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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통사

2. 고구려사의 시기구분

2. 고구려사의 시기구분

고구려사의 전개 과정을 체계적으로 이해하는 방법으로 시기구분을 하게 되는데, 초기는 국가의 형성, 중기는 국가체제의 정비·완성, 후기는 국가체제의 붕괴와 멸망이라는 맥락에서 파악하는 관점이 일국사(一國史)의 흐름을 조망하기에 가장 일반적이고 통상적인 방식이 된다. 고구려사의 경우에도 이러한 시기구분을 적용할 수 있는데, 문제는 정치사의 전개나 국가체제의 변화 양상에서 볼 때 각 시기의 성격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이다(임기환, 2004).
노태돈은 정치체제에 따라 연맹체적인 부(部)체제시기와 영역국가적인 중앙집권체제시기로 크게 구분하고, 중앙집권체제시기 내에서 6세기 중반 이후를 귀족연립정권기로 다시 구분하였다. 즉, 건국기에서 봉상왕 대까지를 초기의 부체제기로, 미천왕에서 안원왕 대를 중기의 중앙집권체제기로, 양원왕에서 보장왕 대까지를 후기의 귀족연립정권기로 나누어 설명하였다(노태돈, 1999). 이러한 시기구분에는 많은 연구자들이 동의하고 있어 지금은 통설로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김영하는 부체제론이 고대 국가 발전단계의 한 단계로 설정됨을 비판하며, 고대 국가의 범주 안에서 귀족합의체제, 대왕집권(大王執權)체제, 중세 중앙집권적 귀족관료체제로 시기구분을 단계화하였다(김영하, 1995; 2000). 이는 고대 국가에서는 대왕(大王)만이 출현하였을 뿐 중앙과 지방 사이에 권력지배가 관철되지 않았기 때문에 중앙집권성은 중세 국가에서 비로소 달성되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한편 노태돈의 시기구분 중 초기를 부체제로 파악한 점을 비판하면서 초기에 이미 왕권의 집권력에 기초하는 정치체제가 성립되었다는 조기집권체제론(早期集權體制論)이 제기되었다. 초기의 부체제에 대한 이해는 본래 국가형성론에서 고대국가의 이전 단계인 과도기 국가체에 대한 이해와 연관하여 나타났다. 그런데 학자에 따라 부체제기에 대한 국가발전단계의 위상을 서로 달리 파악하여, 부체제기를 국가발전단계에서 연맹체의 대체 개념으로 사용하거나, 연맹국가에서 중앙집권국가로 이행하는 과도기 단계로 설명하기도 하고, 부족연맹 단계(형식적으로 대등한 단계)와 부체제 단계(왕권 중심의 결속단계)를 구분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고구려사의 경우 부체제를 고대 국가 발전단계의 하나로 이해하는 부체제론(나부체제론)이 하나의 연구흐름을 이루고 있고, 이와 달리 단위정치체로서 부의 존재를 부정하고 초기 국가 단계부터 왕의 집권력을 중심으로 정치체제를 파악하는 조기집권체제론이 또 다른 연구흐름을 구성했다(임기환, 2022).
부체제론과 조기집권체제론은 초기 정치체제를 이해하는 방식이 서로 대립되어 있다. 초기의 정치체제나 정치운영에 대해서 조기집권체제론은 왕의 집권력을 전제로 논의를 전개함에 반하여, 부체제론의 입장에서는 왕권과 나부 제가세력의 길항관계에서 파악하게 된다. 그러나 부체제론에서도 전망하듯이 중기에 왕권을 중심으로 하는 집권적 정치체제가 구성된다면, 초기 정치체제의 파악에 있어서도 왕권의 집권력이란 요소가 어떠한 양상을 드러내고 있는지 파악할 필요가 있다. 한편 부체제론의 논점이 권력구조나 정치운영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국가구조나 사회체제에까지 확대된다는 점에서, 양 논의의 접점을 분명히 드러내기 위해서는 조기집권체제론의 입장에서도 단순히 정치체제론에서 벗어나 논의 범위를 확대할 필요가 있다.
한편 4세기 이후의 정치사에서도 양자의 입장은 서로 다른 연구범위를 드러낸다. 즉 초기부터 왕권 중심의 정치체제가 확립되었다고 본 조기집권체제론의 입장에서는 중기 정치제체로의 전환 과정이나 이후의 정치체제에 대해서 별다른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이에 비해 부체제론의 입장은 나부의 소멸과 중앙집권체제로 전환하는 과정으로 파악하면서, 3~4세기의 전환기적 양상과 4세기 이후의 중앙집권체제 정비 과정을 주요 연구주제로 삼고 있다. 따라서 초기의 정치사 연구에서 연구시각을 달리하는 부체제론과 조기집권체제론의 입장이 중기와 후기의 정치사 연구에까지 확장되고 있지 않는 실정이다. 부체제를 초기정치체제 단계로 설정하는 입장에서는 이후의 중앙집권적 정치제제로의 전환과 그 배경을 탐구해 갔지만, 조기집권체제론의 입장에서는 초기와 중·후기의 정치체제의 차별성에 별로 주목하지 않은 결과다(임기환, 2004).
그런데 고구려사 연구에서 본격적으로 등장한 부체제론이란 연구시각과 부체제의 존재 여부는 고구려 초기 정치사 연구만이 아니라, 삼국 및 가야의 초기 정치사 연구에 모두 적용되고 있다. 특히 부체제는 근래에 고조선이나 부여의 정치체제를 파악하는 기준으로 확대되면서, 특히 부체제의 존부를 둘러싼 논의가 활발하게 전개된 바 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부체제의 개념은 고구려 초기 나부의 존재 형태에서 비롯된 면이 적지 않은데, 고구려의 나부와 신라 및 백제의 부(部)는 그 형성 기반과 시기 및 성격에서 상당한 차별성을 드러내고 있다. 따라서 부체제를 한국 고대사에서 보편적인 개념으로 확장 일반화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부의 내용에 대해 좀더 구체적인 실증이 진행되어야 한다.
그리고 고구려사 나아가서는 삼국을 포함하는 한국 고대사에서 부(部)라는 정치단위이든 혹은 부체제이든지, 이는 중국의 정치체제는 물론 유목국가의 그것과도 다른 특성을 보인다. 즉 한국 고대국가의 형성과 발전의 기반이 주변의 여러 문화권이나 정치세력권과 상당한 내용적 차별성을 갖고 있음을 시사한다. 그런데 중기 이후에는 구체적인 내용에서 차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기본적으로 중국식 율령체제를 수용하고 있기 때문에 부(部)에 기반한 정치체제와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따라서 고대국가의 성격 변화라는 점에서 부체제에서 중앙집권적 지배체제로의 전환이 갖는 의미에 대한 깊이 있는 탐구가 필요하다.
중기의 중앙집권체제는 두 측면에서 주로 이해되고 있다. 즉 왕권을 중심으로 하는 관료조직의 확대이며, 다른 하나는 지방민에 대한 중앙권력의 직접적인 지배를 관철하는 지방통체제의 정비이다. 즉 초기에 고구려 영역 내에서 다양한 형태로 존재했던 5나부를 비롯한 단위 자치체들이 해체되고 전국의 인민과 토지를 왕권으로 대표되는 중앙정권이 직접 지배하는 형태로 진전되어 간 것이다. 아울러 당대의 국제관계 및 내부 중앙집권체제의 기반 위에서 태왕권과 천하관의 등장이 유의된다. 즉 태왕(太王)과 노객(奴客)의 군신관계, ‘태왕국토(太王國土)’라는 영역적 기반, 태왕과 민의 관계 및 고구려 중심의 차등적 국제관계 속에서 태왕의 위상 등이 중기 집권체제의 특성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그리고 고구려의 전성기라 할 수 있는 중기 고구려사에 대한 연구는 대외 팽창과 영역의 확대 등 제국적 발전에 힘입은 면모가 두드러지는 시기이기 때문에, 주로 대외관계의 측면에서 접근이 이루어지고 있다. 다만 초기의 정치사 연구에서 국가 형성 및 사회 성격이나 지배체제에 대한 연구가 주류를 이루는 것과는 달리, 중기 이후 고대국가의 집권체제를 정비해가는 과정에 대해서는 자료의 부족으로 연구내용이 제한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한계가 있다. 결과적으로 고구려사의 시기 구분에 있어서 고구려 국가의 특성이 가장 잘 드러날 수 있는 전성기인 중기의 고구려 국가체제에 대한 이해가, 현재의 자료 조건으로 인해 상대적으로 연구밀도가 약하기 때문에, 고구려사 전 체계에 대한 시기구분에서 균질적인 이해 기반을 마련하기가 쉽지 않다.
다음 후기 고구려 정치사에서는 왕권의 약화와 귀족 중심의 정치운영의 양상을 보인 이 시기 정권의 성격을 귀족연립정권(체제)으로 이해하는 것이 현재 통설이다(노태돈, 1999). 본래 통일신라 후기사에 적용되던 개념이었던 귀족연립정권(체제)이란 이해방식이 고구려 후기 정치사에 적용된 것인데, 이후 이러한 이해는 여러 연구자에 의하여 별다른 비판 없이 받아들여졌다. 그래서 중기의 강력한 왕권 중심 체제가 붕괴되고 왜 귀족연립정권이 등장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배경이나 귀족연립정권의 구체적인 정치운영 양상에 대한 검토는 크게 진전되지 않았다. 사실 국내외 몇몇 자료에 보이는 왕권 약화와 귀족 중심의 정치운영 현상이 얼마나 지속되었는지, 그리고 이러한 왕권의 약화현상을 귀족연립정권으로 이해함이 과연 타당한지, 그렇다면 통일신라 말기의 귀족연립정권과 동질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지, 또한 귀족연립정권이 고대 정치체제의 전개 과정에서 필연적인 귀결인지 아니면 고구려만의 현상인지 등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남아 있다.
근래의 연구 중에는 평원왕 이후 왕권이 강화되는 면모에 주목하면서 귀족연립정권의 존재를 부정하는 견해도 제기되고 있는데, 주로 각 왕대별 정치상황에 대한 분산적 접근으로서 아직 후기 정치사를 설명하는 전체적인 틀을 갖추고 있지 못하다. 나아가 백제와 신라의 정치체제에서 나타나는 왕권과 귀족권의 갈등 구조와 고구려 후기의 소위 귀족연립체제 사이에 나타나는 차별성이 무엇인지를 살피는 것도 귀족연립체제의 개념과 역사적 위상을 밝히는 데 중요한 비교사적 과제라 하겠다(임기환, 2021).
또한 한국 고대 정치사 이해에서 일종의 기준처럼 등장하는 왕권 대 귀족세력의 길항관계라는 도식적 이해에 대한 다각도의 비판도 필요하다. 오히려 왕권과 귀족권의 결합방식이라는 측면도 유의해야 하며, 귀족연립정권을 권력운영의 파행적 결과로서가 아니라 그 자체 권력운영의 안정성을 갖고 있음에 주목하고, 귀족연립정권의 안정적인 정치운영체제로 권력의 분배방식 등에 연구초점을 두어야 한다. 그동안 귀족연립정권에 대한 연구는 그 자체의 존부나 권력기반에 대한 이해보다는 그 마지막 단계에 나타나는 연개소문의 정변과 그 정권에 대한 이해에 집중되어 있는 점이 아쉽다.
한편, 고구려 후기사의 이해에서 고려해야 할 점은 시대구분과 관련된 관점이다. 즉 7세기를 고대에서 중세로 넘어가는 사회 성격 변화의 분기점으로 파악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귀족연립정권이나 연개소문 정권 역시 단지 정치적 동향의 측면에서만이 아니라, 전 사회적 변동과 연관하여 이해하는 시각이 요구된다고 하겠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현재까지의 연구동향이 각 시기별로 자료 조건이나 연구시각에서 서로 차별적이기 때문에 초기와 후기의 정치사 이해가 분절되어 있고, 정치사 시기구분이 아직 합리적 기준을 찾기 어려운 실정이다. 특히 집권적 지배체제가 완성된 중기의 지배체제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점이 주된 요인이다. 또한 중앙집권성이란 통시대적 개념이기 때문에 역사적 단계성을 분명히 부여할 때 비로소 하나의 시기구분의 지표가 될 수 있다. 부체제와 상대적으로 비교하면 그 역사성이 분명하겠지만, 삼국시대 이후의 중앙집권체제와 비교해서도 그 역사적 단계가 분명히 드러나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는 오히려 중앙집권성 여부 자체를 따지기보다는 구체적인 집권체제 실상을 밝히고 그 단계화를 통해 고대적 집권체제의 특질이 부각될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임기환, 2004).
다음 이러한 시기구분은 고구려사의 연구자료 상황과도 일정하게 연관되어 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는 3세기까지의 역사상을 전해주는 국내 전승자료를 상당수 포함하고 있어, 초기 고구려사의 경우에는 다른 시기에 비해 상대적으로 고구려 내부의 정치·사회상을 제법 규모 있게 구성할 수 있는 편이다. 그런데 4세기 이후 본기의 기년 기사는 많은 부분이 중국 측 자료를 토대로 구성되어 있어 독자적인 전승자료가 드문 편이다. 다음 중국 측 자료는 전 시기에 걸쳐 있으나, 초기 자료는 『삼국지』 고구려전 등 민족지적인 성격의 자료이고, 5~6세기에는 조공·책봉관계를 중심으로 하는 대외교섭관계 자료가 중심이며, 6세기 말~7세기에는 새로운 사회 변화상을 보여주는 일부 자료 및 고구려와 수·당과의 전쟁 기사가 대부분이다. 중국 측 자료 역시 시기별로 반영되는 역사상에 차이점이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고구려본기의 내용이나 이와 대교되는 중국 사서자료 등의 반영 시기를 고려하면, 자연스럽게 미천왕 대를 전후한 시기를 경계로 연구주제가 달라질 수밖에 없게 된다. 그리고 광개토왕비, 충주고구려비, 집안고구려비를 비롯한 다수의 금석문도 시기구분상 중기에 집중되어 있어, 자료 조건상 자연스럽게 하나의 시기 범주가 정해지게 된다. 현재 고구려사 연구주제가 시기구분상에서 불균형해질 수밖에 없는 사정이 여기에 있다. 앞으로 좀더 다양한 측면에서 정치사 구성 요소와 지표를 검토해야겠다.
한편, 수도의 변천에 따른 시기구분도 시도되고 있는데, 졸본도읍기, 국내성도읍기, 평양성도읍기로 구분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엄격한 의미의 시기구분은 아니고 연구주제에 따라 편의적으로 사용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졸본도읍기는 문헌상으로 매우 짧은 시기이지만 국내 천도 시기와 관련하여 시기구분이 달라지게 된다. 따라서 초기 정치사와 관련하여 중요한 논쟁점의 하나는 왕도(王都) 위치 및 천도 시기 문제다. 그중에서도 졸본에서 국내성으로 천도한 시기와 그 정치적 배경에 대해서는 적지 않은 논란이 있다. 즉 국내성 천도 시기에 대해서 고구려본기에는 유리왕 대로 기록되어 있는데, 『삼국지』 고구려전에는 산상왕 대에 환도(丸都)로 천도하여 “다시 새로운 나라를 세웠다(更作新國)”라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삼국지』 고구려전의 기사를 신뢰하는 입장에서는 이 천도 기사가 고구려본기를 불신하는 근거가 되고 있다. 유리왕 대 천도를 부정하는 주장 중에는 왕실 교체와 천도가 연결된 정치적 변화라는 관점에서 태조왕 대에 천도 및 왕실 교체가 일어났던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으며, 왕실 교체는 부정하면서 태조왕 대 천도를 인정하는 견해도 있다(권순홍, 2020). 즉 도읍에 따른 시기구분은 천도 시점에 따라 달라지게 된다.
이와 관련하여 태조왕 대의 정치적 성격 및 시기구분의 기준점이 중요해진다. 태조왕 대를 시기구분상의 획기로 설정하는 견해는 드물다고 하더라도, 태조왕 대는 고대국가체제의 확립기로서 이미 주목을 받아왔으며, 부체제론의 입장에서는 5나부체제가 성립된 시기로 파악되어 정치체제상으로도 하나의 전환기로 이해되고 있다. 근래에는 태조왕 대를 소노부에서 계루부로의 왕실 교대 및 왕계상 변동이 일어난 전환기, 또는 졸본에서 국내로의 천도가 이루어진 시기로 파악하는 견해가 등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태조왕 대의 정치상황과 정치체제에 대한 보다 다각도의 검토가 앞으로 주요 과제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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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고구려사의 시기구분 자료번호 : gt.d_0010_0010_0010_0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