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공격용 무기의 종류와 특징
1. 공격용 무기의 종류와 특징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공격용 무기는 원거리 무기와 근거리 무기, 그리고 공성용 무기로 나눌 수 있다. 그렇지만 고구려의 공성용 무기는 그 실체를 추론할 고고자료가 부족하므로 이 글에서는 제외하였다.
1) 원거리 무기
(1) 활(弓)과 화살촉
활은 고구려의 대표적인 원거리 무기로, 국가 성립기부터 사용되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동명성왕편에 따르면, 고구려를 건국한 주몽(朱夢)은 어렸을 때부터 활을 잘 쏘았으며, 주몽이라는 이름 역시 활을 잘 쏘는 것을 뜻하는 부여의 속어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활은 기본적으로 나무 등의 탄력 있는 재료를 휘어서 반달모양의 몸체를 만들고, 몸체의 끝에 활시위(활줄)를 걸고 화살을 줄에 매겨 함께 당겼다 놓으면 그 탄력으로 화살이 발사되게끔 하는 무기이다. 활은 나무나 동물뼈로 뼈대를 삼고, 명주실 내지는 동물의 힘줄을 활줄로 만들기 때문에 유적에서 발견되기 어렵다.
현존 실물자료로는 ‘동리묘(佟利墓)’로도 잘 알려진 평양역전 이실분에서 출토된 골제활부속구가 유일하다.주 001 ‘영화9년(永和九年)’명벽돌을 통해 353년에 조성되었음이 밝혀진 석개천장의 전실묘인 평양역전 이실분 출토 활부속구는 소의 갈비뼈를 얇게 다듬어 활의 뼈대에 덧붙임으로써 탄력성을 높였다. 골제활부속구는 흉노를 비롯한 주변의 여러 나라에서도 발견된다. 집안(集安) 무용총의 수렵도에 그려진 활에는 뼈대를 덧댄 부분에 끈을 돌린 마디가 분명하게 표현되어 있어, 합성궁(合成弓)을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에서는 나무로 만든 목궁(木弓) 외에도 물소와 같은 동물의 뿔을 이용하여 만든 각궁(角弓)도 유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와 관련하여 『태평어람(太平御覽)』에는 고구려왕(산상왕)이 오(吳)의 손권(孫權)에게 각궁을 선물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한편, 『삼국지(三國志)』 위서동이전에 고구려에는 ‘맥궁(貊弓)’이라는 우수한 활이 생산된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구려 고분벽화에도 여러 활이 묘사되어 있는데, 길이 1m가 넘지 않는 단궁(短弓)이 기본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단궁은 말 위에서 쏘기에 적합한 기마용 활로 널리 알려져 있다. 무용총이나 덕흥리고분의 수렵도에는 달리는 말에서 몸을 뒤로 돌려 활을 쏘는 소위 ‘파르티안 샷(parthian shot)’을 하는 장면도 쉽게 찾아볼 수 있어, 당시 고구려인들이 기마궁술에 능했음을 짐작해볼 수 있다.
그리고 안악3호분 행렬도에는 궁수(弓手)들이 묘사되어 있다. 보병 궁수는 조끼 형태의 찰갑(札甲)을 착용하고 있으며, 허리춤에는 화살통(盛矢具)을 차고 있다. 이들 화살통의 기본 형태와 구조는 부산 복천동22호분과 경주 계림로14호분이나 호우총 그리고 대구 경산 임당동고분군 등의 신라 및 가야 무덤 출토품과도 유사하다.

그림1 | 평양역전 이실분 출토 골제활부속구(朝鮮總督府, 1933)

그림2 | 무용총 수렵도에 묘사된 활쏘는 장면(동북아역사넷)

그림3 | 안악3호분에 묘사된 궁수 행렬(동북아역사넷)
활과 함께 사용된 화살은 무용총 벽화에서 화살촉과 화살대, 깃, 오늬 등으로 구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화살대는 화살의 몸체로 가늘고 긴 싸릿대로 만들기 때문에 유적에서는 철제화살촉만 발견된다. 화살은 그 특성상 다발로 구성되기 때문에 실제 유적에서도 다수의 철촉이 출토되는 경우가 많다.
철촉은 기본적으로는 촉두(鏃頭), 신부(身部, 頸部), 경부(莖部, 슴베)로 구성된다. 철촉은 그 형태적 특징에 따라 넓은잎모양의 광엽형(廣葉形), 날이 직선인 도끼날형(斧形), 세 갈래 날개가 달린 삼익형(三翼形), 도끼날형 철촉에 비해 촉신이 좁고 긴 형태의 착두형(鑿頭刃形), 단면이 마름모꼴인 능형(菱形), 오각형의 납작한 촉두와 단면 방형의 긴 촉신에 좁고 긴 슴베를 가진 뱀머리 형태의 사두형(蛇頭形) 등으로 구분이 가능하다.
이처럼 다양한 철촉의 형태는 기능적인 차이에 따른 것으로 이해하는데,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한 장면에 다양한 철촉이 등장하거나, 유적에서도 다양한 형태의 철촉이 함께 출토되기 때문이다. 특히 앞이 편평한 도끼날형 철촉은 무용총, 장천1호분, 덕흥리고분 등의 수렵도나 마사희(馬射戲)가 그려진 벽화에서 발견되고 있어 사냥이나 연습용으로 사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 밖에도 무용총의 수렵도에는 호랑이나 사슴을 겨냥한 화살촉 바로 뒤에 명적(鳴鏑)이 끼워져 있음이 확인된다. 명적은 구체에 구멍이 뚫려 있어 날아가는 동안 소리가 나도록 한 것으로, 신호를 보내기 위해 사용된다.

그림4 | 고구려 철촉(국립문화재연구소, 2017)
- 1~3, 11~13, 17~18. 환인 오녀산성 4. 집안 마선구2100호묘 5. 집안 우산하540호묘 6. 시중 노남리 남파동104호무덤 7. 집안 태왕릉 8·9. 심양 석대자산성 10. 중강 장성리적석무덤 14·16. 집안 환도산성 15. 서울 홍련봉2보루 19. 구리 시루봉보루 20. 연천 호로고루
- 1~3, 11~13, 17~18. 환인 오녀산성 4. 집안 마선구2100호묘 5. 집안 우산하540호묘 6. 시중 노남리 남파동104호무덤 7. 집안 태왕릉 8·9. 심양 석대자산성 10. 중강 장성리적석무덤 14·16. 집안 환도산성 15. 서울 홍련봉2보루 19. 구리 시루봉보루 20. 연천 호로고루
그런데 고구려 전기의 철촉은 보고된 사례가 많지 않다. 대체로 슴베를 갖춘 유경식(有莖式)으로,주 002 촉두의 폭은 2~3cm로 비교적 넓은 편이다. 이들 광엽형 철촉은 고구려 초기에 등장하여 고구려 중기까지도 사용되었다. 고구려 초기로 편년되는 북한 자강도 시중군 노남리 주거 유적을 비롯하여, 중국 환인(桓仁) 오녀산성(五女山城), 심양(瀋陽) 석대자산성(石台子山城), 집안 우산하(禹山下) 3305호묘와 3560호묘 등의 고구려 중기 유적에서도 출토되었다. 도끼날형 철촉 역시 이른 시기부터 사용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날 끝이 직선인 것과 둥그런 것으로 구분된다. 북한 자강도 남파동104호무덤 외에 고구려 중기로 편년되는 집안 마선구2100호묘와 우산하540호묘 등에서 출토되었다.
고구려 중기에는 앞선 시기의 광엽형 철촉 대신 그 이전보다 슴베의 길이가 길어지는 세장한 형태의 철촉이 유행하게 된다. 이는 시간이 지날수록 갑주 등의 방어구가 발전함에 따라 관통력을 높일 수 있도록 머리가 좁고 뾰족하고, 몸체의 길이가 긴 화살촉이 필요하게 되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김보람, 2013).
이 시기에는 삼익형, 착두형, 능형, 사두형 철촉이 모두 확인된다. 5세기 전반대로 편년되는 집안 우산하3105호 계단적석총에서도 도끼날형, 능형, 사두형 철촉이 모두 출토되고 있어 당시 다양한 형태의 철촉이 용도에 따라 고루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 후기에 해당하는 남한 지역의 아차산보루군에서도 다수의 철촉이 출토되었다. 특히 한강 유역의 구의동보루에서는 1,300여 점의 철촉이 출토되었는데, 세장한 촉두가 특징이다. 이들은 대부분 오각형의 납작한 사두형 철촉으로 전체 길이는 25cm 내외이다. 아차산4보루에는 이들 사두형 철촉 외에도 삼익형과 착두형 철촉도 소량 출토되었다.
한편, 세장형 철촉은 고구려 후기의 관방유적에서 주로 출토된다는 점에서 보병의 장궁에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된 바 있다(김길식, 2005).
(2) 쇠뇌(弩)
쇠뇌는 방아쇠를 사용하여 화살을 발사하는 원거리 무기로, 보통의 활보다 사정거리가 길고 파괴력도 강하다. 쇠뇌는 크게 자루(弩臂)와 활(弩弓) 그리고 방아쇠 장치(弩機)로 구성되는데, 청동으로 만들어진 방아쇠 장치와 쇠뇌에 사용된 화살촉(鐵柄銅鏃)만 발견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쇠뇌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춘추전국시대이며, 한(漢)과 흉노(匈奴)의 전쟁 과정에서 그 종류가 다양해지고 구조 또한 더욱 정교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쇠뇌는 기본적으로 보병의 병기이다. 강력한 쇠뇌로 무장한 보병부대는 기병들이 보유한 활의 사정거리 밖에서 기병들을 제압하여 무력화시킬 수 있었다. 이에 쇠뇌의 보급은 기병들의 장비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되어 투구와 갑옷을 더욱 견고하게 만들었으며, 말에게도 쇠갑옷을 입힌 중무장기병(重武裝騎兵)의 탄생을 재촉하였다고 할 수 있다(김길식, 2005).

그림5 | 연천 무등리보루 출토 추정 쇠뇌촉(토지박물관, 2000)
고구려의 쇠뇌는 아직까지 실물로 보고된 바 없다. 그렇지만 408년에 축조된 남포 덕흥리벽화고분의 남벽 묘주출행도에는 말 탄 사람 위에 “계현령이 쇠뇌를 들어 올렸다(薊懸鈴捉軒弩)”라는 묵서(墨書)가 있어 5세기대에 이미 고구려에 쇠뇌가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렇지만 고구려에서 쇠뇌는 6세기 이후에서야 본격적인 무기로 사용된 것으로 이해된다(余昊奎, 1999). 이와 관련하여 590년 수의 문제(文帝)가 고구려의 평원왕에게 보낸 새서(璽書)에 고구려가 수에 첩자를 파견해 쇠뇌 기술자를 빼내 간 일을 비난하는 내용주 003이 주목된다. 그리고 612년에 있었던 고구려와 수의 전쟁에서 요동성 전투 중에 수나라 장수 염비(閻毗)가 고구려의 활과 쇠뇌(弓弩)의 공격으로 부상을 입었다는 기록주 004도 존재한다. 이를 통해 6세기 후반 고구려는 우수한 쇠뇌 제작에 힘을 기울였고, 수와의 전쟁에서 이를 적극적으로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정동민, 2020).
한편, 한나라의 추형 동촉(銅鏃)이 대부분 쇠뇌의 화살촉으로 사용되었다는 점을 들어 심양 석대자산성에서 출토된 삼각형 혹은 사각형 촉신을 갖추고 있는 추형(錐形) 철촉이나 연천 무등리2보루에서 수습된 길이 21cm, 무게 75g에 달하는 철촉을 쇠뇌촉으로 추정하기도 한다(김길식, 2005).
2) 근거리 무기
근거리 무기로는 도(刀)·검(劍)·도끼(斧)·창(矛)·꺾창(戈)·극(戟)·낫(鎌) 등이 있는데, 크기에 따라 도(刀)로 대표되는 단병기와 창(矛)으로 대표되는 장병기로 나누기도 한다. 『주서(周書)』에는 고구려의 주요 장병기로 극(戟)주 005을 들고 있으나, 실물로 확인된 사례가 없어 이 글에서는 제외하였다.
(1) 도검(刀劍)
도와 검의 구분은 칼날이 한쪽에만 있어서 베는 데 사용하는 것이 도이고, 칼날이 양쪽에 있어서 찌르거나 베는 데 사용하는 것이 검이다. 문헌에는 1세기 전엽까지 고구려가 검을 사용하였음이 기록되어 있으나, 아직까지 실물로 출토된 사례는 없다. 이와 관련하여 고구려 역시 주변국들과 마찬가지로 장검(長劍)을 사용하였을 것이라는 주장도 제기되었다(김성태, 2001).
고구려의 도는 고분벽화에는 모두 손잡이 끝부분에 둥근 고리가 있는 환두도(環頭刀)가 기본이지만, 실제 유적에는 환두가 없는 무환두도(無環頭刀)도 다수 발견된다. 이들 무환두도 역시 원래는 고리가 있었을 가능성도 있지만, 나무자루가 달린 목병도였을 수도 있다(성정용, 2000). 한반도 중서부 지역에서는 4세기 중후반이 되면 목병도가 제작되기 시작하여 4세기 후반에는 실전에서 목병도가 창수와 궁수의 근접전을 위한 강력한 보조무기로 사용되었다고 본 것이다.
환두도는 고리 내부에 장식된 도안에 따라 다양한 명칭을 붙이기도 하는데, 삼국의 다른 국가들과 달리 고구려에서는 별다른 장식을 하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다만 환인 고력묘자15호묘, 집안 마선구1호묘, 평양 병기창유적에서 세 갈래의 잎이 장식된 삼엽문(三葉文) 계통의 환두도가 출토된 바 있다. 이들 삼엽문 환두도는 가야와 삼국 모두에서 확인되고 있어, 당시 가장 보편적인 장식대도였음을 알 수 있다.
별다른 장식 없이 고리만 달린 소환두도(素環頭刀)는 적석총인 집안 하활룡20호묘에서 출토되었는데, 전체 길이는 32cm이다. 그리고 환인 고력묘자19호묘를 비롯하여 북한의 자강도 심귀리 73호무덤, 92호무덤, 운평리 4-6호무덤, 4-8호무덤, 남파동104호무덤 등 대다수의 적석총에서 둥근 고리 없이 길이가 짧은 철제도가 출토되고 있어, 고구려 전기에 주로 길이가 짧은 철도류가 많이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4세기 중엽으로 편년되는 집안 우산하3296호묘에서 전체 길이 26.8cm의 소환두도가, 마선구2100호묘에서 등은 평평하고 날은 비스듬한 직인(直刃)의 철도가 3점 출토되어 고구려 중기의 도 역시 그 이전 시기와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와 관련하여 5세기대의 벽화무덤인 집안 통구12호묘(우산하1894호묘, 마조묘)에 그려진 전투도에는 갑옷과 투구로 무장한 갑주무사(甲冑武士)가 적장을 비교적 크기가 작은 도를 이용하여 참살하려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고구려 전기 유적에도 작은 크기의 도가 출토된다는 점에서, 이들 소도(小刀)는 대도(大刀)와는 달리 장수들이 전투에서 적을 베기 위해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에서 도는 보병과 기병 모두의 무기로 사용되었으며, 고분벽화에 묘사된 바와 같이 중장기병 역시 주력 무기가 장창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환두도를 착장하고 있었던 것은 이처럼 근접전에서 사용하기 위함으로 추정된다.

그림6 | 환두대도를 착용한 무사 - 1. 통구12호묘(조선유적유물도감편찬위원회, 1990)

그림6 | 환두대도를 착용한 무사 - 2. 삼실총(조선유적유물도감편찬위원회, 1990)
반면, 집안 삼실총(三室塚)과 같은 벽화무덤에서는 온몸을 찰갑으로 무장하고 손에 환두대도를 들고 있는 갑주무사가 묘사되어 있는데, 이러한 대도는 벽화에서 행렬의 호위무사나 무덤의 문을 지키는 문지기가 차거나 들고 있어 호위용으로 사용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또한 방패를 들고 있으면서 환두도를 든 경우에는 상대적으로 크게 그려져 있어, 중대형의 소환두대도는 보병이 주로 사용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그림7 | 고구려 대도
- 1. 환인 고력묘자15호묘(陳大爲, 1960) 2. 집안 하활룡20호묘(국립문화재연구소, 2017) 3. 집안 우산하3296호묘(국립문화재연구소, 2017) 4. 평양 병기창유적(김성태, 2007) 5. 초산 운평리4-8호무덤(국립문화재연구소, 2017) 6. 서울 구의동보루(국립문화재연구소, 2017) 7. 서울 홍련봉2보루(국립문화재연구소, 2017)
- 1. 환인 고력묘자15호묘(陳大爲, 1960) 2. 집안 하활룡20호묘(국립문화재연구소, 2017) 3. 집안 우산하3296호묘(국립문화재연구소, 2017) 4. 평양 병기창유적(김성태, 2007) 5. 초산 운평리4-8호무덤(국립문화재연구소, 2017) 6. 서울 구의동보루(국립문화재연구소, 2017) 7. 서울 홍련봉2보루(국립문화재연구소, 2017)
이 밖에 고구려 고분벽화에는 환두도의 둥근 고리에 끈을 매단 경우도 발견되는데, 이는 전투 시 손에서 도가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으로 이해된다.
한편, 무순(撫順) 고이산성(高爾山城)과 한강 유역의 구의동보루를 비롯한 아차산 3·4보루, 홍련봉 1·2보루, 용마산2보루 등에서는 고구려 후기에 해당하는 대도가 출토되었다. 이 중 아차산4보루 출토 대도는 비록 신부와 병부 일부만 남아있었으나, 도 전면에 목질이 있는 것으로 볼 때 목제칼집이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도의 자루는 확인되지 않았으나, 신부 끝부분에 칼집의 끝부분을 감싸던 타원형의 철제초구금구(鞘口金具)가 끼워진 채로 출토되었다. 미세조직에 대한 분석 결과 아차산4보루 출토 대도는 순철을 이용하여 비교적 낮은 온도에서 여러 번 두드려 만든 단조성형으로 제작되었음이 밝혀졌다(張恩晶, 2002). 이 밖에도 구의동보루에서 2점의 대도가 출토되었는데, 모두 고리가 없는 무환두도로 길이가 70cm에 달한다.
(2) 전투용 도끼(鬪斧)
전투용 도끼는 도구로 사용되는 보통의 철제도끼(鐵斧)와 마찬가지로 몸체 측면에 자루를 가로로 착장한 횡공부(橫銎斧)를 말한다. 전투용 도끼를 일컫는 투부(鬪斧)는 중장기병에 대항하기 위한 보병의 무기로 일찍부터 발달하였다. 투부는 기본적으로 타격을 위주로 하는 근접무기로, 철제갑주에 강력한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
고구려에서 도끼가 무기로 사용되었음은 북한의 안악3호분이나 약수리무덤의 고분벽화에서 확인이 가능하며, 환인 오녀산성이나 구의동보루를 비롯한 한강 유역의 아차산보루군에서도 실물자료가 출토된 바 있다. 이들 도끼는 한쪽에만 날이 있는 단인(單刃)의 횡공부와 양쪽에 날이 있는 양인부(兩刃斧)로 구분이 가능한데, 횡공부가 대다수를 차지한다. 이 밖에도 날의 위치나 형태에 따라 상인부(上刃斧)와 월형부(月形斧)도 있다.
그림8 | 안악3호분 벽화에 묘사된 부월수(동북아역사넷)
![]() 1. 동쪽 회랑 동벽 출행도 |
![]() 2. 전실 동벽 벽화 |
안악3호분이나 약수리고분의 행렬도에는 평복 차림의 부월수(斧鉞手)가 전투용 도끼를 메고 행진을 하고 있어서, 전투용 도끼가 무기로서의 기능 외에 의장용 기능을 겸비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3) 창(槍)
장병기를 대표하는 창은 목제자루에 철로 만든 창끝(鐵鉾)과 창끝에 끼우는 물미인 창고달(鐵鐏)을 착장하여 사용한다. 문헌에서는 창을 길이에 따라 기병용 장창인 삭(矟), 보병용 창인 모(矛), 단창인 연(鋋)으로 구분하기도 하지만, 실제 고고자료는 목제자루 없이 철제로 된 창끝과 창고달만 잔존하고 있어 명확한 구분이 불가능하다. 고구려 고분벽화에는 창을 들고 있거나 가지고 전투하는 장면이 많이 묘사되어 있어 창이 고구려의 중요 무기였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창은 안악3호분, 덕흥리고분, 약수리고분 등과 같은 벽화고분에 묘사된 행렬도에서 중장기병의 주요 무기로 사용되고 있음이 확인된다. 그리고 이들 벽화에서 창은 보병과 기병이 모두 소지하고 있어 병종에 상관없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보병이 소지하고 있는 창은 병사들의 키보다 조금 긴 단창(短槍)이고, 기병이 소지하고 있는 창은 길이가 훨씬 더 긴 장창(長槍)이다.

그림9 | 전투용 도끼 각종(국립문화재연구소, 2017)
- 1·7. 환인 오녀산성 2. 서울 용마산2보루 3. 서울 홍련봉2보루 4·6. 구리 아차산4보루 5. 서울 홍련봉1보루
- 1·7. 환인 오녀산성 2. 서울 용마산2보루 3. 서울 홍련봉2보루 4·6. 구리 아차산4보루 5. 서울 홍련봉1보루
한편, 일반적으로 창끝은 소켓 형태의 빈 공간인 공부(銎部)가 있는 투겁창(鉾)과 끼울 수 있는 빈 공간이 없는 모(矛)로 대별된다. 현재 고구려 유적에서 출토되어 실물을 확인할 수 있는 창은 모두 투겁창에 해당한다(주홍규, 2021).
창끝은 형태에 따라 유관직기형(有關直基形), 무관직기형(無關直基形), 유관연미형(有關燕尾形) 등으로 나눌 수 있다. 투겁과 창날 부분을 경계 짓는 관부(關部)의 형성 여부와 함께 끝부분의 형태를 가지고 구분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유관직기형이 연미형에 비해 먼저 출현하고 다수를 차지하고 있으며, 무관직기형은 출토 사례가 많지 않다.
이 밖에도 봉부 형태에 따라 광봉형(廣鋒形)과 협봉형(狹鋒形)으로 나누기도 하는데, 광봉형은 고구려 전기에 주로 출토되고 있을 뿐이며, 중기 이후에는 대체로 협봉형이다. 그리고 봉부의 길이에 따라 장봉(長鋒)과 단봉(短鋒)으로 구분하기도 하나, 단봉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중국 환인 고력묘자19호묘나 북한 자강도 초산군 운평리4-8호무덤, 시중군 풍청리33호무덤 등과 같은 적석총에서는 직기형에 관부가 뚜렷이 형성되어 있는 광봉형 철모(鐵鉾)가 주로 출토되고 있다. 이러한 광봉의 유관직기형 철모가 적석총에서 주로 발견된다는 점에서 고구려 전기에는 창이 찌르는 것 외에 베는 기능도 중시되었음을 짐작해볼 수 있다.

그림10 | 안악3호분 행렬도에 그려진 창병 - 1. 보병(동북아역사넷)

그림10 | 안악3호분 행렬도에 그려진 창병 - 2. 기병(동북아역사넷)
고구려 중기가 되면 연미형 철모가 새롭게 등장하지만 직기형 철모도 여전히 발견된다. 연미형 철모는 집안의 집석공로(集錫公路) 적석총 무덤군에서 발견된 바 있다. 이 시기의 철모는 그 길이가 30cm 전후로, 신부가 좁아져서 단면은 능형을 이루는 협봉형이 주를 이룬다.
한편, 집안 지역 출토 철모 중에는 봉부에 홈이 파여 있는 것도 있는데, 이는 도검류에서 보이는 혈구(血溝)의 기능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병부에 반부(盤附: 고리)가 설치된 것도 발견된다(최종택, 2020).

그림11 | 고구려 창끝(국립문화재연구소, 2017)
- 1·4. 서울 홍련봉2보루 2·8. 구리 시루봉보루 3. 집안 마선구2100호묘 5·9. 서울 구의동보루 6. 집안 우산하3296호묘 7. 시중 풍청리33호무덤 10. 집안 국내성
- 1·4. 서울 홍련봉2보루 2·8. 구리 시루봉보루 3. 집안 마선구2100호묘 5·9. 서울 구의동보루 6. 집안 우산하3296호묘 7. 시중 풍청리33호무덤 10. 집안 국내성

그림12 | 고구려 창고달이(국립문화재연구소, 2017)
- 1. 환인 오녀산성 2. 연천 무등리2보루 3. 연천 호로고루 4. 구리 시루봉보루
- 1. 환인 오녀산성 2. 연천 무등리2보루 3. 연천 호로고루 4. 구리 시루봉보루
철모는 고구려 중장기병의 중요한 무기로, 앞선 시기의 베는 기능까지 겸한 광봉형 철모가 아니라 찌르기 전용의 협봉형 철모로의 변화는 고구려 중기 중장기병의 등장과 궤를 같이한다. 이 시기를 전후하여 견고한 방어구인 철제갑주의 등장에 따라 이에 대응할 수 있는 새로운 무기가 개발된 것인데, 철모의 투겁이 연미형으로 만들어진 것도 일직선으로 된 기존의 직기형에 비해 접지면을 넓힘으로써 찌를 때 전달되는 충격을 분산시켜 자루가 부러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다(김길식, 2005).
한편, 쌍영총 벽화에는 장창을 든 개마무사가 묘사되어 있는데, 창 끝 아래에는 깃발을 달고 창대 끝에는 고달을 부착하였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고분벽화에는 보병과 기병이 모두 창을 소지하고 있는데, 보병의 것에 비해 길이가 길게 묘사된 중장기병의 장창을 삭(矟)으로 보기도 한다. 고분벽화에는 이들 중장기병의 창에 깃발이 걸려있는 경우도 확인된다. 창에 걸린 깃발은 부대를 나타내는 상징 내지는 장식일 수도 있겠으나 접전할 때 깃발로 적을 현혹시키는 등의 효과를 위해 달았을 가능성도 있다. 고구려 중기 이후에 등장하는 투겁 부분에 고리(盤)가 있는 반부철모(盤附鐵鉾)는 고분벽화에 등장하는 것처럼 장창에 깃발을 매달기 위해 개량한 것으로 이해된다.

그림13 | 창을 든 개마무사 - 1. 쌍영총 벽화(조선유적유물도감편찬위원회, 1990)

그림13 | 창을 든 개마무사 - 2. 삼실총 벽화(조선유적유물도감편찬위원회, 1990)
한편, 고구려 후기에도 창은 지속적으로 사용되었다. 무순 고이산성이나 서울 구의동보루를 비롯한 한강 유역의 아차산보루군에서도 다수의 철모가 확인된다. 다만 한강 유역에서는 직기형 철모가 다수인 반면에, 연미형 철모는 소량 확인된다. 이 시기의 철모 역시 찌르는 기능이 강조된 협봉형이다.
(4) 기타
이상에서 다룬 도, 전투용 도끼, 창 외에도 고구려에서는 갈고리창이나 삼지창과 같은 다지창(多枝槍), 그리고 낫(鎌) 등도 무기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 각주 001)
- 각주 002)
- 각주 003)
- 각주 004)
- 각주 0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