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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통사

3. 사찰유적

3. 사찰유적

고구려에 불교가 공인된 것은 372년의 일이다. 372년 전진 왕 부견이 승려 순도를 통해 불상과 불경 등을 고구려에 전하였으며,주 009
각주 009)
『삼국사기』 권18 고구려본기 소수림왕 2년, “夏六月, 秦王苻堅 遣使及浮屠順道 送佛像經文 王遣使廻謝 以貢方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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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375년에는 초문사(肖門寺)와 이불란사(伊弗蘭寺)를 건립하고 각각 순도와 아도를 머무르게 하였다.주 010
각주 010)
『삼국사기』 권18 고구려본기 소수림왕 5년, “春二月, 始創肖門寺 以置順道 又創伊弗蘭寺 以置阿道 此海東佛法之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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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고구려에 불교가 전해진 것은 그보다 훨씬 전의 일인데, 4세기 전반 동진의 승려 지둔이 고구려의 도인에게 편지를 보냈다는 기록이 있으며, 357년에 축조된 안악3호분 벽화에도 불교의 상징인 연꽃이 그려지기도 한다. 불교가 공인된 이후 아도를 비롯해 승려들이 고구려에 입국하고, 고국양왕은 불교를 믿어 복을 받으라는 교를 내리기도 한다. 한편, 평양 천도를 앞두고 광개토왕은 평양에 9개의 사찰을 건립하기도 하는데,주 011
각주 011)
『삼국사기』 권18 고구려본기6 광개토왕 2년, “秋八月, 創九寺於平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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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불교의 수용은 국가의 적극적 후원하에 이루어졌으며, 4세기 중엽 이후에는 사찰 건물이 축조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구려 사찰 건축은 고분벽화에도 묘사되었는데, 요동성총에는 내곽에 여러 층으로 묘사된 불탑이 확인되며, 장천1호분에는 주인공 부부가 절을 방문하여 불상에 예배를 드리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이처럼 늦어도 4세기 후반경 고구려에는 사찰이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지만 국내성 지역에서는 사찰 건축이 확인되지 않고 있다. 그 밖에 문헌에는 금강사, 반룡사, 영탑사, 개원사, 연구사, 금동사, 전구사, 대승사, 대원사, 유마사, 중대사 등의 사찰이 등장하는데, 이 중 금강사는 평양의 청암리사지에 비정되고, 나머지는 위치를 정확히 알 수 없다. 평양 천도 전후 또는 천도 이후의 사찰은 평양의 청암리사지와 상오리사지, 원오리사지, 정릉사지 및 봉산 토성리사지 등을 통해 알 수 있다. 이들을 통해 볼 때 고구려 사찰의 기본 배치는 가운데 탑을 중심으로 동·서·북쪽에 금당을 세운 1탑3금당식 가람을 특징으로 한다. 그 외에도 평양 일원에는 영명사지, 범운암, 낙사지, 청동사지, 중흥사지 등 고구려 사찰로 추정되는 사찰터가 있으며, 중흥사지에는 당간지주가 남아 있다(손수호·리영식, 2009).
 
1) 청암리사지
청암리사지는 안학궁성 서남쪽의 청암리토성 내부에 위치하며, 1938년에 조사되었다. 청암리토성은 안학궁성 남쪽을 동서로 흐르는 대동강이 방향을 바꿔 남행하는 지점에 위치하며, 토성의 남쪽 대동강 남안에는 장안성이 위치한다(小泉顯夫, 1940). 청암리토성 남벽은 대동강과 접하고, 동쪽에는 합장강이 남북으로 흐르는데 전체 평면은 반달 모양을 이루고 있다. 토성 내부 동서 양쪽과 중앙부에서 동쪽으로 약간 치우친 곳 등 세 지점에 고구려시기의 기와가 집중적으로 분포하는데, 청암리사지는 중앙부 동쪽에 위치한다(그림10-1).
청암리사지가 위치한 곳은 북동-남서 방향의 장방형 대지상 지형인데, 전반적으로 평탄한 지형을 이루나 북쪽이 약간 높다(그림10-2). 청암리사지는 전형적인 1탑3금당식 가람으로 남쪽에서부터 중문지, 목탑지, 중금당지를 일직선상으로 배치하였으며, 목탑지 좌우에는 각각 금당을 배치하였다. 이와는 별도로 중금당 동북쪽 대지에는 벽돌을 깐 건물지가 확인되었다(小泉顯夫, 1940). 제일 남쪽의 중문지는 가운데 문지 기초부와 좌우로 이어지는 회랑으로 구성되는데, 기초부 상면에는 고려시대 건물지가 중복되어 있어서 훼손이 심하여 기초부는 확인되지 않으며, 물받이시설만 확인된다. 문지의 북쪽 물받이시설에서 10.51m 지점에 목탑지 남변 기단이 위치하는데, 두 건물은 자갈로 포장된 도로를 통해 연결된다(그림10-3).
그림10 | 청암리토성과 청암리사지 - 1. 청암리토성과 청암리사지 위치(小泉顯夫, 1940, 도판2, 9, 10 수정)
그림10 | 청암리토성과 청암리사지 - 2. 청암리사지 배치도(小泉顯夫, 1940, 도판2, 9, 10 수정)
그림10 | 청암리토성과 청암리사지 - 3. 청암리사지 평면도(小泉顯夫, 1940, 도판2, 9, 10 수정)
중앙부에 위치한 목탑지는 내부시설은 모두 훼손되고 외부의 기단시설과 초석렬, 물받이시설과 계단이 남아 있다. 기단부는 암반풍화토를 정지하여 만든 대지 위에 다듬은 돌을 놓아 팔각형으로 조성하였으며 각 변의 길이는 9.5m이다. 팔각 기단부 바로 바깥쪽에는 초석을 배치하였는데, 기단부보다 한 단 낮은 위치에 있다. 초석은 방형 또는 장방형으로 내부에 방형 주공이 있으며, 모서리에 위치한 초석은 오각형으로 정교하게 다듬어 팔각 기단부와 일치되게 하였다(그림11-2). 초석은 일부 유실된 것도 있지만 각 변에 5개씩을 설치하였으며, 양쪽 모서리 초석의 거리는 9.9m, 초석 사이의 주간 거리는 1.98m가량 된다. 초석렬 바깥쪽으로는 다듬은 할석으로 면을 맞추고 내부는 자갈을 깔아 물받이시설을 설치하였는데, 폭은 0.7m가량 된다. 물받이시설은 동·서·남·북 네 변의 중앙부에서는 직각으로 이어져 중문지, 동·서 금당지, 중금당지로 연결되는데, 연결 도로의 가운데에는 다듬은 할석을 두 줄로 세워 암거 형태의 배수로를 설치하였다. 또한 각 변의 연결부에는 계단을 설치하였던 흔적이 있는데, 남변과 서변의 경우 초석 사이에 커다란 장방형 장대석이 하나 남아 있다(그림11-2). 물받이시설 한 변의 길이는 10.2~10.4m로 약간씩 차이가 있다. 중금당지의 서벽 북단의 기초부도 이와 유사한 구조를 하고 있는데, 건물 기단부와 물받이시설 양쪽 끝에는 판석을 세워 막았는데, 목탑지의 경우 판석이 확인되지는 않지만 원래 같은 구조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팔각 탑지 내부구조는 유실되어 남아 있지 않지만 내부의 팔각 기단과 한 단 낮은 초석렬의 이중 기단, 외곽의 물받이시설은 정릉사지, 상오리사지, 토성리사지의 목탑지에서 같은 구조를 하고 있어서 고구려 목탑지 구조의 기본적인 형태라 할 수 있다. 청암리사지 목탑지의 규모는 물받이시설의 폭은 27m, 초석렬 간의 폭은 24m, 기단부의 폭은 23.6m가량 되는데, 알려진 고구려 목탑지 가운데 가장 크다.
중금당지는 목탑지 북변에서 14.65m 떨어져 있는데, 고려시대 건물과 중복되어 있으며, 건물지 서벽 북쪽 지점에서 고구려시기의 건물 기초부가 확인되었다. 중금당의 기초부는 내부의 기단부와 외곽의 물받이시설, 그 사이의 초석렬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그림11-1). 기본적인 구조는 목탑지 기초부와 같은데, 초석렬이 물받이시설 쪽에 설치되어 있으며, 물받이시설과 기단부 양단에 판석을 세워 막은 점 등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다. 고구려 건물지 상층의 고려시대 건물지는 긴 장대석을 연결하여 기단부를 조성하였는데, 전체 규모는 동서 32.46m, 남북 19.18m이며, 고구려시기 중금당의 규모는 이보다 약간 작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림11 | 청암리사지 중금당지 및 목탑지 평·단면도 - 1. 중금당지 서벽 북단 기초부(小泉顯夫, 1940, 도1, 2 수정)
그림11 | 청암리사지 중금당지 및 목탑지 평·단면도 - 2. 목탑지 남벽 기초부(小泉顯夫, 1940, 도1, 2 수정)
동금당지는 동벽 일부가 잔존하는데, 전체 길이는 23.48m이다. 동벽에는 기단부 바깥쪽으로 5개의 초석이 남아 있고, 남변에도 하나가 있다. 남아 있는 초석의 배치를 보면 원래 동변에는 8개의 초석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주간 거리는 가운데가 3.6m이고, 그 양쪽으로는 각각 3.65m, 3.62m, 2.67m로 일정하다. 동변 초석렬의 배치를 남변에 적용해보면 남변에는 5개의 초석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전체 건물은 정면 7칸, 측면 4칸으로 추정된다. 서금당은 훼손이 심하여 동변과 북변의 물받이시설과 목탑지와 연결되는 자갈길 일부가 확인되었다. 서금당 물받이시설의 윤곽은 남북 길이가 27m, 동서 폭은 12m이며, 목탑지 서변과는 11.72m 떨어져 있다. 한편, 중금당지 동북편에도 건물지가 확인되는데, 건물지 전면에 벽돌을 깔았으며, 적심기초 5개와 초석 1개가 확인되었다.
출토유물 중 ‘金’ 또는 ‘寺’ 등 명문 기와가 있어 이를 근거로 청암리사지를 문자명왕 7년(498년)에 축조된 금강사로 추정하는데,주 012
각주 012)
『삼국사기』 권17 고구려본기7 문자명왕 7년, “秋七月 創金剛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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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암리사지 남쪽의 대동강에는 금강탄으로 불리는 여울이 있고, 주변에 금강전, 탑현 등의 지명이 남아 있어 이를 뒷받침해주고 있다. 또한 『동국여지승람』에는 “금강사터는 부의 동북 8리에 있다”고 하였으며, “주암산은 부의 동북 10리에 있다”고 하였는데,주 013
각주 013)
『동국여지승람』 권51, “金剛寺遺址在府東北八里.”; “酒巖在府東北十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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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또한 청암리사지의 위치와 일치한다(그림10-1).
 
2) 상오리사지
상오리사지는 청암리사지 동남쪽 약 2km 떨어진 대동강 북안의 대지상에 위치하고 있으며(그림12-1), 1939년에 조사되었다(齊藤忠, 1940). 조사 전 대지상에는 기와편들이 산재하고 있었으며, 금동제풍탁과 철제고리가 수습되기도 하였다(小泉顯夫, 1986). 조사를 통해 목탑지와 동·서 금당지 일부가 확인되었으나 중금당과 문지는 훼손되어 확인할 수 없었다(그림12-3).
그림12 | 상오리사지 - 1. 위치도(小泉顯夫, 1986, 도130, 134, 135 수정)
그림12 | 상오리사지 - 2. 목탑지 기초부 노출광경(小泉顯夫, 1986, 도130, 134, 135 수정)
그림12 | 상오리사지 - 3. 평면도(小泉顯夫, 1986, 도130, 134, 135 수정)
암반풍화토를 정지하고 만든 목탑지는 8각 기단을 이루고 있으며, 외곽에 0.9m 폭으로 자갈돌 4줄을 깔아 만든 물받이시설이 조사되었는데, 한 변의 길이는 8m가량 된다. 청암리사지 목탑지와 유사한 구조이지만 물받이시설 안쪽의 기단부 초석은 남아 있지 않으며, 내부에는 장방형 판석을 연결한 방형구조가 확인된다(그림12-2). 목탑지 동·서 양변에서 각각 4m가량 떨어진 지점에는 금당지가 확인되는데, 규모는 정면 25.8m, 측면 12.6m이며, 기단부는 길이 0.5m가량의 판석을 정연하게 깔았다. 보존 상태가 비교적 양호한 서금당지의 기단부 바깥쪽에는 길이 2m 간격으로 장대석이 놓여 있으며, 상면에는 방형의 구멍이 지그재그로 배치되어 있는데, 난간을 세웠던 시설로 추정된다. 동·서 금당지와 팔각 탑지의 통로에는 길이 0.7m, 폭 0.4m의 판석을 깔았는데, 서금당 쪽에 5매, 동금당 쪽에 2매가 남아 있다. 팔각 탑지의 남·북 양변에도 계단이 있었던 흔적과 중문과 중금당으로 이어지는 포도의 흔적이 남아 있다. 조사 과정에서 20여 점의 와당과 ‘東’자를 새긴 기와가 출토되었다.
 
3) 원오리사지
원오리사지는 평안남도 평원군 덕산면 원오리(현재는 덕포리)에 위치하며, 1937년에 조사되었다(小泉顯夫, 1938a). 평원군 일대는 평양에서 서북쪽으로 24km가량 떨어진 평원지역에 해당되며, 해발 248m의 만덕산 정상에서 서남쪽 기슭의 단구상 지형에 절터가 위치하고 있다. 절터는 남북 방향으로 상하 2단의 지형을 이루고 있는데, 중간에 높은 돌담장이 있으며, 상단부 남단에서는 고려시대 석탑 옥개석이 확인되었다(小泉顯夫, 1986). 조사결과 고구려시기의 절터가 폐기된 후에 고려시대 사찰이 들어선 것으로 확인되었는데, 조사 당시에는 경작지로 개간된 상태였다.
문지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남쪽의 낮은 지역은 훼손이 심하여 북쪽의 상단에 대한 발굴을 실시하였는데, 상층에서는 고려시대 건축 유구가 확인되었으며, 그 아래에서 고구려시기 건물의 기초부가 조사되었다. 고구려시기 건축의 기초부는 건물지 동북쪽에 치우친 지점에서 확인되는데, 2m 간격으로 배치된 2개의 잘 다듬은 대형 판석이 놓여 있었으며, 그 아래에는 할석을 채운 적심이 확인되었다. 대형 판석의 동쪽으로는 얇은 판석을 세워 연결한 건물 기단부 측면부가 확인되었다. 다시 그 남쪽에는 여러 개의 초석이 노출되었는데, 두 개의 원형 초석은 원래 위치로 보이고 나머지는 원래 위치에서 이동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훼손이 심하여 가람배치를 확인하기는 어려우나 조사된 건물지는 중금당지로 추정되며, 남쪽으로는 탑과 중문이 배치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원오리사지에서는 발굴조사 이전에 이미 니불이 수집되어 주목을 받고 있었는데, 조사 과정에서도 여러 점의 니불과 와당 및 파편 상태의 치미 등이 출토되었다.
 
4) 정릉사지
정릉사지는 평양시 력포구역 무진리 일대 나지막한 산기슭에 위치하는데, 평양시 중심부에서 동남쪽으로 약 22km 정도 떨어진 곳이다. 사지의 바로 북쪽에는 전동명왕릉이 있으며, 그 뒤로 산중턱에는 진파리고분군이 위치하고 있다. 발굴조사 과정에서 ‘定陵’, ‘陵寺’ 등의 글자가 새겨진 토기 조각과 ‘定’, ‘寺’ 등을 인각한 기와 조각 등이 출토되어 정릉사로 불리게 되었는데, 시조 동명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건립한 원찰로 추정된다. 1974년 김일성종합대학에서 전동명왕릉을 비롯한 진파리고분군과 정릉사지 일대를 발굴하였다. 절터가 위치한 지역은 동서 방향으로 넓은 평지를 이루고 있으면서 북쪽과 동쪽이 약간 높은 지형을 이루고, 서남쪽의 일부 지점은 산에서 흘러내리는 하천의 범람으로 심하게 훼손되어 유적이 남아 있지 않았다(그림13). 발굴조사를 통해 절터의 규모는 동서 223m, 남북 132.8m, 면적은 29,614.4㎡에 달하며, 1개의 목탑지와 18기의 건물지, 10기의 회랑지와 용도를 알 수 없는 원형 벽돌시설 2기, 방형 부석시설 1기를 확인하였다. 정릉사지는 서쪽으로 2° 치우친 남향으로 정남향에 가까우며, 전동명왕릉과는 3° 정도 틀어져 있다(김일성종합대학, 1976).
그림13 | 정릉사지 평·단면도(김일성종합대학, 1976, 그림144 수정)
정릉사는 대표적인 고구려 사찰로 1탑3금당식 가람배치를 하고 있으며, 사찰의 외곽은 회랑식 담장을 돌렸으며, 그 안에는 1기의 탑과 크고 작은 건물 18채가 배치되어 있고, 각 구역과 건물들은 모두 회랑으로 연결하였다. 건물지는 5개 구역으로 구분되는데, 각 구역은 회랑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사지 전체의 북쪽과 동서 양 측면에는 배수구를 설치하였다. 사찰의 중심부인 제Ⅰ구역에는 10기의 건물지가 조사되었는데, 남쪽에서부터 중문, 목탑, 동금당과 서금당이 회랑으로 둘러싸여 있고, 그 북쪽에는 중금당과 경루 및 종루가 회랑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다시 그 북쪽으로는 강당 2기와 온돌이 설치된 건물 1기가 배치되어 있다(그림13). 제Ⅰ구역 북단 배수구 바깥에는 남북 24m, 동서 14m 범위에 기묘한 형태의 바위가 노출되어 있으며, 바위산과 회랑 사이에는 바위를 깎아서 만든 길이 있다. 이곳에 있던 암반 노두는 사찰을 건립할 당시 의도적으로 노출하여 조성한 정원시설로 추정된다. 그밖에 9호 건물지와 10호 건물지 사이의 회랑 중간에는 동서 방향의 배수로를 설치하였는데, 할석을 쌓아 만든 깊은 지하식 배수구로 서쪽으로 이어져 건물 바깥쪽 배수구와 연결되어 물이 빠져나가도록 하였다.
제Ⅱ구역은 중심부 바로 서쪽에 위치하며, 남쪽에 원형 벽돌을 깐 시설이 있고, 회랑을 지나 북쪽에는 2기의 건물지가 남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남쪽 1호 건물지에는 기다란 온돌을 설치하였다. 제Ⅱ구역 북쪽 회랑지에서 10m 정도 떨어진 지점에는 5.8×5.4m 규모로 할석을 쌓은 석축 구조물이 있는데, 용도는 알 수 없다. 제Ⅲ구역은 중심부 바로 동쪽에 위치하는데, 훼손이 심하여 남쪽의 원형 벽돌시설과 회랑지 외에 다른 건물이 확인되지는 않았다. 원형 벽돌시설은 제Ⅱ구역의 원형 벽돌시설과 대칭되는 지점에 있으며, 직경은 4.6m이다. 가운데 일부 지점은 벽돌이 남아 있지 않지만 시설 전면에 걸쳐 벽돌을 둥글게 깔아 원형시설을 만들었으며, 맨 바깥 줄은 벽돌을 세워서 마감하였는데, 용도는 알 수 없다. 제Ⅳ구역은 사지의 서쪽 끝부분에 해당하며, 훼손이 심하여 1기의 건물지와 회랑지 및 배수구 일부가 조사되었다. 제Ⅴ구역은 사지의 동쪽 끝부분에 해당하며, 북쪽 일부를 제외하고 훼손이 심하다. 유구가 잔존하는 북동쪽 모서리 부분에는 배수구가 정연하게 남아 있으며, 3기의 건물지가 회랑으로 둘러싸여 있다(그림13).
제Ⅰ구역 중앙 남부에 위치한 팔각 목탑지는 청암리사지나 상오리사지, 토성리사지의 목탑지와 유사한 구조인데, 청암리사지 목탑지보다는 약간 작은 규모이다. 목탑지 외곽의 물받이시설은 0.6m 폭으로 할석과 판석을 깔았으며, 한 변의 길이는 약간씩 차이가 있으나 8.4m 정도이다. 물받이시설의 동·서·남·북 네 변의 중앙에는 1.3~2m 폭으로 통로가 있는데, 문지와 금당지로 연결되는 계단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목탑지 기단부는 물받이시설보다 한 단 높게 조성하였으며, 외곽에는 면을 맞춘 할석을 놓고 내부에는 전면에 걸쳐 할석을 채웠는데, 기초부의 깊이는 2m이다(손수호·리영식, 2009). 돌기초의 상부시설은 훼손되어 남아 있지 않으며, 기단부와 물받이시설 양쪽 끝부분에는 얇은 판석을 세워 막았는데 폭은 0.8m가량 된다(그림14).
그림14 | 정릉사지 팔각 탑지(김일성종합대학, 1976, 그림151, 153 수정)
목탑지를 제외한 나머지 건물들은 구덩이를 파고 할석을 채운 적심기초를 사용하였는데, 대부분 건물의 적심은 원형이나 제Ⅰ구역 10호 건물지와 제Ⅴ구역 1호 건물지의 적심은 방형으로 차이가 있다(그림15). 금당지는 목탑지를 중심으로 동·서 양측과 북측에 배치하였는데, 서금당지는 목탑에서 9.2m, 동금당지는 5.5m 떨어져 있다. 서금당지는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주간 거리는 정면 5.6m, 측면 3.9m이다. 동금당지는 서금당지와 같은 구조이나 주간 거리는 차이가 있는데, 측면은 3.8m이고, 정면은 가운데가 3.15m, 그 양쪽은 각각 4.8m이다.
그림15 | 정릉사지 제Ⅰ구역 건물지 평·단면도(김일성종합대학, 1976, 그림171, 175 수정)
목탑지 북쪽의 중금당지와 경루 및 종루는 폭 6.8m의 회랑을 경계로 목탑 및 동·서 금당 구역과 구별되는데, 후대의 건물로 인해 교란이 심하여 중금당의 구조는 자세히 알 수 없다. 적심이나 초석 등 시설이 거의 남아 있지 않으나 좌우 건물의 배치 등을 통해 볼 때 정면 17.8m, 측면 14.8m 정도로 추정된다. 중금당 서쪽의 5호 건물지는 경루로 추정되는데, 정면 5칸, 측면 2칸으로 주간 거리는 3×5.75m, 전체 규모는 19.4×13.5m이다. 종루로 추정되는 동쪽의 7호 건물지는 정면 16.4m, 측면 13.8m로 방형에 가까운 형태이다. 다른 건물들과 달리 네 모서리에 각각 1개의 적심을 배치하고, 가운데에 6개의 적심을 배치하였다.
중금당에서 북쪽으로 회랑을 지나 동서 방향으로 긴 8호 건물지가 있는데, 규모와 위치로 보아 강당으로 추정된다. 강당지는 동서 길이 44m, 남북 폭 14.5m로 정릉사지의 건축물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다. 건물의 평면은 정면 13칸, 측면 4칸의 동서로 긴 장방형으로 건물의 크기는 정면 41.5m, 측면 11.5m이다. 초석은 정면으로 14개, 측면으로 2개씩 배치하였는데, 가운데 줄은 초석을 배치하지 않고, 양 측면에만 초석을 하나씩 배치하였으며, 남북 각 2열의 초석렬은 간격이 좁고 가운데 두 칸은 간격이 넓다. 이와 같이 장방형의 건물을 두 줄 기초로 축조한 것은 건물 가운데에 넓은 공간을 확보하기 위한 것으로 생각된다.
강당지 동쪽의 10×9m 공간에 9호 건물지가 있었으나 훼손이 심하여 2개의 적심 외에 다른 시설은 확인되지 않았다. 9호 건물지 북쪽에는 벽돌을 깐 시설이 있으며, 그 북쪽의 회랑 중간에는 서쪽으로 이어지는 지하식 배수구가 있다. 벽돌은 종으로 6줄, 횡으로 1줄을 번갈아 깔았으며, 남아 있는 범위는 폭 4m, 길이 20m가량 된다. 벽돌시설 아래에는 10호 건물지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빠져나가는 배수구를 설치하였다.
10호 건물지는 8호 건물지(강당)의 중간에서 북쪽으로 꺾여 확장된 회랑 내부에 위치하는데, 서쪽과 북쪽 회랑 밖으로는 배수구를 설치하였고, 그 바깥쪽으로는 정원으로 조성된 바위산이 있다(그림13). 또한 북쪽 배수구에는 원형 초석이 5개 있고, 그 위에 네모난 석제동바리를 세웠는데, 배수구를 건너는 시설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건물지 바깥쪽 4면에는 두 줄 기초의 회랑을 둘렀으며, 남쪽 회랑의 동쪽 끝부분에는 지하식 배수시설을 설치하였다. 회랑과 건물 사이에는 벽돌로 포장하였으며, 벽돌 바깥쪽은 다듬은 석재로 마감하였다.
건물의 기초는 방형 적심이 주를 이루는데, 일부는 건물 북쪽의 바위산과 연결되는 암반 노두를 정지하여 초석 없이 바로 기둥을 세운 경우도 있다. 적심과 초석은 건물의 윤곽을 따라 남·북 양변에 각각 6개, 동서 변에 4개씩 배치하고, 그 안쪽에는 남쪽으로 치우쳐 조금 작은 적심을 가로로 7개, 세로로 4개를 배치하였는데, 내부 공간을 넓게 확보하기 위한 배치로 생각된다. 건물의 규모는 동서 10m, 남북 9m이며, 회랑의 폭은 3m, 회랑과 건물 사이의 폭은 2m가량 된다. 건물 내부 동북쪽 공간에는 온돌을 설치하였는데, 온돌의 동쪽 벽체는 초석과 겹쳐 있어서 사용할 당시에는 기둥과 맞닿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온돌 벽체는 깨진 기와와 벽돌을 사용해 구들 골을 만들었으며, 굴뚝은 건물 북쪽의 벽돌을 깐 시설에 설치하였다. 온돌시설의 길이는 8m, 폭은 1.3m, 높이는 1.2m이며, 벽체의 두께는 0.3~0.45m가량 된다(그림15). 그 밖에 제Ⅱ구역 1호 건물지와 제Ⅴ구역 1호 및 2호 건물지에도 온돌을 설치하였으며(그림16), 침실로 사용한 건물에는 온돌을 설치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림16 | 정릉사지 제Ⅱ구역 및 제Ⅴ구역 건물지 평·단면도(김일성종합대학, 1976, 그림179, 187 수정 전제)
 
5) 토성리사지
토성리사지는 황해북도 봉산군 토성리에 위치하며, 서쪽으로는 멀리 재령강, 남쪽으로는 재령강의 지류인 서흥강이 인접해 있다. 발굴조사를 통해 팔각 목탑지를 중심으로 동·서 금당지와 북쪽의 중금당지, 원형 벽돌시설 등이 조사되었는데, 기본적인 구조와 배치는 정릉사지 및 청암리사지와 동일하다(남일룡, 1987).
동금당지와 중금당지는 훼손이 심하지만 목탑지와 서금당지는 비교적 양호한 상태로 남아 있어 구조를 알 수 있다. 목탑지는 외곽의 물받이시설과 기단부로 구성되는데, 물받이시설은 양변에 판석을 세우고 내부에 자갈을 깐 형태로 한 변의 길이는 9.1m, 폭은 0.7m가량 된다. 물받이시설은 바깥쪽으로 약간 경사지게 하였으며, 남변 중앙부에 0.85×0.8m 크기의 화강암 판석이 놓여 있는데, 남쪽의 중문지로 향하는 도로와 연결되는 계단시설의 일부로 추정된다. 물받이시설의 폭은 22m, 전체 둘레는 72.8m이다(그림17).
그림17 | 토성리사지(남일룡, 1987, 13쪽 도면 수정 전제)
물받이시설 바깥 면에서 안쪽으로 1.5m 간격을 두고 기단부를 조성하였는데, 물받이시설보다 한 단 높으며, 기초석 일부가 남아 있으나 내부시설은 훼손되어 확인되지 않는다. 기단부 한 변의 길이는 7.7m이며, 전체 둘레는 63.2m, 폭은 18.2m이다. 서금당지에서는 물받이시설만 조사되었는데, 1.4m 폭으로 강자갈을 한 겹 깔았다. 물받이시설을 기준으로 서금당지의 규모는 정면 18.2m, 측면 9.1m이다. 목탑지 중심부에서 27.3m 북쪽에는 중금당을 배치하였는데, 1.8m 폭의 물받이시설이 확인되었다. 그 밖에 목탑지 동남쪽으로 36m가량 떨어진 지점에는 직경 2.5m의 벽돌을 깐 원형시설이 확인되는데, 정릉사지에서도 같은 형태의 원형시설이 목탑지 남쪽 양쪽에서 확인되었다.
토성리사지는 기초부의 폭 18.2m를 기준으로 비례를 정하여 축조하였는데, 이를 고구려척 35cm를 기준으로 환산하면 52자에 해당한다. 즉, 목탑지 기초부 폭을 기준으로 원을 그리면 동·서 금당지 안쪽 벽면을 만나고, 1.5배인 27.3m 원을 그리면 중금당지 남변과 동·서 금당 바깥쪽 변을 만나게 된다(그림17). 또한 목탑지 기초부 양변에서 18.2m의 0.5배인 9.1m 떨어진 지점에는 동·서 금당이 위치하게 되는데, 이것으로 보아 토성리사지는 고구려척을 기준으로 하여 1:2의 비례로 정밀하게 설계된 것임을 알 수 있다. 토성리사지에서는 많은 기와와 와당이 출토되었는데, 고구려의 황해도 지역 진출과 관련된 역사적 정황을 근거로 4세기 말경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남일룡, 1987).

  • 각주 009)
    『삼국사기』 권18 고구려본기 소수림왕 2년, “夏六月, 秦王苻堅 遣使及浮屠順道 送佛像經文 王遣使廻謝 以貢方物.” 바로가기
  • 각주 010)
    『삼국사기』 권18 고구려본기 소수림왕 5년, “春二月, 始創肖門寺 以置順道 又創伊弗蘭寺 以置阿道 此海東佛法之始.” 바로가기
  • 각주 011)
    『삼국사기』 권18 고구려본기6 광개토왕 2년, “秋八月, 創九寺於平壤.” 바로가기
  • 각주 012)
    『삼국사기』 권17 고구려본기7 문자명왕 7년, “秋七月 創金剛寺.” 바로가기
  • 각주 013)
    『동국여지승람』 권51, “金剛寺遺址在府東北八里.”; “酒巖在府東北十里.”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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