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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통사

2. 생활도구

2. 생활도구

1) 조리 및 저장 도구
(1) 부뚜막
부뚜막은 양쪽에 돌을 세우고 외면에 점토를 발라 고정시켰으며, 부뚜막 중앙에 뾰족한 돌을 세웠다. 뾰족한 돌은 지각이라 부르며, 부뚜막 위에 토기를 놓았을 때 안정시키기 위한 시설이다. 그러나 차츰 취사용토기의 어깨에 전을 달아 부뚜막에 토기를 밀착하게 되면서 지각은 사라지게 된다. 이와 비슷한 시기에 전이 달린 쇠솥이 보급되기 시작한다(복천박물관, 2005). 부뚜막은 토제, 철제, 청동제 등이 발견되며, 유구에 시설된 것도 있고 취사용도구로 부장된 것도 있다(오승환, 2008; 신광철, 2010).
원고구려 지역에서 부뚜막이 부속된 온돌이 등장하는 시기는 기원전 4세기~기원전 3세기경으로 추정된다. 온돌의 한쪽 면에 불을 때는 부뚜막을 설치하고 솥을 걸어 음식을 조리하였다. 실내에서 온돌시설이 사라지면서 야외에서도 사용할 수 있는 이동식 부뚜막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동식 부뚜막은 흙이나 쇠로 만든 것으로 생활유적이나 무덤유적에서 출토되어 실생활용이면서 장례용으로 사용되었다.
고구려에서 부뚜막을 사용하는 모습은 안악3호분 주방 그림에 잘 보인다. 불을 때는 아궁이를 90˚로 꺾어 불을 배출하여 굴뚝으로 내보내는 구조로서 고구려적인 특성을 반영하고 있다. 구의동보루에서는 온돌의 부뚜막 아궁이에 쇠솥이 붙어있는 채로 발견되어 온돌과 부뚜막이 일체형으로 구성되었음을 보여준다. 낙랑고분에서 출토된 부뚜막은 아궁이와 굴뚝이 일직선으로 나 있어 조리만을 위한 구조로 차이가 있다. 고구려의 부뚜막은 토기나 쇠솥을 올리는 확이 하나이지만, 쇠솥을 올리는 확이 여러 개인 중국의 것과 차이를 보이고 있다. 고구려의 부뚜막은 취사용으로 사용하고 남은 열로 구들을 데우는 난방용으로 사용되었는데, 이는 부뚜막을 취사용으로 주로 사용한 중국의 예와 다른 특성을 보이고 있다.
부뚜막은 이동식 형태로 제작되기도 하였는데, 고구려 고분에서 주로 출토되었다. 부뚜막은 주로 토제로 제작되었으나, 특수한 예로 청동제와 철제가 드물게 출토되었다. 토제부뚜막은 집안 삼실총, 장천2호묘, 환인 미창구1호묘 등에서 출토되었다. 삼실총과 장천2호묘의 것은 시유부뚜막이며, 고구려 중기 이후에 제작되었다. 청동제부뚜막은 집안 태왕릉에서 출토되었는데, 청동제로서는 유일한 예이다. 부뚜막 대부분이 토제인 것에 비해 청동제는 태왕릉의 위상을 잘 보여준다. 철제부뚜막(그림16)은 계단적석총인 운산 용호동1호분에서 출토되었다. 부뚜막 한쪽에는 네모난 아궁이가 있으며, 다른 쪽에 원통형의 굴뚝이 달려 있다. 아궁이 위에는 솥을 올리는 확이 둥글게 뚫려 있고, 아궁이에는 문양이 장식된 아궁이틀이 붙어있다. 고분에서 출토된 토제부뚜막에도 동일한 장식이 부착되어 있어 당시 생활상을 반영하고 있다. 이로 보아 부뚜막은 실용적인 도구이자 의례용으로 무덤에 묻힌 것을 알 수 있다. 이 무덤은 평안북도 내륙이 위치한 대형분이라는 위상을 가지고 있다. 고구려의 이동식 부뚜막은 적석총과 횡혈식석실묘 등 고분에서 출토되며, 이들은 대형 고분이라는 특성을 보이고 있다.
그림16 | 철제부뚜막(운산 용호동1호분 출토,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2) 쇠솥과 청동용기
고구려에서 취사용토기의 비중이 줄어들면서 그 대용으로 쇠솥이 보급되었다. 구의동보루에서는 쇠솥이 출토되었는데, 군사적인 방어시설에서 출토된 예로 보아 이동성을 가진 군사용으로 사용되었다. 고구려 유적에서 취사용토기가 적게 출토된다는 사실은 쇠솥의 보급과 관련을 가지고 있다. 쇠솥은 단독으로 사용하기도 했지만, 그 위에 시루나 분형토기 등과 조합되어 사용했을 것이다. 구의동보루에서는 온돌의 부뚜막 주변에서 쇠솥과 시루가 겹친 채 발견되어 세트관계임을 알 수 있다. 쇠솥과 시루가 함께 출토되는 것은 4세기 이후이며, 이 시기부터 쇠솥 위에 시루를 얹어 뜨거운 증기로 쪄낸 음식이 귀족의 밥상에 자주 오르게 되었다(사공정길, 2014).
고구려의 철제솥은 크게 네 유형으로 나뉜다. Ⅰ유형은 다리가 3개 달린 철제정(鼎)이다. 철제정은 집안 칠성산고분군, 환도산성, 동대자유적, 민주2대 등지에서 출토되었다. 모두 3개의 발이 달렸으며, 동체의 형태는 편평하여 불을 맞는 면이 넓게 형성되어 있다. 이 중에서 민주2대 출토품은 3개의 다리를 제외하면 Ⅲ유형의 철제솥과 형태과 거의 같다(그림17).
그림17 | 고구려의 쇠솥(강현숙·양시은·최종택, 2020)
- 1. 칠성산고분군 2. 환도산성 3. 동대자유적 4. 민주2대 5·6. 승리촌 7. 민주촌 8·10. 동대자유적 주변 9·14. 구의동보루 11. 국내성 12. 석대자산성 13. 오녀산성
Ⅱ유형은 동체의 형태가 횡타원형을 그리며 구연부가 직선을 형성하고 있다. 모두 부뚜막에 올려 고정하는 전이 달려 있으며, 어깨와 구연턱에 돌대가 돌아간다. 환인 오녀산성, 집안 승리촌(3점), 민주촌(3점), 동대자유적 주변(2점), 서울 구의동보루, 국내성 등에서 출토되었다. 승리촌 출토품은 3점 모두 동일한 형태이며, 동체 아래 바닥에 돌기가 나 있어 쇠솥의 무게를 바치는 지각 위에 두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승리촌의 쇠솥은 대형으로 다른 쇠솥에 비해 거의 2배의 규격이다. 승리촌의 것은 경주 천마총 출토품과 형태상 거의 유사하다. 이와 비슷한 형태가 장백 14구도관애에서 출토되었다. 나머지 이 유형은 모두 동체 바닥이 점차 돌기보다는 좀 더 편평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국내성의 것은 전이 위치한 바로 윗부분에서부터 구연부가 직립으로 길게 뻗어있는 것이 특징적이다. 대체적으로 바닥에 돌기가 있는 형태에서 편평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형식의 변화가 보인다. Ⅱ유형의 쇠솥과 동일한 형태의 흙솥이 있는 것으로 보아 동일한 기능을 하였다고 추정된다.
Ⅲ유형은 토기의 호 형태와 유사하여 철호(鐵壺)라 부를 수 있으며, 한강 유역의 고구려 보루유적에서 다수 출토되었다. 철호는 전이 달려있지 않으며, 가운데에 고리 3개가 가로로 달려 있다. 크기는 쇠솥의 절반 정도로 작은 형태에 해당한다(사공종길, 2014). 주로 서울 구의동보루, 아차산3보루(5점), 아차산4보루(8점), 시루봉보루, 홍련봉1보루(3점), 홍련봉2보루(2점), 홍련봉3보루(2점), 용마산2보루에서 출토되었다. 이 중에서 용마산2보루의 철호는 뚜껑이 달려 있는 형식이다. 구의동보루에서는 Ⅱ유형 쇠솥과 Ⅲ유형 철호가 아궁이에 걸린 채 나란히 배치된 상태로 출토되었다. 쇠솥과 철호가 실용적인 조리도구로 기능하였음을 알 수 있다.
Ⅳ유형은 동체가 동복과 유사한 형태이나 대칭으로 형성된 손잡이를 소뚜레모양의 고리로 연결하여 걸게 되어 있다. 갈고리에 걸어 지면에서 띄어 조리하는 방식이며, 심양 석대자산성, 환인 오녀산성 등에서 출토되었다.
이 중에서 가장 많이 출토된 유형은 Ⅱ유형이다. Ⅱ유형의 가장 큰 특징은 솥의 어깨에 편평한 전을 붙여 만들었다는 점이며, 부뚜막의 개량과 관련을 가지고 있다. 전을 붙이게 되면 쇠솥을 부뚜막에 안정적으로 걸칠 수 있어 지각이 필요하지 않게 된다. 이전 시기의 것에 비해 훨씬 더 원활한 취사를 가능하게 하였다. 이는 온돌에 부속된 부뚜막에서 전용 부뚜막이 실내 취사시설로 기능하기 시작하였음을 알려준다. 고구려 유적에서 보이는 토제 및 철제 부뚜막의 출현과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었다. 전 달린 솥이 나타나면서 부뚜막도 아궁이와 쇠솥이 놓이는 부분만 개방하여 불이 새는 것을 막을 수 있게 되었다. 쇠솥은 열의 전달을 빠르게 하고 물기의 침투를 막아 음식의 조리를 쉽게 하는 효과를 거두고 있다. 쇠솥의 용도는 고구려 안악3호분 주방 그림에서 부뚜막에 쇠솥을 걸고 그 위에 시루를 얹어 요리하는 모습에서 알 수 있다. 쇠솥에 시루가 조합된 양상은 서울 구의동보루에서 실제로 출토되었다.
고구려의 청동용기로는 정(鼎), 세(洗), 초두, 합(盒) 등이 있다. 정은 칠성산96호묘와 우산하68호묘에서 출토되었는데, 중국에서 제작되어 고구려로 전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세는 얕은 반형 동체에 짧은 다리가 달린 형태로 손을 씻는 용도로 보고 있으며, 중국에서 제작되어 전해진 것으로 보고 있다(강현숙·양시은·최종택, 2020). 뚜껑이 달린 합은 두 종류가 출토되었다. 하나는 얕은 굽이 달려있고 뚜껑에 십자모양의 손잡이가 부착된 것으로 칠성산96호묘 2호묘실에서 출토되었다. 다른 하나는 뚜껑에 화판장식을 하고 꽃봉오리모양의 꼭지를 부착한 것으로 국내성에서 채집되었다.
 
(3) 저장도구
고구려의 주요 생업은 농경이었으며, 어로와 수렵도 병행하였다. 농사는 처음에 밭농사 위주였으나 한반도 남부 지역으로 진출하면서 논농사의 비중이 늘어났다. 실제로 임진강 유역에 입지한 연천 무등리2보루에서 탄화미와 탄화조가 대량으로 수습되었고, 연천 호로고루유적에서도 쌀, 조, 콩, 팥 등의 탄화된 곡물이 다량으로 발견되었다. 호로고루에서 출토된 탄화 곡물은 지하창고에 보관되었다. 5세기 후반에서 6세기경에 한강과 임진강 유역의 성과 보루에서는 다량의 식량을 저장하는 지하창고가 있었다.
고구려 고분벽화에는 창고와 관련된 그림이 나오고 있다. 덕흥리벽화고분의 널방 서벽 북쪽 위에는 부경(桴京)이라 불리는 다락창고가 그려져 있으며, 팔청리벽화고분의 널방 동벽에는 머리에 검은 두건을 쓴 남성이 다락창고를 향해 걸어가는 장면이 있다. 집안 마선구1호묘의 곁방 남벽에는 부경에 해당하는 고상창고가 표현되어 있다. 고구려에서는 고분벽화에 보이는 고상창고에 곡물을 보관하였는데, 습기로부터 곡물을 장기간 보관하기 위한 창고로 보인다.
고구려에서는 논과 밭에서 수확한 곡물을 항아리에 넣어 고상창고인 부경이나 구덩이를 파고 만든 지하창고에 보관하였다. 고구려 유적에서 출토된 커다란 옹이나 항아리는 곡물을 저장하던 용기로 보이며, 곡물을 항아리에 넣어 창고에 장기간 보관하였던 것이다. 창고에 보관하던 곡물은 조리를 위해 디딜방아로 찧거나 절구에 넣어 빻았을 것이다. 약수리벽화고분의 앞방 동벽 아래 남쪽에는 디딜방아로 곡식을 찧는 장면과 빻은 곡물을 키질하는 모습이 한 화면에 그려져 있다(전호태, 2016).
 
2) 장송 및 기타 생활도구
고구려의 적석총과 횡혈식석실묘에서는 장례도구로서 관못, 관고리, 꺾쇠, 장막걸이 등이 출토되고 있다. 관못은 머리 모양에 따라 원두정과 방두정이 있으며, 일부 못머리가 없는 경우도 있다. 머리가 없는 것은 못 상단을 ㄱ자 형태로 꺾어서 사용하였다. 관못은 방두정보다 원두정이 압도적으로 많지만, 신부의 단면은 모두 방형이다(리광희, 2005; 강현숙·양시은·최종택, 2020). 관고리는 기본적으로 좌판과 이음쇠고리 및 원형의 손잡이로 구성되어 있다. 좌판은 원형과 화판형이 있으며, 좌판이 없이 출토되는 경우도 있다. 관을 연결하는 장송도구로 꺾쇠가 있으며, ㄷ자형으로 굽혀 목관이나 목곽을 고정하였다. 또한 무덤 내부에 장막을 설치하는 장막걸이쇠도 출토되었다.
고구려의 산성과 보루에서는 철제 차관, 문지도리쇠, 문확쇠 등 성곽 부속구가 발견된다. 철제차관은 수레굴통쇠 또는 수레굴대라고 불리며, 수레바퀴축을 끼워 돌아가도록 하는 도구이다. 기본적으로 수레의 부속구로서 기능하였으나 산성의 문지 부근에서 출토된 예도 많아 일찍부터 문과 관련된 부속구로 보는 경향이 있었다. 실제로 고구려 유적 중에서 환도산성 2호문지에서는 같은 형태의 대형 차관 내부에 문지도리쇠가 결합된 상태로 출토되었으며, 구의동보루에서도 차관과 문지도리쇠가 출토되었다. 차관이 성문과 관련되었을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차관은 수레 부속품으로 사용된 경우와 문지도리 부속품으로 사용된 경우가 있다(강현숙·양시은·최종택, 2020). 한강 유역의 홍련봉1보루에서는 건물지 입구 쪽 돌확 주변에서 확쇠 2점이 출토되었는데, 문지도리 아래위에 하나씩 장착된 것으로 추정된다. 용마산2보루와 환도산성 궁전지 등 건물지 주변에서 다양한 형태의 문고리가 출토되었으며, 다양한 형태의 대상철기가 출토되었는데, 목제문에 부착하였다고 추정된다.
 
3) 한반도 남부 지역의 생활도구에 보이는 고구려의 영향
5~6세기대 신라 적석목곽묘에서 출토된 고구려계 문물은 관과 이식, 대장식과 같은 금공품도 있지만, 청동합, 은합 등과 금속제용기가 주류를 이룬다. 금속제 용기는 황남대총 남분에 다수 부장되기 시작하였으며, 5세기 후반 이후에 조성된 왕릉급 무덤에서도 청동용기는 지속적으로 발견되었다. 경주 금관총의 청동제사이호, 서봉총의 은합, 호우총의 청동호우 등이 이에 해당한다. 호우총에서 출토된 호우에는 광개토왕과 관련된 명문이 새겨져 있으며, 꽃봉오리모양의 손잡이가 달려있다. 서봉총의 은합은 ‘연수(延壽)’라는 연호와 명문이 새겨져 있으며, 얕은 굽이 달려있고 뚜껑에는 십자모양의 손잡이가 달려있다. 호우총의 호우와 서봉총의 은합은 전형적인 고구려의 용기로서 고구려에서 제작하여 신라로 보낸 것으로 추정된다. 경산 조영EⅡ1호분에서도 고구려계 청동합이 출토되었다.
고구려의 쇠솥은 5세기 신라 고분에서 많이 발견된다. 신라 적석목곽묘에서 출토된 쇠솥, 청동합, 청동솥 등은 고구려제이거나 그 영향을 받은 조리용기이다(국립중앙박물관, 2010). 신라의 쇠솥에는 다리를 떼낸 항아리 동체부를 뚜껑으로 사용되었다. 황남대총 남분에서는 청동솥과 더불어 청동시루도 출토되었는데, 청동시루는 원형 구멍에 띠손잡이를 부착한 고구려제이다. 신라 고분에서 출토된 쇠솥은 황남대총, 금관총, 금령총, 식리총, 서봉총, 금관총, 호우총 등 적석목곽묘에서 다수 출토되었으며(김은경, 2015), 뚜껑은 토기 발을 잘라 사용하였다. 신라의 쇠솥이 신라만의 독창적인 특성을 반영하고 있으나 초기에는 고구려의 영향에서 출발하였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의 생활도구는 백제 사비기 생활용기와 취사도구에도 영향을 끼치고 있다. 고구려적인 요소가 나타나는 백제 토기는 사비도성 주변이나 익산 왕궁리유적, 부여 정암리가마터에서 확인되는데, 시루나 접시 등 생활용기와 부뚜막, 굴뚝 등 취사도구에서 주로 보인다. 그러나 사비기 토기에는 그릇 표면에 평행타날문이 시문된 것에 비해 고구려 토기는 무문으로 구별된다. 특히 고구려적인 요소는 주로 부뚜막 시설과 관련된 것이 많다는 특징이 있다(강현숙, 2007). 백제 사비기 토제부뚜막틀은 그 형태나 문양이 운산 용호동1호분 출토 부뚜막틀과 유사하여 고구려의 영향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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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활도구 자료번호 : gt.d_0009_0050_0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