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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통사

2. 장신구 제작에 구사된 공예기술

2. 장신구 제작에 구사된 공예기술

고구려 장신구의 제작에 쓰인 주요 금속은 금, 은, 동, 철이다. 은과 철은 사례가 적고 금과 동이 중심인데, 동의 표면에 도금한 것도 많다. 고구려에서 금이 장신구의 재료로 선택된 이유는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가공의 용이성, 내구성, 그리고 아름다운 색채 때문이다. 순금을 만들려면 금광상(金鑛床)이 있어야 하고 그것에서 순금을 추출할 수 있는 기술력이 필요하다. 노두는 거의 없으므로 채광에서 정련까지의 공정을 유지하려면 체계적인 조직이 필요하다. 따라서 모든 나라에서 금을 생산할 수는 없다. 고구려 장신구에 쓰인 금은 어디에서 산출된 것일까. 고구려에서 금이 산출되었다는 기록이 없고 금의 채광이나 정련 관련 고고학적 증거도 없다. 따라서 고구려 장신구의 제작에 쓰인 금은 중국 한족 왕조나 삼연 등 주변국에서 들여온 것으로 보아 무리가 없다.
고구려와 달리 신라의 경우 황금이 많이 산출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기년상의 논란은 있으나 『삼국사기』의 “민간에서 금은과 주옥의 사용을 금한다”는 기록주 002
각주 002)
『삼국사기』 신라본기 일성니사금11년, “又下令 禁民間用金銀珠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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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일본서기』 기록주 003
각주 003)
『일본서기』 중애천황8년, “有向津國 眼炎之金銀彩色 多在其國 是謂栲衾新羅國焉”; 『일본서기』 신공황후, “初承神敎 將授金銀之國 又號令三軍曰 勿殺自服 今旣獲財國 亦人自降服 殺之不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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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보면 신라에서는 금의 산출이 많았던 것 같다. 다만 어디서 금을 산출했는지는 알기 어렵다. 이와 같은 신라의 황금을 5세기 무렵 고구려가 수입하였을 가능성도 고려해볼 수 있다.
금은 매우 귀한 소재이므로 장인들은 최소한의 금을 들여 최대의 효과를 내고자 시도했을 것이다. 장신구는 토기나 기와처럼 여러 번의 시행착오를 통해 시제품을 완성할 여유가 없으며 고구려 최고의 장인이 직접 만들거나 제작에 밀접히 관여하였을 것 같다. 무덤에서 출토된 장신구에는 고구려 장인이 구사한 기술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주조, 단조, 투조와 색채 대비, 조금(彫金), 누금세공(鏤金細工), 상감, 도금 등 모든 금속공예기술이 망라되어 있다.
장신구의 제작에 흔히 사용된 기술은 단조로, 금속 소재에 압축하중을 부여해 형상을 만든다. 철의 경우 고온으로 달군 상태에서 작업해야 하나 귀금속의 경우 그대로 두드려도 문제가 없다. 금속 소재를 직접 타격하거나 혹은 모형을 만들어놓고 그것의 표면에 올려 타격한다. 금공에서 단조는 가장 원초적이자 기본적인 기술에 해당한다. 고구려 장신구의 제작에는 단조기술의 구사 비율이 높다.
공방에 기초재료 형태로 비치되었을 금속판과 금속실의 제작에도 일차적으로는 단조기법이 구사되었고 재차 롤러나 인발판 등이 쓰였을 것이다. 단조 가운데 판상으로 가공하는 것을 판금(板金), 뒷면을 두드려 가공하는 것을 타출(打出)이라 부른다. 금속공예문화가 시작되기 이전부터 고구려에는 이미 제철기술이 만개해 있었으므로 단조 역량은 충분했을 것이다.
고구려의 장신구에는 문양이 표현된 사례가 많다. 관이나 허리띠장식에 인동문, 용문 등이 표현되었는데, 그때 사용된 기법이 투조이다. 투조란 금속판에 문양을 표현할 때 가시성을 높이려 바탕의 여백을 뚫어내거나 문양 그 자체를 뚫어내는 기술을 말한다. 통상 금속판 표면에 스케치하듯 밑그림을 그린 다음 망치와 끌을 이용해 차례로 뚫어낸다.
귀금속은 그 자체로도 아름답지만 색채를 대비시키거나 옥석을 끼워 넣어 장식할 때 화려함이 배가된다. 백제나 신라 장신구에 색채 대비 사례가 많음에 비해 고구려 장신구 가운데 색채 대비가 이루어진 사례는 전무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금속의 표면에 금립이나 금선을 붙여 문양을 화려하게 꾸미는 기술을 누금세공이라 부른다. 금립을 만드는 공정을 보면 먼저 끌이나 줄을 이용하여 금사를 가늘게 썬 다음 열을 가해 녹이고 그것을 재차 냉각시키는 과정에서 금은 표면장력으로 인해 둥근 형태를 띠게 된다. 누금세공에 앞서 먼저 금립을 준비하게 되는데 선별 과정을 통해 금립을 크기별로 준비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쉬운 일이었을 것이다. 요즘은 국부에 열을 가할 수 있는 도구가 많이 있지만 고대에는 그런 도구가 없었기에 금립을 붙이는 공정이 가장 어려웠을 것이다. 이러한 고급기술이 고구려 장신구에서도 확인되는데, 서울 능동 출토품으로 전하는 귀걸이가 바로 그것이다. 귀걸이의 중간 장식에 금립을 조밀하게 붙여 표현한 문양이 있다.
도금은 철이나 청동의 표면에 금이나 은을 덧씌워 장식하는 기술이다. 얇은 금속판으로 지판을 감싸기도 하지만 아말감기술도 많이 활용된다. 아말감이란 금이나 은 등의 금속가루를 수은(Hg)에 섞은 상태를 지칭하는데, 이를 도금하고자 하는 금속의 표면에 바른 다음 열을 가하면 357.73°C에서 수은이 끓으며 증발하고 원하는 색상의 금속만 남게 된다. 소량의 금을 들여 황금장신구 효과를 낼 수 있기에 고구려에서도 이 기술이 많이 구사되었다. 금동관이나 금동제허리띠장식, 금동신발에 이 기법이 구사되어 있다.
금속공예기술 가운데에는 주조나 단조처럼 장신구의 형태를 만들기 위해 사용되는 것도 있고 투조나 조금처럼 문양을 표현하거나 강조하기 위해 활용되는 기술도 있다. 조금의 경우 끌과 망치를 이용하여 금공품의 표면에 문양을 시문할 때 쓰이는 기술이다. 끌의 형태와 망치로 타격할 때의 각도와 작업방식에 따라 여러 이름으로 불린다.
이처럼 고구려는 독특한 장신구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특히 새날개모양관식의 경우 디자인이나 제작기법에서 고구려적인 특징이 현저하다. 이 점은 귀걸이나 허리띠장식, 금동신발에서도 마찬가지로 살펴진다. 한편, 고구려의 장신구문화는 그 자체만으로도 중요하지만, 정치·문화적으로 밀접한 교류관계에 놓여 있던 신라와 백제에 큰 영향을 미쳐 삼국 전체에 황금문화가 유행하는 데 기폭제 역할을 수행하였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아볼 수 있다. 신라의 경우 6세기 중엽이 되면서 무덤의 규모가 작아지고 장신구 등 부장유물의 수량이 급감하며 장신구에서 간소화 경향이 뚜렷해진다. 고구려의 경우도 이와 다르지 않으며, 이러한 사실은 덕화리3호분이나 오녀산성 출토 허리띠장식이 잘 보여준다.

  • 각주 002)
    『삼국사기』 신라본기 일성니사금11년, “又下令 禁民間用金銀珠玉.” 바로가기
  • 각주 003)
    『일본서기』 중애천황8년, “有向津國 眼炎之金銀彩色 多在其國 是謂栲衾新羅國焉”; 『일본서기』 신공황후, “初承神敎 將授金銀之國 又號令三軍曰 勿殺自服 今旣獲財國 亦人自降服 殺之不祥.”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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