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평양 천도 이후의 불교미술
2. 평양 천도 이후의 불교미술
427년에 평양으로 천도한 이후 동명왕릉의 남쪽에 정릉사(定陵寺)가 창건되었고 대동강을 따라 곳곳에 사찰이 세워졌다(김정기, 1991). 일제강점기에 조사된 토성리(土城里)사지, 청암리(靑巖里)사지, 평천리(平川里)사지, 상오리(上五里)사지, 원오리(元五里)사지 등 여러 절터에서는 고구려 기와, 벽돌(塼), 토기편, 금속장식물과 함께 불상이 출토되었다.
동명왕릉의 능사(陵寺)로 알려진 정릉사지에서 1974년에 출토된 꽃 모양의 금동장식물(그림6)은 잔존높이 23.2cm로 아래쪽 중앙에 촉이 붙어있어 불상의 광배(光背)나 천개(天蓋), 또는 금동번(幡)에 달려있던 것으로 생각된다(양은경, 2008). 또한 문자왕 7년(497년)에 창건된 금강사로 추정되는 청암리사지가 있는 청암리토성 부근에서 1938년에 출토된 금동관(그림7), 금동광배, 금동장식편은 고구려의 뛰어난 금속공예기술을 알려준다(小泉顯夫, 1940). 출토된 2점의 금동관은 팔메트(palmette) 넝쿨문과 보주가 투각된 환대(環帶) 위에 9개의 화염장식이 세워져 있고, 관대의 양쪽으로 수식(垂飾)이 늘어져 있는 형태로, 목조보살상의 보관으로 추정하고 있다(양은경, 2011). 한편, 토성리사지에서는 소조불상틀(笵: 거푸집)의 파편 3점이 출토되었고, 평천리사지에서는 금동반가사유보살상을 비롯하여 금동광배, 금동대좌, 금동투조신장상 등이 출토되었다.

그림6 | 평양 정릉사지 출토 금동화형장식(조선중앙력사박물관 소장; 조선유적유물도감편찬위원회, 1993)

그림7 | 평양 청암리사지 출토 금동관(조선중앙력사박물관 소장)
1) 6세기 전반의 불교조각
현재 전하는 고구려 불상 가운데 명문이 있거나 조형적인 면에서 제작시기가 6세기 전반경이라고 생각되는 불상은 금동연가7년명여래입상(539년)을 비롯해서 평양 원오리사지 출토 소조불·보살상, 전(傳) 황주 출토 석조여래좌상(소재 불명), 국립중앙박물관 금동보살입상, 청주 비중리 석조여래삼존상, 평양 평천리 출토 영강7년명금동광배(551년) 등을 꼽을 수 있다. 이들 불상은 재료 면에서 금동, 소조, 석조 불상이 고루 포함되어 있다.
(1) 평양 원오리사지 출토 소조여래좌상과 보살입상
평양에서 서북쪽으로 약 24km 떨어진 평원군 덕포리의 만덕산 서남쪽 기슭에 위치한 원오리사지에서 출토된 소조여래좌상(그림8)과 소조보살입상(그림9)은 고구려에서 소조불상이 유행했음을 알려준다. 1937년 발굴조사 당시 소조여래좌상은 204구, 소조보살입상은 108구가 출토되었는데, 여래좌상은 19.5cm, 보살입상은 17.5cm이다[국립중앙박물관, 조선중앙력사박물관, 도쿄국립박물관, 마사키(正木)미술관, 도쿄대학박물관 소장]. 출토된 소조여래좌상과 소조보살입상의 수량에서 볼 때, 원오리사지 소조불상들은 사찰 불전의 내부 벽면을 장엄하는 천불 또는 삼천불로 제작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문명대, 1981; 양은경, 2009). 불전을 천불이나 삼천불로 장엄하였다는 것은 천불사상의 유행을 말해주는데(김영태, 1990), 이와 같은 천불신앙은 뒤에서 살펴볼 금동연가7년명여래입상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그림8 | 원오리사지 소조여래좌상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그림9 | 원오리사지 소조보살입상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원오리사지 소조여래좌상(그림8)은 두 손을 마주 포개어 배에 대고 있는 수인을 결한 모습인데, 오호십육국시대 금동여래좌상(그림2)이나 남조 송 원가 14년 금동여래좌상(그림10)과 같은 초기 선정인 불상 형식을 따르고 있다. U자형 주름이 새겨진 통견식 착의법이나 수인으로 볼 때, 기본적으로 뚝섬 출토 금동여래좌상이나 장천1호묘 〈예불도〉의 여래좌상(그림3)과 크게 다르지 않고 5세기 불상의 도상적 특징이 그대로 이어지고 있는 보수성이 드러난다. 동그랗고 온화하면서도 여성적인 상호는 남조의 송 원가 14년 금동여래좌상(그림10)의 상호와 유사성을 보이고 있어 불교미술의 초기 수용단계에서 받은 영향이 여전히 지속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림10 | 송 원가 14년 금동여래좌상 (永靑文庫 소장; 東京國立博物館, 1988)
원오리사지 소조여래좌상(그림8)은 평양 토성리(평양시 낙랑구역 토성동)에서 출토된 3점의 소조불상틀 가운데 하나로 찍은 것인데, 앞면을 거푸집으로 찍어 성형하고 뒷면은 대나무칼(篦)로 마무리하여 저온에서 소성(燒成)한 뒤에 채색하였다(최성은, 2015). 거푸집에 흙을 밀어 넣어 성형하는 제작기법은 불상을 대량 생산할 수 있는 가장 경제적인 방법이었다. 1931년 평양 토성리에서 출토된 3점의 도제불상틀은 두 형태의 불상 앞면을 찍는 편면(片面)의 거푸집이다. 이 가운데 현재 평양중앙력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도제불상틀(그림11)은 원오리사지 불상을 찍은 거푸집으로, 일제강점기에 이 틀로 제작한 석고 모형(그림12)은 원오리사지 소조여래좌상과 완전히 일치한다. 또한 원오리사지에서 몇 킬로 떨어진 만덕산 북쪽 기슭 귤리(橘里)의 절터에서도 원오리사지 소조여래좌상과 같은 불상틀로 제작된 소조불상들이 출토된 점에서 볼 때 토성리에 있는 공방에서 제작된 동범(同范)의 소조불상들이 평양 일대의 여러 사찰로 운반되었을 가능성이 있다(小泉顯夫, 1938).

그림11 | 평양 토성리 출토 도제불상틀(평양중앙력사박물관 소장)

그림12 | 평양 토성리 출토 도제불상틀로 제작한 석고 모형(『昭和十二年度古蹟調査報告』, 圖57)
토성리에서 출토된 또 다른 불상틀편 2점(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은 하나의 불상틀이 쪼개진 파편이다(그림13). 복원된 형태를 보면, 두 손을 마주 포개어 배에 붙인 초기 선정인의 수인은 원오리사지 소조여래좌상과 동일하지만, 옷주름의 형태가 복잡하고 좌폭(坐幅)은 넓으며 대좌의 절반가량을 치마(裙)으로 덮은 상현좌(裳懸座)가 표현되었다. 상체의 착의 형태는 알 수 없으나 대좌를 덮은 하체의 옷주름이 중앙과 좌우의 세 부분으로 나뉘는 표현은 남조 불상에서 그 양식적 연원을 찾을 수 있는데, 남조의 송·남제 불상에서 발견된다(최성은, 2015). 사천성 무현 출토 영명(永明) 원년(483년) 석조미륵·무량수여래상의 앞면에 새겨진 미륵여래좌상(그림14-1)을 비롯하여 사천성 성도(成都) 출토 남제 영명 8년(490년) 석조미륵삼존불좌상, 남경(南京) 종산(鐘山) 상정림사지(上定林寺址) 출토 소조여래좌상, 남경 서영촌사지(西營村寺址) 출토 소조여래좌상(그림15) 등과 같은 남조 불상에서 유사한 표현이 발견된다. 특히, 이 가운데 서영촌사지 소조여래좌상은 송대까지 제작시기가 올라가는 것으로 생각되고 있어(龔巨平, 2022), 불상을 포함한 고구려 초기 불교문화의 형성에 남조와의 교섭이 일정한 역할을 했다고 생각된다.

그림13 | 평양 토성리 출토 도제불상틀의 복원 모형(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고대불교조각대전』, 2015)
그림14 | 남제 영명 원년 석조미륵·무량수여래상(사천박물원 소장)
![]() 1. 미륵여래좌상 |
![]() 2. 무량수여래입상 |

그림15 | 남경 서영촌사지 출토 소조여래좌상(龔巨平, 2022)
토성리사지에서 출토된 두 종류의 도제불상틀에서 보이는 불상 양식이 혼합되어 또 다른 하나의 불상형으로 나타난 예가 전 황주 출토 석조여래좌상이다(그림16). 이 상은 현재 소장처를 알 수 없고 사진만 전하는데, 두부와 광배 일부를 잃은 높이가 약 12.5cm 정도이고 맞대어 포갠 두 손 아래로는 세로 주름이 새겨진 대의 자락이 중앙과 좌우의 세 부분으로 나뉘어 흘러내려 방형대좌를 덮고 있다. 중앙 옷자락의 끝단이 긴 U자형을 이루는 점에서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도제불상틀 소조여래좌상과 유사하지만 등(等)간격의 옷주름이 세로로 새겨진 것은 원오리사지 소조여래좌상의 거푸집인 평양중앙력사박물관 불상틀의 여래좌상과 유사하여 전 황주 출토 석조여래좌상에서 두 요소가 함께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진홍섭, 1976; 최성은, 2015).

그림16 | 전 황주 출토 석조여래좌상(평양박물관 舊藏; 梅原末治, 1966)
(2) 금동연가7년명여래입상
수도 평양에서 천불을 주조하는 대규모 불사로 조성되어 고구려 불교계에서 ‘천불신앙’이 유행했음을 알려주는 불상은 금동연가7년명여래입상이다(그림17). 1963년 경남 의령군 대의면 하촌리 도로변의 돌무지에서 우연히 발견된 이 불상은 독존상으로 현재 높이는 16.2cm, 불신의 높이는 9.1cm, 상부가 훼손된 광배가 온전하다면 전체 크기가 고구려척으로 반 척 정도 되는 작은 불상이다.
그림17 | 금동연가7년명여래입상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1. 앞면 전체 |
![]() 2. 뒷면 명문 |
![]() 3. 얼굴 부분 | |
천불상의 하나로 조성된 이 불상은 당시 평양 지역에서 가장 일반적인 불상의 형태를 보여주는 것으로 생각되는데, 머리의 나발(螺髮)이 줄을 맞춰 촘촘하고 세밀하게 새겨졌고 푸른색으로 채색된 흔적이 있다(박학수, 2014). 남북조시대에 널리 유행했던 ‘수골청상(秀骨淸像)’의 가늘고 긴 얼굴에는 차분하고 정적이면서도 단엄한 상호가 표현되었다. 중국식(漢式) 복제로 표현된 대의는 좌우로 힘차게 뻗어 오른쪽으로 치우친 U자형 주름을 이루고, 대의 안에 내의(內衣)가 비스듬히 사선으로 보이며 오른쪽 어깨 위에서 내려온 대의 자락이 왼쪽 손목 위에 올려져 있다.
수인은 왼손의 약지와 소지를 접어 올린 시무외·여원인(通印)을 결하고 있는데, 이런 수인은 고구려 불상을 비롯한 삼국시대 불상에서 널리 나타나는 표현이다. 현존하는 남조 불상 가운데에서는 5세기의 남제 영명 원년 미륵·무량수여래상(그림14)에서 처음 보이고, 남제와 양의 불상에서 꾸준히 나타나는 반면 북위 불상에서는 6세기부터 보이기 시작하는 것을 보면, 남조에서 먼저 유행했던 도상으로 생각된다. 대좌는 단판복련(單瓣覆蓮) 연화좌이며 주형(舟形)광배에는 원에 가까운 곡선과 직선이 어우러진 다양한 형태의 선으로 휘몰아치는 화염문이 새겨졌다. 불상과 대좌, 광배가 하나의 거푸집으로 주조된 통주식(通鑄式) 주조기법으로 제작되었고, 주조 뒤에는 공구로 광배의 문양을 새긴 뒤에 수은아말감기법으로 도금한 것이다. 광배 뒷면에는 4행 47자의 명문이 해서체로 음각되어 있다.
延嘉七年歲在己未高麗國樂良 / 東寺主敬弟子僧演師徒卌人共 / 造賢劫千佛流布第廿九囙現義 / 佛比丘法類所供養
위 명문은 “연가 7년 기미년에 고구려 평양 동사(東寺)의 (부처님을) 지극히 공경하는 제자 승연이 사도 40명과 함께 현겁천불을 만들어 유포하였는데, 그 29번째 인현의불(因現義佛)로 비구 법류가 공양하였다”는 내용이다. 이 불상의 명문에 보이는 ‘연가’가 고구려 연호라는 점에 대해서는 학계의 의견이 일치하고 있으나, ‘연가 7년’에 대해서는 419년, 479년, 539년, 599년 설이 제기되었고, 이 가운데 안원왕 대(531~545년)인 539년이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김원룡, 1964; 윤무병, 1964; 김영태, 1992; 문명대, 1980; 김리나, 1996; 정운용, 1998; 문명대, 1999; 장충식, 2000; 최성은, 2017).
명문에 보이는 ‘인현의불’은 서진 영강(永康) 원년(300년) 무렵에 축법호(竺法護)가 한역한 초기 대승경전인 『현겁경(賢劫經)』에서 현겁천불 가운데 29번째로 등장하는 부처로, ‘현의불(現義佛)’이라고도 한다. 『현겁경』에서 설한 현겁천불 가운데 구류손불(拘留孫佛)부터 석가불까지 네 부처는 이미 세상에 출현한 부처이고 다섯 번째 자씨불(慈氏佛: 미륵불)부터는 아직 성불하지 않은 당래(當來)의 부처인데, 이 경전은 그 29번째 인현의불이 3회의 설법을 통해서 셀 수 없이 무수한 제자들을 깨달음에 이르게 한다고 설하고 있다. 이는 널리 알려진 미륵의 3회 설법과 비교될 만한데, 『현겁경』에서는 천불 각각의 부처가 모두 3회의 법회를 통해서 수많은 제자를 깨달음에 이르게 한다고 한다. 이 경전은 오호십육국시대 이래 불교도의 관불수행(觀佛修行)과 이를 위한 천불 조성의 교리적 기반이 되었는데, 평양 동사의 천불 조성 불사 역시 이와 같은 실천적 대승불교 수행과 신앙을 배경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김영태, 1990).
(3) 영강7년명금동광배
1946년 평양시 평천구역 평천동(구 평양시 평천리)의 절터에서 금동대좌편, 금동광배와 함께 발견된 영강7년명금동광배는 불상이 결실되었고 주형광배만 전한다(그림18). 광배 하단부가 화재로 손상되어 정확한 높이는 알 수 없으나, 현재 높이는 약 21cm, 너비 15cm이다. 뒷면에는 다음과 같은 7행의 명문이 음각되어 있다.
그림18 | 영강7년명금동광배 (조선중앙력사박물관 소장)
![]() 1. 앞면 |
![]() 2. 뒷면 명문 |
永康七年歲次辛□…… / 爲亡母造彌勒尊像(祈) / 福願令亡者神昇兜□ / 慈氏三會□ □ / 之初悟无生(念)究竟必昇(菩) / 提若有罪右 願一時消滅 / 隨喜者等同此願
이 명문은 “영강 7년에 돌아가신 어머니의 명복을 빌고자 미륵존상을 조성하오니, 바라옵건데 돌아가신 분의 신령이 도솔천으로 올라가 자씨(미륵보살)의 3회 설법을 만나서 무생의 법리를 깨닫고 구경을 염하여 반드시 깨달음을 얻기를 원하며, 만약 죄업이 있다면 일시에 소멸되기를 바랍니다. 또 같이하는 모든 이들도 이 발원을 같이 이루소서”라는 내용이다(최연식, 2002). 여기서 ‘영강 7년 신□년’은 551년(양원왕 7)으로 추정되고 있어 현존하는 고구려 6세기 금동불상 가운데 연가7년명금동여래입상 다음으로 제작시기가 이른 작품이다.
영강7년명금동광배는 정상부가 뾰족하고 좌우 폭이 넓어 안정적인 형태의 주형광배로 연화문 두광(頭光)과 이를 에워싼 넝쿨문대, 두광부의 정상 중앙 5엽 연화좌 위에 놓인 보주(寶珠), 좌우 아래에서 올라오는 연꽃과 봉우리가 달린 연꽃 줄기, 그 바깥쪽에 새겨진 이른바 ‘훼룡문(虺龍文)’이라고 불리는 화염문(火焰紋)으로 구성되어 어느 한 부분 간단하게 생략되거나 빠진 것 없이 주형광배의 기본 요소를 고루 갖추고 있다. 이 광배와 비교할 수 있는 유사한 형태의 광배로는 남경 신가구(新街口) 출토 금동광배를 꼽을 수 있다(그림19). 6세기 초 남조 양대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이 금동광배는 주형광배의 여러 요소가 고루 잘 갖추어져 주형거신광배(舟形擧身光背)의 전형을 보여준다.

그림19 | 남경 신가구 출토 금동광배(남경 육조박물관 소장)
영강7년명금동광배의 중앙에는 본존불상의 광배촉을 끼웠던 방형구멍이 뚫려 있고 협시보살은 광배와 일주식(一鑄式)으로 주조되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광배 좌우 하단이 화재로 훼손되어 좌우에 협시보살상이 부착되었던 흔적을 확인하기 어려우나 광배의 폭으로 볼 때 본존불상의 좌우에 보살입상이 부착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최성은, 2012).
영강7년명금동광배는 본존불을 잃었고 광배 하단부가 화재로 손상되었으나 섬세하고 수준 높은 제작기법을 보여주고 다른 고구려 불상들의 주형광배에 비해 세부가 충실하게 표현되어 광배 자체만으로도 가치가 높을 뿐 아니라 고구려의 미륵신앙을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광배의 섬세하고 정치한 제작기법으로 미루어볼 때, 이 미륵불상의 조성 발원자는 고구려 상류층 인물일 것으로 생각된다.
(4) 청주 비중리 석조여래삼존상
오늘날 전하는 고구려 불상들이 대부분 소형 금속제불상인 가운데 드물게 전하는 큰 규모의 석조상으로 청주 비중리 석조여래삼존상이 있다(그림20). 이 석조여래삼존상의 제작국에 대해서는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이 모두 거론되었으며, 각각의 견해가 어느 정도 타당성이 있다(문명대, 1979; 정영호, 1980; 서영일, 1997; 김춘실, 2016). 이 가운데 6세기 전반 충북 지역의 지정학적인 상황이나 상 자체의 조형적 특징에서 볼 때, 고구려 남진정책의 전략적 거점에 건립된 사찰에 봉안되었던 고구려 불상이라는 견해는 상당한 설득력을 지닌다(김영관, 2006; 장창은, 2014; 김춘실, 2016). 그렇다면 이곳의 사찰은 고구려 남진의 최전선에 주둔했던 고구려군과 그들과 함께 주변에 거주했던 고구려인들의 신앙적인 구심점 역할을 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1991년과 1992년에 이루어진 발굴에서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사찰이 경영되었음을 알려주는 유물이 다수 출토되었으나, 출토된 기와와 토기편은 고려에서 조선 시대에 걸친 것이었고 삼국시대의 기와는 건물의 기초를 다지기 위해 재활용된 폐기와로 파악되었다(한국교원대학교 박물관, 1991, 1992).
석조여래삼존상은 폭 2m 정도의 석재에 고부조(高浮彫)로 새겨졌는데, 현재 좌협시보살입상이 결실되었고 본존불좌상도 얼굴과 상체에 큰 손상을 입은 상태이나 원래는 풍만하고 입체적인 불상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두부가 훼손된 단면을 보면 커다랗고 양감이 풍부한 불두가 입체적으로 돌출되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되고, 왼팔에는 4단의 옷주름이, 오른팔에는 2단의 옷주름이 새겨져 있어 대의는 통견식으로 표현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림20 | 청주 비중리 석조여래삼존상
![]() 1. 앞면 |
![]() 2. 협시보살입상 |
![]() 3. 실측도면(음영은 결실 부분 복원, 1990년 문화재청) | |
본존여래좌상의 광배는 특이한 형태인데, 4개의 동심원으로 이루어진 두광과 여기에 연결되는 신광(身光)이 표현되었고 그 바깥으로 방형에 가까운 형태의 거신광배가 둘러싸고 있는데, 윗부분이 깨져서 원래의 형태를 알 수 없으나 원래는 낙양 용문(龍門)석굴 고양동(古陽洞) 마애삼존불좌상(그림21)의 광배처럼 상부 중앙이 뾰족한 아치 형태였을 가능성이 크다. 현재 광배 향(向) 우측에 화불이 5구 보이고 있어 원래는 한쪽에 5구씩 모두 10구가 새겨져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불상의 상체는 왼쪽 어깨부터 가슴에 걸쳐 파괴되었으나 오른손을 들어 시무외인을 결하고 왼손은 왼쪽 무릎 위에 올려놓은 수인이 확인된다. 방형대좌 윗부분을 덮은 상현좌의 옷자락은 두꺼운 직물의 중량감이 느껴지는 U자형의 주름 좌우에 굵은 세로 주름이 새겨져 있다.

그림21 | 용문석굴 고양동 마애삼존불좌상 (하남성 낙양)
비중리 석조여래삼존상에서 특이한 점은 본존상과 좌우협시보살상이 하나의 광배를 공유하는 일광삼존 형식이 아니고 각각 별개의 광배를 가진(협시상의 광배 끝부분이 본존상의 광배에 살짝 겹쳐진) 독립적인 구조라는 점이다. 이처럼 본존상과 좌우 보처인 협시상이 하나의 광배를 공유하지 않는 표현은 병령사석굴 169굴 6감의 소조삼존불상을 비롯하여 운강(雲岡)석굴 제7굴 주실의 삼존상들(480년대), 북위 태화(太和) 13년(489년) 금동이불병좌상(根津美術館)의 뒷면 삼존불상, 용문석굴 고양동 상층에 새겨진 삼존불상(그림21) 등 5세기 전반~6세기 초의 여러 삼존불상에서 보이는데, 이들은 일광삼존불상 도상으로 정형화되기 이전의 삼존불상 형식으로 이해된다.
방형대좌 중앙에는 감실(龕室)이 새겨져 있고 그 안에 둥근 원형의 광배를 가진 여래좌상과 좌우협시상이 양각되어 있다. 중앙의 조각을 향로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청주시, 2020), 불상일 가능성이 크다. 향 좌측의 협시상은 훼손이 심하며, 대좌의 좌우 끝에 측면관으로 새겨진 사자 가운데 오른쪽 사자의 몸통 일부와 꼬리 부분만 희미하게 확인된다. 이처럼 불상의 대좌에 불·보살상을 새기는 것은 인도 쿠샨왕조의 간다라불상에서 나타나며 동아시아 불상에서는 드물게 보이는 표현이다. 중국 남북조시대 불상에서는 방형대좌의 정면 중앙에 향로나 꽃병이 있고 그 좌우에 공양상 또는 사자상이 표현되는 것이 일반적인데, 북위 연흥(延興) 2년(472년) 석불좌상(大和文化館)의 방형대좌에 이 불병좌상이 새겨져 있거나, 빅토리아앤드앨버트박물관(V&A)의 금동불좌상 대좌에 삼존불상이 새겨진 것은 매우 드문 예이다. 이 상들은 간다라불상의 도상적 요소가 반영된 5세기의 북위 불상으로 생각되므로 대좌에 불·보살상을 새기는 것이 고식(古式)의 표현임을 알 수 있다.
한편, 우협시보살입상은 얼굴이 심하게 훼손되었으나 뺨이 통통하고 입술의 양쪽 끝이 안으로 쏙 들어가 어린 소녀와 같은 이국적인 얼굴에다 보발(寶髮)이 여러 층을 이루며 좌우로 늘어져 두 귀를 덮었으며, 목에 동그란 구슬이 달린 목걸이를 걸고 있고, 천의는 X자로 흘러내린 주름치마를 입은 모습이다. 삼국시대 보살상에서 흔히 보이는 삼화보관(三花寶冠)이 아니라 치장하여 땋아 올린 듯한 머리가 보관을 대신하여 두부 정상에 표현된 점은 이 보살상의 제작시기를 추정하는 데 단서가 된다. 특히, 머리 모양과 동그랗고 귀여운 얼굴 모습은 북위 문명태후(文明太后) 풍씨(馮氏)의 발원으로 세워진 방산(方山) 사원불사(思遠佛寺)와 사연불도(思燕佛圖, 朝陽北塔)의 목탑지에서 출토된 소조보살상들(479~490년)에서 보이는 표현과 매우 유사하며(그림23), 남조 양대 일광삼존불상의 협시보살상에서도 나타난다. 또한 협시보살상의 주름 잡힌 치마는 남제 영명 원년 석조미륵여래좌상의 뒷면에 새겨진 무량수여래입상(그림14-2)뿐 아니라 480년대에 개착된 운강석굴 제6굴 불·보살상(그림22)에서도 보이고 있어, 불·보살상의 복식이 중국화되면서 나타난 표현임을 알 수 있다(文物出版社, 1994; 張焯, 2011). 이러한 점을 종합해볼 때, 청주 비중리 석조여래삼존상에는 5세기 후반 남북조 불교조각의 여러 요소가 혼재되어 있으며 제작시기는 6세기 전반으로 생각된다.

그림22 | 운강석굴 제6굴 석조여래입상 (하북성 대동)

그림23 | 사연불도 목탑지 출토 소조보살상
- 1. 측면 2. 상체
- 1. 측면 2. 상체
앞에서 살펴본 6세기 전반의 고구려 불상에 보이는 여러 표현, 눈가에 웃음이 가득한 부드럽고 온화한 불·보살상의 상호, 상현좌의 옷주름 표현에서 세 부분으로 나뉜 치마 주름, 왼손의 약지와 소지를 접어올린 시무외·여원인의 수인은 남조 불상에서 남제 이래 꾸준히 나타나는 것이나, 북조에서 이런 형태의 통인(通印)이 유행하는 것은 6세기 1/4분기 말에서 동·서위대 들어와서이다. 고구려 불상에서 나타나는 남조적 요소가 남조에서 직접 전래된 것인지, 북위나 동위를 거쳐 고구려에 전해진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북위 말~동위대 불상 양식에 나타나는 남조적인 요소는 다소 경직되고 도식화된 부분이 함께 발견된다는 점은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고구려의 대북위 교류 상황은 헌문제(獻文帝) 재위기(465~471년)에 개선되기 시작하였으며, 문명태후 풍씨가 섭정을 하던 효문제(471~499년 재위)에 와서 활발하였던 점을 상기하면, 북위 불교문화로부터 영향을 받기 이전에 고구려 불교계는 남조 송·남제의 귀족적인 불교문화의 영향 아래 있었을 것이며, 남조 불상양식의 여러 요소가 고구려 초기 불상 양식의 형성에 기초가 되었을 것이라는 개연성을 상정할 수 있다. 아울러 북위와의 외교관계가 개선되면서 거의 매년 견사(遣使)가 이루어지던 효문제의 태화 연간(477~499년)에 풍태후의 발원으로 이루어졌던 사연불도나 사원불사 등 북위 황실의 여러 대규모 불사가 고구려 불교미술에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와 같은 고구려 불교조각의 복합적인 성격은 금동연가7년명여래입상을 비롯해서 영강7년명금동광배, 청주 비중리 석조삼존불상 등 6세기 전반 불상을 통해서 확인된다(최성은, 2020).
2) 6세기 후반의 불교조각
6세기 후반에서 7세기 초에 제작된 것으로 생각되는 불상은 금동계미명삼존불입상, 황해도 곡산 출토 경4년 금동신묘명삼존불입상, 평양 평천리 출토 금동반가사유상, 충주 출토 건흥5년명금동광배 정도를 꼽을 수 있다. 이 가운데 하나의 광배에 삼존불상이 표현되어 일광삼존불 형식을 가진 금동계미명삼존불입상과 금동신묘명삼존불입상, 건흥5년명금동광배는 각각 563년, 571년, 596년으로 편년되어 평원왕(559~590년)과 영양왕(590~618년) 대의 작품이다. 현존 고구려 불상 가운데 세 구가 이 시기로 추정되는 명문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당시 안정된 국내상황 속에서 불교문화가 융성하여 금동일광삼존불상 제작이 유행했음을 말해준다.
(1) 금동계미명삼존불입상
금동계미명삼존불입상은 소형상임에도 불구하고 본존여래입상과 협시보살상 2구를 모두 따로 주조하여 광배에 끼우게 제작된 상이다(그림24). 전체 높이는 17.5cm로, 광배 뒷면에 새겨진 2행 17자의 명문을 통해 계미년에 보화라는 인물이 돌아가신 아버지 조씨를 위해 조성한 불상임을 알 수 있다.

그림24 | 금동계미명삼존불입상(간송미술관 소장)
癸未年十一月一日 /寶華爲亡父趙□人造
고구려와 남북조시대의 금동불상 명문이 대체로 연호+□년+간지로 시작하는 것과 달리, 이 삼존불입상은 간지년+월+일로 시작하고 있는 것은 매우 특이하여 앞으로 검토가 요망된다.
본존여래입상 소발의 머리 위에 표현된 구형의 육계, 통통하고 작은 얼굴은 지금까지 동위 불상의 양식적 특징으로 알려져 왔다(최성은, 2007). 왼손의 약지와 소지를 접어올린 시무외·여원인의 수인, 본존상에 비해 크기가 매우 작은 협시보살입상, 보살상의 보발이 마치 닭 볏같이 위로 뻗은 발계관(髮鷄冠) 형태로 높게 표현된 점, 훼룡문의 형태로 솟아오른 화염문 등, 거의 모든 면에서 양 대통(大通) 원년(527년) 금동삼존불입상(그림25)이나 동위(東魏, 535~550년) 시기의 일광삼존불상과 유사하나, 치맛자락이 좌우로 넓게 퍼진 비사실적인 표현은 양대 초기인 천감(天監) 3년(504년) 석조아미타삼존불상의 본존상(그림26)이나 북위 전기 운강석굴 제6굴 남벽 석불입상(480년대)의 표현과 같이 남북조 불상의 고식 전통이 고구려 조각에 늦게까지 이어져 오고 있음을 알려준다.

그림25 | 대통 원년 금동삼존불입상(남경 육조박물관 소장)

그림26 | 천감 3년 석조아미타삼존불상(사천박물원 소장)
계미명삼존불입상의 주형거신광배는 앞에서 살펴본 영강7년명금동광배(그림18)와 거의 동일하다. 그러나 두광부의 넝쿨문 조각이 간략하게 단순해졌고, 신광부의 연지문(蓮枝紋)이 얕게 평면적으로 조각되었으며, 두광의 동심원문대와 넝쿨문대, 신광부 연지문대에 어자문(魚子紋)이 가득 새겨진 점, 화염문이 주조 뒤에 끌로 새겨진 점, 두광 정상부 중앙에 보주가 간략하게 표현된 점 등은 영강7년명금동광배에서 변모한 모습이다. 본존불상의 양감이 커지고 광배에 어자문과 같은 장식적인 요소가 추가되면서 다른 기본적인 요소는 생략적으로 나타나는 조형적인 면을 ‘계미’라는 간지와 함께 고려할 때, 이 삼존불상의 조성 시기는 평원왕 5년(563년)으로 생각된다.
(2) 금동신묘명삼존불입상
1930년 황해북도 곡산군 화촌면 봉산리에서 발견된 금동신묘명삼존불입상은 대좌를 잃었으나 불상과 광배의 보존상태가 양호하다. 현재 전체 높이는 15.5cm, 광배 폭은 10.1cm이며, 본존상은 광배와 따로 주조되었고 광배와 일주(一鑄)로 주조된 협시보살상 2구는 광배에 붙어 있다(그림27). 광배 뒷면에는 7행의 명문과 여백이 모자라 맨 아래의 공간에 쓴 한 줄까지 합쳐 모두 8행의 명문이 새겨져 있다.

그림27 | 금동신묘명삼존불입상(삼성리움미술관 소장)
- 1. 앞면 2. 뒷면 명문
- 1. 앞면 2. 뒷면 명문
景四年在辛卯比丘道(須) / 共諸善知識那婁 / 賤奴阿王阿(踞)五人 / 共造无量壽像一軀 / 願亡師父母生生心中常 / 値諸佛善知識等値 / 遇彌勒所願如是 / 願共生一處見佛聞法
명문에는 “경4년 신묘에 비구 도수(?)와 여러 선지식인 나루, 천노, 아왕, 아거(?) 5명이 돌아가신 스승과 부모를 위해 무량수불(無量壽佛: 아미타불)을 조성하며 세세생생 마음속에 항상 부처를 만나고 미륵을 만나게 해달라”고 기원하는 내용을 담았다(국사편찬위원회, 1995; 김춘실, 1995; 양은경, 2005). 따라서 이 삼존불입상은 우리나라에 전하는 아미타삼존불상의 가장 이른 예라고 할 수 있다. 명문 내용에서 특이한 점은 아미타불을 조성하면서 미륵정토에서 만나기를 기원하는 다섯 명의 발원자 가운데 자신을 낮추어 ‘천노(賤奴)’라는 불명(佛名)으로 적은 인물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명문 내용은 당시 고구려의 불교 신앙과 문화가 남조 불교문화로부터 영향을 받았음을 시사한다는 견해가 제기된 바 있다(양은경, 2005).
본존여래입상은 둥근 얼굴에 표정이 온화하고 양 뺨은 살이 통통하며, 좁은 어깨에 걸친 대의 깃이 U자형을 이루며 가슴을 넓게 드러내고 있다. 몸에 비해 커다란 두 손은 왼손의 약지와 소지를 접어 올려 시무외·여원인을 결하고 있으며, 치마와 대의는 좌우로 넓게 퍼지지 않고 비교적 차분히 가라앉은 모습이다. 왼쪽(向右) 협시보살입상은 보관의 중앙과 좌우에 둥근 꽃이 달린 삼화보관을 쓰고 오른쪽(向左) 협시보살입상은 닭 볏 같은 발계관을 쓰고 있는데, 앞에서 살펴본 금동계미명삼존불입상의 협시보살상들에 비해서 양감이 좋아지고 입체적으로 조각되었다. 거신광배의 각 부분은 단순화되고 화염문의 표현도 도식적으로 표현되었으나 금동계미명삼존불입상에서는 보이지 않았던 화불(化佛)이 3구 표현되어 있다.
금동신묘명삼존불입상은 그동안 남북조시대 북제(北齊) 양식이 반영된 불상으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남경 신가구(新街口)에서 남조 양대 금동일광삼존불상이 여러 구 출토되면서 이 불상과의 연관성 속에서 새롭게 이해되고 있다. 특히, 신가구 출토 금동삼존불입상(그림28)은 도상과 양식 면에서 금동신묘명삼존불입상과 매우 유사하여 남조 금동불상의 영향이 확인된다.

그림28 | 남조 양대 금동삼존불입상 (남경 육조박물관 소장)
다만, 6세기 후반에 제작된 금동신묘명삼존불입상의 광배 문양과 화불이 도식화된 점은 제작시기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다른 고구려 일광삼존불상 및 남북조시대 불상과의 양식적 비교를 통해 이 삼존불상이 조성된 ‘신묘’년은 평원왕 13년(571년)으로 생각되고 있다.
(3) 건흥5년명금동광배
충북 충주시 노은면에서 1915년에 발견된 높이 12.4cm의 건흥(建興)5년명금동광배는 광배 뒷면에 새겨진 명문을 통해 석가불의 광배였음을 알 수 있다(그림29). 광배와 따로 주조되어 네모난 구멍에 끼워져 있던 본존불상은 결실되었고 광배와 함께 일주식으로 주조된 협시보살입상 2구만 남아있다. 광배 뒷면에는 5행 39자의 발원문이 새겨져 있다(황수영, 1976).

그림29 | 건흥5년명금동광배(국립청주박물관 소장)
建興五年歲在丙辰 / 佛弟子淸信女上部 / 兒奄造釋迦文像 / 願生生世世値佛聞 / 法一切衆生同此願
명문을 해석하면, “건흥 5년 병진에 상부의 청신녀 아엄이 석가모니불을 조성하여 세세생생 부처를 만나 법을 듣기 바라며 일체중생도 함께 이를 원하기 바란다”는 내용이다. 고구려의 귀족들은 부명(部名)을 관칭하여 자신들이 지배층이라는 사회적 신분을 나타냈다고 하므로 명문에서 ‘상부(上部)’라고 부를 밝힌 아엄은 고구려의 지배층 여성일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이 광배는 앞에서 살펴본 다른 일광삼존불상의 광배들과 기본형식에서는 동일하지만, 불꽃이 타올라가는 동적인 움직임이 잘 나타나는 화염문의 표현과 보주형 두광을 배경으로 앙련좌(仰蓮座)에 앉아있는 세 구의 화불은 앞에서 살펴본 금동신묘명삼존불입상(그림27)의 화불과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양감이 풍부하다. 좌우의 협시보살입상은 향 우측 상이 삼화보관을 쓰고 향 좌측의 상이 발계형의 머리로 표현되었는데, 고부조로 조각되어 금동신묘명삼존불입상 광배의 협시보살상들에 비해 입체감이 느껴진다. 또한 일반적으로 두광부 연화문의 주변을 에워싸고 있던 넝쿨문대는 동심원문대로 단순하게 바뀌었고 두광부 정상 중앙에 표현되던 보주도 생략되었으며 신광부의 세로선문대 좌우의 연지문도 보이지 않는다. 이처럼 일광삼존불상 주형거신광배의 여러 요소 가운데 생략된 부분이 있으나, 화불이나 화염문, 협시보살상 같은 부분은 이전보다 구체적이고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다(최성은, 2012). 이와 같은 점에서 볼 때, 건흥 5년 병진은 영양왕 7년(596년)으로 생각된다(곽동석, 1993).
그런데 이 광배에서 특이한 점은 다른 일광삼존불상들의 광배에 비해서 본존불상의 신광부 높이가 낮다는 것이다. 앞에서 살펴본 다른 불상들에서는 좌우협시보살상이 본존불 두광의 동심원문과 넝쿨문대 아래에 배치되어 있는 것에 비해서, 건흥5년명금동광배 보살상들의 머리 높이는 본존불상의 두광 중심에 가깝게 올라와 있다. 이처럼 일광삼존불상 형식에서 협시보살상들의 높이가 커지는 것은 지역이나 공방에 따른 차이도 있겠으나 존상들의 입체감이 강조되는 제작시기에 따른 변화라고 생각된다.
(4) 국립중앙박물관 금동보살입상
국립중앙박물관의 금동보살입상(그림30)은 높이 15.1cm로 명문은 없으나 오랫동안 고구려 불상으로 생각되어온 작품이다(진홍섭, 1992). 뒷면이 평평한 보살상은 편불(片佛) 형태의 통주식으로 주조되어 광배에 부착되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보살상의 뒷면에 광배에 꽂는 촉이 2개 돌출되어 있어 일광삼존불상의 협시보살상으로 생각된다. 그렇다면 이 보살상을 협시로 구성된 삼존불상은 3구 모두 별주(別鑄)하여 광배에 꽂고 대좌도 따로 주조하여 삼존불상의 전체 크기는 대략 한 척 정도 되었을 것이다.

그림30 | 금동보살입상(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보살상은 머리 중앙 원형장식 위로 3개의 입식(立飾)이 있는 특이한 형태의 보관을 쓰고, 눈에 웃음이 가득하고 입가에 미소를 띤 밝은 상호와 왼손의 약지와 무명지를 접은 시무외·여원인을 결한 큼직한 손의 표현은 남제 영명 8년 석조미륵불좌상(그림31)을 연상시킨다. 깊은 불성과 자비로움의 표출로서 나타나는 인간적이고 부드러우며 이지적인 ‘수골청상’의 면모는 고구려 불교조각의 주요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이는 일찍이 남경 서선교(西善橋) 전축분 벽화나 동진의 화가 고개지(顧愷之, 344~406년 무렵)의 〈여사잠도(女士箴圖)〉와 같은 동진 이래의 남조 미술에서 유행해왔던 표현인데, 이와 같이 격조 높은 남조 문화가 고구려 불교문화계에 전해져 발전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림31 | 남제 영명 8년 석조미륵삼존불좌상(사천박물원 소장)
(5) 평양 평천리 출토 금동반가사유상
1940년 평양시 평천리에서 출토된 금동반가사유상은 높이 17.5cm로 오른손과 함께 팔꿈치 아래가 파손되었고 상 전체에 화재로 부식된 흔적이 보이며 군데군데 도금이 남아있다(김양선, 1964). 머리에 삼면관(三面冠)을 쓰고 귀는 어깨에 닿을 듯 길게 늘어졌으며 머리 뒤에는 두광에 꽂았던 광배 촉이 붙어 있다. 머리를 앞으로 숙여 깊은 사색에 잠긴 표정을 짓고 있는 얼굴의 부푼 뺨과 꾹 다문 입술 아래로 돌출한 턱은 사실적이며 양감이 느껴진다. 이에 비해 상체는 가늘고 긴 나신(裸身)으로 양팔에는 팔찌로 장식하고, 왼손은 오른쪽 다리의 발목 위에 올려놓고, 오른팔은 팔꿈치 아래가 결실되었으나 원래는 손가락을 오른쪽 뺨에 살짝 댄 자세였을 것이다(그림32).

그림32 | 평양 평천리 출토 금동반가사유상(삼성리움미술관 소장)
- 1. 앞면 2. 측면
- 1. 앞면 2. 측면
하체에 걸친 치마의 허리 좌우로는 옥환이 꿰어져 있는 요패와 수식을 늘어뜨려 왕자(王者)의 귀족적 이미지를 드러내고 있다. 반가사유상이 앉아있는 둥근 의자(墩)를 덮은 치마는 2단의 상현을 이루고 주름 끝부분에는 오메가(Ω) 형태의 도식적인 주름이 새겨졌으며 의자 아래로는 단판연화문으로 이루어진 연화대좌가 표현되었다.
중국에서 반가사유보살상이 크게 유행하였던 시기는 북위에서 북제 시기였고 시대에 따라 반가사유상의 양식에도 변화가 많았다. 『법원주림(法苑珠林)』이나 『집신주삼보감통록』 등의 문헌기록에 의하면, 5세기 초 남조에는 법현(法顯)이 인도에서 가져온 반가상이 봉안되어 있었고 6세기 후반에는 이 반가사유상이 북제의 수도인 업도(鄴都)로 옮겨졌다고 하므로 이 반가상이 남조뿐 아니라 북제의 반가사유상에도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짐작된다(양은경, 2012). 현존하는 북위와 동위 대의 반가사유상은 상체에 천의를 걸친 예가 많은데, 북제시기가 되면 상체를 나신으로 표현하는 추세여서 평천리 반가사유상의 상체가 나신인 점은 북제 반가사유상의 영향으로 보인다. 그러나 하체의 치마가 길게 의자를 덮고 2단으로 나뉜 상현의 주름이 세밀하게 표현되는 것은 북위·동위 반가사유상(그림33)의 특징적 요소라고 생각되므로 이른 시기의 양식과 새로운 양식이 절충적으로 표현된 것이라고 이해된다. 따라서 그 제작시기는 6세기 후반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림33 | 하북성 곡양 수덕사지 출토 석조반가사유상(북경 고궁박물원 소장)
고구려에서 조성된 평천리 출토 금동반가사유상은 삼국시대 반가사유상의 조형(祖形)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백제의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의 좌협시반가사유상이나 신라의 경주 송화산 출토 석조반가사유상, 경주 단석산 신선사 마애반가사유상, 국보83호 금동반가사유상 등은 기본적으로 평천리 반가사유상의 형식을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평천리 금동반가사유상은 고구려 불교조각이 백제와 신라 지역에 끼친 영향을 유추할 수 있는 귀중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고구려 6세기 전반의 불교조각에는 남북조 시대 남제와 북위 전기 5세기 후반 불상 양식의 전통적 요소가 나타나고 있다. 이 시기의 양식은 6세기 후반의 불교조각으로 이어지면서 양과 북위 말, 동위 양식이 더해져 다양한 요소가 혼재하는 복합적인 양상을 띠게 된다. 건흥5년명금동광배를 보면, 화불과 같은 세부조각에서도 양감이 좋아지고, 불상과 보살상의 크기에 큰 차이를 보였던 위계적 표현도 점차 자연스럽게 변화하여 협시보살상의 비중이 커져갔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영양왕 대의 기년명 불교조각은 본존불상을 잃어버린 건흥5년명금동광배 한 점뿐이므로 이 시기 불상을 이해하는 데 한계에 부딪히게 된다. 따라서 삼국의 경계지역에서 출토된 불상들과 일본에 전해오는 불상 자료를 통해서 고구려 후기 불교조각을 유추해보고자 한다.
3) 6세기 말~7세기의 불교조각
6세기 말에서 고구려가 멸망하는 668년까지 고구려 불교조각이 어떤 변화와 발전을 겪었는지에 대해서는 이 시기로 편년되는 재명(在銘) 불상이 없는 현재로서는 밝히기 어렵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6세기 중엽에 고구려의 불교가 쇠퇴하고 있다고 판단한 고구려 승려 혜량(惠亮)이 죽령을 넘어 고구려로 진군하는 거칠부(居柒夫)를 따라 진흥왕 12년(551년) 무렵 신라에 귀화하였다는 사실만으로, 이후 고구려 불교미술까지 쇠퇴 일로를 걸었다고 보기는 어려운 부분이 있다. 그간 축적된 고구려의 불상 제작기술은 불교의 융성으로 불상 수요가 큰 지역으로 전해지고 고구려의 장인들이 백제와 신라로 건너가 활동하거나 고구려에서 제작된 불상들이 백제와 신라, 나아가 일본 열도의 왜로 전해졌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한편, 새로운 불교문화의 전래와 수용 문제에 있어서도 6세기 중후반에 여전히 반야(般若), 지황(智晃), 인공(印公) 등 고구려 승려들이 불교문화의 수준이 높고 고구려와 우호적인 관계를 갖고 있던 남조로 유학하였고, 평원왕 18년(576년)에 고구려의 대승상 왕고덕(王高德)이 북제의 업도에 보낸 승려 의연(義淵)은 그곳에서 최전성기를 맞은 북제 불교의 현장을 목도할 수 있었다(정선여, 2000). 당시 업도는 불교를 열렬히 신앙했던 북제의 황제들이 사탑을 세우고 대불 조성 불사를 일으키는 등 불교가 극도로 융성하였는데, 의연은 북제의 도통(都統)으로 명성이 드높았던 법상(法上, 495~580년)을 만나 불교의 시말연유(始末緣由)를 묻고 『십지경(十地經)』을 비롯한 경론을 가지고 귀국했다고 알려졌다. 그는 황실과 귀족의 발원으로 업도에 세워진 거대한 규모의 사찰들과 남·북 향당산(響堂山) 석굴을 배관(拜觀)하고 그 장엄함과 뛰어난 조형감에 압도되었을 것이다. 또한 수대에 와서는 석파약(釋波若, 562~613년)이 천태지의(天台智顗) 문하에서 수학하고, 인법사(印法師)와 실법사(實法師)는 수에서 삼론(三論)을 강의한 대가였으므로 수대 불교문화의 전래가 이어졌을 것으로 보인다(김영태, 1997).
(1) 삼국 경계지역의 고구려 불상
진흥왕 대에 이르러 고구려는 중부지역의 영토를 대부분 잃어버렸다고 생각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경기, 강원 지역에서 출토된 불상 가운데에는 고구려 제작으로 생각되는 불상들이 있다. 이 불상들은 고구려에서 제작되어 삼국의 경계지역으로 옮겨졌을 수도 있고 고구려의 장인이 경계지역에서 불상을 제작할 수도 있었다고 생각되는데, 1척 이하의 소형 금동불상은 이동이 용이하여 출토지가 제작지가 아닐 가능성이 크므로 출토지보다는 조형성을 바탕으로 판단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그동안 고구려 불상일 가능성이 제기된 불상 가운데 횡성 출토 금동여래입상과 영월 출토 금동보살입상, 원주 법천사지 출토 금동여래입상 등을 대표적으로 꼽을 수 있는데, 이 불상들은 동시대의 다른 지역 불상에 비해 주조기법이 우수하다는 점이 특징이다.
① 횡성 출토 금동여래입상
강원도 횡성 출토 금동여래입상은 높이 29.4cm로 조형적인 면에서 볼 때 7세기 전반 작품으로 추정된다(국립중앙박물관, 1990). 불상은 전체적인 비례가 안정적이고 머리에는 나발이 잘게 새겨져 있으며 반개한 두 눈과 양감이 풍부한 양 뺨이 표현된 얼굴은 사실적이다(그림34). 통견식으로 입은 대의는 U자형으로 가슴이 넓게 파이고 대의 안으로 내의와 내의를 묶은 매듭(紳)이 보인다. 대의와 치마가 가지런히 내려오며 치마 끝단 좌우에 오메가형 옷주름이 표현되었는데, 이것은 뒷면 치맛단에도 보인다.

그림34 | 횡성 출토 금동여래입상(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1. 앞면 2. 뒷면
- 1. 앞면 2. 뒷면
이 불상에서 특별히 주목되는 부분은 뛰어난 주조기법이다. 실납법으로 주조된 불상의 뒷면에는 직사각형의 주조 구멍이 뚫려 있고 이 구멍의 가장자리에 얕은 턱이 있어 구멍을 막기 위한 덮개를 씌웠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7세기 전반의 신라 지역 불상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주조기법이다.
② 영월 출토 금동보살입상
강원도 영월군 북면 문곡리에서 출토된 금동보살입상(그림35)은 높이 20.2cm로 머리에 관대(冠帶)의 중앙과 좌우에 화문(花紋)이 3개 달린 삼화보관을 쓰고 머리를 살짝 옆으로 기울이고 몸의 무게 중심을 오른쪽 다리에 두고 왼쪽 다리는 살짝 앞을 내딛은 삼굴(三屈, 三曲)의 자세로 서 있다(국립중앙박물관, 1990). 보살상의 상호는 단아하고 목에는 둥근 원형의 장식에 한 줄의 장식이 늘어진 목걸이를 하고 있는데, 이 역시 7세기 보살상에서 유행했던 장신구이다. 어깨에서 늘어진 천의는 2단으로 복부와 무릎으로 흘러내리고 팔뚝에 걸쳐 밑으로 내려오는 천의 가닥은 파손되었으나 연화대좌까지 늘어진 것이 보인다. 뒷면을 보면 머리에 두광과 연결하는 구멍이 뚫려 있고 머리 가닥이 등 뒤 좌우로 늘어져 있다.

그림35 | 영월 출토 금동보살입상(국립중앙박물관 소장)
③ 원주 법천사지 출토 금동여래입상
2003년 원주 법천사지 3차 발굴조사에서 출토된 금동여래입상(그림36)은 두부와 광배가 결실되었고 잔존높이 16.4cm이다. 통견식으로 착의한 대의 앞가슴이 U자형으로 넓게 파이고 그 안에는 내의가 비스듬히 사선으로 새겨져 있으며 대의 자락이 왼쪽 손목 위에 얹어져 있다. 커다랗고 두툼한 양손으로는 시무외·여원인의 통인을 결하고 있는데, 손가락 하나하나가 세밀하게 조각되었고 손바닥에는 손금이 새겨져 있다. 하체에는 발등까지 길게 내려오는 치마를 입었으며 치마에 가려 반쯤 보이는 두 발은 발가락이 선각으로 표현되었다.

그림36 | 원주 법천사지 출토 금동여래입상(국립춘천박물관 소장)
- 1. 앞면 2. 뒷면
- 1. 앞면 2. 뒷면
뒷면에 광배 촉이 위아래에 2개 돌출된 것을 보면 아마도 커다란 주형거신광배가 여기에 연결되어 있었을 것이다. 2개의 광배 촉 아래에는 작은 방형의 주조 구멍 2개가 단정하게 뚫려 있다. 두부에서 대좌 촉까지 일주로 제작되었고 연화대좌와 광배는 따로 주조해서 연결시켰던 것으로 보인다. 몸체 부분만 중공(中空)식으로 주조되어 두부가 훼손된 단면이 고르지 않고 막혀 있다. 또한 등 뒤에 뚫려 있는 2개의 작은 주조 구멍은 중공식 주조기법의 초기 단계에서 나타나는 특징으로 생각된다.
(2) 일본에 건너간 고구려 불상
6세기 말부터 7세기의 고구려 불교조각을 유추할 수 있는 자료는 일본 열도에 전해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불상들이다. 고구려에서 왜국으로 첫 공식사절을 파견한 것은 평원왕 12년(570년)이었으나 이후 고구려의 대왜 교섭은 여러 우여곡절을 겪으며 지지부진한 상태였고 결국은 선진 불교문화를 왜의 지배층에 전해주는 방향으로 교섭을 펴나갔던 듯하다(이영식, 2006; 井上直樹, 2008; 이성제, 2012). 그 결과, 왜국의 최초 사찰인 아스카데라(飛鳥寺)의 가람 배치가 고구려 사찰에서 보이는 ‘일탑삼금당식’인 점이나(김정기, 1991), 아스카데라 절터에서 고구려계 기와가 출토된 점, 영양왕이 아스카데라 금당 금동장육불상 조성에 사용할 황금을 보냈다는 기록 등은 아스카데라의 창건에 고구려가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쳤다는 것을 말해준다.
특히, 당시 소가씨(蘇我氏)의 최고 권력자였던 소가노우마코(蘇我馬子)가 고구려에서 건너온 혜변(惠便)을 스승으로 하여 불교 수행에 정진하였고(『日本書記』 敏達紀 13年 是歲條; 이영재, 2014), 영양왕 6년(595년)에는 혜자(惠慈, ?~622년)가 왜국에 파견되어 20년간 쇼토쿠태자(聖德太子)의 스승이 되어 삼론뿐 아니라 법화, 유마, 승만경을 가르쳤으며, 602년에는 승려 승륭(僧隆)과 운총(雲聰)이 왜국에 온 기록이 있다(『日本書記』 推古紀 9年 3月). 불교미술 분야에서는 604년에 야마토(大和)의 여러 사찰에 불화를 제작하기 위해서 고구려 출신의 화가집단인 기부미노에시(黃書畵師, 黃文畵師)가 설치되었다(『日本書紀』 推古紀 12年 秋9月; 전호태, 2011). 이는 이미 고구려의 공인들이 왜국에 초청 또는 파견되었음을 말해주며, 이 시기에 고구려 공인들은 왜국 불교문화의 여러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불교를 숭상하는 상대국에 불상을 예물로 보내는 것은 고대 동아시아 국가의 외교관계에서 흔히 보이는 일이다. 따라서 외교 차원에서 사신을 통해 예물로 불상을 보내거나 자국을 방문하는 상대국의 사신에게 예물로 불상을 증여하는 것은 고구려와 왜의 외교관계에서도 예외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 일본에 전해오는 고대 금동불상 가운데는 고구려에서 제작되어 왜국에 보내졌거나 고구려 불상을 범본으로 왜에서 제작된 불상이 존재할 가능성이 있을 것이다. 그 한 예로 생각되는 상으로는 시가현(滋賀縣) 오츠시(大津市) 이시야마데라(石山寺) 금동여래입상을 꼽을 수 있다.
이시야마데라 목조관음보살상의 몸속에서 2002년에 발견된 4구의 금동불·보살상 가운데 한 구인 금동여래입상(그림37)은 높이 26.2cm로 광배와 대좌를 잃었고, 두부의 좌우 측면과 뒷면이 파괴되었으며, 오른쪽 어깨 및 좌우 손 끝부분이 크게 손상되었다. 이렇게 손상이 심한 상태이지만 머리 전면과 측면, 뒷면 하부에 촘촘하고 정교하게 새겨진 나발이 확인된다. 갸름한 얼굴에는 수평으로 정면을 응시한 두 눈과 뚜렷한 콧날, 입꼬리를 위로 올려 온화한 미소를 띤 입술 등 부드럽고 자비로운 상호가 드러난다. 목에는 삼도(三道)가 새겨져 있으며, 양 손은 시무외·여원인을 결했으나 손끝이 훼손되어 수인의 정확한 모습을 확인하기는 힘들다. 약간 아래로 처진 듯한 어깨에 통견식으로 걸친 대의는 긴 U자형으로 넓게 열린 가슴에 내의가 사선으로 표현되었다. 대의 옷자락의 일부는 왼쪽 어깨 뒤로 넘어가고 일부는 왼손 손목 위에 올려져, 손목 아래로 늘어진 옷자락이 접혀 옷주름을 이루고 있다.

그림37 | 이시야마데라 금동여래입상(奈良國立博物館, 2002)
이시야마데라 금동여래입상은 화재로 인해 현재 불상 자체가 온전하지 못한 상태이지만, 전체적인 비례가 좋고, 인간적인 얼굴 표정과 견실한 옷주름 표현에서 조각적으로 우수한 불상임을 알 수 있다. 처음에는 아스카시대 불상으로 추정되기도 하였으나, 주조기법이나 양식 면에서 볼 때, 호류지(法隆寺) 금당의 금동삼존불상을 제작한 도리파(止利派)가 제작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되었으며, 남조의 양 또는 산동성 지역의 동위(東魏) 불상이거나 백제의 불상일 가능성이 제기되었다(岩田茂樹, 2002).
그러나 밝고 인간적인 상호는 국립중앙박물관 금동보살입상(그림30)과 매우 유사하고, 전체적으로 안정된 비례를 지녔으며 금동연가7년명여래입상(그림17)처럼 나발이 정확한 구획으로 촘촘하게 표현된 점, 양식적으로 6세기 후반 북제나 수대 불상에서 보이지 않는 그 이전 시기의 고식 요소를 고수하고 있는 점 등, 여러 면에서 고구려 불상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으로 판단된다. 특히, 실납법으로 주조된 이 불상의 X선형광분석에서 99% 이상인 순동(純銅)으로 주조되었음이 밝혀졌는데(岩田茂樹, 2012), 미량의 주석(0.5~1%)만 포함되었을 뿐 납을 사용하지 않은 순동의 주조기법은 상당히 높은 수준의 제작기술이 아니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6세기 말에 이처럼 우수한 금동불상을 제작할 수 있는 곳으로 일찍부터 금속주조기술이 발달했던 고구려를 제외하고는 생각하기 어렵다고 판단된다.
7세기 고구려 불교조각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알려진 자료가 거의 없으므로 이 시기의 고구려 불상을 밝히기 위해서는 국내에 전해오는 삼국시대 불상과 일본에 있는 아스카시대 불상에 대한 세밀한 조사와 검토가 필요하다. 백제와 신라 지역의 불상과 일본에서 백제 불상으로 이해되고 있는 불상 가운데 고구려 불상이 섞여 있을 가능성이 매우 크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는 고구려 불상에 대한 미술사적 논의뿐 아니라 성분분석과 같은 과학적인 연구조사를 통해 삼국의 다른 지역 불교조각과 구별되는 고구려 불상 고유의 특징과 성격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와 자료가 축적되어야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