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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통사

1. 생업도구

1. 생업도구

1) 농구
고구려의 철제농구는 보습, 一자형쇠날·U자형쇠날·괭이 등의 갈이농구, 쇠스랑과 같은 삶기농구, 철서와 같은 김매기농구, 그리고 낫과 같은 걷이농구로 구성되어 있다. 고구려에서는 갈이–삶기–김매기–걷이 작업이 일관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갈이농사에 쟁기가 이용되고, 흙을 부수는 작업에 쇠스랑을 이용하는 농작업은 고구려 지역에서 널리 확인되며, 이러한 전통은 조선 후기 김홍도의 풍속화에서도 확인된다(국립중앙박물관 외, 1995).
 
(1) 괭이
괭이는 일반적으로 땅을 일구고 파는 데 사용하는 농구로서 주조괭이, 단조괭이, 철곽(鐵钁)이라고도 한다. 주조괭이는 기원전 3세기~기원전 2세기경부터 나타나는데, 기원 전후 단조괭이가 보급되면서 거의 자취를 감추게 된다. 주조괭이는 연나라 철기의 영향을 받은 연화보–세죽리 철기문화(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 편, 1977)의 농구로서 주조로 만든 구멍자루괭이, 원시호미(長柄鋤), 낫 등과 함께 출토되었다. 대표적인 유적으로는 영변 세죽리와 위원 용연동 유적이 있다. 그러나 이들 연계 철제농구는 고구려가 국가를 건설하기 이전 단계인 원고구려 지역에서 출토되었다는 데 의미를 가지고 있다. 기원전 1세기 무렵부터는 고구려 지역에서 한의 철기문화와 관련되는 단조괭이가 사용되기 시작하다가 이후 널리 보급된다. 단조괭이는 무순 고이산성(高爾山城), 환인 오녀산성(五女山城), 구리 아차산4보루 등의 관방유적뿐만 아니라 미창구(米倉溝)장군묘, 집안 산성하(山城下)M191호묘, 동대파(東大坡)M356호묘, 하활룡촌(下活龍村)M8호 적석총, 태왕릉, 초산 운평리8호 적석총, 시중 풍청리33호 적석총 등의 무덤에서도 출토되었다. 주로 산성과 무덤 유적에서 집중적으로 출토되고 있다.
그림1 | 고구려의 괭이
- 1·2. 구리 아차산4보루 3. 환인 미창구장군묘 4. 집안 환도산성 5·6. 환인 오녀산성
단조괭이는 ㄱ자형의 나무자루에 끼워 괭이, 호미, 자귀의 용도로 사용하였으며, 크기 13cm 이상은 괭이로, 그 이하는 자귀로 사용하였다. 실례로 창녕 교동3호분에서는 ㄱ자 형태로 구부러진 쇠자루에 고정시킨 철부가 출토되어 자귀로 사용되었다고 추정한다. 작은 것은 호미와 같이 김을 매거나 자귀로서 목기를 제작하는 공구였고, 큰 것은 괭이로 이용되어 경작지를 갈았을 것이다(김재홍, 2001). 주목되는 사실은 기원 이후에 고구려에서는 주조괭이가 사용되지 않고 단조괭이만 사용된다는 것이다. 이는 백제·신라·가야 지역에서 단조괭이와 주조괭이가 모두 사용되는 것과는 차이를 보이고 있다.
 
(2) 一자형쇠날
一자형쇠날은 평면형태가 ‘一’자형의 쇠날을 가진 농구로서 나무자루의 착장방법에 따라 삽, 괭이 등으로 사용되었다. U자형쇠날이 나무삽의 날 부분 전체를 감싸는 농구라면, 이것은 경작면에 접촉하는 나무삽의 일정 부분만 철기를 사용하고 있다. 시기적으로 U자형쇠날에 앞서 사용되었으며, 곧 U자형쇠날로 대체되었다. 一자형쇠날은 그 길이와 너비의 비율에 따라 두 형식으로 분류할 수 있다. Ⅰ식은 세장방형으로 길이보다 너비가 넓은 형태이며 환인 오녀산성(그림2-1)과 집안 유가촌(劉家村)에서 출토되었고, Ⅱ식은 정방형으로 길이와 너비가 거의 같은 규격이며 집안 유가촌(그림2-2)의 것이 있다.
그림2 | 고구려의 一자형쇠날
- 1. 환인 오녀산성 2. 집안 유가촌
한의 一자형쇠날과 그 형태가 유사한 것으로 보아 한 철제농구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며, U자형쇠날에 앞서 3세기 이전에 주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이것이 발견된 무순 고이산성, 환인 오녀산성, 집안 유가촌 등의 지역은 모두 압록강 이북 지역이다. 이로 보아 一자형쇠날은 고구려 초기에 한대 철기의 영향으로 짧은 기간에 사용되었다가 소멸한 것으로 판단된다. 실제로 오녀산성 출토품은 3기문화층에서 한 시기에 해당하는 유물과 함께 발견된 바 있다.
 
(3) U자형쇠날
U자형쇠날은 평면형태가 U·凹자형의 쇠날을 가진 농구로서 나무자루의 착장방법에 따라 따비, 삽, 가래, 화가래로 사용되었다. 고구려의 U자형쇠날은 남부 지역에 비해 凹자형이며, 고구려적인 특징으로 볼 수 있다. 이것은 날과 자루가 평행하게 연결되어 요즈음의 삽날, 따비날, 가래날로 사용하기도 하고, 날과 자루가 직각으로 연결되어 화가래와 같이 땅을 파는 기능을 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화가래의 기능보다 따비나 가래의 역할을 주로 하였다고 추정된다.
이 유물은 무순 고이산성, 단동 호산산성(虎山山城), 집안 동대자(東台子)유적, 동대자 부근의 고묘, 교구(郊區) 승리유적(勝利遺蹟), 중강 토성리, 서울 구의동보루, 몽촌토성 88-2호주거지, 구리 아차산4보루, 시루봉보루, 청원 남성골유적 등의 고구려 유적에서 출토되었다. 몽촌토성 88-2호주거지는 성벽 정상부에 있는데 방어와 관련된 시설로 보이며, 고구려 토기가 출토된 것으로 보아 고구려의 생활유구로 추정된다. U자형쇠날은 낙랑 지역에 해당하는 운성리토성, 운성리 가말뫼2호목곽묘, 양동리5호전실묘에서도 출토되고 남부 지역에서는 3세기경 목곽묘 단계에서부터 나타난다. 양동리5호에서 출토된 U자형쇠날은 고구려의 전형적인 것과 동일한 凹자형으로 이 지형에 맞는 농구로 추정된다.
U자형쇠날은 그 형태에 따라 몇 가지로 형식을 분류할 수 있다. 먼저 날이 벌어지는 각도에 따라 U자형의Ⅰ식과 끝이 V자형의 Ⅱ식으로 나눌 수 있고, Ⅰ식은 다시 쇠날의 길이와 너비의 비율에 따라 너비보다 길이가 짧은Ⅰ-a식과 너비보다 길이가 긴Ⅰ-b식으로 나눌 수 있다. Ⅰ-a식은 집안 동대자건축유적과 승리유적(그림3-8)에서 발견되었는데, 사천성 홍가포(洪家包)와 안휘성 흑니(黑泥)에서 출토된 한대의 철삽과 유사한 형태이다(陳文華 편저, 1994). 이것은 一자형쇠날에서 발전하여 위로 날이 연장된 것으로 고구려식 U자형쇠날로 정착하기 이전 단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선비족과 관련이 있는 유적인 요령성 라마동(喇嘛洞)M209호(遼寧省文物考古硏究所 외, 2004)에서 출토된 U자형쇠날(그림9-6)도 날의 길이보다 너비가 넓은 형태를 하고 있어 승리유적의 것과 비슷한 형태를 하고 있다. 고구려 유적에서 출토된 U자형쇠날은 대부분이Ⅰ-b식(그림3-1~7)으로 고구려 지역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나고 있어 이를 고구려식이라 정의할 수 있다.
그림3 | 고구려의 U자형쇠날
- 1·2. 서울 구의동보루 3. 구리 아차산4보루 4·5. 구리 시루봉보루 6. 서울 몽촌토성 88-2호주거지 7. 무순 고이산성 8. 집안 승리유적
고구려의 U자형쇠날은 그 평면형태가 凹자형을 띠면서 위로 길고 곧게 뻗어 길이가 너비보다 2배 이상이 된다. 이에 비해 신라·가야 지역의 U자형쇠날은 U자형을 띠지만 위로 가면서 옆으로 뻗어 마치 V자형을 그리는 Ⅱ식이 많이 있다. 고구려의 것은 너비에 비해 길이가 길어 깊이 경작할 경우에 유리하였다. 고구려의 U자형쇠날은 삽날 끝과 가장자리의 날 끝이 같은 너비를 유지하고 있어 경작을 할 경우에 처음 경지에 닿는 부분이 넓어지면서 계속 같은 너비로 갈게 된다. 하지만 신라·가야 지역의 U자형쇠날은 삽날 끝보다 가장자리의 날 끝이 더 넓은 너비를 가지고 있어 처음 경지에 닿는 부분은 좁지만 점차 넓은 면적을 갈게 된다. 이는 양 지역이 가진 경지 조건과 관계가 있다. 고구려 지역은 밭이 많은 지역으로 날 면이 넓은 경작이 필요한 지역이고, 신라·가야 지역은 논이 상대적으로 많고 경지도 진흙이 많아 좁고 깊게 들어가는 농구가 필요하였다. 따라서 고구려 지역에서는 날 끝 면이 넓은 凹자형쇠날이 사용되었고, 신라·가야 지역에서는 날 끝이 좁아 진흙에 잘 들어가는 끝이 둥근 V자형쇠날이 적당하였다.
 
(4) 쇠스랑
쇠스랑은 3개의 발이 하나의 투겁에 연결되어 있는 형태로 철치파(鐵齒擺), 철탑(鐵搭)이라고도 한다. 현재는 농가에서 거름을 칠 때 주로 사용하고 있으나, 삼국시대 제주도에서는 소가 끄는 우경을 대신하여 쇠스랑으로 땅을 일구었다. 이로 보아 쇠스랑은 다양한 용도로 활용되었으며 주로 논과 밭을 막론하고 땅을 정지하는 작업구나 흙을 부수는 농구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쇠스랑은 두 형식으로 나눌 수 있다. Ⅰ식(그림4-1)은 발이 짧고 발끝이 뾰족하며 투겁이 길게 뻗어 자루와 연결된 것이고, Ⅱ식(그림4-2)은 발이 길고 발끝이 무디며 투겁이 짧은 특징을 가지고 있다. Ⅰ식은 주로 단단한 흙덩이를 부수고 땅을 파는 데 유리한 형태를 하고 있으며 고구려 지역에서 많이 출토된다. Ⅱ식은 발이 길어 진흙 땅에 적당하여 주로 한반도 남부 지역에서 많이 출토되고 있다(은하수, 2003). 한국 고대의 쇠스랑은 세부적인 차이는 있으나 그 형태가 거의 유사한 것으로, 기다란 발의 상면에 직각으로 네모난 자루구멍을 만들어 자루를 끼우는 역현 연하도(燕下都) 출토의 중국 쇠스랑(陳文華 편저, 1994; 河北省文物硏究所, 1996)과는 다른 형태를 하고 있다. 고구려 유적으로는 환인 오녀산성, 서울 구의동보루, 구리 아차산4보루 등에서 출토되었다. 한강 유역의 보루유적에서는 다수 발견되지만, 한강 이북 지역에서는 소수가 확인되고 있다. 이로 보아 쇠스랑은 주로 남쪽에서 많이 사용하였으며, 쇠스랑이 논이나 진흙 땅에서 사용된 농구라는 점에서 수긍할 수 있다.
그림4 | 고구려의 쇠스랑
- 1·2. 서울 구의동보루 3~5. 구리 아차산4보루 6. 환인 오녀산성
고구려 유적에서는 U자형쇠날과 쇠스랑이 함께 출토되는 경우가 많은 것으로 보아 두 농구는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었다. U자형쇠날은 쟁기와 더불어 대표적인 갈이농구이며, 쇠스랑은 갈고 난 흙덩이를 부수는 삶기농구로서 경지에 보습을 유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조선 후기 이방운의 〈빈풍칠월도〉(국립중앙박물관, 1997)에 U자형쇠날(화가래)과 쇠스랑을 이용한 농작업이 묘사되어 있어 이것이 후대에도 계속하여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5) 철서
철서(鐵鋤)는 신부의 길이에 비해 짧은 투겁을 가진 것으로 ㄱ자형의 자루를 끼워 사용하였는데, 호미와 같은 용도로 사용되었다. 철서는 호미와 달리 ‘중경제초(中耕除草)’의 기능보다는 흙을 북돋아주거나 이랑 사이를 긁어 간단히 제초를 하는 기능에 더 가까웠다.
철서는 한반도 남부 지역에서는 무덤유적에서 대부분이 출토되었으나, 고구려 지역에서는 생활유적에서 주로 출토된다. 주거지나 생활유적에서는 사용한 흔적이 확인되는 철서가 많이 출토되었는데, 이 점에서 철서가 실제로 사용된 농구일 가능성이 높다. 고구려에서 출토된 철서의 형태는 짧은 굽통과 날이 바깥으로 약간 휘어져 있고 날의 양옆 가장자리가 둥글게 처리된 동일한 형태를 하고 있다(김재홍, 1997). 한반도 남부 지역 출토 철서의 대부분은 무덤유적에서 발견되어 실용적인 농구 뿐만 아니라 의례농구의 성격도 가지고 있으나, 고구려에서는 생활유적에서 대부분이 출토되어 처음부터 실용농구로서 기능하였다. 특히 구리 아차산4보루에서는 17점, 구의동보루에서는 7점이나 출토되어 고구려에서 높은 비중을 차지한 농구임을 알 수 있다. 그 외 무순 고이산성, 환인 오녀산성, 미창구장군묘, 집안 동대자유적, 청원 남성골유적 등에서도 철서가 출토되었다. 중국에서는 이와 비슷한 형태의 농구가 발견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고구려에서 만들어 발전시킨 농구이다.
그림5 | 고구려의 철서
- 1·2. 서울 구의동보루 3. 구리 아차산4보루 4·5. 무순 고이산성 6. 집안 동대자유적 7. 환인 오녀산성 8. 환인 미창구장군묘
 
(6) 낫
낫(鐵鎌)이 나오기 이전의 걷이농구는 주로 반달돌칼이나 반달쇠칼이었다. 반달칼은 이삭 1~2개를 한 손으로 잡고 자르는 데 이용되었으나, 낫이 나타나면서 곡물의 줄기까지 수확할 수 있게 되었고 작업의 속도가 훨씬 빨라지게 되었다. 대체적으로 직인 → 곡인, 날 끝이 직선 → 아래로 굽은 것, 날 끝의 너비가 넓은 것 → 좁고 뾰족한 것, 날의 너비가 넓은 것 → 좁은 것으로 변화하였다(천말선, 1994).
낫은 기원전 3세기부터 사용되기 시작하여 이후 중요한 수확농구로 자리잡게 되었다. 철제농구 중에서 가장 많은 출토량을 보여주고 있으며 소유계층의 폭도 가장 넓게 나타나고 있다. 고구려 지역에서도 보편적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주로 산성이나 건물지에서 출토되고 있다.
그림6 | 고구려의 낫
- 1·2. 서울 구의동보루 3·4. 구리 아차산4보루 5·6. 환인 오녀산성 7. 무순 고이산성
 
(7) 철제 보습과 볏
삼국시대 보습(鐵犁)은 신라 유적인 안변 용성리고분에서 나온 끝이 둥근 U자형의 보습(양익룡, 1953)을 제외하고는 모두 고구려의 보습이다. 6세기대 용성리고분군도 원래 고구려 지역에 있었던 것이므로 현재 발견된 보습은 대부분 고구려와 관련이 있다. 고구려 보습으로는 무순 고이산성, 청원 산성자산성(山城子山城), 철령 청룡산고성(靑龍山古城), 집안 태왕릉 서측, 지구촌(地溝村), 국내성 부근, M2374호, 동대자유적, 평양시 상원 소구절2호 횡혈식석실묘, 서울 구의동보루, 구리 아차산4보루 출토 유물 등이 있다. 이 중에서 철령 청룡산고성, 집안 국내성 부근, M2374호 출토 보습은 구체적인 사진이나 그림이 공개되지 않아 정확한 형상을 파악하기 힘들다. 또한 집안 동대자유적에서 수습하였다는 보습은 그 형태가 고구려뿐만 아니라 당시 중국에서 사용하던 보습과도 달라 좀 더 신중한 검토가 필요하다. 그 형태로 볼 때 당이나 요·금대의 보습(陳文華 편저, 1994)과 닮은 점에서 후대의 것일 가능성이 높다. 이 중에서 도면이나 자세한 형상이 묘사된 것은 무순 고이산성, 청원 산성자산성, 집안 태왕릉 서측, 지구촌, 평양시 상원 소구절2호 횡혈식석실묘, 서울 구의동보루 등에서 출토된 보습이므로, 이를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집안 지구촌에서 발견된 주조보습은 한 변의 길이가 19.2cm, 날의 너비가 5.4cm 정도이다. 한의 무덤에서 다수 출토되는 형태로서 그 평면형태가 V자형이며, 삼각형 주조보습인 철화(鐵鏵, 鐵犁)의 날 앞에 덧대는 철관(鐵冠)에 해당한다. 고구려 초기에 한의 영향으로 농경에 사용하였다고 추정된다.
태왕릉 서측에서 출토된 한대 대형 주조보습은 평면이 원만한 삼각형으로 양변이 날로 사용되었다. 편평한 면이 아래 바닥면이고, 양쪽 날로부터 가운데 쪽으로 비스듬히 등대가 세워진 윗면이 있고 투겁의 단면은 삼각형이다. 등대는 갈아서 올라온 흙을 좌우로 가르는 기능을 하였다. 전체 길이가 50.4cm, 삼각형 윗변 너비가 50.4cm에 이르는 거대형 보습이다. 이러한 보습은 한 중기 이후부터 사용되기 시작하며, 여러 마리의 소가 끄는 황무지 개간용 또는 수로 굴착용으로 사용하였다고 추정된다.
청원 산성자산성에서도 평면형태가 원만한 삼각형을 이루는 철제보습이 출토되었는데, 길이가 27.0cm, 상단 너비가 20.0cm로 중형에 해당하는 보습이다. 이와 유사한 형태의 보습이 섬서성 농현에서 철관과 함께 출토되었으므로, 한대의 보습으로 판단된다. 이로 보아 산성자산성의 보습은 한의 보습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서울 구의동보루에서도 평면형태가 삼각형을 이루는 철제보습이 2점 발견되었다. 완전한 형태의 1점은 길이 44.4cm, 너비 34.4cm인 대형이고(그림7-1), 다른 1점은 상단이 파손되어 남아 있는 길이가 25.5cm, 잔존너비 24.8cm이나(그림7-2) 복원하면 전자와 거의 비슷한 크기일 것으로 추정된다. 전체적인 형태가 평양시 상원의 보습과 유사하나 완성된 형태를 지니고 있다. 완전한 1점은 상단 가장자리에서 완만하게 곡선을 이루며, 윗면 가운데에 목제부속을 고정시키는 구멍이 뚫려 있어 태왕릉 서측 출토품과는 차이를 보이고 있다. 파손된 1점은 상단 쪽이 파손되어 정확한 형태를 알 수 없으나, 남은 형태로 보아 완전한 것과 거의 비슷할 것으로 보인다.
그림7 | 고구려의 보습
- 1~3. 서울 구의동보루 4. 집안 태왕릉 서측 5. 평양 소구절2호 6. 청원 산성자산성
이곳에서는 다른 형태의 보습 2점도 보고되었는데, 하나는 길이 15.4cm, 너비 10.7cm이고, 다른 하나는 길이 20.0cm, 너비 22.3cm(그림7-3)이다. 이것은 반달모양쇠판을 둥그스름하게 오므린 형태로 가운데 사각형 구멍이 2개 뚫려 있다. 그 형태나 뚫린 구멍으로 보아 또 다른 형태의 보습이라기보다는 보습의 아랫면으로 추정된다. 이 경우에 참조할 수 있는 유물은 4~5세기경 선비족이 세운 나라인 삼연(전연, 북연, 후연)의 무덤에서 나온 보습이다. 이는 북표 라마동묘지Ⅰ-M45호, Ⅱ-M49, Ⅱ-M209호, Ⅱ-M266호(그림9-1·2)에서 발견되었는데, 전체적인 형태가 구의동의 것과 비슷하고 목제부속구를 고정하기 위한 구멍이 윗면에 1개, 아랫면에 2개 뚫려 있다. 구의동의 보습은 2개로 쪼개져 있으나, 이 둘을 합치면 라마동의 보습과 비슷한 모습을 지닌다. 따라서 구의동보루유적에서 보습은 4점이 아닌 2점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평양 상원군 일대의 고구려 고분군 중 소구절2호 횡혈식석실묘에서 일부가 파손된 보습이 발견되었다. 보습의 남아 있는 형상은 길이가 35.0cm, 중심부 너비가 30.0cm로 전체적인 형태가 구의동 출토 보습과 비슷하다. 추정 복원한 길이는 54.0cm 정도이고, 너비는 40.4cm 정도로 거대형에 속한다. 대부분의 보습이 주로 방어시설이나 주거지에서 발견된 것과는 달리 개인의 무덤에서 출토되어 철제농구의 개인 소유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이와 유사한 형태의 쇠보습이 신원 아양리토성 1호건물지에서 출토되었는데, 길이 90.0cm, 너비 60.0cm로 고구려 보습 중 최대 크기를 보이고 있다.
무순 고이산성에서 출토된 쟁기(그림8-1, 2)는 보습과 볏을 세트로 가진 완전한 형태로서 삼국시대 쟁기 중에서 유일하게 볏(鐵鐴)을 가지고 있다. 형태는 삼각형이고, 윗면은 편평하고 곧은 반면 뒷면 중앙에 돌기가 있어 삼각형홈을 이루고 있다. 길이 34.5cm, 상단 너비 32.0cm이다. 볏은 전체적으로 타원형에 가까운 편인데, 앞면은 활처럼 휘었고 뒷면은 불룩 튀어나왔으며, 3개의 고리가 있다. 길이 42.0cm, 너비 30.0cm이다. 이곳에서는 파손된 보습과 볏도 각각 1점씩 출토되었다. 모두 2세트의 쟁기가 출토되었는데, 동성 내 서쪽 구릉 소나무 아래에서 출토되었다. 고이산성에서 출토된 보습과 동일한 형태는 석대자산성에서도 2점 출토되었다. 고이산성에서 보습과 함께 출토된 등자는 주로 발해유적에서 출토된 등자와 동일한 형태를 띠고 있으며, 이러한 등자는 요 진국공주묘에서도 출토되므로 발해부터 요까지 넓은 시기 폭을 보이고 있다(服部敬史, 2012). 그렇다고 고이산성의 쟁기를 발해 이후로 볼 수만은 없다.
그림8 | 무순 고이산성 출토 철제농구
- 1. 보습 2. 볏 3. 구멍자루괭이 4. 괭이 5. 一자형쇠날 6. U자형쇠날 7·8. 철서 9. 낫
그림9 | 북표 라마동묘지 출토 철제농구
- 1. 보습(M266호) 2. 볏(M266호) 3·4·5. 괭이(M209호, M328호, M379호) 6. U자형쇠날(M209호) 7·8. 낫(M108호, M101호)
고이산성에서 출토된 쟁기는 고구려가 멸망하기 직전이나 그 직후인 7세기 후반으로 편년된다. 함께 출토된 단병형등자는 병부가 장방형으로 짧고 윤부가 넓은 것으로 선비의 등자와 관련을 가지고 있다(김영길, 2021). 발해 이전에도 사용되었으며, 주로 당대부터 요대까지 사용된 등자이다. 7세기에 사용한 것으로 보아 고구려에서도 사용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일반적으로 고이산성 보습은 고구려의 쟁기로 보고 있다(東潮, 2005; 서민수, 2017; 이동건, 2022). 이로 보아 고이산성에서 출토된 보습은 7세기 후반 고구려 보습의 모습을 반영할 가능성이 있다. 고구려에서도 요하 유역의 변경지역을 중심으로 볏 달린 보습을 사용한 쟁기 기술이 보급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보습의 형태는 윗면 상단에 귀(耳)가 없이 편평하고 윗면 가운데에 삼각형 구멍이 있는 것으로 보아 발해의 보습과 거의 유사하다. 고이산성의 보습은 구의동보루 등에서 출토된 고구려의 전형적인 삼각형보습보다는 후대인 발해의 보습과 형태상으로 유사성이 더 높다. 이는 발해의 보습이 고구려를 계승하였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고구려의 전형적인 삼각형보습은 7세기 후반을 전후하여 윗면 머리 부분이 직선을 이루는 삼각형보습으로 전환하였으며, 이러한 형태의 보습은 발해 보습으로 계승되었다.
고구려의 이른 시기 철제보습은 집안에서 발견된 V자형철관, 삼각형 전철제(全鐵製)철화, 원만한 삼각형쇠보습인데, 이것은 중국 한대 화북지방의 보습과 관련을 가지고 있다. 고구려의 전형적인 삼각형보습은 평양, 한강 유역, 요하 유역 등지에서 발견되어 고구려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U자형보습이 신라 지역에서 사용된 보습의 일종이라는 것과 비교하면 그 지역적인 특성을 알 수 있다. 고구려 지역의 삼각형보습은 한강 이북의 밭농사 지역에서 사용되었으며, 끝이 둥근 U자형 신라식 보습은 진흙이 많은 한반도 남부 지역에서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고구려의 전형적인 보습은 한대 보습에서 발전한 형태이지만, 이후 우리나라 지형에 맞는 보습으로 정착하여 최근까지도 그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고구려식 삼각형보습(그림10)은 발해와 신라통일기의 보습(그림11)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김재홍, 2013). 전체적으로 삼각형이라는 규격성을 유지하지만 자연환경에 따라 세부적인 변화를 거치게 된다. 북쪽에서는 무순 고이산성의 보습을 거쳐 발해의 삼각형보습으로 전환되고, 남쪽에서는 용인 언남리 등 신라통일기 보습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신라통일기의 보습은 세장한 삼각형이고 양 가장자리에 귀가 돌출하며 윗면에 1개, 아랫면에 2개의 구멍이 뚫려 있다. 형태적인 측면에서 신라통일기의 보습은 고구려의 보습을 잘 계승하고 있다. 윗면 머리 부분의 차이를 제외하고는 별다른 차이를 찾기 힘들 정도로 유사성이 높다. 고구려의 보습이 윗면 머리 부분이 완만한 곡선을 이루는 것에 비해 신라통일기의 보습은 윗면 머리 부분의 가장자리에 귀가 돌출하고 가운데 부분은 직선을 이루고 있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그림10 | 고구려식 보습(서울 구의동보루)
-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그림11 | 신라통일기의 쟁기(용인 언남리유적)
-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8) 나무쟁기
평안북도 염주 주의리 니탄층에서는 나무쟁기 2점이 출토되었다. 평후치로 보고하고 있으나, 굽쟁기인 장상려(長床犁)에 해당한다. L자형으로 구부러진 참나무를 이용하여 만들었으며, 날 부분은 왼쪽이 얇고 두터워서 오른쪽으로부터 왼쪽으로 경사져 있어 흙이 자연히 왼쪽으로 넘어가는 우반전(右反轉)이다. 후치 날의 중심부와 좌우 측면, 손잡이 부분에는 크고 작은 네모난 구멍이 각각 1개씩 뚫려 있으며, 경사진 날 턱 윗부분에는 둥근 구멍이 2개 뚫려 있다. 나무쟁기는 강이나 하천 유역의 거친 땅을 갈기 위한 농구로 이용되었다. 주의리 쟁기는 청동기시대로 추정되고 있으나, 그 형태가 일본 7~8세기 나무쟁기와 유사하여 삼국시대로 소급할 수 있다(김재홍, 2016).
그림12 | 주의리 나무쟁기(『조선유적유물도감』 2)
최근 몽촌토성 북문지 집수지 내에서 나무쟁기(그림13)가 발견되었는데, 층위와 출토유물로 보아 이 쟁기는 고구려 나무쟁기일 가능성이 높다(한성백제박물관 백제학연구소, 2022). 이 쟁기는 술·날·손잡이로 이뤄진 일반적인 쟁기 구조에 비녀와 분살이 더해진 형태이다. 날 부분의 형태와 크기로 봤을 때 날에 끼웠던 보습은 서울 구의동보루에서 출토된 보습과 유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날 부분의 볼록 면에는 ‘V’자형홈이 있어 볏이 ‘V’자형날개모양으로 달렸을 가능성이 있다. 쟁기의 전체 길이는 165.0~170.0cm, 날 부분은 29.0cm, 너비는 최대 18.0cm로 파악됐다. 기존 연구자료에 의하면 이런 형태의 쟁기는 함경도와 중국 연변, 연해주 일대에서 쓰이는 쟁기인 일명 ‘가대기’와 동일하다(국립문화재연구소, 2007). 집수지는 자연과학적 연대분석 결과 469~541년에 고구려가 축조하여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림13 | 몽촌토성 집수지 출토 목제쟁기(한성백제박물관 촬영)
 
2) 어구
고구려 유적에서 출토된 어구로는 작살(銛)이 있다. 작살은 3~4갈래의 가지날이 있으며, 끝부분에 미늘이 있어 세갈래창과 구분된다. 세갈래창(三枝鉾)과 세갈래작살(三枝銛)의 가장 큰 차이는 가지에 미늘이 달렸는지 여부로서 미늘이 달린 것을 삼지섬으로 분류한다. 세갈래작살은 가지마다 미늘이 하나만 달려 있기도 하고, 경우에 따라 가운데 가지에는 양쪽에 미늘이 달리기도 한다. 대부분 고구려 병장기로 언급하는 삼지모 중에서 미늘이 달린 것은 세갈래작살로 볼 수 있다. 끈으로 연결하는 네갈래작살은 판분령(板坌嶺)에서, 세갈래작살은 유림향(楡林鄕) 지구촌에서 출토되었다(耿鐵華 외, 1993). 또한, 세갈래작살은 오녀산성 4기문화층과 지표 채집에서 출토되었는데, 주 가지에 양옆으로 2개의 미늘이 있으며, 양옆 가지를 주 가지에 소켓으로 끼우게 되어 있다. 양옆 가지의 미늘은 안쪽으로 나 있다. 창과 유사한 형태이지만 가지날이 붙은 작살이 집안 임강 동나록포자고성에서 화살촉과 함께 출토되었다. 투겁이 달린 작살날에 가지가 양쪽에 달려 있으며, 투겁에 끈을 고정하는 반원형고리가 붙어 작살날이 물고기를 찔러도 떨어지지 않게 하였다. 두갈래작살은 환인 오녀산성에서 출토되었는데, 가지가 안으로 마주보는 형식이며 나무자루에 고정할 수 있게 촉이 아래로 나 있다.
세갈래작살은 가지를 연결하는 방식에 따라 끈으로 묶는 Ⅰ식, 가지 아랫부분만 단접하여 제작하는 Ⅱ식, 가지를 완전히 단접하여 하나의 자루를 제작하는 Ⅲ식, 주 가지에 2개의 옆 가지를 붙이는 Ⅳ식으로 나눌 수 있다(그림14). Ⅰ식은 김해 대성동2호, 본산리·여래리Ⅱ-18호·37호, 부산 미음동24호석곽묘에서 출토되었다. Ⅱ식은 부산 복천동10호에서, Ⅲ식은 창녕 계남리1호, 합천 옥전M3호에서, Ⅳ식은 환인 오녀산성에서 출토되었다. 남부 지방에서 발견된 Ⅱ식도 고구려 지역에서 동일한 형태가 발견되어 고구려계임을 알 수 있다. 특이하게도 Ⅲ식인 합천 옥전M3호 출토품은 네갈래작살이다. 사지섬은 고구려 지역의 집안 지구촌에서도 발견되었으나 가지를 결합하는 방법이 Ⅱ식으로 옥전의 것과 차이를 보이고 있다. 가야와 고구려 지역의 세갈래작살은 한강 유역의 것과 달리 가지에 미늘이 하나만 형성되어 있어 공통성을 알 수 있다.
그림14 | 삼국시대 작살
- 1. 창녕 계남리1호 2. 합천 옥전M3호 3. 부산 복천동10호 4. 김해 대성동2호 5. 홍천 성산리35호 6. 화천 율천리69호 7. 동해 송정동3호 8. 파주 와동리14호 9. 판분령 10.유림향 지구촌
낙동강 하류 유역에서는 고구려의 것과 형태가 유사한 어구가 출토되고 있다. 세갈래작살 중에서 가지를 끈으로 묶는 방식은 고구려에서도 보인다. 이러한 방식은 금관가야와 관련된 유적에서 출토되었다. 고구려 세갈래작살의 특성은 김해 대성동2호와 부산 복천동10호의 세갈래작살에서 잘 보이고 있다. 따라서 끈으로 묶는 방식의 세갈래작살은 고구려와 관련을 지을 수 있다. 유림향 지구촌 출토품은 전체적 형태나 자루를 고정하는 방식이 부산 복천동10호의 것과 아주 유사하다. 이렇듯 신라·가야의 작살은 고구려에 기원을 두고 있다.
 
3) 생업도구로 본 고구려 사회
(1) 농구의 발전단계
한반도 북부 지역과 중국 동북 지역에서는 기원전 3세기~기원전 2세기경에 주조괭이, 구멍자루괭이, 원시호미, 낫 등의 철제농구가 주조로 제작되었다. 기본적인 농구는 갈이–김매기–걷이라는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연의 철제농구와 형태가 유사한 것으로 보아 연에서 제작하였거나 그 영향을 받은 농구로 판단된다. 이러한 연화보–세죽리 철기문화는 연의 영역뿐만 아니라 요동 지역과 한반도 북부 지역에 걸쳐 나타나고 있다. 고구려가 국가체를 형성하기 전에 이 지역에서는 철기문화를 공유하고 있었다. 압록강 중류 유역에 있는 관전 쌍산자(雙山子), 위원 용연동 등지의 유적은 고구려와 관련이 있는 지역으로 판단된다. 연계 철제농구는 고구려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기보다는 고구려가 국가를 건설하기 이전 단계인 원고구려 지역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지역에서 이전과 다른 형태의 농구가 출현하는 것은 기원전 2세기경 한이 요동 지역과 한반도 서북부 지역에 진출하는 한사군의 설치 이후부터이다. 한의 철제농구는 보습, 一자형쇠날, U자형쇠날, 단조괭이 등이 있으며(고구려 I기), 연 계통 철제농구와 달리 단조로 제작되었다. 대부분의 유물이 확실한 유구에서 출토된 것이 아니라 지표에서 수집되어 정확한 연대를 알기는 어려우나 대략 기원전 1세기~3세기 단계에 해당된다. 이 단계의 철제농구는 한대 철제농구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한대 철제농구와 다른 농구가 나타나는 것은 4세기 이후이다(고구려 II기). 이 시기는 고구려식이라 할 수 있는 U자형쇠날, 쇠스랑, 철서, 보습 등이 사용된 4~7세기경이다. 고구려가 집권국가로 성장한 다음 단계로서 고구려의 독자적인 철제농구체계가 확립된 시기이다. 이 시기부터는 一자형쇠날이 거의 출토되지 않고 U자형쇠날도 한대의 것과 다른 형태가 나타나는데, 고구려만의 특징이 확인되고 있어 고구려식이라 해도 좋을 정도이다. 이 단계는 고구려가 중앙집권적인 고대국가를 형성하고 요동 지역과 한반도로 세력을 확장하는 시기로서 고구려식 철제농구는 그 세력 확장의 배경이 되었다. 이 시기부터 소가 끄는 쟁기가 보급되었다.
철제농구의 종류별 분석을 통하여 농구의 역사적 변천을 고찰하면 다음과 같이 3단계로 변화의 시기를 잡을 수 있다. 먼저 주조괭이, 구멍자루괭이, 원시호미, 낫 등 연 계통의 철제농구가 사용된 기원전 3세기~기원전 2세기경이다. 그러나 고구려는 국가가 형성되기 전이므로 원고구려기로 설정할 수 있다. 고구려 Ⅰ기에는 주조괭이, 단조괭이,一자형쇠날, U자형쇠날, 낫 등이 사용된 기원전 1세기~3세기경으로 한대의 철제농구와 그 형태가 유사하다. 한대 철기문화의 영향을 받아 철제농구를 사용한 시기이다. 고구려 Ⅱ기에는 이전 단계의 농구와 더불어 고구려식이라 할 수 있는 U자형쇠날, 쇠스랑, 철서, 보습 등이 사용된 4~7세기경으로 고구려가 중앙집권국가로 성장한 다음 단계로서 고구려의 독자적인 철제농구체계가 확립된 시기이다.
표1 | 고구려 철제농구의 발전단계
단계시기농구 조합상특성소유유적
원고구려기기원전 3세기 ~ 기원전 2세기주조괭이+원시호미+낫연 계통집단생활유적, 무덤
고구려Ⅰ기기원전 1세기 ~ 3세기보습 +단조괭이+U자형쇠날+낫한 계통?지표수습
고구려Ⅱ기4~7세기보습+단조괭이+U자형쇠날+쇠스랑+철서+낫고구려식국가, 개인생활유적, 무덤
원고구려기와 고구려 Ⅰ기의 철제농구는 중국 계통의 영향을 받으면서 고구려 지형에 맞는 철제농구를 찾아가는 시기였다. 유적의 성격이 분명하고 그 출토양상이 뚜렷하게 관찰되는 철제농구는 주로 4~7세기 고구려 Ⅱ기의 유적에서 출토된 것이다. 이 단계는 고구려식 U자형쇠날·쇠스랑·철서·보습 등이 사용된 시기로 고구려가 고대 중앙집권국가로 성장하여 영역을 확장하던 시기였다.
 
(2) 출토 유적의 성격
고구려 유적에서는 괭이, 一자형쇠날, U자형쇠날, 쇠스랑, 철서, 낫, 보습과 볏 등 전통시대 우리나라의 전형적인 농구 대부분이 출토되고 있다. 이 시기에 해당하는 철제농구가 출토되는 유적은 성격상 둘로 구분되는데, 무덤유적과 생활유적이다. 무덤유적은 적석총과 석실묘로 나눌 수 있는데, 적석총이 시기적으로 일찍 조영되었다. 적석총에서는 괭이, 낫 등의 간단한 농구가 출토되고, 석실묘에서는 보습, 철서, 낫 등이 출토되었다. 무덤유적은 주로 환인·집안·평양 등의 도성에 분포하는 고분으로, 보습 등 대형 농구보다는 괭이, 낫 등 간단한 농구를 부장하고 있다. 예외적으로 고구려 후기인 6세기경에 조영된 상원 소구절2호 횡혈식석실묘에서는 대형 보습이 출토되었다.
생활유적은 산성·보루 등의 방어유적과 왕궁·관아를 포함한 건물지로 나눌 수 있다. 관방유적은 한반도 남부 지역의 예가 대표적이며, 구의동보루, 홍련봉1·2보루, 용마산2보루, 아차산3·4보루, 시루봉보루, 호로고루, 무등리1보루, 남성골유적 등에서 농구가 출토되었다. 중국 동북 지역의 관방유적인 환도산성, 국내성, 고이산성, 오녀산성, 석대자산성 등에서도 농구가 출토되었다. 산성과 보루에서 철제농구가 출토되는 유구는 주거지나 건물지이므로 성격상 모두 건물로 볼 수 있다. 생활유적으로는 집안 동대자유적, 민주유적 등의 건물지에서 농구가 출토되었다. 백제·신라·가야 지역에서는 주로 무덤에서 철제농구가 출토되는 비율이 높으나, 고구려 지역에서는 무덤보다 건물지·산성과 같은 생활유적에서 출토되는 양이 많은 편이다. 이러한 유적은 그 성격상 개인의 무덤이나 가옥이 아니라 국가와 관련이 있는 구조물로 판단된다(김재홍, 2011).
관방유적에서는 철제무기와 함께 철제농구가 다량으로 출토되었다. 유적은 주변 지역을 조망할 수 있는 높은 지대에 위치해 있어 군대의 주둔지로 적합하였다. 주둔군은 지속적으로 전쟁을 수행하기 위하여 자체적으로 군수물자인 군량을 조달하고 성이나 보루에 군량을 비축할 필요가 있었다. 고구려의 최전방에서는 산성과 보루를 단위로 군량을 해결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고구려의 최전선 방어성에서는 군사적인 기능뿐만 아니라 농업생산력의 증진을 위한 노력을 경주하고 있었다. 한강 유역의 방어성인 보루는 그 규모가 성보다 작은 소규모 군대 주둔지이지만 다량의 농구를 보유할 정도였다. 요동에 있는 대규모의 성에는 다량의 군량뿐만 아니라 다수의 소나 말도 보유하고 있었다. 군대가 전선에 배치된 것만으로는 지역을 방어할 수 없었고 농업생산의 기반을 안정적으로 유지해야만 지속적인 점령이 가능하였던 것이다.
철제농구가 출토되는 유적은 철령·청원·무순·단동 등 고구려가 천리장성을 축조한 서북방 변경지역, 환인·집안과 같이 고구려 전기 도성이었던 지역, 평양을 중심으로 하는 고구려 후기 도성이었던 지역, 한강 유역의 남방 변경지역 등에 분포한다. 바로 고구려 전성기의 영역과 겹치고 있다.
 
(3) 농업기술의 발전
사회의 변동은 생산력의 발전과 생산관계의 변화로 설명할 정도로 생산력의 발전수준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생산력과 관련된 사료는 부족하지만 고고자료로서 철제농구는 1차적으로 생산도구이지만 생산력을 가늠해볼 수 있다. 적어도 철제농구를 통해 당시 농업기술의 일단을 엿볼 수 있다.
괭이와 一자형쇠날은 주로 간단하게 밭을 갈거나 흙덩어리를 부술 때에 사용하는 농구로서 가장 이른 시기에 나타나고 있다. 이것은 주로 간단하게 경지를 갈 때에 유용하게 이용되었으며, 주로 낫과 함께 농작업을 수행하였다. 주조괭이는 연의 철기와 관련 있는 것으로 주로 기원전 3세기~기원전 2세기부터 나타나고, 단조괭이와 一자형쇠날은 한대 철기의 영향을 받아 기원전 1세기 이후부터 나타난다. 이 시기에는 괭이와 一자형쇠날이라는 갈이농구, 쇠낫이라는 걷이농구로 구성된 농구 조합이 농경기술을 반영하고 있다.
U자형쇠날과 쇠스랑의 출현은 다양한 농구의 확대뿐만 아니라 새로운 농사기술의 발전을 의미한다. 논의 토양은 점성이 강하기 때문에 논농사에 적합한 갈이농구는 땅에 꽂혔을 때 생기는 진공상태의 저항도가 낮은 것이 바람직하다. U자형쇠날과 쇠스랑은 가벼우면서도 흙에 대한 저항력이 낮고 강인하기 때문에 논농사에서 작업효율을 크게 높일 수 있다. 그러나 고구려의 U자형쇠날과 쇠스랑은 그 형태로 보아 논농사보다는 밭농사에 주로 이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U자형쇠날과 쇠스랑은 걷이농구와 삶기농구로서 농업도구로서 기능하였다. 이전 시기에 괭이가 도끼 등의 공구로도 기능하였던 상황과 구별된다. 또한 이들 선진농구의 도입으로 구릉이나 산간 지대에서는 밭의 개간이 활발해지면서 기존의 밭작물 재배 이외에 맥작이 늘어나 맥류가 차지하는 비율도 상대적으로 높아졌을 것이다.
고구려의 철제농구 중에서 철서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철서는 호미와 같은 용도로 사용되었지만, 호미의 ‘중경제초’ 기능보다는 흙을 북돋아주거나 밭의 바닥을 긁어 간단히 김을 내는 기능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철서는 논보다는 밭에서 사용한 농구로 판단된다(김재홍, 1997). 고구려 지역에서는 백제, 신라 지역과 달리 논농사에 가장 많이 사용되던 살포가 1점도 출토되지 않고 밭농사에 널리 사용되는 호미에 해당하는 철서가 널리 사용되고 있었다. 이로 보아 고구려 지역은 산간의 평지를 이용한 밭농사가 발달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 다른 변화는 소가 끄는 쟁기의 사용이다. 소를 이용함으로써 노동력이 절감되고 깊이갈이를 할 수 있어 농업생산을 증대시켰다. 고구려의 철제농구 중에서 가장 주목을 끄는 것이 쟁기이다. 고구려는 초기에 요동 지역 쟁기의 영향을 받아 한대의 보습을 사용하였으나 4세기 이후에는 고구려식 보습을 쟁기에 사용하였다. 요하 유역의 선비족 문화권에서는 보습과 볏을 가진 쟁기가 사용되었으나 집안 지역과 압록강 이남의 고구려 지역에서는 보습만 달린 무상려가 농경에 사용되었다. 다만, 고구려 영역 내에서도 국경지대인 요하 유역에서는 요서 지역의 영향을 받아 볏 달린 보습을 사용하였다고 추정된다. 고구려의 보습만 달린 무상려는 그 형태로 보아 주로 밭농사에 사용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고구려 보습은 최근까지 농촌에서 사용한 일명 ‘긁쟁이’라는 술이 없는 쟁기의 보습(박호석, 1993)과 아주 유사한 것이다. 이는 중국, 일본의 술이 있는 쟁기와는 다른 형태이며, 우리나라 지형에 맞는 보습으로 판단된다. 고구려식 보습에 맞는 나무쟁기가 몽촌토성 집수지에서 발견되어 보습을 나무쟁기에 장착하여 사용하였을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동아시아에서는 우경의 보급이 주로 국가권력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졌다. 신라에서도 6세기에 전국적인 규모로 수리시설과 우경이 보급되기 시작하였다. 지증왕 4년(503년)에 처음으로 우경의 실시를 전하고 있으나 그 이전부터 실시되어 오던 우경을 국가적인 차원에서 장려한 조치로 이해되고 있다. 이것은 우경을 지방사회에까지 널리 보급하겠다는 신라의 권농책과 관계가 있었다. 고구려에서도 우경은 국가에서 주도적으로 실시하였다. 그런데 6세기경에는 국가 관련 시설뿐만 아니라 유력계층의 무덤에서도 보습이 발견되고 있다. 평양시 상원 소구절2호 횡혈식석실묘에서 철제보습이 발견되어 당시 유력계층에까지 쟁기가 보급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가 밭농사에 쟁기를 사용한 증거로는 한강 유역에 위치한 미사리유적의 밭에서 찾을 수 있다. 삼국시대의 경작유구가 2개 층에서 발견되었는데, 상층에서 발견된 것은 대략 6세기경에, 하층의 경우 4~5세기나 그 이전에 사용된 경작지로 추정하고 있다. 575년에서 6세기 중엽까지 한강 유역을 차지하고 있던 고구려가 미사리의 상층 밭을 경작하였다고 여겨진다. 고구려가 점령한 한강 이남의 몽촌토성에서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중엽으로 편년되는 고구려 유물이 다수 출토되어 고구려가 일정 시기에 몽촌토성을 비롯한 한강 이남 지역을 차지했음을 알 수 있다.
미사리의 하층 밭은 고랑과 이랑의 너비가 일정하고 직선을 이루며 고랑과 이랑을 합한 너비가 150.0cm가량 되고 고랑에는 지름 20.0cm 정도의 작물 재배 구멍이 지그재그로 남아 있다. 하층밭은 고랑이 70.0~80.0cm 정도로 비교적 넓은 것으로 보아 주로 U자형 따비나 쇠스랑 같은 농구로 밭을 갈고 고랑에 작물을 재배했다고 여겨진다. 이에 비해 상층밭은 고랑과 이랑을 합한 너비가 100.0cm 정도이고, 이랑에 비해 고랑이 좁다. 상층밭은 고랑보다는 이랑을 넓게 만들었으며, 고랑의 깊이가 30.0cm 정도인 것으로 보아 축력을 이용하여 밭을 갈았다고 추정된다. 일반적으로 미사리 하층밭 단계에는 휴한농업이 실시되었다는 것에 의견을 같이하고 있으나, 우경으로 경작한 상층밭은 상경농법으로 전환했다거나 여전히 휴한농법이었다고 하여 의견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다.
 
(4) 가야 지역의 생업에 보이는 고구려의 영향
가야 생업을 보여주는 도구 중에서 농구와 어구에서 4세기경에 독특한 형태가 나타난다. 그 형태나 시기로 보아 고구려와 관련지을 수 있는 농구와 어구가 보인다. 4세기 이후 가야 지역에서는 이전 시기와 다른 농구인 철서와 어구인 작살이 나타난다. 철서와 작살은 고구려에서도 4세기 이후에 나타나는 형태와 유사하여 그 영향력을 엿볼 수 있다.
4세기에 새로이 등장하는 밭농사용 농구가 김을 매는 제초구인 철서이다. 발굴조사에서 확인 가능한 김매기농구는 납작한 초기 형태의 호미이지만 출토량이 많지 않다. 이 중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철서가 복천동67호에서 출토되었으며, 고구려의 것과 형태가 유사하다.
한반도 남부 지역에서 출토된 철서는 부산 복천동67호, 함안 도항리〈현〉22호에서 출토되었다. 이와 유사한 형태이지만 10.0cm 미만의 규격을 가진 대가야의 소형 철제농공구 중에서 철서형을 열거할 수 있다. 대가야의 철제소형농공구는 철부형(도끼나 괭이 형태), 철서형, 따비형, 낫형의 네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철부형, 따비형, 낫형은 4세기 이전에도 있었던 농공구이지만, 철서형은 4세기 이후에 새로이 나타나는 농구이다. 그 형태로 보아 고구려의 전형적인 철서로 상정된다. 가야의 철서는 그 형태가 고구려 지역의 철서와 유사하다. 철서가 발달한 지역이 고구려의 밭농사 지역이라면, 이 지역에 보이는 이른 시기의 철서는 고구려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고구려의 철서가 생활유적에서 출토된 실용적인 농구인 것에 비해, 가야의 철서는 대부분 무덤유적에서 발견되어 실용적인 기능뿐만 아니라 의례용농구의 성격도 가지고 있었다. 고구려에서 출토된 철서의 형태는 짧은 굽통과 날이 바깥으로 약간 휘어져 있고 날의 양옆 가장자리가 둥글거나 각진 형태로 처리된 동일한 모양을 하고 있다. 날의 양 끝이 둥근 형태는 사용한 흔적으로 보인다.
고구려식 철서는 신라통일기에도 계승되어 사용되었는데, 경주 월지에서 출토된 철서는 고구려와 유사한 형태이다. 모두 밭에서 간단하게 김을 매는 도구였다. 철서의 형태에서 변화가 나타나는 것은 삼국시대 말기에서 신라통일기 초기이다. 역시 월지에서 날 끝이 뾰족한 호미가 발견되어 새로운 변화를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신라통일기까지 철서의 일반적인 형태는 고구려식인 날이 네모난 형태였다. 고려시대 이후 철서는 날이 뾰족한 형태인 호미로 변화하여 최근까지 사용되고 있다.
가야의 어구 중 작살의 형태에서 고구려의 영향을 알 수 있다. 세갈래작살 중에서 가지를 끈으로 묶는 방식은 고구려에서 보이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은 김해 대성동2호(그림 15)와 부산 복천동10호의 금관가야 세갈래작살에서 잘 보이고 있다. 따라서 끈으로 묶는 방식의 세갈래작살은 고구려와 관련을 지을 수 있다. 끈으로 연결하는 네갈래작살은 판분령에서, 세갈래작살은 집안 지구촌에서 출토된 것이 있다(耿鐵華 외, 1993). 지구촌 출토품은 전체적 형태나 자루를 고정하는 방식이 부산 복천동10호의 것과 아주 유사하다. 이 시기 고구려 문물이 한반도 남부 지역으로 전파되는 과정은 농구에서도 잘 보인다. 부산 복천동67호 철서는 그 형태가 고구려 발생기의 철서와 유사하다(김재홍, 2011). 철서가 출토된 복천동67호 목곽묘는 4세기 중엽에 해당하는 유적이다. 고구려의 밭농사지역에서 철서가 발달했다면, 이 지역에 보이는 이른 시기의 철서는 고구려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농구와 어구 양면에서 고구려의 영향을 알 수 있다.
그림15 | 금관가야의 세갈래작살 (김해 대성동2호 출토, 국립김해박물관 소장)
복천동고분군에 보이는 철서와 세갈래작살의 출토 의미는 당시 국제정세의 변동과 관련이 있다. 낙랑군이 멸망한 후 4세기 후반에 고구려와 백제는 낙랑과 대방 고지를 사이에 두고 서로 공방전을 펼쳤다. 낙랑과 대방이 수행하였던 국제교역망을 차지하려는 고구려와 백제 간의 세력다툼이었다. 낙랑이 멸망하면서 발해만–대동강 유역–서남 해안–낙동강 하구–일본 열도를 잇는 교역망은 붕괴되기 시작하였으며, 고구려와 백제가 주도하는 교역망으로 전환하고 있었다. 이 와중에서 복천동고분군의 정치체는 고구려로부터 새로운 농구인 철서와 어구인 세갈래작살을 받아들여 생산력의 향상을 도모하였다. 광개토왕의 금관가야 공격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대외교역망을 확보하여 자체 성장을 꾀하였던 것이다(김재홍,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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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생업도구 자료번호 : gt.d_0009_0050_0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