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고구려사의 역사적 성격
3. 고구려사의 역사적 성격
고구려사는 국가 멸망으로 인하여 그 역사적 경험과 사회적 특질 등이 이후의 역사 전개에 제대로 이어지지 않은 부분이 적지 않다. 특히 고구려 사회가 갖는 유목사회적 요소나 다종족국가의 측면, 정복국가로서 제국적 통치질서, 정치·문화의 국제성 등등의 측면이 그러하다. 이러한 면모는 한국사의 다른 왕조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고구려 국가의 독특한 성격이다. 앞서 살펴본 고구려사의 시공간 범위 및 시대구분론에서 논의한 내용을 중심으로 고구려사의 역사적 성격에 대해 살펴보자.
고구려의 국가 형성 시점은 철기문화를 기반으로 적석묘이라는 묘제를 공유하는 정치적·문화적 주민공동체집단의 형성에서 비롯한다. 문헌상으로 예맥 혹은 맥으로 표현되거나, 고구려, 구려라는 정치체로 표현된다. 이를 원고구려사회라고 할 수 있으며, 초기 고구려 국가체이다. 이후 고구려의 형성과 성장 과정은 현도군 등 중국 군현과의 충돌 및 이들의 축출 과정과 겹쳐 있다. 중국의 주변 국가와 종족집단 중 만주와 한반도 지역에서는 고구려가 가장 이른 시기에 선진적으로 국가체를 형성하고 중국 군현과 대립하면서 성장하였는데, 이 점이 초기 고구려사의 중요한 면모이며 역사적 성격이다. 이에 따라 중국 측 역사서에 초기 고구려 국가체의 모습이 상대적으로 풍부하게 서술되어 있는 편이다. 따라서 고구려 자체의 전승자료에 기반하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의 내용과 대교하면서 초기 고대국가의 형성 과정을 실증적으로 해명하여 한국 고대 초기사의 인식틀을 마련할 수 있다.
고구려는 국가 형성기부터 정복전쟁과 대외적 팽창을 통하여 국가적 성장을 이루었기 때문에 자연히 영역의 확대와 더불어 주변 여러 종족을 국가체제에 편입시킨 일종의 제국적인 면모를 갖추고 있다. 그리고 5세기 이후에는 영역 외곽에 거란, 말갈 등 주변 종족을 예속시키면서 고구려 자체 세력권을 구성하고 있다. 고대 시기 동북아시아에서 하나의 세력권을 구축한 국가는 고구려뿐이었다. 이 점이 고구려사의 주요한 성격이다. 다만 자료의 부족으로 제국적 면모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해명하지 못하고 있어 아쉽다.
고구려가 제국적인 면모를 갖추게 된 결과 한국 역사상 보기 드문 다종족국가라는 점도 중요한 성격이다. 대표적인 고구려 사회 내부의 이종족으로서는 말갈을 들 수 있다. 따라서 고구려 국가를 구성하는 종족과 주민집단의 다양한 존재 양상을 밝히는 구체적인 연구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예컨대 광개토왕비문에 나타난 수묘제와 수묘인에 대한 논의 역시 영역 확대에 따른 영역지배의 다양한 현상을 드러내주며, 고구려가 제국적 지배질서를 수립해가는 일면을 반영하고 있다. ‘신래한예(新來韓穢)’라는 표현은 한과 예 역시 고구려를 구성하는 여러 이종족의 일부로 인식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나아가 지방통치체제나 조세제 등 집권적 국가지배질서에 대한 이해에도 다종족국가이며 제국적 질서를 구축해 간 고구려 국가의 특성을 고려해야 한다. 이러한 점으로 인해 같은 삼국시대 역사라고 하더라도 고구려사는 신라사, 백제사, 가야사와 다른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
이와 관련하여 5세기 금석문에 잘 드러나 있는 태왕호(太王號)와 천하관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특히 태왕호와 천하관은 고구려에서 시작하여 주변 국가로 확산되어 가는 왕호 및 세계관이다. 태왕(대왕)이란 왕호가 당대에 백제, 신라, 가야에서 공유되고 후에 발해, 고려, 조선으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비록 내포하는 의미에는 차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최고 통치자로서 태왕(대왕)호를 공유하는 하나의 시공간 범주를 이루고 있다는 점이 유의된다.
태왕호 등장은 처음 5세기 고구려의 중앙집권적 정치기반에서 비롯하였는데, 이 태왕은 고구려 세력권의 구축을 통하여 고구려 중심의 천하관을 표상하는 권력체로서 등장하였다. 당시 고구려의 천하관에서는 고구려 중심의 국제질서와 고구려 국내의 질서가 태왕을 중심으로 통일적으로 구성하고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 아울러 고구려 천하에 속한다고 여긴 나라와 족속 중에는 일종의 동류의식과 같은 범주에 포함된 존재와 그렇지 않은 존재로 구분되었다. 즉 백제, 신라, 동부여는 고구려의 속민으로 규정되는데, 이는 같은 태왕의 통치를 받는 민으로서 일종의 동류의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소박한 동류의식은 그 뒤 시기에 등장하는 한국인의 동족의식 형성의 단초적인 모습으로서 유의된다(노태돈, 1989).
아울러 고구려사가 한국 민족사의 일부로 구성되는 과정도 고구려사의 전개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점에서 한반도 내의 평양으로 천도한 이후의 고구려사 전개가 유의되는 바이다. 한반도와 만주에 걸친 영역 공간을 확보한 왕조국가는 한국사에서 고구려가 유일하였다. 물론 당시에는 오늘날과 같이 한반도와 만주에 대한 지리 구분 인식이 없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하며, 고구려사의 소멸 이후 만주와 한반도 사이에 공간적 분리 인식이 심화되는 역사가 전개되었다는 점도 유의된다.
한편, 평양 천도 이후 고구려와 백제, 신라 사이에 충돌이 증가했지만 다양한 형태의 교류도 늘어났고, 이러한 역사적 배경에서 7세기 이후 동아시아 정세 변화에 따른 고구려, 백제 멸망 및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의 결과로 신라에서‘일통삼한(一統三韓)’ 의식의 출현이 주목된다. 7세기 이전 삼국 간의 갈등 구조는 한반도를 중심 무대로 전개되었으나, 당이 출현한 이후 비록 전쟁의 무대는 한반도였다고 하더라도 국제질서의 변동 축은 중국이 중심이었다. 삼국을 넘어선 거대한 외부 힘의 출현은 삼국의 운명을 바꾸었을 뿐만 아니라, 삼국인의 대외적 인식에도 어떤 형태로든지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보인다.
물론 그것이 백제와 고구려의 멸망 이후 삼국민 간의 공동체의식을 보다 강화하는 외적 조건이 되었는지는 아직 불투명하다. 다만 정복자로서 당의 점령정책이 무자비하였다는 점에서 신라와는 다른 면모를 드러냈으며, 특히 나당전쟁 과정에서 신라는 일종의 삼국통합정책으로 이해되는 조치를 시행하였다. 이렇게 당시 삼국인이 가졌을 당에 대한 위기의식은 각각의 나라를 넘어선 하나의 범주를 형성하는 외적 배경이 되기에 충분하였으리라 짐작된다. 결과적으로 통일신라기에 삼국인의 동류의식은 심화되어 갔고, ‘일통삼한’ 의식 내부에서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역사의식의 형성으로 이어져 갔다.
고구려사는 단지 고구려 국가체의 역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른바 한국사의 맥락에서 그 위상을 인식하는 대상이다. 그렇다면 고구려사는 한국사에서 그 범주를 어떻게 설정하는 게 타당할까? 특히 한국 민족사의 범주에서 고구려사를 다룰 때 국가사로서 고구려사는 민족사의 맥락과 어떻게 결합할 수 있을까?
한국사의 체계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영토, 주민, 주권의 연결성과 계승성이다. 즉 왕조가 교체된다고 하더라도 일정한 영토와 주민, 그리고 주권이 이어지고 있으면 역사의 계승을 자연스럽게 논할 수 있다. 그런데 앞서 살펴본 국가사의 기준에서 보자면 고구려 국가의 경우 다수의 영토와 주민이 한반도의 통일신라 국가로 계승되지 못하였고, 고구려 국가의 주권은 소멸되고 말았다. 후일 발해 국가에 의해 고구려 국가의 영토, 주민, 주권의 계승이 이루어졌지만, 발해 국가 역사 또한 영토와 주민이 고려 국가의 역사로 이어지지 않았고, 발해 국가의 주권은 소멸되고 말았다.
이때 중요한 점이 역사 계승성 등을 포함하는 정체성의 계승이다. 그리고 그 정체성 계승의식의 내면은 고구려 문화의 다양한 계승, 고구려 영역 내에 구축되었던 고구려적 요소, 고구려인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는 주민집단의 존재 등이 복합적으로 결합된 결과였다. 한 국가의 역사가 후대 국가에 의해 특별하게 정체성의 계승이 표방되지 않았다고 한다면, 이 역사를 후대 국가의 특정한 역사체계 속에 포함하기 어렵다. 즉 고구려사의 역사적 위상은 정체성에 대한 계승의식을 통해 비로소 확보된다고 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