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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통사

1. 궁궐유적

1. 궁궐유적

궁궐 또는 궁실이란 왕이 정무를 살피던 궁전을 비롯한 각종 공공건물을 함께 일컫는 말이다. 『삼국사기』에는 주몽이 건국하던 해에는 궁실을 지을 겨를이 없어 비류수가에 오두막을 짓고 기거하였으나, 3년 뒤인 동명왕 4년(기원전 34년) 가을 7월에 성곽과 궁실을 지었다고 전하고 있다.주 001
각주 001)
『삼국사기』 권13 고구려본기 동명성왕 원년, “而未遑作宮室 但結廬於沸流水上居之.”; 『삼국사기』 권13 고구려본기 동명성왕 4년, “秋七月, 營作城郭宫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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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고구려는 건국 초기부터 궁궐을 지었던 것으로 전하지만, 초기의 궁궐 모습이 어떠했는지는 오늘날 자세히 알기 어렵다. 문헌사료의 단편적인 기록을 통해 볼 때 고구려 궁궐은 왕궁 등 궁전건축 외에도 높은 대를 갖춘 건축과 정원 등을 갖춘 비교적 화려한 모습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주 002
각주 002)
『삼국사기』 권13 고구려본기 동명성왕 6년, “秋八月, 神雀集宮庭.”; 『삼국사기』 권13 고구려본기 동명성왕 10년, “秋九, 鸞集於王臺.”; 『삼국사기』 권16 고구려본기 산상왕 24년, “夏四月, 異鳥集于王庭.”; 『삼국사기』 권16 고구려본기 서천왕 7년, “九月, 神雀集宮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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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졸본시기 고구려 궁궐에 대해서는 오녀산성의 대형 건물지를 왕궁으로 추정하는 견해가 있지만(遼寧省文物考古硏究所, 2004), 유적의 연대는 물론이고 규모나 구조적인 측면에서 왕궁으로 비정하기는 어렵다. 2000년대 초반 국내성과 환도산성에 대한 발굴이 실시되어 국내성기 궁궐의 일면을 알 수 있게 되었다. 국내성 체육장지점 등 성 내부 중앙에서 4세기대의 건축유적이 조사되어 이를 통해 국내성기 궁궐건축의 윤곽을 추정할 수 있다(朴淳發, 2012; 여호규, 2012), 그러나 개발로 인해 제한적인 발굴만 실시되어 궁궐의 전체 규모나 구조를 온전히 확인하기는 어렵다(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集安市博物館, 2004a).
한편, 환도산성에서는 궁전지에 대한 전면 발굴이 실시되었다(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集安市博物館, 2004b). 그러나 출토유물로는 건축의 연대를 5세기 이전으로 소급하기 어려워 국내성시기 궁궐건축의 전모를 파악하는 데 한계가 있다. 평양 천도 이후 평양성 전기에는 대성산성 아래에 위치한 안학궁성이 있으며, 이에 대해서는 자세한 발굴조사 보고서가 간행되어 있으나 역시 건축연대와 축조주체 등에 대한 논란이 있다. 6세기 후반 장안성(오늘날 평양성)으로 도읍을 옮긴 후 궁궐은 평양성 내성 지역에 위치한 것으로 추정되지만, 1935년에 긴급 발굴된 두 건축유적을 제외하고는 발굴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역시 자세한 내용을 알기 어렵다.
 
1) 환도산성 궁전지
집안시 외곽에 위치한 환도산성은 국내성기 국내성의 방어성으로 기능했으며, 일시적으로 왕성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해발 652m의 환도산에 축조된 환도산성은 동·서·북 삼면이 험준한 봉우리로 둘러싸여 있으며, 남쪽에는 통구하가 흘러 자연해자 역할을 하고 있어서 방어에 유리한 지형을 갖추고 있다. 성의 둘레는 6,947m로 큰 성에 속하며, 모두 7개의 문지가 남아 있다. 2001년부터 2003년까지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는데, 남벽과 남문지 및 서문지의 구조가 자세히 밝혀졌으며, 성 내부 완사면에서 점장대와 연못, 궁전지 및 병영지 등이 조사되었다.주 003
각주 003)
이하 환도산성 궁전지에 대한 내용은 발굴조사보고서를 참고하여 정리한 것이다(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集安市博物館, 2004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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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전지는 성 내부 남쪽 해발 254m의 비교적 완만한 경사의 대지에 축조되었다. 남북 95.5m, 동서 86.5m 규모의 장방형 대지는 동북-서남 방향으로 경사를 이루고 있으며, 고저 차는 13m가량 된다. 궁전지는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담장의 길이는 동변 91m, 서변 96m, 북변 75m, 남변 70m로 둘레는 332m이며, 면적은 8,260.75㎡에 달한다. 궁전지 내부는 경사지를 4개의 계단식 기단으로 조성하였으며, 아래쪽 서변 담장 중앙부와 서쪽으로 치우쳐 2기의 문지가 확인되었다. 가장 높은 지점의 동변 담장 외곽에는 배수구를 설치하였고, 각 기단의 동변에도 배수구를 별도로 설치하였다(그림2).
그림2 | 환도산성 궁전지 평면도(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集安市博物館, 2004b, 도2, 41 수정)
4단의 기단부에는 모두 11기의 건물을 축조하였는데, 2호 기단과 3호 기단의 중앙에는 각각 계단이 설치되어 있고, 2호 기단과 1호 기단 사이에는 광장이 조성되어 있다. 대부분의 건물은 기단 내부에 조성하였으나 1호 건물은 중앙광장 북편에 단독으로 조성하였다. 건물은 모두 적심기초와 초석을 사용하였고, 건물의 평면형태는 대부분 장방형이나 1호와 4호, 5호 건물은 방형이다. 2호와 3호 건물은 팔각형으로 제사나 의례와 관련된 건물로 추정된다. 3호 기단에는 하나의 장방형 건물(9호 건물지)을 축조하였는데, 전체 길이는 84.5m, 폭은 4m로, 궁전지 건물 중에서 가장 크다.
중앙광장 북편에 단독으로 축조된 1호 건물은 외곽에 할석을 사용해 기단부를 만들었는데, 규모는 9×9.5m이다(그림3). 건물은 9개의 초석을 사용한 정면 2칸, 측면 2칸의 방형 건물로 주간 거리는 2.8m 내외이다.주 004
각주 004)
발굴조사보고서에는 주간 거리를 2m로 보고했으나, 도상으로 계측해보면 각 초석의 중심부 간 거리는 2.8m가량 된다(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集安市博物館, 2004b, 76~7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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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방형 건물인 4호와 5호 건물도 전체적인 규모와 형태는 1호 건물과 유사하다. 장방형 건물은 규모와 형태에 있어서 약간씩 차이가 있는데, 가장 큰 9호 건물은 측면 1칸으로 회랑건물로 추정하고 있다. 가장 낮은 쪽에 위치한 7호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구성된 방형 공간 8개가 남북으로 연접된 형태인데, 주간 거리는 1.8m 내외이다. 한편, 8호 건물과 11호 건물은 측면 4칸의 공간이 남북으로 연접되어 있는데, 주간 거리는 7호 건물에 비해 좁다.
그림3 | 환도산성 궁전지 1호 건물지(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集安市博物館, 2004b, 도42, 44, 45 수정)
1호 건물지 평·단면도
건물지 출토 초석
적심시설은 원형 수혈에 할석과 점토를 채운 형태인데, 7호 건물의 4호 적심의 경우 수혈의 직경은 1.65m, 깊이는 0.35m이다(그림3 7호-Z4). 초석은 대부분 자연석을 약간 다듬은 편평한 형태이나 일부는 화강암 표면을 정교하게 가공한 것들도 있다. 6호 건물의 29호와 34호 초석은 표면을 정면하여 곱게 다듬었으며, 가운데에 원형의 주좌를 만들었는데, 기둥의 직경은 45cm 내외이다. 7호 건물의 17호, 18호, 19호 초석은 주좌를 8각형으로 정교하게 다듬었는데, 기둥의 직경은 45~50cm로 추정된다(그림3).
환도산성 궁전지는 1962년 처음 윤곽이 조사된 직후부터 342년 전연 모용황의 침입으로 환도성이 함락되었을 때 소실되어 폐기된 궁전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궁전지에서 출토된 유물 중 4세기로 소급할 수 있는 것은 없으며, 연화문와당 등의 편년에 의하면 평양 천도 이후의 유물이 주를 이루고 있다. 따라서 현재까지의 자료만으로는 환도산성 궁전지는 평양 천도 이후 국내 지역이 별도(別都)로 재편되었을 당시의 건축물로 추정하는 것이 타당하다(여호규, 2012).
 
2) 안학궁성
평양 대성산 소문봉 남쪽의 평탄한 대지 위에 축조된 안학궁은 427년 평양 천도 이후부터 586년 장안성으로 수도를 옮기기까지 왕궁으로 이용되었다. 안학궁 북쪽에는 대성산성이 방어성으로 위치해 있으며, 동쪽과 남쪽의 대동강, 서쪽의 합장강이 해자 역할을 하고 있다.주 005
각주 005)
이하 안학궁성에 대한 내용은 발굴조사보고서를 참고하여 정리한 것이다(김일성종합대 학 고고학및민속학강좌, 1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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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학궁은 한 변 622m의 평행사변형 토성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총 둘레는 2.5km, 면적은 38만m²에 달한다. 성벽은 밑부분을 3~7단의 돌로 쌓고, 그 위에 12m 높이로 흙을 다져 쌓은 토심석축 성벽이며, 성벽 바깥쪽에는 해자를 돌렸다. 문지는 모두 6개로, 남벽에 3개, 동벽과 서벽 및 북벽에 각각 하나씩 성문을 세웠으며, 성벽의 네 모서리에는 각루를 설치하였다. 성 내부 지형은 대체로 북고-남저, 서고-동저의 지형인데, 북문 남동쪽과 남궁 서쪽에는 흙을 쌓아 인공산을 만들고 정원을 조성하였다. 궁성 남동쪽 모서리에는 방형 연못을 설치하였으며, 성 내부의 물은 북문 동쪽의 암문에서부터 남쪽으로 이어진 수로를 따라 연못 서쪽을 지나 수구문을 통해 배출되도록 하였다(그림4).
그림4 | 안학궁성 건물 배치도(김일성종합대학 고고학및민속학강좌, 1973, 그림84 수정)
궁성 내부에는 궁전 21기, 회랑 31기 등 모두 52기의 건물이 있었으며, 이들 건물의 총건평은 31,458m²에 달한다. 건물들은 궁성의 중심 축을 따라 남궁, 중궁, 북궁, 동궁, 서궁 등 다섯 구역으로 나누어 배치하였는데, 남북 축을 중심으로 좌우 대칭으로 배치하였으며, 회랑으로 연결되었다. 남궁은 가운데 규모가 큰 궁전 건물을 배치하고 좌우에 2기의 궁전을 배치하였으며, 각 궁전 건물은 회랑으로 연결하였다. 북궁은 세 구역에 각각 2기의 궁전 건물을 남북으로 평행하게 배치한 복잡한 구조이다. 동궁은 궁성 내부 동쪽의 가장 낮은 지점에 조성하였으며, 고저 차와 남북으로 이어지는 수로로 인해 다른 궁전들과 떨어져 있다. 동궁은 남북으로 길게 조성하였는데, 북쪽에 4기의 건물을 배치하고 이와 다소 떨어진 남쪽에 2기의 건물을 배치하였다. 서궁은 북궁과 이어져 있으며, 모두 7기의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남궁은 조회를 비롯한 왕의 정무를 위한 외전 또는 정전, 중궁은 왕이 일상적으로 거처하면서 정무를 돌보던 내전 또는 편전으로 추정되며, 북궁은 왕의 침실이 있는 침전으로, 동궁은 태자의 거처로, 서궁은 왕궁에서 일하던 사람들의 거처로 이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건물은 문루와 회랑, 궁전 등으로 구분되는데, 모든 건물은 적심기초를 사용하였으며, 별도의 난방시설은 설치하지 않았다. 적심기초는 2,590개가량 확인되었는데, 지름 2.5~3.5m, 깊이 0.6~1.7m의 수혈에 할석을 채운 형태이며, 문지의 적심 규모가 궁전 건물지의 적심보다 규모가 크고 깊이도 깊다. 적심시설은 원형이 주를 이루나 동궁의 1호 궁전 건물은 방형이다. 적심 위의 초석은 화강암을 편평하게 가공하였는데, 원형으로 잘 다듬은 것도 적지 않다.
회랑은 2열 또는 3열의 초석 열이 길게 이어지는 형태인데, 3열이 주를 이룬다. 문지는 성벽 중간에 설치된 것과 회랑 중간에 설치된 것으로 구분되는데, 초석은 3열이며 측면 2칸 구조이며, 정면 칸수는 규모에 따라 다르다. 남벽 중앙부에 위치한 남중문은 45.6×18m 규모의 기단부 위에 24개의 초석을 설치한 정면 7칸, 측면 2칸의 구조이다. 적심의 규모는 지름 3~3.5m, 깊이 1~1.7m인데, 앞줄은 지름 3.5m, 뒤의 두 줄은 지름 3m이며, 깊이는 뒷줄의 적심이 깊다. 정면 주간 거리는 가운데가 6.1m로 가장 넓고, 그 좌우로 각각 5.1m, 6m, 4.6m로 차이가 있으며, 측면 주간 거리는 5m이다(그림5-1).
궁전 건물은 주변보다 높게 기단부를 조성하고 축조하였는데, 각 구역별로 중심건물은 가운데에 기둥을 배치하지 않았다. 가장 규모가 큰 중궁의 1호 궁전터는 앞뒤 두 채로 구성되어 있다. 전체 기단의 규모는 정면 90.5m, 측면 33m에 달하는데, 앞채는 정면 19칸이고, 측면은 중심부 5칸, 좌우 측면 4칸이며, 중심주 가운데에는 기둥을 설치하지 않았는데, 이러한 기둥 배치로 보아 중심부는 중층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주간 거리는 중심부 가운데가 5m로 가장 넓고, 나머지는 4.5m이며, 측면 주간 거리는 앞에서부터 3.25m, 3m, 3m, 3m, 4.25m로 차이가 있다. 중심부 좌우 나래의 주간 거리는 정면이 각각 4.2m이고, 측면은 앞에서부터 각각 3m, 2.75m, 2.75m, 3m이다.
정전에 해당하는 남궁의 1호 궁전은 길이 57.1m, 폭 27.3m의 기단 부위에 조성하였는데, 기단부는 1.5m로 다른 건물에 비해 높다. 초석은 정면으로 12개, 측면으로 5개를 배치하였으며, 가운데 줄의 초석 8개는 설치하지 않아 넓은 공간을 확보하였다. 건물은 장방형으로 정면 11칸, 측면 4칸으로 정면 주간 거리는 가운데가 가장 넓어 5.5m이며, 그 양쪽으로 4.5m, 4.4m, 4.5m, 4.4m, 4m로 전체 길이는 49.1m이다. 측면 주간 거리는 앞뒤 두 칸은 4.2m, 가운데 두 칸은 4.1m로 전체 길이는 16.6m이다(그림5-2). 궁전 건물과 회랑지 등에서는 많은 양의 기와 등 건축부재가 출토되었으며, 중궁과 남궁에서는 각각 2점의 치미가 출토되어 건물의 규모와 웅장한 외관을 엿볼 수 있다. 치미는 연주문이 장식된 것 1점과 몸체에 비늘무늬를 장식한 것 3점으로 구분되는데, 중궁에서 출토된 치미는 높이가 2.1m, 너비 1.8m, 두께 0.4m로 가장 크다. 비늘무늬로 장식된 치미는 높이 1.63m로 중궁 출토 치미보다는 작으나 발해 동경성에서 출토된 같은 형태의 치미보다는 크다(그림5-3, 4).
그림5 | 안학궁성 남중문지, 남궁 1호 궁전지 평·단면도 및 출토 치미(김일성종합대학 고고학및민속학강좌, 1973, 그림98, 138, 216 수정)
1. 남중문 평·단면도
3. 중궁 출토 치미
2. 남궁 1호 궁전지 평·단면도
4. 남궁 출토 치미
또한, 발굴조사를 통하여 많은 양의 기와와 토기 등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는데, 이를 근거로 평양 천도 직후에 안학궁성을 축조하여 586년 장안성으로 이도할 때까지 사용한 것으로 추정하였다. 그러나 안학궁을 평양 천도 직후 축조된 왕궁으로 보는 북한 학자들의 견해와 달리 안학궁에서 출토된 기와의 연대가 늦다는 점, 안학궁 축조 이전에 폐기된 고구려 석실분의 존재 등을 근거로 안학궁을 고구려 말기에 사용된 별궁(關野貞, 1941; 田中俊明, 1995), 또는 고려 서경의 좌궁으로 비정하는 견해(田中俊明, 2004; 朴淳發, 2012) 등이 제기되었다.
 
3) 평양성 내성 건물지
평양성에 대한 최초의 발굴조사는 일제강점기인 1935년에 실시되었다. 같은 해 3월 만수대의 평양신사 남쪽 참도(參道)를 개축하는 과정에서 문지가 확인되었고, 8월에는 만수대 대지에 평안남도 청사를 신축하는 과정에서 건물지가 확인되었는데(그림6), 이것이 평양성 내에서 조사된 유일한 궁궐 관련 건축이다.
그림6 | 평양성 배치도 및 건물지 발굴지점 위치도(배경지도는 국토지리정보원 1950년 항공사진, 평양성 윤곽 및 문지, 리방구획은 기경량, 2017, 도61 참조)
만수대 문지는 1935년 3월 평양신사 남쪽의 참도 동쪽 경사면에 광장을 조성하기 위해 공사를 하던 중 지표 아래 3m 지점에서 소토층과 목탄층, 고구려 기와가 드러나 발굴조사를 실시한 결과 확인되었다(그림7). 문지는 동서 방향의 토루를 남북으로 가로질러 설치하였는데, 폭은 4.8m, 문도의 길이는 7m가량이다. 문도 양쪽에는 55cm 간격으로 방형 초석을 배치하였으며, 초석 가운데에는 원형 주공이 있는데, 불에 탄 목주가 남아 있는 경우도 있다. 문지 북단 5.2m 지점에서 화강암으로 된 문지방석이 확인되었다. 문지방석 양단에는 문주를 세웠던 장방형 구멍이 뚫려 있었고, 그 안쪽의 방형 초석에는 반구형의 철제확이 설치되어 있었으며, 주변에서는 두께 20cm 내외의 목제문비가 확인되었다. 또한 문지방석 양단 안쪽으로는 1.45m 간격을 두고 폭 28cm 홈이 2개 설치되어 있었는데, 수레가 다니던 통로로 추정된다. 문지가 조사된 지점은 만수대 서쪽의 성벽 토루와 골짜기로 구분되어 있어서 성문으로 보기 어려우며, 평양신사가 있던 북쪽 대지에 세워진 건물지를 둘러싼 토루에 설치된 것으로 추정된다(小泉顯夫, 1938b; 1986).
그림7 | 만수대 주변 문지 및 문지방석(小泉顯夫, 1938b, 도판74-76 수정)
건물지는 만수대 대지 정상부에서 10m가량 아래쪽에 위치해 있으며, 평안남도 청사를 신축하는 과정에서 확인되었다. 서북쪽의 성벽으로 향하는 경사면 중복부를 굴토하는 과정에서 소토 및 탄화된 목재 등이 섞여 있어서 조사한 결과 화재로 소실된 건물지의 기둥으로 확인되었다. 성벽의 내황(內隍)에 연접한 건물지는 북동-남서 방향의 세장방형이며, 양쪽 끝은 이미 유실되어 전체 크기를 알 수 없지만 남아 있는 크기는 폭 4m, 길이 36m에 달하는 거대한 규모이다(그림8). 건물지 양단에는 길이가 서로 다른 장방형 석재를 잇대어 깔고, 그 안쪽에는 4m 간격을 두고 원형과 방형의 초석을 배열하였다. 북서쪽 초석렬 바깥쪽은 급경사를 이루어 다른 유구가 확인되지 않았으나 남동쪽 초석렬 아래쪽으로는 할석을 깔아 만든 폭 1.6m가량의 기단이 확인된다. 다시 기단의 남동쪽으로는 석렬이 이어져 계단형 지형을 이루고 있어서 다른 건물지로 연결될 것으로 보이나, 소방대 건물 등이 있어서 확인하지 못하였다. 이상의 조사된 상황을 통해 볼 때 다른 건물지에 딸린 회랑시설로 추정되며, 출토유물 중에 고려 기와와 도자편이 상당수 섞여 있는 점으로 보아 이 건물지는 고구려시기에 초축된 후 고려시기에 개축된 것으로 추정된다(小泉顯夫, 1986).
그림8 | 만수대 건물지 - 평·단면도(小泉顯夫, 1938b, 도6, 도판70 수정)
그림8 | 만수대 건물지 - 건물지 전경(小泉顯夫, 1938b, 도6, 도판70 수정)

  • 각주 001)
    『삼국사기』 권13 고구려본기 동명성왕 원년, “而未遑作宮室 但結廬於沸流水上居之.”; 『삼국사기』 권13 고구려본기 동명성왕 4년, “秋七月, 營作城郭宫室.” 바로가기
  • 각주 002)
    『삼국사기』 권13 고구려본기 동명성왕 6년, “秋八月, 神雀集宮庭.”; 『삼국사기』 권13 고구려본기 동명성왕 10년, “秋九, 鸞集於王臺.”; 『삼국사기』 권16 고구려본기 산상왕 24년, “夏四月, 異鳥集于王庭.”; 『삼국사기』 권16 고구려본기 서천왕 7년, “九月, 神雀集宮庭.” 바로가기
  • 각주 003)
    이하 환도산성 궁전지에 대한 내용은 발굴조사보고서를 참고하여 정리한 것이다(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集安市博物館, 2004b). 바로가기
  • 각주 004)
    발굴조사보고서에는 주간 거리를 2m로 보고했으나, 도상으로 계측해보면 각 초석의 중심부 간 거리는 2.8m가량 된다(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集安市博物館, 2004b, 76~77쪽). 바로가기
  • 각주 005)
    이하 안학궁성에 대한 내용은 발굴조사보고서를 참고하여 정리한 것이다(김일성종합대 학 고고학및민속학강좌, 1973).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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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궁궐유적 자료번호 : gt.d_0008_0060_0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