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초기 왕계 연구
2. 초기 왕계 연구
『삼국지』 고구려전에는 소노부에서 계루부로 왕실이 교체되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후한서』, 『삼국지』, 『위서』 등에 나오는 고구려 왕계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광개토왕비에 나오는 왕계가 정확하게 일치하지 않아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보이는 왕계에 의문이 제기되기도 했다. 이에 따라 이전 시기부터 왕실 교대를 인정하지 않는 선행연구도 있었고, 왕실 교대를 인정하지만 교체 시기를 달리 보기도 했다.
1980년대 이후에는 기본적으로 소노부에서 계루부로 왕실이 교체되었다고 보는 인식을 바탕으로 연구를 진행했다. 이 시기 연구에 나타난 새로운 경향 가운데 하나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대한 면밀한 검토를 통해 왕계 관련 사료에 층차가 있다는 점에 주목하여 왕계의 조정 혹은 후대의 가상이 이루어졌다고 보는 것이다.
다케다 유키오는 중국 사서와 『삼국사기』고구려본기의 왕계를 비교하여, 1단계로 환도·국내왕계의 사실상 시조인 산상왕부터 광개토왕 대까지 왕계가 이어졌고, 2단계로 주몽을 시조로 하는 초기의 전설왕계가 4세기 말에 완성되었고, 3단계로 『삼국지』에 의거하여 환도·국내왕계의 두 왕이 가상되고, 4단계로 6세기 이후 『후한서』에 의해 태왕왕계가 성립, 가상되어 현전하는 고구려 왕계가 성립한 것으로 추정하였다(武田幸男, 1989).
이도학(1992)은 광개토왕비와 『삼국사기』의 왕계를 비교하여 형제상속을 부자상속으로 바꾸거나 실전한 왕계를 삽입하는 형태로 왕계 복원을 시도하였다. 조인성(1990)은 고구려 왕실에서 동천왕 대에는 태조왕을 시조로 섬겼는데, 소수림왕 대에 이르러 주몽왕을 시조로 존숭하게 된 것으로 보았다. 노태돈(1994)은 광개토왕비의 왕계를 기준으로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전하는 왕계의 성립 시점을 추적하여, 소위 대왕 왕계의 후대 삽입설을 부정했다. 그는 소수림왕 대에 모본왕까지의 초기 왕계와 그 이후의 왕계가 결합하여 추모왕을 시조로 하는 새로운 왕계를 정리했을 것이라 추정하였다.
『삼국사기』에 성이 고씨로 나오는 태조왕과 해씨로 나오는 그 이전 왕들은 세계(世系)가 달랐다고 본 연구도 진행되었다. 주몽을 제외한 유리왕부터 모본왕까지의 성씨가 해씨인데 태조왕은 고씨라고 되어 있으므로 자연스럽게 태조왕 대에 왕실이 교체되었다고 보았다(김용선, 1980). 태조(太祖)라는 시호 자체가 시조적 성격을 띠고 있으므로, 태조왕과 그 이전 왕계의 단층에 주목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따라 태조왕 대에 소노부에서 계루부로의 왕실 교체가 이루어진 것으로 보는 설이 나온 것이다.
그런데 태조왕을 계루부 안의 방계로 보아 해씨에서 고씨로의 전환을 계루부 내의 왕실 교체였다고 보는 견해가 제기되었다(노태돈, 1993). 또 비류국 송양왕이 주몽보다 선주집단으로서 더 우세한 세력이었지만 주몽과의 경쟁에서 패한 후 항복해왔고, 뒤에 비류부로 편제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삼국사기』 고구려본기는 주몽 건국 이후 그 후계 왕들의 역사를 서술한 것으로 보고, 해씨 성을 가진 초기 5왕은 유리왕계였고, 고씨 성으로 나오는 태조왕은 이들보다 앞서 압록강 중류 유역으로 온 졸본부여 출신인 모후세력을 기반으로 즉위했으므로 동일하게 졸본부여에 기반을 둔 주몽도 고씨로 명기한 것으로 본 견해도 나왔다(김현숙, 1994). 이 경우 고구려 왕들은 주몽 이래 모두 부여에서 온 유이민이었고 이들이 졸본부여, 국내성에서 편입한 세력 등과 함께 계루부를 형성했으므로 해씨 왕계에서 고씨 왕계로의 변화는 계루부 세력의 분화일 뿐 왕실이 교체된 것은 아니라고 보았다. 이후 해씨 왕계에서 고씨 왕계로의 변화를 계루부 내의 해씨 집단과 고씨 집단의 교체로 이해한 또 다른 연구(강경구, 1999)도 나왔다. 이에 따라 태조왕 대에 해씨에서 고씨로 왕의 성씨가 바뀐 것은 소노부에서 계루부로의 왕실 변화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계루부 안의 변화라고 보는 것이 다수설로 되었다. 따라서 소노부에서 계루부로 고구려 왕실이 바뀐 것은 주몽의 고구려 건국을 가리킨다는 것을 알 수 있다(김현숙, 199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