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고구려 무기체계의 변천
3. 고구려 무기체계의 변천
고구려는 국가 발전 과정에서 주변국들과 끊임없는 전쟁을 통해 지속적인 무기 개발과 개량이 이루어지면서 무기의 구성체계를 완성하게 된다. 무기체계의 확립과 변화 과정은 군대조직이나 무장 및 전술체계의 변화와 서로 밀접하게 연동될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고고자료가 제한적인 상황에서 고구려 무기의 구성체계를 파악하는 것은 그리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럼에도 당시까지 보고된 유물을 토대로 문헌에 나타난 고구려의 군사조직, 병력동원체계, 전쟁양상 및 군사방어체계의 변화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고구려 무기체계의 변화양상을 5기로 나누어 살펴본 연구가 있다(김길식, 2005). 이 연구에서 제1기(1세기~2세기)는 한대 무기의 영향과 고구려 무기의 성립, 제2기(2세기~3세기 중엽)는 고구려 독자적 무기체계의 형성, 제3기(3세기 후반~4세기 중후엽)는 고구려 무기체계의 확립, 제4기(4세기 중후반~5세기 중엽)는 첨단무기로의 기능 확대, 제5기(5세기 후반~6세기 후반)는 전투양상의 변화에 따른 다양한 무기의 발달로 특징지었다. 그렇지만 고고자료가 거의 없는 고구려 전기를 이처럼 세분하여 살펴볼 수 있을지 의문이고, 고구려와 수·당 전쟁이 있었던 7세기에 대해서는 전혀 다루지 않았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이에 고구려 무기체계의 변화양상은 고구려 토기 내지는 고구려의 국가발전단계와 마찬가지로 대략 300년과 500년경을 기점으로 하여 4세기 이전(전기), 4~5세기(중기), 6세기 이후(후기)의 세 시기로 나누어 변화 과정을 살피는 것이 보다 합리적이다.
1) 고구려 전기
우선 『위략』과 그간의 고고자료를 종합해 보면, 4세기 이전 고구려 전기의 무기체계는 활, 도, 창(모)을 근간으로 한 것으로 이해된다.
이 시기 원거리 공격무기로는 활이 대표적이지만, 실물로 남아있는 것은 없다. 그렇지만 3세기대까지의 여러 상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삼국지』 위서동이전에 고구려에서는 “좋은 활이 생산되는데, 이른바 맥궁(貊弓)이다”라는 기록이 남아있어 참고가 된다. 그리고 활과 세트관계를 이루는 철촉은 적석총과 초기 취락유적에서 다수가 확인된다. 이 시기의 철촉은 대체로 슴베가 있는 유경식으로 촉두가 넓적한 광엽형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이는 아직까지 철제갑주와 같은 견고한 방어구가 본격화되지 않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3세기 이후가 되면 고구려의 대표적인 철촉 형태로 알려진 착두형 철촉이 남파동104호 적석총을 시작으로 등장하며 점차 주류를 차지하게 된다.
이 시기 근거리 공격무기로는 도와 창(모)이 대표적이다. 2~3세기에 해당하는 적석총에는 주로 둥근 고리만 있는 길이 30~40cm가량의 환두대도와 짧은 철제단도, 직기형 철모가 출토되었다. 철제단도와 직기형 철모의 유행은 광엽형 철촉과 마찬가지로 철제갑주와 같은 방어구의 미발달로 근접전에서 베는 기능이 중요시되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문헌에 따르면 고구려 전기에는 병력 동원의 규모가 5,000명에서 1만 명 정도밖에 되지 않았고, 전쟁이 벌어진 지역 역시 환인을 위시한 고구려 도성이나 현도군(玄菟郡), 요동군(遼東郡)과 같은 특정 지역에 국한되어 있었다. 이를 통해 본다면 3세기 중반 이전까지 고구려의 병력은 일부 한정된 계층만 전쟁에 참여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출토유물로 보면, 3세기 중반 이전 고구려의 무장은 활과 창, 도가 중심이었다.
〈표2〉는 2~5세기 고구려의 전쟁 관련 기사 중에서 병종과 병력 규모를 확인할 수 있는 사례를 정리한 것이다. 이를 보면 3세기까지 고구려는 기병을 주로 동원하여 전투를 하였음을 알 수 있다. 물론 고구려 역시 일찍부터 보병도 운영했을 테지만 문헌기록상 3세기까지도 그 전술적인 비중이 그리 높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에는 활을 쏘는 기병이 중심이 되었을 가능성이 큰데, 이는 환인 고력묘자 15호묘, 19호묘나 자강도 법동리 하구비무덤, 서해리2-1호무덤, 집안 만보정242-1호묘 등의 여러 적석총에서 재갈 등의 마구가 출토되고 있는 것을 통해서도 짐작이 가능하다. 다만 이들 유적에서 철제 등자나 마갑 등이 확인되지 않는 것으로 볼 때 이 시기 고구려에서는 아직까지 중장기병은 출현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표2 | 2~5세기 고구려의 병력 규모와 병종 구성(李廷斌, 2010)
| 연도 | 병력 규모 | 주요 내용 | 전거 |
| 121년(태조왕 69) | 마한·선비 1만 기 | 현도성(玄免城) 공격 | 『후한서』 |
| 172년(신대왕 8) | 수천 기 | 한군(漢軍) 추격[좌원(坐原)] | 『삼국사기』 |
| 246년(동천왕 20) | 보기(步騎) 2만(정기 5,000) | 위군(魏軍) 방어[비류수(沸流水)] | 『삼국지』, 『삼국사기』 |
| 259년(중천왕 12) | 정기(精騎) 5,000 | 위군 방어[양맥곡(梁貊谷)] | 『삼국사기』 |
| 293년(봉상왕 2) | 기병(騎兵) 500 | 모용괴(慕容鬼) 요격[곡림(鵠林)] | 『삼국사기』 |
| 393년(광개토왕 3) | 보기 50,000 | 백제 방어 | 『삼국사기』 |
| 400년(광개토왕 10) | 보기 50,000 | 신라 구원 | 〈광개토왕릉비〉 |
| 407년(광개토왕 17) | 보기 50,000 | 후연(後燕) 공격 | 〈광개토왕릉비〉 |
| 436년(장수왕 24) | 보기 20,000 | 북연왕(北燕王) 구출 | 『위서』 |
2) 고구려 중기
고구려 중기인 4~5세기대에는 그 이전 시기에 존재하였던 활, 도, 창의 기본 무기류는 그대로 유지되면서 도끼류가 새롭게 등장한다.
이 시기 원거리 무기인 활의 경우, 평양역전 이실분에서 출토된 활부속구와 고분벽화에 묘사된 활을 통해 볼 때 길이가 짧은 단궁이 기본이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철촉의 경우에는 그 이전 시기보다 슴베가 길어지는 세장한 형태가 등장하는 것이 특징이다. 광엽형 철촉은 더이상 보이지 않으며, 삼익형, 착두형, 유엽형, 능형 등의 철촉이 일반화된다.
또한 이 시기에는 고구려에 중장기병의 등장과 함께 기병용 장창인 삭(鎙)이 유행한다. 그 이전 시기에는 직기형 철모가 중심이었으나, 신부가 좁아지고 단면은 능형으로 찌르기 전용의 협봉형 철모로 변화하면서, 철제갑주에 대응하기 위한 연미형 철모가 새롭게 출현한다. 그리고 고분벽화에서 다수 확인되는 깃발을 매달기 위해 투겁창에 고리가 달린 반부철모 역시 이 시기에 새로 등장한다.
전투용 도끼 역시 안악3호분이나 덕흥리벽화무덤, 약수리벽화무덤 등에서 부월수가 묘사되어 있는 것을 볼 때 고구려 중기에 새롭게 등장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들 전토용 도끼는 농공구로 사용된 도끼와 달리 몸통에 옆으로 구멍을 뚫어 자루를 끼워 사용하는 횡공부로, 철제찰갑에 타격을 입힐 수 있다는 점에서 보병의 중요 무기로 활용되었다고 추정된다. 이들 도끼는 행렬도와 같은 고분벽화에 등장하고 있는 것을 볼 때 실전뿐만 아니라 의전에서도 주요하게 다루어졌던 것으로 이해된다.
한편, 고구려 중기에는 등자의 출현과 함께 방어용 무기인 갑주 사용이 본격화되었는데, 특히 기병전에 적합한 찰갑이 기본이 되었다. 이들 찰갑은 가죽으로 된 것도 있었다고 추정되나, 주로 작은 철제찰편으로 이루어진 철제갑옷이 주를 이루었다. 활동성이 강조된 고구려의 찰갑은 본래 기마용 갑옷으로 등장했다고 여겨진다. 고분벽화에서 보병은 상반신 갑옷을, 기병은 경갑을 갖추고, 소매가 손목까지 오는 상반신 갑옷에 발등까지 내려오는 긴 갑옷바지를 입고 있다. 이 시기의 투구는 종장판주 내지는 소찰주가 기본이었으며, 고분벽화에서는 깃털이나 뿔로 장식한 투구도 확인된다.
한편, 당시 고구려의 고분벽화에서는 갑옷으로 중무장한 장수들이 다리를 제외한 온몸에 갑옷을 입힌 개마(鎧馬)를 타고 있는 모습이 확인된다. 문헌에서는 동천왕 대부터 철기(鐵騎)와 관련된 기록이 확인되고 있다. 마갑주와 관련한 유물은 4~5세기대로 편년되는 집안 지역 초대형 적석총에서 일부 출토되고 있어서 실제로 개마무사가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들 갑주무사의 생생한 모습은 삼실총의 공성(攻城)하는 전투장면에서도 확인이 가능하다. 이 밖에도 삼실총 서벽에 그려진 갑주무사의 경우에는 못이 달린 신발을 신고 있는데, 전투용 신발인 철정리(鐵釘履)는 집안 환도산성(丸都山城)에서 실제로 출토된 바 있다.
이처럼 병력의 동원 규모가 5만 명으로 그 이전 시기에 비해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고구려 중기에는 전투양상 또한 그 이전처럼 도성이나 중원의 세력과 맞닿아 있는 경계 지역이 아니라 도성으로 향하는 주요 교통로에 있는 산성과 그 주변 지역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무기체계 역시 중장기병 전투에 적합한 형태로 변화하였던 것으로 이해된다.
안악3호분이나 덕흥리고분, 약수리고분 등과 같이 4세기 후반에서 5세기 전반에 해당하는 벽화고분의 행렬도에는 행렬의 좌우에 기병이 배치되고, 그 안에 보병이 열을 짓고 있으며, 보병의 수가 기병보다 많게 묘사되어 있다. 이러한 행렬도의 대형을 그대로 전투 시의 상황으로 치환하면 기병과 보병의 합동작전으로 전투를 수행하였음을 짐작해볼 수 있다. 즉 장창 밀집대형을 갖춘 중장기병이 일차적으로 돌진하여 치명타를 가하여 적진을 교란한 다음 보병이 진격하여 접전을 벌이는 형태의 전투가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있다. 병력의 수는 보병이 많았더라도 전투의 주력은 기병이었을 것이다. 이는 벽화의 전투장면에 중장기병의 전투장면이 주로 묘사되어 있다는 점에서 확인이 가능하다. 당시 동아시아에서 고구려의 군사적 우위가 유지될 수 있었던 기반은 무장한 중장기병에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김길식, 2005).
4~5세기 단계에 갑주로 무장한 중장기병을 핵심으로 갑주로 무장한 보병을 배합한 고구려군은 활, 창, 도끼, 도, 쇠뇌 등을 사용하는 병사들로 구성되었다. 고구려 고분벽화에 그려진 무기 중 창이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어 장창기병(長槍騎兵)의 수가 다른 병종에 비해 많았을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쇠뇌를 제외한 병력을 제외하면 일반 보병은 무기별로 비슷한 비율로 구성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李仁哲, 1996).
4세기 이후 한반도 중서부에서는 환두도의 환두부가 없어지고 손잡이 부분을 실용적인 나무손잡이로 만든 ‘목병철도(木柄鐵刀)’가 보급되면서 보편적인 개인 무기로 보급되는 반면에, 환두도는 손잡이 부분을 금은 등으로 장식한 장식대도로 변화하면서 오히려 신분을 상징하는 위세품의 성격이 강해지는 방향으로 기능적 분화가 일어난다. 이는 고구려와는 차이를 보이는 부분이다. 그렇지만 철모의 경우에는 신부의 길이가 짧아지면서 두께는 두꺼워지고, 신부와 공부 사이의 경계 역할을 하였던 관부가 점차 사라져 이른바 무관연미형 철모가 등장하여 사용된다. 이 철모는 베는 기능은 거의 없는 대신 찌르는 기능이 극대화된 것으로서, 철제갑주 등의 방어구가 발달한 것과 관련이 깊다. 결국 장병기인 철모는 찌르는 기능으로, 단병기인 철도는 근접전에서 베는 기능으로 극대화되는 모습을 보이게 된다. 이러한 무기 형태의 변화는 무기체계의 변화는 물론이고 당시 전투양상의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무기는 고대국가 사이의 빈번한 전쟁을 수행하는 데 적합하게 변화하기 마련이다. 철촉 또한 이에 맞추어 유경식의 경부가 길어져 비행거리가 늘어나고 살상력이 높아지는 방향으로 발달하게 된다(성정용, 2019).
3) 고구려 후기
고구려 후기가 되면 그 이전 시기의 무기체계를 여전히 유지하면서도 관방유적에서의 전투를 위한 무기체제가 더욱 발전해가는 것으로 이해된다. 고구려 중기에는 중장기병의 발전이 두드러졌던 것에 비해, 6세기 중반 이후에는 중국 쇠뇌의 발전으로 중장기병의 효용이 점차 쇠퇴하게 되었다. 이에 고구려에서도 중장기병 중심의 기존 전술을 수정하고 관방유적을 활용한 전술에 보다 초점을 맞추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하여 고구려 후기에는 원거리 무기로 기병용 단궁 외에 성곽 등에서 활용하기 적합한 보병용 장궁을 많이 사용한 것으로 이해된다. 구의동보루로 대표되는 이 시기의 철촉은 길이가 23~25cm 달하는 세장경촉으로 장궁에 이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이 시기에는 보통의 활보다 사정거리가 길고 파괴력도 강한 쇠뇌가 본격적으로 사용되었다. 쇠뇌는 장궁과 함께 주로 보병의 무기로, 기병들이 보유한 단궁의 사정거리 밖에서 기병들을 제압하여 무력화시킬 수 있다는 장점을 지닌다. 특히 6세기 말 고구려가 수에 첩자를 파견해 쇠뇌 기술자를 빼낸 사건은 이러한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준다고 하겠다.
고구려 후기의 단거리 무기체계는 중기 이후에 확립된 도, 전투용 도끼, 창이 그대로 유지된 것으로 판단된다. 다만 부월수로 대표되는 전투용 도끼가 남한 지역의 관방유적을 비롯하여 여러 관방유적에서 다수 출토되고 있어, 이 시기에 보병의 주 무기로 적극 활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전투용 도끼는 강력한 타격으로 철제갑옷에 치명상을 입힐 수 있는 무기로 근접전이나 공성을 방어하는 데 매우 효과적이다. 문헌기록에는 월(鉞)이 실전 외에 의장에도 많이 사용되고 있어 군사의례용으로도 많이 사용되었다고 보인다.
창의 경우에는 남한 지역의 관방유적을 중심으로 연미형 철모 외에 폭이 좁고 단면이 두꺼운 직기형 철모도 다수 출토되고 있어, 세장형의 화살촉과 마찬가지로 창에서도 철제갑옷에 타격을 줄 수 있도록 찌르는 기능이 극대화된 것으로 이해된다. 이 시기에는 갈고리창과 다지창 등이 새롭게 등장하는 등 장병기가 다양화되는 양상도 보인다.
이와 관련하여 동 시기 다른 여러 나라와의 무기체계를 비교하여 6세기 중반 이후 고구려에서는 장병기의 분화가 두드러지고 있음을 지적한 연구가 있다(이정빈, 2010). 문헌기록에는 대부분의 나라에서 모(矛)만 발견되고 있는데, 고구려에서는 장병기인 창이 극(戟)·삭(削)·모로 분화되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장병기의 분화는 4세기 이후 중장기병의 출현 결과로도 볼 수 있으나, 이들 장병기는 보병의 주력 무기이기도 하다. 6세기 중반 이후 쇠뇌의 본격적인 보급과 함께 비슷한 시기에 고구려의 활 역시 파괴력이 증가되고 사정거리가 확장된 장궁이 개발되어 널리 보급되었다는 점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즉, 6세기 중반 이후 쇠뇌와 아울러 장궁이 개발되고 보급되었다는 것은 보병의 수적 증가만이 아니라 전투에서의 전술적 비중도 높아진 변화를 반영한다고 봐야 한다는 것이다.
6세기 말에서 7세기 초에 고구려와 전쟁을 치르었던 수는 북주(北周)의 군제를 계승하는 과정에서 중장기병을 그대로 활용하여 기병의 주력으로 삼았다. 그렇기 때문에 고구려로서는 수의 중장기병에 대해서도 대비해야만 했다. 심양 석대자산성에서 출토된 두꺼운 화살촉은 수군의 갑주를 뚫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관통 상처를 크게 내어 보다 치명적인 상처를 내기 위해서라고 여겨지는데, 그 대상 가운데 하나가 바로 중장기병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수의 중장기병에 대비하기 위해 우수한 쇠뇌 도입은 필수였던 것으로 이해된다(정동민, 2020).
고구려와 수의 대대적인 전쟁에서 쇠뇌가 대거 활용되고 부각됨에 따라, 이후 중장기병을 활용한 전술이 쇠퇴하였을 것이고, 이는 보병의 비중을 늘리는 결과를 가져왔을 것이다. 결국 이러한 변화는 쇠뇌와 장궁을 비롯하여 관방유적 방어를 기본으로 하는 전술의 채택으로 이어졌을 가능성이 있다.
물론 그렇다 하더라도 이 시기에는 여전히 방어용 갑주가 꾸준히 이용되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보장왕 4년(645년)에 당이 고구려 안시성을 공략하던 중 고연수와 고혜진이 군사 3만 6,800명을 거느리고 항복을 청하는 기록이 있는데, 당시 고구려군에게 획득한 말이 5만 필, 소가 5만 두, 명광개(明光鎧) 1만 벌 등이었다고 한다. 명광개는 표면에 황칠을 하여 햇빛에 빛나도록 만든 화려한 갑옷을 지칭하는 것으로, 당시 고구려군이 위압적인 광채를 발하는 갑주를 착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밖에도 문헌에는 고구려 후기에 기존의 무기체계에 더하여 포차(抛車)와 같은 공성무기도 사용하고 있음이 기록되어 있으나, 실제 출토유물에서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