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정치체제와 정치사 연구
1. 정치체제와 정치사 연구
1) 부체제론과 조기집권체제론
고구려사 가운데 1990년대까지 연구가 제일 많이 이루어진 분야는 정치사였다. 고구려의 국가발전단계는 건국~3세기까지를 초기, 4~5세기를 중기, 6~7세기를 후기로 보는 3시기 분류설이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졌다(임기환, 1995c). 고구려사의 시기구분에 대해서는 수도의 위치에 따라 기원전 108년~210년경까지를 비류시대, 210년경~427년까지를 환도시대, 427년~668년까지를 평양시대로 나누거나(末松保和, 1965; 1996), 정치사적인 면에서 태조왕 이전, 태조왕~고국원왕, 소수림왕~문자명왕, 안장왕 이후의 4시기, 혹은 소수림왕을 기준으로 이전을 불문관습법시대, 이후의 성문법시대의 2단계로 구분할 수 있다고 보는 설(노중국, 1979a)이 있다.
하지만 국가 성격과 구조, 사회·문화적 변화 등 전반적인 면에서 볼 때 대체로 3시기 구분법이 가장 적합하다고 보았다. 고구려의 국가발전단계를 구분할 때 가장 우선적이고 직접적인 근거는 정치체제 변화였다. 즉 고구려사는 정치체제 변화를 중심에 두고 집권체제를 이루어가는 과정인 초기, 중앙집권적인 통치체제가 확립된 중기, 그리고 그 체제가 이완된 시기인 후기로 나눌 수 있다. 이에 이 글에서도 이 시기 구분에 따라 서술하고자 한다.
한국 학계에서 1980년대와 1990년대에 가장 연구를 집중한 분야는 초기 정치사였다. 건국 전후 시기의 압록강 중류 유역 정치세력의 상황과 활동, 초기 정치체제, 중앙정치제도와 운영방식, 지배층의 편제, 왕실 교체와 왕계 문제 등 다양한 분야에 대해 연구가 이루어졌다.
이 과정에서 초기 고구려 정치체제에 대한 의견이 첨예하게 대립했다. 부체제론(部體制論)과 조기집권체제론(早期集權體制論)이 그것이다. 초기 고구려 정치체제를 어떻게 보느냐는 국가의 성립 과정과 초기국가의 구조 및 정치운영방식, 민의 위상과 민에 대한 지배방식 등 국가 운영 전반과 관련된 문제로, 고구려사 연구에서 가장 기본적인 출발점에 해당한다. 따라서 여러 학자들이 이에 대해 집중적으로 연구했다.주 001
부체제론은 고대 삼국의 국가구조와 발전 과정에서 중요한 기능을 했던 단위정치체로서 ‘부(部)’의 존재에 주목한 노태돈의 연구(1975)에서 비롯되었다. 초기 고구려 관련 사료에는 ‘나(那)’가 나온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비류나부, 연나부, 관나부, 환나부 등 ‘나부(那部)’와 주나, 조나 등 ‘나’가 나온다. 이 연구에서는 압록강 중류 유역에 다수 존재하였던 이 나들이 느슨한 연맹체를 구성하고 있다가 뒤에 계루부 포함 5개의 부로 통합되었다고 보았다. 이 다섯 가운데 가장 강력한 계루 집단을 중심으로 무역과 외교 등 대외관계에서 창구를 단일화하여 한(漢) 등 외부세력에 대항했고, 이후 계루 집단의 권한이 점차 커져 다른 4나 내부의 일에 간여하면서, 여러 나들이 자치적인 연맹부족에서 고대국가의 부로 전환하게 된 것으로 보았다. 노태돈은 태조왕 대에 5부가 성립되었는데, 5부는 고구려 건국의 주체집단으로서 고구려 안의 다른 피정복집단에 비해 우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고 보았다. 또, 고구려에서 5부의 성립 과정은 곧 고대국가의 성립과 궤를 같이했으며, 초기국가체제에서 부가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는 점에서 이를 부체제라고 불렀다. 나아가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에 공통으로 나타나는 부는 모두 단위정치체로서 성격을 가졌다고 보았다.
노태돈의 부체제론은 고구려의 국가 형성 과정과 초기국가의 내부 구조를 체계적으로 분석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한국 고대국가의 발전 과정과 국가 성격을 규명하는 데 유용한 기준을 제공했다. 그러나 그가 지적한대로 삼국의 부에 대한 개별적인 고찰이 더 필요했다(노태돈, 1986). 후학의 연구를 통해 뒤에 밝혀지듯이 고구려의 부와 백제, 신라의 부는 사료에 같은 부로 표기되어 있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기본 성격과 규모, 발전단계 면에서 서로 다른 면이 많기 때문이다.
고구려사에서는 이후 정치집단의 형성과 발전 과정을 보여주는 나와 나부 관련 사료가 비교적 풍부하여 이를 통해 국가 형성 과정이나 초기국가의 성격을 밝히려는 연구가 연이어 나왔다. 이때 부체제에 대해서는 고구려의 특징적인 정치적 실체로 사료에 나오는 ‘나’와 ‘○○나부’에 주목하여 백제, 신라와 구분해 나부체제 혹은 나부통치체제라 불렀다(임기환, 1987; 여호규, 1992; 김현숙, 1993).
임기환(1987)은 압록강 중류 유역에 존재했던 나를 국읍과 읍락으로 이루어진 삼한 소국에 비견하였다. 이는 나를 성읍국가로 본 이기백(1985)이나 소국으로 본 이종욱(1982), 손영종(1984)과 같은 입장으로, 군장사회였다고 파악한 금경숙(1989), 박경철(1996)과는 나의 성격을 달리 본 것이다. 여호규(1992)는 압록강 중류 유역에서의 정치체 성립과 성장, 발전 과정을 보다 세밀하게 단계별로 나누어 살폈다. 그는 나 집단이 모여 나국을 형성했고 나국이 모여 고구려를 형성한 후 나부가 된 것으로 보았다.
김현숙(1993; 1995)은 고구려가 소국-소국연맹-부체제기-중앙집권적 고대국가 단계로 발전해 갔다고 보았다. 압록강 중류 유역에 존재하던 5개의 유력 정치집단과 그 집단에 속하지 않은 작은 집단들이 맹주국을 중심으로 지역연맹체를 형성하고 외부세력, 특히 한 세력과 경쟁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맹주국인 계루 세력의 위상이 강화되어 왕실로 정립된 후 다른 소국 세력을 나부로 편제함으로써 나부체제가 성립되었다고 본 것이다. 즉 임기환, 여호규, 김현숙은 나와 나부의 존재를 부체제론의 입장에서 파악했다. 이들은 이후 고구려 초기의 정치운영과 귀족세력의 편제방식, 국가의 내부구조 등에 대한 연구를 이런 시각에서 진행했다.
부체제론자 사이에도 견해차가 있다. 임기환(1995)은 부체제기를 국가발전단계에서 연맹체의 대체 개념으로 사용했고, 김현숙(1993; 1995)은 연맹왕국에서 중앙집권국가로 이행하는 과도기적 단계로 보았으며, 여호규(1992)는 부체제를 통치체제 일반의 개념에서 접근했다.주 002
그런데 삼국의 부가 서로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음에도 동일하게 부체제를 설정할 수 있다고 보는 연구자가 있고, 또 부체제론이 국가형성론의 일부나 정치체제론으로 다루어지거나, 혹은 양자를 결합하여 이해하면서 논자마다 다양한 차이를 드러내고 개념의 혼란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에 서로 층위가 다른 국가발전단계와 정치체제의 발전단계를 구분하지 못한 결과라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다(김영하, 1995; 2000a).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고구려사 연구에서도 동일하게 부체제론에 입각해 초기사를 바라보지만 그 성격을 조금씩 다르게 규정했다.
이런 상황에 이르자 부체제론을 최초로 제기한 노태돈(2000)이 초기 고대국가의 구조와 정치운영방식을 정리하면서 초기국가의 정치체제로서 부체제의 개념과 범주를 설명하는 글을 발표했다. 이 글에서 그는 정치세력이 형식적으로 대등한 단계에 있는 부족연맹단계와 왕권 중심으로 결속한 단계인 부체제 단계를 구분해서 보아야 한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나부체제는 이미 다른 귀족보다 상위에 있는 국왕이 주도적으로 편제한 것이라 본 김현숙(1993; 1995)도 같은 인식을 갖고 있다. 이처럼 부체제론은 입론과 적용, 보완의 과정을 거치며 초기 고구려사의 여러 면을 규명해 갔다.
한편 고구려가 초기부터 왕을 중심으로 집권적 국가를 이룩하고 있었다고 보는 시각을 편의상 집권체제론 혹은 조기집권체제론이라 불렀다(여호규, 1997). 조기집권체제론의 입장에서는 국가의 성립 단계에서부터 이미 왕권 중심으로 권력 집중이 이루어졌다고 보았다. 따라서 단위정치체로서 부의 성격과 부체제론을 부정하는 입장에서 이후 고구려의 발전 과정을 왕권 중심의 중앙집권화가 점점 더 강화되어 가는 것으로 보았다.
김광수(1983; 1989)는 독자적 수장층을 기반으로 한 초기 지배체제가 태조왕 이후 국왕에게 권력이 집중된 집권적 지배체제로 전환된 것으로 보았다. 이종욱(1982)은 고구려가 일찍부터 왕권에 의해 중앙정치기구와 지방통치조직이 편성되고 정비되었다고 이해했다. 박경철(1996)은 나부를, 계루부가 다른 나를 국가지배구조로 편제하는 과정에서 인위적·의도적으로 분획한 하부 단위정치조직이라 보면서, 형성기 국가 성격을 ‘전제적 군사국가’ 또는 신분제를 근간으로 전일적인 통제력이 관철되는 신분국가로 이해했다.
2) 관등제
국초의 주요 과제 가운데 하나는 국가의 형성과 발전 과정에 참여한 다양한 정치세력을 어떤 방식으로 편제하는가였다. 이는 초기국가의 정치체제 성격과 관계없이 우선되는 과제였다.
초기 고구려에서는 이와 관련하여 사성(賜姓), 식읍 하사, 관등과 관직 수여 등 다양한 방법이 있었다. 이후에는 귀족세력을 중앙정치체제 안에 편입하기 위해 세력, 출신 차이 등을 고려하여 등급을 상정하는 관등제를 만들었다. 관등·관직제의 제정과 정비는 고구려 중앙정부조직의 편성 과정이자 지배체제의 정비 과정으로 국가 발전의 주요 지표 가운데 하나였다.
고구려 초기에는 관등과 관직의 차이가 불분명했고, 관등의 신분적 성격도 분명히 드러나지 않았다. 하지만 3세기 중엽의 사료에는 이미 관등제가 성립되어 있었다고 나온다. 그리고 후기에는 14등 관등제로 분화, 발전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삼국지』 고구려전에 보이는 관등의 성격과 관등제의 성립 과정을 최초로 검토한 연구자는 김철준이었다. 그는 부족집단을 누층적으로 집적하여 편제한 것이 고대국가라고 보았다. 이에 초기 고구려 관등 중 가(加)와 그 후신인 형(兄)은 족장 출신의 관등으로 족적 기반을 지닌 족장층을 통합해 그 세력 정도에 따라 차등 있게 중앙관으로 편제하였고, 사자(使者)는 고대국가의 성장에 따라 필요한 수취 업무를 담당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보았다(1956). 다케다 유키오(武田幸男, 1978)는 후기 자료를 통해 고구려 관등제를 분석한 다음 역으로 초기 관등제의 성격과 성립 과정에 대해 살폈다. 그는 제가(諸加)세력의 지배자공동체 성격을 갖는 관등과 왕의 직속 관료적 성격을 갖는 관등이 이원적 구조로 되어 있었는데, 이는 『삼국지』 고구려전에 초기 형태로 나타나는 관등제에서 알 수 있다고 했다. 초기 관등제는 4세기에 일원적으로 정리되었다가, 후기에 다시 14개 관등으로 분화, 발전했다고 정리했다. 그리고 고구려 관등제에는 신분제적 측면이 있다고 지적했다.
고구려 초기 관등제가 제가세력의 관등과 왕권을 뒷받침하는 귀족의 관등이라는 서로 성격이 다른 두 계통의 관등을 적절하게 편제한 것이라는 시각은 학계의 일반론이 되었다. 임기환(1995a)은 2세기 말 이후 관등조직을 패자-우태-조의의 나부 계열과 대로-주부-사자의 방위부 계열의 이원적 구조로 보았다. 또 다케다 유키오와 달리 후기 관등제는 14관등이 아니라 13관등이었으며, 세 신분으로 구분되었다고 보고, 4·5세기와 6·7세기 관등제의 차이는 곧 왕권과 귀족세력 간의 정치적 역관계의 추이에 따른 결과라고 설명했다(임기환, 1999).
여호규(1992)는 초기 관등조직은 나부의 다양한 지배력을 편제하던 관등, 계루부 왕권을 뒷받침한 관등, 나부의 자치권을 뒷받침한 관등으로 구성되어, 왕권과 나부의 역관계를 규정한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초기 관등조직에서 중기 관등조직으로의 전환에 중점을 두고 4세기 이후 일원적 관등조직의 정비에 대해 살폈다(여호규, 1997).
이들은 나부체제론에 입각해 초기 고구려 정치체제를 보기 때문에 관등제도 국왕권을 뒷받침하는 관등과 나부세력을 편제한 관등이라는 서로 성격이 다른 관등을 교직했다고 보았다. 노태돈(1999)은 이후 관등제가 기본적으로는 제가세력을 편제하는 기능을 하였으나, 성립 이후에는 관등제 자체의 운영원리에 의해 왕실 중심으로 5부 세력을 하나의 정치체로 결집시켜 나가는 기능을 했다고 봤다.
그런 한편 집권체제론자의 경우, 고구려 관등제는 처음부터 국왕 중심으로 중앙집권화된 체제 아래 분화된 직능을 담당하던 관제였다고 보았다(김광수, 1983). 이에 따라 초기의 중앙정부조직을 관등제를 통해 살펴보면서 처음부터 관등과 관직이 엄격히 분리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았다(이종욱, 1982a). 이 경우 초기 관등과 중기 이후 관등조직의 성격 차이나 변화·발전되는 양상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질 수 없었다.
3) 국상과 제가회의
고구려 초기의 관직 가운데 연구의 관심이 집중된 주제는 국상(國相)과 상가(相加)의 성격을 어떻게 보느냐였다. 이는 제가회의(諸加會議) 성격과 직접 연결되며 초기 정치운영방식과도 관련이 있어 역시 초기 정치체제를 나부체제로 보느냐, 집권체제로 보느냐에 따라 견해가 다르게 나타났다.
노중국(1979b)은 국상을 초기 관등제에서 가장 상위로 보이는 상가와 동일하다고 보고, 국상이 제가회의의 장으로서 왕권과 제가회의 간의 역관계를 조정하는 역할을 한 것으로 보았다. 이와 달리 이종욱은 국상을 왕이 통치권을 행사하는 데 필요한 일을 의논하는 군신회의의 장으로 보았다. 김광수(1991)는 상가는 대수장층이고, 국상은 국정을 총괄하는 수장으로 막료적 성격을 갖고 있어 모두 왕권 아래 집권적 정치제도의 구성요소였고, 제가회의도 한정된 기능만 수행하는 기구였다고 보았다.
김현숙(1993)은 초기 고구려의 최고위 관직은 좌보와 우보였는데, 좌보는 나부세력, 우보는 계루부 출신 귀족이 맡아 공동으로 정치를 운영했으며, 뒤에 왕권이 커지면서 최상위관으로 국상을 설치한 것으로 보았다. 국상이 왕 아래 최고위 관직자로서 왕권을 배경으로 정치를 직접 운영하는 역할을 했다고 본 것이다. 이와 달리 여호규(1998)는 상가가 곧 국상이라고 보는 설을 따르면서, 좌·우보는 왕권 아래 나부의 대리인으로서 행정적 실무를 담당했고, 국상은 나부의 행정실무를 국가 차원에서 통솔했던 것으로 보았다. 그러면서 국상은 3세기 이후 제가회의가 상설 귀족회의로 전환되었을 때 그 회의의 의장이었다고 보았다.
하지만 노태돈(1999)은 상가가 곧 국상이라는 설을 부정하고, 상가는 4부의 부장에게 부여한 일종의 작위였고, 국상은 왕의 측근 관직이라고 보았다. 당시 국정 운영의 중심은 제가회의로서 관료조직의 취약성을 보완하여 5부 전체에 통합력을 발휘했지만, 기본적으로는 왕권 아래 종속된 존재였다고 하였다. 또 국상은 대보(大輔), 좌·우보를 이은 관직으로서 왕의 측근이 주로 임명되어 왕을 보좌하여 왕권강화를 도모하는 성격을 지녔다고 보았다.
반면 금경숙(1994; 1999)은 집권체제론에 입각하여 제가회의는 초기부터 왕권 아래 편제된 비상설기구였다고 보았다. 그에 따라 국상은 제가회의의 장이 아니고, 좌·우보와 동일하게 왕권강화의 역할을 수행한 관으로, 제가회의와 국상은 대립적인 존재였다고 파악했다.
4) 후기 정치사
고구려사에 관한 문헌자료는 주로 초기에 집중되어 있고, 중기에 이르면 소략해지다가 후기에는 단편적인 자료 몇 개를 제외하고는 수·당과의 전쟁 관련 자료가 태반을 이루고 있다. 따라서 후기사에 대한 연구는 부분적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왕권약화 과정과 귀족세력 분열, 대외정세 변화 등에 대한 검토를 통해 당시 정치동향이나 정치체제의 성격이 규명되었다. 그리고 이 시기의 성격을 보여주는 기준점이 되는 대대로(大對盧)와 막리지(莫離支)의 성격, 연개소문의 정변과 그 정권의 성격에 대한 연구도 이루어졌다.
6세기 이후 고구려 정치사에 대한 연구를 보면, 왕권이 약화되어 유력 귀족 중심으로 국정이 운영되는 양상을 보인 이 시기 정권의 성격을 귀족연립정권(체제)으로 이해하는 동향이 일반화되었다.
노태돈(1976)은 본래 통일신라 후기사에 적용한 개념인 귀족연립정권(체제)이란 이해방식을 고구려 후기 정치사에 처음으로 도입했다. 그 후 귀족연립정권론 혹은 귀족연립체제론은 여러 연구자가 별다른 비판 없이 받아들였다. 그런 가운데 6세기 이래의 귀족 간 대립을 국내계 정치세력과 평양계 정치세력의 대립으로 파악한 연구(임기환, 1992), 국내외적 요인으로 6세기에 들어 고구려 왕권이 급격히 약화되었음을 주목한 연구(김현숙, 1999)가 나왔다.
하지만 중기에 강력한 국왕 중심 체제가 붕괴되고 귀족연립정권이 등장하게 된 배경이나 귀족연립정권의 구체적인 정치운영방식에 대한 검토는 별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다만 권력 운영의 파행적 결과로서가 아니라 그 자체 권력운영의 안정성을 갖고 있다고 보는 입장에서 귀족연립정권의 안정적인 정치운영체제로 당시 대대로-막리지체제가 시행되었다고 본 견해가 나오는 선에서 머물렀다(임기환, 1992). 이에 따라 고구려 후기 정치체제를 일반적으로 귀족연립체제 혹은 귀족연립정권으로 칭하고 있지만, 그것이 부체제나 중앙집권체제와 등가가 되는 용어인지 의문이 제기되기도 했다(김현숙, 1996).
이후 귀족연립정권론을 가장 먼저 제기했던 노태돈(1999)이 그 운영 방식에 대한 연구를 진행했다. 그는 자율성을 가진 대대로가 중심이 된 귀족회의 중심의 권력운영을 귀족연립정권의 특징으로 지적했고, 일급 귀족인 상위 5관등 소지자의 회의체에 주목했다. 그리고 귀족연립정권에서도 고구려 왕실이 유지된 배경으로 왕실의 신성성, 고씨 왕족의 유대감과 정치적 비중, 왕실을 압도할 정도의 권력을 갖는 귀족세력의 부재, 왕이 갖는 권위가 귀족연립정권을 안정시킬 수 있는 배경이 되었던 점 등을 지적했다. 요컨대 고구려 후기의 정치체제는 중기와 동일하게 중앙집권체제였으며, 왕권의 약화라는 요인으로 인해 정치운영방식에 있어 귀족들의 견해가 전보다 강하게 작용하는 귀족연립정권이 되었다고 정리하였다(노태돈, 1999).
고구려 후기 정치사 연구에서 주목을 끈 또 다른 주제는 연개소문의 정변과 그 정권의 성격 문제였다. 단재 신채호(1972)가 연개소문의 정변은 당의 등장과 위협에 따라 대당강경파가 결행한 것이라고 지적한 이래 대체로 이에 동의하는 가운데, 6세기 이래 국내계와 평양계 귀족 간 대립의 연장선이라는 점을 강조하거나(임기환, 1992), 연개소문과 왕위를 노리던 대양왕(大陽王)의 결속 가능성을 지목하는 연구(전미희, 1994)가 나왔다.
연개소문의 행적 및 후기 정권의 성격과 관련해 볼 때 주목되는 핵심 관직이 대대로와 막리지였다. 연개소문이 부직(父職)으로서 승계한 관이 대대로인가 막리지인가, 아니면 대인(大人)인가를 두고 서로 다른 의견이 제출되었다. 특히 정변 이후 연개소문의 권력기반이 된 막리지에 대해 관심을 기울였다.
다케다 유키오(1978)는 막리지를 태대형으로 보는 견해를 처음으로 밝히고, 연개소문 집권기에는 옛날부터 최고위직이었던 대대로를 공동화시키고, 새로운 권력 집중의 중심체로서 막리지를 활용했다고 보면서 이 시기 권력운영방식에 대해 살폈다. 이문기는 이에 동의하면서 막리지를 국왕의 근시직인 중리제(中裏制)의 최고위직인 중리태대형(中裏太大兄)으로 보고, 중리직이 평원왕 이후 귀족연립적 정치운영을 견제하고 왕권강화를 뒷받침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였다고 설명했다(이문기, 2000). 노태돈은 연개소문의 지위가 정변 전에는 동부욕살 대인, 정변 후에는 대모달(大模達) 대장군 막리지(태대형)였으며, 이후 대대로에 취임하여 귀족회의를 중심으로 하는 귀족연립정권의 정상적인 운영방식을 따른 것으로 이해했다.
이처럼 막리지 및 연개소문의 권력기반을 관료제 운영의 틀 안에서 이해하고 연개소문 정변 시 동원된 부병을 공적인 군사력으로 본 것은 귀족연립정권의 공적 기반 위에 연개소문 정권이 위치한 것으로 파악했기 때문이다. 즉 기본적으로 5세기 집권체제의 관료제적 기반이 귀족연립정권 이래 지속되었다고 본 것이다.
막리지의 성격을 어떻게 보느냐는 고구려 후기의 정치운영방식이나 권력구조, 연개소문 정권의 성격과 밀접한 연관을 갖고 있다. 임기환(1992)은 연개소문이 이전 귀족연합정권의 정치운영체제인 대대로-막리지체제를 붕괴시키고 사적 권력을 장악함으로써 이후 내분의 주요인이 되었다고 지적했다. 전미희(1994)도 연개소문이 정변 이후 귀족연립체제를 부정했는데, 보장왕과 연개소문이 서로 이해를 달리하면서 정권의 불안정성이 드러난 것으로 보았다. 반면 김기흥(1992)은 보장왕 대의 권력구조를, 기본적으로는 귀족연립정권의 성격을 유지하였으나 실제 집권자인 연개소문과 상징적인 존재인 보장왕의 이원집정제였다고 보았다. 이성시(1993)는 정변 전 대대로에서 정변 후 막리지로 연개소문의 지위가 변화된 것에 주목하고, 다케다 유키오의 막리지에 대한 견해를 받아들여 연개소문이 족제적 성격의 구세력을 타도하고 집권화를 지향하여 국가체제를 재편하려는 의도를 가졌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이 견해는 대대로와 막리지의 성격이 대립적이었다고 보는 근거를 제시하지는 못했다.
5) 지방통치제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고구려사 연구에서 논의가 집중된 주제 중 하나로 지방통치제를 들 수 있다. 지방통치제에 대한 연구 역시 고구려 초기의 정치체제를 조기집권체제로 보느냐, 부체제로 보느냐에 따라 근본적으로 다른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조기집권론의 경우 국초부터 왕명을 대행하는 지방관이 각지에 파견되어 지역을 지배한 것으로 보았다(이종욱, 1982b). 그러나 부체제론의 입장에서는 엄밀한 의미에서의 지방관 파견은 3세기 후반경이 되어야 이루어졌고, 4세기에 지방통치가 본격화되었다고 보았다. 이때부터 교통로를 중심으로 주요 전략거점지역에 성을 축조하고 지방관을 파견하여 지역을 통치한 것으로 본 것이다. 하지만 지방통치체제의 기본구조와 변화, 그리고 군현제 실시 여부나 지방 5부의 존부(存否) 문제 등에서 견해차를 드러냈다.
4~5세기의 지방지배 연구에 주요한 토대를 제공한 것은 다케다 유키오의 연구(1979)였다. 그는 광개토왕비문을 면밀히 분석하여 고구려에서는 곡(谷)지배, 성촌(城村)지배, 종족지배, 부락-영(營)지배주 003 등 구성원의 성격에 맞는 다양한 방식을 적용하여 통치했지만, 일원적인 성(城) 지배체제로의 이행을 추구했던 것으로 보았다. 즉 고구려가 농경정주양식을 영위하는 촌을 기저사회로 하는 성-촌지배, 성-호(戶) 지배를 강화함으로써 안정적 수취기반을 확보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았다.
임기환(1987)은 이러한 다케다 유키오의 설에 동의하면서 고구려의 내부구성과 기저사회의 양상 관련 자료를 더욱 세밀하게 분석하여 초기 지방지배가 성·곡지배에서 성중심지배로 이행해 갔다는 것을 상세하게 정리했다. 또 여호규(1995)는 교통로를 중심으로 지방통치조직의 정비 과정을 살폈는데, 4~5세기에 지방통치조직이 상하 2단계로 중층화되었으며, 지방관도 수사(태수)-재(宰)가 상하 통속관계를 가졌다고 보았다.
김현숙(1996; 1997)은 고구려 지방통치제의 전체적인 발전 과정에 대해 살폈다. 3세기 말 4세기 초부터 정치·경제·군사적으로 중요한 요충지부터 지방관을 파견했는데, 4세기 중반까지는 주요 거점지역에만 지방관을 파견했다며 이를 거점지배라 불렀다. 거점지배는 전략요충지에 구축된 성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는데, 주요 지역의 성에는 태수, 그보다 중요도가 낮은 지역에는 재를 파견해 통치했으며, 태수나 재는 치소성(治所城) 인근지역을 벗어난 외곽지역의 주민까지 개별적으로 통치하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았다.
김현숙은 4세기 중후반경 영역의 확대로 통치단위들이 각각 개별적으로 중앙과 직접 연결되는 거점지배를 더 이상 유지하기 어렵게 되었고, 방어체계상에도 심각한 모순이 드러나자 고국원왕 후반기부터 통치단위를 중층적으로 재편하기 시작했지만, 왕의 갑작스런 전사로 소수림왕대에 가서 태수-재의 2단계 지배체제를 완성한 것으로 보았다. 이로써 점적인 지배에서 면적인 지배로 전환되었고, 이 지배체제하에서는 통치단위를 몇 개 합친 넓은 지역을 상위 지방관이 관장했던 것으로 보고, 이를 권역지배라 불렀다. 이 권역지배체제에서는 모든 주민을 호적에 등재하고 보편적인 법률에 따라 통치했으므로 보다 체계적이고 전면적인 영역지배가 가능했다고 보았다.
그러다가 광개토왕 대에 영토가 팽창하자 다시 상·하위 행정단위를 포괄한 광역을 총괄하는 지방관인 수사(守事)를 설정하여 수사-태수-재의 3단계 지배체제가 되었다고 보았다(김현숙, 1996; 1997). 수사를 모두루묘지와 충주고구려비에 나오는 군급 지방관인 태수와 동일한 것으로 보느냐(여호규, 1995), 복수의 태수-재 관할지역을 담당하는 상위 지방관으로 보느냐에 따라 당시의 지방통치조직이 2단계였다고 보는지, 3단계였다고 보는지가 달라진 것이다.
지방통치제에 대한 견해차는 성을 단위로 구성된 6~7세기 지방제의 구조와 관련해서도 나타났다. 지방관의 구성으로 볼 때 노중국은 욕살(褥薩)-처려근지(處閭近支)-가라달(可邏達)-루초(婁肖) 4단계 조직이었다고 보았다(1976). 노태돈(1996)은 수·당이 쳐들어왔을 때 고구려 서북지역 중진 성들이 각각 개별적으로 성을 방어했음을 보여주는 『삼국사지』 지리지4의 ‘목록(目錄)’ 기사와 수·당과의 전쟁 기사를 근거로 6~7세기까지도 고구려 지방통치조직이 중층적인 조직이 아니었던 것으로 보았다. 즉 욕살과 처려근지는 병렬적이었으며 서로 통속관계가 없었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고구려 후기의 지방통치조직은 3단계 조직이었다고 보는 것이 다수설이다. 단 여기에도 차이가 있다. 즉 가라달을 욕살과 처려근지의 속료(屬僚)였다고 보아 욕살(-가라달)-처려근지(-가라달)-루초의 3단계였다고 보는 설(武田幸男, 1980; 임기환, 1995b; 여호규 1995b)과, 전략지역에는 하부 단위 지방관으로 가라달을 두어 욕살-처려근지-가라달, 일반지역에는 루초를 두어 욕살-처려근지-루초의 3단계 조직이었다고 보는 설(김현숙, 1996)이 있다.
고구려의 지방통치제가 변화, 발전하는 과정에서 군현제를 도입했는지 여부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이에 대해 북한 학계에서는 4세기 이후 주군현제가 정연하게 실시되었다고 보았으나(리승혁, 1987), 한국 학계에서는 5세기를 전후하여 군제(郡制)가 도입되었지만 6세기 후반에 소멸되었다고 보았다(노태돈, 1996; 김현숙, 1996).
전국을 광역으로 구분한 5부의 존재에 대해서는 논의가 많이 진행되지 않았다. 하지만 연개소문 사망 후 남생이 직을 물려받은 뒤 지방 순시를 나갔을 때 “5부를 돌아봤다”는 구절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지방을 크게 나눈 5부가 존재한 것은 분명하다. 다만 광역의 5부가 실제적인 지방통치단위로 기능한 것 같지는 않다는 견해가 있다(김현숙, 1996).
한편 고구려 내부에는 다른 일반 고구려인과 성격이 다른 존재가 있었다. 대표적인 예로 생활방식과 종족면에서 이질성이 강한 말갈족이 상당수 편입되어 있었다. 노태돈(1981b)은 이들의 존재양상 및 고구려와의 관계에 주목했다. 박경철(1988)은 선비·거란·지두우(地豆于) 같은 스탭세력과 말갈같은 부차적 스탭세력이 고구려 군사역량의 인적 기반, 즉 군사동원체제의 잠재적 기반이었음에 주목하여, 이들 개개에 대한 정복·지배의 양태를 고찰했다. 그는 이러한 제국적 지배질서 아래 고구려가 이종족에 대해 그들 본래의 공동체적 질서와 생산양식, 고유의 생존영역을 비호·보장해주는 대가로 그들로부터 조부(租賦) 특히 노동력과 군사력을 수탈한 것으로 보았다. 고구려는 이러한 보호·종속관계를 바탕으로 이종족세력을 부용(附庸)화함으로써 자기 군사잠재력의 바탕을 확대·강화시켜 나갔다는 것이다.
그런 한편 김기흥(1991)은 고구려 안에 집단거주하고 있던 말갈, 거란 등을 6세기 조세 관련 사료에 나오는 ‘유인(遊人)’이라고 보아, 이들의 성격에 맞추어 조세를 다른 일반인에 비해 3년에 한 번만 내고 소액을 부담하도록 했다고 보았다. 김현숙(1992)도 이에 동의하는 입장에서 수·당대 말갈 7부 가운데 백산부(白山部)와 속말부(粟末部)는 기원전 5세기 이후 거의 완전한 고구려민으로서 존재할 수 있었으나, 그 외의 부는 고구려의 속민집단 혹은 부용집단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고 보았다. 말갈은 다른 지역의 일반 고구려민과 생활방식이 다른 존재였으므로, 그 종족적 성격을 고려하여 형식적 수준에 그치는 소액의 세금만 부과하였고, 군사적 부담으로 국왕 직속의 특수부대로 편성하여 정복 활동에 동원했던 것으로 보았다. 그러면서 유인은 조세 부담자로서 군대조직에 편제된 말갈 등을 지칭한다고 보고, 수·당과의 전쟁에서 대규모로 동원되던 말갈을 그 예로 들었다.
낙랑군과 대방군 고지(故地)에 대한 지배방식도 연구되었다. 안악3호분의 벽화와 묵서명에 근거하여 무덤 주인공의 성격에 대해 논의를 집중하면서, 평양 천도 이전까지는 이 지역에 거주하던 중국계 이주민이나 토착세력이 고구려의 직접지배를 받지 않는 상태에서 독자적으로 살아가고 있었다고 본 이전의 시각을 계승했다(武田幸男, 1989; 孔錫龜, 1989; 孔錫龜, 1990). 하지만 임기환은 광개토왕 대에 국왕 직속의 막부를 두고 이를 통해 지배했다는 새로운 견해를 제출했다. 이후 낙랑·대방 고지에 대한 고구려의 지배방식에 관한 다각도의 연구가 이루어졌다(김미경, 1996; 노태돈, 1996; 이문기, 1999).
- 각주 001)
- 각주 002)
- 각주 0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