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고구려사의 시간·공간 범위
1. 고구려사의 시간·공간 범위
1) 시간 범위
고구려사의 시간 범주는 곧 역사에서 고구려라는 국가체, 혹은 고구려라고 부를 수 있는 정치공동체, 사회공동체의 등장 시점이 언제인가? 그리고 이 국가체의 역사상 소멸 시점을 언제로 볼 수 있는가의 문제와 관련된다. 물론 국가체를 기준으로 하는 이런 관점이 타당하냐 여부 역시 따져야 하겠지만,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주민보다는 국가의 성립과 소멸이 좀더 고구려사의 시간적 범주를 파악하는 데 유용하다는 입장에서 검토하겠다.
먼저 고구려사의 출발 시점부터 살펴보자. 물론 기준을 무엇으로 하느냐에 따라 시점이 달라질 수 있다. 일단 고구려인들이 스스로 인식하고 주장한 건국 시점을 전하는 문헌사료부터 살펴보자. 고구려의 건국 시점에 대한 가장 대표적인 문헌기록인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시조 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한 시점을 한(漢) 건소(建昭) 2년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서기로 환산해서 기원전 37년이다. 고구려 왕조의 멸망 시점이 668년이니 705년간 존속한 셈이 된다.
이와 유사한 고구려 건국 시점을 보여주는 문헌기록은 좀더 찾아볼 수 있다. 고구려 유민인 고자(高慈)의 묘지명(699년 작성)에는 “고려가 처음 건국된 이래 나라가 망하기까지 708년(自高麗初立, 至國破已來, 七百八年)”이라는 기록이 있다. 또 『일본서기』 천지천황7년(668) 동10월조에는 “고려 중모왕(仲牟王)이 처음 건국했을 때 천 년을 다스리고자 하였는데, 어머니가 ‘나라를 잘 다스리더라도 [그렇게] 할 수 없을 것이다. 단지 700년 정도 다스리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지금 이 나라가 망한 것은 700년의 끝에 해당한다”는 기록이 있다. 이런 자료들은 고구려본기에 전하는 건국 시점이 멸망기 고구려 사회 내부에서 어느 정도 공통된 인식이었음을 반영하고 있다.
그런데 이와 다른 기록도 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10년조에 문무왕이 안승(安勝)을 고구려왕으로 봉하면서 내린 책문에는 “공의 태조인 중모왕(中牟王)은…자손이 서로 이어 대대로 끊어지지 않고 땅은 천리를 개척하고 햇수는 장차 800년이 되려 하였다”라고 하여 800년 개국기년설을 전하고 있다. 또한 『신당서』 고려전에는 당 시어사(侍御史) 가언충(賈言忠)이 “고려의 비기(祕記)에 ‘900년이 못 되어 80 대장이 나와 멸한다’라는 전승이 있다”고 전한다. 개국 기년에 대해 800년설, 900년설 등이 고구려 멸망 당시에도 전하고 있음을 알 수 있지만, 고구려본기의 기록과는 다른 전승이 무엇을 근거로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고구려본기의 기록이 시조 주몽 이래의 왕계를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고구려 왕실이 인정한 공식적인 건국 시점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중국 측 사서에는 주몽의 고구려 건국 시점 이전에 ‘고구려’라는 명칭 및 고구려로 볼 수 있는 정치체의 동향을 시사하는 자료가 현도군의 설치 및 퇴축과 관련하여 기록되어 있다. 『삼국지』 동옥저조, 『후한서』 동이전, 『한서』 지리지 현도군조 등에 의하면, 한이 고조선을 정벌하여 멸망시키고 기원전 108년에 낙랑군, 임둔군, 진번군 3군을 설치하고, 1년 뒤에 현도군(제1현도군)을 설치하였는데, 현도군의 군치를 옥저성에 두었으며, 그 뒤에 이맥(夷貊)에게 침략을 받아 현도군을 구려(句麗) 서북으로 옮겼다고 한다. 이것이 제2현도군이다.
다시 말해서 기원전 75년 무렵에 압록강 중상류 유역에서는 ‘이맥’으로 표현된 존재가 현도군을 퇴축시킬 수 있는 정도의 군사력 등 힘을 갖춘 세력으로 등장하였고, ‘구려’라는 명칭을 갖는 일정한 지리적 공간을 점유한 세력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현도군을 퇴축시킨 이맥이 곧 구려라는 이름과 깊이 연관될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제2현도군에는 고구려현(高句麗縣)이 설치되었는데, 이런 사실은 늦어도 기원전 75년 이전 혹은 현도군의 설치 이전에 고구려라는 이름의 정치체 혹은 세력집단이 존재하였음을 뜻한다. 따라서 기원전 75년경에는 고구려가 국가 형태를 갖추었고, 국가 형성 시기는 현도군 설치 이전으로 올려볼 수 있다(임기환, 2020).
이러한 문헌자료에 보이는 고구려의 국가체 형성과 관련하여 고고자료의 현황도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압록강 중상류 지역에서 고구려라고 부를 수 있는 하나의 정치체로서 양상을 드러내는 주요한 고고자료는 적석묘(積石墓)와 철기문화이다. 즉 묘제상에서 고구려 적석묘는 하나의 문화 범주, 종족 범주를 구성하고 있다. 고구려 초기 적석묘는 지상에 돌을 쌓아 묘단을 만든 다음 그 위에 시신을 안치하고 돌로 덮는 형태로 축조되었는데, 지상의 묘단에 매장부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지석묘와 석관묘, 토광묘 등과 명확하게 구분되고 있기 때문이다. 즉 고구려 적석묘의 분포 범위가 고구려의 국가 형성 과정에서 고구려 주민집단의 거주 범위이며 정치체의 공간 범위에 해당한다(여호규, 2014).
그런데 고구려 초기 적석묘에서는 동검, 동모, 동경 등 전형적인 청동기시대의 유물은 출토되지 않는 반면, 청동제 장식품, 생활용구 및 철제 농공구와 무기가 많이 출토된다. 대표적으로 통화 만발발자(萬發撥子) 및 환인 오녀산성(五女山城) 유적에서 청동기시대 후기층과 고구려 초기 문화층은 명확하게 구별되고 있어, 고구려 초기 적석묘가 철기문화의 보급과 더불어 축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고구려의 등장이나 국가 형성의 문화적 기반이 철기문화임은 분명하며, 이는 고구려의 등장 시기를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이다. 즉 고구려 초기 적석묘는 기원전 3세기 말 철기문화의 보급과 더불어 조영되기 시작하였으며, 외부에서 이주하거나 유입된 묘제가 아니라 이 지역의 토착 주민들이 조영한 묘제였다(양시은, 2020).
고구려 초기 적석묘의 분포 범위는 대체로 압록강 중상류 일대로 한정된다는 점에서 문헌상에 보이는 고구려 국가의 지리적 범주와 일치한다. 따라서 공간적으로는 압록강 중상류 일대라는 범위 내에서 시기적으로는 기원전 3세기 말경에, 문화적으로는 철기문화를 기반으로 적석묘라는 묘제를 갖추고 있는 독자적인 문화권을 형성하고 있는 주민집단이 출현한 것이다. 이 주민집단은 종족상으로는 주변의 예맥 사회와 동일하지만, 문화적·정치적으로 구분되어 ‘고구려’ 혹은 ‘구려’로 불리게 되었다. 이들 주민집단을 고구려를 구성하는 기반이라는 의미에서 학술상 용어로 ‘원(原)고구려사회’로 지칭하기도 한다(여호규, 1992).
이와 같이 문헌자료상으로 늦어도 1세기 초 이전, 고고자료상 적석묘의 축조와 철기문화의 보급과 관련하여 후일‘고구려’라고 불리는 정치체와 주민집단의 등장은 기원전 3세기 말~기원전 2세기 초로 볼 수 있다. 이 시점을 고구려사의 시작 시점으로 상정할 수 있다. 다만 고고자료상에 보이는 사회 분화와 정치체의 형성 자료가 국가 형성 과정을 그대로 드러내지 않으며, 문헌자료에는 공식적인 건국 시점 이전의 상황이 기록되지 않았다는 자료상의 불균형이 문제가 된다.
그런데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보이는 나(那), 곡(谷) 집단과 관련된 몇몇 자료가 지역단위 읍락사회를 기반으로 등장하는 정치세력들의 동향을 간접적으로 추정케 한다. 고구려본기에는 나(那), 나국(那國), 나부(那部)의 용례가 등장한다. ‘나’란 명칭의 집단은 대개 천변 또는 계곡의 어떤 지역집단을 뜻하며, 그것은 씨족공동체가 붕괴된 이후 각 지역별로 성립된 단위정치체로서의 성격을 지니는 것으로 이해되어 왔다(노태돈, 1975). 이들 용례를 통해 논리적으로 추론해 보면 압록강·혼강 유역의 각 지역에 분산적으로 성립되어 있던 단위정치집단 즉 곡집단 혹은 나집단인 ‘나(那)’가 성장하면서 상대적으로 우세한 나를 중심으로 결속하여 ‘나국’을 구성하고, 이들 나국 사이에 통합 과정을 거치면서 고구려라는 국가를 형성하였던 것이다. 고구려 국가의 5나부의 존재는 나국이나 읍락들의 상호 통합 과정의 결과로서 최후에 5개의 단위정치체가 성립되고 이들이 하나의 고구려 연맹체를 구성하였음을 보여준다. 즉 나부의 내부 구조인 ‘나–나국–나부’를 통해 고구려 국가 형성 과정을 투시할 수 있다(임기환, 1987; 여호규, 1992).
이와 같이 고구려 역사의 시점을 파악하는 방식은 자료에 따라 설명의 범위를 달리하고 있다. 고구려사를 해명하는 주된 문헌자료인 『삼국사기』 고구려본기가 기원전 37년이라는 건국 전승 이전의 상황을 담고 있지 않으며, 고구려본기 초기 기사에 관한 신빙성 문제가 제기되면서 고구려사 시점 및 초기사 대한 연구는 문헌과 고고자료를 포함하여 공통된 연구방법론을 모색하고 있다.
고구려사의 종점과 관련해서는 비교적 명확하다. 즉 668년 보장왕 등 항복과 평양성의 함락이라는 왕조의 멸망을 종식 시점으로 삼을 수 있다. 그런데 그 이후 고구려의 부흥을 꾀하는 부흥전쟁이나 고구려 유민들의 활동을 고구려사와 어떻게 연관할 수 있는지가 문제다. 당에 의한 정복과 왕조의 멸망이 고구려 국가체의 소멸로 직결되는 상황 이후에 고구려 유민들의 활동은 일단 유민사(遺民史) 차원에서 다루어질 수 있다.
다만 부흥전쟁은 유민사의 일부라고 하더라도 본래 고구려의 국가체가 존재했던 공간 내에서 활동이기 때문에 이 역시 고구려사의 범위에 포함하는 것이 타당하리라고 생각한다. 즉 고구려 유민들의 활동 공간이 본래 고구려의 공간 내부에 있느냐, 아니면 이를 벗어난 타국에서 이루어지느냐에 따라 고구려사의 범위에 포함 여부를 판단할 수 있는 기준으로 삼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고구려의 본래 영역 내에서 이루어지는 부흥운동은 현재의 기록상으로는 한성 고구려국이 주체가 되어 벌이는 당과의 전쟁이며, 이는 673년에 소멸된다. 따라서 673년을 고구려사의 종점으로 파악해도 그리 무리가 없다고 본다. 물론 요동 지역 등에서 고구려 유민들의 활동도 추정할 수 있지만, 구체적인 양상이 파악되지 않는다. 그리고 앞서 고구려 유민사를 고구려사와 구분함이 타당하다고 언급하였는데, 고구려 국가체가 중심이 되는 역사와 달리 고구려인(주민)의 역사라는 점에서는 고구려사의 범주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고구려사의 주변사 혹은 경계의 역사로서 갖는 의미가 중요하다.
2) 공간 범위와 시기별 변천
고구려의 국가적 성장에 따라 고구려사의 공간적 범주가 변화, 확대되어 갔다. 즉 고구려사의 공간적 범주를 고구려 국가의 영역과 일치시켜 파악할 때, 그 변화 과정은 대략 여섯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이 시기는 고구려 영역의 변화 과정을 대략 파악하기 위하여 필자가 편의상 구분하였다는 점을 양해바란다.
제1기는 고구려의 국가체 형성과 관련된 지리공간이다. 고구려는 혼강과 압록강 중상류 일대에서 발흥했는데,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고구려 독자적인 묘제인 초기 적석묘의 분포지를 통해 초기 고구려 국가의 지리공간 범위를 확인할 수 있다. 이 적석묘의 분포 범위 외곽에는 초기 성곽들이 분포되어 있는데, 성곽 자체가 고구려 국가의 정치적 지배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성곽 분포 범위의 내부 공간이 고구려 국가체의 정치적 지배공간으로서 영역을 뜻한다.
예컨대 전기 산성으로 추정되는 고검지산성(高儉地山城), 흑구산성(黑溝山城), 전수호산성(轉水湖山城), 자안산성(自安山城)은 초기 고구려 영역의 외곽선에 배치된 산성이다. 고검지산성은 소자하(蘇子河)나 태자하(太子河)에서 고구려의 졸본(환인)으로 들어오는 경로의 최서북단에 위치한다. 흑구산성·전수호산성은 소자하에서 부이강(富爾江)으로 따라 내려오는 경로상의 최북단에 위치하는 산성이다. 자안산성은 혼하(渾河)와 유하(柳河) 상류에서 지금의 통화를 거쳐 국내 지역으로 들어오는 경로에 위치한 최북단에 위치한다. 그리고 성장립자산성(城墻砬子山城), 와방구산성(瓦房溝山城)은 환인에서 혼강을 따라 국내성으로 이어지는 경로상에 위치한 산성이며, 애하(靉河) 상류를 통해 서안평(西安平)으로 이어지는 경로를 방어하는 최서남단의 산성이다.
이들 산성을 선으로 연결하면 고검지산성-흑구산성·전수호산성-자안산성을 잇는 선이 북계선(北界線), 고검지산성-성장립자산성·와방구산성을 잇는 선이 서계선(西界線)이 되는데, 압록강 이북에 존재하는 고구려 적석총의 소재지는 대체로 이 범위 안에 분포한다. 이들 산성의 축조 시기는 비록 3세기 전후 시기까지 내려간다고 하더라도 초기 압록강 일대의 고구려 주민집단의 거주공간과 영역을 군사적으로 방어하기 위한 산성이라는 점에서 볼 때, 이른바 기원전 2세기 이래 고구려 사회의 공간 범위를 이들 산성이 둘러싼 지역으로 확정할 수 있다. 물론 당시 고구려의 영역지배는 교통로를 따라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외곽의 산성을 연결하는 영역선은 지리공간 범위의 대강을 파악하는 방식일 뿐이다(임기환, 1998).
그런데 적석총의 분포 범위와 외곽 산성의 분포가 일치한다는 점에서 산성의 축조가, 고구려 국가권력이 이른바 5나부라는 고구려 공동체를 통합하는 정치체로서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이는 고구려 국가와 주민들의 공간적 정체성으로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공간적 정체성은 고구려사 내내 일정하게 변화하였지만 말기까지 지속적으로 작용하였다고 판단된다. 즉 공간적 정체성이 곧 고구려인의 정체성과 연관될 가능성이 크다.
제2기는 기원 전후에서 3세기까지로 원고구려 지역을 기반으로 국가체를 성립한 고구려가 다양한 방향에서 외부로 진출해가는 과정과 그 영역 공간이다. 이 시기에 고구려는 먼저 함경도 일대 및 두만강 방면으로 진출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두만강 하류의 북옥저를 차지하고, 태조왕 대에는 함흥평야의 동옥저를 복속하였다. 뒤이어 2세기에는 영흥만 일대의 동예 지역을 대부분 장악했다. 이들 지역은 후한(後漢) 군현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약하면서, 농업 등 경제기반은 원고구려 지역보다 우월하여 고구려의 배후기지로서 적절한 지역이었다. 특히 동옥저가 핵심 배후지역이었다. 북옥저가 있는 두만강 하류 일대는 옥저계 주민 외에 말갈계 주민이 함께 거주하는 곳이었는데, 고구려 멸망 직전에 책성 욕살(柵城褥薩)을 역임한 이타인(李他仁)이 “12주 고려를 관장하고, 37부 말갈을 통할했다”는 기록처럼 최말기까지 고구려 주민과 말갈 주민이 혼재하고 있던 지역적 특성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면모는 고구려가 다종족국가체의 성격을 어떤 방식으로 유지하였는지를 탐색할 수 있는 자료가 된다. 고구려본기 기록으로는 태조왕 대에 이미 책성이 이 일대를 지배하는 전략적 거점으로 기능하면서 태조왕의 순행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또 동천왕 때에는 북옥저가 국왕의 피난처가 되기도 하였다(여호규, 2020).
이 시기는 서쪽으로 현도군을 퇴축시키는 과정이었다. 원고구려 지역과 현도군 통할지역의 관계에 대해서는 여러 논란이 있지만, 일단 고구려 국가체의 등장에 따라 기원전 75년경에 현도군의 치소는 소자하 방면으로 이동하였다. 그 뒤 고구려는 태자하 상류의 양맥(梁貊)을 복속시키고 1세기 말경에는 소자하 일대 제2현도군을 점령하였으며, 뒤어어 제3현도군 및 요동군과 충돌하고, 압록강 하구의 서안평에 대한 공세도 이어갔다. 이 과정에서 요동반도를 장악한 공손씨 정권, 그리고 그 뒤로 조위(曹魏), 서진(西晉)과의 충돌과 교섭이 이어졌다. 아직 서안평과 혼하의 제3현도군을 장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서쪽 경계선이 확보되었다.
제3기는 3세기 말 4세기 후반에 걸쳐 제3현도군, 낙랑군 등 중국 군현을 퇴축시키면서 요동 진출의 교두보를 확보하고, 북쪽의 부여 지역을 차지하고, 한반도 서북부 지역을 장악하는 등 본격적인 영역국가로서의 성격이 두드러졌다. 먼저 3세기 말에 무순 일대 제3현도군을 장악하고, 이곳에 고구려 서방 최대 요충성인 신성(新城)을 축조하였다. 4세기 전반에는 송화강 중류의 원부여 중심지인 길림 일대를 장악하였고, 동시에 요하 중상류 동쪽 지역인 서풍, 철령, 요원 등 지역으로도 진출했다(여호규, 2020). 요동반도에서는 전연(前燕), 후연(後燕)과 충돌을 거듭했으며, 아직 요동반도를 장악하지는 못했다. 이러한 요동 지역으로 진출 과정과 짝하여 압록강 하구의 서안평에 대한 공세를 펼치면서 미천왕 대에는 낙랑군을 퇴축시키고 한반도 서북부를 차지하였다. 제3기 영역 확장은 북방 유목족의 남하와 서진(西晉) 세력의 후퇴라는 국제정세의 변화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한편 이 시기에는 무순의 신성, 서풍의 성자산산성(城子山山城)을 최전선으로 하여 소자하에서 혼하로 이어지는 교통로와 태자하 상류 교통로 일대에 다수의 성곽을 축조하면서 영역지배와 방어망을 구축하였다. 그 대표적인 성곽은 이른바 남도(南道)와 북도(北道)의 교통로상에 위치한 고이산성(高爾山城: 신성), 철배산성(鐵背山城: 남소성), 오룡산성(五龍山城), 구로성(舊老城), 태자성(太子城), 삼송산성(衫松山城), 나통산성(羅通山城) 등이다.
그런데 이들 산성을 보면 초기 산성과는 그 구조와 성격이 달라졌다. 산성의 규모가 대형화되고, 산성의 위치나 구조가 평지에서의 접근이 용이하여 산성 내에 관청이나 중요 시설물이 설치됨으로써, 산성이 평상시에도 정치적·행정적 중심지로서 기능하였음을 보여준다. 성 내부 거주공간의 확대로 주민들의 입거성(入居性)이 확대된다는 점에서 산성의 지역 중심지로서 성격이 강화되었다. 이러한 변화에 따라 4세기 이후 산성이 순수 군사적인 기능만이 아니라 지방통치의 중심지로서 기능하는 역사적 성격을 부각하게 된다. 성(城)을 단위로 한 고구려 특유의 지방통치방식은 이 시기에 그 기본적 틀이 확립되는 것이다(임기환, 1998).
그런데 제2기와 제3기에 확보한 지역과 그 주민이 광개토왕비문에 이른바 ‘구민(舊民)’이라고 부르는 영역의 주민이라는 점이 유의된다. 이 지역에는 원고구려 지역 외곽 영역으로서 성(城)과 곡(谷) 중심이라는 새로운 방식의 영역지배가 적용되었다는 사실이 주목된다. 구민 수묘인연호가 차출되는 돈성(敦城), 동해고(東海賈), 우성(于城), 비리성(碑利城) 등 지역은 북옥저와 동옥저 지역으로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제2기에 영역 내로 편제한 지역이었다. 양곡(梁谷), 양성(梁城), 신성(新城), 남소성(南蘇城)은 태자하 상류, 소자하 유역으로 제3기에 편입하고 영역지배를 구축한 지역이었다. 한반도 서북부의 핵심인 평양성(平穰城) 역시 제3기에 편입한 지역이었다. 이처럼 광개토왕비문의 구민 수묘인연호조를 통해 광개토왕 이전까지 고구려가 확장한 영역에 대한 인식을 살펴볼 수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비록 정복지역과 그 주민은 ‘구민’이라는 칭호로 부르고 있지만, 일단 수묘인연호가 5나부를 구성한 주민을 대상으로 차출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5나부 고구려인과 구민 정복민 사이에는 일정한 차등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제4기는 그동안 고구려가 각 방면으로 진출하면서 충돌했던 상대국들을 제압하면서 영역을 확보해가는 과정이었으며, 5~6세기 중반에 걸쳐 전성기의 제국적인 영역을 구성하였다. 5세기를 전후하여 광개토왕 대에는 후연의 내분을 틈타 요동평원, 요동반도 일대를 영역화하고, 서요하의 거란 지역으로 진출하였으며, 목단강 유역으로 진출하여 읍루(숙신)을 예속시켰다(여호규, 2020; 공석구, 2022; 장창은, 2022).
제4기에서 가장 중요한 과정은 고구려가 요하 유역의 요동평원과 요동반도로 진출하여 이 일대를 영역화한 점이다. 이 지역은 한의 요동군이 설치되었고, 공손씨 정권의 거점이었으며, 선비 모용씨의 세력기반이었던 중요한 공간이었다. 그리고 그 중요성만큼 고구려는 이 지역에 대한 지방지배와 군사적 방어를 위해 다수의 성곽을 구축하였다. 요원의 용수산성, 서풍의 성자산산성, 철령의 최진보산성, 무순의 고이산성(신성), 심양의 석대자산성, 탑산산성(개모성), 요양의 요동성, 해성의 영성자산성(안시성), 개주의 고려성산성(건안성), 대련의 대흑산산성(비사성) 등 요하에서 천산산맥으로 이어지는 최전선 일대에 중대형 성곽을 축조하여, 이 일대 지방지배의 거점과 군사적 방어망을 구축하였다(여호규, 2023). 이 일련의 성곽방어체계가 후기에는 이른바 천리장성으로 알려졌으며, 최말기까지 고구려 영역의 실제적인 서쪽 경계선을 이루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수·당과의 전쟁 시에는 이들 영역의 최전선에 구축된 성곽들이 효율적인 방어체계를 구성하여 기능하였다.
고구려는 4세기 이후 한반도 방면으로의 남진정책도 적극 추진했다. 4세기 초에 차지한 한반도 서북 지역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고, 4세기 후반에는 재령강과 예성강의 분수령인 멸악산맥 일대에서 백제와 공방전을 벌이다가 광개토왕 대에 예성강-임진강 일대를 장악하는 한편, 내륙지역에서는 북한강 유역으로 진출했다. 그리고 장수왕 대인 475년 백제 도성 한성(漢城)을 함락시키고 남하하면서 남한강 전 유역과 서해안 일대를 장악하였다. 이로써 신라와는 소백산맥을 경계로 접하고, 백제와는 차령산맥을 경계로 대치하였다(여호규, 2022).
최근에 백제가 웅진시기에 한강 유역을 수복했다는 견해가 다수 제기되고 있지만, 5세기 후반에서 551년까지 한강 유역을 비롯한 한반도 중부 지역을 차지하였다고 보는 게 통설이다. 그리고 한반도 중부 지역에 대한 고구려의 지배방식에 대해서도 논란이 분분하다. 이 지역에서는 서북한이나 요동 지역과 달리 지방행정의 중심지로 추정되는 중대형 포곡식산성이 거의 확인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에 고구려가 중부 지역 전역을 지배하지 않고 전략적 거점만 장악했다고 보기도 한다(임기환, 2002). 그런데 최근 경기 남부 지역에서 다수의 고구려 고분이 조사되었으며, 경기 남부와 금강 유역에서는 안성 도기동산성, 진천 대모산성, 청주 정북동토성, 청원 남성골산성, 연기 나성리토성, 대전 월평동산성과 월평동유적 등 성곽이나 주거 유적도 다수 확인되었다. 이 중 몇몇 산성은 군사방어뿐 아니라 거점성의 역할도 수행할 수 있는 입지 조건이기 때문에 고구려가 한강 유역을 비롯한 중부지역을 지방행정구역으로 편제하여 지배했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여호규, 2022). 다만 요동반도를 비롯한 만주 지역이나 한반도 서북부와 같이 성을 단위로 하는 균질적인 영역지배가 이루어졌는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다시 말해서 고구려의 영역을 정복 과정이나 각 지역의 주민집단 및 지리적 환경과 산업에 따라 여러 권역으로 구분할 수 있고, 각 권역에 대한 지배방식에서 일정한 차이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각 권역별 지배방식에 대한 보다 정밀한 연구가 향후 과제다.
이와 아울러 고구려는 427년에 평양 천도를 통해 한반도 서북부 지역을 만주 중남부 및 한반도 중북부에 걸친 광대한 영역을 경영하는 중심지로 삼았을 뿐 아니라, 황해를 끼고 있는 지리적 조건 등을 배경으로 중원 왕조를 비롯하여 동북아 각국과의 국제교섭을 활발하게 전개했다. 5세기 초에는 동아시아 국제정세가 새롭게 변화하고 있었다. 420년 송의 건국, 427년 고구려의 평양 천도, 439년 북위의 화북 지역 통일 등은 동아시아에서 새로운 국제환경의 변화를 상징하는 사건이다. 130여 년이나 계속된 중국의 5호16국시대는 막을 내리고 북위가 가장 강력한 세력으로 등장하면서 새로운 국제질서가 성립하였다. 즉 북위를 가운데 두고 중국의 남조 송와 북방의 유연 및 서의 토욕혼, 그리고 동의 고구려는 서로 연결을 꾀하며 북위를 포위 견제하는 한편, 각자 북위와 우호관계 또는 적대관계를 맺게 되었다. 이와 같은 국제정세 속에서 고구려는 이들 3국과 등거리 외교관계를 맺으며, 동아시아의 세력균형에 일조하고 있었다. 고구려는 북위에 대한 견제책으로 남조 국가와 통교하였으며 북방의 유연과도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다.
5세기 후반에 들어서 고구려는 동북아 국제정세를 이끌어가는 중심 국가로서 안정된 위상을 확보한 뒤, 서북방 지역으로 본격적으로 진출하였다. 그 결과 시라무렌 일대 거란 일부 집단은 고구려에 부용세력화되었으며, 거란 북방의 지두우(地豆于)를 유목제국인 유연과 함께 분할점령을 기도하였다. 지두우 분할의 실행 여부와 결과는 기록상 나타나지 않지만, 지두우 옆에 위치한 실위(室韋)에 고구려가 철을 수출하면서 영향력을 행사한 것을 보면, 고구려가 서북방쪽으로 세력을 확장해 간 모습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이는 고구려가 단순히 영역지배만이 아니라 영역 외곽에 존재하는 이종족세력에 대한 통제력을 발휘하는 일종의 세력권을 구축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이와 같이 당대 국제정세를 배경으로 중국 세력이나 북방 유목세력의 영향력을 배제한 가운데 동북아시아에서 고구려는 독자적 세력권을 구축하였다. 즉 세력권의 외곽에 거란족와 말갈족의 일부를 거느리고, 내몽고 동북부 지역에도 세력을 뻗쳤다. 한반도 내에서는 백제를 압박하면서 중북부 일대를 차지하였고, 신라에 정치적·군사적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독자적 세력권의 구축이라는 점에서 제4기 고구려사의 공간은 영역 공간과 세력권 공간이라는 중층성을 갖게 된다. 이러한 중층성은 여러 구성으로 변화하지만, 세력권이라는 성격에서 고구려 말기까지 지속되며, 이 점이 제5기에서 고구려가 수·당제국과 충돌하는 주요한 배경이 된다. 그리고 이러한 독자적 세력권을 배경으로 당시 고구려는 자국 중심의 독자적 천하관을 형성하였다(노태돈, 1989).
제5기는 6세기 중반에서 7세기 초까지로, 고구려가 요서로 진출하면서 새로운 영역과 공간을 확보하였지만, 한반도 내에서는 백제와 신라의 공세로 한강 유역을 상실하였다. 6세기 전반기에 북위의 내란과 분열로부터 시작하여 동아시아에서 세력 변동이 일어났다. 이러한 상황을 틈타 6세기 전반 이후 고구려는 요서로 진출하고 영주(營州) 일대까지 공세를 취하면서, 대릉하 동쪽 범위까지 세력을 확장했다. 요서 지역은 대릉하 하류와 남북으로 뻗은 의무려산(醫巫閭山)이라는 자연 경계로 동서로 구분되고 있다. 고구려가 요서 동부지역을 차지한 것은 영토를 확대했다는 데에 그치지 않고 요동을 안전하게 지킬 수 있는 전략적 교두보지역을 확보하였다는 의미를 갖는다. 나아가 요서 지역을 통해 거란은 물론이고 북방 유목세력과 교섭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요서 지역 종족들을 고구려의 세력권으로 편입하거나 복속시키는 것은 대외전략과 군사적 안정에 중요한 변수가 되었다(김진한, 2022).
그러나 6세기 중반 북방 몽골고원에서 신흥 돌궐이 유연을 격파하는 세력 교체가 일어났고, 돌궐이 동진하여 요서까지 진출하면서 요해 지역에서 정세 변화는 더욱 복잡해졌고, 580년을 전후한 무렵에는 고구려와 돌궐이 충돌하게 되었다. 요해 지역에서의 이러한 정세 변화 및 고구려 내부의 왕위계승을 둘러싼 내분 등으로 551년에 고구려는 백제와 신라의 동맹군에게 한강 유역을 상실하였으며, 멸망기까지 한강 유역을 회복하지 못하고, 임진강을 경계선으로 신라와 대립하였다. 그러나 한강 유역이라는 영역 공간에 대한 고구려인의 인식은 끝내 신라와의 대립관계를 지속시키면서, 제6기에 수·당과의 전쟁 과정에서 남부 전선을 위태롭게 하는 전략적 한계를 드러냈다.
제6기는 7세기 초부터 멸망기까지로, 요서 지역 상실 외에는 영역상의 큰 변화는 없었지만 중국의 통일제국인 수·당과 총력을 기울인 전쟁을 계속 벌이게 되었다. 7세기에 들어 수와 당이라는 중원의 통일제국이 등장하고, 이들이 대외 팽창을 통해 서역 세력과 북방의 돌궐을 차례로 복속하면서, 5세기 이래의 다원적인 국제질서는 급속히 변동되었다. 수와 당은 중국 중심의 일원적 국제질서를 수립하고자 하였으며, 이에 5세기 이래의 독자적 세력권을 구축하고 있었던 고구려의 세력권과 영역에 대한 인식은 수·당의 인식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 시기에는 영역과 공간의 역사성 인식이 고구려와 수·당의 경우에 나타나고 있음이 유의된다. 온달과 연개소문 때의 사례에서 보듯이 고구려는 신라에게 빼앗긴 한강 유역이 본래 고구려의 영토라는 인식이 있어 지속적으로 신라와의 대외관계를 경직시켰다. 수와 당은 요동과 고구려의 영토가 한의 군현 영역이라는 인식을 내세우며 고구려 정벌의 명분으로 삼았다. 아울러 영류왕 때 고구려가 당에 봉역도(封域圖)를 보낸 예처럼, 고구려 국가의 통합된 공간과 영역에 대한 인식이 성숙했다는 점이 유의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