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성곽
1. 성곽
1) 조사연구현황
남한 지역에서 고구려 유적의 존재가 처음 확인된 것은 1988년 몽촌토성 동남지구의 발굴조사를 통해서이다. 그해 겨울 보고서 작성을 위한 유물 정리 과정에서 고구려 토기 나팔입항아리(廣口長頸四耳甕)의 존재가 확인되었다(그림2). 물론 이전의 조사에서도 고운 점토질의 흑색마연토기들이 확인된 바 있으나 고구려 토기의 영향을 받은 백제 토기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전형적인 고구려 토기로 알려진 나팔입항아리의 확인으로 인해 같은 제작 전통을 가진 일련의 토기류를 백제 토기와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림2 | 몽촌토성 출토 나팔입항아리(ⓒ서울대학교박물관)
1988년 몽촌토성 발굴조사를 통해 고구려 토기의 존재가 확인됨에 따라 남한 지역 특히 한강 유역에 고구려 유적이 존재할 가능성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게 되었다. 몽촌토성 출토유물을 정리하는 과정에서1977년 한강 북안의 구의동에서 발굴되어 서울대학교박물관에 보관되고 있던 토기류에 대한 재분석이 이루어졌다. 분석 과정에서 몽촌토성 출토 고구려 토기류와 구의동유적 출토 토기류가 같은 제작 전통임을 확인하고 구의동유형으로 분류하였고, 그 시기는 475년 이후로 분류하였다(金元龍 외, 1988). 1989년에는 몽촌토성 서남지구 고지대의 지상 건물군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ㄱ’자형 온돌을 갖춘 지상 건물지가 확인되었다. 남북 3.1m, 동서 3.7m 규모의 온돌유구는 중국 집안(集安) 동대자(東台子)유적 건물지와 구조가 유사한 점이나 층위상의 증거 등으로 보아 고구려가 축조한 것이며, 그 연대는 475년 이후에서 551년 사이로 추정하였다(金元龍 외, 1989). 또한 1988년에 구의동유형으로 명명된 토기류를 고구려 토기류로 보고함으로써 이를 고구려 토기로 명확히 인식하게 되었다. 이상의 몽촌토성 발굴성과를 바탕으로 1991년에는 1977년 발굴 당시 백제 고분으로 보고되었던 구의동유적이 고구려 군사시설로 재인식되었고, 출토된 철기류 15종 1,353점(철촉 1,300여 점)에 대한 재분석이 이루어졌다. 1993년에는 구의동유적에서 출토된 토기류 19개 기종 369개체분에 대한 분석이 이루어졌다. 이어 1995년에는 한강 유역에서 출토된 고구려 토기에 대한 종합적인 분석이 이루어졌다(崔鍾澤, 1991; 1993; 1995).
1994년에는 구리문화원에서 실시한 아차산 일원의 지표조사를 통하여 15개소에 달하는 고구려 군사시설을 확인하였으며(강진갑 외, 1994), 이를 보루성으로 명명하였다(金玟秀, 1994). 이후 보루성이라는 명칭은 보루에 이미 방어시설로서 성의 개념이 포함되어 있음을 이유로 보루로 칭하고 있다(崔鍾澤, 1999b). 1997년에는 아차산4보루에 대한 발굴조사가 시작되어 1998년에 마무리되었다. 이 발굴조사에서는 둘레 210m가량의 성벽과 두 개의 치, 그리고 내부에서는 7기의 건물지와 간이대장간시설 등이 비교적 양호한 상태로 확인되었으며,주 001 26개 기종 538개체의 토기류와 복발형투구를 포함한 203점의 철기류가 확인되었다(임효재 외, 2000). 이 발굴을 통해서 아차산 일원 고구려 보루의 구조에 대한 대략적인 윤곽이 밝혀졌으며, 구의동보루와의 비교를 통하여 당시 보루에 주둔하였던 군사의 수를 추정하는 등 향후 연구의 발판이 마련되었다.
아차산4보루에 대한 발굴조사성과에 힘입어 1999년에는 아차산 시루봉보루 발굴조사가 시작되었으며, 이는 2000년에 마무리되었다(임효재 외, 2002). 2002년 중국의 이른바 ‘동북공정’의 여파로 고구려에 대한 관심이 폭증하였고, 아차산 고구려 보루도 다시 주목을 받게 되었다. 그 결과 2004년에는 홍련봉1보루가 발굴되었으며, 2005년에는 홍련봉2보루와 아차산3보루의 일부가 발굴되었다. 홍련봉2보루에서는 520년에 해당하는 ‘경자(庚子)’명 토기접시가 출토되어 아차산보루에 대한 연대관이 더욱 명확해졌다. 아차산3보루에서는 단야시설과 디딜방앗간 등의 시설물이 새롭게 확인되었다. 발굴 도중 아차산3보루 남쪽 등산로에서도 방앗간시설이 확인되어 일대를 아차산6보루로 명명하기도 하였다(崔鍾澤 외, 2007a; 2007b; 2007c).
이후 2005년과 2006년에 걸쳐 용마산2보루가 발굴되었으며(양시은 외, 2009), 2007년에는 아차산4보루의 정비를 위한 성벽 추가 발굴이 이루어졌다. 이 조사를 통해 아차산4보루에서 2기의 치가 새로 확인되었고, 남쪽으로는 용마산2보루에서 확인된 것과 유사한 복합구조의 치가 확인되었다. 또한 성벽 내부에 일정한 간격으로 설치한 목책시설도 추가로 확인되었다(국립문화재연구소, 2009). 2009년과 2010년에는 시루봉보루의 정비복원을 위해 시루봉보루 외곽의 성벽에 대한 추가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이선복 외, 2013). 2012년과 2013년에는 정비복원을 위해 홍련봉1·2보루에 대한 추가 발굴조사가 실시되었다. 홍련봉1보루는 2004년의 조사를 통해 내부시설에 대한 조사는 완료되었으며, 2012년에 성벽 전체에 대한 추가 조사가 실시되었다. 조사결과 다른 보루에서 확인되는 치는 확인되지 않았으며, 보루 북쪽에 치와 같이 튀어나온 출입시설이 확인되었다. 또한 성벽 외곽에 기둥을 세웠던 흔적과 함께 성벽 중간에 세웠던 주동의 흔적이 자세히 조사되었으며, 축조 당시부터 이중으로 구축한 성벽의 구조도 새롭게 확인되었다. 홍련봉2보루의 추가 발굴은 복원과 정비를 위한 조사로서 성벽은 물론 외곽에 대한 조사가 실시되어 보루의 내부는 물론 외곽시설물에 대한 전면적인 조사가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중요하다(이정범 외, 2015; 2019). 이로써 아차산보루의 내부는 물론 외부구조가 자세히 밝혀지게 되었으며, 각 보루의 발굴상황을 종합해볼 때 각 보루를 구축하는 데 일정한 규칙이 적용되었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 또한 2016년에는 중랑천 좌안의 낮은 봉우리에 위치한 배봉산보루를 발굴조사하였는데, 보루 내부 유구는 모두 유실되었으나 성벽 축조와 관련된 영정주 구덩이가 2열로 확인되었다(서울문화유산연구원, 2018).
임진강 유역에서는 1991년 지표조사를 통해 고구려 유적이 처음으로 보고되었으며(김성범, 1992), 1995년에는 연천 호로고루와 당포성, 은대리성 등의 주요 고구려 성곽이 확인되었다(육군사관학교, 1995). 또한 1999년에는 호로고루에 대한 정밀지표조사를 실시하는 과정에서 20여 개소의 성곽과 보루가 확인되었고, 무등리2보루에서는 대규모의 탄화미와 탄화조 등이 수습되었다(심광주 외, 1999). 이어 2000년에는 호로고루에 대한 발굴이 시작되었으며, 2011년까지 4차에 걸쳐 발굴조사가 실시되었고, 이후 성벽 복원 과정에서 동벽과 치에 대한 발굴조사가 실시되었다(토지박물관, 2001; 심광주 외, 2007; 2014; 한울문화재연구원, 2018, 그림3). 2003년에는 은대리성에 대한 시굴조사가 실시되었고(박경식 외, 2004), 이후 성 내부에 대한 추가 발굴조사가 실시되었으며(중앙문화재연구원, 2018), 당포성 성벽에 대한 발굴조사가 실시되었다(육군사관학교, 2003). 2010년부터 2012년까지 무등리2보루에 대한 발굴조사가 실시되었고, 2017년에는 무등리1보루에 대한 발굴조사가 실시되었는데, 무등리2보루에서는 완전한 상갑 1벌과 사행상철기 등 중요 유물이 출토되기도 하였다(이선복 외, 2015; 이정은 외, 2019). 그 밖에 임진강 하구의 파주 덕진산성에 대한 발굴조사가 2012년부터 2017년에 이르기까지 5차에 걸쳐 실시되었다(中部考古學硏究所, 2014; 2018).

그림3 | 복원된 연천 호로고루 동벽 전경(ⓒ최종택)
양주 지역에서는 1998년 지표조사를 통해 무려 28개소의 보루가 조사되었고, 이 중 상당수는 고구려 보루로 확인되었다(토지박물관, 1998). 보루는 주로 천보산맥의 지봉인 도락산과 천보산·불곡산의 능선을 따라 남북으로 열을 지으며 배치되어 있는데, 이 중 천보산2보루에 대해서만 간단한 발굴조사가 이루어졌으며(이선복 외, 2014), 2014년부터 태봉산보루에 대한 발굴조사가 실시되었다(겨레문화유산연구원, 2016; 2017; 2018). 2018년부터는 독바위보루에 대한 발굴조사가 진행되고 있다(화서문화재연구원, 2019; 2020).
그 밖에 안성천 유역에서도 안성 도기동산성(하문식 외, 2016; 기남문화재연구원, 2018)이 발굴되었으며, 금강과 미호천 유역에서 진천 대모산성(車勇杰·盧秉湜, 1996), 청주 정북동토성(충북대학교박물관, 2018), 세종 남성골산성(차용걸 외, 2004; 2008), 연기 나성(중앙문화재연구원, 2015), 대전 월평동유적(국립공주박물관, 1999; 李漢祥, 2000; 李浩炯·姜秉權, 2003) 등이 발굴되었는데, 대체로 5세기 후반경에 축조된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2) 입지와 분포
남한 지역에서 조사된 고구려 성곽은 대략 50여 개소에 이르며, 향후 조사결과에 따라 유적의 수는 다소 증가할 것으로 생각된다. 성곽은 입지와 규모에 따라 평지성과 산성 및 보루로 구분되며, 임진강·한탄강 유역과 양주분지 일원, 한강 하류 유역의 아차산 일원, 금강 유역 등 크게 네 지역에 나뉘어 분포하고 있으며, 최근 안성천과 미호천 유역에서도 고구려 성곽이 조사되고 있다.
임진강은 함경남도 덕원군 일대에서 발원하여 마식령산맥을 따라 남행하다가 연천군 전곡읍 일대에서 한탄강과 합류한 후 서남쪽으로 흘러 판문점과 파주 일원에서 한강과 합류하여 황해로 유입된다. 한탄강과 합류한 임진강은 한반도 중부와 북부를 가로지르는 경계를 이루고 있어 남북 교통의 장애물이 되는 한편, 교두보 역할을 하고 있어 강을 따라 삼국시대 성곽이 밀집하여 분포한다. 경기도 연천군과 파주군 일대를 동서로 관통하는 임진강과 한탄강 유역에는 강을 경계로 20여 개소의 고구려 성곽이 분포하고 있으며, 이 중 호로고루, 은대리성, 당포성, 전곡리토성, 무등리1·2보루, 덕진산성은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그림4).

그림4 | 경기 북부지역 고구려 유적 분포도(ⓒ최종택)
임진강·한탄강 유역의 성곽은 강 북안의 평지에 위치한 평지성과 강안의 낮은 봉우리에 위치한 보루로 구분되는데, 남한의 다른 지역에 비해 평지성이 많은 것이 특징이다. 호로고루, 은대리성, 당포성이 대표적인 평지성인데, 임진강으로 흘러드는 샛강과 임진강 사이에 형성된 삼각형의 강안대지에 축조하였다. 유적이 위치한 곳은 샛강에서 유입된 토사로 인해 수심이 낮은 여울목이 형성되어 도강이 유리한 지점이다. 또한 강 본류와 샛강으로 둘러싸인 두 면은 높은 현무암 절벽으로 이루어져 있어 견고한 방어시설이 필요치 않으며, 나머지 한 면에만 견고한 성벽을 쌓았다. 임진강 하류의 강 북안 언덕에 위치한 덕진산성은 평지성은 아니지만 입지는 유사한 특징을 공유하고 있다. 임진강 본류 좌안에 위치한 무등리1·2보루와 고성산보루, 우정리보루 역시 나지막한 봉우리에 위치하며 도강을 감제하기 유리한 곳에 위치하고 있다. 한편, 강서리보루처럼 해발 350m가 넘는 높은 곳에 배치된 성곽도 있으며, 광동리보루처럼 강에서 다소 떨어진 곳에 위치한 보루도 있는데 역시 도강을 위한 교두보나 도강을 차단하기 위한 방어 기능을 한 것으로 생각된다. 임진강 남쪽에 입지한 성곽은 아미성이 유일한데, 작은 지천을 두고 신라의 수철성과 마주 보고 있으며, 동두천의 소래산보루나 태봉산보루와 이어지는 남북 교통로를 확보하기 위한 교두보 역할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임진강 남안의 백제 육계토성 내부의 주월리유적 백제 주거지에서 고구려 토기가 출토되었으며, 임진강 좌안의 강내리와 한탄강 북안의 통현리 및 신답리에서 고구려 고분이 조사되었고, 포천 성동리 신라 취락유적에서도 고구려 토기가 출토되었다. 주월리유적 출토 토기는 4세기 중·후반경으로 편년되고, 강내리고분은 5세기 후반경으로 편년되는데, 고구려의 임진강 유역 진출과 상실 과정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된다.
양주분지는 지리적으로 임진강 유역과 한강 하류 지역의 가운데에 위치한 교통의 요충지로 28개소의 보루가 분포하고 있다(그림4). 이 중 태봉산보루, 천보산2보루, 독바위보루 등에 대한 발굴조사가 진행 중인데, 독바위보루도 당초 알려진 것과는 달리 크고 작은 두 개의 보루가 있는 것으로 조사되고 있다. 각각의 보루는 평지의 길목을 내려볼 수 있는 전망이 좋은 능선상의 봉우리에 위치하고 있다. 보루는 단독으로 입지하는 경우도 있으나 대부분은 능선을 따라 몇 개씩 연결되어 축조되어 있는데, 일정한 간격을 두고 선형으로 배치되어 있다.
양주분지 동쪽을 호형으로 둘러싸고 있는 천보산에는 5개의 보루가 위치하고 있으며, 분지 중앙부 서쪽의 도락산과 불곡산에도 각각 4개와 9개의 보루가 분포하고 있다. 분지 중앙부 동쪽으로는 독바위보루와 고장산1·2보루가 입지하며, 그 남쪽으로는 큰테미산보루와 작은테미산보루가 남북으로 배치되어 있다. 양주분지 북쪽의 동두천에는 태봉산보루와 소래산보루가 위치해 있는데, 이 두 보루는 임진강과 한탄강을 건너 남하하는 교통로의 입구에 입지하고 있다. 양주분지의 보루들은 양주분지를 둘러싼 형국을 취하고 있어서 남하하는 교통로뿐만 아니라 양주분지 전체를 방어하는 기능을 한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천보산보루는 동쪽의 포천 방면에서 남하하는 교통로를 방어하는 기능도 한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의정부 서남쪽 사패산에도 3개의 보루가 위치해 있으며, 그 동남쪽으로 서울 노원구에는 수락산보루가 위치해 있는데, 수락산보루는 다시 남쪽의 봉화산보루, 망우산보루와 이어진다. 양주분지 일원 보루의 규모는 대체로 둘레 100m 내외로 소규모이지만 서로 연결되어 거대한 방어기지를 구성하고 있다. 발굴조사가 진행 중이어서 자세한 사항은 알 수 없지만 양주분지의 보루는 남하하는 부대의 교통로를 확보하기 위한 전진기지의 기능과 북상하는 부대를 차단하기 위한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한강 유역은 한반도의 중심부로 남북 간 왕래의 통로인 동시에 넓은 들이 있고 황해로의 진출이 용이하여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지역으로, 삼국시대에 들어와서는 이 지역을 차지하는 것이 국가의 흥망을 좌우할 정도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한강 북안의 아차산 일원에는 모두 22개소의 보루가 분포하고 있는데, 지금까지 7개의 보루가 발굴되었거나 조사가 진행 중이다.
아차산은 현재의 서울과 구리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데, 서쪽으로 용마봉, 북쪽으로 망우산 등 주변 산지를 포함하여 아차산이라 부른다. 아차산 일대의 산줄기 좌우로 흐르는 중랑천과 왕숙천 유역에는 저평한 충적평야가 넓게 발달해 있어 육로교통에서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아차산은 해발 285m, 용마산은 해발 348m로 높지는 않지만 한강변에 위치하고 있어 산 위에 서면 서울시를 둘러싼 모든 산과 한강변의 경관을 조망할 수 있다. 특히, 아차산은 그리 높은 산지는 아니지만, 충적평야지대와 한강에 인접하여 위치하고 있어 주변 지역을 조망하는 데 있어서 최상의 위치라 할 수 있다. 아차산에서는 남으로 한강 남안의 풍납토성과 몽촌토성 일대가 한눈에 들어오며, 중랑천변과 왕숙천변을 이용한 육로를 조망할 수 있으며, 한강을 통한 적의 접근까지 조망할 수 있다. 이러한 까닭에 아차산은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군사적으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며, 아차산 고구려 보루의 입지도 이러한 지리적·지형적 이점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그림5).

그림5 | 아차산 일원의 지형과 고구려 보루 분포도(배경지도는 1966년 국토지리정보원 항공사진, ⓒ최종택)
삼국시대에 들어와 아차산 일원은 교통과 통신의 요충지로서 그 중요성이 더욱 부각되었다. 이 지역을 최초로 점유한 세력은 백제인데, 아단성(阿旦城)으로 비정되는 아차산성이 아차산에 위치해 있으며, 바로 한강 남안에는 한성기 백제의 도성인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이 자리하고 있다. 몽촌토성 남쪽으로는 석촌동고분군, 방이동고분군, 가락동고분군 등이 있으며, 아차산 동쪽 한강 남안에는 미사리유적과 암사동유적 등 백제의 취락유적이 위치하고 있다. 475년 백제가 웅진으로 천도한 이후 이렇다 할 백제 유적은 확인되지 않으며, 고구려 유적이 주로 확인된다. 고구려 유적은 주로 관방유적으로 아차산 일원에는 21개소의 보루가 남아 있으며, 한강 남안의 몽촌토성도 한동안 고구려군이 재사용하였다. 551년에는 백제가 수복하였으나 553년 이후 이 일대는 신라가 차지하는데, 아차산성은 신라의 북한산성으로 사용되었으며, 동남쪽의 하남시에 위치한 이성산성은 신라가 새로 설치한 신주(新州)의 치소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그 밖에 아차산 서남쪽의 중곡동고분군과 아차산 일대의 고분군, 방이동고분군, 가락동고분군 등은 신라에 의해 축조된 것이다.
아차산 일원의 고구려 보루는 1994년 구리문화원에서 실시한 지표조사를 통해 구체적인 내용이 알려지게 되었다. 이후 1997년 실시된 발굴조사와 지표조사를 통하여 현재 아차산 일원의 보루는 모두 22개소로 확인된다. 그러나 조사 전에 파괴된 정립회관보루 등을 고려하면 더 많은 수의 보루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일제강점기 조사에 따르면 아차산성 동북쪽, 현재의 워커힐호텔 경내 작은 구릉에도 보루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홍련봉보루 서북쪽 400m 지점의 백련봉에도 보루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 밖에도 고양군 독도면의 광장리·능리·중곡리·구의리 일대에 아차산성을 포함한 10개소의 성지와 봉수가 있었다고 하며, 양주군 노해면 상계리·중계리에 3개소, 중하리와 아천리 일대에도 5개소의 성지와 봉수가 있었다고 한다(강진갑 외, 1994). 실제로 발굴 과정에서 새로운 보루의 존재가 확인되기도 하는데, 2005년 아차산3보루 발굴조사 당시 아차산2보루 서쪽 능선 등산로에서 방앗간시설의 일부가 확인되어 아차산6보루로 명명된 바 있다. 또한 아차산3보루 바로 북쪽에도 석축시설이 확인되며, 아차산1보루 북쪽 등산로에서도 보루로 추정되는 지점이 확인되는 점 등으로 보아 향후의 조사성과에 따라서 더 많은 수의 보루가 확인될 가능성이 크다.
한편, 1970년대 말 강남의 잠실지구와 강북의 화양지구에 대한 개발이 이루어지면서 한강 본류와 지류가 정비되었는데, 1977년 구의동보루가 발굴될 당시까지는 구 지형이 대체로 유지되었던 것으로 보인다(그림6). 개발 이전 아차산 남쪽의 한강은 두 줄기로 갈라져 잠실과 신천 일대를 둘러싸고 있었으며, 한강 본류의 폭도 50m 내외로 좁았다. 몽촌토성 북벽 쪽으로는 성내천이 곡류하고 있으며, 석촌동고분군 남서쪽으로는 탄천이 사행천을 이루고 있다. 또한 아차산의 서쪽으로는 중랑천이 여러 갈래로 나뉘어 흐르고 있으며, 아차산 동쪽으로는 왕숙천이 곡류하여 한강으로 유입된다. 암사동유적 북안의 동쪽과 남안의 서쪽 강변에는 넓은 모래톱이 형성되어 있으며, 하중도 형태를 띠고 있는 잠실과 신천 일대도 모래톱이 넓게 형성되어 있다.

그림6 | 아차산 일원 고구려 보루 분포도(배경지도는 1972년 간행된 지도, ⓒ최종택)
아차산 좌우의 중랑천과 왕숙천 일대는 하천을 따라 남북으로 긴 평지를 이루고 있으며, 해발 50m 내외의 얕은 구릉을 제외하고는 지형적 장애물이 전혀 없다. 아차산 서북쪽 평지에는 해발고도 160m의 봉화산이 독립 구릉을 이루고 있는데, 여기에 보루가 설치되어 있으며, 조선시대 아차산 봉수대가 이곳에 설치되었다. 최근 중랑천 좌안의 배봉산에서도 고구려 보루가 조사되었다. 아차산 서남쪽 중곡동고분군 남쪽에서 구의동보루 사이에는 얕은 구릉이 형성되어 있는데, 지형적 특성으로만 보면 이 일대에 또 다른 보루 등의 유적이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반면에 아차산 일대에서 가장 높은 용마봉은 해발 348m, 아차산은 해발 285m 등이며, 그 자체로는 그리 높지 않으나 주변이 모두 평지인 탓에 비고가 높아 우뚝 솟은 느낌을 준다. 이와 같은 지형적 특성 때문에 아차산 좌우는 고대부터 남북 간 교통의 요충으로 활용되었으며, 아차산 일원에 설치된 보루도 이러한 지형적 요인을 고려하여 배치된 것으로 보인다.
아차산 일원의 보루는 입지에 따라 평지의 단독 구릉상에 배치된 것과 아차산 능선의 봉우리에 배치된 것으로 나뉜다. 단독 구릉에 입지하는 보루는 봉화산보루와 구의동1·2보루 및 홍련봉1·2보루 등 5기가 있으며, 구의동보루는 한강 바로 북안에 인접해 있어서 최전방 초소의 역할을 한 것으로 생각된다. 봉화산보루는 중랑천변 평지의 북쪽 끝에 위치하며, 북쪽의 수락산보루와 함께 양주 일대의 보루와 연락을 위한 보루로 추정된다. 홍련봉1·2보루는 아차산 능선의 최말단과 연결되는 지점에 위치하는데, 평지와 아차산 줄기가 만나는 중간지점에 해당한다. 한편, 아차산 줄기는 용마봉5보루 지점에 이르러 용마산 능선과 아차산 능선의 두 줄기로 갈라지는데, 각 능선에 6~7개의 보루가 배치되어 있으며, 시루봉보루는 동쪽으로 뻗어 내린 능선의 끝자락에 위치한다.
각각의 보루는 위치에 따라 감시대상지역의 차이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주요 보루의 가시권역 분석결과에 잘 나타나 있다(최종택, 2013). 가장 북쪽의 단독 구릉에 위치한 봉화산보루는 아차산 서쪽 중랑천변 전역을 가시권역으로 하고 있는데, 구의동보루와 한강 이남 지역까지도 조망할 수 있으며, 망우산3보루 북쪽 능선이 잘린 지점을 통해 아차산 동쪽 일부 지점도 조망이 가능하다. 망우산보루 중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망우산2보루는 아차산 좌우의 평지를 모두 가시권역으로 하는데, 이는 보루가 남북으로 이어지는 좁은 능선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망우산2보루에서는 봉화산보루와 시루봉보루는 물론이고 아차산2·3·4·6보루와 용마산3·4·5·7보루 등도 조망할 수 있다.
아차산과 용마산 줄기가 만나는 곳에 위치한 용마산5보루는 아차산 서남쪽 일부 지역과 한강 이남의 풍납토성 주변을 제외한 거의 모든 지역을 가시권역으로 하고 있다. 또한 용마산1·2·6·7보루와 아차산1·5보루를 제외한 나머지 보루 모두가 조망되는 좋은 입지를 가지고 있다. 아차산 일대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에 위치한 용마산3보루는 아차산 주변 전역을 가시권으로 하고 있으나, 아차산 능선의 동쪽 바로 아래 지역과 아차산성 건너편 지역은 조망할 수 없는 위치에 입지하고 있다. 용마산1보루는 아차산 서남쪽 일대를 가시권으로 하며, 구의동보루와 홍련봉보루, 아차산 능선의 보루들도 조망된다.
시루봉보루는 아차산 서쪽 왕숙천변 일대와 한강 이남의 풍납토성 및 몽촌토성 일대를 가시권역으로 하고 있으며, 망우산보루와 아차산2·3·4·6보루 및 용마산4·5보루를 조망할 수 있는 위치에 입지하고 있다. 아차산 능선의 최북단에 위치한 아차산4보루는 왕숙천변 평지와 한강 이남의 동쪽지역을 가시권역으로 하는 점에서 시루봉보루의 가시권역과 중첩된다. 그러나 아차산4보루에서는 아차산 서남쪽 한강 이남 지역을 조망할 수 있는 점에서 시루봉보루보다 넓은 지역을 조망할 수 있는 우월한 위치에 입지하고 있다. 아차산 능선 말단에 위치한 홍련봉1보루는 한강 이남 지역 전역과 서쪽 중랑천변 일부를 가시권역으로 하며, 구의동보루와 용마산1·2·3·4·5보루 및 아차산1보루를 가시권역 안에 두고 있다. 아차산일대보루 중 가장 남쪽의 한강변에 접하여 위치한 구의동보루는 얕은 구릉임에도 불구하고, 한강 이남 지역 전역과 북쪽의 봉화산보루까지 조망할 수 있는 좋은 위치에 입지하고 있다. 또한 구의동보루에서는 홍련봉보루는 물론 아차산과 용마산의 주요 보루를 조망할 수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아차산일대보루군은 각각의 위치에 따라 감시할 수 있는 대상지역에서 차이가 있으며, 보루를 축조할 당시 이러한 지형적 요건을 고려한 것으로 생각된다. 즉, 서쪽의 용마산 줄기를 따라 늘어서 있는 보루들은 주로 중랑천 일대를 감제하기 위하여 배치되었으며, 아차산 줄기의 보루들은 왕숙천변과 한강 이남의 감시를 위하여 배치된 것으로 보인다. 봉화산보루는 북쪽의 보루들과 연락을 위한 중간지점에 배치되었으며, 홍련봉과 구의동 일대의 보루들은 한강 이남과 한강의 수로를 조망하기 위하여 배치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각 보루들의 가시권역은 서로 중첩되는 현상을 보이는데, 한강 이남 지역이 가장 많이 중첩되는 것으로 보아 한강 이남 지역을 주요 감제 대상으로 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한편, 구의동보루와 홍련봉보루는 각각 2기의 보루가 독립구릉에 쌍으로 배치된 점을 특징으로 하나 나머지 아차산 능선의 보루들은 일정한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다. 구의동보루와 홍련봉보루는 직선거리로 2km가량 떨어져 있으나 능선의 보루들은 대략 400~500m가량 떨어져 있다. 용마산 능선의 보루들과 아차산 능선의 보루들은 마주 보고 있는데, 음성이나 수신호로 연락이 가능한 위치에 자리 잡고 있다. 각각의 보루는 독립적으로 위치하지만 선형으로 배치되어 있어 유기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아차산 전체가 하나의 요새와 같은 기능을 할 수 있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한강 하류 지역 이남의 고구려 성곽은 호서 지역의 미호천과 금강 유역에 주로 분포하는데, 최근 안성천 남안에 위치한 도기동산성이 조사되는 점으로 미루어볼 때 향후 경기 지역에서도 고구려 성곽이 추가로 조사될 가능성이 크다. 금강 유역에는 세종 남성골산성, 세종 나성 등이 있으며, 금강의 지류인 갑천변에도 월평동산성주 002이 위치하고 있다. 또한 북쪽으로는 금강의 지류인 미호천을 따라 진천 대모산성과 청주 정북동토성이 위치하고 있다(그림7). 호서 지역의 고구려 성곽은 다른 지역과는 달리 규모가 큰 성이 밀집 분포하지 않고 단독으로 분포한다는 점에서 분포상의 차이가 있다. 또한 성곽이 위치한 지역은 육로나 수로를 이용한 교통의 결절점에 해당하는데, 남성골산성이 위치한 곳은 금강 뱃길의 최상류에 해당하며, 고대는 물론 조선시대까지 교통과 물류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호서 지역의 성곽은 출토유물의 편년에 따르면 5세기 후반경에 해당하며, 구체적으로는 475년 고구려의 한성 공함 이후 남하하는 과정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즉 한성에서 성남, 용인, 화성 지역을 따라 남하한 고구려는 안성 도기동산성과 진천 대모산성을 거쳐 차령산맥을 넘은 뒤 청주 정북동토성을 거쳐 청원 남성골산성과 세종 나성 등 금강 유역에 이르러 백제의 웅진도성을 바로 외곽에서 압박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5세기 후반 고구려 남하 경로로 추정되는 지역인 성남 판교동, 용인 보정동, 용인 신갈리, 화성 청계리, 오산 궐동 등지에서 고구려 고분이 발굴되었으며, 용인 마북동 등 고구려 취락유적도 조사되고 있다.

그림7 | 호서 지역 고구려 유적 분포도(ⓒ최종택)
3) 구조
남한 지역의 고구려 성곽은 평지성과 산성 및 보루로 구분된다. 평지성은 임진강 북안의 호로고루, 당포성과 한탄강 북안의 은대리성, 전곡리토성 및 미호천 유역의 정북동토성 등이 있다.주 003
각주 003)

호로고루, 은대리성, 당포성은 강 본류와 지류 사이에 형성된 삼각형 지형에 축조한 탓에 성의 평면형태는 삼각형이며 강에 접한 단애면에는 성벽을 쌓지 않고, 나머지 한쪽 면에만 성벽을 쌓았다. 성의 둘레는 은대리성이 1km가량으로 가장 크고, 당포성은 728m, 호로고루는 400m가량 된다. 전곡리토성은 목책만 일부 조사되어 전체적인 형태는 알 수 없지만, 앞에서 살펴본 3성과는 다른 형태이다. 한편, 세종 나성은 금강 북안의 나지막한 구릉에 위치한 토성으로 엄밀히 평지성이라 할 수는 없으나 입지와 축조방법에 있어서 평지성과 같은 특징을 공유하고 있다.청주 정북동토성은 미호천과 무심천 합류지점 바로 동쪽의 미호천 남안에 위치한 방형 토성으로 토성 바깥쪽으로 해자가 설치되어 있으며, 동서남북 네 곳에 문지가 있고, 둘레는 675m이다. 정북동토성은 원삼국시대 이후 목책성으로 축조되었다가 토성으로 개축된 것으로 통일신라시대까지 여러 차례 수·개축이 반복된 것으로 보인다(충북대학교박물관, 2018). 최근 발굴조사에서 해자가 폐기된 후의 퇴적층에서 5세기 후반경의 고구려 토기가 출토되었으나 고구려가 정북동토성을 사용할 당시의 모습은 정확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이 때문에 현재의 자료상으로는 정북동토성과 같은 평지의 방형 토성을 남한 지역 고구려 성곽의 한 유형으로 설정하기 어렵다.
산성은 파주 덕진산성, 연천 아미성과 안성 도기동산성, 진천 대모산성, 세종 남성골산성, 대전 월평동산성 등이 있는데, 덕진산성과 도기동산성, 대모산성, 남성골산성은 내성과 외성으로 구성되어 있다. 산성의 규모는 도기동산성이 둘레 2km가량으로 가장 크고, 대모산성이 1.25km, 덕진산성 외성이 948m, 남성골산성이 700m가량이며, 아미성은 363m로 가장 작다. 성벽은 도기동산성과 남성골산성의 외성은 목책성이고, 대모산성은 토성이며, 덕진산성과 월평동산성은 토심석축성, 아미성은 석성 등으로 다양하다.
보루는 임진강·한탄강 북안과 양주분지, 한강 북안의 아차산 일원에 집중적으로 분포하며, 규모는 양주분지의 고장산2보루나 큰테미산보루와 같이 둘레 500m를 넘는 것도 있으나 대부분은 둘레 300m 이내의 작은 규모이다. 전면적인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아차산 일원의 보루를 보면, 외곽의 해자와 성벽과 치 등 방어시설, 내부의 건물지와 저수시설, 저장시설 및 배수시설 등이 기본적인 구조이며, 보루별로 단야시설과 방앗간 등을 갖추고 있다(그림8).

그림8 | 홍련봉2보루 유구 배치도(ⓒ한국고고환경연구소)
남한 지역 고구려 성곽의 성벽은 목책성과 토성, 토심석축성 및 석성 등으로 구분되는데, 토성은 세종 나성 등 매우 적은 사례만 확인되고, 순수한 석성은 아미성 등에서만 확인된다. 목책성은 가장 먼저 사용된 것으로 호로고루의 토심석축성 아래층에서 목책성이 확인되었으며, 도기동산성과 남성골산성의 외성도 목책성으로 확인된다. 목책성은 안팎으로 일정한 거리를 두고 2열의 목책렬을 세운 것으로, 남성골산성의 경우와 같이 외곽 목책렬 안쪽에 보조 기둥을 세운 주열이 1열 추가되기도 하고, 바깥쪽 목책렬 하단부를 석축으로 보강하기도 하였다. 도기동산성에서는 목책 바깥쪽에 토낭을 쌓아 기단부를 구축한 사례도 확인된다(기남문화재연구원, 2018).
토심석축성은 남한 지역에서 가장 일반적으로 성벽을 구축하는 방법인데, 임진강·한탄강 유역의 대부분 성곽과 아차산 일원의 보루는 모두 같은 방식으로 축조된 것으로 확인된다. 월평동산성에서도 토심석축성이 확인되고, 토성으로 보이는 진천 대모산성도 원래는 같은 토심석축성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토심석축성은 먼저 내외 2열의 영정주를 세운 후 이를 종장목과 횡장목으로 엮은 후 내부는 점토로 다져 토축부를 축조하고, 그 바깥쪽으로 1~2겹의 석축 성벽을 쌓았다(그림9, 10). 그래서 성 외부에서는 석축 성벽만 보이게 되지만 바깥쪽 성벽이 무너지면 토축부에 기대어 쌓은 1차 석축부에 일정한 간격의 영정주 기둥 홈이 드러나게 된다. 규모의 차이가 있지만 같은 형태의 기둥홈은 평양의 대성산성에서도 확인된다. 한편, 호로고루와 당포성에서는 토축부 바깥쪽의 1차 석축 성벽의 기둥 홈 바닥에서 확돌이 조사되었는데, 석축을 쌓기 위한 가설목을 고정하여 성벽을 견고하게 유지해주는 구조물의 기능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심광주, 2018).

그림9 | 호로고루 성벽 전경 (ⓒ한국토지박물관)

그림10 | 아차산 고구려 보루 성벽 구조 개념도
성곽의 내부에는 여러 기의 건물과 저수시설 및 배수시설 등이 설치되었다(그림11). 병사들의 막사로 사용된 건물들은 일부 움집 형태도 있지만 대부분은 지상 건물이다. 방형이나 장방형으로 돌과 점토를 섞어 쌓은 담장식 벽체에 맞배식 지붕을 덮은 구조로 대부분 5×7m 내외의 크기이다. 건물지 내부에는 온돌이 설치되어 있는데, 온돌은 고래가 하나뿐인 이른바 ‘쪽구들’로서 판석을 세워서 벽체를 만들고, 그 위에는 납작하고 긴 판석으로 뚜껑을 덮은 뒤 짚을 섞은 흙으로 미장한 형태이다.
성곽의 내부에는 1~2기의 저수시설을 갖추고 있다. 저수시설은 풍화암반토를 방형으로 굴토하여 만들었으며, 벽체와 바닥에는 뻘을 채워 방수 처리를 하였다. 벽체에는 통나무를 쌓아가며 뻘을 채웠으므로 사용할 당시에는 통나무가 노출되어 벽체의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저수시설의 규모는 약간씩 차이가 있으나 저수 용량이 비교적 일정한 것으로 보아 보루의 규모에 따라 확보해야 할 저수 용량이 정해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림11 | 아차산 고구려 보루 내부 시설물(ⓒ한국고고환경연구소)
![]() 1. 온돌 |
![]() 2. 배수시설 |
![]() 3. 방앗간 |
![]() 4. 건물지 |
![]() 5. 저수시설 | |
![]() 6. 단야로 |
![]() 7. 소성유구 |
그 외에도 보루의 특징에 따라 여러 시설물이 설치되었다. 아차산4보루와 용마산2보루 및 아차산3보루의 경우 단야시설이 설치되어 있어서 철기류에 대한 간단한 수리 정도는 직접 수행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홍련봉2보루에서는 토기 소성과 관련된 시설이 확인되었으며, 아차산3보루와 홍련봉2보루에서는 지하식 저장고가 확인되기도 하였다. 또한 아차산3보루에서는 방앗간이 확인되었는데, 방아확과 볼씨가 함께 배치된 상태로 발굴되었다. 이러한 각종 시설물로 보아 이들 보루에 주둔한 고구려군은 다양한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병사로 구성되었으며, 출토된 철제농공구들은 이들이 평상시에 농사와 같은 생업에 종사하였음을 보여준다.
4) 편년
역사적인 상황을 고려할 때 남한 지역 고구려 관방유적은 고구려가 본격적으로 남진을 시도한 4세기 말 이후에 축조된 것이다. 그러나 출토된 토기류의 제작기법과 형태적인 특징을 고려할 때 지역별 또는 유적별로 축조시점과 사용기간에 상당한 차이가 있다.
지금까지 가장 많은 연구가 이루어진 한강 유역의 경우 고구려 토기의 대표적인 기종인 구형호류에 대한 형식 변천에 따르면 아차산 일원 보루에서 출토된 구형호류는 6세기 전반으로 편년된다. 반면에 몽촌토성에서 출토된 사이장경옹(나팔입항아리)의 경우 형태적 특징으로 보아 5세기 후엽으로 편년된다. 또한 홍련봉2보루에서는 520년에 해당하는 ‘경자(庚子)’명 토기가 출토되어 이러한 연대관의 명확한 근거가 되고 있다(그림12). 이러한 토기류의 편년에 의하면 475년 백제의 수도 한성을 공함한 고구려군은 500년 무렵까지 한강 이남의 몽촌토성에 주둔하였으며, 한강 북안의 아차산 일원 보루는 500년 무렵에 축조되어 551년까지 존속한 것으로 편년된다.

그림12 | 홍련봉2보루 출토 경자명 토기 (ⓒ최종택)
또한 남한 지역 성곽에서 출토된 토기류는 제작기법과 형태적 특징을 기준으로 크게 두 유형으로 구분된다. 첫 번째 유형은 표면이 흑색이 많고, 태토에 모래가 섞여 있으며, 표면에 점열문이나 중호문 등이 시문된 것이고, 두 번째 유형은 표면이 황색이고, 태토는 모래가 섞이지 않은 니질이며, 문양이 시문되지 않은 것이다. 한강 유역 고구려 토기의 편년에 따르면 전자는 5세기 중엽 이후 500년 무렵까지로 편년되며, 후자는 500년 이후 6세기 중엽까지로 편년된다.
임진강과 한탄강 유역의 성곽들은 두 유형이 모두 있으며, 일부 유적에서는 더 늦은 시기의 토기류가 출토되고 있으므로 5세기 중엽 이후 축조되어 일부는 7세기 중엽까지 사용된 것으로 생각된다. 양주분지의 관방유적은 발굴된 사례가 부족하여 자세히 알기 어려우나 천보산2보루 출토 토기류를 통해 볼 때 5세기 중엽 이후에 축조된 것으로 생각된다.
반면에 남성골산성을 비롯한 금강 유역의 관방유적에서는 첫 번째 유형의 토기류만 출토되어 비교적 짧은 기간 동안 존속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토기류의 연대관과 역사적 상황을 고려할 때 475년 이후 축조되어 500년 무렵까지 존속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 각주 001)
- 각주 002)
-
각주 003)
청주 정북동토성은 미호천과 무심천 합류지점 바로 동쪽의 미호천 남안에 위치한 방형 토성으로 토성 바깥쪽으로 해자가 설치되어 있으며, 동서남북 네 곳에 문지가 있고, 둘레는 675m이다. 정북동토성은 원삼국시대 이후 목책성으로 축조되었다가 토성으로 개축된 것으로 통일신라시대까지 여러 차례 수·개축이 반복된 것으로 보인다(충북대학교박물관, 2018). 최근 발굴조사에서 해자가 폐기된 후의 퇴적층에서 5세기 후반경의 고구려 토기가 출토되었으나 고구려가 정북동토성을 사용할 당시의 모습은 정확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이 때문에 현재의 자료상으로는 정북동토성과 같은 평지의 방형 토성을 남한 지역 고구려 성곽의 한 유형으로 설정하기 어렵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