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건국신화, 기원, 주민 구성 연구
3. 건국신화, 기원, 주민 구성 연구
1980~1990년대 고구려의 건국신화를 통해 왕실의 출자를 파악하려는 연구도 이루어졌다. 광개토왕비와 모두루묘지 등 고구려 당대 사료에서는 북부여출자설, 『삼국사기』에서는 동부여출자설을 제시하고 있는 만큼 각 사료에 나오는 북부여와 동부여의 실체가 과연 무엇이었으며, 시조 주몽 집단이 원래 거주하던 부여는 어디인지를 두고 연구가 진행되었다.
노태돈(1989; 1993)은 본래 주몽의 고향은 송화강 유역의 북부여(부여)로서 5세기 말 고구려에 합병되었고, 동부여는 3세기 말 선비족 모용씨(慕容氏)의 공격을 받은 북부여 일족이 세운 나라로, 광개토왕 대에 고구려에 통합된 것으로 파악했다. 그는 『삼국사기』·『삼국유사』 및 고구려 금석문에 나오는 부여·동부여의 실체는 5세기 당시 고구려인이 의식하고 있던 ‘천하관(天下觀)’을 바탕으로 파악해야 한다고 보았다. 즉 당시 고구려인은 자국을 ‘중(中)’으로 보는 입장에서 고구려의 북쪽에 있는 나라를 북부여, 동쪽에 위치한 부여를 동부여라 생각했다고 본 것이다.
박경철(1994)도 고구려 건국 당시 동부여실재설과 주몽의 동부여출자설에 회의적인 입장에서, 길림(吉林) 지방을 중심지로 하는 북부여가 곧 주몽의 출자지인 부여라고 보았다. 박경철은 기원전 1세기 후반에 새로운 건국 주도 세력으로 등장한 주몽 집단을 한 세대 전 이 지역에서 잠깐 부여 방면으로 강제 퇴출되었던 해모수 및 유화 집단에 맥락을 대고 있는 맥계의 전사집단으로 보기도 했다(1996; 1998).
이와 달리 서영수(1988)는 고구려의 건국 당시 계루부의 고지(故地)로 비정되는 두만강 유역에 동부여가 실재했던 것으로 보았다. 그는 추모와 유리 등으로 대표되는 계루부가 왕위계승전 끝에 이탈하자, 동부여는 점차 쇠약해지다가 대무신왕에게 정복되어 기원전 1세기경에는 이미 유력한 정치세력이 아니게 되었다고 보았다. 또 고구려 광개토왕이 410년에 원정한 동부여는 285년 모용씨에 의해 북부여가 망하자 그 잔류세력이 친연관계에 있던 동부여의 고지로 옮겨옴으로써 성립된 것으로 보고, 494년 부여 왕의 내항(來降)을 동부여의 멸망과 연계시켜 이해했다.
이도학(1991)은 길림시 일원의 원부여(原夫餘)가 346년 모용씨에 의해 소멸된 후 북부여·동부여라는 방위명 부여국이 성립되었는데, 북부여는 농안(農安) 지역에, 동부여는 두만강 하류 지역에 각각 존재했던 것으로 보았다. 또 송호정(1997)은 동부여는 동해안 일대에 실재했던 국가가 아니라 원부여(북부여)의 동쪽에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보았다. 송눈평원(松嫩平原) 지역을 중심으로 분포하던 원부여 세력과 달리, 길림 일대를 중심으로 서단산(西團山)문화를 조영하면서 발전하던 예족 세력이, 송눈평원 일대 예맥족계의 한 갈래가 이주해 와 새롭게 성장하자, 이를 동부여라 불렀다고 본 것이다.
이 시기 한국 학계에서는 고구려 종족에 대한 관심이 이전에 비해 옅어졌다. 사서에 나오는 기록을 분석한 결과, 고구려 종족은 맥족 혹은 예맥족이라 지칭되는 존재라는 데 의견 일치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이옥(1984)은 예족과 맥족이 중국 산서성·하북성 방면에 각각 거주하다가 점차 동으로 이동해 온 것으로 보았다. 그는 기원전 3세기 무렵 길림의 장춘, 농안 방면에 먼저 정착해 있던 예족이 맥족에 밀려 남천(南遷)하였다가 다시 고조선에 의해 쫓겨났는데, 이들이 『한서』 권6 무제기(武帝紀)에 등장하는 예군남여(濊君南閭) 집단이라는 것이다. 이 예의 일부가 맥족에 흡수되어 기원전 2세기 무렵 새로운 종족인 예맥이 성립했는데, 이들이 바로 고구려족이라고 보았다.
유 엠 부찐(1986)은 고조선 주민 구성의 토대는 알타이어족인 예와 맥이며, 이 중 맥족은 그 서쪽 지역인 요서 지역, 요하 중류의 분지, 요동반도, 한반도의 북서 연안지역에, 예족은 그 동쪽 지역인 길림 지방의 남쪽 지역, 한반도의 북쪽 나머지 지역에 거주한 것으로 보았다. 그는 이런 종족 간의 혼합이 요령 지방 동부와 압록강 중류 및 하류 계곡을 접맥(接脈)지대로 하여 이루어졌고, 그 결과 새로운 인종명인 예맥(濊貊)이 나타났다고 설명했다.
정한덕(1990)은 미송리형 문화를 이루었던 사람들을 혼하(渾河), 태자하(太子河), 압록강 중·하류 지방의 맥계 민족으로 파악했다. 그는 요하 중·하류 유역부터 청천강 이북까지 지역은 기원전 천년기 전반대에서 늦어도 기원전 3세기대에 이르기까지 중원문화와 구별되는 독자적 문화를 가지고 있었던 곳으로, 고구려족-맥족 계통의 활동범위였던 것으로 보았다.
여호규(1996)는 고구려의 종족적 기원에 대해 기존의 견해를 정리하고, 그 족원을 예족에서 분화한 것으로 보았다. 그는 고구려를 이룬 주민집단은 원래 예족 혹은 예맥족의 일원이었다가, 기원전 3세기~2세기 초 무렵 철기문화를 바탕으로 주변 예맥사회와 구별되는 주민집단을 형성했고, 기원전 2세기 후반경부터 독자적인 정치세력으로 성장했는데, 이 주민집단은 처음에는 구려라 불리다가 이후 고구려라는 국가명으로 고정되었고, 기원을 전후한 시기부터 점차 맥이라는 종족명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이해했다.
이러한 여호규의 견해는 현 한국 학계의 보편적인 인식이라 볼 수 있다. 즉 고구려는 예, 예맥, 맥족으로 지칭되었으며, 이들은 부여, 동옥저, 예 등과 동일 종족 내의 지파로서 거주지역이 달랐고, 문화 성격 면에서 약간씩 차이가 있었기 때문에 각기 다른 명칭으로 불렸다는 것이 일반적인 인식이다.
노태돈(1998)은 종래의 예맥 문제 연구성과를 주민이동론과 분포설로 분별하고, 이를 비판적으로 보았다. 그는 고구려를 세운 족속으로 거론되는 선진 문헌의 맥족은 고대 황하 유역 주민들이 그 북방의 족속을 지칭하던 일종의 범칭이라 보았다. 그는 분포설이 사실이라 할 경우라도, 북중국 방면의 맥족은 한국인의 기원이나 고구려사와의 관계에서 볼 때 별다른 의미가 없다고 설명했다. 또 이동설의 경우 역시 동이족 혹은 맥족의 이동 과정이나 그 결과물이 고고학적으로 논증되어야만 의미가 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고구려의 기원을 찾기 위한 노력은 북중국 방면의 족속 이동을 추구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일단 현재로서는 압록강 유역 적석총의 기원과 관련지어 논의를 진행하는 것이 보다 실효적이라고 지적했다.
한편 북한의 손영종은 고구려의 주민 구성에 대해 논하면서 종래의 고조선·부여·고구려 사람들의 예·맥족 분별론 즉 고구려가 맥족이라는 설을 부인하고, 송화강 유역 남쪽, 요하 유역 동쪽 지역 주민들은 읍루족을 제외하고는 다 신석기시대 이래 기본적으로 같은 문화를 가지고 있던 조선 옛류형사람들의 후손이었으며, 후에 하나의 조선 민족이 된 사람들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고구려의 고조선계승론에 입각해 고조선은 예족, 고구려는 맥족이라고 구분하지 않았다. 그의 이런 인식은 신판 『조선전사2: 고대 편』(1991)에 반영되었고 변함없이 이어지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