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연구 약사
1. 연구 약사
우리나라에서 기와에 대한 관심은 조선 후기 실학자인 이수광이나 이익 등의 이용후생적인 경향에서 시작되었다. 이수광은 『지봉유설(芝峯類說)』에서 기와의 기원에 대해 “『사기(史記)』에 이르기를 걸왕(桀王)이 기와집을 지었다고 했고, 『박물지(博物志)』에 역시 이르기를 걸이 기와지붕을 만들었다고 하였는데, 이것으로 비추어 본다면 하나라 걸왕 이전에는 궁실에도 대개 띠를 덮은 것이다”주 001라고 고찰하였다. 김정희는 평양에서 권운문와당을 접한 후 『완당집(阮堂集)』에 〈한와당(漢瓦當)〉이라는 시문을 남겼다. 특히 “뭉게뭉게 먹구름을 뱉어낸다”든가 “천추만세의 무궁한 계획”이라는 시 구절은 바로 눈앞에서 낙랑의 천추만세(千秋萬歲)명와당과 권운문와당을 보는 듯 생생하다. 김정희의 금석학 연구는 한국 기와 연구에서 최초의 단서를 열어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백종오, 2006a; 2006b).
고구려 와전은 비교적 이른 시기부터 소개되었다. 먼저 고종 20년(1883년)에 일본 육군 포병중위인 사가와 가게노부(酒匂景信)는 〈광개토왕릉비〉의 묵본(墨本)과 태왕릉에서 ‘원태왕릉안여산고여악(願太王陵安如山固如岳)’이 새겨진 명문전을 수집하였다. 그 다음 해에 아오에 슈(靑江秀)와 요코이 다다나오(橫井忠直)는 태왕릉의 명문전을 소개하였다(靑江秀, 1884; 橫井忠直, 1884). 1905년에 도리이 류조(鳥居龍藏)는 압록강 유역의 고구려 유적을 조사하면서 약간의 고구려 기와를 보고하였다(鳥居龍藏, 1905).
이후 1913년에 세키노 다다시(關野貞)는 집안 지역의 장군총과 태왕릉, 천추총 등의 고구려 유적을 조사하면서 고구려 기와류를 언급하였다(關野貞, 1934). 1928년에는 고구려 와당에 대한 정리된 결과를 가지고 유형별 특징에 따라 형식을 분류하였다. 이른바 태왕릉A형과 장군총형의 복선연화문와당이 평양 토성리와 대동강 건너편 평천리에서 출토되는 이유는 낙랑 멸망 후 고구려인이 먼저 낙랑군 치지 부근인 이곳에 내주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關野貞, 1928).
일제강점기에 고유섭은 한국인으로는 유일하게 고구려 기와에 대한 기본 개설과 미학적 관점에서 접근하였다(高裕燮, 1932; 1939). 와당의 종류는 암막새와 수막새로 구분하였으며, 문양은 연화문, 인동문, 수면문, 당초문, 복선문, 중권문 등 6종으로 나누고, 평와당은 방격문, 사격문, 망안문, 인동문, 우상문 등으로 분류하였다. 이 중 기하학적 선문, 수면문 등은 한와당(漢瓦當)의 유형이라고 했으며, 나머지는 불교적 문양이라고 하였다. 문양 조각은 외곽이 힘이 있어 굵고 두터우며 내구의 선각은 강인하다고 표현하였다. 와당의 색깔은 적색과 흑색의 두 가지가 있는데, 적색이 가장 고구려적인 특질이라 하였다. 이렇게 예술적 조형 심리와 형태를 통찰하면서 이것이 고구려 와당 조각의 특색이라고 설명하였다. 또 고구려의 초기 와당은 중간의 중방을 중심으로 6엽 내지 8엽의 연화가 배치되는데, 낙랑과 다른 점은 판단의 양 옆에 주문을 배치한다는 점과 와당면을 구분하는 선조가 사라지고 연판, 인동 등의 복합된 판간문양이 등장한다고 지적하였다. 이렇듯 고구려 와당의 다종다양하고 강인함을 미학적인 관점에서 백제, 신라와 비교하며 기술하였다.
해방 이후에도 초기에는 고구려 와당을 중심으로 문양의 양식사적 접근에서 시작하였는데 이후 삼국 간의 비교를 통하여 그 영향관계와 제작기법을 설명하였다(김화영, 1967; 유재우, 1980; 김성구, 1992; 2006; 조용중, 1995; 최맹식, 2001; 2004; 2005; 조미정, 2004; 김희찬, 2005a; 2005b; 2006; 2011; 백종오, 2006a; 2006b; 강현숙, 2007; 왕비봉, 2013; 주홍규, 2009; 2014; 2015; 2019). 이후 남북의 화해 분위기에 맞추어 군사분계지역인 임진강 유역의 고고학적 조사가 활발해지며 연구영역이 평기와까지 확대되었다(심광주, 1999; 2005; 백종오, 2001; 2003; 2005). 이 연구들은 평기와의 고유한 속성과 특징을 분석하여 제작방법에 대한 복원의 토대를 마련하였으며 만주 지역 출토품에 대한 연구도 가능하게 되었다. 이와 함께 중성자방사화분석, X선회절분석 등 자연과학적인 분석이 이루어져 산지추정과 소성온도값 등 구체적인 기술적 속성의 정보를 획득하게 되었다(양동윤·김주용·한창균, 1999; 백종오, 2004). 이처럼 평기와의 비교 분석과 와당 훼기 의례 행위(백종오, 2008; 2011; 2012)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는 일본이나 중국에서 이루어지지 않은 남한의 고고학적 성과이다.
한편, 북한에서의 고구려 기와 연구는 남한보다 몇 년 앞서 시작되었고 연구경향 역시 현지의 자료를 대상으로 실시하였기 때문에 같은 시기 남한의 연구보다 생동감 있고 정밀한 연구가 가능했다(채희국, 1964; 김일성종합대학 편, 1985; 김영진, 2002; 백종오, 2008). 이러한 발굴자료를 통해 기와 문양의 연대 비정과 유적의 시기적인 변천 과정을 연결하려는 노력이 엿보인다(리광희, 2004; 윤광수, 2004; 주선희, 2005; 김영일, 2014; 2015). 또한 평양 지역의 평기와류와 마루기와(윤광수, 2006; 2009; 2010)만이 아니라 기와의 제작기법(윤광수, 2011; 2016)과 자연과학적 분석(한명걸·우철, 2014a; 2014b), 집안 지역 출토 와당(김성철, 2015; 정지향, 2016) 등 연구범위가 확대되는 과정 역시 남한 학계와 유사하다.
일본의 경우, 고구려 와당의 형식 분류와 시기 구분을 통해 한사군의 영향으로 고구려 기와가 제작된 것으로 보고 있으며, 이러한 통설은 현재까지 그 범위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이다(關野貞, 1928). 그리고 고구려의 와전 도록 발간(井內功編, 1976; 1981), 와당의 원류와 영향관계(太田靜六, 1971; 關口廣次, 1977), 와당을 토대로 한 유적의 시기 구분(千田剛道, 1982; 田村晃一, 1983; 1984; 谷豊信, 1989; 1990), 제작기법에서 나타나는 제반 속성, 문양이 갖는 상징적 의미(關口廣次, 1987) 등에 대한 검토작업은 상당 부분 진행되었다.
중국의 연구는 한국과 일본에 비해 늦게 출발하였지만 다양한 자료를 접할 수 있다는 장점과 더불어 고구려 초기 기와에 대한 다량의 자료를 확보하고 있기 때문에 전자에 비해 더욱 폭넓고 세부적인 연구가 가능하였다(方起東·林至德, 1984; 李殿福, 1984; 林至德·耿鐵華, 1985; 嚴長錄·楊再林, 1988; 魏存成, 1994; 耿鐵華·尹國有, 2014). 그렇지만 제작 기법의 특징이라든가 자연과학적 분석이 뒤따르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으며 기와 연구도 주로 와당에 국한되어 있기 때문에 평기와와의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 한편, 고구려 기와의 생성과 발전을 자국사의 영향으로 풀이하려는 한계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고구려 기와를 예술적으로 재인식하려 한다든가 세밀한 형식 분류가 시도되고 있다는 점(李梅, 2002; 宋玉彬, 2020; 任嘉敏, 2022)은 한국이나 일본 학계와 다른 중국만의 강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고구려 와전 연구는 처음에는 와당과 명문전을 중심으로 연구되었으며, 이를 통한 형식과 유형 분류가 분석의 주된 방법이었다. 그리고 고구려 기와의 기원은 중국 한사군의 영향이라는 기존의 통설을 그대로 이어받고 있다는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최근에는 평기와의 속성 분석과 자연과학적 분석, 문자 및 도상기와에 대한 해석, 와당의 의례행위까지 영역을 넓히면서 새로운 지평을 열고 있다. 이는 지리적 한계로 고고학적 자료를 충분히 확보할 수 없는 남한 학계의 연구자료 부족을 방법론적으로 극복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