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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통사

1. 매장시설 출토 기타 금속기

1. 매장시설 출토 기타 금속기

매장시설에서 확인되는 기타 금속기는 공헌품으로 무덤 내부에 매장된 부장품, 무덤 장구, 무덤 부속시설 출토품으로 분류하였다. 이들은 형태와 용도가 비교적 명확한 것보다 그렇지 않은 것이 대부분이다. 특히 왕릉급 무덤에서 다량 출토되는 금동제장식의 경우 무덤의 높은 위계 뿐 아니라 축조와 매장 과정 중 이루어진 장송 행위와 고구려인의 내세관이 반영된 중요 부장품이다. 그러나 온전한 형태가 아닌 잔편으로 발견되는 이들 대부분은 각종 기물에 부착된 부속구라는 추정 이외에 전모를 파악하기 어려워 기초적인 정리나 연구가 미진한 상태이다. 따라서 형태가 비교적 온전하여 용도 추정이 가능하거나 출토 맥락을 고려한 의미 접근이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것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1) 부장품
(1) 부뚜막형명기
고구려 무덤에 부뚜막형명기를 부장한 사례 중 금속제 부뚜막형명기도 드물게 확인되는데 청동제와 철제가 있다. 태왕릉 남쪽 변 서쪽 두 번째 호분석 아래에서 출토된 부뚜막형명기는 청동제로 금동만가(幔架)와 함께 발견되었다(그림1). 이들은 본래 무덤 내 부장품으로 도굴꾼이 옮겨 임시로 매납한 것으로 보고 있다. 발견 당시 여덟 조각으로 파손된 상태였다. 길이 86cm, 너비 49.5m, 높이 31.8cm 크기의 장방체로 세로 17cm, 가로 32.5cm 크기의 비교적 큰 사각형 아궁이가 긴 측면 한쪽에 치우쳐 뚫려 있는 형태이다. 아궁이 주위로는 낮은 돌기선으로 아궁이틀을 주조하였다. 아궁이 위쪽 면에는 지름 34.2cm의 원형 솥걸이 구멍이 뚫려 있다. 아궁이 반대편 짧은 측면 중앙에 가로 10.8cm, 세로 8.5cm 크기의 생선꼬리형(魚尾形) 연기 구멍이 뚫려 있을 뿐 굴뚝은 별도로 없는 형태다.
그림1 | 태왕릉 출토 청동제부뚜막(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集安市博物館, 2004)
- 1·2. 출토 당시 모습 3. 전체 모습
평안북도 운산군 용호동1호분에서는 철제부뚜막형명기가 출토되었다(그림2). 대형분 3기로 이루어진 운산 용호동고분군은 고구려 국내도성과 평양도성을 연결하는 내륙교통로상에 조성되었다. 초대형 목실계단적석총인 1호분은 조사 당시 적석분구 상부 3단만 남고 파괴된 상태였고 붕괴된 현실 내부 및 연도 내부로 추정되는 곳에서 철제부뚜막형명기와 금동제봉황형장식 등이 출토되었다.
그림2 | 운산 용호동1호분 출토 철제부뚜막(국립중앙박물관)
- 1. 출토 당시 모습(朝鮮總督府, 1929) 2. 전체 모습 3. 아궁이 세부 4. 바닥과 내부 모습
철제부뚜막형명기의 본체는 길이 67.2cm, 높이 29.1cm의 장방체로 아궁이 부분과 몸체를 십자상으로 4분할하여 주조한 후 본체를 합체하고 별도로 주조한 굴뚝을 본체에 덧붙였다. 바닥면은 뚫린 상태다. 세로 11cm, 가로 10cm 크기의 아궁이가 있는 화구부 전체가 앞쪽으로 돌출된 형태로 아궁이 바깥쪽에는 폭 1.5cm로 돌출된 테두리와 그 사이의 초화문이 주조되었다. 아궁이 위쪽 면에는 지름 13cm 크기의 솥 구멍을 내었다. 화구에서 이어져 불이 지나가는 불길의 길이는 29cm이며 바닥면에서부터 시작되는 높이 28cm의 원통형 굴뚝은 위쪽으로 가면서 좁아져 상부 지름이 10.5cm이다. 무덤의 조성시기는 4세기 말경으로 보고 있다(강현숙, 2020).
철제부뚜막형명기는 장방체 몸체의 긴 옆면에 치우쳐 아궁이를 만들어 아궁이 내 불길이 연기의 흐름과 직교하도록 굴뚝을 배치한 형태이다. 아궁이 위치에 따라 윗면 한쪽에 치우쳐 원형 솥걸이 1개를 둔 것도 고구려 부뚜막의 특징으로 안악3호분, 약수리벽화분에 그려진 부뚜막 형태도 이와 같다. 봉토석실분인 장천2호분과 삼실총에서 출토된 부뚜막형시유토기도 이와 유사한 구조이며, 시유토기의 아궁이틀에 초화문이 양각된 점도 비교할 만하다. 계단적석총인 만보정1078호분에서도 부뚜막형시유토기가 출토되었으며, 집안 출토품으로 전하는 일본 교토박물관 소장품도 알려져 있다. 그 밖에 만보정1368호분 출토 석제부뚜막형명기가 있다.
 
(2) 금동제상장식
태왕릉의 청동제부뚜막형명기가 매장된 곳으로부터 0.8m 떨어진 위치에서 금동제등자, 띠연결고정금구 등의 마구, 장막걸이쇠 등과 함께 말굽모양다리를 가진 금동제상다리(案足) 10점이 확인되었다. 안쪽으로 향하는 한쪽 면이 편평한 반원형 단면을 가진 형태이다(그림3). 말굽형 바닥 위쪽이 가늘어져 마디를 이루며 바닥면 중앙에는 반원형 구멍이 뚫려 있다. 내부를 채우지 않고 외형만 청동으로 얇게 주조하는 과정에서 내형토를 빼내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상판과 연결되는 부위인 다리 위쪽의 장부는 납작한 장방형으로 중앙에 작은 구멍이 있으며 못이 박힌 채 남아 있는 것도 있다. 크기에 따라 대, 중, 소 3종으로 구분되는데, 대형(A형)은 높이 43~45cm에 발굽 너비 10.5cm이고 중형(B형)은 높이 25.5cm 내외로 다리가 짧은 형태다. 잔존높이가 17.7cm인 소형(C형)은 다리 앞쪽 면에 두 줄의 돌선이 주조된 형태다.
그림3 | 태왕릉 출토 금동제상다리(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集安市博物館, 2004)
- 1~5. 대형(A형) 6~7. 중형(B형) 8. 소형(C형) 9. 출토 당시 모습
한편, 태왕릉에서는 다량의 금동투조장식편이 출토되었는데, 이 중 나무로 만든 상의 장식으로 추정되는 금동제용호문투조판이 발견되었다(그림4). 잔존 길이 61.6cm, 폭 12cm, 두께 0.06cm 크기로 초화문 사이의 용과 호랑이 형상을 투조로 반복 표현하였다. 끝이 결실되어 형태가 온전하지 않으나 남은 한 변의 잔존형태와 동일하다면 6각형 금동장식판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투조무늬판의 가장자리를 따라 쌍을 이룬 구멍이 2cm 간격으로 돌아가고 바깥 모서리에는 못 구멍이 한 개씩 7cm 간격으로 뚫려 있다. 4쌍의 구멍에 동사(銅絲)가 끼워진 상태인데, 뒷단 왼쪽 구멍에는 마노 구슬 한 개가 꿰어져 있다. 이 금동장식판을 목제 기물 표면에 부착해 사용하기 위한 용도로 보인다. 다수의 출토품과 마찬가지로 도굴되어 태왕릉 남쪽 변에서 출토되어 부장 당시의 맥락을 직접 확인할 수는 없다. 다만, “백제의 상제(喪制)가 고구려와 같다”(『수서』백제전)는 기사로 미루어 볼 때 백제 무령왕릉의 무덤 내 제사는 참고할 만하다. 그에 따르면 장례 시 목관 앞, 널길, 널문 앞에 제대가 차려지고 음식을 공헌하는 제의가 이루어졌다. 따라서 금동제용호문투조판이 금동제상다리와 함께 장례 시 공헌물을 올리는 상의 일부였다는 추론이 가능하다면 고구려의 장송의례를 복원하는 단서가 될 수 있다.
그림4 | 태왕릉 출토 금동제용호문투조판(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集安市博物館, 2004)
 
(3) 청동방울
고구려 무덤에서는 금동, 청동, 철 등 금속으로 제작한 방울이 출토된다. 태왕릉에서는 3개의 청동방울이 출토되었는데, 한 점은 아래 끝단이 ∧모양으로 오목하고 횡단면이 타원형으로 납작한 형태이나(그림6-2), 다른 두 점은 아래 끝단이 일직선인 원통형이다. 전자는 높이 5cm이고 후자는 높이 5~5.2cm로 상단에 고리가 달린 형태인데 납작한 방울은 고리 달린 윗면에 구멍이 하나 뚫려 있다.
이 중 고리가 탈락한 원통형 청동방울 한 점 표면에 명문 12자가 새겨져 있다. 음각된 명문은 3자씩 4행으로 “辛卯年 好太王 □造鈴九十六”이다(그림5). 지금껏 이 청동방울의 출토 위치에 대해서는 태왕릉 남쪽 오른쪽 모서리 두 번째 호석 주변 돌 밑에서 청동제부뚜막 등 유물 30여 점과 함께 발견되었다(조법종, 2004)거나 현실 앞쪽 적석분 구상에서 출토되었다(이도학, 2004)는 등의 전언 보고가 있었다. 그러나 최근 태왕릉 남쪽 변에서 2.9km 떨어진 SG1 트렌치 중간 서쪽 편에서 출토된 것으로 공식 보고되었다. 그에 따르면 청동제부뚜막형명기와 금동만가 등은 태왕릉 남쪽 변의 서쪽 두 번째 장대석 아래, 금동제 상다리와 장막걸이쇠, 등자, 운주 등 청동제 및 금동제 유물 30여 점은 이로부터 80cm 떨어진 곳의 계단석 이음매 틈새 안쪽에서 출토되었다. 이 유물들은 도굴되어 이곳에 임시 매납된 태왕릉 출토품으로 보고 있다(백승옥, 2005).
그림5 | 태왕릉 출토 청동방울(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集安市博物館, 2004)
이 청동방울에 대한 그간의 논의는 명문 중 ‘신묘년’의 해석에 주목해 태왕릉의 피장자를 비정하는 데 집중되어 왔다. 신묘년을 391년으로 보아 광개토대왕의 즉위년에 주목한 ‘광개토왕설’과 고국양왕의 훙거년이라는 점을 강조한 ‘고국양왕설’, 고국원왕의 즉위 해인 331년을 신묘년으로 해석한 ‘고국원왕설’ 등의 견해가 제기되었다. 더불어 방울의 명문 ‘□조령(□造鈴)’에 포함된 첫 번째 글자를 ‘무(巫)’로 판독하여 광개토왕 시기의 무당이 왕명에 따라 이를 제작해 사용한 기물이거나 고국양왕의 무당이 왕이 훙거하자 그 명복을 빌기 위해 제작한 것으로 해석하기도 하였다. 다른 한편에서는 이 글자를 ‘릉(崚, 陵)’으로 판독하여 ‘호태왕릉을 위해 방울 96개를 제조하였다’거나 ‘교(敎)’로 판독하여 왕의 교시로 제작된 것이라 보기도 하였다.
방울의 용도는 실제 사용된 말방울 또는 제의나 의례용 기물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그러나 서봉총 출토 은합우(銀盒杅), 그리고 호우총 출토 호우(壺杅)명청동합 명문 조합과 비교해 ‘제작시기, 태왕, 숫자’로 이루어진 조합이 도량형 기물의 명문에서 흔히 확인되는 구조라는 점에 주목한 연구도 있다. 이에 따르면 신묘년명 방울의 횡단면 형태가 원형인 점이나 발성 기물로 사용되기에는 얇은 벽면 두께를 가지고 있다는 점 등도 일반적 방울 제작 관행과 다른 점이다. 이런 점에 더해 왕과 관련된 공식 명문을 가지고 있다는 점, ‘구십육(九十六)’과 같은 숫자 명문이 방울(鈴, 鐸)이 아닌 도량형에서 흔히 확인된다는 점 등으로 보아 이 기물이 일종의 권형(權衡), 즉 고국양왕 또는 광개토왕 시기 제작 및 반포한 도량형일 수 있다는 해석도 있다(조우연, 2017).
이 외에도 다양한 청동방울이 출토되었다(그림6), 천추총 매장부 출토 청동방울은 파손되거나 변형된 상태라 명확치 않으나 끝단이 오목하고 횡단면 타원형의 납작한 형태이다. 세 점 중 두 점의 윗면에 고리가 남아 있는데, 윗면 상태가 온전한 한 점은 높이 5.1cm 크기로 고리 앞쪽에 작은 구멍이 뚫려 있는 점이 태왕릉 출토품(그림6-2)과 유사하다. 횡구식 구조의 계단목실적석총인 산성하195호분에서 출토한 높이 4.4cm 크기의 방울은 덮개가 있는 형태로 추정되는데(그림6-1), 계단목개석실적석총인 만보정242-1호분 출토 금동방울과 유사하다. 우산하540호분에서 출토된 두 점의 청동방울은 횡단면 육각형에 높이 4.4cm 크기로 상부의 고리에 철제고리를 연결하였다(그림6-5).
그림6 | 고구려 고분 출토 청동방울의 종류와 형태(趙宇然, 2017)
- 1. A형(산성하195호분) 2. B-Ⅰ형(태왕릉) 3. B-Ⅰ형(천추총) 4. B-Ⅱ형(태왕릉) 5. B-Ⅲ형(우산하540호분)
 
(4) 철제거울
평탄대지 위 단독으로 자리한 계단목실적석총 마선구2100호분은 매장부가 파괴되고 비교적 이른 시기 도굴이 이루어진 상태로, 무덤 서쪽과 북쪽 편 도굴갱에서 다양한 금제와 금동제 장식편, 각종 철기, 마구 등과 함께 표면에 옷칠을 한 직경 38cm 크기의 대형 철제거울이 출토되었다(그림7). 가장자리 일부가 결실되고 표면 칠도 상당 부분 박락된 상태이나 중앙의 반구형 뉴와 칠이 남아 있는 부분에는 가느다란 비단 흔적이 남아 있다. 뉴 주위에 내원외방(內圓外方) 형태로 두 줄의 음각선이 돌아가고 그 바깥쪽에 4엽문이 있으며 꽃잎 사이 방형 구획 안에 문자가 양각되었다. 이 중 ‘당(當)’과 ‘자(子)’자만 희미하게 판독 가능한데 ‘자손당귀(子孫當貴)’와 같은 길상어로 추측된다. 거울 외연부에는 내향하는 16개의 연호가 돌아가며, 4엽문과 내향연호문 사이에는 간략하고 추상화된 기봉(夔鳳)무늬 4세트를 대칭되게 부조로 표현하였다. 감숙성 무위 경기장 동한묘 출토 금은기봉문철제거울의 문양과 풍격이 유사하고 옻칠한 철제거울이 삼국에서 위진 시기까지 중원 귀족의 표지성 물품이라는 점에서 이 거울이 외래품으로 전래되어 고구려 무덤에 부장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림7 | 마선구2100호분 출토 철제거울(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集安市博物館, 2004)
반면, 중국 후한 전기부터 제작되기 시작해 후한 말에서 서진대에 걸쳐 철제거울이 북방에서 많이 발견되나 동진 이후에는 북방에서 감소하고 남방에서 증가한다는 점, 북연 풍소불묘에서 철제거울이 출토된다는 점을 들어 마선구2100호분 출토 철제거울의 제작지가 삼연문화와 관련하에서 고구려일 것으로 상정하고 황남대총 북분 출토 철경의 성격을 이해하려는 견해도 있다(이양수, 2010). 시가33호분에서도 철제거울이 출토되었다.
 
(5) 금동제봉황형장식
평안북도 운산군 용호동1호분의 널방 내에서 철제부뚜막형명기, 금동투조금구 잔편, 토기, 유리편, 철제 못과 꺾쇠, 화살촉 등과 함께 금동제봉황형장식 4점이 출토되었다(그림8). 얇은 금동판을 오려서 봉황의 옆모습을 만든 것으로 세 점의 크기는 비슷하고 한 점이 크다. 큰 것은 길이 15cm, 높이 19.1cm, 날개 끝부분 길이 8cm이고 작은 것은 길이 12.7cm, 높이 13.1cm, 날개 길이 6cm이다. 표면에 별다른 장식이나 무늬가 없다. 역S자로 휜 몸에 커다란 꼬리깃이 뻗어있는 모습으로 뒤로 젖히고 있는 머리 위에는 펜촉모양장식이 달려 있고 턱 아래에 작은 돌기가 있다. 벼슬은 갈기와 같은 형태로 뒤로 휘날리듯 표현되어 있으며 큼지막한 날개는 위로 치켜 올라가 날아갈 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날개는 별도로 만들어 결합하였지만, 부착했던 흔적만 일부 남아 있다. 일직선으로 뻗은 두 다리의 위쪽에 돌기가 있어 윗다리와 아랫다리를 구분한 듯하며 발은 별도로 표현하지 않았으나 끝에 각각 하나의 못 구멍이 있어 이를 이용해 어딘가에 부착하였던 부속장식구임을 말해 준다.
그림8 | 용호동1호분 출토 금동제봉황형장식 - 1.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그림8 | 용호동1호분 출토 금동제봉황형장식 - 2. 朝鮮總督府, 1929
철제 관못과 꺾쇠, 장막걸이쇠 등이 함께 출토되어 목실 구조가 존재했으리라 짐작할 수 있어, 이 장식도 목실이나 다른 기물을 꾸미는 데에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강현숙, 2020). 마선구2100호분에서는 이보다 작은 크기(잔존높이 약 4cm)의 금동제봉황형장식 두 점이 말모양장식과 함께 출토되었는데, 모두 관(冠)장식으로 보고되었다(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集安市博物館, 2004). 우산하992호분에서도 같은 방식으로 제작된 장식편이 출토되었으나 용도는 알 수 없다.
 
2) 무덤 장구
(1) 금동만가(幔架)
태왕릉 서쪽 두 번째 호분석 아래에서 청동제부뚜막형명기와 함께 금동투조장식이 발견되었다. 도굴꾼들이 임시로 이곳에 매납한 상태로 추정된다. 배판, 측판, 앞덮개, 뼈대로 구성된 투조장식은 시체문(柹蔕文)이 반복되는 형태의 구조물로 배판 길이 2.42m, 폭 0.35m, 덮개 길이 2.68m 크기이다(그림9-1). 시체문장식은 감꼭지모양으로 투조한 방형 장식으로 4엽의 체판으로 이루어져 있다(그림9-2). 이의 부속으로 추정되는 ‘工’자형능형망, 높이 약 13.4cm 말다리모양편, 시체문투조장방형장식판, 시체문관장식덮개편 등도 함께 수습되었다. 각 부위는 청동리벳으로 연결되었다.
이러한 금동투조장식판들은 앞이 높고 뒤가 낮은 형태의 복원안(그림9-4)과 함께 휘장덮개라는 뜻의 ‘만가(幔架)’로 보고되었다(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集安市博物館, 2004). 반면 ‘만가’라는 기물과 명칭의 용례가 확인되지 않고 유물의 구조상 휘장을 걸었던 흔적을 확인하기 어려우며 윤곽선을 따라 못 구멍과 못이 확인되는 점으로 보아 시신을 안치한 목관의 외면에 부착한 장식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김수빈, 2022). 이에 따르면 복원된 앞이 높고 뒤가 낮은 형태는 내벽에 벽화가 그려진 북연 풍소불묘 출토 목관과 비교 가능하다. 관 양쪽 하단에 시체형금첩이 부착되어 있다. 또한 섬서성 법문사 출토 당대 은도금사리관도 이처럼 앞이 높고 뒤가 낮은 형태라는 점에서 참고할 만하다. 만일 이 금동시체문투조관장식이 목관 표면을 장식하는 데 사용된 것이라면 관의 형태 복원에 중요한 단서가 될 것이다. 태왕릉에서 출토된 여러 문양의 투조장식편은 금동시체문투조관장식의 일부이거나 또 다른 관장식 부속편으로 추정된다.
그림9 | 태왕릉 출토 금동만가(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集安市博物館, 2004)
- 1. 전체 모습 2. 세부 모습(배판) 3. 실측도 4. 복원도
 
(2) 장막걸이쇠
고구려 무덤 매장부 내부에서는 목관(목곽)이나 목실 부재인 금속제 관못, 관고리, 꺾쇠와 함께 무덤 장구로 사용된 장막걸이쇠가 발견된다(표1). 꺾쇠나 관못이 목관, 목실 등의 안치시설을 복원하는 단서가 된다면, 장막걸이쇠는 현실 내부에서 이루어진 매장의례를 추론케 하는 단서이다. 장막걸이쇠는 ‘ㄷ’자형으로 굽어 있고 대개 철제이나 태왕릉, 장천2호분 등에서는 금동으로 제작해 장식성을 부여한 경우도 있다(그림10).
표1 | 장막걸이쇠 출토 무덤 및 공반 무덤 장구
무덤명무덤 형식공반 무덤 장구
우산하992호분계단목실적석총장막걸이쇠, 청동제 관못, 꺾쇠
우산하2110호분계단목실적석총장막걸이쇠, 꺾쇠, 관못
우산하2112호분계단목실적석총장막걸이쇠, 관못,
칠성산211호분계단목실적석총장막걸이쇠, 청동제 관못, 꺾쇠
칠성산1096호분계단목실적석총장막걸이쇠, 철제관고리
서대총계단목실적석총장막걸이쇠, 철제 관못, 꺾쇠
마선구2100호분계단목실적석총장막걸이쇠, 관못, 꺾쇠
용호동1호분계단목실적석총장막걸이쇠, 관못, 꺾쇠
태왕릉계단석실적석총금동장막걸이쇠, 못, 꺾쇠
만보정1368호분봉토석실벽화분장막걸이쇠
산성하332호분(왕자묘)봉토석실벽화분장막걸이쇠, 청동제관고리, 철제문고리, 못
장천2호분봉토석실벽화분금동장막걸이쇠, 못, 화판형관장식, 관고리 관부재
그림10 | 태왕릉 출토 금동장막걸이쇠(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集安市博物館, 2004)
고구려 벽화고분 중 만보정1368호분, 마선구1호분, 우산하1041호분, 통구12호분, 산성하332호분, 장천1호분, 장천2호분, 미창구장군묘, 호남리사신총, 강서중묘, 강서대묘 등에서 장막을 걸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구멍이 벽에서 확인되었다. 만보정1368호분은 현실(남북 3.2m, 동서 2.4m, 높이 3.2m) 네 벽 상부 못 구멍과 함께 직각으로 굽은 철제장막걸이쇠가 확인되었는데, 북벽에 9개, 서벽에 6개, 남벽에 4개, 동벽에 2개가 남아 있으며 간격은 일정하지 않다. 현실 동벽 모서리 쪽에 돌을 쌓아 만든 장방형 부엌이 있고, 남쪽 끝에는 돌로 만든 화덕을 설치하였다. 집안 장천2호분 역시 현실(한 변 길이 3.52~3.6m)의 남벽, 북벽에 각 5개, 동벽에 8개, 서벽에 4개의 구멍이 일정 간격으로 나 있고 동벽 남단과 서벽 북단에서는 금동장막걸이쇠가 확인되었다. 장천1호분은 연화문으로 장식된 주실 벽 위쪽에 일정 간격으로 동벽에 8개, 남벽과 북벽에 각각 7개의 못 구멍이 뚫려 있다. 산성하332호분은 현실의 동·서·북벽 위쪽에 40~50cm 간격으로 벽마다 6개 못이 5cm 깊이로 박혔던 쇠못 구멍이 남아 있다. 칠성산1096호분은 석실 내 주검을 안치한 목실이 놓였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장막걸이쇠가 출토되어 목실 안에 유장을 드리웠던 것으로 보고 있다.
여러 폭의 피륙을 이어 만들어 둘러치는 장막인 휘장이 설치된 거대한 규모의 집이 고구려 고분벽화에 등장한다는 점에서 장례의식 중 현실 내부에 장막을 치는 행위는 고구려인의 계세적 내세관을 보여 준다(정호섭, 2009). 벽면 못 구멍과 장막걸이쇠가 확인된 장천2호분 남쪽 관대에서 출토된 유운문(流雲文) 비단편이 벽화의 장식 무늬와 함께 실제 설치되었던 휘장의 흔적일 가능성도 제기되었다. 고구려 고분벽화 장식 도안으로 사용된 ‘왕(王)’자 유운문은 고구려에서 제작된 ‘운포금’과 ‘문자금’을 묘사한 것으로 병풍이나 휘장 장식 비단의 무늬가 벽면 그림으로 표현되었다 보기도 한다(박아림, 2012). 따라서 이들이 무덤 내 제의공간 마련에 쓰인 것이라면, 본래 제사와 관련된 여러 기물과 부장품이 그 주위에 배치되었을 것이다.
 
3) 무덤 부속시설 출토 금속기
국내성시기에 조성된 초대형 적석총에서는 여러 부속시설이 확인된다. 우월적 입지의 배타적 점유를 드러내는 동시에 누대에 걸쳐 안정적으로 왕릉이 관리되어 있음을 시사하는 무덤 부속시설인 능원은 그 중 하나이다(강현숙, 2021). 서대총, 마선구2100호분, 천추총, 태왕릉, 장군총 등에는 능원의 담장으로 추정되는 석렬도 일부 남아 있다. 무덤과 일정 거리를 두고 장방형 또는 세장방형 평면으로 돌을 돌리고 내부에 작은 돌을 채워 쌓은 높이 1m 정도의 석대시설도 확인되는데, 제대의 성격을 가진 것으로 이해된다.
주 무덤에 딸린 별개 무덤으로 축조된 배장묘나 무덤 제사를 위한 건물인 능묘시설도 초대형 적석총의 부속시설에 포함된다. 마선구62호분과 태왕릉, 장군총에서 배장묘가 보고되고 칠성산871호분, 칠성산211호분, 우산하992호분의 제대시설도 배장묘일 가능성이 있다. 이러한 무덤 부속시설에서는 무덤 조성과 장례 과정, 나아가 매장 이후까지 정기적 제사가 이루어졌을 것이다.
한편, 천추총, 태왕릉, 장군총 등과 같은 초대형 계단석실적석총의 분구 상단에는 기와를 지붕에 얹은 묘상건축물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 경우, 정연하게 축조된 석실의 거대 천장석은 상부 묘상건물의 초석이나 기단석으로 활용되었을 수 있다. 실제 초대형 적석총 돌무지 사이에서 적지 않은 양의 암·수키와를 비롯해 막새 등이 출토되는데, 특히 우산하3319호분 출토 권운문와당에는 “정사년 5월에 중랑과 부인을 위하여 무덤을 덮을 기와를 만들고 또 백성 4천…만세를 누리시리라”는 명문이 있어 기와가 무덤을 덮는 데 이용되었음을 말해준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기와를 어떻게 덮었는지 알 수 있는 근거가 없다. 또한 불에 녹은 돌과 기와가 함께 응결된 채 분구 위에서 발견되는 경우는 분구에서 불을 태운 번소의식이 있었음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기와 출토가 곧 묘상건축물의 존재를 직접 입증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묘상건축의 성격에 대해서는 향당 또는 제의 관련 건물로 해석하거나, 화장의례 또는 방수시설과 관계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또한 계단적석총 층단의 ㄴ자상 판상석이나 석실 입구에서 유물이 출토되는 상황을 주검 안치와 관련된 일회적 묘전의례나 분구의례의 흔적으로 설명하기도 한다(강현숙, 2018).
이처럼 다양한 무덤 부속시설은 그 기능과 매장 정황이 명확치 않은 것이 대부분이나 이곳 출토품의 의미 해석에서 주 무덤 내 공헌물과 다른 출토 맥락이 고려되어야 함은 분명하다.
 
(1) 묘상건축 난간 연결쇠
장군총 남쪽 호분석 위 흙더미에서 여러 마디로 이루어진 철제사슬이 금동머리장식, 대량의 기와, 와당 등과 함께 발견되었다(그림11-1). 철제사슬은 양 끝에 원형 고리가 있는 철제봉을 연결한 구조로 모두 5단 24마디가 확인되었는데, 13마디 사슬이 남은 것 중 가장 길다. 이 중 두 마디는 고리 부근 철봉에 문자가 새겨져 있는데 “□육(□六)”, “□이(□二)”로 판독되며 다른 한 자는 ‘조(條)’자와 유사하다.
그림11 | 장군총 묘상건축 난간 연결쇠 관련 출토품(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集安市博物館, 2004)과 추정 능각(강현숙 외, 2020)
1. 철제사슬
2. 최상부 계단석 모서리 구멍
3. 추정 능각
한편, 장군총 최상층 7층 계단석 네 면 가장자리에는 직경 약 10cm, 깊이 약 15cm 크기의 구멍이 일정 간격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 확인되어(그림11-2) 계단석 위 구멍은 장군총 7층 계단 위 중앙에 세워진 기와를 얹은 목조 묘상건축물과 그 주위 난간을 박았던 흔적이며, 철제사슬은 난간 연결쇠로 사용된 것이라 추정된다. 이처럼 장군총 외부에서 출토된 철제사슬은 무덤건축에 남아 있는 흔적과 함께 최상위 적석총 묘상건축과 그 부가시설의 존재 가능성을 제기하는 중요 단서이다.
 
(2) 수레바퀴비녀장(車轄)
견고하고 탄성 있는 바퀴살로 이루어진 수레바퀴의 제작과 사용은 문명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오회분4호묘에 대장장이신과 함께 등장하는 수레바퀴신(그림12-1)의 모습은 고대사회에서 수레바퀴의 제작이 철기 제작과 대등한 가치로 인식되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고구려에서 수레바퀴가 사용되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는 벽화에 등장하는 여러 행렬모습뿐 아니라 부속구인 철제 차관과 비녀장 등에서 확인된다. 비녀장은 수레바퀴가 빠져나오지 않도록 차축 끝에 박는 못이다. 고분벽화 행렬장면 중 수레의 바퀴 축 중앙에 길쭉하게 돌출된 비녀장이 표현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그림12-2). 초대형 적석총의 부속시설에서도 수레바퀴와 관련된 유물이 발견된다.
그림12 | 고구려고분벽화 속 수레바퀴
1. 수레바퀴신(오회분4호묘)
2. 수레(덕흥리고분)
임강총 제대 주변에서 청동제수레바퀴비녀장이 발견되었다(그림13-1). 주 무덤 동측 변 13.5m 떨어진 장방형 제대 표면에서 불에 탄 흔적과 유사한 검은 흙덩이가 확인되었으며, 주위에서 철제허리띠고리, 금동장식편 등과 함께 비녀장이 발견되었다. 길이 17cm의 청동제비녀장은 윗부분이 두 손을 허리에 대고 서 있는 인물 형상을 한 형태로 길이 18.6cm 크기의 우산하2110호분 출토 2점과 유사하다(그림13-2, 3). 제대 추정 시설에서 출토되는 수레바퀴비녀장은 마선구626호분에서도 확인된다(그림13-4). 마선구626호분 출토 비녀장은 길이 14.8cm의 철제품으로 크기도 작고 특별한 장식 없이 상부를 말아 제작한 형태이다. 무덤 시설은 아니나 오녀산성 철기저장공(JC)에서도 길이 11cm에 특별한 장식 없는 소형 비녀장이 출토되었다(그림13-5). 현재로서 제대 출토품과 무덤 내 출토품 간 의미 차이를 규정하기는 어려우나 사회적 가치재로서 상징성을 가진 기물인 수레바퀴 부속구의 출토 맥락을 고려한 의미 해석이 필요할 것이다.
그림13 | 고구려 무덤 출토 수레바퀴비녀장(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集安市博物館, 2004)
- 1. 임강총 2·3. 우산하2110호분 4. 마선구626호분 5. 오녀산성
 
(3) 철제편자
전형적 계단석실적석총인 장군총은 주 무덤 동북쪽에 2기의 배장묘와 제대가 있고 서남쪽에는 부속된 제사시설 성격의 대형 건축유구가 남아 있어 고구려 왕릉 매장제도의 특징을 잘 보여 준다. 특히 장군총 1호, 2호 배장묘는 축조기술이나 구조적으로 장군총과 유사해 주 무덤과 비슷한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
장군총 1호배장묘에는 철제말편자 2점이 부장되었다(그림14-1, 2). 말의 발굽이 닳는 것을 보호하기 위해 사용되는 편자는 U자형 금속에 못을 박기 위한 구멍이 일정 간격으로 나 있는 형태로 구멍에 못이 박힌 채로 확인되기도 한다. 이러한 철제편자는 고려성자촌 고려성산성, 집안 산성자산성 궁전지, 석대자산성, 구리 아차산3보루 등과 같은 생활유적에서도 출토되나 무덤 내 부장품으로 매장된 점은 고구려에서 말이 차지했던 가치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장군총 1호배장묘에 길이 27cm의 집게 1점과 끌 2점, 정 등의 철제단야구가 부장된 점도 주목할 만하다. 이곳에서는 용도를 알 수 없는 높이 20cm의 안장형 철기도 함께 출토되었다.
그림14 | 무덤 부속시설 출토 철제편자(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集安市博物館, 2004)
- 1·2. 장군총 1호배장묘 3. 장군총 2호배장묘 4. 임강총 제대
장군총 2호배장묘에서는 길이 10.8cm 크기의 철제편자 1점 출토되었으며(그림14-3), 임강총 제대에서는 길이 10cm 크기의 철제편자 1점(그림14-4)이 청동제수레바퀴비녀장, 재갈 등을 비롯한 금속기와 함께 출토되었다. 그 밖에 옥도리 동우동 9호분, 10호분 등에 철제편자가 다량 매장되었으며(그림15), 산성하전창145호분에는 못 구멍이 3개인 초승달형소편자가 발견되었다.
그림15 | 옥도리 동우동9호분 출토 철제편자와 출토 모습(국립문화재연구소,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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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매장시설 출토 기타 금속기 자료번호 : gt.d_0009_0080_0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