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와전을 통한 고구려 문화
6. 와전을 통한 고구려 문화
1) 기와에 그려진 시조전승, 동명신화
집안 지역에서는 많은 문자기와와 도상기와가 출토되어 당시 사회의 면모를 나타내는 좋은 자료가 된다. 특히 환도산성 출토 기와류는 다른 지역보다 월등히 많고 그 안에 문자나 다양한 그림이 그려져 있어 고구려인의 사유체계를 접근하는 데 좋은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이들 기와의 종류와 수량을 정리하면 〈표1〉과 같다.
〈표1〉에서 보듯이 환도산성 내 명문기와 수량은 확인된 것만 922점으로 상당히 방대한 분량이 출토되었다. 이들 명문과 문양을 종류별로 보면 환도산성 궁전지 70여 종, 2호문지 30여 종, 요망대 20여 종 등 모두 120여 종류의 문자와 그림, 부호가 다양하게 확인되었다(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集安市博物館, 2004a). 이에 비해 천추총은 문자 중심의 명문 20여 종, 태왕릉은 문자보다는 간단한 부호가 많은 비중을 차지하며 10여 종이 출토되었다. 장군총은 천추총과 같이 한 문자 위주의 명문 10여 종이 파악되는데 이들 고분 출토 문자자료는 환도산성 출토품과 좋은 비교자료가 된다.
표1 | 환도산성 출토 문자 및 도상기와 현황
| 출토지/종류 | 문자 | 부호 | 그림 | 합계 |
| 궁전지 | 小兄, 大甩, 九, 鳥, 中, 天 등 56점 | 井, X, Y 등 478점 | 鳥頭文 등 163점 | 697점 |
| 2호문지 | 下天倉, 九, 天, 与, 大, 手, 君 등 24점 | 井, X, Y 등 170점 | 鳥頭文, 蓮花文 등 29점 | 223점 |
| 요망대 | 弗, 夫 등 2점 | 井, X, 工 등 (?) | 鳥頭文 등 (?) | 2점 |
| 합계 | 82점 | 648점 | 192점 | 922점 |
* 요망대 출토 부호, 그림은 합산하지 않음.
환도산성 출토품에는 새머리와 새발자국, 날아가는 새, 연화, 꽃, 나무, 사람, 뱀 등 다양한 주제가 그림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 중 가장 많은 것은 새 그림이다. 약식화된 부호 역시 ‘조(鳥)’자나 새를 간략화하여 그리기도 하고(그림31-1, 2), 새의 발자국 등으로 부호화하였다. 궁전지에서 출토된 ‘与’자모양(그림31-3) 역시 ‘조’자의 약식으로 추정되며, 한쪽으로 기운 연화문 봉우리와 그 위로 뻗은 나무문을 향해 새가 날아가는 모습을 형상화(그림31-6)하여 회화성이 돋보인다. ‘与’자문 아래로는 ‘ㅒ’자문이 그려져 있는데 ‘八’자 밑에 그려진 경우(그림31-5)와 새무늬의 몸통 안에 그려진 예(그림31-4)가 있다.
이들 문자 및 도상은 새와 새머리의 비중이 압도적이다. 이는 하늘(天)과 이어주는 조류 숭배사상과 그 맥을 같이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다른 문자나 그림도 대부분은 하늘과 양(陽)을 상징하는 ‘천(天)’, ‘정(井)’, ‘조(鳥)’, ‘☆’ 등을 기본문양으로 하였으며 땅(地)과 음(陰)을 상징하는 뱀무늬도 일부 관찰된다. 암키와에도 격자문 계통이 타날된 배면에 ‘십(十)’, ‘정(井)’, ‘천(天)’, ‘올(兀)’ 등의 문자나 부호를 새긴다. 모두 하단 부분에 치우쳐서 시문되는 점이 특징이다.

그림31 | 환도산성 출토 ‘조(鳥)’명 약식 기와
- 1·2. 궁전지 3~6. 2호문지
- 1·2. 궁전지 3~6. 2호문지
수키와에 다양한 글씨, 그림, 부호 등이 들어가는 데 반해 암키와에는 격자문과 석문이 일부 시문되고 있다. 주로 한 글자나 부호를 약식화하여 시문하는 점이 암키와와 수키와의 차이점이다. 암키와에 시문되는 부위도 중앙보다는 상·하 단면이나 측면에 치우치도록 하였으며, 이를 통해 수키와 시문방식에 대한 기술적 습성이 그대로 암키와에도 옮겨가고 있다. 수키와 배면에 ‘천(天)’, ‘정(井)’, ‘조(鳥)’ 등의 문자나 관련 그림을 새기는 것은 이들 문자나 그림이 하늘을 향하게 함으로써 늘 하늘과 연결된다는 의미가 강하게 내포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건물의 위상을 그대로 반영한다고 하겠다. 그렇기에 음을 상징하는 암키와보다는 양을 상징하는 수키와에 절대 다수의 글자나 그림이 새겨지는 것이다.
고구려의 기록 중 새와 관련된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은 시조전승인 동명신화이다. 이 동명신화는 고구려 왕실의 천손의식과 세계관을 담고 있는 자료로 고구려인들의 정신세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다시 말해 고구려 사람들이 기와 표면에 새긴 새모양은 고구려 건국신화와 관련되어 고구려인들의 정신 속에 면면히 흐르던 고구려인의 시조전승과 왕권의 상징과 조력자로서의 새가 함께 융합되어 표현된 것이다. 이는 새에 대한 고구려인들의 남다른 애착과 천손으로서의 상징성이 내포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백종오, 2006a; 2006b; 이은진, 2022). 집안 일대 고구려 유적에서 발굴된 새 관련 그림을 통해 고구려인들의 새에 대한 관념과 사후세계에 대한 인식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다. 살아있는 집권자의 통치공간이자 국난 극복의 상징물인 환도산성에 사용된 기와에는 고구려의 건국신화와 맥을 같이하는 새 그림이 그려져 왕권의 권위와 국운의 안정을 비는 데 사용되었고, 망자의 공간인 장군총에는 왕의 영혼을 사후세계로 인도할 새의 모습이 간략하고 추상적으로 묘사되어 고구려인들이 가지고 있던 관념의 다양성을 알려준다.
2) 와당 속의 윤회, 훼기와당
훼기와당(毁棄瓦當)은 수막새의 주연부를 의도적으로 타결한 후 매납한 막새기와를 말한다(백종오, 2011; 2012). 이 와당은 삼국시대 유적에서 공히 출토되는데, 고구려의 경우 집안 지역의 국내성과 환도산성, 천추총, 태왕릉, 장군총 등과 평양 지역의 청암리성, 대성산성, 정릉사지, 안학궁 등의 사례가 있다. 남한 지역에서는 연천 호로고루와 서울 홍련봉1보루에서 발굴된 바 있다(표2).
(1) 훼기와당의 출토 사례
〈표2〉에서 보듯이 14개소 유적에서 모두 33점이 확인되었다. 이 중 출토 맥락을 알 수 있는 사례는 천추총과 태왕릉 그리고 연천 호로고루가 있다. 적석총의 경우 적석부에서 출토되는데, 적석총의 상면이나 각 층단의 상면에 직접 덮은 형태로 노출되었다. 이는 적석총 상부 건물, 즉 묘상건축에 올려졌던 기와를 후대 고분의 보수 시 적석부 안에 덮었으며 일부 수막새는 주연부를 훼기한 후 의도적으로 매납하였다는 출토 정황을 말해준다. 만약 건물 지붕에 올려진 수막새가 건물이 무너지면서 떨어졌다면, 주연부만 탈락하고 막새면이 그대로 노출되기는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백종오, 2011).
표2 | 고구려 훼기와당 출토 현황(2022년 10월 현재 33점)
| 번호 | 유적명 | 성격 | 와당 종류 및 수량 | 시기 | 출전 |
| 1 | 집안 천추총 | 고분 | 6엽 복선연화문와당 5 | 4세기 후반~5세기 전반 | 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集安市博物館, 2004a |
| 2 | 집안 태왕릉 | 고분 | 6엽 복선연화문와당 6 8엽 복선연화문와당 2 | 4세기 후반~5세기 전반 | 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集安市博物館, 2004a |
| 3 | 집안 장군총 | 고분 | 9엽 복선연화문와당 1 | 4세기 후반~5세기 전반 | 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集安市博物館, 2004a |
| 4 | 집안 국내성 | 성곽 | 9엽 단판연화문와당 1 인동문 1 용면문 1 | 5세기 후반~ | 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集安市博物館, 2004b |
| 5 | 집안 환도산성 | 성곽 | 9엽 단판연화문와당 1 용면문 4 | 5세기 후반~ | 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集安市博物館, 2004c |
| 6 | 평양 청암리성 | 성곽 | 4+4엽 조합연화문와당 1 | 5세기 전반~6세기 전반 | 朝鮮總督府, 1929 |
| 7 | 평양 대성산성 | 성곽 | 6엽 복선연화문와당 1 복합연화문와당 1 | 5세기 전반~6세기 전반 | 김일성종합대학 고고학및민속학강좌, 1973 |
| 8 | 평양 안학궁 | 건물지 | 복합연화문와당 1 | 6세기~ | 조선유물도감편찬위원회, 1989 |
| 9 | 평양 정릉사지 | 사찰 | 4+4엽 조합연화문와당 1 | 6세기~ | 조선유물도감편찬위원회, 1989 |
| 10 | 평양 원오리사지 | 사찰 | 4+4엽 조합연화문와당 1 | 6세기~ | 朝鮮總督府, 1937 |
| 11 | 평양 토성리 | 미상 | 6엽 복선연화문와당 1 조합연화문와당 1 | 5세기 전반~6세기 전반 | 朝鮮總督府, 1929 |
| 12 | 평양 평천리 | 미상 | 6엽 복선연화문와당 1 | 5세기 전반~6세기 전반 | 朝鮮總督府, 1929 |
| 13 | 연천 호로고루 | 성곽 | 6엽 단판연화문와당 1 | 6세기 초반~ | 한국토지공사 토지박물관, 2007 |
| 14 | 서울 홍련봉1보루 | 성곽 | 4+4엽 조합연화문와당 1 | 6세기 전반~ | 高麗大學校 考古環境硏究所, 2007 |
연천 호로고루의 경우 우물지에서 주연부가 결실된 연화문와당이 수습되었다(한국토지공사 토지박물관, 2007) 우물지는 동벽 내 중앙부에 위치하는데 평면은 방형이고 규모는 동서 105cm, 남북 120cm, 깊이 263cm 정도이다. 바닥은 통나무를 사각으로 짠 후 그 위로 현무암 석재를 사용하여 13단 정도 축조하였다. 내부 지표하 160cm 깊이에서 연화문와당과 바닥에서 흑색 마연단경호 등의 각종 토기류와 함께 다량의 동물뼈가 수습되었다. 여기에서 수습된 연화문와당은 중앙에는 반구형의 자방이 돌출되었고 6엽의 단판연화문과 간판이 고부조로 볼륨감 있게 표현되었다. 잔존 지름은 13cm이고 두께는 3.5cm이다. 훼기상태는 주연부에 인위적인 타격을 가해서 주연부만을 조심스럽게 떼어낸 흔적이 역력하게 남아있다. 떼낸 방향은 와당의 앞면과 뒷면의 양쪽에서 관찰된다.

그림32 | 연천 호로고루 우물과 훼기와당 출토 위치(한국토지공사 토지박물관, 2007 재편집)
이와 유사한 사례로 서울 홍련봉1보루 출토품이 있다(고려대학교 고환경연구소, 2007). 이 유적에서는 와당이 모두 7점이 수습되었는데 동일범(同一笵)을 사용하여 4 +4엽의 조합연화문을 배치하였다. 막새면은 점토판 두 매를 앞뒤 판으로 사용하였으며 주연부를 따로 접합하였다. 주연부는 막새면보다 높게 조성하였는데, 지름은 17~19cm, 두께는 2cm 내외이다. 특히 S4E3피트 출토품은 막새면의 주연부를 인위적으로 탈락시켜 2차 가공한 타결흔(打缺痕)이 뚜렷하다. 떼어낸 방향도 앞서 언급한 호로고루 출토품과 같이 양쪽에서 관찰된다(백종오, 2008). 홍련봉2보루에서 520년에 해당하는 ‘경자(庚子)’명토기가 출토되어 1보루 역시 6세기 전반경으로 편년하고 있다.
(2) 훼기와당의 의미
훼기와당은 고분, 성곽, 사찰 등의 유적에서 출토된다. 이들 입지는 강이나 하천 등에 가까우며 유구 역시 연못, 우물, 집수지 등 모두 물과 관련되는 공통점이 있다. 그리고 이 와당의 주요 문양은 연화문이다. 연꽃은 인도의 고대신화에서 우주 창조와 생성의 의미를 지닌 꽃으로 이해되고 있다. 이후 불교에서는 서방정토에 왕생할 때 연꽃 속에서 다시 태어난다는 ‘연화화생(蓮華化生)’의 의미로 이해되어 모든 불·보살의 정토를 ‘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로 표현하기도 하였다.

그림33 | 집안 삼실총 연화화생도
고구려는 소수림왕 2년(372년)에 불교가 전래되었다. 당시 인도와 중국에서 전래된 불교는 대승불교이고, 대승불교에는 윤회를 뜻하는 사겁(四劫)이 형성되어 있었다. 사겁이란 성겁(成劫), 주겁(住劫), 괴겁(壞劫), 공겁(空劫)을 지칭한다. 각 20겁이 있어 모두 80겁 동안에 우주 생성과 소멸이 이루어진다고 본다. 성겁은 이 세계가 성립하기 시작하여 완성될 때까지를 말한다. 주겁은 기세간에서 유지되는 20겁의 시간이다. 괴겁은 주겁이 다한 후에 20겁 동안 이 세계가 파괴되어 가는 시간이다. 공겁은 의미 그대로 20겁 동안의 공허한 시간을 의미한다. 이같은 사겁에 대한 내용은 『장아함경(長阿含經)』, 『대루탄경(大樓炭經)』, 『기세인본경(起世因本經)』, 『구사론(俱舍論)』 등 여러 경론 가운데 표현되어 있다.
이러한 불교 교리와 와당의 주연부 훼기는 와당의 평면 형태를 보면 쉽게 연상된다. 막새면은 크게 자방부와 연판부, 주연부로 구성되어 있다. 가운데 연씨를 상징하는 자방은 만물이 생성하는 성겁을 말하며, 화려하게 만개하는 연판은 만물이 성장하는 주겁을 뜻한다. 그리고 연판 주위에 높직하게 테두리를 형성한 주연은 괴겁에 해당하기 때문에 이 주연을 훼기함으로써 공겁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불교 미술품이나 조각품 등에 연화문을 그리거나 조각할 때는 주연부인 테두리를 표현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불교회화나 고분벽화의 연화문, 불·보상이나 탑, 부도, 석등 대좌의 앙련과 복련, 범종의 연화문 당좌 등이 그 예이다.
그런데 유독 와당에만 주연부를 두고 있다. 물론 빗물의 침습을 막새면에 받지 않게 한다는 기능적인 면도 있겠으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태왕릉이나 천추총 출토품과 같은 초기 복선연화문와당에는 필요 이상으로 높게 주연부를 조성한다는 점이다. 이는 고구려의 경우 권운문와당 단계에서는 권운부와 주연부가 평면적인 막새면을 보이다가 연화문와당 단계에서는 높직한 주연부를 조성하는 것과 깊은 관련이 있다. 이렇게 권운문와당의 평면적인 거치문은 이후 연화문 단계에서는 태왕릉 출토 복선연화문수막새에서 보듯이 주연부 높이가 5cm 정도로 높게 조성한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권운문와당 주연부의 거치문은 동경의 문양에서 차용해 왔듯이 태양이 발산하는 형상을 뜻한다. 연화문와당 주연부는 권운문와당 단계에서도 빛(光)을 의미했듯이 윤회의 의미를 내포하는 공겁이라는 개념과 함께 부처의 자비광명을 나타내는 의미로 해석된다. 그렇기 때문에 권운문와당의 거치문이 연화문와당의 주연부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그 표현은 달라진 것으로 생각된다. 원은 태양, 곧 빛을 상징한다. 이것을 거치문으로 표현하여 태양으로 표현하느냐, 아니면 높직한 주연으로 도드라지게 광명을 표현하느냐는 와당의 변화·발전 과정에서 나타난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보인다.

그림34 | 고구려 훼기연화문와당
- 1~3. 태왕릉 4. 천추총 5. 장군총 6. 국내성 7. 청암리성 8. 대성산성 9. 안학궁 10. 정릉사지 11. 원오리사지 12. 토성리 13. 평천리 14. 호로고루 15. 홍련봉1보루
- 1~3. 태왕릉 4. 천추총 5. 장군총 6. 국내성 7. 청암리성 8. 대성산성 9. 안학궁 10. 정릉사지 11. 원오리사지 12. 토성리 13. 평천리 14. 호로고루 15. 홍련봉1보루
그래서 지붕에 사용하지 않고 재활용할 때는 훼기와당을 물과 관련된 수변유적에 매납 또는 투기하면서 연꽃과 같은 건물의 번성을 기원하고 이에 덧붙여 성, 주, 괴, 공의 완전한 단계에 이르기를 염원하였다. 결국 연꽃이 자라기 적절한 공간에 윤회의 상징인 연화문와당을 훼기하여 매납함으로써 윤회의 고리를 끊고 나아가 그 물속에서 연화화생으로 다시 태어나기를 바라는 불교적 열망을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3) 와당 문양의 변화와 통치이념
고구려 와당의 형식은 문양에 따라 크게 권운문, 연화문, 인동문, 용수문 등 주요 와당과 만초문, 전지문, 기하문 등 기타 와당으로 분류되는데, 집안 지역과 평양 지역의 시기별 변천 과정이 확인된다. 특히 와당의 성립과 관련하여 ‘태녕4년’명 및 유문자와당이 주목된다. 중국 권운문와당과 기본적인 문양 구도는 비슷하게 나타나지만, 중방부, 권운부, 주연부 등 세부양식의 있어서는 고구려의 독자적인 요소가 많이 포함되어 있다. 다시 말해, 이들 권운문와당은 유문자에서 무문자로 바뀌고 연호부의 퇴화 등 세부적인 속성이 변천되면서 고구려 양식으로 정립되었다.
고구려의 와당은 초기 도교적인 배경에서 출발하여 불교 수용 이후 연화문이 등장하였고 정치상황이 변모함에 따라 문양의 변화도 함께 수반되었다. 고구려인들은 고대국가 형성기부터 도교적인 사상체계를 형성하고 있었는데, 이는 동명신화 등에서 도교적인 요소로 나타났고 유적으로는 고분벽화에 나타나는 도교적인 신수(神獸)의 존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고구려인들의 도교에 대한 이해는 점차 심화되어 갔고 그 영향은 거울을 정(正)과 (邪)를 구분하는 지표로 인식하게 되었다. 나아가 고구려인들은 건물로 들어오는 사악한 기운을 막고자 거울을 모방한 권운문와당을 이용하여 처마 끝을 장식하였다.
도교적인 영향을 받아 제작되기 시작한 고구려의 권운문와당은 불교 수용 이후 연화문와당으로 변화하게 되었고 이는 왕실의 적극적인 불교 장려와도 맥을 같이한다. 연화문와당은 고구려 귀족연립정권 성립기 집권 귀족의 사상적 경향을 반영하여 조합연화문의 출현을 보게 되었다. 이는 왕실의 불교 장려와 불교계 내부의 토착신앙 흡수의 영향을 받았을 뿐 아니라 남조와의 교류를 통해 유입된 복판연화문의 유입 등이 와당의 문양 변화에 크게 작용하였던 것으로 이해된다. 조합연화문와당은 복합연화문와당과 함께 귀족연립정권기의 특징적인 유물인 것이다. 고구려 후기에 나타나는 기하문와당은 귀족연립정권의 붕괴와 연개소문 정권의 등장, 중국 도교의 유입 등으로 인해 불교계의 기반이 약해지고 사회 전반적으로 도교의 영향력이 강해진 것을 입증해 주고 있는데, 왕실 원찰인 정릉사에서조차 불교식 와당이 쇠퇴하고 있었다는 점은 당시 불교계의 쇠퇴가 어느 정도였는지 실감할 수 있게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