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1980~1990년대 연구의 특징과 한계
6. 1980~1990년대 연구의 특징과 한계
1980~1990년대는 고구려사 연구에 있어 발전기라 부를 수 있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고구려의 성립과 발전 과정, 그것을 통해 형성된 국가의 성격, 정치체제의 내용과 변화, 영역지배방식, 5세기 고구려의 국내외 위상을 보여주는 태왕호와 건국신화, 신성족으로서 왕족의 자의식, 고구려의 인적 구성, 고구려의 고양된 국제적 위상, 능동적이고 자주적인 대외관계, 멸망 후 유민에 대한 연구까지 다양한 연구가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이 글에서 정리하지는 못했지만, 고분벽화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 고구려 무기와 병종 연구, 산성과 교통로 및 방어체계 연구, 남한 지역 고구려 유적에 대한 본격적인 조사 및 연구 등 이전 시기에는 거의 이루어지지 못했던 연구도 심도 있게 진행되어 주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이로 인해 고구려의 역사와 문화가 보다 구체적으로 밝혀지게 되었다.
이와 같이 이 시기에 고구려 역사와 문화에 대한 연구가 심화되고 확산될 수 있었던 것은 이전 시기부터 진행해 온 국가 형성 문제와 초기국가의 성격, 한국사의 시대구분 등 근본적인 주제에 대한 심도 있는 고민과 토론이 밑거름으로 작용했다. 또한 『삼국사기』, 『구삼국사』, 『삼국지』 동이전 등 문헌사료에 대한 깊은 연구가 이루어졌고, 고대사 연구의 기본자료인 금석문 자료를 집대성하여 자료집을 발간했으며, 『삼국사기』 역주작업이 진행되어 결과물을 전집으로 발간하는 등 고구려사를 포함한 한국고대사 연구의 기반을 다져놓았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연구기반을 발판으로 1980년대와 1990년대에는 고구려사의 전체적인 면모를 밝히고 복원하는 데 집중했다. 특히 1980년대에는 소수의 고구려 연구자들이 연구를 진행했던 것에 비해, 1990년대에는 연구자의 수가 확대됨으로써 여러 분야에 대한 연구가 더 활발히 이루어질 수 있었다.
그러나 199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는 문헌사학계의 연구가 약간 소강상태에 들어갔다. 물론 이 시기에도 주목할 만한 논문이 꾸준히 발표되었지만, 새로운 분야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기보다는 기존 연구를 보완하거나 재검토하는 작업이 주류를 이루었다. 무엇보다 신진 연구자의 수가 별로 증가하지 않았다는 점이 이 시기의 고구려사 연구 분위기를 잘 보여준다. 어쩌면 한 차례의 폭발적인 진전 다음에 오는 숨고르기 단계로 해석할 수도 있다. 아무튼 이때 고고학과 문헌사학으로 분류가 가능할 정도로 고구려사 연구의 공간이 확대되었다는 점에서 소강상태였다고만 평가할 수는 없을지도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이 시기의 연구로 인해 불투명했던 고구려사의 이런저런 모습이 보다 선명해졌다.
가장 중요한 성과는 이 시기의 활발한 연구활동으로 인해 고구려사 가운데 어떤 부분에 대한 연구가 더 필요한지, 어떤 점에서 시각의 전환이 필요한지 등 향후 보완하고 수정해야 할 부분이 드러났다는 것이다. 이로써 이후 더 세부적인 연구를 진행해 갈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그런 한편 그동안 고구려에 크게 관심을 가지지 않고 있던 중국 학계에서 1990년대 중반 이후 고구려사 연구결과물이 집중적으로 발표되었다. 이는 2002년에 진행한 이른바 동북공정의 전초작업이 이 시기에 시작되었음을 보여준다.
이 시기 중국 학계 고구려사 연구의 주된 관심대상은 고구려사의 귀속 문제였다. 그때까지 중국 학계는 고구려사에 대해 첫째, 중국 북방의 소수민족 역사로 파악하는 견해, 둘째, 현재 중국 영토에 속하는 평양 천도(427) 이전의 고구려사는 중국사이고, 천도 이후는 한국사에 속한다고 본 일사양용설(一史兩用說), 셋째, 고구려사를 고대 한국사로 보는 세 입장이 있었다. 이 시기까지만 해도 이 중에서 두 번째 시각으로 보는 연구자가 많았다. 하지만 중국의 동북 지역과 한반도의 정세가 변화된 1990년대 중반 이후부터 고구려사를 중국사로 보는 입장이 주류가 되었다.
중국 학계에서는 고구려사가 중국사에 속한다는 논리를 입증하기 위해 다음 여섯 가지 주제를 집중적으로 연구했다.
첫째, 고구려의 종족 기원과 건국 과정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졌다. 1990년대 전반까지만 해도 중국 학계에서는 장박천(張博泉, 1985)의 견해에 따라 고구려를 건국한 종족은 맥이고, 맥이 곧 예, 예맥이라고 보는 것이 다수설이었다(孫進己, 1987; 孫玉良·李殿福, 1990; 李殿福, 1993; 劉永智, 1994; 王綿厚, 1997; 魏存成, 1997). 부여기원설도 중국 학계의 전통적인 학설이었다(金毓黻, 1941; 王健群, 1987a; 楊昭全, 1993; 金岳, 1994). 이 가운데 왕건군의 경우 부여족을 예맥족과 계통을 달리하는 퉁구스어족인 숙신의 후예로 말갈, 여진과 동일 계통이라 본 점에서 다른 부여기원론자와 인식상 차이가 있다. 그러나 예맥과 부여기원설은 사서에 기반한 전통적인 시각이다.
그런데 1990년대 중반 이후 고구려를 구성한 종족이 중원에서 왔다고 보는 주장이 나왔다. 그중 하나가 고구려 선조가 상인(商人)에서 분리되어 나온 고이족(高夷族)이라는 설이다. 이 주장은 『일주서(逸周書)』 왕회(王會) 편에 나오는 “고구려는 일명 구려라고 하는데, 옛날의 고이이다”라는 공조(孔晁)의 주석에서 나왔다. 김육불(金毓黻)의 『동북통사(東北通史)』에서도 이 점을 간단히 서술했으며, 강맹산(1983), 왕면후(1987)도 고이에 관한 언급을 한 바 있다. 하지만 1980년대까지만 해도 종족의 먼 기원 문제에는 별반 관심을 두지 않았고, 압록강 중류 유역에 이전부터 살던 토착민과 부여에서 내려온 주몽 집단이 결합해 고구려를 건국했다고 보는 입장이었으므로, 고이에 대해서는 이름만 잠시 거론했을 뿐 논증하지는 않았다. 이 설의 가장 적극적인 주도자는 유자민(劉子敏, 1996)이다.
양지룡(梁志龍, 1996)은 전욱의 아들이 세운 계우지국(季禺之國)과 구려(句麗)의 음이 동일하고, 난생족(卵生族) 신화, 모우(毛羽) 습속, 조우삽관(鳥羽揷冠) 풍습 및 귀신숭배사상 등의 공통점이 있다며, 고구려를 전욱고양씨((顓頊高陽氏)의 후손이라고 했다. 이는 고이의 선대가 중국 전설상의 황제인 전욱고양씨라며, 전욱고양씨-고이-고구려로 이어지는 계보를 설정한 견해로 고이족설의 확대재생산이다. 이후 장벽파(張碧波, 1999)도 이전 견해를 수정하여 전욱고양씨를 고구려의 선조로 보는 설을 내놓았다.
상인(商人)기원설도 제기되었다. 범리(范梨, 1993)는 고구려의 선조는 상인에서 분리되어 나왔다며, 그 근거로 5방(方) 개념, 국인(國人,城民)과 야인(野人, 谷民)의 구분, 왕위의 형제계승, 사유재산제와 귀족제, 백색(白色) 숭상, 귀신 숭배 등 문화의 유사성을 들었다.
이 외에 중국 산동 지역으로부터 압록강 중류 일대로 이주한 염제족의 한 지파가 고구려인이라고 본 견해도 나왔다(李德山, 1992; 1996).
둘째, 고구려와 중국 간의 조공책봉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졌다. 중국 학계에서는 자국의 역사를 서술할 때 명분상, 자구상의 조공책봉이라는 관계와 실질적인 상황을 구분해서 파악한다. 하지만 고구려와의 관계에 대해서만은 조공하고 책봉을 받았으므로 지방정권이었다고 이해하였다(那炎, 1999; 康德文, 1997; 2000; 徐貴通, 1996; 徐德源, 1999; 孫玉良·李殿福, 1990b; 孫進己, 1994; 孫泓, 1999; 劉永智, 1995a; 劉子敏, 1995; 1996; 1999; 劉厚生, 1999).
셋째, 평양 천도 이후 고구려사의 귀속 문제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었다. 중국 학계에서는 “현재의 중국 땅 안에 속하는 모든 지역의 과거사는 모두 중국사”라는 ‘통일적 다민족국가론’에 입각해 역사를 서술하고 있다. 그런데 이에 따르면 평양 천도 이후의 고구려사와 이전의 고구려사를 분리해 보아야 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이 때문에 일사양용설이 나오게 되었다(姜孟山, 1999). 하지만 동북공정이 본격 가동되면서는 평양 천도 이후 고구려사도 중국사에 속한다고 보는 것이 전체적인 입장이다.
손진기(孫進己, 1995)는 한반도에서의 고구려사 기간이 427년부터 668년까지 241년인 데 비하여, 중국 영토 즉 중국사로서의 고구려사 기간은 기원전 37년부터 427년까지 464년이나 되어 2배가량이나 되고, 고구려 땅의 3분의 2가량이 현 중국의 영토 안에 있다면 고구려사는 중국사라고 강조했다. 또 유영지(劉永智, 1995a)는 고구려의 첫 번째 수도인 흘승골성과 두 번째 수도인 국내성이 현재 중국 영토에 있고, 세 번째 수도인 평양은 역사적으로 한의 관할범위에 있었기 때문에 고구려사는 당연히 중국사에 포함되어야 한다고 했다.
넷째, 고구려의 대수·당전쟁의 성격을 파악하는 연구가 이루어졌다. 고구려가 중국의 지방정권이었고, 고구려 왕은 황제의 신하였다고 보는 입장에 따라 고구려의 대수·당전쟁에 대해서도 국제전이라 보지 않고 중국 내부의 통일전쟁이라고 보았다(孫玉良·李殿福, 1990b). 중국 학계에서는 중화주의적 시각에 따라 전쟁의 명분으로 삼기 위해 발표한 수 문제와 양제, 당 태종의 조서를 자구 그대로 받아들여 책봉에 의한 수·당과의 신속관계를 깨뜨린 고구려의 잘못을 응징한 것이라고 수·당의 고구려 침략에 당위성을 강조했다(楊春吉, 1996). 그리고 고구려에 대한 수·당의 정벌은 국가 사이의 전쟁이 아니라 중원 통일정권이 지방정권의 이탈을 막고 본래의 영역을 확보하기 위해 벌인 중국 국내의 통일전쟁자 민족전쟁이지, 침략전쟁이 아니라고 규정했다(張春霞, 1999).
다섯째, 고구려 유민의 거취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졌다. 중국 학계는 고구려 멸망 후 그 주민의 상당수가 중국으로 들어가 한족으로 흡수되었기 때문에 고구려사는 중국사에 속한다고 보았다. 손진기(孫進己, 1982; 1984)는 일찍부터 다수의 고구려 유민이 한족으로 융입되었으므로 고구려사가 중국사에 속한다고 강조했다. 당시에는 학계의 주목을 크게 받지 못하다가 1990년 중반 이후 주목을 받았다(通化師範學院高句麗硏究所, 1996; 楊春吉·耿鐵華 主編, 1997; 吉林省社會科學院高句麗硏究中心·通化師範學院高句麗硏究所, 1999). 고구려 멸망 후 상당수 사람이 중국 내지로 바로 들어갔고, 일부는 요동에 남아 있다가 발해 건국에 참여하거나 돌궐로 들어갔지만, 이들도 뒤에는 모두 중국으로 들어갔으며(王鐘翰, 1994; 楊保隆, 1998, 孫泓, 1999), 신라는 고구려 유민의 7분의 1만 접수했으므로 고구려를 계승했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劉厚生, 1999).
여섯째, 발해와 고려의 고구려사 계승 문제에 대한 연구를 진행했다. 중국 학계에서는 발해를 고구려를 계승한 자주국으로 보지 않고 “당의 지방정권 가운데 하나였던 말갈국”이었다고 보고 있다. 이는 『신당서』가 발해 건국자인 대조영을 속말말갈(粟末靺鞨) 출신이라 기록해 놓은 것과 말갈이 그 건국세력의 다수를 차지했다는 것을 주요 근거로 삼았다(回俊才·董振興, 1980; 嚴聖欽, 1981; 1982; 楊昭全, 1982; 李殿福, 1981; 王承禮, 1982; 魏國忠, 1982; 姜守鵬, 1982; 莊嚴, 1982; 諸慶福, 1983; 孫玉良, 1983; 許憲範, 1989; 徐德源, 1996).
또 고구려와 고려의 계승관계에 대해 이전복(李殿福)·손옥량(孫玉良(1990)은 “오대(五代)시대에 한반도에서 일어난 왕씨의 고려 왕조 역시 고구려와는 무관하다. 고려는 한족(韓族)인 신라를 주체로 하여 건립된 국가로, 신라의 후계정권이었다”라고 서술했다. 이와 관련된 중국의 입장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학자는 손진기(1994)였다. 그는 고주몽이 세운 고구려와 왕건이 세운 고려는 이름만 비슷할 뿐 서로 계승관계가 없는 타국의 역사라고 주장했다. 고구려와 고려는 본래 족속이 다르다며, 고구려는 중국 역사상의 국가로 중국인의 선조가 세운 나라였으나, 고려는 한국인의 선조인 신라의 후손들이 세운 나라라는 것이다(孫進己, 1994b; 劉子敏, 1999). 이런 주장은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라고 기록한 『송사(宋史)』의 내용과 배치되는데, 이에 관해 이런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송사』에 이렇게 기록한 것 자체가 잘못된 인식에서 비롯된 오류라고 주장했다(孫進己, 1994b; 張春霞, 1999).
이처럼 이 시기의 연구는 중국 학계의 이후 고구려 연구에 방향성을 제시하였다. 이에 따라 2002년 이후 이때 제시된 논리의 보강, 심화, 확산이 이루어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