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광개토왕비 연구의 새로운 국면
4. 광개토왕비 연구의 새로운 국면
광개토왕비는 4~5세기 동북아시아의 국제정세를 보여주는 금석문 자료로서 오랫동안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이에 따라 광개토왕비문 연구는 한국고대사에서 특히 연구성과가 많이 축적된 분야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하지만 고대한일관계사의 일면을 보여주는 이른바 신묘년 기사에 연구가 집중됨으로써 비 자체와 비문 내용에 대한 전반적인 연구는 부족한 형편이었다. 광개토왕비에는 고구려의 건국신화와 천하관, 광개토왕의 정복활동과 왕릉 수묘 관련 상황, 당시 고구려민의 구성, 영역범위, 지방통치 등 당시 고구려의 사회상과 국가 성격을 보여주는 내용이 풍부하게 담겨 있다. 따라서 비문 전체 내용에 대한 정밀한 분석과 함께 다각적인 방향에서의 새로운 검토가 필요했다.
그러나 1970년대까지는 비문의 훼손과 변조 가능성이 제기되어 있는 상태였으므로 비문의 전반적인 내용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기 어려웠다.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광개토왕비의 일부 자구에만 매달리던 연구에서 벗어나 비문의 전체 내용을 구조적으로 분석함으로써 비문에서 신묘년 기사가 차지하는 의미에 대해 재해석한 연구가 이루어졌다(濱田耕策, 1974). 광개토왕비의 ‘정복’ 기사와 ‘수묘인연호(守墓人烟戶)’ 기사를 적극적으로 이용하여 광개토왕의 영토 확장 과정과 그 내용, 고구려의 영역편제방식, 고구려 사회를 구성하는 다양한 종족집단과 그들의 존재양상 등 여러 문제에 대한 고찰도 이루어졌다(武田幸男, 1979).
이러한 새로운 방면에서의 연구로 인해 1980년대부터 광개토왕비 연구는 전환기를 맞이했다. 1980년에서 2000년까지 이루어진 광개토왕비 관련 새로운 연구는 비문에 나타나는 4~5세기 고구려의 천하관, 광개토왕의 정복활동 및 영역 확장, 수묘인(守墓人)과 수묘제(守墓制) 등 다양한 방면에서 진행되었다.
천하관에 대한 연구(양기석, 1983; 노태돈, 1988; 武田幸男, 1989)의 경우, 광개토왕비문을 통해 당대 왕권의 위상과 그 현실적 기반을 태왕권(太王權)과 고구려 천하관이란 시각에서 접근했다. 그리고 태왕과 노객(奴客)의 군신관계(武田幸男, 1981), 태왕국토(太王國土)라는 영역적 기반(노태돈, 1989), 태왕과 민의 관계(임기환, 1996b), 태왕의 대민관(김현숙, 1999b), 5세기 고구려를 중심으로 한 국제사회의 범위와 그 내부에서의 차등성을 보여주는 속민의 존재(김현숙, 1996) 등 새로운 방향의 연구가 진행되었다.
광개토왕이 벌인 정복전쟁의 내용과 성격, 구체적인 지명 비정, 영역 및 세력권 확장에 대한 연구도 이루어졌다. 천관우(1980), 서영수(1982; 1988), 이도학(1988), 공석구(1991), 이인철(1996), 다나카 도시아키(田中俊明, 1996)의 연구가 이에 해당한다. 이러한 연구를 통해 광개토왕 대에 서쪽 방면으로 요동 지역을 완점했고, 북쪽 방면으로 북부여, 동북쪽 방면으로 목단강과 연해주, 남쪽 방면으로 한강 이북선까지 영역이 확장되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1980년대와 1990년대 광개토왕비 연구에서 가장 주목되는 점은 수묘인과 수묘제에 대한 연구가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는 것이다. 이 시기에 집중적으로 이루어진 연구는 이후 2012년에 집안고구려비가 발견되고 고구려 수묘제 및 두 비석의 성격과 비문 내용을 둘러싸고 심도 있는 연구가 진행될 때 중요한 토대가 되었다.
수묘인 관련 사료의 사회사적 가치에 주목하고 이를 중점적으로 다룬 연구는 다케다 유키오(1979)에 의해 먼저 이루어졌다. 그는 광개토왕비의 정복 기사와 수묘인연호 기사를 적극적으로 이용하여 광개토왕의 구체적인 영토 확장 과정과 그 내용, 고구려의 영역편제방식, 고구려 사회를 구성하는 다양한 종족집단 및 그들의 존재양상 등 여러 문제를 고찰했다. 그리고 고구려에서 수묘인의 차출상황과 수묘제 수행방식, 수묘인의 성격 등에 대해서도 살폈다. 이 논문은 이후 시기 수묘인과 수묘제 연구에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했다.
수묘제 문제를 전론으로 다룬 최초의 논고는 북한 학계에서 나왔다. 손영종(1986)은 고구려에서 수묘인의 신분과 수묘역(守墓役)의 수행방식 등에 대해 본격적으로 살폈다. 그 다음 해에 남한 학계에서 수묘인 연호 관련 기록을 보다 세부적으로 분석하여 광개토왕과 장수왕 대 수묘인의 사회적 성격과 수묘제의 개혁 등을 당시 고구려의 정치적, 사회적 변화와 관련지어 검토한 석사학위논문(김현숙, 1987)이 나왔다.주 004
이후 고구려 수묘제의 변화와 수묘인의 성격, 광개토왕비의 성격, 고구려의 대민편제방식 등에 대해 살핀 비중 있는 논고가 연이어 발표되었다(조인성, 1988; 임기환, 1994; 이성시, 1995; 門田誠一, 1995; 이성시, 1996; 이인철, 1997). 이로 인해 수묘제 연구는 더욱 심화되어 고구려 사회의 내부구조와 신래한예(新來韓穢)와 구민(舊民), 국연(國烟)과 간연(看烟)의 성격, 수묘제 정비 시기와 내용, 광개토왕비에 표기된 수묘인이 소속된 왕릉 등 다양한 주제가 검토되었다. 이로 인해 이를 활용한 사회사 관련 연구가 보다 활성화될 수 있는 기반도 마련되었다.
이처럼 고구려의 수묘제와 수묘인에 관한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면서 연구자 사이에 견해차가 드러나게 되었다. 광개토왕비에 나오는 “신래한예”는 광개토왕의 정복활동으로 고구려 영역에 편입된 백제 지역 출신자이고, “구민”은 이전부터의 영역 확장 과정에서 편입된 지역의 주민으로 모두 복속민 출신이라는 데 대체로 동의했다. 하지만 구민에 대한 이해에는 차이가 있다. 즉 비문에 나오는 구민은 일반적인 복속민이 아니라 수묘의 법칙을 알고 있는 존재로서 광개토왕 이전 시기부터 왕릉 수묘역에 종사해 온 수묘인으로 보는 설이 있다(김현숙, 1987; 조인성, 1988; 이인철, 1997). 이 경우 비문에 나오는 “구민리열(舊民羸裂)”이란 구절을 기존 수묘인의 약화를 일컫는 것으로 보아, 결원이 생기고 조직이 흐트러진 기존 수묘인들을 장수왕 즉위 초에 정리하여 110가로 재편해 신래한예 220가와 합쳐 새로 수묘인연호 330가를 편성했다고 이해했다. 그러나 임기환, 조법종은 구민리열을 전체 구민 일반의 상황을 가리키는 것으로 본 박성봉(1985)의 견해에 따라 구민과 신래한예의 농업생산력 차이가 수묘인 교체의 배경이 되었던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임기환도 언급했듯이 구민과 신래한예의 경제적 기반이나 농업생산력의 차이가 구체적으로 논증되지 않은 현 상태에서는 쉽게 동의하기 어렵다.
국연과 간연의 실체에 대해서는 이전 시기에 이미 주목한 연구가 있었다. 박시형(1966)은 이를 고려나 조선의 병역제도와 선상노비제도 및 각종 국역(國役)에서 보는 호수·봉족과 같은 관계로 규정하고, 왕릉 수묘에서 국연이 주된 복무를 수행하고 간연은 국연의 복무를 각 방면에서 보좌해주는 임무를 담당한 것으로 보았다. 다케다 유키오(1979)도 국연은 수도나 왕묘가 있는 국강상(國罡上)에서 수묘역이란 국가적 노역에 종사하도록 지정된 사람이며, 간연은 왕묘의 간수(看守)·간시(看視)·간호(看護)를 담당한 사람이라고 규정했다.
이와 달리 경철화(耿鐵華, 1984)는 국연이 근교를 포함한 도시와 도읍에 거주하는 성민(城民) 출신으로 주로 수공업 생산과 가공에 종사하던 사람임에 반해, 간연은 심산유곡에 거주하던 곡민(谷民)으로서 주로 농업과 어렵생산을 영위하던 사람이라 하여 거주환경과 직업에 차이가 있었던 것으로 보았다. 손영종(1986)은 국연은 부유하여 수묘역 한 몫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고, 간연은 그렇지 못하여 열이 하나로 합쳐 한 몫을 하는 사람이라 보았다. 김현숙(1987; 1989)은 국연은 국가적인 노역인 수묘역을 책임지고 수행해 나갔던 존재이고, 간연은 ‘간(看)’자의 뜻 그대로 능을 간수(看守)하는 실질적인 노역을 직접 행하는 존재로 보고, 국연과 간연 사이에 일단의 계층차가 존재했다고 보았다. 조법종(1995)은 국연은 국강상에서 수묘역을 직접 수행하였고 간연은 본래 거주지에서 수묘역 수행에 필요한 제반 경비를 조달한 것으로 보았다.
수묘역 수행방식에 대해서는 국연 1가와 간연 10가 총 11가로 구성된 노동조가 수묘역의 기초적인 노동단위였다고 보고, 이들이 일정량의 노역을 책임지고 행하거나, 몇 개의 노동조가 합쳐 1기의 왕릉을 각각 책임지고 관리하는 식으로 수행해 나갔을 것으로 본 설(김현숙, 1987; 1989)과 구민 수묘호 1조와 신래한예 수묘호 2조(총 33호)가 한 조가 되어 합동으로 수묘역을 수행했을 것으로 본 설(조인성, 1988), 66호씩 5개 부대로 나누어져 3개 부대는 소수림왕릉, 고국양왕릉, 광개토왕릉의 3기 능의 수묘역을 이행하고, 나머지 2개 부대는 기와나 벽돌을 굽는 노역에 동원되는 형태로 운영되었다고 추정한 설(이인철, 1997)이 있다.
수묘인의 사회적 위상은 고구려 사회의 내부구조와 성격의 일면을 보여 주는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1970년대 후반 이래 여러 학자들의 관심 대상이 되었다. 수묘인의 신분에 대해서는 매매의 대상이 되었다는 점에서 노예로 보는 설(勞幹, 1929; 백남운, 1933; 왕건군, 1984)과 군역을 면제받는 대신 당번이 되면 수도에 올라가 역을 수행했던 농노적 성격을 띤 양인(良人)으로 보는 설(김석형, 1974; 耿鐵華, 1984; 孫永鐘, 1986; 임기환, 1994)로 크게 나눠졌다. 하지만 수묘인의 사회적 위상이 일반 자연촌에 거주하는 민보다는 낮고 노예보다는 다소 높았던 특수직역인집단이라고 보는 설(김현숙, 1987; 1989; 이인철, 1997)과 발해의 부곡(部曲)과 유사한 존재일 것으로 보는 설도 있다(조인성, 1988).
수묘인의 사회적 위상이나 신분이 어떠했느냐는 수묘역의 성격을 어떻게 보느냐 하는 점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에 대해서는 국강상에 살면서 고정적, 세습적으로 특수역인 수묘역을 수행했던 것으로 보는 논자(노예제론자, 김현숙, 이인철, 조인성)와 지방에 거주하면서 순번이 돌아오면 국강상으로 올라와 일반 국역의 하나인 수묘역을 수행했다고 보는 논자(양인론자)로 크게 양분되어 있는 가운데 국연은 국강상에서 수묘역을 수행하고 간연은 지방에 거주하면서 그에 필요한 경비를 조달했다고 보는 설도 있다(조법종, 1995).
광개토왕비에 기록된 수묘인의 소속에 대해서도 의견이 나눠져 있다. 이에 대해 330가의 수묘인이 고국원왕, 고국양왕, 광개토왕 세 왕의 능에 소속되었다고 본 하마다 고사쿠(浜田耕策, 1982)와 소수림왕, 고국원왕, 광개토왕릉을 수묘했다고 본 이인철(1997)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학자들이 광개토왕릉만 수호했다고 보았으나, 집안(集安)에 조영된 고구려 왕릉 전체를 관리했다고 보는 설도 있다(김현숙, 1987; 1999).
수묘인에 대한 내용이 비문의 상당수를 차지한다는 점에서 광개토왕비의 건립 목적과 비의 성격에 대해서도 이전 시기와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는 설이 제기되었다. 이에 대해 1970년대까지는 능비(陵碑)나 훈적비(勳績碑)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수묘인에 관심을 두면서 광개토왕비 설립에 수묘연호에 관한 율령을 공시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고 보는 설이 나왔다(김현숙, 1987). 비문의 내용과 설치시기, 비석을 세운 현실적인 필요성 등에서 어떤 점을 더 우선시하느냐에 따라 견해가 달라지게 된다. 그러나 사실상 광개토왕비는 이 모든 성격을 종합적으로 가진 비석이다. 어느 하나의 성격과 기능만 가진 비석이라고 보는 것은 오히려 문제가 있다. 능비나 훈적비로만 보는 시각이 지나치게 강했으므로 비 건립 당시의 현실적인 목적에 주목하는 연구가 나왔던 것이다(김현숙, 1987; 1989; 李成市, 1994).
이 시기에도 신묘년 기사에 대한 관심은 계속되었다. 서영수(1996)는 신묘년 기사에서 판독이 어려운 글자를 추정하는 작업을 했다. 김영만(1980)은 신묘년 기사를 고구려가 바다를 건너와 백제를 깨뜨리고 신민(臣民)으로 삼았다고 해석했다. 천관우(1979)는 파(破)를 고(故) 또는 인(因), 시(時), 이(而)로 고쳐보고, ‘이위신민(以爲臣民)’의 주체는 백제, 객체는 신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편, 전 시기에 광개토왕비의 훼손과 비문 변조에 대한 논쟁이 격렬히 진행되었는데, 그에 대한 검증 노력의 일환으로 이 시기에 석회가 발리기 전에 뜬 광개토왕비 원석 탁본에 대한 조사와 연구 및 집성 작업이 활발히 진행되었다. 그 결과 한중일 삼국에서 주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다(武田幸男, 1988; 徐建新, 1994; 林基中, 1995). 이는 이후 시기 광개토왕비 연구가 안전한 토대 위에서 진행될 수 있게 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