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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통사

5. 문자기와와 전돌

5. 문자기와와 전돌

고구려의 문자기와는 주로 와당이나 평기와, 벽돌을 중심으로 남아 있다. 대부분의 문자는 추상적인 내용의 그림을 담고 있거나 마멸과 훼손이 심해 쉽게 판독해 내거나 그 속에 담긴 의미를 찾기 어렵다.
이들 문자자료의 시문방법은 음각, 양각, 음양각 등 세 종류로 분류된다. 음각에는 침선과 말압(抹壓), 양각에는 타출(打出), 음양각에는 인각(印刻), 인장(印章), 모인(摸印) 등이 포함된다. 이 중 고구려에서는 음각 침선을 가장 많이 사용하였다. 시문 내용은 글씨, 부호나 기호, 그림 등으로 암키와보다는 대부분 수키와 배면에 많이 새겨겨 있다. 시문 부위는 수키와의 하단부인 미구나 언강 쪽에 치우친 점이 특징적이다. 이곳은 즙와(葺瓦) 때 수키와끼리 포개지는 부분에 해당한다. 그렇지 않으면 양 측면으로 치우치게 문자나 그림 등을 새기고 있다. 이는 수키와 배면에 물이 머무르는 요소를 최대한 차단하는 효과를 가진다. 암키와의 경우도 배면에 새기기 때문에 지붕에 얹으면 안쪽으로 놓이게 된다. 역시 기와 표면으로 물이 침습하여 훼손되는 것을 방지하려는 기술적 배려이다(백종오, 2004).
 
1) 문자기와
문자기와는 집안 지역의 국내성과 환도산성의 출토품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이외 요원 용수산성과 연천 호로고루 등의 사례가 있다.
집안 지역 출토 문자기와는 권운문와당에 시문된 경우가 많다. 권운문와당은 명문의 유무에 따라 유문자와 무문자로 나누어지며 와당면은 중방부, 권운부, 연호부, 주연부를 기본구도로 한다. 이들 와당은 국내성, 이수원자남유적, 천추총, 서대묘, 우산하992호묘, 우산하3319호묘, 마선구2100호묘 등에서 출토되었다(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集安市博物館, 2004b; 2004c). 집안 지역에서 출토된 유문자 권운문와당은 다음과 같다(백종오, 2004; 박찬규, 2005; 여호규, 2010).
① ‘태녕4년(太寧四年)’명와당은 가운데 중방을 두고 주위를 원권이 돌아가며 권운부를 8분할 하였다. 연호부는 따로 두지 않고 권운문과 주연부 사이에 ‘태녕사년태세□□윤월육일기사조길보자의손(太寧四年太歲□□閏月六日己巳造吉保子宜孫)’이라고 시문하였다. 여기에서 ‘태녕4년’은 326년으로 편년되며 국내성 인민욕지지점과 영화관공사장 지점에서 출토되었다. 지름은 12.5cm이다(吉林省文物志編委會, 1983)(그림28-1).
② ‘태녕□년(太寧□年)’명와당은 연호부와 주연부 사이에 ‘태녕□년사월조작(太寧□年四月造作)’이라는 명문을 새겨 놓았다. 국내성 남문리지점에서 출토되었으며, 지름은 14cm이다(耿鐵華·尹國有, 2001)(그림28-2).
③ ‘무술년(戊戌年)’명와당은 ‘태녕□년’명와당과 동일한 구도이다. 중방에는 ‘태(泰)’명과 주연부에는 ‘□□년조와고기세(□□年造瓦故記歲)’, ‘무술년조와고기세(戊戌年造瓦故記歲)’라는 명문이 시문되어 있다. ‘무술년’은 338년으로 추정되며(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集安市博物館, 2004c), 지름은 14.4~15cm이다. 국내성 체육장지점, 이수원자남유적과 우산하 992호묘에서 출토되었다(그림28-4).
④ ‘을묘년(乙卯年)’명와당은 ‘십곡민조(十谷民造)’명와당과 마찬가지로 권운부 칸 사이와 연호부에 명문을 양각하였는데 연호부에는 355년으로 추정되는 ‘을묘년계유(乙卯年癸酉)’명이 남아있다(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集安市博物館, 2005). 국내성과 우산하3319호묘 출토품으로 지름은 16cm 정도이다(그림28-5).
⑤ ‘정사(丁巳)’명와당은 주연부에 거치문 대신 명문을 양각한 점이 특이하다. 내용은 ‘태세재정사오월이십일위중랑급부인조개묘와우작민사천체□□용영시흥예득형만세(太歲在丁巳五月卄日爲中郞及夫人造盖墓瓦又作民四千餟□□用盈時興詣得亨萬世)’이다. 여기에서 ‘丁巳’는 357년으로 추정된다. 지름은 15.5~16cm이다(吉林省文物志編委員會, 1983)(그림28-6) .
⑥ ‘대세□□년조와구(大歲□□年造瓦九)’명와당은, 중방에는 ‘대길(大吉)’을, 연호부에는 ‘대세□□년조와구’명을 시문하였다. 국내성 시 제2소학교지점에서 2점이 출토되었고, 지름은 12cm이다(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集安市博物館, 2004b).
⑦ ‘십곡민조(十谷民造)’명와당은 권운문 사이에 ‘부일(夫一)’명을, 연호부에는 ‘십곡민조(十谷民造)’명을 시문하였다. 이수원자남유적에서 출토되었으며 지름은 15cm이다(吉林省文物志編委員會, 1983)(그림28-7).
이상과 같이 집안 지역에서는 모두 7종의 유문자 권운문와당이 출토되었다. 이들 와당에 새겨진 명문 내용은 길상구, 와당의 조성시기, 제작자나 제작집단 등 세 가지로 대별된다. 모두 4세기 전반부터 후반까지 유행하였다.
4세기 전반 권운문와당은 국내성과 이수원자남유적 같은 건물지 유적에서 많이 출토되고 있다. 그 시점이 326년경으로 편년되는 ‘태녕4년’명과 ‘태녕□년’명 와당이 그 예이다. 이 와당은 중국의 권운문와당과 중방부, 권운부, 주연부 등 기본적인 구도만 비슷하게 나타날 뿐 세부양식에 있어서는 많은 차이점을 보여준다. 즉 중방부의 원권은 권운문과 연결되지 않으며 권운부는 1줄 구획선으로 막새면을 8분할하고 있다. ‘태녕4년’명와당은 연호부를 따로 조성하지 않고 명문을 시문하였으나 ‘태녕□년’명와당에서는 연호부가 새롭게 발생하고 있다. 가장 두드러진 차이점은 주연부에 있다. 중국의 경우 주연부를 돌출되게 조성하는 것과 달리 고구려는 평면구도에서 표현한다는 차이점이 있다. 또 그 내부엔 거치문이 주로 시문된다. 이는 그만큼 문화 수용에 적극적이었으며 이를 짧은 시간 안에 고구려의 독자적인 양식으로 변화 발전시켰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이후 고분과 건물지 출토 ‘기축년’(329년), ‘무술년’(338년), ‘을묘년’(355년), ‘정사’(357년) 등 간지명 권운문와당의 사용이 많아지면서 다양한 변천 과정을 보여준다. 이들 편년은 329년부터 357년으로 4세기 전반과 중반을 포함하는 시기이다.
따라서 연호명 권운문와당은 국내성의 건물지에서 4세기 전반(1/4분기)에 나타나기 시작하였으며, 간지명 권운문와당은 국내성과 이수원자남유적, 서대묘, 우산하992호묘, 우산하3319호묘 등과 같이 건물지와 고분에서 4세기 중반(2/4~3/4분기)에 사용되는 양상을 보여준다. 이후 4세기 후반(3/4~4/4분기) 연호부에서 이들 명문이 사라지고 새무늬로 대치되는 마선구2100호묘, 새무늬와 ‘井’자로 대치되는 천추총부터는 무문자 권운문와당이 고분에서만 출토되고 있다.
이외 인각명문와는 도장에 명문을 새겨서 찍은 기와를 말한다. 정릉사지에서는 원형과 방형의 테두리 안에 ‘사(寺)’, ‘천(泉)’, ‘정(定)’ 등이 양각된 명문기와가 출토되었다. 평양 장매리 출토품은 ‘사(寺)’자를 수키와 내면에 새겨놓았다. 이런 기법을 통해 집안 지역의 전통이 평양 지역에도 그대로 전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림28 | 집안 지역 출토 권운문와당
- 1. 국내성 인민욕지지점 2. 국내성 남문리지점 3. 서대묘 4. 우산하992호묘 5. 국내성 6. 우산하3319호묘 7. 이수원자남유적 8. 마선구2100호묘 9. 천추총
환도산성에서는 ‘소형(小兄)’, ‘하천창(下天倉)’, ‘대(?)(大甩)’, ‘공(工)’, ‘범(凡)’, ‘천(天)’, ‘조(鳥)’, ‘정(井)’ 등이 새겨진 기와가 나타난다. 이 중 ‘소형’명기와는 고구려 환도산성 궁전지의 수·개축에 소형이 약 100여 명의 인부를 관리·감독하는 실무책임자로 관여한 사실을 말해준다. 즉, 환도산성 궁전지와 같은 고구려의 궁궐에는 ‘소형’이 주관하여 생산한 기와가 사용되었으며, 이들은 궁궐 등 국가적인 조영사업에 사용되는 기와를 제작하던 집단이었다.
그림29 | 우산하3319호묘 평·단면도 및 출토유물
천추총에서는 ‘영락(永樂)’, ‘조장군(趙將軍)’, ‘장안(長安)’, ‘왕(王)’, ‘전(前)’, ‘후(後)’, ‘상(上)’, ‘하(下)’ ‘왕(王)’ 등 연호와 직위, 지명, 방위 등 다양한 명문이 나타난다. 태왕릉에서는 ‘서인(西人)’, ‘주(州)’, ‘사(四)’, ‘오(五)’, ‘만(万)’ 등 지방인(평양 사람)과 숫자 등이 새겨져 있다. 그 외 장군총에서는 ‘대(大)’, ‘소(小)’, ‘신(申)’, ‘조(鳥)’ 등 한 글자 위주의 명문과 함께 새머리무늬가 1점 남아있으며 ‘제삼(第三)’과 같은 명문이 기와 내면에 새겨진 경우도 있다(조선유적유물도감편찬위원회, 1990). 우산하992호묘에서는 ‘부(富)’자가 새겨진 기와가, 서대묘에서는 ‘와(瓦)’, ‘음(音)’, ‘료(了)’, ‘작(爵)’자가 쓰여진 기와가 출토되었는데, ‘음’과 ‘작’은 기와 내면에 시문되었다. 천추총이나 태왕릉, 장군총, 서대묘 등 고분군에서는 단일 문자와 부호가 중심이 된다.
중국 요원 용수산성에서는 1990년을 전후하여 요원시 문물관리소의 수차례 발굴 결과, 북쪽 연못 남벽 문화층에서 ‘사(士)’명 수키와 1점, 지표에서 ‘왕(王)’, ‘대(大)’자 등 명문과 부호를 새긴 수키와편 14점이 채집되었다(吉林省文物志編修委員會,1988; 遼源市文物管理所, 1997). 그리고 연천 호로고루에서는 ‘□소와칠백십대와□백팔십용대사백삼십합천(□小瓦七百十大瓦□百八十用大四百卅合千)’명, ‘이십육일(卄六日)’명, ‘관일(官一)’명, ‘X’명, ‘Y’명 수키와 등이 출토되었다. 이 중 ‘□소와칠백십대와□백팔십용대사백삽합천’명은 모두 17자의 명문이 확인되었다. 그 내용은 ‘□ 소와 710개, 대와 □80개 중에 대와 430개를 사용하고 남은 것의 합이 천□□개이다’라고 해석하고 있다. 용도는 장인이 기와의 제작 수량과 남은 수량을 기록해 놓은 산판으로 추정하였다. 여기서 ‘소와’와 ‘대와’는 수키와와 암키와를 의미하는 것으로 여겨진다(심광주, 2009).
 
2) 전돌
전 혹은 전돌은 예전에 왕궁, 사찰, 왕릉 따위의 벽이나 바닥을 장식하는 데 쓰던 벽돌을 말한다. 기와와 같은 건축용 자재로 점토를 틀에 넣어 찍은 후 건조하거나 소성하여 만든 것이다. 전은 그 형태에 따라 방전, 조전(반방전), 삼각전, 제전, 공심전 등으로 나뉘고 용처별로 부전, 벽전, 묘전, 탑전 등으로 분류된다. 그리고 문양이나 문자 등의 유무에 따라 문양전, 문자전, 무문전 등으로도 구분한다.
고구려의 전돌은 집안 지역의 국내성, 환도산성, 민주유적, 천추총, 태왕릉, 우산하3319호묘 등과 평양 지역의 평양성, 정릉사지, 원오리사지, 장매리 등에서 출토되었다. 이외 무순 고이산성, 서울 구의동보루, 연천 호로고루 등에서도 수습되었다.
그림30 | 전돌 - 1. 집안 우산하3319호묘
그림30 | 전돌 - 2~4. 집안 천추총
그림30 | 전돌 - 5. 평양 정릉사지
국내성과 민주유적 출토 조전에는 용문, 능형문 등이 측면에 시문된 경우와 상면에 승문을 타날한 사례가 있다. 이들 측면 문양전은 벽체를 구성하는 벽전으로 추정되며 승문전이나 무문전은 바닥을 까는 부전의 용도로 파악된다. 태왕릉 출토 조전 역시 측면에 능형문이 시문되어 있기에 묘실을 구성하는 묘전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또한 태왕릉과 천추총에서는 많은 문자전이 출토되었는데 방전, 조전 등이 대부분이다. 긴 측면은 곽을 둔 후 명문을 양각했으며 짧은 측면은 빗각으로 깎기조정한 점이 특이하다. 천추총에서는 ‘천추만세영고(千秋萬歲永固)’, ‘보고건곤상필(保固乾坤相畢)’이라는 길상구가 새겨져 있다. 태왕릉에서는 ‘원태왕릉안여산고여악(原太王陵安如山固如岳)’이라는 길상구가 남아 있다. 우산하3319호묘에서는 무문전과 함께 ‘을묘년(乙卯年)’과 ‘정사(丁巳)’명 권운문와당이 출토된 바 있는데, 각각 355년과 357년으로 추정된다. 이로 볼때 4세기 중엽까지 무문전을 묘실에 사용하였다는 점과 무덤 상부에는 권운문와당을 덮었다(造蓋墓瓦)는 사실을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가 된다. 그리고 1936~1937년에 평남 대동군 임원면의 고산리 3호분과 7호분 발굴 시 능형문전, 방곽 내 삼각추문전 등이 소량이지만 보고된 바 있다.
한편, 정릉사지는 1975~1975년에 걸쳐 사역 전체를 발굴하였는데 이때 전돌을 사용한 각종 시설과 구조가 주목된다. 먼저 사역의 제일 동쪽 구역 북단에 있는 동서 16m, 남북 11.8m의 건물터는 침전(寢殿)으로 추정된다. 이곳에는 전돌을 포개 쌓아 만든 두 줄의 ㄱ자형 구들시설이 있고, 침전과 주변 회랑 사이 바닥에는 부전을 깔았다. 그리고 서구와 동구의 남쪽에 대칭되게 전돌로 만든 원형 구조물이 있으며 우물 주변의 바닥에도 원형으로 부전을 깔아 놓았다. 전돌은 대체로 청회색이며, 문양은 크게 능형문, 사선문, 타래문, 이깔나뭇잎무늬 등 네 종류로 구분된다. 이처럼 전돌을 이용한 다양한 유구가 남아 있는 경우는 매우 드문 사례이다. 평양 원오리사지에서는 연화문과 무문전이, 대동군 장매리와 부벽루에서는 연속 능형문전, 화문전 등이 남아있다. 평양 평천리 출토 특수전은 장방형의 조전으로 한쪽이 약간 휜 부채꼴로 장축면에 당초문과 기하문이 시문되었는데 그 용처는 원형시설이나 우물의 바닥을 까는 부전에 사용된 것으로 생각된다. 이외 연천 호로고루와 서울 구의동보루 등에서도 무문전이 확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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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문자기와와 전돌 자료번호 : gt.d_0009_0020_00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