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금속기 제작기술
3. 금속기 제작기술
1) 철 생산공정
철은 강인하고 실용적이며 인간의 생활방식에 획기적 변화를 가져다 준 소재로 오늘날까지 생활 속에서 매우 다양하게 이용되고 있다. 인류가 처음으로 철을 사용했다고 알려진 고대 서아시아나 중국에서는 운석에 포함되어 있는 운철, 즉 자연철이 이용되었는데, 이는 니켈 성분이 많아 질이 무르고 양이 적어 실용화시키기 어려웠다. 철기는 청동기보다 손쉽게 원재료를 구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으나 고온의 화력을 낼 수 있는 기술력과 철광석을 녹여 철을 뽑아내는 제철기술이 발명되면서부터 비로소 이용되기 시작했다. 철기 제작을 본격화한 기술의 발전은 새로운 토기의 출현, 생산력 중대와 군사력 강화 등과 맞물려 사회 변화의 근간이 되었고, 사회 통합과 국가 권력 성장을 뒷받침하는 핵심 동력이 되었다.
철기는 철의 생산과 철기의 제작 과정을 통해 완성된다(그림18). 철 생산은 철기 제작에 필요한 소재를 생산하는 과정으로 철 성분을 포함하고 있는 원료에서 철 광물을 분리해내는 제련공정에서 시작된다. 원료인 철광석 또는 사철을 연료와 함께 생산시설인 노(爐)에 넣어 가열해 철 성분을 추출해 얻는 괴련철(塊鍊鐵)과 선철(銑鐵)은 1차 철 소재에 해당된다. 고구려 영역 내에서 아직 당시의 광산유적이 발견된 예는 없으나 북한 전역 및 중국 동북 지역에 분포한 철광석 산지가 적극 개발되었을 뿐만 아니라 광석 결핍지역에서는 사철을 채취하여 사용하였을 것으로 보고 있다. 제련작업은 철의 원료뿐 아니라 생산 과정 중에 투입되는 막대한 연료를 확보하기 쉬운 지역이 선호되었다. 따라서 통상 원료보다는 연료 산지에 가까운 위치가 제철작업지로 선택된다. 따라서 고구려의 철 제련도 성곽 주변의 삼림이 고갈되어 가면서 점차 산악지대로 이동해 갔을 것으로 생각되나, 고구려 탄요로 볼 만한 사례는 아직 없다. 더불어 427년 평양 천도 후에 은율, 재령, 하성 등지의 적철광이나 갈철광 사용이 확대되면서 후기 고구려의 제철문화가 지속적으로 발전하였다는 것이 북한 학계의 입장이나 체계적이고 본격적인 연구는 충분치 않다.

그림18 | 한국 고대의 제철 공정도(이남규, 2019)
도구로서 철의 성능을 좌우하는 특성은 강도와 경도인데, 철의 화학 성분 조성, 무엇보다 탄소 함량에 따라 기계적 성질이 크게 변한다. 일반적으로 탄소 함량에 따라 순철, 강철, 그리고 주철로 구분한다. 철 소재인 철광석은 철 원자가 주로 산소와 결합하여 산화물 상태로 존재하고 있어 제련로에서 목탄과 함께 넣어 가열 시 온도 상승과 함께 철광석 내 산소 제거에 필요한 탄소를 목탄으로부터 공급받아 환원 상태, 즉 철 본연의 상태가 될 수 있다. 제련 과정에서 생산되는 철 소재는 제련로의 축조방식과 공급되는 목탄의 양, 그리고 목탄과 철광석이 반응할 수 있는 시간과 온도 범위에 따라 탄소 함량이 지극히 낮은 순철이 생산되거나 탄소 함량이 높은 주철이 생산되는 경우가 보통이다. 탄소 함량에서 이들의 중간에 있는 강 소재는 기술적 난이도가 높아 고대의 철광석 제련 과정에서 자연적으로 얻기 어려우며, 이미 생산된 순철이나 주철의 탄소 함량을 조절함으로써 생산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철의 용해(또는 응고) 온도는 순철에서 1539℃에 이르나 탄소 함량이 증가함에 따라 점차 낮아져 탄소 함량 4.3%의 주철에서는 1,148℃까지 낮아진다. 탄소 함량이 주철에 비하여 낮은 철 소재는 그 용해온도가 비교적 높아 고대에 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용해 및 응고 작업은 거의 이루어지지 못한 반면, 주철을 대상으로 한 용해작업은 상대적으로 일찍 쉽게 실행될 수 있었던 것이 그 때문이다.
따라서 고대 제철에서 1,000℃ 정도 온도까지 고체 상태의 철광석을 달궈 반용융 상태로 만든 후 두드려 불순물을 분리해 얻는 철이 괴련철이다. 불순물이 빠져나간 자리가 빈 구멍으로 남은 형태라 해면철이라고도 불린다. 이 경우는 탄소가 0~0.03% 정도 미미하게 포함되어 있어 강도와 경도가 낮은 순철 성분으로 충격에 잘 부서지고 잘 늘어나는 성질을 갖는다. 1,200。C 정도 온도에서 녹아 얻어지는 선철은 탄소를 4.3% 내외로 포함한 주철로 경도가 높아 매우 단단한 대신 충격에 깨지기 쉽다. 반면, 탄소 함량이 0.03~2.1%에 해당하는 강철은 순철이나 주철에 비하여 기계적 성능이 우수할 뿐 아니라 두드림이나 열처리로 강도와 연성을 자유롭게 조절할 수 있어 철 소재 중 가장 쓰임새가 크다. 충격에 강하고 질기며 늘어나는 성질을 가지고 있어 실용구로서 매우 유용하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철기 제작기술의 발달은 강철 생산, 즉 제강기술 확보를 위한 노력의 과정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철기 제작기술 연구에서 반드시 고려되어야 할 점은 강철 소재를 생산하는 데 어떠한 제강법이 적용되었는가이다. 어떠한 제강법을 주로 사용하느냐에 따라 당대 철기산업의 기본구조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론적으로 강 소재는 순철의 탄소 함량을 높이거나 주철의 탄소 함량을 낮춤으로써 생산할 수 있다. 제강 과정에 순철이 응용될 경우 탄소를 투입하는 작업이 수행되어야 하며, 주철의 경우는 탄소를 제거하는 작업이 이루어져야 한다. 일반적으로 전자는 침탄제강법으로, 후자는 탈탄제강법으로 불리며, 후자는 다시 고체 상태에서 진행되는 공정과 액체 상태에서 진행되는 공정으로 구분된다. 고대사회에서는 이처럼 괴련철과 선철의 성질을 변화시켜 보다 실용성 높은 소재로 만드는 제강공정으로서 탄소량을 높이는 침탄기술과 탄소량을 낮추는 탈탄기술이 고안되었다.
침탄기술은 탄소량이 거의 없고 불순물이 많은 괴련철을 소재로 하는 경우 탄소량을 높여주기 위한 공정에 적용된다. 일단 정련로에서 정련작업을 거친 후 목탄 불에 계속 가열하여 철 표면에 탄소를 부착시킨 후 이를 두드리고 접는 과정을 반복하여 침탄시키는 것과 동시에 반복적으로 두드려 재질을 균일하게 하고 강도를 높여 나갔다. 그에 비해 탈탄기술은 탄소량을 줄이는 공정이다. 고체 상태에서 오랜 시간 열처리하여 표면으로부터 탈탄을 유도한 주철탈탄강을 생산하는 기술이 있는 반면, 주철을 가열하여 반액체와 반고체 상태로 만든 후 탈탄제를 첨가해 고루 섞어 탈탄시키는 기술이 초강법이다(그림19).

그림19 | 『천공개물(天工開物)』의 초강 생산(국립중원문화재연구소, 2020)
한편, 철 소재의 조직은 규칙적으로 배열된 철 원자들 사이에 형성된 빈 공간 일부에 탄소 원자들이 들어가 있는 구조이다. 이들은 응고가 완료되어 고체가 된 후에도 온도의 높고 낮음에 따라 원자 배열의 규칙성, 즉 결정구조가 변화하고 그에 따라 기계적 성질이 달라질 수 있다. 따라서 철 소재를 두드리거나 가열 또는 냉각하는 열처리를 거침으로써 기계적 성질을 다양하게 조절할 수 있다. 특히 강은 순철이나 주철에 비해 열처리로 성능을 크게 개선하거나 자유롭게 조절할 수 있어 쓰임새가 높다. 열처리에는 담금질, 뜨임, 풀림 등이 있는데, 강철을 가열하고 물 또는 기름 속에서 급랭해 경도가 매우 큰 조직이 생성되는 담금질은 대표적인 열처리 기법으로 단조철기의 날 부분을 보다 강화하기 위해 주로 사용되는 기법이다.
2) 철기 생산 유적과 단야공구
고구려의 초기 제철유적은 압록강 중류 유역인 자강도 일원에 분포한다. 자강도 시중군 노남리유적과 중강군 토성리유적에서 제철 관계 유구가 보고되었다. 북한 학계의 보고 초기에는 노남리 제철유구를 쇳물(선철)을 받아내는 제철로, 토성리 유구를 단순 쇠부리터로만 보았으나, 이후 이들이 완전 용융 상태에서 강철을 생산할 수 있는 노라 판단하였다. 이는 선철에 첨가제를 넣어 탈탄시켜 강을 제작하는 방식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이나 근거를 제시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제강로에서의 강철 생산’을 강조하면서 광석(Fe₂O₃, Fe₃O₄)을 사용한 선철 탈탄공정을 상정하였고, 장수산 일대 고구려 제철로 중 원통형은 제련로, 장방형은 제강로로 이해하였다(표3).
표3 | 장수산 일대 고구려 제철로
| 위치 | 형태 | 크기(높이×직경 또는 길이×폭)(m) | 벽 두께(m) |
| 1호 쇠부리터(외성) | 장방형 | 2×0.95×1.3 | 앞 1.5, 뒤 0.85 |
| 2호 쇠부리터(외성) | 원통형 | 0.5×0.57 | 0.4 |
| 동문 쇠부리터(외성) | 원통형 | 0.57×0.45 | 0.25 |
| 남문 쇠부리터(외성) | 장방형 | 0.75×0.55×0.7 | 앞 0.6, 뒤 1.45 |
단야로는 아차산3보루에 단야시설이 존재하는 것으로 보고되었으나, 철재, 단조박편 및 입상재 등 작업이 이루어졌음을 보여주는 흔적은 보고되지 않았다. 그에 비해 연천 무등리2보루에서는 남쪽 치의 서벽 바깥쪽 아래(최대 크기 30cm), 북쪽 치의 서벽 바깥쪽과 남쪽 성벽의 바깥쪽 바닥면에서 철재가 노출되었고, 방형 석축 내부의 배수로에는 철재와 노벽편이 다량으로 폐기된 상태였다. 기능과 지형을 고려할 때 치 주변에 제철장이 있었다고 보기는 어려우나, 남쪽 성벽 안쪽과 방형 석축 배수로 사이에 정련과 단련 단야를 실시하던 제철로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정련 철재 및 단련단야, 성형단야에 쓰이는 단야공구들이 산성 및 관방 유적, 나아가 무덤의 부장품으로도 확인된다(표4). 마선구1445호분과 장천2호분에 철제망치가, 태왕릉에 철제 끌과 정이, 장군총 1호배장묘에 철제 집게와 끌, 정과 같은 공구류가, 우산하540호분에 철제끌이 부장되었다. 단야구의 부장은 앞선 시기 낙랑 목곽묘인 평양 정백동62호분과 정백동81호분에서도 이미 확인된다. 창원 다호리17호 목관묘에 망치 1점, 64호 목곽묘에 철광석이 부장되었으며, 신라 권역에서는 생활유적보다 고분 부장품으로 대부분 확인된다. 이처럼 무덤에서 단야구가 부장품으로 확인되는 경우가 많은 것에 대해 공방에서 사용된 단야구는 다시 녹여 재가공하거나 폐기되었을 가능성이 많기 때문으로 보지만(차순철, 2003), 대형 무덤 내 단야구의 부장은 고대사회에서 철기 제작기술 보유의 의미와 위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표4 | 고구려의 철기 단야도구 출토 현황
| 유적 | 유적 성격 | 단야구 |
| 국내성 | 산성 | 모루, 망치 |
| 오녀산성 | 산성 | 망치, 줄, 끌, 천공기, 정(鏨), 쐐기 |
| 홍련봉2보루 | 관방 | 망치, 집게, 정(鏨), 지석 |
| 아차산3보루 | 관방 | 정(鋌), 지석 |
| 아차산4보루 | 관방 | 망치, 정(鏨), 지석 |
| 아차산시루봉보루 | 관방 | 집게, 정(鏨), 끌, 지석 |
| 용마산2보루 | 관방 | 망치, 집게, 지석 |
| 호로고루 | 관방 | 집게, 끌, 망치 |
| 장군총 1호배장묘 | 무덤 | 집게, 끌, 정(鏨) |
| 태왕릉 | 무덤 | 끌, 정(鏨) |
| 마선구M1445호분 | 무덤 | 망치 |
| 장천2호분 | 무덤 | 망치 |
단야구로는 집게(그림20), 망치, 줄, 끌, 정, 모루 등이 남아 있는데, 철기 생산을 반증하는 철정, 철재, 철괴 등이 공반되기도 한다. 이 중 대장간에서 철기를 열처리하거나 단조작업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철제집게는 소유자의 사회적 지위를 상징하는 대표적 단야구이다. 집게는 단조철물의 크기나 형태, 무게에 따라 집게부와 손잡이부의 길이와 형태가 달라 소형은 성형단야용, 대형은 단련단야용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삼국시대 집게부의 형태를 원형과 타원형으로 분류하기도 하는데, 원형 집게는 옥전M3호분, 임당 조영E1호분 출토품 등 소수만 확인되어 지역적·기능적으로 형태 차이가 존재한다 판단하기는 어렵다(김승옥·이보람, 2011). 다만 원형 집게가 주조작업 시 쇳물을 부을 때 도가니를 집거나 작은 철물을 단단하게 집는 데 유리한 형태라는 기능성에 주목하기도 한다(김은주, 2007).

그림20 | 철제단야공구-집게(축척 부동)
- 1. 장군총 1호배장묘 2. 홍련봉2보루 3. 용마산2보루 4. 시루봉보루 5. 호로고루
- 1. 장군총 1호배장묘 2. 홍련봉2보루 3. 용마산2보루 4. 시루봉보루 5. 호로고루
망치는 철기 가공작업 외에도 못박기나 석공의 작업도구로 다목적 활용이 가능한 공구이다. 그런 까닭에 망치의 중량과 형태 차이에 따라 못을 박는 용도로 사용된 것과 단조에 사용된 것에 차이가 있으리라는 점(송계현, 1984)과 한쪽 끝부분이 뾰족한 형태는 석공이 작업용으로 사용한 것이라는 견해(차순철, 2003)가 있다. 단야작업에서 망치는 철 소재를 두드려 의도하는 철기를 성형하는 데 사용하는 도구로서 단조작업의 핵심 공구이기도 하다. 목탄과 함께 가열해 철 소재를 두드릴수록 탄소 함유량이 증가하여 강철이 되는 점 역시 그 중요성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철기 제작의 공정과 세부작업 성격에 따라 사용하는 망치의 크기와 형태도 다양하다. 1차 가공의 단야작업에는 상대적으로 큰 망치가 필요하지만 정교한 타격이 필요한 철기의 성형이나 큰 망치의 보조 역할 시에는 중소형 망치가 사용되었을 것이다. 그에 따르면 홍련봉2보루 출토 소형 망치가 성형단야에 사용된 것이라면 용마산2보루나 아차산4보루 출토 대형 망치는 단련단야의 메질용으로 볼 수 있다.
줄은 단야작업 이후 쇠붙이를 벼르거나 이미 제작된 철제품의 날을 세울 때 사용했던 도구로, 좁고 길쭉한 형태의 아래쪽에는 나무손잡이를 고정시키기 위한 경부가 있다. 철기 표면을 마연 가공하기 위한 미세 눈금 형태의 얕은 줄눈이 앞뒷면에 있다.
끌은 날의 반대편을 망치로 두드려 철판을 자르는 도구이다. 날 부분을 뾰족하게 세운 길쭉한 형태로 가공 목적에 따라 다양한 형태의 날을 가진 끌이 제작, 사용되었을 것이다. 특히 고구려 유적에서 출토되는 철제끌은 날의 반대편이 투겁식으로 제작된 형태가 많다.
철의 단련과 철기의 성형 과정에서 구부리기나 천공(穿孔) 등에 쓰이는 정(鏨)은 일반적인 끌(鑿)보다 굵거나 두부에 강한 충격을 받은 흔적을 갖고 있는데, 때에 따라서는 채석용이나 치석(治石)용으로 쓰였을 것이다.
모루는 단조나 판금 작업 시 철기를 올려 놓는 작업대 역할을 하는 도구로, 석제와 철제가 모두 제작, 사용되었다. 이 중 철제모루는 지하에 몸통의 절반 이상이 묻히는 대형 모루, 지상에 설치되는 소형 모루, 철상의 형태가 세장하여 끝이 뾰족하여 다리 부분을 땅속이나 나무에 박아서 사용하는 부리형모루 등이 있다(吉川金次, 1991).
고구려에서 사용된 단야구는 오회분4호묘의 대장장이신이 그려진 벽화 속에 망치, 집게, 모루가 등장하고 있어 그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그림21-1). 상투를 튼 남자가 바위처럼 생긴 곳에 앉아 모루 위의 철물을 망치로 내려치는 모습이다. 단야로는 보이지 않으나 왼손에 집게로 철물을 잡고 오른손에 쥔 쇠망치로 이를 세게 내리치려는 장면을 포착했다. 단조작업을 위해 철물을 올려 놓은 모루는 통나무를 잘라 세우고, 그 위에 원통형 철제모루를 고정시킨 것으로 보인다. 소형 망치로 앉은 채 작업하는 모습으로 보아 마지막 성형단야 작업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그림21 | 단조철기 제작 모습 - 1. 오회분4호묘 벽화 속 대장장이신의 성형단야 모습
그에 비해 대장간 작업을 그린 조선 후기의 풍속화 속 단야 장면은 조금 다른 제작공정을 담고 있다(그림21-2). 김홍도의 대장간 그림에는 중앙의 가마 주변으로 풀무꾼과 집게를 다루는 사람, 망치잡이, 낫을 갈고 있는 사람 등 모두 5명이 한 조로 작업하는 모습이 담겨 있다. 가마 앞쪽의 방형 단 위에 집게를 쥔 사람이 쭈그린 자세로 앉아 있고 모루 반대편에는 2명이 망치를 들고 메질을 하고 있다. 원통형 철제모루는 통마루 받침대 위에 놓여 있으며, 모루 옆에 있는 구유형물통은 급랭을 통한 담금질 등에 이용된 장비였을 것이다. 모루 위의 철물이 아직 크고 정교한 형태를 갖추지 않아 이를 붙잡고 있는 철제집게나 2명이 교대로 내려치는 망치의 크기도 크다. 따라서 이 작업은 철기 성형을 위한 최종 단야작업이라기보다는 정련이나 단련을 위한 작업 과정으로 보인다.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는 모루 주변으로는 단타작업으로 표면이 박리된 철재들이 사방에 흩어져 있다.

그림21 | 단조철기 제작 모습 - 2. 김홍도 풍속화 속 정련(단련)단야 모습(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고대사회에서 단야구는 철기를 전문적으로 제작하는 특정 장인집단 계층의 존재와 국가경쟁력을 가늠해볼 수 있는 단서이다. 그런 의미로 대형 무덤에서 출토되는 단야구는 작업의 전문화와 사회적 계층화를 시사하는 표지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단야구가 부장된 대형 무덤의 피장자를 직접 단야작업에 종사한 장인이라 보기보다는 철기 제작기술을 가진 집단의 수장층을 상징하는 의미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신라 지역의 경우 경주를 비롯한 일부 중심지의 지배층 집단묘역인 대형 고분군에서는 대형 집게 1점만 부장되는 반면, 중소 규모 고분군 내에서는 고루 갖춘 단야구가 부장된 예가 확인된다. 또한 야철기술이 보편화되어가는 과정에서 장인집단의 사회적 신분이 전대에 비해 낮아지는 현상도 확인된다(차순철, 2003). 이처럼 당시의 사회적 가치 변화와 맞물려 단야구의 부장이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오녀산성에서는 군인들의 막사로 추정되는 주거지와 임시 철기저장시설로 추정되는 교장유구에서 철제 망치, 끌, 쐐기, 줄, 천공기 등의 단야공구가 출토되었다(그림22). 이들은 출토 정황상 전문 장인의 본격적 철기 제작 흔적이라기보다는 산성 내부에 주둔하고 있던 군인들이 유사시 병기를 제작하거나 간단히 수리하는 데 사용한 공구로 보인다. 대장간 단조작업에 가장 중요한 시설인 단야로가 확인되지 않은 점, 집게가 출토되지 않은 점 등이 이를 뒷받침한다. 임시 철기보관시설인 JC 교장유구의 주변 주거지 중 하나인 F35 주거지에서 단조공방으로 추정할 수 있는 대형 판석이 발견된 점도 주목할 만하다. 지표 아래 30cm 지점에서 확인된 원형 수혈인 JC 교장유구 내부에는 철솥(鐵釜) 내부에 철촉 191점을 비롯하여 모두 300여 점의 철기가 담겨 있었다. 솥의 바닥면과 측면에 찰갑의 소찰편이 덮여 있었는데, 본래 찰갑 한 벌로 솥의 윗면을 덮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솥의 외부에서는 말 재갈 1점이 출토되었다. 이 유구 출토품에는 망치 2점, 철정, 끌, 줄, 쐐기, 천공기 각 1점을 포함해 등자, 재갈, 수레축구, 허리띠장식 등의 마구, 벌목구인 양날도끼와 나무껍질을 벗기는 데 사용할 수 있는 철겸, 철도자 등 다종다양한 철기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은 산성에 주둔한 병사들이 유사시 산성 방어에 필요한 비축품을 수리하고 가공하는 데 상시 이용할 수 있는 작업도구로 추정된다. 이는 고구려에서 전문공인 뿐 아니라 전쟁을 수행하는 군인들 중에도 간단하게 철을 다룰 수 있는 인력이 존재했음을 말해준다(차순철, 2004). 한강 유역에 분포하는 고구려 관방유적 내에서 단야공구가 출토되고 간이 대장간 추정 시설이 보고되고 있는 점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림22 | 오녀산성 출토 단야공구와 철기 매납 철제솥(축척 부동)
- 1·6. 철제솥(JC 교장) 2·3. 망치(JC 교장) 4. 줄(JC 교장) 5. 쐐기(JC 교장) 7. 천공기(JC 교장) 8. 정(釘, JC 교장) 9. 망치(F29호주거지) 10. 끌(F32호주거지) 11. 철첩(鐵鉆, J2호 건물지) 12. 망치(유물포함층 T41조사구) 13. 천공기(유물포함층 T63조사구) 14. 천공기(유물포함층 T56조사구)
- 1·6. 철제솥(JC 교장) 2·3. 망치(JC 교장) 4. 줄(JC 교장) 5. 쐐기(JC 교장) 7. 천공기(JC 교장) 8. 정(釘, JC 교장) 9. 망치(F29호주거지) 10. 끌(F32호주거지) 11. 철첩(鐵鉆, J2호 건물지) 12. 망치(유물포함층 T41조사구) 13. 천공기(유물포함층 T63조사구) 14. 천공기(유물포함층 T56조사구)
단야작업에 사용된 철 소재의 성격은 분명하지 않다. 아차산3보루 출토 정(鋌)으로 보고된 방형 철기 1점이 있기는 하나 소형이라는 점과 아직 다른 유적에서 유사한 출토 사례가 없다는 점에서 신중한 해석이 필요하다. 다만 연천 무등리2보루에서는 철의 정련 결과 생성된 철재가 출토되어 이곳에 철정(鐵鋌)과 같은 철 소재를 제조하던 공방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였다. 무등리2보루 남쪽 치의 서벽 바깥쪽 아래(최대 크기 30cm), 북쪽 치의 서벽 바깥쪽과 남쪽 성벽의 바깥쪽 바닥면에서 철재가 확인되었다(그림23). 또한 방형 석축 내부 배수로에는 철재와 노벽편이 다량으로 폐기된 상태였다. 보루에서 노벽편이 많이 보이는 것은 최종적으로 제철조업이 종료되고 그 시설이 크게 훼손되었음을 의미하며, 제철장의 나머지 부분은 후대 삭평으로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다만, 치 주변에서 철재가 확인되기는 하였으나 기능과 지형의 면에서 치 주변에 제철장이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고 남쪽 성벽 안쪽과 방형 석축 배수로 사이에 정련과 단련 단야를 실시하던 제철로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에서 수습된 철재와 슬래그에 대한 분석 결과 무등리2보루에서 초강 정련작업이 이루어졌다고 보고 있다(이남규, 2018). 이러한 점을 고려한다면 무등리2보루는 주변의 고구려 군부대에 철기 내지는 철 소재를 공급하는 일종의 군수기지 역할을 담당하였을 가능성이 크다(최종택·양시은, 2018).

그림23 | 무등리2보루 제철 흔적(이남규, 2018)
- 1. 남쪽 치 2. 북쪽 치 3. 배수로 4. 남쪽 성벽
- 1. 남쪽 치 2. 북쪽 치 3. 배수로 4. 남쪽 성벽
3) 고구려의 철기 제작기술
철 소재를 활용해 제작된 철기는 최종 성형방식에 따라 단조품과 주조품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철기의 용도와 기능에 따라 다양한 소재와 제작공정이 적용되었다. 선철을 거푸집에 주입하여 생산하는 주조철기는 거푸집 제조, 용해작업, 주조작업, 열처리 등의 공정을 거친다. 고구려의 철기 대부분은 단조공정을 통해 제작되었으며, 사용 시 강한 충격을 받지 않아도 되는 철제용기와 같은 기종은 주조공정으로 제작되었다.
주조철기로는 구의동보루에서 시루와 나란히 온돌 아궁이에 걸린 채 출토된 둥근공모양 몸체의 쇠솥, 칠성산고분군 채집품과 환도산성 출토품과 같은 세발솥, 운산 용호동1호분 출토 철제부뚜막 등이 있다. 또한 쟁기 바닥에 끼워 땅을 갈아 흙덩이를 뒤집는 데 사용된 철제보습 역시 주조로 제작되었으며, 일자형가래날도 주조품이 확인된다.
조선 후기 김준근이 그린 〈가마점〉에는 철제 솥과 쟁기를 제작하고 있는 주조작업 모습이 잘 담겨 있다(그림24). 이 그림은 전통시대 용해 공정을 보여주는 매우 드문 자료이다. 크고 둥근 원추형가마는 앞쪽에 쇳물을 받아내는 아궁이가 있고 위쪽에는 배연작업을 위한 구멍이 뚫린 형태다. 가마 뒤편에서는 풀무꾼 4명이 2명씩 마주 보고 풀무질을 하고 있다. 이곳에는 차양과 2개의 기둥, 그리고 풀무꾼의 손잡이가 설치되어 있다. 풀무는 상면만 보여 전신은 지하에 매설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가마 앞쪽에서는 쇳물을 옮기기 위한 도가니가 놓여 있다. 5개 솥거푸집과 3개의 쟁기거푸집이 가지런히 배열되어 있으며, 오른쪽 아래에는 쇳물을 받아 옮기는 작업자 2명이 솥거푸집에 용해된 쇳물을 붓고 있다. 갓을 쓰고 봇짐을 진 1명이 8명의 작업자를 지켜보고 있어 작업관리자인 듯하다.

그림24 | 김준근 〈가마점〉(ⓒNRICH/Museum am Rothenbaum (MARKK), Hamburg)
단조철기 제작에는 강도가 서로 다른 강 소재를 합쳐 만드는 합단기술이 사용되었는데, 이를 통해 내부는 유연한 연강을, 외부는 경강을 사용하여 강도가 높으면서도 부러지지 않는 도구를 제작하고 필요한 부위에만 강을 사용함으로써 소재를 경제적으로 활용해 실용구를 제작할 수 있었다. 또한 단조철기의 날 부분을 보다 강화하기 위한 열처리로 담금질을 하거나 너무 강도가 높아지면 재가열하여 풀어주는 풀림기술이 사용되었다. 이때 달궈진 철을 담구는 물이나 기름의 온도를 조절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기술 중 하나였다. 단조작업에는 모루, 집게, 망치가 기본적으로 이용되지만, 갑옷이나 마구 등 형태가 복잡한 철기를 제조할 때에는 끌 등의 절단도구와 정교한 세공도구가 사용되었다. 성형을 마친 철기는 거친숫돌단계와 고운숫돌단계를 거쳐 연마되어 최종 생산품으로 완성되었다.
철기 제작기술에 대한 금속학적 연구는 소재로서 철의 기계적 성질과 제작원리를 밝힐 수 있으며 금속 내부에 존재하는 비금속개재물의 성분 파악은 제철의 원료와 생산방식 등을 규명하는 데 유용하다. 우리나라에서 철기에 대한 금속학적 연구는 1960년대 북한의 공학자인 최상준이 세죽리, 범의구석, 운성리, 풍천리, 노남리에서 출토된 철부, 철촉, 철모 등 철기 15점의 화학 조성과 현미경 조직을 분석한 데에서 시작되었다. 이 연구에서는 이들이 순철과 백주철 및 탄소강으로 제작되었고, 은율군 운성리 나무곽움무덤 출토 ‘수레굴대’가 회주철 조직임을 제시하였다. 이어 정찬영은 고구려 초기 무덤 출토 철기 10점을 분석하여 공구로서 적합한 강철제 단조품 제작기술이 널리 보급되었으며 이러한 기술이 이후에도 계속되었다고 보았다. 또한 노남리와 토성리 쇠부리터의 구조와 출토 철광석 및 철재의 성분을 분석하여 이곳이 파철 또는 해면철을 녹이던 노시설이며 여기서 생산된 철을 두드려 강철을 만들었다고 추정하였다.
구의동보루 출토 횡공부 1점과 철촉 3점에 대한 CMA(Computer-aided X-ray Micro Analyssis)와 EPMA(Electron Probe Micro Analysis) 분석에서는 철기 내 비금속개재물의 성분을 파악하여 이들이 초강을 소재로 제작되었으며, 횡공부와 같은 공구는 탄소 함량이 0.86%에 달하는 고탄강으로 오늘날 공구강 수준에 맞먹는 강도를 지녔고 철촉은 그보다 탄소량이 적은 강으로 제작했음을 밝혔다. 이 연구에서는 철 제련 원료가 사철이 아닌 철광석이었고, 비금속개재물 내에 칼슘(Ca)이 많은 것은 초강 정련 시 조재제(造滓劑)로 석회 성분을 넣은 결과이며, 겹침단조기술이 구사된 것으로 보았다(윤동석·이남규, 1985).
철기의 미세조직분석은 제작에 사용된 철 소재가 어떠한 경로를 거쳐 생산되었으며 현재 상태로 가공되는 과정에서 어떠한 기술이 응용되었는지에 대한 단서를 제공할 수 있다. 이를 통해 형태 변화가 크지 않은 철기의 기능 구현에 반영된 기술 특성을 파악하는 데에도 유용하다. 한강 유역 출토 단조철기 14기종 32점에 대한 미세조직분석에서는 괴련철 침탄법과 합단법 등의 제작기술과 담금질과 뜨임 열처리 기술을 밝히고 백주철뿐 아니라 서랭에 의한 회주철 조직 생성 및 주철탈탄강의 존재를 확인하였다(최종택 등, 2001).
이로써 고구려 사회에 다양한 제강기술과 단조철기 제작공정이 존재했으며, 기능과 기종별 적합한 소재 활용과 제작기술을 접목한 철기제작기술체계가 존재했을 가능성이 제시되었다(장은정, 2002). 또한, 고구려의 철제품 생산에서 제강공정이 앞서 실시되는 제강–성형체계와 반대로 성형 후 제강하는 두 가지 기술체계가 공존했다는 견해도 있다(박장식, 2005). 이처럼 금속학적 연구를 통한 철기 제작기술 연구는 철 소재 유통 및 철기 생산체계를 파악하는 데 유의미한 시사점이 있다.
4) 청동용기 제작
고구려의 청동기는 무덤에서 출토되는 청동용기가 대표적인데, 이들은 모두 주조품이다. 칠성산96호분과 우산하68호분에서 출토된 청동정(鼎)은 편구형 동체부에 비교적 높은 다리가 세 개 부착되었고 어깨에 한 쌍의 파수가 달렸다. 둥근고리모양손잡이가 뚜껑에 부착되어 있는데 우산하68호분 출토품은 뚜껑손잡이 옆에 명문이 있다. 의례 전 손을 씻는 용도로 사용되는 청동세(洗)는 얕은 반형 동체에 짧은 다리를 가진 형태로 우산하68호분과 마선구2351호분에서 출토되었다. 외반 구연의 반형 동체에 수각형 다리 세 개가 달린 초두는 칠성산96호분 2호묘실에서 출토된 것이 유일하다. 용머리가 손잡이 끝에 있는 형태로 같은 형태의 초두가 원대자벽화묘에서도 출토되었다. 대체로 이러한 청동용기들은 중국에서 제작되어 고구려에 전해진 것으로 추정된다.
반면, 칠성산96호분 2호묘실 출토 유개합은 합신부에 얕은 굽이 달려 있고 뚜껑에는 십자모양의 손잡이가 부착된 형태로 경주 서봉총 출토 연수(延壽)명은합과 유사하다. 또한 국내성에서 채집된 합의 뚜껑에는 화판장식과 보주형꼭지가 부착되어 있는데, 이와 유사한 형태의 청동유개합이 경주 호우총에서 출토되었다. 경주 금관총에서는 고구려의 대표적 토기인 사이장경호와 유사한 형태의 청동제사이호가 부장되고 있어 4~5세기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를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청동용기의 제작기술에 대한 연구로는 초보적이나마 호우명청동합의 제작방식에 대한 연구가 있다. 호우총 목관 내부에서 확인된 청동합은 5mm 높이의 낮은 굽이 있는 형태로, 저부 안쪽 바닥면에 4자 4행으로 “을묘년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호우십(乙卯年國岡上廣開土地好太王壺杅十)”이라는 16자 명문이 새겨져 있다(그림25). 〈광개토왕비문〉과 서체가 유사한 이 명문 속 을묘년을 415년으로 보아 5세기 초 고구려에서 제작되어 신라로 반입되고 100여 년 가량의 전세를 통해 호우총에 매납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림25 | 경주 호우총 출토 청동용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1. 호우명청동합 |
![]() 2. 호우명청동합 바닥면 |
![]() 3. 이형청동용기 | |
호우명청동합의 명문 중간에는 주물 시 생긴 흔적으로 추정되는 선이 남아 있다. 엑스레이(X-ray) 사진 촬영 결과, 명문을 새기고 형태를 만든 뒤 2개의 외범과 1개의 내범에 가로 9mm, 세로 9mm의 방형 형지 4개를 고정시키고 청동주물을 부어 만든 것으로 확인되었다. 또한 호우총에서 출토한 호우명청동합과 한쪽 면에 짧은 주입구가 연결된 이형청동용기의 성분을 비파괴 성분 분석한 결과 구리 94% 내외, 주석 10% 내외, 납 5.8% 내외, 그리고 아연과 철이 소량 함유된 것으로 밝혀졌다. 이 수치는 황남대총, 식리총에서 출토된 청동용기의 성분 구성 비율과 차이를 보이는 것이며, 이를 근거로 두 점의 호우총 출토 청동기는 같은 집단의 장인이 제작한 것이라 추정한 연구도 있다(이주헌, 20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