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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통사

4. 역사적 의미

4. 역사적 의미

475년 고구려의 한성 공함과 이후 한성을 포함한 중부지역의 영유와 관련한 문헌사료가 자세하지 않거나 모순된 점이 많아 이에 대해 서로 다른 입장의 여러 논의가 이루어졌다. 1980년대 후반 이후 최근까지 한강 유역을 포함한 중부지역에서 다양한 고구려 유적이 조사되어 관련 논의가 어느 정도 정리되고는 있다.
475년 고구려의 공격으로 한성이 함락되자 백제는 고대국가의 기틀을 다지는 기반이 되었던 한성을 포기하고 웅진으로 천도함으로써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이후 538년 사비로 천도할 때까지 63년간의 웅진기는 초기의 약화된 왕권으로 인한 정국의 혼란과 동성왕대의 국력 회복, 무령왕·성왕대에 걸친 부흥으로 요약된다. 백제사에서 웅진기는 고대국가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해왔던 한강 유역의 상실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백제의 한성 실함은 정치·경제·외교에 있어서 커다란 혼란을 가져와 국가의 존립을 위협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천도 이후에도 백제는 한강 유역에 대한 관심을 버릴 수가 없었으며, 이를 수복하려는 노력이 웅진기 내내 지속되었다. 이러한 까닭에 백제사 연구에 있어서 웅진기 한강 유역의 상황과 관련된 문제는 중요하게 취급되어 왔으며, 이에 대한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문제의 핵심은 웅진기에 한강 유역을 영유한 주체가 누구였으며, 그 방식은 어떠했는가 하는 것이다.
한강 유역에서 5~6세기 고구려의 고고자료가 조사·연구되면서 이에 대한 논의가 다시 활기를 띠고 있다. 즉, 1988년 몽촌토성에서 고구려 토기가 확인된 이후 그동안 백제고분으로 보고되었던 구의동유적이 고구려 보루로 재인식되었다. 이어 한강 북안의 아차산에서 여러 기의 고구려 보루가 발굴조사되었으며, 임진강·한탄강 유역과 양주분지, 충남 진천과 충북 청원, 대전 등지에서도 고구려 유적이 조사되었다. 이러한 고고자료는 직접적으로는 고구려의 남진과 관련된 것이지만, 이를 계기로 고구려의 한강 유역 지배방식과 웅진기 한강 유역 영유문제에 대한 관심이 다시 촉발되었다. 특히 최근까지 계속된 아차산 일원 고구려 보루의 발굴을 통해 475년에서 551년에 이르는 동안의 고고자료 편년과 성격이 점차 분명히 드러나고 있으며, 이를 통해 웅진기 동안의 한강 유역 상황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가능해졌다.
현재까지 조사된 고구려 유적에 대한 연구성과에 따르면 475년 고구려의 한성 공함 이후 한강 유역과 그 이남 지역의 상황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최종택, 2013). 475년 장수왕의 한성 공함 이후 왕은 돌아갔으나 고구려군은 몽촌토성에 주둔하고 웅진 방면으로 남하를 계속하였다. 이후 동성왕대를 거쳐 무령왕대에 이르러 한강 유역에 대한 백제의 공세가 강화되자 500년을 전후한 시점에 몽촌토성을 비롯한 한강 이남의 고구려군은 한강 이북으로 철수하여 아차산 일원에 주둔하였다. 그렇지만 몽촌토성을 포함하는 한강 이남 지역을 백제가 안정적으로 확보하고 경영하였던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한강 이남 지역에서 웅진기 백제와 관련된 유적이나 유물이 확인되지 않는 점에서도 뒷받침된다. 무령왕대에는 이러한 상황 전개에 따라 한강 유역 외곽은 물론 멀리 황해도 지역에서까지 전투를 하는 등 대고구려 공세를 강화할 수 있었고, 성왕대에도 이러한 상황의 기조가 유지되었다. 그러나 성왕대의 전선은 다시 충청도 일원까지 남하하였으며, 551년 백제가 한성을 회복할 당시 먼저 한성 지역을 얻고 나서 평양 지역을 획득하였다는 점으로 보아 551년 직전 무렵에는 한강 이남 지역도 고구려의 관할하에 있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문헌사료와 상충되는 면이 없지는 않지만 고고자료를 통해서 보는 한 475년 이후 한강 유역은 고구려의 지배하에 있었다. 그러나 한성 공함 이후 한강 유역에 대해 고구려가 행한 조치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어서 그 내용을 알기 어렵다. 종래에는 이 시기 고구려의 한강 유역 영유를 인정하는 입장에 있더라도 한강 유역에 대한 고구려의 영역지배를 부정적으로 생각해 왔었다. 그 까닭은 한강 유역에서 확인되는 고구려 유적이 대부분 소규모의 보루이며, 일반적으로 고구려 영역에서 확인되는 대규모 거점성의 존재가 확인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475년 한성 공함 직후 고구려군이 모두 철수한 것으로 인식하기도 하였고, 당시의 정황으로 보아 한성이 폐허가 되고, 대부분의 기반시설이 모두 상실된 마당에 고구려가 당장 이를 중심으로 지방관부를 설치하고 주둔군을 배치하는 등 영토로 삼을 수 없었을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한다(김병남, 2004).
그러나 몽촌토성에서 고구려 유적의 존재가 확인되면서 이러한 생각은 재고를 요하게 되었다. 475년 한성 공함 이후 장수왕과 고구려군은 돌아갔으나 일부는 몽촌토성에 주둔하고 있었으며, 진천의 대모산성과 세종 남성골산성, 세종 나성, 대전 월평동산성 등이 몽촌토성과 비슷한 5세기 후반의 고구려 유적으로 편년되는 점(崔鍾澤, 2004b)은 고구려가 몽촌토성을 거점으로 하여 금강 유역으로 남진을 계속하였음을 확인시켜 주는 것이다. 또한 몽촌토성에서 확인된 적심 건물지를 비롯한 특수한 구조의 지상 건물지와 의례용 토기의 존재를 통해 몽촌토성에 주둔한 지휘관이 상당한 신분의 소유자였음을 추론할 수 있으며(崔鍾澤, 2002), 이를 통해 몽촌토성이 거점성의 기능을 담당하였음을 상정할 수 있다. 진천의 대모산성은 발굴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없지만 세종 남성골산성 역시 조사된 규모나 내용으로 보아 거점성으로서의 기능을 하기에 충분하다. 따라서 이러한 거점성들을 중심으로 고구려는 한강 이남 지역의 영역화를 시도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이와 관련하여 한성을 실함한 이듬해인 문주왕 2년(476년)에 대두산성을 수리하고 한강 이북의 주민을 이주시킨 사실주 007
각주 007)
『삼국사기』 백제본기 문주왕 2년조, “修葺大豆山城 移漢北民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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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들어 한강 유역이 공백상태였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를 웅진으로 천도할 당시 함께 온 한수 이북의 민호들을 대두산성에 집단으로 안치한 것으로 보면 자연스러우며, 오히려 이 기사야말로 한성 공함 후 고구려가 한강 유역을 영유하였음을 보여주는 기사로 이해할 수도 있다(김현숙, 2005). 또한 『삼국사기』에는 한성 공함 이후 6세기 초반까지 백제에 대한 고구려의 공격이 보이지 않는 반면에 신라에 대해서는 지속적인 공세를 취하는 것으로 나타나는데, 이는 한강 유역에 대한 고구려의 지배가 어느 정도 관철된 데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주 008
각주 008)
이와 관련하여 한성 실함 후 웅진으로 천도한 백제는 국가 존망의 기로에 서 있었으며,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더 이상의 전투를 하지 않는 대신 고구려에 신속하고 영토를 할양하였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기도 한다(李道學,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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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고구려가 점령한 이후 백제의 한성은 어떻게 되었을까? 주지하듯 백제 한성시기의 도성과 관련해서는 하북위례성, 하남위례성, 한산, 한성 등이 거론되고 있으며, 시간의 흐름에 따라 명칭에 변화가 있었던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즉, 근초고왕 26년(371년) “移都漢山”이 있기 전까지의 백제 도성은 위례성으로 불렸고, 한산으로의 이도와 더불어 한성이라는 명칭이 사용되었으나, 한성 공함이 있은 475년 이전까지 백제인들은 여전히 위례성을 도성 전체를 대표하는 범칭으로 사용하였고, 한성은 주로 군사방어성과 관련된 명칭으로 사용하였다. 475년 이후 고구려가 위례성(『삼국사기』 개로왕 21년조의 북성: 풍납토성)을 폐기하고 군사방어적 성격이 강한 한성(『삼국사기』 개로왕 21년조의 남성: 몽촌토성)만 활용함에 따라 한성이 백제 고도를 대표하는 명칭으로 부상하였다는 것이다(余昊奎, 2002). 475년 이후 몽촌토성에 고구려군이 주둔하고 있었던 점으로 보아 타당한 견해로 보이며, 이에 따르면 점령 이후 고구려는 한강 유역(구체적으로는 한강 남안)을 한성으로 불렀던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아차산 일원 고구려 보루는 중랑천변 일대의 남평양을 방어하기 위한 시설이며, 495년 문자명왕의 남순과 관련하여 설치된 것으로 보는 견해(崔章烈, 2001)가 제시된 바 있다. 또 남평양은 4세기 중엽에 황해도 신원군의 장수산성 아래에 있었으며, 475년 이후 한강 유역으로 옮겨졌다고 보기도 한다(손영종, 1990). 이러한 견해에 따르면 475년 백제의 한성을 공함한 몽촌토성에 주둔한 고구려는 이를 여전히 한성이라고 불렀으며, 495년 이후에는 한강 북안의 중랑천변에 남평양을 건설하고 주변의 아차산에 보루를 축조한 것이 된다.주 009
각주 009)
이와 관련 최근 고구려 남평양의 위치를 중랑천변의 장안평 일대로 비정하는 견해가 발표되기도 하였다(여호규, 2020a; 2020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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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475년 이후 고구려군은 몽촌토성에 주둔하였다가 500년을 전후한 시점에 한강 북안의 아차산 일원 보루로 철수하였다는 필자의 견해와도 일치한다.
고구려의 한강 이남 지역에 대한 영역화와 관련하여 최근 발굴사례가 증가하는 남한 지역의 고분 자료가 중요하다. 남한 지역에서 고구려계 고분이 조사되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초반의 일이나 이를 고구려 고분으로 특정할 만한 유물이 출토되지 않아 연구는 답보상태를 거듭하였다. 그러나 2000년대 중반 이후 용인 보정동고분을 비롯한 여러 고분에서 고구려 토기가 출토되면서 남한 지역 고구려 고분의 존재가 분명해지게 되었다(崔鍾澤, 2011). 남한 지역 고구려 고분은 임진강·한탄강, 북한강 상류, 남한강 상류 등 큰 강가에 위치하거나 성남, 용인, 화성 일대의 내륙에 분포하고 있는데, 지금까지 조사된 고분의 수는 67기에 달한다.
남한 지역의 고구려 고분은 대부분 우편재 연도의 횡혈식석실분이며, 묘실 길이 2.2m를 기준으로 소형과 중형으로 구분되고, 장축비 1.6을 기준으로 장방형과 세장방형으로 나뉜다. 고구려 횡혈식석실분의 형식 변천과 출토유물을 통해 볼 때 세장방형 고분은 5세기 중엽으로 편년되며, 장방형 고분은 5세기 후엽으로 편년된다. 고구려의 남한 지역 진출은 평양 천도 이후 본격화되었지만 이미 4세기 후반 고구려는 중원 지방 진출을 위해 북한강 상류의 춘천과 홍천과 횡성, 원주를 거쳐 남한강 수계를 통과하여 충주에 이르는 교통로를 확보하였으며, 400년 광개토왕의 신라 구원 이후에는 북한강 유역을 영역화한 것으로 보인다(금경숙, 2001). 이러한 견해에 따르면 강내리고분군과 방동리2호분 및 두정리고분군과 같은 세장방형 고분은 고구려의 중원 진출 및 영역화와 관련된 것으로 추정된다. 나머지 5세기 후엽의 장방형 고분들은 475년 한성 공함 이후 점령지에 대한 영역화를 시도하는 과정에서 축조된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남한 지역 고구려 고분은 비교적 넓은 지역에 걸쳐 분포하고 있으나 구조적인 특징에 있어서 강한 정형성을 보이고 있다. 내부에서 출토되는 유물로 보아 5세기 중엽에서 후엽에 이르는 비교적 짧은 시기에 고구려인들에 의해 축조된 고분임이 분명하다. 고분의 피장자에 대한 자료는 별로 남아 있는 것이 없지만 연천 강내리 2호분과 8호분에서는 금제구슬과 은제팔찌, 유리구슬 등이 출토되었으며, 충주 두정리4호분에서는 은제지환이 출토되었다. 이러한 장신구류가 출토된 고분은 비교적 규모가 큰 고분에 해당하며, 남한 지역 고구려 고분의 피장자는 상위 신분의 소유자였던 것으로 보인다.
최근 발굴조사가 확대됨에 따라 관방유적과 고분 외에도 홍천 철정리와 역내리, 춘천 우두동, 원주 건등리, 용인 마북동, 진천 송두리, 충주 탑평리 등 곳곳에서 고구려 취락유적이나 고구려 토기가 출토되는 유적이 조사되고 있어 주목된다. 이 유적들은 모두 신라가 다시 사용하였기 때문에 고구려시기의 유구나 문화층이 명확히 확인되지는 않지만 특징적인 고구려 토기가 출토된다. 이러한 취락유적에서 출토된 고구려 토기는 기형이나 문양에 있어서 유사한 특징을 가지고 있으며, 5세기 후엽으로 편년된다(그림36).
그림36 | 남한 지역 취락유적 출토 고구려 토기
- 1. 역내리유적 2·9·10. 건등리유적 3. 송두리유적 4~7. 마북동유적 8. 철정리유적 11. 탑평리유적
그런데 이들 취락유적의 분포를 보면 춘천 우두동유적은 만천리고분과 인접해 있으며, 홍천 철정리유적과 역내리유적은 철정리고분 및 역내리고분과 바로 인접해 있다. 또, 충주 탑평리유적은 두정동고분군 및 〈충주고구려비〉와 인접해 있으며, 용인 마북동유적은 보정리고분군과 인접해 있다. 한편, 신답리고분군과 강내리고분군 주변에는 파주 주월리유적 외에도 많은 수의 관방유적이 분포하고 있다. 이러한 분포상의 특징을 근거로 할 때 고분의 피장자는 인접한 취락유적이나 관방유적에 거주하던 고구려인으로 추정할 수 있겠다. 따라서 남한 지역 고구려 고분의 피장자는 단기간의 전투 중에 전사한 지휘관 등이 아니라 일정기간 체류하던 집단의 상위 계층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이러한 추론과 관방유적의 분포를 연계해볼 때 475년 한성을 공함한 고구려는 장수왕은 귀환하였으나, 이후 점령지에 대한 영역화를 진행하였던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면 한성 공함 이후 고구려가 영역화를 시도한 고구려의 남방한계는 어디까지이며, 경영방식은 어떠한 것이었을까? 충북 진천의 대모산성이나 세종 남성골산성, 연기 나성, 대전의 월평동유적의 고고자료로 보아 5세기대 고구려의 최대 영역은 백제 영역이었던 금강 하류의 대전 지역에까지 이르렀던 것으로 확인되고 있으며, 시간에 따른 변화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의 점령지역, 특히 한강 이남 지역에 대한 고구려의 지배방식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지만 고고자료만으로 보는 한 광개토왕대와는 달리 실질적인 지배를 시도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구체적인 경영방식에 대해서는 몇 가지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고구려가 이 지역을 〈충주고구려비〉에 보이는 “하부(下部)”로 통괄했을 가능성이 크고, 하부의 하위조직으로서의 군현제는 아니더라도 군현명과 같이 대소로 세분된 행정구획을 성에 귀속시켰을 것으로 보기도 한다(李昊榮, 1984). 또한 551년 백제가 한강 유역을 탈환할 당시 한강 유역이 군(郡)으로 편제되었던 것으로 이해하기도 한다(노태돈, 2005).
고구려가 한강 유역에 대한 영역지배를 관철하였다면 이를 위해 파견된 지방관의 신분은 어떠하였을까? 일반적으로 고구려에서는 대형(大兄) 관등을 지닌 수사를 파견하여 군 단위의 행정을 담당하게 하였는데, 〈충주고구려비〉에서도 수사가 보이는 점으로 미루어 한강 유역도 군과 같은 행정단위로 편제되었다고 볼 수 있으며(노태돈, 2005), 수사와 같은 지방관의 존재를 상정해볼 수도 있다. 이에 대한 직접적인 자료는 없으나 아차산4보루에서 출토된 ‘후부도○형(後卩都○兄)’명 접시가 일단의 실마리가 될 수도 있다. 여기서 ‘후부(後卩)’는 ‘후부(後部)’를 의미하는 것이고, ‘도○형(都○兄)’은 관등명이나 인명으로 보인다. 아차산4보루보다 다소 늦은 시기의 것이지만 병술년(566년)의 평양성각자성석(丙戌十二月中漢城下後卩小兄文達節自此西北行涉之)에서 이와 같은 용례가 보인다(그림37). 두 유물의 시차가 크지 않은 점과 한강 유역의 한성이 551년 이후 황해도 신원 지방으로 옮겨진 것(손영종, 1990)을 고려한다면 아차산4보루의 ‘후부’도 한성(漢城)의 ‘후부’로 해석할 수 있다. 이로 보아 당시 한강 유역이 도성에서 보이는 것과 같이 몇 개의 구역으로 구분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아쉽게도 아차산4보루의 명문에는 관등명이 표현되어 있지 않아 신분을 알 수 없으나 다양한 계층의 관리들이 파견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림37 | 아차산4보루 출토 ‘후부(後卩)’명 토기(왼 )와 ‘병술(丙戌)’명 평양성각자성석 세부(오른쪽)
남한 지역 고구려 유적의 조사 및 연구는 1980년대 말 이후 본격화되었는데,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상당한 연구성과를 거둔 것으로 생각된다. 현재 남한 지역에서 조사된 가장 이른 시기의 고구려 유물은 파주 주월리유적에서 출토된 구형호 등으로 4세기 후엽 또는 4세기 말로 편년된다. 다음으로는 세장방형 묘실의 횡혈식석실분으로 5세기 중엽에 해당된다. 5세기 후엽에는 장방형 묘실의 횡혈식석실분이 축조되었으며, 아울러 몽촌토성과 대모산성, 남성골산성, 월평동유적, 은대리산성, 당포성 등도 이 시기에 해당된다. 이후 6세기 전반에는 한강 북안의 아차산 일원에 고구려 보루가 축조되어 551년까지 존속한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양주분지와 임진강·한탄강 유역 대부분의 보루들도 대체로 5세기 중반 이후에 축조된 것으로 이해되나 폐기시점에 대해서는 추후 연구가 필요하다.
지금까지의 연구성과를 통해 볼 때 고구려는 4세기 후반 이후 북한강 상류와 남한강 상류를 통해 충주 지역으로 진출하였는데, 연천 강내리고분군과 춘천 방동리2호분 및 충주 두정리고분군과 같은 세장방형 고분은 고구려의 충주 지역 진출 및 영역화와 관련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475년 한성 공함 이후 고구려군은 몽촌토성에 주둔하고 진천과 청원, 대전으로 진출하였으며, 점령지에 대한 영역화를 시도했던 것으로 이해되는데, 나머지 5세기 후엽 이후의 장방형 고분들은 이러한 영역화 과정에서 축조된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이 고분들 인근에서 고구려의 취락유적이 속속 조사되고 있는데, 이를 통해 고구려가 남한 지역에 대한 영역화를 적극적으로 시도하였으며, 이러한 경략활동은 일정 기간 지속되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 각주 007)
    『삼국사기』 백제본기 문주왕 2년조, “修葺大豆山城 移漢北民戶.” 바로가기
  • 각주 008)
    이와 관련하여 한성 실함 후 웅진으로 천도한 백제는 국가 존망의 기로에 서 있었으며,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더 이상의 전투를 하지 않는 대신 고구려에 신속하고 영토를 할양하였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기도 한다(李道學, 2005). 바로가기
  • 각주 009)
    이와 관련 최근 고구려 남평양의 위치를 중랑천변의 장안평 일대로 비정하는 견해가 발표되기도 하였다(여호규, 2020a; 2020b).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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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역사적 의미 자료번호 : gt.d_0008_0070_00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