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주택유적
4. 주택유적
고구려시대 주택은 발굴된 유적이 많지 않지만, 고분벽화에 당시 주택을 묘사한 그림이 많이 있어 그 형태를 비교적 자세히 알 수 있다. 『구당서』에는 고구려의 주택에 대해 “거처하는 곳은 반드시 산과 계곡에 의지하여 모두 띠풀로 집의 지붕을 이는데, 단지 사찰과 사당 및 왕궁과 관청 등은 기와를 사용한다. … 겨울이면 모두 긴 구덩이를 만들고 아래로 숯불을 지펴서 방을 따뜻하게 한다”주 014고 기록하고 있는데, 고분벽화나 발굴된 유적을 통해 조사한 내용과도 일치한다.
고구려 사람들은 죽어서도 생전의 삶을 그대로 누리고자 하였으며, 이러한 생각은 고분벽화에 반영되어 있다. 특히, 4세기 중엽에서 5세기 중엽에 이르는 시기에 제작된 고분벽화는 무덤 주인의 생활 및 풍속과 관련된 내용을 주로 그렸으며, 따라서 고분의 구조도 당시 주택의 모습을 많이 반영하고 있다. 생활풍속을 주로 그린 벽화고분으로 대표적인 안악3호분(357년)과 덕흥리고분(408년)은 무덤이 여러 칸으로 나뉘어 있으며, 안악3호분에는 회랑도 있다. 이들 고분은 당시 귀족의 주택을 묘사한 것인데, 귀족주택은 주인이 공적인 업무를 처리하던 사랑채와 일상생활을 영위하던 안채로 크게 구분되며, 안채와 사랑채는 담장으로 구분되었다. 주택의 외곽은 담장을 둘렀으며, 건물은 물론 담장에도 기와지붕을 얹었다. 귀족주택의 경우 안채와 사랑채와 같은 주요 건물 외에도 부엌과 고깃간, 우물, 다락창고와 차고(수렛간), 외양간, 마구간 등 다양한 부속시설이 마련되었다. 또한 규모에 따라 차이가 있겠으나 연못이 있는 정원을 꾸미고, 규모가 큰 집에서는 정원에서 활쏘기를 즐길 수도 있을 정도였다(전호태, 1999).
집안의 난방은 벽을 따라 설치된 온돌을 통해 해결하였다. 고구려의 온돌은 오늘날의 온돌방과는 차이가 있는 것으로 고래가 하나나 둘밖에 없어서 흔히 ‘쪽구들’이라고 불린다. 온돌은 집안시 외곽의 동대자유적과 황해도 오매리 절골유적 등에서 확인되며, 최근 조사된 아차산의 고구려 보루에서도 같은 형태의 온돌이 많이 발굴되었다. 온돌은 납작한 돌을 두 줄로 세우고 그 위에 얇은 구들장을 얹은 후 진흙을 발라 마감하였으며, 불을 때는 아궁이는 고래의 진행 방향과 직각이 되도록 설치하였다. 직선형 온돌도 있으나 규모가 큰 집에서는 ‘ㄱ’자형으로 꺾인 형태를 주로 사용하였으며, 이 경우 온돌이 집안의 두 벽을 따라 설치되어 난방 효과를 높일 수 있었다.
일반 평민들이 살던 집의 모습은 발굴된 유적을 통해 알 수 있다. 고구려 초기 유적인 자강도 시중군 로남리유적에서는 3기의 집자리가 조사되었다. 이 중 2호 집자리의 구조가 잘 남아 있는데, 동서 12m, 남북 10m의 남향집이다. 집 안에는 ‘ㄱ’자형의 외고래 온돌 2기가 동서 방향으로 설치되어 있으며, 기둥구멍 4개가 일정한 간격으로 배치되어 있었다. 이보다 늦은 평안남도 북창군 대평리유적에서는 집자리 바닥을 진흙으로 잘 다듬은 뒤 ‘ㄱ’자형 온돌을 설치하였는데, 모두 고래가 두 줄이었다. 기둥은 주춧돌을 놓고 그 위에 세웠는데, 땅을 파고 기둥을 세운 로남리 집자리보다 발전된 것이다. 일반 평민들의 집은 강을 끼고 산을 의지한 지형에 지었으며, 집자리에서는 기와가 출토되지 않는다.
1) 동대자유적 건물지
동대자(東台子)유적은 국내성 동쪽 500m 지점의 황토대지에 위치하는데, 1913년 조사에서 다량의 기와와 초석이 확인되었으며(關野貞, 1914), 1958년 발굴조사를 통해 자세한 내용이 알려지게 되었다(吉林省博物館, 1961). 동대자유적에서는 모두 4기의 건물지가 조사되었는데, 발굴보고서에서는 2호 건물지를 침실, 1호 건물지를 관청으로 추정하고, 전체 건물지의 구조와 규모로 보아 궁궐이나 제사를 지내던 사직이 있던 곳일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이후 문헌기록을 근거로 동대자유적을 국가제사를 지내던 종묘사직으로 추정하고, 1호 건물지를 토지신에게 제사하던 사(社), 2호 건물지를 곡물신에게 제사하던 직(稷)으로 비정하였다(方起東, 1982). 이후 이 유적은 국내성시기의 대표적인 국사(國社)로 인식되어 왔으나, 건물지의 축조시기와 구조상 특징으로 볼 때 국내성시기의 제사시설로 볼 수 없다는 견해(강현숙, 2010)가 설득력을 얻고 있다.
동대자유적 건물지의 주향은 북서-남동 방향으로 동서 35m, 남북 36m 범위에 4기의 건물지가 연접해 있다(그림18). 가운데 동쪽의 1호 건물지는 비교적 구조가 잘 남아 있으나, 서쪽의 2호 건물지는 서벽과 남벽 및 북벽 일부가 훼손되었고, 북쪽의 3호 건물지는 남벽과 동벽 일부, 남쪽의 4호 건물지는 북벽과 동벽 일부가 남아 있다. 1호 건물은 동서 15m, 남북 11m의 장방형 건물지로 벽체는 자갈돌 줄기초 위에 초석을 놓은 형태인데, 줄기초의 폭은 1.5~2m, 두께는 0.3~0.5m가량 된다. 줄기초 위에 놓은 초석은 판석을 거칠게 다듬어 만들었는데, 북벽과 동·서 벽에는 각각 10개 내외의 초석을 놓았다. 벽체 구조는 남아있지 않지만 줄기초 위의 초석에 기둥을 세우고, 그 사이는 점토로 채워 마감한 것으로 생각되며, 남벽 중앙부와 좌우 양쪽에는 초석이 없는 점으로 미루어 이곳에 출입구를 설치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림18 | 동대자유적(吉林省博物館, 1961, 도2~4, 6, 8 수정 편집)
1호 건물 동벽과 북벽에는 외고래 구들을 설치하였으며, 북벽의 서쪽 모서리를 관통하여 북쪽의 굴뚝과 연결된다. 구들의 벽체는 자갈돌을 2~3겹 깔고 그 위에 깨진 기와를 엎어서 쌓았으며, 바닥에도 깨진 기와를 깔았다. 구들의 뚜껑은 얇은 판석으로 덮었는데, 건물 외곽의 굴뚝 쪽에는 좀 더 크고 두꺼운 판석을 덮었으며, 구들 외벽은 점토로 마감하였다. 건물 가운데에는 길이 0.8m, 폭 0.6m, 높이 1m의 방형 대석이 놓여 있으며, 대석 주변과 하부에는 자갈을 깔아 기초를 마련하였다. 대석의 일부는 자갈 기초에 묻혀 있고 0.6m가량은 노출된 상태인데, 이를 토지신과 농사신에게 제사를 지내던 상징물인 사주(社主)로 추정하고 있다(方起東, 1982).주 015
2호 건물은 줄기초가 아니라 적심기초 위에 초석을 놓은 형태인데, 규모는 1호 건물과 같은 것으로 생각된다.주 016 2호 건물에도 동벽과 북벽에 구들을 설치하였는데, 1호 건물 구들과는 달리 두 줄 고래인 점에서 차이가 있다. 2호 건물 내부 중앙에서 서쪽으로 약간 치우친 곳에는 적심시설 위에 원형으로 잘 다듬은 초석이 놓여 있는데, 동서 방향의 보를 받치던 기둥의 초석으로 생각된다. 한편, 이 초석의 북쪽에 또 다른 구들 아궁이가 확인되는데, 2호 건물이 폐기된 후에 추가된 것으로 생각된다.
2호 건물의 서벽과 남벽의 외곽은 훼손되어 명확한 구조를 알기 어려우나 도면상으로 보면 1호 건물과 2호 건물은 같은 기단 위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1호 건물의 북벽과 동벽 및 남벽 외곽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설치한 적심과 초석이 확인되고, 북쪽 적심렬 외곽의 기단은 굴뚝을 감싸고 북쪽의 회랑과 연결된다. 2호 건물 북벽 외곽에도 1호 건물 북벽 외곽의 적심과 같은 간격으로 적심이 설치되어 있고, 그 북쪽의 기단이 북쪽 회랑과 연결되는 점은 1호 건물과 동일하다. 이상과 같은 구조와 2호 건물의 서쪽과 남쪽이 훼손된 점을 감안하면 당초 2호 건물의 서쪽과 남쪽에도 적심렬이 설치되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1호 건물과 2호 건물 외곽의 적심과 초석은 북쪽 회랑과는 달리 1열로 배치되어 있는데, 여기에는 건물 지붕의 처마를 받치던 기둥을 세웠던 것으로 생각되며, 건물 벽체 바깥쪽에 공간을 확보함으로써 회랑과 같은 공간을 마련한 것으로 추정된다.
3호 건물은 독립된 기단 안쪽으로 줄기초를 한 건물이며, 남벽과 동벽 일부만 남아 있어 전체 규모는 알 수 없다. 건물의 기단 동쪽으로는 남북 방향의 회랑이 있고, 남벽 외곽의 기단 안쪽에 4개의 적심 또는 초석이 있는데, 역시 지붕 처마를 받치는 기둥을 세웠던 것으로 추정된다. 4호 건물은 동벽의 초석 2개와 북벽 및 동벽 외곽의 적심렬과 기단 일부만 남아 있어 전체 규모와 구조를 알기 어려우나 다른 건물과 유사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발굴조사 후 보고된 내용만으로 보면 동대자유적 건물지는 1호 건물과 같은 줄기초 건물과 2호·3호·4호 건물 등 적심기초 건물의 두 종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2호 건물의 동북쪽에 나중에 추가된 구들이 확인되는 점과 두 줄 고래의 구들이 있는 점, 출토유물 등으로 보아 동대자유적은 오랜 기간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며, 그 과정에서 건물의 증축과 보완이 이루어졌을 개연성이 크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초축 시점의 건물은 1호 건물과 같은 줄기초 벽체의 건물과 외곽의 처마를 받치던 기둥(적심기초)과 회랑 등으로 구성되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으며, 1호와 2호 건물은 단일 기단 위에 축조된 동일 구조의 건물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발굴조사 과정에서 많은 양의 기와와 토기, 철부(鐵釜) 파편 및 철촉 등이 출토되었는데, 와당의 형태적 특징을 고려할 때 동대자유적 건물의 초축 시점은 평양 천도 이후로 추정되며, 전형적인 발해시기 과대장식이 출토되는 점 등으로 보아 발해시기까지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강현숙, 2010). 건물의 축조 연대와 함께 구조적인 측면을 고려하면 동대자유적을 국가제사를 위한 국사로 이해하던 기존의 견해는 설득력이 떨어지며, 국내성 외곽에 설치된 귀족의 주택으로 추정하는 것이 타당할 것으로 생각된다.
2) 국내성 체육장지점 건물지
2000년 이후 국내성 내 여러 곳에 대한 발굴조사가 실시되었으며, 체육장주 017지점에서 4기의 건물지가 확인되었다. 체육장지점은 국내성 내부 한가운데에 위치하며, 북쪽은 현대 건축의 기초로 훼손되었다. 이 일대의 층위는 5개로 구분되는데, 건물지는 4층 상면에서 조사되었다(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集安市博物館, 2004a). 건물은 동서 방향으로 배치되었는데, 각 건물의 주향은 같으며, 제일 동쪽의 1호 건물지가 가장 크고, 나머지 3기의 건물은 비슷한 규모이다. 1호 건물지 아래 5층에서는 남북으로 긴 기단 석렬이 조사되었고, 그 서쪽에서는 소형 수혈 7기가 조사되었는데, 여기서는 시유도기와 중국청자 등이 출토되었다(그림19).

그림19 | 국내성 체육장지점 건물지 평·단면도 및 출토유물(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集安市博物館, 2004a, 도65, 66, 69, 70, 72, 73, 75 수정 편집)
1호 건물은 남북으로 긴 장방형 건물로 서벽과 남벽에는 자갈과 할석을 섞어 만든 4개의 적심이 남아 있고, 북벽과 동벽에는 할석과 자갈을 깐 줄기초 시설이 남아 있다.주 018 또한 서벽의 적심 위에는 초석이 남아 있고, 그 동쪽 건물 내부에는 몇 개의 초석이 남아 있는데, 건물 내부의 초석은 원래 위치에서 이동된 것으로 보인다. 건물의 규모는 길이 29m, 폭 21.1m, 적심의 지름과 동벽 줄기초 폭은 1.5m가량이다. 한편, 건물 중앙부 북쪽으로 약간 치우쳐 구들과 같은 ㄱ자형 구조물이 있는데, 이 건물과 동시기에 축조된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또한 건물 동벽 안쪽에 남북으로 긴 기단 석렬이 위치하는데, 이 건물의 아래층에 위치하며, 선행 건물의 기단으로 추정된다.
1호 건물의 서북 모서리 서쪽에 접하여 2호·3호·4호 건물이 나란히 배치되어 있는데, 세부적으로는 약간의 차이가 있으나 기본적으로는 같은 구조의 건물이다. 그중 2호 건물지의 구조가 비교적 잘 남아 있는데, 건물 벽체는 자갈을 깐 줄기초이며, 초석은 남아 있지 않아 원래 초석을 사용했는지는 불분명하다. 줄기초는 지면을 약간 파고 자갈을 채워 깔았는데, 폭은 1.1~1.3m가량이다. 건물 벽체 외곽에서 0.5~1.1m 간격을 두고 할석조의 기단이 건물 전체를 두르고 있는데, 보고서에는 이를 외장(外墻)으로 이해하고, 회(回)자형 건물로 명명하였다. 그러나 줄기초 벽체 외곽의 석렬은 줄기초와는 달리 바깥쪽에 할석을 세우고 그 안쪽에 할석을 채운 구조로 자갈을 이용해 축조한 줄기초와는 다르다. 이를 건물 벽체로 보면 건물 내벽 바깥에 0.5~1.1m 간격을 두고 외벽을 두른 형태의 건물이 되는데, 이는 구조적으로나 기능적으로도 이해하기 어려우며, 따라서 건물 벽체가 아니라 기단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기단의 폭은 1.2m 내외로 그 위에 초석이 확인되지는 않으나 처마를 받치던 기둥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건물의 형태는 동대자유적의 건물과 유사한 것으로 생각된다. 1호 건물 기단의 규모는 동서 13.5m, 남북 14m, 줄기초 벽체의 규모는 동서 10.2m, 남북 10m, 건물 내부의 규모는 동서 7.6m, 남북 7.5m이다.
2호 건물지 내부에서 구들시설은 확인되지 않았으나 동벽 내부 중간지점에 소토의 흔적이 확인되고, 북동 모서리 안쪽에는 할석이 흩어져 있는 점으로 보아 원래는 동벽과 북벽에 ㄱ자형 구들이 설치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또한 2호 건물지 동북쪽 기단 외곽에 자갈을 깐 보도가 있는데, 이는 2호 건물 서북 모서리에서 3호 건물과 연결되며, 3호 건물지 서쪽에도 비슷한 구조물이 확인된다. 이러한 점으로 보아 당초 각 건물은 기단을 따라 서로 연결되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한편 2호 건물지 기단 남쪽에는 동쪽 기단과 같은 방향으로 벽돌을 세워 만든 암거식 배수구가 설치되어 있다.
3호 건물과 4호 건물도 2호 건물과 기본적으로 같은 구조인데, 3호 건물의 남벽 줄기초와 서벽 줄기초 일부에는 판석이 깔려 있고, 4호 건물지 동벽 줄기초도 할석으로 마감하였는데, 나중에 보수한 흔적으로 추정된다. 4호 건물지 동벽 안쪽 중앙부에 소토 흔적이 있는데, 역시 구들의 아궁이가 있었던 흔적으로 추정된다. 3호 건물의 기단부 규모는 동서 10.3m, 남북 10.5m, 내부 줄기초 벽체의 규모는 동서 8m, 남북 8.5m가량이며, 4호 건물의 기단부 규모는 동서 12.25m, 남북 13.6m, 내부 줄기초 벽체의 규모는 동서 7.5m, 남북 10.4m가량으로 추정된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체육장지점의 2호·3호·4호 건물은 줄기초 벽체의 방형 건물로 벽체 바깥에는 기단을 두르고 처마를 받치던 기둥을 설치한 구조로 추정되며, 동대자유적의 건물과 기본적인 구조는 같은 것으로 추정된다. 1호 건물은 적심기초와 줄기초가 혼재된 것으로 보이지만 훼손과 중복이 심하여 당초 모습을 확인하기는 어렵다. 다만 현존하는 적심기초와 줄기초를 건물 기단으로 보면 다른 건물과 비슷한 구조였을 가능성이 크다. 한편, 체육장지점 2호 건물지 북쪽에서 25m가량 떨어진 유아원지점에서는 동서 방향의 배수구시설이 확인되었으며, 1호 건물지 남쪽에서 약 40m 떨어진 실험소학교지점에서도 동서 방향의 배수구시설이 확인되었다. 두 유적의 배수구 방향이 체육장지점 건물의 방향과 일치하는 점으로 미루어볼 때 이 두 유적이 체육장지점 건물지의 남변과 북변을 이루는 것으로 추정된다(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集安市博物館, 2004a).
건물지에서는 다량의 기와와 벽돌 등이 출토되었으며, 건물지 아래층인 5층 수혈유구에서는 시유도기와 중국청자 등이 출토되었다. 2호 건물지와 5층 퇴적층에서 권운문와당이 각각 1점식 출토되었는데, 2호 건물지 출토 권운문와당은 자방부에 태(泰)자를 양각하였고, 주연부에는 거치문을 시문하였으며, 내향연호부에는 ‘□□年造瓦故記歲’라는 명문을 양각한 형태이다. 이러한 형태의 권운문와당은 우산992호분에서 여러 점 출토되었는데, 우산992호분 출토 권운문와당에는 338년으로 비정되는 무술(戊戌)이라는 간지명이 있다. 따라서 이 권운문와당이 2호 건물의 지붕에 사용된 것이라면 건물의 연대는 4세기 전반경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 밖에 3호 건물지와 4호 건물지에서는 무복선연화문와당과 귀면문와당이 출토되었는데, 형태적 특징으로 보아 5세기를 상회하지는 않으며, 대체로 평양 천도 이후에 유행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건물지 아래층인 5층 수혈에서는 여러 점의 시유도기와 청자가 출토되는데, 시유도기의 문양은 4~5세기에 유행한 것이다. 수혈에서 출토된 청자는 중국 육조시기 동진에서 유행한 것과 유사한 형태로 대체로 4세기 전반대로 추정되며, 2호 건물지에서 출토된 권운문와당의 연대와 비슷하다.
이상의 출토유물과 건물의 구조 및 중복관계를 고려하면 체육장지점에는 늦어도 4세기 전반경에 건물지가 축조되었으며, 이후 여러 차례 개축을 거쳐 평양 천도 이후까지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유적의 위치가 국내성의 중앙부라는 점과 건물지의 남북 폭이 대략 100m에 달하는 점을 고려하면 체육장지점 건물지는 국내성시기에 중요한 기능을 한 건물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3) 집안 민주유적 건물지
민주유적은 집안시 태왕진 민주촌에 위치하는데, 북쪽의 우산고분군과 남쪽의 압록강 사이의 평원지대에 해당한다. 유적의 서쪽으로 1.5km 지점에는 국내성이 위치하고, 북쪽으로 0.5km 지점에 오회분, 남쪽으로 0.6km 지점에 압록강이 위치한다. 민주유적에서는 대형 건물지와 2기의 석주(石柱)가 조사되었는데, 이미 일제강점기에 석주와 초석이 확인되었으며, 1961년 석주유적은 현급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었고, 1963년에는 북한과 중국의 합동조사단이 동쪽 석주에 대한 조사를 실시하였으나 조사내용은 보고되지 않았다. 이후 1984년 간행된 『집안현문물지』에 서쪽 석주와 그 서북방 40m 지점에 대형 건물지가 있다는 사실이 보고되었으며(吉林省文物志編委會, 1984), 2003년에는 석주 서쪽의 건물지에 대한 발굴조사를 실시하여 3개의 건물군을 조사하였다(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集安市博物館, 2004a).
민주유적 건물지는 담장으로 둘러싸인 3개의 건물군으로 이루어졌는데, 가운데 위치한 2호 건물군이 가장 잘 남아 있다. 2호 건물군은 남북으로 긴 장방형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전체가 남아 있는 남쪽 담장의 길이는 37.5m가량 된다. 서벽은 약 36m가 잘 남아 있으나 북단이 훼손되어 전체 길이는 알 수 없지만 2~5호 건물의 북단까지 거리를 고려하면 대략 46m 이상으로 추정된다(그림20). 이를 고려하면 2호 건물군의 규모는 동서 37.5m, 남북 46m가량으로 추정된다. 담장 기초는 외곽에 장방형의 할석을 쌓고 내부에는 강돌을 채운 형태이며, 폭은 2.25m가량 된다. 남쪽 담장 동단에는 문지가 있는데, 끊어진 담장 안과 밖으로는 네 개의 초석이 놓여 있으며, 초석의 거리는 3.5~4m가량 된다. 화강암제 초석은 상부를 팔각형으로 잘 다듬었으며, ‘石’, ‘井’ 등의 문자가 음각되어 있다. 문지의 서쪽 초석 바깥쪽에는 담장을 관통하는 암거식 배수구를 설치하였는데, 폭은 0.25~0.3m가량 된다. 2호 건물군 내부에는 5기의 건물이 있는데, 1호와 2호 건물지는 적심기초의 초석 건물지이며, 나머지 3기의 건물지는 훼손이 심하여 정확한 구조나 규모를 확인하기 어렵다.
1호 건물군은 2호 건물군의 동쪽 담장과 2.5~3m가량 떨어져 있으며, 내부에는 2기의 건물과 여러 개의 초석이 확인되지만 훼손이 심하여 구조와 규모는 확인하기 어렵다. 남쪽 담장 일부와 서쪽 담장 일부가 남아 있는데, 담장의 기초는 2호 건물군의 담장 기초와 같다. 나머지 담장은 훼손이 심하여 정확한 규모는 알 수 없으나 남쪽 담장 동쪽 끝부분에 팔각형으로 다듬은 초석이 하나 남아 있으며, 2호 건물군의 문지와 같이 끊어진 담장 서쪽으로 배수구가 설치되어 있다. 이러한 점으로 보면 1호 건물군의 남쪽 담장은 2호 건물군의 담장과 같은 구조임을 알 수 있는데, 담장의 서쪽 끝에서 문지 초석까지의 거리도 동일하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면 1호 건물군의 남벽 길이도 2호 건물군과 같이 37.5m 내외로 추정할 수 있으며, 동벽과 서벽의 길이도 비슷한 규모로 추정된다.
2호 건물지 서편의 3호 건물군도 같은 구조로 생각되는데, 동벽과 남벽 일부가 남아 있으며, 다른 건물군와 같은 남벽 동단에 문지로 추정되는 구조가 확인되는 점으로 보아 규모도 비슷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1호 건물군 동쪽에는 서측 석주가 있으며, 여기서 40m 동쪽에 동측 석주가 위치해 있다. 석주의 바깥쪽에는 담장 기초가 확인되는데, 다른 건물군의 담장 기초와 같은 형태이다. 2기의 석주 사이에는 민가가 있어서 조사가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다른 건물군과 유사한 건물이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상의 건물군 구조를 통해 볼 때 민주유적 건물지는 동서 37.5m, 남북 46m 이상의 담장을 두른 건물군 3개와 비슷한 규모의 담장을 두른 석주를 포함하는 시설이 나란히 배치된 것으로 이해되며, 전체 폭은 160m가량 될 것으로 추정된다. 민주유적에서 출토된 유물 중 연대를 특정할 만한 유물이 없으나 토기와 시유도기 등이 국내성 건물지에서 출토된 유물과 유사한 점으로 미루어 국내 성기에 축조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림20 | 민주유적 건물지 평면도 및 석주 평·입·단면도(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集安市博物館, 2004a, 도92, 96, 98 수정 편집)
4) 남한 지역의 고구려 건물지
남한 지역에서도 상당수의 고구려 건물지가 조사되었는데, 몽촌토성에서 조사된 줄기초 건물지와 온돌 건물지를 제외하면 모두 보루 등 관방시설에서 확인된 군사용 막사 건물이다. 몽촌토성에서 출토된 건물은 서남지구의 고지대에 위치하고 있는데, 자연지형을 성토하여 정지한 후 조성하였다. 건물의 기초는 줄기초와 독립기초를 혼합한 방식으로 규모는 정면 3칸 이상, 측면 2칸의 장방형 건물이다. 주간 거리는 정면이 5.5m, 측면이 3m이다. 건물의 기초는 벽채의 윤곽을 따라 폭 30cm, 깊이 40cm가량을 굴토한 후 작은 자갈을 채워 벽기초를 하고, 기둥이 설 자리에는 직경 70~80cm가량의 적심을 설치하였는데, 초석은 확인되지 않는다(그림21). 적심 건물지 동쪽에 온돌 건물지가 1기 확인되었으나 벽체는 모두 유실된 상태로 자세한 구조는 알 수 없다(최종택, 2002).

그림21 | 몽촌토성 고구려 적심 건물지 평·단면도(최종택, 2002, 그림4)
군사들의 막사도 일반 평민의 집과 비슷하였다. 물론 야전에서 일시적으로 주둔할 경우에는 천막 등을 이용했겠으나, 장기적인 주둔의 경우는 막사용 건물을 지었다.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아차산보루에서 확인된 건물지는 모두 71기에 달한다. 보루별로 건물지의 수량에 차이가 있는데, 홍련봉1보루와 아차산4보루가 각각 18기와 17기로 가장 많으며, 구의동1보루를 제외하면 용마산2보루의 건물지가 가장 적다. 그런데 홍련봉1보루는 553년 이후 신라가 축조하였거나 재사용한 것이고, 이를 제외하면 고구려 당시에 축조된 건물은 10여 기 내외였던 것으로 보인다.
건물은 대부분 지상식이지만 일부 수혈식과 지하식 건물도 있다. 수혈식 건물은 구의동1보루 건물지와 홍련봉1보루 1호 수혈 건물지, 아차산4보루 6호 건물지 등 3기이며, 수혈을 파고 벽체에 기둥을 세운 구조이다. 구의동1보루 건물지의 평면형태는 원형이며, 직경은 7.6m, 깊이는 0.6~0.7m인데, 내부에는 온돌과 저수시설을 설치하였고, 방형의 출입시설을 부가하였다. 홍련봉1보루 1호 수혈식 건물은 4.5×4.4m의 방형으로 깊이는 0.8m이다. 수혈 내부 동벽과 남벽에는 벽구를 설치하였으며, 벽체를 따라 8개의 주공이 남아 있는데, 간격은 1.5~2m로 일정하지 않다(그림22-3). 이 건물은 보루의 가장 남쪽에 위치하며, 건물 남벽 바로 외곽으로 목책렬이 돌아가고 있다. 건물 내부에 시설물은 없으나 건물 남서 모서리 바로 바깥지점에서 문틀에 사용된 철제 확쇠 2점이 출토되었으며, 발굴 전 지상에서 문비석이 1점 확인되었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이 건물 남서 모서리 쪽의 목책에 출입을 위한 문비가 설치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아차산4보루의 6호 건물은 1호 건물의 서쪽 석축 바로 아래에 위치하며, 건물의 주공이 설치된 동벽 일부와 ㄱ자형 온돌만 확인되어 전체 규모는 확실하지 않지만 주변 공간으로 보아 장방형으로 추정된다.
지하식 건물은 홍련봉1보루에서 2기가 조사되었는데, 석재로 벽체를 쌓았다는 점에서 수혈식 건물과는 구조상 차이가 있다. 홍련봉1보루 12호 건물은 암반을 정지한 후 석재를 이용해 방형의 벽체를 구축한 후 외부는 마사토와 점토를 쌓았다(그림22-2). 따라서 수혈을 파고 벽체를 쌓지는 않았지만 건물의 바닥은 지표보다 아래에 위치하게 된다. 건물 내부 북벽에 설치한 온돌은 경사를 이루며 올라와 건물 밖으로 빠져나오도록 하였다. 암반에서부터 석축의 높이는 1.1m 정도이나, 온돌이 위치한 건물 바닥에서부터 벽체의 높이는 0.8m가량 된다. 홍련봉1보루 1호 건물은 보루의 가장 북쪽 출입시설 안쪽에 위치하는데, 서벽은 유실되어 흔적이 불분명하지만 동벽과 남벽은 석축을 하여 건물 바닥은 지하에 위치하게 된다. 건물의 북벽은 안쪽 목책렬을 그대로 이용하였는데, 목책공 중간에 판재의 흔적이 남아 있어서 건물의 북벽은 판재로 마감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림22 | 아차산 고구려 보루 건물지 - 1. 아차산 4보루 1, 2호 건물지(임효재 외, 2000, 그림8)

그림22 | 아차산 고구려 보루 건물지 - 2. 홍련봉1보루 12호 건물지(崔鍾澤 외, 2007a)

그림22 | 아차산 고구려 보루 건물지 - 3. 홍련봉1보루 1호 수혈 건물지(崔鍾澤 외, 2007a, 도면19)
이상 5기의 건물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지상식 건물이다. 지상식 건물은 성토된 보루의 바닥면에 위치하는데, 아차산4보루의 1호 건물은 석축을 쌓아 기단을 조성한 후 그 위에 벽체를 구축하였다(그림22-1). 건물의 평면형태는 장방형 또는 방형이 대부분이나 일부 부정형도 있다. 부정형은 건물 전체적으로는 방형이나 장방형을 이루나 한 벽이 호선을 이루는 형태로, 지형적 요인에 의한 것으로 보이며 예외적인 형태로 생각된다. 건물의 전체 구조가 잘 남아 있는 경우 평면형태는 장형에 가까우며 내부에는 온돌을 설치하였다. 대표적인 예로 홍련봉2보루의 2호, 4호, 8호 건물을 들 수 있는데, 건물의 규모는 5m 내외로 정방형에 가까우며, 건물 모서리에 출입구를 설치하였고, 벽체를 따라 온돌을 설치하였다(그림23). 굴뚝은 벽체 밖에 설치하였는데, 8호 건물지의 굴뚝은 석재를 둥글게 쌓아 정교하며 규모도 크다. 벽체도 비교적 완전한 상태로 남아 있는데, 먼저 지름 15cm가량의 기둥을 세우고 그 사이에 작은 할석과 점토를 섞어 쌓았으며, 다시 짚 따위의 유기물을 섞어 반죽한 점토를 발라 마감하였다. 마무리된 벽체의 두께는 20cm가량 된다.

그림23 | 홍련봉2보루 건물지 - 1. 8호 건물지(한국고고환경연구소)

그림23 | 홍련봉2보루 건물지 - 2. 2호 건물지(崔鍾澤 외, 2007b, 도면14)
건물 내부에는 일반적으로 온돌을 설치하였는데, 온돌은 평면형태가 ㄱ자형인 것과 직선형 두 종류가 있다. 지금까지 조사된 53기의 온돌 중 ㄱ자형은 13기에 불과하고 직선형 온돌이 40기로 훨씬 많다. 온돌의 벽체는 작은 할석과 점토를 섞어 쌓아 벽체를 만들고 그 위에 커다란 판석을 올려 고래를 만들었으며, 다시 벽체는 점토로 미장하였다. 아궁이는 고래와 직교하는 방향으로 설치하였는데, 좁고 긴 석재를 세워 아궁이 틀을 만들고 그 위에 이맛돌을 얹었으며, 아궁이 내부에는 솥을 받칠 수 있도록 지각을 설치하였다. 아차산4보루 5호 건물지 온돌과 같이 아궁이가 2개인 경우도 있으며, 아궁이 앞에 둥글게 돌을 돌려놓은 경우도 있다. 굴뚝은 건물 밖에 설치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굴뚝 하단은 방형으로 쌓은 것이 일반적이다. 굴뚝 바닥의 개자리는 온돌 고래보다 깊게 파고 자갈을 깔았으며, 아차산4보루 5호 온돌의 경우 건물 밖에서 개자리의 재를 치우기 위한 시설을 마련하였다(그림24 화살표). 각 보루에서 많은 양의 토제연통이 출토되는 점으로 보아 굴뚝에는 토제연통을 세웠던 것으로 보인다. 거의 모든 온돌이 외고래이지만 홍련봉2보루의 8호 건물지와 아차산3보루의 3호·8호 건물지와 같이 고래가 2개인 경우도 있다. 일반적으로 하나의 건물에 1기의 온돌을 설치하였으나 아차산4보루 1호 건물처럼 2기의 온돌을 설치한 경 우도 있다.

그림24 | 아차산4보루 5호 건물지 복원 모습과 온돌(ⓒ최종택)
건물 지붕에 대한 자료는 거의 남아 있지 않으나 구의동1보루에서는 판재를 이용해 지붕을 덮었던 흔적이 남아 있으며, 홍련봉1보루의 1호·12호 건물은 기와를 덮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까지 조사된 자료로는 그 이상의 추론이 불가능하지만 대부분의 건물이 짚이나 억새 등과 같은 유기물로 지붕을 덮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된다.
한편, 건물 내부에 온돌이 설치된 점으로 보아 대부분의 건물이 주거용으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이나, 일부 건물의 경우 주거용으로 보기 어려운 경우도 있다. 71기의 건물지 중 온돌이 확인되지 않은 건물은 21기에 달하는데, 이 중 상당수는 보존 과정에서 온돌이 훼손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홍련봉2보루의 1호·6호 건물과 아차산4보루의 2호 건물 등과 같이 배치상 주거용으로 보기 어려운 건물이 몇 기 있다(그림25 왼쪽). 이러한 건물은 용도를 알 수 있는 자료가 없으나, 주거용 건물에 딸린 부속건물이나 저장용 창고 같은 용도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 밖에 홍련봉2보루의 5호 건물은 내부에 온돌이 설치되어 있기는 하지만 다른 건물과 달리 벽체를 두껍게 축조하였으며, 바닥에 소토와 점토가 깔려 있고, 커다란 판석이 놓여 있는 점으로 보아 주거용이 아닌 공방용 건물로 추정된다(그림25 오른쪽). 또한 출입구 안쪽 우측에 토기 태토로 보이는 회색 점토가 쌓여 있는 점으로 보아 토기를 제작한 공방이었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생각된다.

그림25 | 홍련봉2보루 건물지 배치(ⓒ한국고고환경연구소)
- 각주 014)
- 각주 015)
- 각주 016)
- 각주 017)
- 각주 0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