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출토유물
3. 출토유물
남한 지역에서 처음으로 발굴된 고구려 유물은 1921년 경주시 노서동 가옥 건축 중에 우연히 발견된 금관총에서 출토된 청동사이호(靑銅四耳壺)라고 할 수 있다. 광복 직후인 1946년 한국인에 의해 처음으로 발굴조사가 실시된 경주 호우총에서는 청동호우(靑銅壺杅)가 출토되었는데, 바닥에는 415년으로 추정되는 을묘(乙卯)년 광개토왕과 관련된 명문이 있어서 주목을 받았다. 1963년에는 경남 의령군 대의면 하촌리의 도로공사 중에 고구려 불상 금동연가7년명여래입상이 우연히 발견되었고, 비슷한 시기 진천 회죽리와 청원 상봉리 등지에서 고구려 금제귀걸이가 우연히 발견되었으며, 1979년에는 충주에서 남한 유일의 고구려 비인 〈충주고구려비〉가 발견되기도 하였다.
이상과 같이 남한 지역에서도 20세 초부터 신라 고분이나 유구와 유리된 채 간헐적으로 고구려 유물이 발굴 또는 발견되었으나, 확실한 고구려 유적에서 고구려 유물이 출토된 것은 1980년대 이후의 일이다. 1988년 몽촌토성 동남지구 발굴조사에서 고구려 토기 사이장경옹(四耳長頸甕)이 출토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1977년 조사된 구의동유적 출토유물도 고구려 유물로 재인식되었다. 이어 1994년에는 아차산 일원의 지표조사를 통해 20여 기의 고구려 보루와 고구려 유물이 조사되었고, 1997년 아차산4보루 발굴조사를 필두로 최근까지 7개의 고구려 보루에 대한 발굴조사가 실시되었다. 또한 1999년 이후 임진강·한탄강 유역, 양주분지, 경기도 성남·용인·화성·안성, 강원도 춘천·화천·홍천, 충청북도 충주·진천·청주·청원 및 세종과 대전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에서 고구려 유적이 조사되었고, 많은 양의 고구려 유물이 출토되었다. 남한 지역 출토 고구려 유물은 장신구류, 토기류, 와전류, 철기류 등으로 구분된다.
1) 장신구류
장신구류는 금제귀걸이, 은제 팔찌와 반지 및 구슬 등이 있는데, 고분에서 출토된 것이 대부분이다. 남한 지역에서 출토된 고구려 귀걸이는 모두 8점으로 세종 남성골산성에서 1점, 춘천 중도고분에서 1점, 중도F지구에서 2점이 출토되었으며, 나머지는 연천 선곡리, 서울 능동, 진천 회죽리, 청원 상봉리 등지에서 채집된 것이다(그림21). 채집품의 출토 유구는 명확하게 알 수 없지만 대체로 고분 부장품으로 추정된다.
남한 지역 출토 귀걸이는 모두 주환-유환-중간식-수하식으로 구성된 전형적인 고구려 귀걸이 형태인데, 태환식이 5점으로 주를 이루며, 세환식은 1점에 불과하다. 중도F지구 출토품 2점은 주환이 유실되었으나 중간식 연결금구가 판상으로 되어 있어 원래 태환식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태환식귀걸이의 유환은 모두 타원형이며, 세환식의 유환은 원형으로 태환식에 비해 작다. 중간식은 모두 구체를 이루고 있는데, 서울 능동 채집품은 중간식 연결금구와 구형 중간식, 원판형 수하식에 누금기법으로 인동문과 화문을 정교하게 장식하였는데, 알려진 고구려 귀걸이 중 가장 화려한 것으로 꼽힌다. 남성골산성 출토품도 이와 유사한 형태이나 연결금구와 중간식 및 원판형 수하식에 누금장식이 생략된 형태이고, 나머지는 모두 여러 개의 작은 고리를 연접하여 만든 이른바 소환연접구체를 중간식으로 하고 있는데, 연천 선곡리 채집품은 소환연접구체 가운데 가로로 눈을 새긴 대를 돌린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수하식은 추형과 심엽형 두 종류가 각각 4점인데, 서울 능동 채집품과 남성골산성 출토품은 약간 길쭉한 각진 추형이고, 청원 상봉리 채집품과 춘천 중도 출토품은 각이 없는 짧은 형태로 약간의 차이가 있다. 심엽형 수하식은 대체로 끝이 뾰족하고 테두리가 도톰하게 장식된 크고 작은 심엽형 금판 2매를 연결하였으나, 연천 선곡리 채집품은 테두리가 없는 심엽형 금판 1매로 이루어진 점에서 차이가 있다. 또한 수하식 연결금구도 얇은 금판을 둥글게 말아 만들었으나, 선곡리 출토품은 소환 형태의 연결금구를 사용한 점에서도 차이가 있다.
남한 지역 출토 귀걸이는 형태나 제작기법의 속성을 통해 볼 때 대체로 5세기 후엽에서 6세기 전엽으로 편년되며(劉나리, 2015), 이러한 연대관은 인접지역의 고구려 고분이나 보루 등의 연대와도 일치한다. 또한 금제귀걸이의 소유자는 당시 고구려 사회의 상위 신분이었음을 고려하면 남한 지역의 고구려 유적이 남진을 위한 거점의 역할 외에도 일정 기간 주둔을 염두에 둔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 정황적 근거로서 중요하다(최종택, 2011; 2016).

그림21 | 남한 지역 출토 금제귀걸이(ⓒ 1·8: 국립중앙박물관, 2~4: 국립청주박물관, 6·7: 예맥문화재연구원, 5: 최종택)
- 1. 서울 능동(길이 6cm) 2. 진천 회죽리(길이 6.1cm) 3. 청원 상봉리(길이 5.2cm) 4. 세종 남성골산성(길이 6cm) 5. 춘천 중도(길이 4.5cm) 6. 춘천 중도F구역(길이 3.6cm) 7. 춘천 중도F구역(길이 2.7cm) 8. 연천 선곡리(길이 4.3m)
- 1. 서울 능동(길이 6cm) 2. 진천 회죽리(길이 6.1cm) 3. 청원 상봉리(길이 5.2cm) 4. 세종 남성골산성(길이 6cm) 5. 춘천 중도(길이 4.5cm) 6. 춘천 중도F구역(길이 3.6cm) 7. 춘천 중도F구역(길이 2.7cm) 8. 연천 선곡리(길이 4.3m)

그림22 | 남한 지역 고구려 고분 출토 은팔찌와 반지, 금박구슬 및 유리구슬(축척 부동, ⓒ1~4, 6~10: 高麗文化財硏究院, 5: 중원문화재연구원)
팔찌는 은제와 청동제가 있는데, 은제팔찌는 연천 강내리2호분에서 1점(그림22-1), 강내리8호분에서 2점(그림22-2·3), 충주 단월동10호분에서 2점이 출토되었으며, 청동제팔찌는 충주 단월동5호분에서 2점이 출토되었다. 특히, 단월동5호분에서는 남성과 여성의 인골이 각각 1구씩 조사되었는데, 남녀 피장자가 각각 팔찌를 착용하고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팔찌는 외면에 작은 눈을 도드라지게 새긴 것과 가는 선을 둥글게 구부려 연결한 두 종류인데, 전자는 단월동5호분에서 확인된다. 연천 강내리8호분에서 출토된 한 쌍의 팔찌는 가느다란 은봉을 둥글게 휘어 만든 후 양단을 구부려 고리를 만들어 연결한 후 끝을 1~3회 감아서 마무리하였는데, 이와 유사한 형태의 팔찌는 무령왕릉에서도 확인된다(김병모 외, 2012).
반지 역시 은제와 청동제가 있는데, 은제반지는 연천 강내리2호분에서 1점(그림22-4), 충주 두정리4호분에서 1점(그림22-5), 충주 단월동10호분에서 2점 등 총 4점이 출토되었으며, 청동제반지는 단월동5호분 여성의 인골 주변에서 1점이 출토되었다. 반지는 은판을 둥글게 말아 연결하고 2조의 횡침선을 돌린 후 짧은 거치문을 시문하여 장식한 것(그림22-4)과 은봉 또는 청동봉을 둥글게 말아 연결한 후 윗면을 마름모꼴로 편 형태(그림22-5) 두 종류가 있는데, 전자는 연천 강내리2호분 출토품이 유일하다. 나머지는 모두 후자의 형태에 속하는데 평양 안학궁터2호분 등지의 고구려 고분에서 흔히 출토되는 것과 같은 형태이다(김일성종합대학 고고학및민속학강좌, 1973).
그 밖에 연천 강내리고분군에서는 금박구슬 2점 및 유리구슬 3점이 출토되었다(그림22-6~10). 금박구슬은 속이 빈 주판알 모양이며, 매달아 장식할 수 있도록 가운데나 양 측면으로 구멍이 뚫려 있다. 유리구슬은 3점 모두 감청색을 띠며, 세로 방향으로 기포흔이나 백색 줄이 보이는데 이는 유리를 늘려서 만든 흔적으로 보인다. 또한 과학적 분석 결과 산화나트륨과 산화칼륨을 융제로 사용한 것이 확인되어 소다유리로 추정된다(김병모 외, 2012).
2) 토기류
1988년 몽촌토성 동남지구 발굴조사에서 고구려 토기 사이장경옹이 출토된 것을 계기로 몽촌토성에서 출토된 같은 제작기법의 토기류와 구의동유적에서 출토된 토기류를 고구려 토기로 인식하게 되었다. 이어서 아차산 일원의 보루에서 다량의 고구려 토기가 출토되었으며, 임진강 유역의 연천 호로고루를 비롯해 대전의 월평동유적에 이르는 넓은 지역에서 많은 양의 고구려 토기가 출토되었다.
토기의 기종은 대략 30여 개로 분류되며, 대부분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던 실용기이다(그림23). 보루별로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출토양상을 보면 단일 기종으로는 옹류가 가장 많고, 동이류·구형호류·접시류·장동호류·완류·시루류 등의 순으로 많이 출토된다. 광구장경사이옹류와 원통형삼족기류는 실용기가 아니라 의례용기로 추정되는데, 출토량이 빈약하며 완형으로 출토되는 예도 거의 없다. 그 밖에 또아리병류·구절판류·호자류·깔때기류·주좌류 등은 소량만 출토되는 기종으로 일반적으로 실생활에서 많이 사용되지 않은 것이다.

그림23 | 남한 지역 출토 고구려 토기(ⓒ최종택)
용기류 외에도 다양한 토기가 출토되는데, 연천 호로고루에서는 상고(相鼓)라는 명문이 새겨진 토제북이 출토되었으며, 직선으로 마감된 구연부 아래에 3열의 구멍이 지그재그로 뚫려 있어서 가죽을 덮고 끈을 연결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명문은 남아 있지 않지만 양주 천보산2보루에서도 같은 형태의 토제북이 출토되었다. 그 밖에 호로고루에서는 토제벼루와 저울추, 관모형 토제품 등이 출토되었다(그림24).

그림24 | 남한 지역 출토 고구려 토기(심광주 외, 2007; 2014 원색사진에서 발췌 전제)
남한 지역에서 출토된 토기류는 기종별로 약간씩 차이가 있지만 대체로 유사한 제작기법을 공유하고 있다. 우선 모든 기종이 평저로 제작되었고, 호·옹류의 경우 목과 구연이 발달되었으며, 호·옹류 및 동이류, 시루류 등에는 대상파수를 부착하였다. 태토는 기본적으로 매우 정선된 니질점토를 사용하였다. 예외적으로 심발류와 부형토기류는 사립이 함유된 점토질태토를 사용하였으며, 석면을 보강제로 사용하기도 한다. 니질태토의 토기는 별도의 보강제를 사용하지는 않았으나 대부분의 토기에 산화철(Fe2O3) 성분의 붉은색 덩어리가 섞여 있는 것이 관찰되며, 의도적으로 섞은 것인지 원료 점토에 포함되어 있던 것인지 여부는 명확하지 않다(崔鍾澤, 1995). 토기질은 대체로 경질에 가까우나 일부는 표면이 손에 묻어날 정도로 약화되어 있다. 일부 회색조의 토기류는 경도가 상당히 높은 반면에 구연부나 동체부 일부가 찌그러지거나 부풀어 오른 경우가 많아 주된 제작기술은 아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토기의 표면색은 황색·흑색·회색의 세 가지로 대별되는데, 황색이 가장 많으며, 토기 표면에 슬립을 입힌 것으로 보이는 경우도 간혹 있다.
성형은 대체로 테쌓기를 한 후 물레를 사용하여 마무리하는 방법을 통해 이루어진다(그림25). 제작 과정을 보면 저부에서 구연부 쪽으로 올라오면서 성형하는데, 먼저 납작한 바닥을 만들고 그 위에 점토 띠를 쌓아 올라가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바닥과 동체부를 접합하는 방식은 두 가지가 있는데, 첫 번째는 납작한 바닥을 만들고 그 위에 점토 띠를 올려놓고 쌓는 방식이며, 두 번째는 납작한 바닥을 만들고 그 주위에 점토 띠를 붙여서 쌓는 방식이다. 이 두 방법은 기종과 관계없이 혼용되는 것으로 보이는데, 전자는 대체로 장동호류와 같은 소형 기종에서 많이 관찰된다.

그림25 | 아차산보루 출토 고구려 토기류의 제작흔(ⓒ최종택)
동체부는 점토 띠를 쌓고 아래위로 손으로 눌러서 접합한 후 물레질하여 마감하는데, 점토 띠의 폭은 기종에 따라 다르다. 장동호류와 같은 소형 기종의 경우 점토 띠의 폭은 2~3cm에 불과하지만 옹류와 같은 대형 기종의 경우 점토 띠의 폭이 10cm를 넘는 것도 있다. 테쌓기를 하면서 손으로 눌러서 점토 띠를 서로 접합하여 구연부까지 성형한 후 안팎을 물레질하여 깨끗이 마무리하였다. 동체부나 뚜껑에 손잡이를 붙이는 방법은 손잡이 종류에 따라 차이를 보이는데, 동체부에 대상 파수를 부착할 경우 가운데 심을 박고 그 주변에 점토를 덧붙여 마무리하였으며, 뚜껑에 파수를 부착할 경우는 파수를 부착할 지점에 먼저 여러 줄의 홈을 낸 후 손잡이를 부착하였다.
일부를 제외한 거의 모든 토기의 표면은 물레질로 마무리하였다. 많은 토기들은 물레질을 한 후 부분적으로 깎기 기법을 사용하여 정면하는데, 예새를 사용한 문지르기나 깎기 등이 많이 사용되었다. 그 밖에 예새를 이용한 횡방향 정면 후 음각선을 그은 경우와 예새를 이용하여 횡방향 깎기와 종방향 깎기를 병행한 경우 등이 있으며, 표면에 승문이 타날된 경우도 가끔 있다. 토기 표면에 음각으로 문양을 새기는 경우는 없으며, 흔히 암문으로 불리는 찰과법에 의한 불규칙한 사선문이나 격자문, 연속고리문 등이 시문된다(그림26). 표면 색조는 황색이 가장 많으며, 흑색과 회색의 경질토기도 있는데, 회색경질토기는 소성 과정에서 형태가 변형된 것이 많다.

그림26 | 아차산보루 출토 고구려 토기류의 암문(ⓒ최종택)
토기의 제작과 관련된 여러 속성 및 기술은 토기의 제작 전통을 특정하게 되는데, 이는 다른 한편으로 시간적인 요소와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몽촌토성과 은대리성, 남성골산성의 토기류에서는 황색조의 토기가 상대적으로 적고, 니질태토의 경우에도 고운 사립이 소량 섞여 있는 경우가 많이 확인된다. 또 이들 유적의 토기에서는 비교적 많은 수의 토기에 문양이 시문되어 있으며, 문양의 종류도 음각 횡선문과 점열문, 중호문, 파상문 등이 단독 또는 결합하여 시문되고, 일부 유적에서는 승문이나 격자문, 선조문 등이 타날되기도 한다. 대전의 월평동유적 출토 토기류도 이와 유사한 특징을 공유한다.
반대로 구의동1보루, 홍련봉1·2보루, 용마산2보루, 아차산3・4보루, 시루봉보루, 호로고루, 독바위보루 등에서는 표면색이 황색인 토기의 구성비가 상대적으로 높으며, 심발형토기를 제외하고는 완전한 니질태토의 토기가 대부분이다. 또 이들 유적에서는 음각으로 시문된 토기가 거의 없으며, 반대로 격자문이나 연속고리문 등의 암문이 시문된 토기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높다. 그 밖에 시루봉보루에서는 굽이 달린 완류의 수가 다른 유적에 비해 월등히 많으며, 특히 통굽을 만들고 내부를 깎아 내는 기법은 자기에서 보이는 굽의 제작기법과 같은 것이어서 시간적으로 늦은 시기의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梁時恩, 2003). 이상과 같이 남한 지역 고구려 유적에서 보이는 토기의 제작기법과 관련된 속성의 차이는 유적 간 시간적인 차이를 반영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몽촌토성을 대표로 하는 이른 시기의 유적과 구의동1보루 및 아차산 일원의 보루를 중심으로 하는 늦은 시기의 유적으로 큰 경향성을 파악할 수 있다.
그 외에도 고구려 토기 호류와 옹류, 장동호류, 동이류, 심발류의 구연 형태의 구성비 차이를 통해 유적 간의 시간적 차이를 분석할 수 있다. 이들 기종의 구연부는 구순 말단의 처리에 따라 네 유형으로 구분된다(그림27). 첫째는 구연부가 거의 직선으로 외반하며, 구단부를 둥글게 처리한 것(A형)이고, 둘째는 직선으로 외반한 구연부의 말단이 각지게 처리된 것(B형)으로 이 경우 구단부 바깥쪽으로 침선이 돌아가는 경우가 많다. 셋째는 둘째 유형과 유사하지만 구단부 하단이 들리고 홈이 파진 것(C형)이며, 넷째는 구연부를 밖으로 말아서 접은 것(D형)이다.

그림27 | 고구려 토기 호·옹류 구연부 형태 분류(ⓒ최종택)
남한 지역 각 유적별 고구려 토기의 구연부 형태의 분포는 그림28과 같다. 그간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단순하게 처리된 A형과 B형 구연보다 구단부를 밖으로 말듯이 둥글게 접은 D형이 시간적으로 늦게 사용되는 것으로 밝혀지고 있는데(崔鍾澤, 1999a), 이러한 구연 형태 구성비는 유적별로 차이가 있어서 구연 형태의 구성비에 따라 각 유적 간 시간적 차이를 추론할 수 있다. 이러한 구성비를 참조한다면 아차산 일원의 보루들과 호로고루는 몽촌토성이나 은대리성, 월평동유적, 남성골산성, 주월리유적보다 상대적으로 늦은 시기의 유적으로 판단할 수 있다. 이를 다시 토기질이나 표면색조, 문양 등 여러 속성의 분석결과와 함께 고려하면 남한 지역 고구려 토기가 출토되는 유적은 주월리유적(4세기 후반)-남성골산성, 월평동유적, 은대리성, 몽촌토성(5세기 후반)-호로고루와 아차산 보루(6세기 전반) 순으로 배열할 수 있다.

그림28 | 남한 지역 유적별 고구려 토기 구연 형태 백분율 분포도(숫자는 최소 개체수)
남한 지역 고구려 토기 중 형태상 가장 특징적인 기종은 사이장경옹류이다. 사이장경옹류의 형식 변천 및 편년관에 의하면 몽촌토성 출토 사이장경옹은 삼실총 및 장천1호분 출토품보다는 늦고 문악리1호분 출토품보다는 이른 시기의 것으로 볼 수 있으며, 그 구체적인 연대는 고구려가 한성을 함락한 직후인 5세기 후반으로 추정할 수 있다.
구형호류는 공처럼 둥근 동체부에 짧게 외반된 목이 달린 것 중에서 동체부에 파수가 부착되지 않는 것들이다. 구형호류는 구연부를 포함한 목의 형태와 동체부의 형태에 따라 세 유형으로 구분되는데, A형은 동체부가 대체로 구형을 이루나 최대경이 어깨쪽에 있으며, 무엇보다도 목과 구연부가 거의 직립에 가까운 것을 특징으로 한다. B형은 동체부가 눌린 공모양의 편구형이며, 목은 짧게 직립하다가 밖으로 꺾이는 형태를 하고 있다. C형은 동체부가 대체로 구형을 이루고 있으나, 다른 유형에 비해 세장한 형태이고, 목은 외반되어 있으나 B형에 비해 짧은 것이 특징이다(그림29). 구형호류의 형태별 변천에 따르면 구의동보루나 아차산보루에서 출토된 구형호는 6세기대에 속하는 것이며, 몽촌토성 출토품은 이보다 약간 이른 5세기 후반으로 편년된다. 한편, 최근 조사된 연천 강내리고분, 용인 보정리고분, 화성 청계리고분, 충주 두정리고분 등에서 출토된 구형호류도 몽촌토성 출토품과 유사한 5세기 후반으로 편년된다(최종택, 2011).

그림29 | 고구려 토기 호류 변천도(ⓒ최종택)
고구려 토기의 제작기법상 특징과 구연 형태 구성비, 기종별 편년, 역사적 상황 등을 종합해볼 때 남한 지역 고구려 유적의 편년적 위치는 다음과 같다. 남한 지역에서 출토된 가장 이른 시기의 토기 자료는 주월리유적에서 출토된 구형호이며, 이를 통해 주월리유적 고구려 토기의 연대는 4세기 후반대로 비정할 수 있다. 그다음으로는 남성골산성, 월평동유적, 은대리성, 몽촌토성 등의 유적인데, 이들 유적의 고구려 토기는 대략 5세기 후반대로 편년된다. 각 유적별 절대연대를 비정할 만한 자료가 충분하지는 않지만 몽촌토성의 경우는 고구려의 한성 공함 연대(475년)를 상한으로 한다. 몽촌토성 고구려 유적의 하한은 토기의 편년결과를 통해서 짐작할 수 있는데, 몽촌토성 고구려 토기의 형식 변이가 크지 않은 점을 고려할 때 그 존속기간을 25년 정도로 보면 대략 500년을 전후한 시점이 몽촌토성 고구려 유적의 하한이 될 것으로 생각된다. 다음으로는 구의동1보루, 호로고루, 아차산4보루, 시루봉보루 등 아차산 일원의 고구려 보루와 임진강 유역의 유적 일부가 이에 해당하는데, 양주 지역의 일부 유적도 이 시기에 속할 것으로 생각된다. 이들 유적의 절대연대에 대해서는 홍련봉2보루에서 출토된 경자명 토기가 있는데, 그 연대가 520년에 해당하므로 이들 유적의 연대는 6세기 전반으로 비정할 수 있다. 상한은 몽촌토성 고구려 유적의 하한 연대를 참고하여 500년을 전후한 시점으로 비정하고, 하한연대는 백제가 한강 유역을 회복하는 551년으로 비정할 수 있다.
3) 와전류
남한 지역에서 기와류가 출토되는 유적은 임진강·한탄강 유역의 호로고루와 당포성, 두루봉보루, 무등리1보루, 아미성 그리고 한강 유역의 홍련봉1보루 등 매우 제한적이며, 이 중 와당은 호로고루와 홍련봉1보루에서만 출토된다. 그 밖에 아차산성에서 고구려 기와 및 와당이 출토되는데, 홍련봉1보루 출토품과 같은 것이다. 또 가락동5호분 현실 바닥 정지에 고구려 기와류가 사용되었는데(沈光注, 205), 폐기된 기와류를 재사용한 사례이므로 원래 용도로 보기는 어렵다. 발굴조사가 실시된 홍련봉1보루에서는 1호 건물지 주변에서만 기와와 와당이 출토되는 등 제한적이지만 호로고루에서는 기와폐기장이 확인되었고, 평기와와 와당 외에 치미와 착고 등도 출토되었으며, 기와의 사용과 관련된 명문기와가 출토되어 본격적인 기와 사용의 사례로 중요하다. 그밖에 구의동보루와 호로고루에서는 문양이 없는 소문전이 여러 점 출토되었는데, 바닥에 깔아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와당은 홍련봉1보루에서 6점, 호로고루에서 10여 점이 출토되었는데, 두 유적 모두 각각 동일한 양식의 와당만 출토되는 특징이 있다. 홍련봉1보루 출토 와당은 6점 모두 꽃봉오리 형태의 연화를 선조와 부조로 표현한 연화복합문와당이다. 자방은 반구형으로 융기된 형태이며, 외곽으로 2줄의 권선이 돌아가고 있다. 연화의 중앙에는 융기선이 표현되어 있어 강한 볼륨감을 나타내고 있다. 연화 사이에는 삼각형의 주문이 표현되어 있으며, 와당면과 주연부 사이에는 1줄의 권선이 돌아가고 있다. 주연부는 와당면보다 좀 더 높게 돌출된 것이 특징이다. 주연부가 남아 있는 와당을 통해 볼 때 와당의 지름은 17~19cm 정도로 큰 편이다.
와당의 색조는 대부분이 적색이며, 한 점만 회색을 띠고 있다. 적색 와당의 경우에도 표면에 붉은색을 채색한 것이 아니라 산화염 소성에 의한 것이다. 태토는 고운 니질점토를 사용하였으며, 자방과 연화에 분리사(分離沙)를 사용한 것이 확인되는데, 와당면뿐만 아니라 주연부에서도 분리사가 확인된다. 와당의 절단면에서 2~3매의 점토판을 이용하여 접합한 것이 확인된다. 주연부는 와당면을 성형한 뒤 따로 제작하여 접합하였으며, ㄴ자 형태의 홈을 파서 수키와를 접합하였는데, 와당의 뒷면은 도구를 사용하여 다듬었다(그림30-1).
와당면에서 확인할 수 있는 표현기법에서 몇 가지 공통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와당면이 남아 있는 경우 부조로 표현한 연화의 끝이 외곽의 주연부와 이어져 있는 점을 모두 확인할 수 있다. 또한 부조로 표현된 연화의 크기가 일정하지 않으며, 연화의 오른쪽 끝부분이 왼쪽보다 높이가 낮다. 마지막으로 삼각 주문의 형태가 모두 같은 부분에서 작게 표현된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특징을 고려해볼 때 홍련봉1보루 출토 와당은 모두 동일 와범에서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아차산성 남문지 일대 조사에서도 같은 형태의 와당 2점이 출토되었는데, 역시 동일한 와범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유사한 형태의 연화복합문와당은 상오리사지 등 평양 지역에서 주로 출토되는데, 홍련봉1보루의 연대가 6세기 전반에 해당하므로 같은 형식의 와당을 편년하는 데 참고가 된다.
호로고루 출토 와당은 저수시설에서 출토된 1점을 제외하면 모두 기와폐기장에서 출토되었으며, 모두 같은 형식의 연화문와당이다. 당면 중심에는 작은 반구형자방이 있고, 주위에는 융기된 연봉형연화 6엽을 배치하였으며, 연화 사이에는 주연부 쪽에서부터 삼각형 간판을 배치하였다. 주연부는 와당의 크기에 비해 넓고 높으며, 크기는 홍련봉1보루 와당에 비해 작다. 와당 뒷면은 날카로운 도구로 사선을 깊게 새긴 후 수키와 와구부와 접합하였으며, 수키와 안쪽은 점토를 추가하여 보강하였다(그림30-2). 호로고루 연화문와당과 유사한 형태는 국내성지역에서 주로 확인되는데, 홍련봉1보루 연화복합문와당이 평양 지역에서 주로 확인되는 점과는 대조적이다. 두 유적의 와당 형태 차이가 시간적인 것인지, 와공의 출신지역 차이인지는 알 수 없으나 향후 검토가 필요한 문제이다(심광주 외, 2014).

그림30 | 남한 지역 출토 와당·치미·착고 - 1. 홍련봉 1보루 연화문와당(ⓒ한국고고환경연구소)

그림30 | 남한 지역 출토 와당·치미·착고 - 2. 호로고루 연화문와당(ⓒ토지박물관)

그림30 | 남한 지역 출토 와당·치미·착고 - 3. 호로고루 착고(ⓒ토지박물관)

그림30 | 남한 지역 출토 와당·치미·착고 - 4. 호로고루 치미편(ⓒ토지박물관)
치미는 호로고루에서 파편 상태로 여러 점이 출토되었는데, 2~3cm 폭의 니질점토를 테쌓기로 성형하였으며, 표면에는 타원형 문양이 음각되어 있는데, 보고자는 이를 물고기 비늘 형태의 도안 일부로 추정하고 있다. 고구려 유적에서 치미가 출토되는 유적은 매우 제한적인 점을 고려하면 호로고루유적의 위계가 매우 높았음을 보여주는 또 다른 증거로서 중요한 자료로 생각된다(심광주 외, 2014). 지붕 마루의 기왓골을 막는 데 사용된 착고는 호로고루의 기와폐기장에서 9점이 출토되었는데, 소성하기 전의 수키와를 와도로 절단하여 제작한 것으로, 내면에는 포흔이 그대로 남아 있다. 착고의 상면은 수키와의 장변을 그대로 사용하였고, 측면과 하단부는 둥글게 잘라 마무리하였는데, 여러 차례의 와도 흔이 남아 있다. 착고 역시 치미와 함께 국내성이나 평양 지역의 주요 건물지에서 출토되는 특수기와로서 호로고루의 높은 위계를 보여주는 자료의 하나로 중요하다.
남한 지역에서 출토된 고구려 기와류의 대부분은 평기와인데, 홍련봉1보루에서 5,000여 점, 호로고루에서 수만 점의 기와가 출토되었다. 기와의 제작에는 대체로 모골와통이 사용되었는데, 호로고루 수키와의 경우 원통와통을 사용하였으며, 암기와는 승문이 주를 이루고 수키와는 무문이 주를 이룬다. 홍련봉1보루 기와는 회색 계열이 많은 반면 임진강 유역의 기와는 적색 계열이 주를 이루는 등 약간의 차이가 있다(그림31, 32).

그림31 | 홍련봉1보루 출토 기와류(ⓒ한국고고환경연구소)

그림32 | 호로고루 출토 기와류(ⓒ토지박물관)
호로고루 수키와 중에는 명문이 새겨진 것이 여러 점 확인된다. 그중 하나에는 “… □小瓦七百十大瓦□八十用大四百卅合千”과 같은 명문이 있는데, “… 작은 기와는 710(장), 큰 기와는 □80(장), 깨졌어도 사용할 수 있을 만큼 큰 기와 조각 430장을 모두 옮겼다”와 같이 해석된다. 이는 호로고루의 건축에 사용된 기와를 운반한 내역을 적은 일종의 회계부 성격을 지닌 것으로, 건축에 사용하고 남은 기와를 따로 보관하기 위해 옮기고 그 내역을 적은 것으로 이해된다. 이는 당시 호로고루에 이두문을 이해할 수 있는 정도의 한문에 소양이 있는 중요 인물이 상주하였거나 건축에 참여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와당이나 치미, 착고기와와 함께 호로고루의 높은 위계를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로 이해된다(기호철, 2014).
4) 철기류
남한 지역의 고구려 유적에서 제철과 관련된 시설은 확인된 바 없으나, 아차산3·4보루와 용마산2보루, 무등리2보루에서는 철기를 수리하거나 철 소재를 이용해 철기를 제작하였던 시설이 조사되었다. 이들은 본격적인 단야시설이라기보다는 간이대장간의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이는데, 아차산4보루에는 건물지 외곽의 경사진 곳에 온돌 형태의 단야시설이 설치되어 있었고, 주변에는 수리를 위해 모아 둔 철기 수십 점이 함께 출토되었다. 아차산3보루의 단야시설은 타원형의 수혈구덩이 바닥에 길이 80cm가량의 단야로가 설치되어 있었다. 또 홍련봉2보루에서는 단야구인 철제집게가 출토되었고, 단야용 망치는 여러 보루에서 출토되었다. 그 밖에 무등리2보루에서는 단야시설이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다량의 슬래그(slag)가 확인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남한 지역의 각 관방유적에서는 철 소재를 이용해 철기를 제작하거나 사용 중 파손된 철기를 수리하는 정도의 작업이 이루어졌던 것으로 이해된다.
남한 지역에서 출토된 철기류는 용도에 따라 무기와 갑주, 마구, 농공구, 용기류 등으로 구분되며, 기타 용도가 불분명하거나 특수한 용도의 철기도 확인된다. 지금까지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아차산 일원의 보루와 호로고루, 무등리1・2보루, 천보산2보루 등에서 출토된 철기류는 대체로 유사한 특징을 보이는데, 다음에서는 아차산 일원의 철기류를 중심으로 종류별로 구분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아차산보루에서 출토된 철기류 중 무기류가 가장 많은데 전체의 84.5%를 차지하며, 농공구류가 7.5%, 생활용구류, 용기류, 마구류 등은 5% 미만을 차지한다(최종택, 2013). 무기류는 철촉과 철도, 철부 등이 주를 이루고, 방어용 무기류인 갑옷과 투구도 출토된다(그림33, 34). 무기류 중에서는 철촉이 가장 많은 양을 차지한다. 삼익촉과 착두형촉 및 소량의 기타 형식을 제외하면 모두 세장형촉이다. 세장형촉은 오각형의 납작한 촉두와 단면 방형의 긴 촉신에 좁고 긴 슴베를 가진 형태로 전체 길이는 25cm가량 된다. 이러한 촉은 2세기대로 편년되는 칠성산871호분에서 출토된 예가 있지만 대체로 4세기 이후에 유행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환인 지역의 오녀산성이나 집안 지역의 환도산성, 심양 석대자산성, 무순 고이산성 등 방어 기능이 강조되는 성곽에서 주로 출토되는 점으로 미루어 고구려 중기 이후에는 대표적인 인마살상용 화살촉으로 사용된 것으로 이해된다.

그림33 | 아차산 일원 보루 출토 무기류(ⓒ최종택)
도(刀)는 환두부가 유리된 채로 출토된 경우가 많으나 잔존하는 병부의 형태로 보아 원래는 환두도로 추정된다. 아차산4보루 출토 철도의 병부 쪽에는 얇은 철판을 타원형으로 접어서 만든 초구금구가 남아 있다. 구의동보루에서 출토된 도가 가장 완전한 형태인데, 현존하는 길이는 68.3cm이다. 모(矛)는 28점 중 25점이 관부가 형성된 형태이며, 관부 없이 봉부로 이어지는 형태는 3점에 불과하다. 유관철모 중 공부 하단이 직기형인 것이 연미형에 비해 빈도가 높다. 모는 봉부의 형태에 따라 광봉형과 협봉형으로 나뉘는데, 구의동1보루 출토품 일부를 제외하면 모두 협봉형이다. 봉부의 길이도 장봉과 단봉이 있으나 단봉이 많다. 부(斧)는 거의 모든 보루에서 확인되는데, 대부분이 횡공부이다. 횡공부 외에 공부가 있는 철부도 있으나 이는 무기로 보기 어렵다. 그 밖에 초승달모양의 월형부와 쌍인부 등 특수한 형태의 도끼도 소량 출토되었다(그림33).
방어무기로는 아차산4보루에서 복발이 있는 소찰주 1식이 출토되었는데, 복발 1개와 52매의 소찰로 이루어져 있다(그림34-1). 복발은 소위 몽고발형으로 반구형이며, 평면은 타원형에 가까운 말각삼각형으로서 전면이 좀 더 뾰족하게 돌출되어 있다. 복발의 하단부는 마치 차양처럼 짧게 벌어져 있는데, 여기에 1.5~2cm 간격으로 작은 구멍이 2개씩 뚫려 있어 가죽끈을 이용해 다른 소찰들과 연결하도록 하였다. 복발에 연결되었던 소찰은 출토 시에 이미 주의 원형이 파괴된 상태였기 때문에 전체 형태의 복원이 쉽지 않다. 소찰은 두께 0.2cm 내외의 얇은 철판을 이용해 외형을 제작한 후 각 테두리 중간 부분에 2개 혹은 1개씩 구멍을 뚫은 것이 대부분인데 크게 세 유형으로 구분되며, 볼가리개와 목가리개 등 부착 부위에 따라 서로 다른 형태를 하고 있다.

그림34 | 소찰주 및 철제찰갑 - 소찰주(아차산 4보루)(ⓒ서울대학교박물관)

그림34 | 소찰주 및 철제찰갑 - 철제찰갑(무등리 2보루, 왼쪽이 전면, 오른쪽이 후면)(ⓒ서울대학교박물관)
갑옷은 모두 찰갑으로 다양한 형태의 찰갑편이 출토되었다. 아차산 보루에서 출토된 찰(札)은 크기와 모양에 따라 세 형식으로 구분되지만 기본적으로는 상단부는 직선이고 하단부는 모를 접은 형태인 상방하원형이다. Ⅰ형식의 소형 소찰은 소찰주에 사용된 것으로 볼 수도 있겠으나, 아차산4보루에서 특이한 형태의 소찰주가 확인된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찰갑에 사용된 것으로 판단된다. 소찰 자체만으로는 각 형식별 사용된 부위를 구분하기 어려우나, Ⅰ형식은 신갑의 상부, 중형의 Ⅱ형식과 대형의 Ⅲ형식은 요갑 또는 경갑에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최종택, 2013). 한편, 무등리2보루에서는 완전한 형태의 동갑 1점과 관모형 복발이 있는 소찰주가 함께 출토되었는데(그림34), 이를 통해 소찰의 부위별 형태와 연결기법 등을 확인할 수 있다(이선복 외, 2015).
마구류는 재갈과 등자, 편자, 교구방울 등이 있는데, 아차산4보루에서는 재갈과 등자가 같은 건물지에서 함께 출토되었다(그림35). 재갈은 이른바 환판비에 해당되며, 재갈쇠와 고삐이음새, 재갈멈추개로 이루어져 있다. 재갈쇠는 2절식으로 각 마디는 단면 원형인 철봉의 양 끝을 구부려 타원형고리를 만든 후 그 끝을 두 번 정도 철봉에 감아 마무리하였다. 재갈쇠의 내환은 외환에 비해 작으며, 내환과 외환이 각각 수직과 수평을 이루고 있다. 각각의 외환은 크기와 형태가 비슷하나, 내환은 한쪽은 크고 다른 한쪽은 작다. 고삐이음쇠 역시 재갈쇠와 같은 방식으로 꼬아서 제작하였는데, 고삐와 이어지는 외환은 내환보다 큰 직경을 가지고 있으며 함과 마찬가지로 철봉을 중심으로 내환과 외환이 수직과 수평을 이루고 있다. 재갈멈추개는 얇은 철판으로 제작하였는데, 장타원형 환판의 외곽 하단은 작은 돌기가 달려 있으며, 상단에는 장방형 입문이 부착되어 있다. 환판의 내부는 십자형을 기본으로 하고 중심부에는 함공이 뚫려 있는데, 함공의 외경은 3cm가량 된다. 함에 연결되지 않은 상태로 출토되었지만 별도의 장치 없이 함외환에 직접 연결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림35 | 아차산 일원 보루 출토 마구류 각종(ⓒ서울대학교박물관)
아차산4보루에서 출토된 등자는 이른바 터널형의 윤등으로서 주조품이다. 병부는 윤부 위에 약간의 목을 세운 뒤, 말각제형의 현수부를 90° 틀어서 부착한 형태이다. 윤부는 단면 원형으로서 두께는 일정한 편이나 병부에서 윤부 중앙과 답수부에 이르기까지 그 두께가 소폭 감소한다. 발이 직접 닿는 답수부의 평면형태는 유엽형이며, 그 바닥의 외측 중앙과 양 측면은 길게 돌선을 만들어 보강하였다. 병부는 끝으로 갈수록 얇아지는데, 아래쪽으로 내려오면서 일정한 비율로 두꺼워져 병부와 연결되는 목 부분에서는 윤부의 환봉과 같은 굵기가 된다. 병부의 중앙에 장방형의 현수공이 뚫려 있다.
편자는 아차산3보루에서 출토되었으며, 납작한 철판을 둥글게 돌려 만든 반원형이다. 철판의 단면은 약간 휘어 있는데, 두께는 0.2cm 내외이다. 양쪽 끝이 일부 결실되어 있으나 전체적으로 반원형에 가까우며, 철판의 중심부를 따라 네 개의 구멍이 남아 있다. 유사한 형태의 편자가 몽촌토성에서 출토된 바 있으며, 아차산3보루 출토품에 비해 다소 크다.
농공구류는 철겸·보습·삽날·살포·쇠스랑 등 농기구류와 끌·정·단조철부 등 공구류로 크게 나뉘며, 집게와 망치 등 단야구도 소량 출토된다. 용기류는 주로 솥과 호가 출토되는데, 구의동1보루에서는 아궁이에 솥과 호가 나란히 걸린 채 출토되었다. 반면에 다른 보루에서는 완형으로 출토된 사례가 없으며, 이는 유적의 폐기 상황과 관련된 것으로 생각된다. 즉, 구의동1보루와 달리 아차산의 보루들은 철솥과 무기 등 주요 물품을 거두어 철수한 것으로 추정된다. 생활용구에는 다양한 철기가 포함되는데, 문고리가 가장 많은 양을 차지한다. 그 밖에 홍련봉1보루와 용마산2보루에서는 문틀에 사용된 확쇠가 출토되었고, 구의동2보루에서는 문지도리쇠가 출토되어 문짝 구조를 복원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