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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통사

1. 근대적 연구의 여명과 광개토왕비 발견

1. 근대적 연구의 여명과 광개토왕비 발견

근대 역사학의 형식과 방법으로 고구려사를 서술·연구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후반~20세기 초반 이후였다. 다만 근대적 연구의 토대는 중세의 역사 서술과 연구에서 비롯하였다. 특히 조선 후기의 성과가 주목된다. 양란 이후 조선에서는 고구려를 재인식하고 새롭게 조명하였다(李萬烈, 1984). 전란 극복과 중화질서 회복을 위한 역사적 경험으로 고구려의 강성을 주목하였고, 북벌을 추구하고 중화계승의식을 표방하며 북방 고토(故土)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가운데 자국사로서 고구려사를 중시하였던 것이다(허태용, 2009).
이종휘(李種徽)의 『동사(東史)』가 대표적이다. 『동사』에서는 단군조선·기자조선의 정통이 고구려로 계승되었다고 파악하였다. 일각에서는 단군조선·기자조선의 정통을 신라에서 찾기도 하였지만, 이종휘를 비롯한 일각에서는 단군조선·기자조선의 고지(故地)에서 발흥한 고구려가 그 영역과 문물을 계승하였다고 본 것이다(김문식, 1994; 許太榕, 2021). 고구려 중심의 고대사 이해였다.
고구려를 중시한 역사 서술로 한치윤(韓致奫)과 한진서(韓鎭書)의 『해동역사(海東繹史)』도 주목된다. 『해동역사』는 정통이 아닌 건국 시점의 선후를 고려해서 고구려·백제·신라 순으로 삼국의 역사를 서술하였고(韓永愚, 1985; 한영우, 1994), 고구려를 세 권으로 하고 백제·신라는 한 권으로 하였다. 고구려에 높은 비중을 두었던 셈이다(李萬烈, 1984). 무엇보다 『해동역사』는 사료를 집성하였다는 점에서 사학사적 중요성이 크다. 『삼국사기』와 같은 국내 사서만이 아니라 중국·일본의 각종 사서에서 고구려와 관련된 방대한 사료를 집성하였는데, 이는 근대적 연구가 개시하는 데 기초를 제공하였기 때문이다.
『해동역사』에서는 사료의 이해와 해석을 두고 독창적인 견해를 밝히며 이를 고증하기도 하였다. 사료에 대한 고증은 한백겸(韓百謙)의 『동국지리지(東國地理志)』, 이익(李瀷)의 『성호사설(星湖僿說)』, 신경준(申景濬)의 『강역고(疆界考)』, 안정복(安鼎福)의 『동사강목(東史綱目)』, 정약용(丁若鏞)의 『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 등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李萬烈, 1984; 김현숙, 2011).
『동사강목』과 『해동역사』에서는 왕계(王系)와 인물·사건·지명 등을 고증하였는데, 이를 비롯한 이상의 여러 사서에서 가장 큰 관심을 두었던 것은 지명과 지리였다. 지명의 의미를 파악하고 위치를 비정하고자 하였다. 일종의 역사지리 연구였다. 조선 후기의 역사지리 연구는 고증에 철저했다. 사료를 비교·검토하고 전거를 탐색하였다. 이는 연구주제의 설정과 방법이란 측면에서 근대적 연구에 영향을 미쳤다.
예컨대 안정복은 『동사강목』의 「졸본고(卒本考)」·「국내위나암성고(國內尉那巖城考)」·「환도고(丸都考)」·「비류수고(沸流水考)」 등을 통해 『삼국사기』에 보이는 고구려 초기 도성의 위치 문제를 제기하였고, 이를 고증하고자 했다. 그의 성과 중 일부는 오늘날 연구에서도 하나의 학설로서 유효하다. 비단 『동사강목』만이 아니라 조선 후기의 역사 서술과 연구는 지금의 한국 고대사 연구에서도 선행연구로서 중시되고 있는데(조인성, 2011), 고구려사 연구에서도 마찬가지다.
이처럼 조선 후기의 역사 서술과 연구는 사료의 집성과 고증이란 근대적 연구의 과정을 일부 수행하였다. 그러므로 고구려사 연구의 기원 내지 전통을 찾는다고 하면, 조선 후기의 역사 서술과 연구를 주목할 수 있다. 하지만 조선 후기의 역사 서술과 연구가 근대적 연구를 예비하였거나 그와 직결된 것은 아니었다. 조선 후기의 역사 서술과 연구는 유교적 가치를 우선적으로 추구하였다. 이 점에서 중세 유교적 역사학의 범주에서 이탈한 것은 아니었다. 고구려사를 중시하였던 것도 마찬가지였다. 중화계승의식의 일환으로 조선 왕조의 정통과 유교적 가치의 계승을 밝히는 데 주된 목적이 있었다(허태용, 2009; 2021).
유교적 가치를 추구하였던 중세, 조선 후기의 역사 서술과 비교해 19세기 서구에서 성립한 근대의 역사학은 독립된 분과학문으로 사료비판이란 연구방법을 통해 과거 사실의 객관적인 관찰과 서술을 추구하였다는 점에서 중요한 차이가 있었다. 그런데 근대 역사학도 역사의 산물이었다. 시대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근대 역사학은 국민국가의 시대에 성립하였고, 국민국가 형성에 호응하며 번영하였다. 대부분의 역사 서술은 민족 내지 국가를 단위로 하였고, 연구의 관심은 그 기원과 형성 과정을 해명하는 데 집중되었다. 이른바 국사(國史)였다. ‘근대 역사학의 창건자’로 불리는 랑케(Leopold von Ranke)도 마찬가지였다(도면회, 2009; 이상신, 2021).
동아시아에서 근대 역사학을 가장 먼저 수용한 것은 일본이었다. 1887년 일본에서는 도쿄제국대학에 사학과를 설치하고 랑케의 제자 리스(Ludwig Riess)를 교원으로 초빙함으로써 서구의 근대 역사학을 수용하였다. 그리고 근대 역사학을 통해 서구와 같은 국사(일본사)를 서술·연구하고자 국사과를 증설하였고(1889), 국사와 중국사(지나사)·동양사를 구분하였다. 그 결과 1904~1910년 도쿄제국대학과 교토제국대학에서는 국사·동양사·서양사의 3과 제도가 수립되었다(旗田巍 著, 李基東 譯, 1983; 스테판 다나카 지음, 박영재·함동주 옮김, 2004; 나가하라 게이지 지음, 하종문 옮김, 2011; 오병수 편, 2021).
일본 학계의 고구려사 연구는 일본사와 동양사 분야에서 진행되었다. 다만 초기의 연구는 역사학의 제도가 정립하기 이전부터 시작하였다. 1870년대 중반~1880년에 중국 길림성(吉林省) 집안(集安) 지역에서 광개토왕비가 발견된 것이 그 계기였다. 광개토왕비는 발견 직후부터 동아시아 여러 나라 학자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청의 학계에서는 금석학에 대한 높은 관심 속에서 1880년대 전반부터 광개토왕비 탁본을 수집해 이를 연구하였다. 판독작업이 이루어졌고, 서체가 탐구되었으며, 비의 성격이 논의되었다(조우연, 2015; 趙宇然, 2019).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주요 논저는 표1과 같이 정리된다(조우연, 2015).
광개토왕비는 일본 학계에도 전달되었다. 1883년 육군 참모본부의 사코 가게노부(酒匂景信)가 묵수곽전본(墨水廓填本)을 구입해 귀국하였는데, 이로부터 본격적인 연구를 개시하였다.
일본 해군성 군사부의 고요가카리(御用掛)였던 아오에 하이즈(淸江秀)의 『東扶餘永樂大王碑銘解』(1884)와 육군 참모본부 편찬과의 요코이 나다나오(橫井忠直)의 『高句麗古碑考』(1884)가 대표적인 성과였다. 비문에 주해를 붙였고, 건립 연대를 논의하였다. 특히 요코이 나다나오는 이른바 ‘신묘년조(辛卯年條)’를 주목하였다. “倭以辛卯來渡海 破百殘□□新羅以爲臣民”을 두고, “그 말이 딱 우리 옛 역사와 맞았다. 즉 천고에 비할 바 없는 좋은 증거이다. 또한 유쾌하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광개토왕비를 통해 『일본서기(日本書紀)』에 보이는 신공황후(神功皇后)의 ‘삼한 정벌’이 사실로 입증되었다고 생각하고 이를 중시한 것이다(이노우에 나오키, 2015).
당시 일본 학계에서는 한학·국학의 전통 속에서 근대 역사학을 수용하고 있었는데, 『일본서기』를 비롯한 고대 문헌에 대한 이해를 두고 논쟁이 있었다. 한학·국학의 전통 속에서 고대 문헌에 보이는 일선동조(日鮮同祖) 내지 남선경영(南鮮經營)의 사실을 긍정하기도 하였고, 근대 역사학의 시각에서 그를 비판적으로 보기도 하였던 것이다(旗田巍著, 李基東 譯, 1983). 후자의 경우 『동국통감(東國通鑑)』과 같은 한국 측의 사서와 비교해 『일본서기』 초기 기록의 기년(紀年)과 사실성을 의심하였다. 신공기(神功紀)·응신기(應神紀) 등은 후대 역사가의 망찬(妄撰) 내지 날조로 생각하기도 했다(이노우에 나오키, 2015).
표1 1882~1903년 중국의 광개토왕비 관련 주요 논저
구분저술/발표 연도저자논저
11882이초경(李超琼)『遼左日記』
21884섭창치(葉昌熾)「高句驪王墓碑跋」
31887양이(楊頤)「好太王碑考訂」
41889성욱(盛昱)「好太王碑釋文」
51890~1896양동계(楊同桂)「高麗墓碑」(『瀋考』卷1)
61891왕효렴(王孝廉)「跋文」, 釋文
71895왕지수(王志修)「高句麗永樂太王古碑歌」·「高句麗永樂太王碑考」(『高句麗永樂太王碑歌考』)
81897부운용(傅雲龍)「跋」(『長白彙徵錄』, 1910 수록)
91897육심원(陸心源)「高句麗廣開土好太王談德紀勛碑跋」(『儀顧堂續跋』)
101898정문작(鄭文焯)「高麗國永樂好太王碑釋文纂考」 跋(『平湖朱氏經注經齎刻本』(1900)
111900오중희(吳重熹)「高麗永樂好太王碑釋文纂攷後跋」
121901섭창치(葉昌熾)「奉天一則」(『語石』卷2)
131903영희(榮禧)「高句麗永樂太王墓碑文」·「高句麗永樂太王墓碑讕言」(『古高句麗永樂太王墓碑文考』; 朴殷植 編, 『西北學會月報』1卷 9號, 1909 재수록)
광개토왕비는 당대의 금석문이었다. 따라서 기왕의 고대 문헌사료보다 사료적 가치를 높이 평가받았고, 문헌사료 비판에 유용하였다. 그런데 새로이 발견된 광개토왕비에서는 왜의 백제·신라 공격과 신민(臣民) 관계 설정이 보였다. 1889년 『회여록(會餘錄)』 제5집이 광개토왕비 특집으로 간행되며 광개토왕비에 대한 관심은 한층 높아졌다. 이제 근대 역사학의 시각에서도 요코이 나다나오처럼 『일본서기』 초기 기록의 사료적 가치를 높이 평가했다. 반대로 한국 측 사서의 사료적 가치는 낮추어 보았다. 간 마사토모(管政友)의 「高麗好太王碑考」(1891)가 대표적이다.
간 마사토모는“한국 사료는 어떤 것도 멀리 후세의 것이므로 오류가 많고”, “믿기 어려운 것이 많다”고 하였다. 이 외에도 나카 미치요(那珂通世)의 「高句麗古碑考」(1893), 시라토리 구라키치(白鳥庫吉)의 「高句麗百濟新羅三國の興起」(1894), 미야케 요네기치(三宅米吉)의 「高麗古碑考」(1898), 「高麗古碑追考」(1898) 등 성과가 제출되었는데, 주된 관심은 광개토왕비 탁본 및 판독과 더불어 이를 중심으로 한 사료비판에 있었다(이노우에 나오키, 2015).
사료비판의 대상이 비단 『일본서기』 등 일본 고대의 문헌만은 아니었다. 한국과 중국 등 동아시아 여러 나라의 사서를 망라하였다(旗田巍 著, 李基東 譯, 1983). 하지만 광개토왕비 발견 이후 일본 학계의 고구려사 연구는 자국 중심의 고대사 이해를 구축하는 데 경도되었다. 이는 메이지 연간(1868~1912) 이후 일본 학계의 일각에서 한국사에 대한 차별적·멸시적 시각이 점차 강화되고 있었던 사정과 무관치 않았는데, 이는 일본의 한국 침략과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는 데 기능하였다(旗田巍 著, 李基東 譯, 1983). 이를 식민주의 역사학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근대 역사학의 수용 이후 일본 학계의 광개토왕비 및 고구려사 연구는 제국주의·식민주의 역사학의 성립을 배경으로 하였던 것이다.
물론 조선에서도 서구의 근대 역사학을 수용하고 있었다. 1894년 갑오개혁 이후 학부아문에서는 독립된 교과목으로 국사를 설정하고 교과서를 편찬하였고, 이를 국민 양성에 활용하였다. 현채(玄采)는 『동국사략(東國史略)』(1907)에서 하야시 다이스케(林泰輔)의 『朝鮮史』(1892)와 『朝鮮近世史』(1900)를 역술(譯述)하였는데, 이로부터 이른바 신사체(新史體)를 보편적으로 사용하였다. 국사 교과서 편찬을 통해 서구·일본의 근대 역사학의 형식과 방법이 수용된 것이다. 그리고 러일전쟁(1904~1905)과 을사조약(1905) 이후 일제의 침략과 그에 대한 저항의 노력 속에서 민족주의가 고양되며 왕조 정통의 통사(通史)를 변용해 민족 정통의 통사를 수립하였다(도면회, 2009).
신채호(申采浩)의 역사 서술과 연구가 대표적이다. 그는 『독사신론(讀史新論)』(1908)을 통해 부여족 중심의 한국사 체계를 제시하였는데, 한국사의 정통은 단군조선-부여-고구려-발해로 이어졌다고 생각하였다(도면회, 2009). 부여를 통해 고조선에서 고구려로 정통이 계승되었다고 본 것이다. 이는 부여를 매개로 하여 고구려를 중심으로 한 한국 고대사 체계를 전망한 것으로, 신채호는 삼국 중에서 특히 고구려를 중시하였다. 고구려의 적극적인 대외투쟁이 고유의 민족정신을 대표하며, 이는 자강과 독립의 가능성을 보여준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조인성, 2009).
이처럼 한국의 근대 역사학은 서구·일본의 역사 서술형식을 수용함으로써 성립하였는데, 고구려사 서술과 연구는 일본 학계의 연구와 그 시각에 대항해 개시되었다. 반식민주의·민족주의의 시각과 태도였다. 이로써 일제시기 민족주의 역사학의 방향이 마련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신채호의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1931), 『조선상고문화사(朝鮮上古文化史)』(1931)를 비롯해 장도빈(張道斌), 권덕규(權悳奎), 황의돈(黃義敦), 정인보(鄭寅普) 등의 저술에서 고구려사가 중시된 것은 그와 같은 시각과 태도를 보여준다(조동걸,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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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근대적 연구의 여명과 광개토왕비 발견 자료번호 : gt.d_0010_0020_0010_0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