15 지 제11 예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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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불교가 고구려에 전해진 뒤 사회 전반에 큰 변화를 가져오고 5세기 중엽에는 불교신앙에 바탕을 둔 내세관이 고분벽화의 주제로까지 선호되는 현상을 떠올리게 한다. 외래문화의 수용에 대한 개방적 태도, 수용된 외래문화요소의 적극적 소화, 외래문화의 고구려 문화구성요소로의 재창조라는 고구려식 외래문화 소화 원리가 호선무와 같은 서방 기원 예술 장르에도 적용되어 성공적인 결과에 이른 경우이다.
고구려가 서방문화예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고구려화했음은 수의 구부악(九部樂), 당의 십부기(十部伎) 중 서량기(西涼伎)에 사용된 것으로 소개된 악기의 상당수가 고려기(高麗伎)의 것과 일치한다는 사실을 통해서도 재확인된다(이혜구, 1957). 서량기와 겹치는 악기의 일부는 평양 천도를 전후한 시기에 고구려가 북위나 유목제국 유연을 다리로 삼아 서역과 접촉하거나 북위를 거쳐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고구려가 중국 서북의 5량(凉) 및 중앙아시아 각국의 문화를 불교문화의 일부로 대거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이들 악기 외에 춤이나 노래, 놀이도 동방에 전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전덕재, 2006; 2012; 2020).
고구려의 서역문화 수용 및 소화와 관련하여 검토와 해석이 더 필요한 부분은 5세기 편년 고분벽화에 구체적으로 표현된 교예(巧藝)이다. 약수리벽화분, 팔청리벽화분, 수산리벽화분에 묘사된 나무다리타기, 공과 막대 던지고 받기나 수레바퀴 공중돌리기, 칼재주 등은 한의 화상석과 고분벽화에서도 자주 발견되는 재주로, 한과 그 뒤를 이은 위·진 등 왕조와의 접촉을 통해 고구려에 알려진 이른바 ‘백희(百戱)’ 중 일부이다. 다만 공과 막대, 혹은 검을 동시에 사용하는 고구려 놀이꾼의 손재주는 두 종류의 도구를 따로 사용하는 것보다 기술적으로 진전된 것이어서 고구려 나름의 전통에서 비롯된 것으로 해석할 여지가 있다(전호태, 2018a).
그러나 장천1호분에 등장하는 원숭이가면놀이는 고구려에 새로 소개된 아직 낯설고 새로운 재주일 수 있다. 중국과 달리 기후환경으로 보아도 원숭이를 기르기 쉽지 않은 고구려에 원숭이가 직접 재주를 부리는 놀이가 일찍부터 알려져 유행하기는 어려웠다고 해야 할 것이다. 원숭이를 다루는 재주꾼 두 사람이 특이한 용모를 지닌 인물로 그려지지 않은 것은 이들이 고구려에 흘러든 공연을 업으로 삼으며 유랑하는 사람들일지라도 서역 출신은 아니었음을 시사한다. 그러나 5세기 중엽으로 편년되는 장천1호분에 특히 많은 서역문화 제재가 등장하는 점을 고려하면 벽화 중의 원숭이가면놀이도 유래는 서역일 가능성이 크다(전호태, 2016b).
392년 고국양왕이 국가적 차원에서 불교신앙을 장려하겠다는 의지를 피력하면서 동시에 추진한 것은 국가제의를 체계화하는 일이었다. 국사(國社)를 세우고 종묘를 수리하도록 함으로써 자칫 불교신앙과 문화의 확산 과정에 전통적인 종교관념과 제의체계가 약화되거나 혼란에 빠지지 않도록 한 것이다.주 032
각주 032)
『삼국사기』 권18 고구려본기6 고국양왕 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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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6년 북연 멸망을 기점으로 고구려가 동아시아 4강으로서의 지위를 확보하면서 천손국(天孫國) 의식에 바탕을 둔 고구려 중심의 천하관을 내외에 피력하고 범고구려문화의 정립과 전파를 시도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정책적 흐름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할 수 있다.
불교를 매개로 한 서역문화 수용 및 소화를 통해 5세기 고구려문화는 독자성과 보편성을 아울러 지녀 개성이 두드러진 국제적 성격의 문화로 재탄생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고구려 고유의 문화에 중국의 한 문화, 서아시아·인도문화를 포괄적으로 담은 서역문화가 차례로 더해지면서 범고구려문화로 불릴 수 있는 새로운 문화의 성립이 계속 시도되어 의미 있는 결과물을 내기에 이르렀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5세기 고구려의 국가적 과제의 일부이기도 했던 범고구려문화의 정립 과정에 외래문화요소가 어떤 방식으로 변형되고 녹아들었는지는 요소별 검토를 통해서만 그 실상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가능할 것이다.

  • 각주 001)
    『삼국지(三國志)』 권30 위서30 오환선비동이 고구려. 바로가기
  • 각주 002)
    『삼국사기(三國史記)』 권17 고구려본기5 미천왕 14년 10월 및 15년 9월. 바로가기
  • 각주 003)
    『수서(隋書)』 권81 열전46 동이 고려. 바로가기
  • 각주 004)
    『북사(北史)』 권94 열전82 고려. 바로가기
  • 각주 005)
    『삼국지』 권30 위서30 오환선비동이 고구려; 『신당서(新唐書)』 권220 열전145 동이 고려. 바로가기
  • 각주 006)
    『위서(魏書)』 권100 열전88 고구려. 바로가기
  • 각주 007)
    『남제서(南齊書)』 권58 열전39 동남이 고려국. 바로가기
  • 각주 008)
    『삼국사기』 권32 잡지 제1, “樂: 金花折風帽 白馬小遲回 翩翩舞廣袖 似鳥海東來.”; 『악부시집(樂府詩集)』 권78 잡곡가사18 당 이백 고구려. 바로가기
  • 각주 009)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권3 동명왕편 소인 『구삼국사(舊三國史)』 동명왕본기. 바로가기
  • 각주 010)
    『삼국지』 권30 위서30 오환선비동이 고구려. 바로가기
  • 각주 011)
    『삼국사기』 권18 고구려본기6 소수림왕 2년 6월. 바로가기
  • 각주 012)
    『삼국사기』 권14 고구려본기2 대무신왕 11년 추7월; 『삼국사기』 권15 고구려본기3 태조왕 7년 하4월. 바로가기
  • 각주 013)
    『삼국사기』 권14 고구려본기2 민중왕 4년 9월; 『삼국지』 권30 위서30 오환선비동이 예. 바로가기
  • 각주 014)
    『삼국사기』 권17 고구려본기5 동천왕 원년. 바로가기
  • 각주 015)
    『삼국지』 권30 위서30 오환선비동이 고구려; 『양서(梁書)』 권54 열전48 동이 고구려. 바로가기
  • 각주 016)
    『고사통(故事通)』 소인 『수신기(搜神記)』. 바로가기
  • 각주 017)
    『삼국사기』 권45 열전5 온달. 바로가기
  • 각주 018)
    『삼국지』 권30 위서30 오환선비동이 고구려; 『후한서(後漢書)』 권85 동이열전75 고구려. 바로가기
  • 각주 019)
    『삼국사기』 권33 지2 기용(器用). 바로가기
  • 각주 020)
    『삼국지』 권30 위서30 오환선비동이 고구려. 바로가기
  • 각주 021)
    『구당서(舊唐書)』 권299하 열전149상 동이 고려. 바로가기
  • 각주 022)
    『삼국지』 권30 위서30 오환선비동이 고구려. 바로가기
  • 각주 023)
    『삼국지』 권30 위서30 오환선비동이 고구려. 바로가기
  • 각주 024)
    『수서』 권81 열전 제48 동이 고려. 바로가기
  • 각주 025)
    『삼국사기』 권13 고구려본기1 유리명왕 11년 4월. 바로가기
  • 각주 026)
    『삼국사기』 권14 고구려본기2 대무신왕 15년 4월. 바로가기
  • 각주 027)
    『삼국지』 권30 위서30 오환선비동이 고구려. 바로가기
  • 각주 028)
    『삼국사기』 권14 고구려본기2 대무신왕 15년 4월. 바로가기
  • 각주 029)
    『수서』 권15 지 제10 음악하(下). 바로가기
  • 각주 030)
    『삼국사기』 권18 고구려본기6 고국양왕 9년 3월. 바로가기
  • 각주 031)
    『신당서(新唐書)』 권15 지 제11 예악. 바로가기
  • 각주 032)
    『삼국사기』 권18 고구려본기6 고국양왕 9년 3월.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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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벽화를 통해 본 생활상 자료번호 : gt.d_0008_0050_00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