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대외관계, 유민 및 기타 연구
5. 대외관계, 유민 및 기타 연구
고구려의 대외관계에 대한 연구는 크게 두 갈래로 나눠볼 수 있다. 하나는 중원 왕조와 북방 유목국가, 왜 등 한반도를 둘러싼 정치세력과의 관계이고, 다른 하나는 백제, 신라와의 관계다.
먼저 전자에 대해 살펴보면, 고대 동아시아세계의 국제관계를 설명하는 논리로 중국의 전통적인 중화사관에 입각한 조공책봉론과 1970년대에 제시된 책봉체제론 등이 제시되어 있었다. 이를 고구려사에 적용하면 고구려가 중국에 조공하고 책봉을 받은 왕조였다는 점에서 중원 세력에게 일방적으로 좌우되었다고 규정하게 된다. 예컨대 미사키 요시아키(三崎良章, 1982)는 북위의 화북 통일 이후 고구려는 북위의 번병(藩屛)이 되었고 그 지위는 다른 나라에 비견할 수 없을 정도로 일관되고 안정되었다며 북위 중심의 번병설을 주장했다. 그리고 기토 기요아키(鬼頭淸明, 1984)는 고구려의 국가 형성에 있어서 국제적 조건을 중요하게 살폈다.
그러나 고구려의 역사 전개 과정에서 중국과의 대외관계사를 살펴보면 시기와 상황에 따라 오히려 고구려가 동아시아 국제관계를 능동적으로 활용하는 측면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노중국(1986)은 국제적 조건이 국가의 성립, 형성 과정에 관여하는 정도는 하나의 원칙으로 일반화하여 말할 수 없으며, 개별 국가의 구체적인 역사적 조건에 의해 생성된 외적 계기에 대한 반향이 국제적 조건에 미치는 역파동의 영향도 다각적으로 고려되어야 할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듯이, 남북조시기와 수·당시기의 중원과 고구려의 관계는 성격이나 내용에서 큰 차이가 있다. 신형식(1981)은 5세기 중엽 이후 고구려와 북위 사이에 외형적인 조공관계가 성립된 것으로 보았다. 이에 서영수(1981)는 한중 사서에 사행의 대다수가 조공사로 표현되어 있는 것은 중국인의 화이관에 의한 조공의 이중구조적 개념에서 발생한 것이라며, 삼국과 남북조와의 조공관계는 일반적인 외교관계로 봐야 하고 전형적인 조공관계의 성립은 수·당제국이 출현하여 물리적 힘으로 신속(臣屬) 거부에 대한 응징이 본격화되면서 비로소 그 초기적 양상이 나타난다고 보았다. 서영수는 이 시기 고구려의 대중국교섭을 장수왕의 평양 천도 이전까지의 대북조 교섭, 천도 이후 문자왕 대에 이르는 시기의 대남북조 양속(兩屬)외교, 안장왕 이후 삼국 정립기의 외교로 구분하고, 고구려의 남북조에 대한 양속외교는 중국에 대한 조공관계라기보다는 광개토왕 대부터 전환된 남진책의 외교적 배경이라고 파악했다. 즉 한중 간의 조공관계가 조공제도의 이념 그대로 현실에 작용하지 않았음을 지적한 것이다.
노태돈(1984)은 5~6세기의 고구려는 중국의 남북조와 각각 관계를 맺어 양자를 견제하고 북방 유목세력인 유연과 교류하면서 독자적인 세계를 형성했다고 보았다. 이에 따라 5세기 중엽 동아시아 국제질서를 고구려, 유연, 남조, 북조 4강이 상호 견제와 승인 위에 세력균형을 이루고 있어 어느 한 세력이 다른 세력을 공격하거나 균형을 깨뜨리기 어려운 상태였다고 설명했다. 당시 고구려는 동아시아 국제사회에서 독자적인 천하를 구축하고 자주적이고 능동적인 외교활동을 벌이는 등 국제적 위상이 높았는데, 이는 바로 4강의 세력균형이라는 상황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보았다. 노태돈(1989)은 또 고구려인, 발해인과 내륙아시아 주민 간의 교섭에 대한 연구를 통해 고구려 때 구축된 대외교류가 발해시기까지 이어졌음을 밝혔다.
고구려와 수·당과의 관계 및 전쟁에 대한 연구는 조공 기사와 말갈을 중심으로 고구려와 수·당과의 관계를 정리한 연구(김선욱, 1984; 1985)가 있고, 수·당과 고구려 전쟁의 원인에 대해 살핀 논고(강성문, 1996)가 있다. 고구려와 수·당과의 전쟁사를 개괄적으로 정리한 책(서인한, 1991)도 나왔고, 고구려의 요서 공격 원인과 관련 내용을 살핀 연구(이성제, 2000)도 이루어졌다. 하지만 고구려와 수·당과의 대외관계와 전쟁에 관한 연구는 주제의 무게에 비해 많이 진행되지 않았다. 이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2000년대 이후 활발히 진행되었다.
고구려와 백제, 신라의 관계에 대해서는 이후 연구의 기준이 될 중요한 성과가 있었다. 노중국(1986)은 삼국의 대외정책이 지닌 기본 성격을 자주외교, 실리외교, 세력균형으로 파악하고, 삼국이 상호 간 또는 대중국 관계에서 상황 변화나 이해관계 여하에 따라 대외정책을 수시로 바꾸어온 것으로 보았다. 그는 중국 주변 여러 나라의 주체적 측면을 경시한 책봉체제론과 달리 여러 나라의 주체적 입장을 강조하는 역학관계론에 입각해 삼국의 관계 변화를 검토했다(노중국, 1981). 또 고구려의 남하와 백제·신라의 화호(4세기 초~4세기 말), 고구려·신라 대 백제·왜·가야 연합의 대결(4세기 말~5세기 중엽), 고구려의 남진정책 적극화와 백제·신라의 동맹(5세기 중엽~6세기 중엽), 고구려·신라 대 백제의 대립과 신라의 한강 하류 점령(6세기 중엽~6세기 말), 삼국의 상호 항쟁과 대립(6세기 말~7세기 초), 고구려·백제 연합 대 신라·당 연합의 대결(7세기 초~7세기 중엽), 여섯 시기로 나누어 삼국 관계가 어떤 역사적 사건을 겪으며 어떻게 변화되었는지 상세히 살폈다.
다케다 유키오(1978)는 5~6세기에 동아시아 국제관계가 중국이 남북조로 나눠진 가운데 북위-고구려 추축과 남조-백제-왜 추축의 2대 추축권이 성립되었음을 지적하면서, 고구려는 신라와 백제의 연합을 견제하기 위해 신라와 비교적 느슨한 예속인 형제관계를 유지하면서도 전통적인 남하정책을 위압적으로 추구해 나갔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고구려와 백제, 신라와의 관계를 조공-속민관계와 귀왕(歸王)-노객(奴客)관계로 정리했다.
이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에서 서영수(1982)는 귀왕이나 노객은 왕에 대한 귀의복속을 강조한 표현으로서 조공관계와 다른 별도의 예속적 관계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보고, 광개토왕 대의 고구려는 화이정통론에 입각한 차등적인 조공 개념을 통해 정토(征討)를 합리화하는 동시에 그러한 복속지배를 구체화하고자 한 것으로 파악하였다. 그는 광개토왕비에 보이는 조공의 개념은 고구려의 독자적인 대외관계라기보다는 4세기 이후 명분에 입각한 유교문화가 중국을 중심으로 한 주변 제국에 확산되면서 ‘온 하늘 아래 임금의 땅이 아닌 곳이 없다(普天之下 莫非王土)’라는 왕토사상에 입각한 중국적 천하관이 고구려에 반영되어 나타난 것으로 보았다.
삼국의 관계와 관련하여 양기석(1981)은 이 시기 외교관계의 하나로 나타나는 인질에 대해 본격적으로 연구했다. 그는 4세기 중엽에서 5세기 중엽까지는 고구려의 국력이 팽창함에 따라 인질외교는 고구려의 천하관을 반영하는 외교 개념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호영(1982)은 이 시기 려제동맹의 결성에 대해 려제연화(麗濟連和)란 실제상으로 존재한 것이 아니고 신라가 당과 제휴를 도모하는 외교적 교섭 과정에서 교묘한 말로 려제연화설을 당에 전했고, 당이 이를 착각하여 받아들임에 따라 빚어진 허구의 산물이라고 보았다. 그는 고구려와 백제가 실제로 연화하지 못했기 때문에 멸망했다고 설명했다.
한편 고구려 멸망 후 유민의 행방에 관해서는 이병도가 1970년대에 관심을 가진 바 있다(1976). 그는 멸망 후 고구려인의 저항과 그에 대응한 당의 강제천사(强制遷徙)정책에 대해 살폈다. 이후 노태돈(1981)이 고덕무(高德武)의 안동도독 임명을 소고구려국 건국으로 보지 않고, 안사(安史)의 난 이후 요동 지방이 당과 발해의 완충지대가 됨으로써 비로소 소고구려국 건립이 가능했으며, 9세기 전반 선왕(宣王) 대에 발해로 합병되었다고 파악했다. 그는 당 내지(內地)로 옮겨진 유민을 고구려 구지배층·전쟁포로·사민정책에 의해서 변경지대로 천사된 부류로 나누어 이들의 동향과 존재 양태에 대해 검토했다. 또 묵철가한(黙啜可汗)의 사위가 된 고문간(高文簡)으로 대표되는, 집단별 자치를 영위하며 가한에 종속하고 있던 몽골 방면 돌궐로 옮겨간 유민의 삶과 그 문화적 흔적에 대해서도 살폈다.
김문경(1981)은 당의 외민내사책(外民內徙策)과 관련, 고구려의 반당(反唐)세력을 당 내륙으로 이치(移置)하여 ‘강간약지(强幹弱支)’하는 조치를 취하였으며, 옛 영토에 대한 직접지배를 관철하고자 했다고 보았다. 또 당이 대고구려 유민정책이 실패한 후 기미통치(羈縻統治)를 꾀하다가 다시 유민을 내륙으로 천사시켜 치주편호(置州編戶)하였다고 보았다. 그는 당의 이민족에 대한 개방정책 결과 많은 외민(外民)이 무장으로 기용되어 당 제국의 질서유지에 이용되었음을 지적하였다. 서병국(1982)은 고구려와 동돌궐의 기존 관계가 계기가 되어 유민의 동돌궐 망명이 가능했다고 보았다. 그는 고문간·고공의(高拱毅) 등이 당으로 투항하게 된 배경을 고구려 유민이 동돌궐에서 독자적 활동이 불가능해진 점에서 찾기도 했다.
이외에 김기흥의 고구려 조세 관련 문제 연구(1987, 1991)와 김영하의 순수제(巡狩制) 연구(1985)와 고구려의 발전과 전쟁 연구(1997), 서영대의 평양 천도 연구(1981), 이경식의 식읍제 연구(1988) 등도 이 시기 고구려사 연구자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었다.
한편, 이 글에서 살펴보지는 않았지만 1990년대에는 고구려 고분벽화 연구가 진행되어 큰 성과를 거두었다(전호태, 1997; 2000). 또 한강과 임진강 유역에서 고구려 유적이 확인되면서 이후 한국 학계에서도 고구려 고고학에 대한 연구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