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장신구의 사례와 특징
1. 장신구의 사례와 특징
1) 관(冠)
고구려인이 어떤 관을 착용하였는지에 대해서는 『삼국지』, 『주서』, 『북사』, 『수서』, 『구당서』, 『신당서』에 간략한 기록이 남아 있다. 『삼국지』 고구려전에 “대가(大加)와 주부(主簿)는 머리에 책(幘)을 쓰는데, 중국의 책과 흡사하지만 뒤로 늘어뜨리는 부분이 없다. 소가(小加)는 절풍을 쓰며 그 모양이 고깔과 같다”라고 하였고, 『주서』 고려전에는 “벼슬이 있는 사람은 그 위에 새의 깃을 2개 꽂아 뚜렷한 차이를 나타낸다”라고 하였으며, 『북사』고려전에는 “사람들은 모두 머리에 절풍을 쓴다. 그 모양이 고깔과 같은데 벼슬하는 사람(士人)은 2개의 새깃을 더 꽂았다. 귀한 사람들은 그 관을 소골(蘇骨)이라고 하며 대부분 자주빛 비단으로 만들어 금이나 은으로 장식한다”고 하였다. 이 기록에 의하면 고구려 관인들은 비단 관에 새깃 2개를 꽂고 금테나 은테를 섞어 두른다고 하였는데, 새깃을 꽂는 목적은 신분 차이를 드러내기 위함이라고 한다.
고분벽화에 묘사된 인물상 가운데 새깃을 꽂은 예는 개마총, 쌍영총, 무용총 등에서 확인된다. 세부 묘사에 차이가 있지만 기본적으로 직물로 만든 관에 새깃털모양장식을 끼운 것이다. 이를 조우관(鳥羽冠)이라고 부른다.

그림1 | 고구려의 관
- 1·2. 개마총 벽화 3·5. 집안 4. 태왕릉
- 1·2. 개마총 벽화 3·5. 집안 4. 태왕릉
이 중 개마총 벽화에 묘사된 관은 전 집안 출토 관식과 매우 유사하다. 가운데에 곧고 길쭉한 입식(立飾)이 있고 옆에 새날개모양장식이 부착된 것처럼 보인다. 중간 입식의 가장자리에는 깃털모양의 표현이 보이며, 맨 꼭대기는 조금 동그란 편이고 투조문양이 있다. 아프라시아브궁전 벽화와 당 이현묘(李賢墓) 벽화에 묘사된 인물상의 경우 국적에 대한 논란이 있지만(노태돈, 2003), 고구려 고분벽화의 인물상과 마찬가지로 고깔모양관모에 새날개모양장식을 꽂고 있다.
유적에서 실물로 발굴된 유물 가운데 고구려의 관이 있다. 그중 집안 우산하3105호분 출토 관식은 금동제품이며 양 날개부와 중간 입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표면에 구멍이 많은 것으로 보면 원래 영락이 달렸던 듯하다. 입식의 가장자리에 깃털모양장식이 표현되어 있다(孫仁杰·遲勇·張雪岩, 1993; 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 編, 2009).
요령성박물관 소장 집안 출토 금동관식의 경우 중간 입식의 가장자리에 끌로 오려낸 깃털모양장식이 있다. 외형이 장타원형에 가깝고 맨 위에는 삼엽문이 투조로 표현되어 있다. 좌우의 장식은 새날개모양이며 전면에 둥근 달개가 가득 달려 있다. 관식의 일부로 보이는 다각형판도 있다. 이 판의 윗부분은 톱니모양을 띤다(孫仁杰·遲勇·張雪岩, 1993).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 역시 전형적인 고구려 관식이다. 3개의 입식이 있는데 전체 형태는 장방형에 가깝고 가장자리는 깃털모양으로 장식되어 있다. 입식의 중간에 세로로 8개의 삼엽문이 투조로 표현되어 있다. 함께 출토된 것으로 추정되는 산자형(山字形)장식은 하부가 곡선적이며 내부에는 삼엽문이, 가장자리에는 원문과 삼각형문이 투조로 표현되어 있다(신대곤, 1997). 북연 풍소불묘의 오각형장식(黎瑤渤, 1973)에 비견되며, 신라 조익형(鳥翼形)관식의 중간 부위 장식과 연결시켜 볼 수 있다.
집안 태왕릉 출토품 가운데에도 금동관이 포함되어 있다. 모두 분리되어 출토되었기 때문에 원래 어떤 모습으로 조합될지 분명하지 않다. 고깔모양관모 2점, 새날개모양장식 1점, 관테로 보이는 장식품 여러점이 수습되었다(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 外, 2004). 고구려 유적에서 이같은 고깔모양장식이 발굴된 것은 유례가 드물고 새날개모양장식도 경주 황남대총 남분 출토 금제 및 은제 관식과 유사하다.

그림2 | 전 집안 출토 금동관식의 삼엽문
- 1. 요령성박물관 소장 2.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1. 요령성박물관 소장 2.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이러한 고구려의 관문화는 신라에 큰 영향을 주었다. 신라의 5세기 무덤에서는 금속제관이 출토되는데, 그것의 기원을 고구려에서 찾을 수 있다. 고구려 금동관식에서 보이는 여러 특징적인 요소인 조익형관식, 산자형장식, 깃털형장식, 삼엽문 등이 신라 초기 관에서 그대로 확인되기 때문이다.
의성 탑리고분 Ⅰ곽 출토 금동관은 대륜(臺輪) 위에 3개의 입식이 부착되어 있는데, 입식의 가장자리에 가위로 오려 비틀어 꼰 깃털형장식이 있다. 입식의 맨 위에는 집안 출토 관식처럼 둥글게 투조된 부분이 있다. 황남대총 남분에서 출토된 여러 점의 관 가운데 소위 전액식(前額式)관으로 불리는 은관과 금동관에도 깃털형장식이 있다.
신라의 전형적인 관식은 조익형이다. 새가 날개를 활짝 펴고 날아가는 모습을 연상시키므로 조우관으로 불러도 무방할 것 같다. 그 조형은 요령성박물관 소장 금동관식처럼 고구려에서 찾을 수 있다. 다만 가운데 입식이 없고 오각형장식이 더 곡선적이며 관모에 끼울 수 있도록 아랫부분이 뾰족하게 만들어져 있다. 대표적인 예가 황남대총 남분 출토 금관식과 금동관식이다. 고구려의 조우관과 유사한 형태의 관이 포항 흥해 학천리 신라묘에서 출토된 장경호, 경주에서 채집되어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 중인 장경호편, 황룡사지 출토 인물문 벽돌에 묘사되어 있어 두 나라의 관문화가 유사하였음을 알려준다. 다만 발굴된 유물 가운데 고구려에서 만들어져 신라로 전해진 것을 찾기는 어렵다. 발굴된 유물에는 고구려와 조금 다른 신라적 색채가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신라 양식 관의 전형은 수지형(樹枝形)과 녹각형(鹿角形) 입식을 갖춘 금제대관(帶冠)이다.
이처럼 적석목곽분 축조기의 신라문화에 고구려적인 요소가 풍부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 계기는 4세기 후반 이후 고구려와 신라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한 점에서 찾아볼 수 있다. 400년 고구려군의 남정(南征) 이후 두 나라의 우호관계는 5세기 중엽까지 지속된다. 이 기간 동안 고구려의 공예품이 경주로 다수 이입되었고 그것을 신라화한 물품 제작이 활발했던 것 같다. 450년의 고구려 변장(邊將) 살해사건을 계기로 두 나라는 약간의 갈등을 겪었지만 곧 회복되었으므로 551년 진흥왕이 백제와 연합하여 고구려가 영유하고 있던 한강 유역을 공격하기 전까지 고구려의 문물이 경주로 많이 전해졌을 것이다.
고구려와 신라의 외교관계에서 보면 고구려 물품이 신라로 전해진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아직 고구려 유적에서 적석목곽분 축조기의 신라 유물이 출토된 사례가 확인되지 않는다. 중국 남북조시대 유적에서 백제와 신라 유물이 출토되지 않는 현상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겠다.
이외에 평양 청암리토성 부근에서 출토된 금동관 2점은 대륜을 갖춘 것이며 얇은 금동판에 인동초가 중심무늬로 장식되어 있다. 입식에는 활활 타오르는 불꽃 속에서 인동초가 피어나는 모습이 표현되어 있다. 입식 가운데는 가장자리를 불꽃무늬 대신 가위로 오려낸 다음 비틀어 꼬아 장식한 것도 있다. 대륜에는 인동초뿐만 아니라 연꽃도 장식되어 있다. 맨 아래쪽 좌우에는 마치 옷고름과 비슷한 드리개가 부착되어 있다(황욱, 1958).
이 금동관은 고구려를 대표하는 왕관으로 알려져 있으나, 고구려의 왕이나 귀족이 썼던 실용품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주 001 만든 기법이나 모양이 보통의 관과 다르기 때문에 나무로 만든 불상의 머리를 장식하였던 보관으로 보는 견해가 더 설득력을 얻고 있다.
2) 귀걸이
고구려의 장신구로는 귀걸이의 출토 사례가 가장 많다. 태환이식과 세환이식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태환이식의 경우 고구려적 특징을 더 잘 보여준다(東潮, 1988; 三木ますみ, 1996; 유나리, 2015; 전호태, 2016). 전 세계적으로 출토되는 귀걸이 가운데 고구려의 사례처럼 주환–유환(遊環)–중간식–수하식을 모두 갖춘 예는 드물다. 태환이식은 페르시아나 동남아시아에서도 출토되고 있지만 소환구체(小環球體)와 심엽형 혹은 추형의 수하식을 갖춘 것은 고구려적인 귀걸이라 부를 만하다. 태환이식과 거의 동일한 기법으로 제작된 세환이식의 경우 신라 초기 귀걸이와 유사하여 관과 함께 신라 장신구문화의 기원에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한편 ,서울 석촌동고분군 출토 귀걸이를 보면 백제 귀걸이문화의 개시에 고구려의 영향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 태환이식
고구려의 태환이식에 영락이 장식된 예는 없으며 다른 나라 귀걸이보다 더 간소하다. 태환이식은 중간식과 수하식의 구조와 형태에 따라 몇 가지로 구분된다.
집안 마선구1호분 출토품(吉林省博物館輯安考古隊, 1964), 집안 칠성산고분군·승리촌 수집품(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 外, 2010), 청원 상봉리 신고품(박영복·김성명, 1990), 평양 만달산록7호분과 안학궁 출토품(조선유적유물도감편찬위원회, 1990), 강서 보림리 대동6호분 출토품, 전 서울 능동 신고품, 경주 황남대총 북분 출토품 등은 유환 아래에 매달린 연결고리와 구체, 저울추모양의 수하식이 땜으로 접합되어 있다(문화재연구소, 1985). 이와 유사하지만 수하식의 형태가 심엽형을 띠는 이식으로 진천 회죽리 신고품(박영복·김성명, 1990), 평안남도 대동군(조선유적유물도감편찬위원회, 1990)과 집안 마선구고분군 출토품(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 外, 2002)이 있다. 이외에 집안 마선구412호분 귀걸이처럼 중간식과 수하식이 땜으로 연접되어 있지 않으며 각각 분리된 것을 판상의 금구로 연결한 예도 있다. 특히 중간식의 형태는 신라 귀걸이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소환입방체이다.
고구려 귀걸이 가운데 초기형은 집안 마선구1호분, 칠성산고분군 수집품이다. 크기가 작은 편이고, 중간식과 수하식의 구별이 뚜렷하지 않다. 무덤의 연대는 4세기 후반~5세기 초반이다.

그림3 | 심엽형 수하식을 갖춘 귀걸이
- 1. 중도동F구역 삼국시대 고분 2. 마선구고분군 3. 대동군 4. 회죽리
- 1. 중도동F구역 삼국시대 고분 2. 마선구고분군 3. 대동군 4. 회죽리

그림4 | 추형 수하식을 갖춘 귀걸이
- 1. 중도동C2구역 1호분 2. 승리촌 3. 상봉리 4. 남성골산성
- 1. 중도동C2구역 1호분 2. 승리촌 3. 상봉리 4. 남성골산성
고구려는 평양 천도 후 한반도 중부지역에 대한 관심을 강화하였다. 그 시기의 귀걸이가 춘천 중도동유적에서 출토된 바 있다. 중도동C2구역 1호분 귀걸이는 주환, 유환, 연결금구, 중간식, 수하식을 모두 갖추었다. 중간식은 소환구체이고 수하식은 추형이다. 집안 승리촌 수집품과 유사하다. 양자는 주환의 크기와 중간식 및 수하식의 형태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다. 특히 위쪽 연결고리와 소환구체를 연결하는 방식, 소환구체의 형태, 수하식 맨 아래쪽 추형장식의 형태가 조금 다르다. 중도동F구역 삼국시대 고분 귀걸이는 일부 부품이 결실되었지만 집안 마선구고분군, 평안남도 대동군, 진천 회죽리 수집품과 같은 유형이다. 중도동 귀걸이는 집안 및 평양 주변 출토품과 공통적 요소를 갖추고 있어 평양 천도 직후에 제작된 물품일 가능성이 있다.

그림5 | 마선구1호분과 황남대총 북분 귀걸이
- 1. 마선구1호분 2. 황남대총 북분
- 1. 마선구1호분 2. 황남대총 북분
한편, 중도동 귀걸이보다 조금 늦은 시기의 자료가 중원 지역 출토품이다. 진천 회죽리와 청주 상봉리 귀걸이는 정식 발굴된 것이 아니라서 고고학자료로서는 한계가 있지만, 고구려의 중원 진출 시점 이후 반입되었을 공산이 크다. 고구려가 백제의 왕도 한성을 함락시킨 것이 475년이고 그에서 멀지 않은 시점에 고구려군이 진천, 청주를 거쳐 금강변까지 진출한 것으로 보인다. 그 이후 상당 기간 중원 지역은 고구려의 수중에 들어갔고 그러한 역사적 배경하에서 고구려 귀걸이가 이 지역으로 전해졌을 것 같다.
서울 능동 출토로 전하는 태환이식은 절정기의 고구려 귀걸이 가운데 가장 화려하다. 이 귀걸이는 주환과 유환, 중간식과 수하식으로 구성된다. 주환과 유환에 중간식과 수하식이 달려 있는데 속 빈 구슬로 만든 중간식과 추모양수하식, 그리고 유환에 연결하는 고리가 모두 땜으로 접합된 일체형이다. 연결고리와 중간식의 표면에는 금사와 금립을 조밀하게 붙여 표현한 꽃무늬가 있다.
고구려 태환이식 가운데 경주 황남대총 북분에서 출토된 3쌍의 귀걸이는 주목된다. 이 귀걸이는 신라의 일반적인 귀걸이와는 꽤나 다른 특징을 보이며 집안 마선구1호분 출토품을 비롯한 고구려 귀걸이와 유사하다. 이 귀걸이의 특징은 중간식과 수하식에서 찾아볼 수 있다. 연결금구와 중간식, 수하식이 모두 땜으로 접합되어 있는데 중간식이 공구체인 것과 소환구체인 것으로 나누어진다.
(2) 세환이식
세환이식은 태환이식보다 다양하지만 신라나 백제 귀걸이에 비하여 간단하다. 이는 중간식과 수하식의 형태에 따라 몇 가지로 세분된다.
전 영원 출토 귀걸이는 주환에 유환, 연결금구, 소환입방체, 추형수하식이 차례로 연결된 것이다. 집안 칠성산고분군 수집품(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 外, 2010), 강서 보림리 대동19호분과 용강 후산리 추동8호분, 태성리 저수지내고분군(전주농, 1963), 평양 만달산록7호분 출토품은 주환에 유환, 연결금구, 소환구체, 심엽형 수하식이 차례로 매달려 있다(野守健·榧本杜人, 1938). 강서 약수리벽화분 출토품(조선유적유물도감편찬위원회, 1990), 칠성산고분군 수집품은 주환에 금사로 만든 연결금구가 걸려 있고 그 아래에 사슬과 공구체가 차례로 달려 있다(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 外, 2010). 전 영원 출토품 가운데에는 주환에 금판으로 만든 연결금구가 걸려 있고 그 아래에 소환구체, 사슬, 추형 수하식이 매달린 것이 있다.
마선구412호분 출토품은 주환이 태환과 세환의 중간 정도 굵기이고 중간식은 소환입방체, 수하식은 심엽형이다. 중간식과 수하식 사이에 사슬이 끼워져 있다. 이 귀걸이와 유사한 사례가 서울 석촌동 1호분과 2호분 사이 유물 집중부에서 출토된 바 있다. 이 귀걸이는 주환이 금동이고 유환에서 수하식까지는 금이다. 위로부터 소환입방체, 사슬, 공구체가 차례로 연결되어 있다(한성백제박물관, 2021). 중국 중원 왕조, 삼연, 신라 유적에서 이와 유사한 귀걸이가 아직까지 출토된 바 없어 백제 한성기 귀걸이에 고구려의 영향이 존재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림6 | 고구려의 영향을 받은 백제산 귀걸이
- 1. 석촌동 의례유구 2. 능안골32호분 3. 야하타오쓰카2호분
- 1. 석촌동 의례유구 2. 능안골32호분 3. 야하타오쓰카2호분
산성하고분군 수집품은 중간식이 공구체이고 상하에 세로로 고리 1개씩을 땜으로 접합한 형태인데, 기본형은 태환이식과 유사하다. 이러한 유형의 세환이식은 사비기 백제의 귀걸이와 동일한 기법으로 제작되었다. 전형적인 예는 부여 능산리 능안골32호분에서 출토되었다.
그간 부여 능산리 능안골32호분 출토품과 유사한 귀걸이가 여러 유적에서 발굴된 바 있다. 부여에서는 관북리 연지, 왕흥사지 목탑지, 능산리 능안골 32호분과 49호분, 염창리 옹관묘, 염창리Ⅰ-2호분, 정암리 수작골1호분에서 출토되었다. 그 밖에 당진 채운리1호분, 홍성 석택리A-2지구 1지점1호분, 보령 구룡리4-14호분, 일본 오카야마현 야하타오쓰카(八幡大塚)2호분에서 출토되었다. 야하타오쓰카2호분 출토품은 능안골32호분, 왕흥사지 목탑지 출토품과 유사하며 6세기 후반 백제의 왕실공방에서 제작된 것 같다(이한상, 2022).
국내유적에서 출토된 세환이식 가운데 강릉 병산동 공항대교 도로유적 29호분 출토품은 중간식이 소환구체 1개로 구성되어 있는 유일한 예이다. 또한 이 귀걸이의 소환구체는 중간에 2줄의 각목대를 돌리고 있어 일반적인 신라 귀걸이와는 차이를 보여준다. 현재까지의 자료로 보면 이 귀걸이는 고구려산일 가능성이 있다. 이는 동해안이 신라와 고구려 문화의 접점이라는 역사적 상황과 관련이 있을 것 같다(국립경주박물관, 2001).
이외에 강동군 순창리의 굴바위 2호분과 5호분 출토 금동제귀걸이의 경우 제작시기에 대하여 논란이 있다. 북한 학계에서는 고조선시기(기원전 25세기~기원전 24세기)로 편년하면서 고조선 공예기술의 선진성을 보여주는 자료라 주장하고 있다(조선기술발전사편찬위원회, 1996). 그러나 이 귀걸이의 제작기법과 외형은 만달산록7호분 등 고구려 귀걸이와의 유사도가 높으며, 청동기시대의 유사한 귀걸이가 전무하다는 점을 고려하면 고구려 귀걸이로 볼 수 있다.
3) 팔찌
고구려의 팔찌는 출토 사례가 매우 적다(박희명, 2001). 그 가운데 고식으로 추정되는 자료가 시중군 심귀리75호분 출토품이고, 가장 전형적인 것이 평양 만달산록15호분(朝鮮總督府, 1938)이나 고성군 봉화리1호분 팔찌이다(백련행, 1967).
고구려의 팔찌 가운데 가장 수량이 많은 예는 표면에 아무런 장식이 없는 것이다. 심귀리75호분, 대성산 식물원구역4호분(김일성종합대학 고고학급민속학강좌, 1973), 용강군 후산리 내동4호분과 추동9호분 팔찌가 그에 해당한다.
다음으로 표면에 장식된 예로는 만달산록15호분(1점), 봉화리1호분(1점), 황북 보산군 천덕동 출토품(2점)이 해당된다(조선유적유물도감편찬위원회, 1989). 이 가운데 앞의 2건은 동제품이고 천덕동 출토품은 은 제품이다. 팔찌의 표면에 돌기가 표현된 점이 특징적이다.

그림7 | 고구려의 팔찌
- 1. 만달산록15호분 2. 봉화리1호분
- 1. 만달산록15호분 2. 봉화리1호분

그림8 | 백제와 가야의 6세기 팔찌
- 1. 내산리34호분 2. 능산리사지
- 1. 내산리34호분 2. 능산리사지
이 4점의 팔찌는 삼국시대 팔찌의 전체 흐름에서 보면 6세기적인 특징을 보인다. 신라와 가야의 경우 경주 금령총, 노서리215번지고분 출토품(有光敎一·藤井和夫, 2000), 고성 내산리34호분 주실 출토품에 비견되며, 백제의 경우는 567년이라는 매납연대를 알 수 있는 능산리사지 목탑지 하부 출토품(국립부여박물관 외, 2000)과 유사하다.
팔찌의 변화는 윤(輪)의 단면에서 잘 관찰된다. 즉, 원형·타원형에서 방형으로, 다시 장방형으로 변화하며 돌기의 형태가 둥근 것에서 사다리꼴로 바뀐다. 그간 출토된 자료 가운데에는 645년의 매납연대를 가진 황룡사지 목탑지 하부 출토품(김정기 외, 1983)이 가장 늦은 요소를 지니고 있다.
4) 허리띠장식
고구려의 허리띠장식(帶金具)은 진(晉)과 삼연의 영향을 함께 받았다. 산성하 152호분(集安縣文物保管所, 1983; 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 外, 2010)과 159호분, 우산하3560호분 출토품(장설암, 2001)은 진식대금구과 유사도가 매우 높다. 이 가운데 산성하152호분 출토품과 우산하3560호분 출토품은 제작의장이 정교한 편이어서 완제품이 이입된 것으로 보이지만 산성하159호분 출토품은 고구려에서 만들어졌거나 삼연으로부터의 이입품일 가능성도 있다.
칠성산1196-1호분(吉林省文物志編委會, 1983), 산성하725호분, 우산하151호분, 산성하160호분(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外, 2010), 산성하330호분 출토품(柳嵐·張雪岩, 1984)처럼 과판에 엽문(葉紋)이 투조로 표현된 것과 칠성산873호분(吉林省文物工作隊·集安文管所, 1984), 우산하3560호분(孫仁杰·遲勇·張雪岩, 1993), 고산리10호분(채희국, 1964), 호남리 사신총 출토품(梅原末治·藤田亮策, 1966)처럼 방형판에 2개의 연결고리로 수하식을 매단 것이 주종을 이룬다. 이외에 우산하 3105호분, 3162호분, 3296호분(孫仁杰·遲勇·張雪岩, 1993; 장설암, 2001)과 환도산성 왕궁지 출토품처럼 타원형판을 엮어 만든 요패도 있다(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 外, 2004).
이 가운데 칠성산873호분, 우산하3560호분, 고산리10호분 출토품은 진식의 용문투조과판의 계보를 잇는 것으로 보인다. 위에는 방형과판, 아래에는 말각방형장식을 2개의 경첩식고리로 연결한 것으로 간략화된 용무늬가 장식되어 있다. 호남리 사신총 출토품의 경우 다른 예보다 늦은 시기로 편년할 수 있는 자료인데, 방형판의 중앙에 인동초가 표현되어 있다.

그림9 | 고구려의 허리띠장식
- 1. 칠성산873호분 2. 우산하3560호분 3. 고산리10호분 4. 호남리 사신총 5. 칠성산1196-1호분 6. 산성하725호분 7. 산성하330호분 8. 우산하151호분 9. 우산하3162호분 10. 우산하 3296호분·3105호분 11. 환도산성
- 1. 칠성산873호분 2. 우산하3560호분 3. 고산리10호분 4. 호남리 사신총 5. 칠성산1196-1호분 6. 산성하725호분 7. 산성하330호분 8. 우산하151호분 9. 우산하3162호분 10. 우산하 3296호분·3105호분 11. 환도산성

그림10 | 고구려의 영향을 받아 제작된 신라 허리띠장식(천마총)
이와 달리 칠성산1196-1호분 출토품의 경우 심엽형 수하식이 달려 있다. 표현된 문양은 좌우 대칭이며 특히 심엽형 장식의 표면에 소뿔모양의 이파리장식이 표현되어 있고 내부에 삼엽문이 거꾸로 표현된 점은 북표시 라마동IIM275호분(遼寧省文物考古硏究所, 2002)이나 산성하725호분 출토품에 비견된다.
산성하725호분 출토품은 혁대에 부착되는 방형판의 도안이 경주 서봉총 출토 금제과판(小泉顯夫, 1927; 朝鮮總督府博物館, 1933)과 유사하다. 다만 수하식의 좌우 어깨 부위에 엽이 없다는 점, 내부의 이파리가 2엽이 아니라 3엽이라는 점 등은 다르지만 방형판 도안의 유사성은 지적할 수 있다. 재질 또한 신라의 허리띠장식에서 다수를 차지하는 은제품이라는 점도 주목된다.
진식이나 삼연식 허리띠장식의 경우 요패가 공반된 바 없다. 그간 타원형과 방형의 금속판을 이어서 만든 요패가 출토된 곳은 신라의 중대형 무덤과 백제의 무령왕릉(이한상, 1993) 밖에 없었으나 우산하3296호분과 3105호분, 환도산성 왕궁지에서 출토된 요패는 신라 요패의 기원을 생각하게 하는 중요자료이다. 이와 아울러 우산하3162호분 출토품은 일반적인 과판과는 형태가 다르며 잔존양상으로 보면 요패가 매달려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보다 늦은 시기에 유행하는 허리띠장식은 역심엽형 과판을 부착한 것이다. 그간 고구려의 허리띠장식을 설명하면서 바로 이 역심엽형 과판의 존재에 대한 관심이 적었다. 그리고 역심엽형 과판으로 보고된 자료 가운데에는 허리띠장식이 아닌 화살통장식 부속구 등이 포함되어 있어 혼란스러운 부분이 있었다.

그림11 | 고구려의 허리띠장식
- 1. 덕화리3호분 2. 오녀산성 3. 시가묘지M7호분 4. 시가묘지M9호분
- 1. 덕화리3호분 2. 오녀산성 3. 시가묘지M7호분 4. 시가묘지M9호분
고구려의 대표적인 역심엽형 과판으로 대동군 덕화리3호분 출토 은제품(조선유적유물도감편찬위원회, 2000), 오녀산성 출토 동제품(遼寧省文物考古硏究所, 2004), 무순 시가묘지 M7호분 은제품 및 M9호분 철제품을 들 수 있다(遼寧省文物考古硏究所, 2007). 덕화리3호분 출토 허리띠장식은 교구나 과판, 대단금구의 형태나 제작기법이 6세기대 신라나 백제의 허리띠장식과 매우 유사하다. 그 가운데 특히 능산리사지 목탑지 출토품과 유사함을 지적할 수 있다. 부여 능산리사지 목탑지 하부 출토품은 공반된 창왕명사리감(昌王銘舍利龕)의 연대로 보면 567년에 매납된 것으로 볼 수 있어 덕화리3호분의 연대를 추정하는 데 참고가 된다. 오녀산성과 시가묘지M7호분 출토품은 재질이 다르지만 제작기법은 기본적으로 유사하다. 이와 비교할 수 있는 자료로 639년에 매납된 익산 미륵사지 서탑, 645년 무렵 매납된 것으로 보이는 경주 황룡사지 목탑 하부 출토품을 들 수 있다(국립문화재연구소, 2009; 국립문화재연구소·익산시, 2009).
미륵사지 출토품은 은제품이다. 과판은 표면에 4개의 못이 장식되어 있다. 이면에는 ∩자형 고리가 있는데, 능사나 왕흥사지 과판과 달리 땜으로 지판에 직접 부착한 것이다. 은제대단금구는 전체 형태가 규형(圭形)에 가깝다. 띠 연결부의 표면에는 7개의 못이 일정한 간격을 이루며 박혀 있고 이면에는 연미상(燕尾狀)의 은판장식이 부착되어 있다. 황룡사지 출토품은 띠 연결부에서 하부로 내려오면서 약간의 굴곡이 있다. 향후 자료가 더욱 증가되면 전체적인 변화의 방향을 알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현재까지의 자료에서 본다면 고구려의 역심엽형 과판을 부착한 허리띠장식은 같은 시기 신라, 백제의 그것과 유사한 면모를 지녔던 것 같다.
5) 금동신발
고구려의 금동신발은 관식과 마찬가지로 출토 사례가 매우 적은 편이다. 전형적인 예는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전 집안 출토품이며, 마선구고분군 수집품(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外, 2010), 마선돼지농장 부근 고분, 우산하3109호분, 우산하고분군 수집품(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 外, 2010), 칠성산M1223호분 출토품, 장군총 제대(祭臺) 출토품(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 外, 2004)이 알려져 있다.
이 금동신발의 공통점은 신발의 바닥면만 남아 있고 바닥에 금속제 못이 박혀 있다는 점이다. 신발 바닥판의 가장자리를 잘 살펴보면 가죽이나 천으로 만든 신발과 접합하기 위한 자그마한 구멍이 촘촘히 뚫려 있음을 알 수 있다. 대부분 크기가 너무 크고 약하게 만들어져 있어 장례용품일 가능성이 있다. 신발의 길이는 30~34cm 정도이며 바닥판에 부착된 금동못의 수는 22~60개로 다양하다.

그림12 | 고구려의 금동신발
- 1. 마선돼지농장 부근 고분 2. 전 집안 3·5. 마선구고분군 수집 4. 우산하고분군 수집
- 1. 마선돼지농장 부근 고분 2. 전 집안 3·5. 마선구고분군 수집 4. 우산하고분군 수집
흉노나 선비족뿐만 아니라 서진과 동진에서 위진남북조시대에 이르기까지의 중국 무덤에서 금동신발이 출토되는 경우는 없다. 금동신발의 하부에 금속못이 박힌 것은 고구려, 백제, 신라, 왜의 유적에서만 출토되며 그것의 기원지는 고구려일 가능성이 높다.
6) 고구려 양식 장신구
고구려의 장신구는 주변 여러 나라 장신구와 공통점과 차이점을 지닌다. 공통점은 백제와 신라의 장신구에서 일부 보이고, 차이점은 거의 모든 나라의 장신구에서 확인된다. 그만큼 고구려의 장신구는 고구려적 색채가 짙어, 이를 고구려 양식 장신구라 부를 수 있다. 백제, 신라의 장신구와 공통인 점은 고구려 장신구문화가 영향을 준 부분이다. 따라서 장신구를 통해 고구려문화의 독자성과 탁월성을 엿볼 수 있다. 앞에서 살펴본 바를 일부 발췌하여 고구려 장신구의 특징을 강조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조우관이다. 고구려 고분벽화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들은 머리에 새깃털모양장식을 부가한 사례가 많다. 아프라시아브궁전 벽화 속 인물이나 당 이현묘 벽화 속 인물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무덤에서 출토된 유물도 유사한 면모를 보인다. 집안 출토 관식의 경우 새가 날개를 펴고 나는 모습이다. 이를 조우관 혹은 조우형관이라 부른다. 이러한 유형의 관은 고구려, 신라, 가야, 백제를 제외한 곳에서는 거의 출토되지 않는다. 그것은 바로 중국에서 동이(東夷)라고 인식한 지역에서만 한정적으로 출토되는 독특한 관이다.
둘째, 수식 갖춘 귀걸이다. 전 세계의 귀걸이 가운데 고구려 귀걸이처럼 주환–유환–중간식–수하식을 모두 갖춘 예는 드물다. 특히 태환이식이 더 고구려적이다. 태환이식은 페르시아나 동남아시아에서도 출토되지만 소환구체나 심엽형 혹은 추형 수하식을 갖춘 것은 고구려적인 귀걸이라 부를 만하다. 이러한 고구려 귀걸이를 충실히 수용하여 더욱 발전시킨 것이 신라 귀걸이다. 신라 무덤 속에서는 약 1,000여 점의 귀걸이가 출토되었으며 삼국시대 귀걸이 가운데 가장 화려하고 정교하다.
셋째, 타원형 요패를 갖춘 허리띠장식이다. 고구려 허리띠장식의 특징적 요소 가운데 타원형 요패를 들 수 있다. 원래 요패란 북방 유목민이 말 위에서 생활도구나 약재를 쉽게 사용할 수 있도록 고안한 것인데, 고구려 출토품보다 더 오래된 금속제품은 잘 확인되지 않는다. 귀걸이와 마찬가지로 이러한 고구려 양식 허리띠장식은 신라 고분에서 그 절정을 볼 수 있다. 황남대총 남분과 북분, 금관총, 서봉총, 천마총, 금령총에서 출토된 금제허리띠장식에는 각종 요패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넷째, 금동신발이다. 신발의 바닥판만 금속이고 그것에 수십 개의 금동못이 박힌 것은 고구려산이다. 삼실총 고분벽화에 묘사된 갑옷 입은 장수의 신발에도 못이 박혀 있는데, 이는 철제품이었을 것 같다. 이러한 고구려의 금동신발문화는 신라와 백제로 전파되었다. 물론 세부 형태에서 차이가 있지만 장송의례용품으로 금동신발을 제작하여 무덤에 매납하였다는 점은 공통적이다. 아직 같은 시기 중국 여러 왕조에서 금동신발이 발굴된 사례는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