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고구려 마구의 변천과 그 의미
4. 고구려 마구의 변천과 그 의미
1) 마구의 변천
고구려에서 기승마구는 주로 4세기 이후의 고분과 성곽 유적에서 출토되지만, 이른 시기 적석총에서 재갈쇠, 차축이나 차축두, 차할이 부장되기 시작하여서 차마구가 먼저 등장했다고 볼수 있다. 현재 확인되는 가장 이른 마구는 환인 망강루1호 적석총에서 출토된 재갈쇠 한 쪽 편이고, 망강루4호 적석총에서는 철제차축두가 출토되어 일찍부터 말이 끄는 수레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마구 구성품이 고르게 출토되지 않고 시간에 따른 변화를 보여줄 만큼 다양하지 않지만, 무덤의 구조와 공반되는 유물 등을 결부시켜 볼 때 4~5세기의 고분에 부장된 등자나 운주, 행엽은 여러 형태가 있어서 시간에 따른 변화를 추적해볼 수 있다.
등자는 기승마구의 지표가 되는 마구의 하나로, 고구려에서 가장 이른 등자는 칠성산1096호분에서 출토된 것이다. 이 고분에서는 재갈과 금동제 등자와 안교, 그리고 행엽과 띠연결고정구 등이 출토되어서 기승마구 일습이 부장되었음을 보여주는데, 이와 유사한 부장 양상은 만보정1078호분에서도 확인된다. 보고된 내용에 의하면, 만보정1078호분에서는 기승마구가 두 세트분 부장되었고, 그중 한 세트는 투조장식이 된 것이다.
칠성산1096호분과 만보정1078호분은 부장유물에 따라 선후관계가 인정되는 무덤으로, 두 무덤에 부장된 등자는 모두 나무로 형태를 만들고 금동판이나 철판을 덧댄 목심등자이다. 칠성산1096호분 등자는 윤부 형태가 하트형에 가깝고 발 딛는 부분에 못이 없지만, 만보정1078호분 등자의 윤부는 가로가 긴 원형에 가깝고, 발 딛는 부분에 못이 박혀 있어서 칠성산1096호분의 등자보다 기능적으로 발전된 형태이다. 등자의 이러한 변화를 고려해볼 때 장천4호분의 등자는 목심에 금동판을 덧댄 것으로 가로가 긴 원형 윤부이지만, 발 딛는 부분에 못이 없어서 칠성산1096호분과 만보정1078호분 사이에 위치한다. 한편, 자루가 짧고 발 딛는 부분이 넓어졌지만 두 가닥으로 갈라진 철제 등자는 등자의 기능적 향상을 고려해볼 때 가장 늦은 형태로 주로 성곽 유적에서 출토된다.

그림16 | 고구려 마구의 변천
고구려의 행엽은 심엽형이라는 점에서 공통되며, 심엽형 내부의 무늬에 따라 무늬가 없는 것과 있는 것으로 나눌 수 있다. 칠성산1096호분의 행엽은 무늬가 없고, 만보정1078호분의 행엽은 내부에 十구획이 있는 것과 투조무늬판을 덧댄 것 두 형태가 공존한다. 따라서 무늬가 없는 것이 있는 것보다 앞서 등장하였고, 내부에 十자 구획이나 투조무늬는 동시에 함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덧판에 점각으로 十자를 만든 장천4호분의 행엽이나 무늬를 투조한 것이 있는 태왕릉의 행엽이 칠성산1096호분이나 만보정1078호분 행엽 사이에 위치할 것이다.
운주도 4세기에 들어 부장되기 시작하여 기승마구와 함께 출현한 것으로 보인다. 운주는 입식이 없는 것이 앞서고, 장식판은 꽃잎이 있는 것과 반구형이 공존하다가 차츰 반구형에 입식이 있는 것으로 변화한다. 동시에 영락이 달리는 가짓수도 하나에서 여러 개로 변하여 장식성이 강조된다. 대개 5세기 이후의 무덤에서는 입식이 있는 반구형 운주가 유행하였다.
이와 같이 시간에 따른 마구의 변화를 정리해보면, 고구려에서 마구는 세 단계의 변화를 겪는다.
1단계는 차마구가 중심이 되는 3세기까지의 기간으로, 아직 기승마구는 확인되지 않는다. 1세기를 즈음하여 조성된 환인 망강루 1호 적석총의 재갈쇠와 4호 적석총의 차축두, 그리고 출토위치를 알 수 없는 재갈멈치 등으로 미루어 일찍부터 차마구 부장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분에서 출토되는 차축두나 차축 혹은 재갈 등의 차마구는 주검이 저승으로 나아가는 이동수단으로서 차마구를 상징하는 것으로, 이는 중국 중원 왕조뿐 아니라 북방민족에서 공통된 사후관념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차할은 2세기경에 조성된 초대형 적석총인 마선구626호분에서 출토되었고, 3세기 말경으로 비정되는 임강총이나 우산하2110호 적석총에서 매우 유사한 형태의 사람얼굴형상 청동차할이 출토되었다. 차축두는 부여족의 무덤으로 보고 있는 노하심 중층 목곽묘에서도 출토된 바 있고, 부여의 왕족이나 귀족의 무덤으로 보고 있는 길림시 모아산 목곽묘에서 출토된 사람얼굴형상 청동차할은 임강총이나 우산하2110호분과 유사하여 고구려 차마구 등장을 부여와 관련지어 생각해볼 수 있다.
차마구와 함께 출토되는 철제재갈은 고리 2개를 이어 만든 이련식 재갈쇠와 고삐이음쇠로 구성된 것으로, 재갈멈치는 만보정242-1호분과 고력묘자고분에서 출토된 것이 전하지만 대개는 남아있지 않다. 노하심 중충유적의 목곽묘에서 녹각이나 뿔로 만든 재갈멈치가 출토된 바 있어서 고구려에서도 나무나 뿔 등의 유기질로 재갈멈치를 만들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2단계는 기승마구가 출현하여 크게 확산된 4~5세기로, 재갈뿐 아니라 안교와 등자, 말띠를 꾸미는 운주, 행엽, 띠연결고정금구 등이 주로 무덤에 부장된다. 또, 철제 갑옷과 투구와 함께 마갑주 등이 등장하므로 고구려에서 기승마구의 출현은 중장기병과 함께 한다고 할 수 있다. 이 단계는 금속제 기승마구가 출현하여 무덤에 부장되기 시작하는 4세기와 장식성이 강조되며 그 수가 늘어나는 5세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고구려에서 기승마구의 출현에는 중국 동북지역 모용선비의 영향이 있었을 것이다. 금속제 기승마구의 부장은 모용선비 무덤의 커다란 특징으로, 4세기 전연과의 전쟁이 계기가 되어서 고구려에서도 기승마구가 출현하였을 것이다. 4세기 중엽으로 비정되는 칠성산1096호분에 부장된 경판비와 안교, 등자, 행엽과 띠연결고정구는 중국 조양의 전연 시기에 조성된 무덤에서 출토된 것과 형태적으로 유사하다. 경판비는 조양 요이영자9001호분과 원대자벽화분, 안교와 등자는 조양 12대전창88M1호분, 안양 효민둔154호무덤에서 출토된 것과 형태적으로 유사하여 고구려의 기승마구는 중장기병과 함께 전연으로부터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아마도 차마구를 대신하여 기승마구가 저승으로 인도하는 이동수단으로서 부장되었을 것이다.
4세기 말을 거쳐 5세기에 들어서면 기승마구는 고구려식으로 변용되고 기능이 향상되는 등 발전이 있었다. 장식성이 최고에 달한 기승마구는 태왕릉에서 출토된 등자와 행엽 그리고 띠연결고정금구라고 할 수 있다. 동시에 기승마구의 복수부장이 행해지기도 한다. 만보정1078호분에는 2세트의 기승마구가 부장되었는데, 한 세트는 투조장식이 없지만, 다른 한 세트는 투조장식이 있는 것이다. 장식성이 부가된 기승마구의 부장은 5세기 후엽의 우산하1041호분에서도 관찰된다. 따라서 이 단계의 기승마구는 재질과 수와 장식에서 피장자의 사회적 신분을 과시하는 상징적 위세품인 한편, 차마구를 대신하여 피장자를 저승으로 나아가게 하는 이동수단으로 부장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개마총 벽화의 묘주 뒤를 따르는 장식된 말이 그러한 관념이 잘 보여준다.
3단계는 고분에서 마구의 부장은 확인되지 않고, 주로 성곽을 포함한 생활유적에서 차마구와 함께 기승마구가 출토된다. 6세기 이후의 유적에서 출토된 기승마구나 차마구는 철로 만든 것이어서 2단계에서 보이는 재질과 장식에서 신분을 과시하였던 위신재로서 상징적 기능도 사라졌다고 할 수 있다. 오히려 실생활에 사용된 생활마구로서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성곽 등 생활유적에서는 판비보다는 표비가 다수를 점하며, 등자는 고분에 부장된 등자와 달리 자루가 짧거나 없으며, 윤부도 타원형보다 말각방형에 가까운 형태이다. 따라서 이동과 운송 수단으로서 기승마구와 차마구가 계속 사용되었을 것이다. 6세기 이후 벽화분이 생활풍속과 관련된 제재가 사라지는 대신 무덤을 지키는 방위신이자 수호신으로 사신을 주 제재로 하고 있음을 감안해볼 때, 차마구나 기승마구의 부장이 사라진 것도 죽음을 바라보는 관념의 변화와 관련 있을 것이다.
2) 고구려 마구의 확산과 그 의미
고구려에서 마구는 차마구로서 무덤에 부장되었고, 차마구의 부장은 장송관념의 표현이었다. 이러한 관념은 일찍부터 중국과 북방초원지대에서 관찰되며, 그 가운데 부여의 유적에서 출토된 것과 유사한 양상을 보여서 고구려에서 차마구 부장에 대한 장송관념은 부여와 관련지어 생각해볼 수 있다.
4세기가 되면 차마구 부장이 줄어들면서 금속제 기승마구의 부장이 크게 유행한다. 동시에 철제 갑옷과 투구 그리고 말 갑옷과 투구가 함께 부장되면서 무사와 말이 갑옷으로 중무장한 기병의 모습을 보여준다. 특히 금속제 기승마구와 갑옷은 철로 만든 것이 다수이지만, 일부 무덤에서는 금동으로 만들거나 형태나 무늬 등 장식성이 강조되면서 기승마구의 부장은 장송관념의 표현이자 피장자의 사회적 지위를 표현한 위세품으로서 역할을 한다. 이러한 경향은 5세기까지 지속되었다.
고구려의 기승마구와 유사한 양상이 영남 각 지역에서도 확인된다. 영남 지역에서 기승마구는 경주 월성로, 부산 복천동, 김해 대성동 등 4세기대 고분에서 판비와 등자, 행엽 등이 확인되기 시작한다. 그중 경주 월성로가-13호분의 재갈은 판형 재갈멈치를 가진 판비인데, 고구려의 칠성산1096호분 재갈멈치와 같은 형태로, 신라의 기승마구에 고구려의 영향이 있었음을 잘 보여준다(이희준, 1996). 마찬가지로 부산 복천동과 김해 대성동, 경주 황남동, 황오동의 목곽무덤이나 적석목곽무덤에서 목심등자가 출토되었다. 초창기의 등자는 전면에 철판을 덧대거나 자루와 윤부가 만나는 부분 등에 일부 철판을 덧댄 것으로, 중국 동북지역 전연대 무덤에 부장된 것과 유사하고, 일부는 고구려 무덤에 부장된 것과도 형태적으로 유사하다. 행엽이나 운주, 띠고정연결구의 형태도 고구려 기승마구와 특징을 같이한다(강현숙, 2012).
이렇듯 영남 지역에서 4세기 이후 출현하는 금속제 기승마구가 고구려의 것과 서로 형태가 유사한 것은 고구려가 신라, 가야로의 마구 확산에 영향을 미쳤음을 시사한다. 영남 지역으로 기승마구가 확산되는 주요 계기는 〈광개토왕릉비〉를 통해 유추할 수 있다. 400년에 고구려의 보병과 기병 5만 명이 신라를 도와서 가야와 왜를 쫓아냈다는 내용으로 미루어 광개토왕 군대의 남정(南征)이 중장기병과 함께 금속제 기승마구 확산의 배경이 되었을 것이다.
5세기 이후가 되면서 신라와 가야 각 정치체에서 높고 큰 분구를 가진 무덤을 조성하고 다량의 부장품을 부장하는데, 그 가운데 금, 금동, 은으로 장식한 장식성이 강조된 기승마구의 부장이 두드러진다(강현숙, 2012). 신라에서 가장 이른 고총인 경주 황남대총 남분에서 출토된 등자는 고구려 만보정1078호분 등자와 형태적으로 유사하며, 황남대총 북분에 부장된 등자는 칠성산1096호분과 태왕릉에서 출토된 등자와 유사하지만, 비교적 늦은 단계로 비정되는 천마총에는 청동제, 철제 등 여러 점의 등자가 부장된다. 그 가운데 황남대총 남분 등자와 유사한 것도 있고, 철제등자는 발 딛는 부분이 두 갈래로 나뉘어 기능적으로 고려된 등자도 있어 고구려 등자와 차이를 보이기도 한다. 한편, 행엽이나 띠연결고정구 중에는 옥충이나 야광패 등의 재료를 사용하여 화려함을 더하는 등 신라식으로 변용이 일어났고, 특히 편원어미형의 행엽은 신라식 행엽이 되어서 신라의 영역 확대에 따라 영남 각지로 확산되기도 하였다. 가야 지역에서도 5세기 후반이 되면서 가야식으로 변용이 일어나는데, 검능형(劍稜形) 행엽이 대표적이다.
금속제 기승마구의 부장은 북방 선비족의 한 갈래인 모용선비가 세운 전연의 무덤에서 두드러지고, 전연과의 관계 속에서 기승마구가 고구려에 유입되었다. 고구려의 기승마구는 재질과 형태에서 장식성이 강조되어 피장자의 사회적 지위를 과시하는 위세품으로서 역할을 하였다. 신라, 가야에서도 비슷한 과정을 겪으며 기승마구가 확산되면서 금속제 기승마구가 재질과 장식성에서 피장자의 정치·사회적 지위를 과시하는 위세품으로서 고분에 부장되었다. 4~5세기의 고구려 고분에 기승마구가 부장되듯이, 고구려의 영향을 받은 신라와 가야의 기승마구도 중장기병과 함께 고분에 부장되었다. 그리고 기승마구는 중장기병과 함께 영남 각지로 확산되었고, 일본에도 영향을 미쳐서 일본 전방후원분의 중요한 부장품이 되었다.
4~6세기 걸쳐 고구려를 포함한 동북아시아 여러 나라의 크고 높은 무덤에서 금속제 기승마구 부장이 갖는 의미는 두 가지로 설명된다. 하나는 피장자가 저승으로 가는 데 필요한 이동수단의 의미로서 장송관념의 표현이며, 다른 하나는 중장기병과 관련하여 피장자의 정치·사회적 신분을 과시하는 위세품으로서의 상징적 표현이다. 위세품의 하나로 재질과 형태에서 장식성이 강조된 장식마구는 5세기가 되면 무덤의 높고 큰 규모, 나라마다의 특징적 구조와 함께 삼국의 독자적인 기마문화를 형성하게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