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발전단계론을 중심으로 한 역동적 변화상 탐구
3. 발전단계론을 중심으로 한 역동적 변화상 탐구
20세기 전반 일본의 역사학계는 자국을 제외한 동아시아 여러 나라의 발전 과정을 경시하였다. 고구려사를 비롯한 한국 고대사 연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원시 사회에서 이어져 온 공동체의 유제(遺制)를 강조하였고, 한사군(漢四郡)을 비롯한 외부의 영향을 중시하였으며, 그러하였기에 고대 국가의 성립 과정도 지연된 것으로 설명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와 같은 시각 내지 태도를 식민주의 역사학의 정체성론(停滯性論)으로 묶어볼 수 있다.
식민주의 역사학의 정체성론을 정면으로 비판하고 한국사에서 고대 국가의 발전 과정을 체계화한 것은 1930년대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이었다. 백남운의 『조선사회경제사』(1933)가 대표적인 성과였다. 백남운은 ‘원시 씨족사회-원시 부족국가-고대 노예제 국가’란 고대 국가의 발전 과정을 제시하고, 고구려가 원시 부족국가에서 출발해 3세기 이후 고대 노예제 국가로 발전하였다고 파악하였다. 이와 같은 백남운의 연구는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의 세계사적 보편성을 중시한 것으로, 고구려도 서구의 고대 국가처럼 노예제 국가였다고 본 것이다. 이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백남운은 ‘원시 부족국가’란 과도기를 설정한 것인데, 이는 이후의 연구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백남운의 『조선사회경제사』가 발표된 이후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 중의 일부는 세계사적 보편성보다 아시아적 특수성을 강조하기도 하였다. 그들은 아시아의 여러 나라는 서구와 같은 전형적인 노예제가 부재하였고, 대신 국가와 민의 관계가 중요하다고 이해하였다. 김광진(金光鎭)이 대표적이었다. 김광진(1937)은 사회경제사의 통사적 이해를 추구하며, 국가와 촌락공동체·민의 관계를 중심으로 고구려 사회를 파악하고자 하였다.
백남운과 김광진의 견해 차이는 광복 이후 북한 역사학계에서 전개된 고대사·중세사 시대구분 논쟁으로 재연되었다. 광복 이후 북한의 삼국시대사 이해는 백남운의 연구를 기초로 통설을 구축하였지만(조선력사편찬위원회 편, 1951), 김광진을 비롯한 적지 않은 수의 역사학자는 이를 비판하며 통설에 도전하였다.
예컨대 김일성종합대학 조선사강좌에서 편찬한 『조선사개요』(1957)에서는 고구려를 비롯한 삼국시기까지 공동체적 사회가 존속했고, 국가에서는 이를 이용해 성읍·군현·식읍 등의 형식으로 공납제적 착취를 실시했다고 하였다. 노예제보다 공동체적 생산양식(우클라드)을 강조한 것으로, 『조선사개요』(1957)에서는 공동체적 생산양식과 노예제적 생산양식 그리고 농노제적 생산양식이 병존하며 서로 투쟁하던 시기를 ‘조기 봉건사회’라고 부른다고 했다. 김광진(1955)이 종래의 자설을 보완해 제기한 ‘조기 봉건사회설’을 조선사강좌의 공론으로 채택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삼국시대를 두고 노예제설과 조기 봉건제설이 경합하며 1950년대 전·중반 북한 역사학계 내부에서는 활발한 논쟁이 전개되었는데, 이는 1960년대 전반에 양론이 절충하며 새로운 통설을 구축하였다. 즉 고조선을 비롯한 여러 나라를 고대 노예제 사회로, 삼국시대부터 중세 봉건제 사회가 개막하였다고 규정한 것이다. 이와 같은 새로운 통설은 한편으로 삼국시대사를 바라보는 시각에 조기 봉건사회설이 채택된 면모를 보여주지만, 한편으로 세계사적 보편성을 강조한 백남운의 시각이 투영된 결과였다고 할 수 있다.
이는 1956년 8월 종파사건 이후 북한의 역사학계에서 외부의 영향을 배격하고 한국사의 내재적 발전을 강조하고자 한 사정과 밀접하였다. 점차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의 이론과 논리보다 민족주의 시각이 중시된 모습이었다. 한편 6·25전쟁 이후 분단이 고착화하며 북한 역사학계에서는 ‘민주 수도’ 평양의 역사적 전통을 강조하며 고구려를 주목하였는데, 이에 따라 북한 역사학의 민족주의적 시각은 고구려에 집중되었다.
이미 1949년 안악3호분이 발굴되며 고구려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있었는데, 1950년대 후반 이후 평양 일대의 고구려 유적이 대대적으로 발굴·조사되며, 이를 바탕으로 고고학 분야의 연구가 활발하였다. 『고구려 고분벽화 연구』(김용준, 1959), 『고구려 벽화무덤의 편년에 관한 연구』(주영헌, 1961) 등을 비롯해 다수의 연구논문이 발표되었다. 특히 평양의 역사적 전통을 직접적으로 말해줄 수 있는 고구려 도성유적에 대한 발굴·조사와 연구가 활발하였다. 평양성·안학궁성·대성산성 등 평양 일대 도성유적의 구체적인 면모를 살필 수 있었고, 이에 기초한 연구를 축적하였다(한창균, 2000; 백종오, 2008).
1972년 북한에서는 사회주의헌법을 제정하며 헌법상의 수도를 서울에서 평양으로 변경하였는데, 이로써 고구려사의 중요성은 더욱 부상하였다. 이는 1970년대 확립된 주체사상과도 밀접했는데, 이제 고구려사를 중심으로 삼국시대사를 바라보는 시각이 강화되어 나갔다. 1979년 발간된 『조선전사』에 그와 같은 변화가 분명히 드러난다. 『조선전사』에서는 고구려가 평양으로 천도한 이후 삼국 통일을 지향하였다고 하였고, 고구려를 중심으로 삼국시대사가 전개된 것으로 설명했다.
반면 신라의 삼국 통일은 전면 부정했다. 1950년대까지 북한 역사학계는 신라의 삼국 통일을 긍정하고, 이로써 단일의 준민족이 형성되었다고 보았지만, 민족 형성의 시점은 차츰 상향되었다. 특히 1960년대 이후 남북국시대론이 제기되며 신라의 삼국 통일은 그 의미를 축소해 보았고, 마침내 이를 전면적으로 부정하게 된 것이다(盧泰敦, 1991). 1974년 발굴된 이른바 동명왕릉이 이와 같은 북한 역사학계의 변화를 상징하였는데, 1970년대 후반 이후 북한 역사학계는 고구려의 시공간을 확장하고 그에 정통성을 부여하는 데 집중하였다.
이처럼 광복 이후 북한의 역사학계에서는 처음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의 고대 국가 발전단계론을 염두에 두고 논쟁이 전개되었지만, 1950년대 후반 이후 민족주의적 시각이 강화되었는데, 그 중심에는 고구려가 있었다. 고구려는 평양의 역사적 전통을 상징하였고, 평양에 수도를 둔 북한 정권의 정통성을 함의하였다. 이와 같은 북한의 역사학은 『삼국사기』를 비롯한 각종 사료에 대한 비판을 방기하였고, 동명왕릉 발굴에서 드러나듯 무리한 주장에 기초한 것이 많다.
북한 역사학과 비교해 광복 이후 남한의 역사학은 사료비판과 이에 기초한 실증이 연구의 주된 방식이었다. 일제시기부터 대학에서 역사학을 전공한 이후 연구활동을 지속해 온 이병도(李丙燾)와 이홍직(李弘稷)의 몇몇 논문이 이를 대표하였다(盧泰敦, 1986). 그럼에도 고구려사에 대한 전문적인 연구는 상대적으로 부진한 형편이었다. 고대 국가의 형성, 발전 및 사회 성격에 대한 논의도 활발하지 못하였다. 비록 손진태(孫晋泰)가 백남운의 ‘원시 부족국가-고대 노예제 국가’ 이론을 계승해 ‘부족사회-부족국가-부족연맹왕국-고대 국가’ 등으로 고대 국가의 발달 과정을 세분해 그의 연구가 통설처럼 수용되고 있었고, 이용범(李龍範)처럼 북방사의 시각에서 고구려사를 조명해 보기도 하였지만, 1960년대까지 고구려를 비롯한 삼국시대사 연구에서 그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는 이루어지지 못했다(盧泰敦, 1986).
본격적인 논의는 1970년대부터 전개되었다. 1960년대 후반 고고학의 성과에 힘입어 청동기시대가 설정되고 『삼국사기』 초기 기록에 대한 합리적인 이해가 모색되며, 고대 국가의 형성과 발전을 한층 역동적으로 설명하고자 시도한 것이다. 특히 1970년대 수평적 혈연집단의 일종인 부족과 수직적 계급집단의 일종인 국가를 묶어 ‘부족국가’로 개념을 만들기에는 부적절하다는 비판에 다수의 학자가 공감대를 형성하였다. 통설에 균열이 생기며 다양한 새로운 학설이 출현하였다(여호규, 2008).
원시 사회와 고대 국가를 구분하고, 고대 국가를 ‘성읍국가-연맹왕국-중앙집권적 귀족국가’로 체계화하기도 하였고, 서구의 인류학에서 제기된 치프덤(chiefdom)이론을 수용하기도 했다. 치프덤은 군장사회(君長社會) 또는 군장국가(君長國家)로 번역하였는데, 부족국가를 대신한 과도기 국가였다. 부(部)를 혈연집단이 아닌 지역집단으로 파악하며 이를 중심으로 고대 국가의 발전을 해명하고자 시도하기도 했다(盧泰敦, 1975). 이를 부체제론(部體制論)이라고 하는데, 고구려를 비롯한 삼국이 부를 중심으로 국가를 형성하였다는 점에 주목한 이론이었다(여호규, 2008).
부체제론은 학자마다 국가발전론 혹은 정치운영론으로 활용하는 등 개념이 분명하지 못하다는 비판이 있었지만, 고구려를 비롯한 삼국 초기의 국가 형성과 정치 운영을 이해하는 데 다양하게 원용되었다. 부체제론은 고구려사 연구를 바탕으로 하였다. 『삼국지』 동이전에 보이는 5족(族)·5부(部)와 『삼국사기』에 보이는 나(那)·나국(那國)·나부(那部)가 국가 형성의 기초단위였다고 보고, 그의 대응관계를 설정하는 데서 논의의 기초를 삼았던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이마니시 류(1921), 이케우치 히로시(1926), 미시나 쇼에이(1954) 등의 선행연구도 간과할 수 없다. 이들 연구를 통해 『삼국지』 동이전에 보이는 3세기 중반의 고유명 부와 7세기 중반 당에서 파악한 방위명 부를 구분할 수 있었고, 전자에서 후자로의 변화를 통해 중앙집권적 국가체제의 정비를 파악할 수 있었다. 이에 따라 3세기를 전후한 방위명 부의 성립에 주목할 수 있었는데(李基白, 1959), 이상과 같은 연구에 따라 고구려 정치사에서 초기사와 중기사가 구분되었고, 고구려사의 전개 과정과 시기구분에 대한 지금의 통설적인 이해가 마련되었다.
이처럼 광복 이후 남한 역사학계의 고구려사 연구도 고대 국가의 발전 과정을 해명하는 데 주력하였다고 하였는데, 이와 더불어 정치사의 전개 과정도 주목되었다. 이는 관제(官制)를 중심으로 한 정치제도 연구가 중심이었다. 김철준(金哲埈)과 이기백 등이 신라사와 백제사 연구를 통해 얻은 성과와 방법을 고구려사 연구에 원용하며 정치사 이해의 기초를 축적해 나가고 있었는데, 이제 『삼국지』 동이전을 위시한 중국 정사에 보이는 각 관등의 기원과 의미, 좌보(左輔)·우보(右輔)와 국상(國相)을 비롯한 『삼국사기』에 보이는 관명·관제, 관제와 왕권의 관계가 한층 정밀히 분석되었다(盧重國, 1979a; 李鍾旭, 1979). 또한 율령의 내용과 의미가 체계적으로 설명되었는데(盧重國, 1979b), 이를 통해 4세기 국왕 중심의 정치제도가 성립한 사실이 널리 인정받을 수 있었다.
6세기 중반 이후 대대로(大對盧)를 중심으로 한 귀족 중심의 정치 운영에 대해서도 일련의 연구가 진행되었다. 특히 『일본서기』에 보이는 안장왕 대(安臧王代, 519~531), 안원왕 대(安原王代, 531~545)의 정변이 주목(李弘稙, 1954)된 이후 이를 귀족연립정권의 수립으로 본 연구(盧泰敦, 1976)는 고구려 정치사의 중기사와 후기사를 구분하는 데 중요했다. 역시 고구려사의 전개 과정과 시기구분에 대한 지금의 통설적인 이해가 마련되는 데 기여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