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기원·종족 계통 및 시공간의 탐색
2. 기원·종족 계통 및 시공간의 탐색
20세기 전반 일본 학계에서 고구려사 연구를 주도한 것은 동양사 분야에서였다. 일본의 동양사 연구는 시라토리 구라키치가 주도하였는데, 그 출발점은 한국사 연구였다. 그는 1890년에 가쿠슈인(學習院) 교수로 동양사를 강의하며, “황급히 일본에서 가장 가까운 조선의 역사부터 조사하기 시작했”다고 하였다(마쓰이 다카시, 2009). 그의 연구 안에는 고구려사도 포함되었다. 「高句麗百濟新羅三國の興起」(1894)를 비롯해 「高句麗の名稱に就きての考」(1896) 등의 논문을 발표했다. 특히 후자를 통해 고구려 명칭이 고구려어의 구루(溝漊)·홀(忽)·골(骨)에서 비롯하였고, 이는 성(城)을 의미한다고 풀이하였다. 시라토리 구라키치는 19세기 후반~20세기 전반의 여러 연구자가 그랬던 것처럼 언어가 민족의 특색을 나타낸다고 생각하였는데, 이에 명칭과 어의(語義)를 통해 고구려의 기원과 계통에 접근하고자 한 것이다(旗田巍 著, 李基東譯, 1983; 마쓰이 다카시, 2009).
고구려의 기원과 계통은 일본 동양사 연구의 주요 주제 중 하나였다. 그런데 이에 대한 선구적인 연구 역시 조선 후기부터 찾아볼 수 있다. 안정복·한진서·정약용 등은 현도군 고구려현에 착목해 한 무제 이전부터 고구려가 존재하였던 것으로 파악하였고, 기원전 107년 그 설치 지역을 함경남도 함흥으로 파악하였다(김현숙, 2011). 이와 같은 조선 후기의 연구는 일본 동양사 연구에 본격적으로 인용되지 않았지만, 연구 방법과 결론은 대체로 동일하였다. 나카 미치요의 「朝鮮樂浪玄菟帶方考」(1894), 히구치 류지로(樋口隆次郞), 「朝鮮半島に於ける漢四郡の疆域及沿革考 1~5」(1911~1912), 시라토리 구라키치의 「漢の朝鮮四郡疆域考」(1912)와 「武帝始建の四郡」(『滿洲歷史地理』, 1913), 이나바 이와키치(稻葉岩吉)의 「玄菟郡の名称について」(1915) 등이 대표적이다(이준성, 2015).
『삼국지』동이전에서 고구려는 부여의 별종이었다고 하였고 그 종족은 맥족(貊族)이었다고 하였다. 그런데 『삼국지』 동이전에서 부여는 예족(濊族)이었던 것처럼 나온다. 또한 각종 사서에서는 예(濊)와 맥(貊) 그리고 예맥(濊貊)이 혼재되어 나온다. 그러므로 그의 기원과 계통에 대해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었다. 크게 보면 예맥이 같은 종족이었다고 보는 견해가 있었고, 예와 맥은 서로 다른 종족이었다고 보는 견해가 있었다. 예컨대 정약용의 경우 전자의 입장이었다.
이와 같은 연구쟁점은 일본 시라토리 구라키치를 비롯한 일본 동양사 연구에서도 중요한 주제였다. 먼저 고구려와 부여의 관계는 건국신화를 통해 논의되었다. 비단 『삼국지』 동이전만 아니라 광개토왕비와 『위서(魏書)』 고구려전에 보이는 고구려의 건국신화도 부여의 건국신화와 유사하다. 그러므로 대다수 연구에서는 고구려와 부여의 근친관계를 인정하였고, 양국이 동족이었던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를 비판적으로 보기도 하였다.
시라토리 구라키치는 「朝鮮古代地名考」(1895~1896)에서 고구려와 부여의 관계를 정치적인 측면에서 이해하였다. 이러한 그의 견해는 「濊貊民族の由來を述べて夫餘高句麗及び百濟の起原に及ぶ」(1933)에서 한층 본격적으로 개진되었는데, 부여의 쇠망 이후 동명왕(東明王)을 자국의 시조로 하여 자부심을 표출하였던 정치전략의 일환으로 본 것이다(井上直樹, 2004; 이성시 지음, 이병호·김은진 옮김, 2022). 이와 같은 그의 연구는 근대 역사학의 방법에 입각한 것으로, 사료를 비판해 보았다는 점에서 연구사적 의의를 부여할 수 있다.
이처럼 시라토리 구라키치를 중심으로 한 일본 동양사 분야에서는 고구려의 기원과 계통에 주목해 연구를 진행하였는데, 조선 후기 이후의 연구쟁점을 근대 역사학의 방법으로 해명하고자 하였다. 본격적인 연구는 러일전쟁 이후 확대되었는데, 이는 일본의 한국·만주 침략을 배경으로 하였다. 러일전쟁 이후 일본은 만주와 조선 침략을 위한 국책회사로 남만주철도주식회사(南滿洲鐵道株式會社, 이하 만철)를 설립하였는데, 만철의 지원으로 도쿄지사에 만선역사지리조사실(滿鮮歷史地理調査室, 이하 조사실)을 두고 만주사·조선사 연구를 진행하였던 것이다(旗田巍 著, 李基東 譯, 1983). 1915년 도쿄지사의 조사실은 폐지되고 도쿄제국대학 문학부로 이관되었지만, 만철의 지속적인 지원을 받아 1942년까지 연구를 지속하였다(이노우에 나오키, 2021).
조사실에서는 많은 수의 동양사·한국사 연구자가 양성되었다. 시라토리 구라키치의 주재하에 쓰다 소우키치(津田左右吉), 야나이 와타리(箭內恆), 마쓰이 히토시(松井等), 이나바 이와키치, 이케우치 히로시(池內宏), 와다 기요시(和田淸) 등이 연구에 참여하며 성과를 축적하였다. 『滿洲歷史地理』(2책, 1913)와 『朝鮮歷史地理』(2책, 1913), 그리고 『滿鮮歷史地理硏究報告』(16책, 1915~1941)가 그 대표적인 성과였다.
『滿洲歷史地理』에서는 기원전 2세기부터 7세기까지 만주 지역에 소재하였던 고구려의 지리를 고증하였고, 그 과정에서 고구려와 중원, 호족(胡族) 왕조의 관계를 검토하였다. 『朝鮮歷史地理』와 『滿鮮歷史地理硏究報告』는 고구려사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논문을 수록하였다.
津田左右吉, 1913, 「好太王征服地域考」, 『朝鮮歷史地理』1.
__________, 1913, 「長壽王征服地域考」, 『朝鮮歷史地理』1.
__________, 1913, 「高句麗戰役新羅進軍路考」, 『朝鮮歷史地理』1.
__________, 1922, 「三國史記高句麗紀の批判」, 『滿鮮地理歷史硏究報告』9.
池內宏, 1930, 「曹魏の東方經略-毌丘儉の高句麗征伐に關する三國史記の記事-」, 『滿鮮地理歷史硏究報告』12.
______, 1930, 「高句麗滅亡後の遺民の叛亂及び唐と新羅との關係」, 『滿鮮地理歷史硏究報告』12.
______, 1941, 「高句麗討滅の役に於ける唐軍の行動」, 『滿鮮地理歷史硏究報告』16.
______, 1941, 「樂浪郡考-遼東の玄菟郡とその屬縣-」, 『滿鮮地理歷史硏究報告』16.
__________, 1913, 「長壽王征服地域考」, 『朝鮮歷史地理』1.
__________, 1913, 「高句麗戰役新羅進軍路考」, 『朝鮮歷史地理』1.
__________, 1922, 「三國史記高句麗紀の批判」, 『滿鮮地理歷史硏究報告』9.
池內宏, 1930, 「曹魏の東方經略-毌丘儉の高句麗征伐に關する三國史記の記事-」, 『滿鮮地理歷史硏究報告』12.
______, 1930, 「高句麗滅亡後の遺民の叛亂及び唐と新羅との關係」, 『滿鮮地理歷史硏究報告』12.
______, 1941, 「高句麗討滅の役に於ける唐軍の行動」, 『滿鮮地理歷史硏究報告』16.
______, 1941, 「樂浪郡考-遼東の玄菟郡とその屬縣-」, 『滿鮮地理歷史硏究報告』16.
목록을 통해 알 수 있듯 주된 관심은 역사지리 분야에 있었다. 특히 전쟁 관련 기록에 주목해 주요 지명의 지리를 고증하였고, 만주와 한반도의 여러 교통로를 연구하였다. 철저한 사료비판을 통해 고구려의 영역과 국제관계의 기초를 파악할 수 있었는데, 이를 비롯한 만선역사지리조사실의 성과는 20세기 전반 일본 동양사 연구를 대표하는 것으로 평가된다.
그런데 ‘조위의 동방 경략’이나 ‘고구려 유민의 반란’, ‘고구려 토벌’ 등과 같은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연구는 중원 왕조의 시각에서 진행하였다. 이는 『滿洲歷史地理』도 마찬가지였다. 중원 왕조를 기준으로 시기를 구분하였고, 중원 왕조의 관점에서 고구려의 국제관계를 이해하였다. 주지하다시피 고구려 관련 사료의 상당수는 중국 정사(正史) 및 『자치통감(資治通鑑)』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이는 중원 왕조 측의 시각에서 작성된 것이었다. 20세기 전반 일본 동양사 연구는 이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없었다. 중원 왕조 측의 시각에서 작성된 사료를 그대로 활용해 고구려사를 바라보았던 것이다. 고구려의 주체적 입장이 고려되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이와 관련하여 고구려를 만주사의 범위에서 서술한 점이 주목된다.
조사실을 비롯한 일본 학계에서는 한국 고대사의 공간적 범위를 조선과 만주로 이분하였는데, 고구려는 만주사 속에서 연구·서술하였다(井上直樹, 2004; 박찬흥, 2005). 만주사 속의 고구려사 연구와 서술은 한국사의 주체성을 간과한 역사단위였다. 일본 동양사학이 한국사의 주체성을 간과한 모습은 고구려사에 대한 연구주제를 보아도 알 수 있다. 주된 관심은 지명과 연대의 고증이었다. ‘인간 부재의 역사학’이었다고 비판받는 까닭이다(旗田巍 著, 李基東 譯, 1983). 다만 지명과 연대의 고증은 고구려사의 시공간 범위를 파악하기 위한 작업으로 이후의 논의에 토대를 제공했다.
이와 관련하여 1910년대 이후 고구려 초기 도성에 관한 본격적인 연구가 진행된 사실이 주목된다. 이는 일본 학계의 고구려 유적 조사가 시작된 데서 비롯하였는데(양시은, 2009), 1914년 일본 『史學雜誌』에 시라토리 구라키치, 세키노 다다시(關野貞), 도리이 류조(鳥居龍藏)의 논문이 발표되며 일련의 논쟁이 전개되었다(권순홍, 2016). 이때 각종 문헌사료가 검토되었고, 고고자료에 비추어 구체적인 위치가 비정되었다.
표2 1914년 일본 『사학잡지』에서 전개된 국내 천도 관련 논쟁
| 연구자 | 국내성 | 환도성 | 비고 |
| 시라토리 구라키치 | 집안 평지성·산성자산성 | 동처설 | |
| 도리이 류조 | 환인 오녀산성 | 집안 산성자산성 | 이처설 |
| 세키노 다다시 | 집안 평지성·산성자산성 | 집안 우수림자(楡樹林子)·외찰구문(外察溝門) | 이처설 |
이와 같은 논쟁의 전개에는 광개토왕비와 더불어 1906년 집안 소판차령(小板岔嶺)에서 발견된 관구검기공비(毌丘儉紀功碑)가 중요하였다. 광개토왕비와 그 일대의 고고자료를 통해 평양 천도 이전 고구려의 도성이 지금의 중국 길림성 집안 일대에 소재하였음이 드러났고, 관구검기공비가 발견됨으로써 환도성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이에 따라 집안 지역의 산성자산성(山城子山城)과 평지성이 주목받았다. 문제는 국내성과 환도성의 구체적인 위치 비정이었다. 이 과정에서 국내성과 환도성의 동처(同處)·이처(異處) 문제가 쟁점으로 부각되었다.
동처설은 시라토리 구라키치가 제기하였다. 그는 국내성과 환도성을 동일한 지명에 대한 이칭(異稱)으로 보고, 양자는 모두 집안 평지성을 가리킨다고 하였다. 집안 산성자산성은 그 부속 산성으로 평지성과 함께 도성을 이룬다고 하였다. 동처설은 이후 이케우치 히로시, 미시나 쇼에이(三品彰英), 이병도(李丙燾), 이기백(李基白), 이기동, 노태돈 등 다수의 연구자가 지지하였고, 이후 이를 바탕으로 해서 보다 치밀한 논의가 전개되었다.
이와 같은 초기 도성 연구는 고구려의 공간적 범위만 아니라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초기 기록에 대한 사료비판 문제와 밀접하였는데, 이는 고구려사의 시간적 범위를 이해하는 문제와 직결되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와 지리지에서는 유리왕 대에 국내성으로 천도하였다고 하지만, 『삼국지』 동이전에서는 이이모(伊夷模) 즉 산상왕 대에 다시 신국(新國)을 세웠다고 하였다. 산상왕 대에 국내성 지역으로 천도하였다고 여길 수 있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고국천왕을 비롯한 이전의 왕계도 의심받을 수밖에 없었다.
실제 『삼국사기』에 보이는 고구려의 왕계가 광개토왕비와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삼국지』·『후한서』 등과 비교해 보아도 태조왕이 즉위하기 이전의 왕계는 확인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문제의 소지가 있었다. 예컨대 『삼국사기』에 수록된 고구려의 왕호는 왕의 장지(葬地)에서 비롯된 것이 많았다. 고국천왕도 국천(國川) 즉 국내성 지역에 왕의 장지를 마련한 데서 비롯된 왕호였다. 그런데 고구려의 국내성 지역 천도가 유리왕 대가 아닌 산상왕 대였다고 하면, 고국천왕은 그 존재조차 신뢰할 수 없었다. 비단 고국천왕만 아니라 대무신왕(大武神王), 민중왕(閔中王), 모본왕(慕本王)도 장지에서 비롯된 왕호였다는 점에서 이 문제는 초기 왕계 전반과 관련되었다.
이에 대해 쓰다 소우키치(1922)와 이케우치 히로시(1940)는 고국천왕은 가공의 왕으로 조작된 것이었고, 태조왕·차대왕·신대왕은 『삼국지』와 『후한서』를 참조해 삽입한 것이었으며, 이 이전의 왕계도 믿을 수 없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견해에 따르면,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의 초기 기록도 그대로 믿기 어렵고, 이에 입각한 고구려사의 시간적 범위의 설정도 곤란하다. 『삼국지』·『후한서』 등 중국 측의 사서에 의존해 고구려사의 전개 과정을 해명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의 초기 기록은 후대에 윤색된 면이 있지만, 이미 광개토왕비에서 건국신화가 정착한 데서 드러나듯 일찍이 고유의 전승을 정리한 것으로, 그 사료적 가치를 전면적으로 부정할 수 만도 없다. 사료적 가치가 높은 내용도 적지 않다. 연나부(椽那部) 출신의 왕비족과 관련한 내용이 대표적이다(李基白, 1959). 이와 같은 이유에서 이후의 후속 연구에서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의 초기 기록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데 그치기보다 원전자료와 그 형성 과정을 염두에 두고, 다른 자료와 비교해 합리적인 이해를 도모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졌다(三品彰英, 1951; 1953; 鄭早苗, 1979). 고구려의 왕위계승이 형제상속에서 부자상속으로 이행된 면모를 주목한 연구(金哲埈, 1956; 李基白, 1959)도 이와 같은 시각에서 도출되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