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정치사 연구
2. 정치사 연구
1) 국가 형성과 초기 정치사
고구려의 국가 형성 및 그 발전 과정이나 지배체제를 이해하는 과정은 초기 정치사 연구의 핵심이기도 하였다. 고구려 초기 정치체제에 대한 견해는 소위 ‘부체제론’와 ‘조기집권체제론’으로 이해되어 왔다. 양자는 계루부 왕권의 집권력과 나부의 자치권을 둘러싸고 견해차를 보였지만, 고구려 초기 정치사에 대한 이해의 폭을 크게 확장시켰다고 할 수 있다. 부체제론은 나부를 자치권을 지닌 단위정치체로 파악하고 왕권과 함께 중요한 정치운영의 주체로 상정하고 있고(노태돈, 2000; 여호규, 2000; 임기환, 2003; 김현숙, 2007; 조영광, 2012), 조기집권체제론은 조기부터 왕권강화와 집권화를 강조하고 나부를 정치운영의 주체로 이해하지 않는다(박경철, 2002; 금경숙, 2004; 이종욱, 2008).
이에 따라 초기 정치체제의 구조와 운영도 서로 다르게 이해하는데, 나부체제론은 왕의 집권력과 나부의 자치권을 조화시키는 방향으로 정치체제가 성립하였고, 제가회의가 중요한 기구라고 이해하고 있다. 조기집권체제론은 왕권을 중심으로 하여 행정적, 관료적 기구가 이른 시기부터 정비된 것으로 보면서 군신회의를 중요한 기구로 보고 있다.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나부체제론과 조기집권체제론은 계루부 왕권이 점차 강화되어가면서 왕권을 중심으로 집권화로 나아갔다는 점은 동일하게 인정하고 있다. 한편 국가 구조와 정치체제에 대한 연구가 서로 분리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라서 양자를 상호 유기적인 연관하에서 고찰할 때 비로소 고구려사의 윤곽이 파악될 수 있다는 지적도 있었다(노태돈, 2000).
이러한 부체제론과 집권체제론은 모두 나름의 약점을 지니고 있는데, 이들 논의의 문제점은 비교적 명확하게 제시된 바 있다. 집권체제론은 나부의 자치권을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중기 이후의 중앙집권체제와 뚜렷이 구별되는 초기 정치체제의 고유한 특징과 운영원리를 간과하게 되었다는 것이고, 부체제론은 나부의 자치권과 정치운영상의 연맹체적 특성을 강조함으로써 국가 성립 이전의 집단 간 통합원리와 초기 정치체제를 명확하게 구분하지 못하였다는 것이다(여호규, 2014). 또한 부체제론은 국가발전단계와 정치체제발전단계의 서로 다른 층위를 구분하지 않았다는 비판도 나왔다(김영하, 2000; 2012).
고구려 초기의 정치체제 이해와 관련하여 관등제의 구성과 운영, 왕권의 위상 변화와 회의체 변천, 좌·우보나 국상 등에 대한 이해도 함께 이루어져 왔다. 고구려의 성립과 당시 사회 구성을 살피는 것은 국가 형성과 정치체제를 이해하는 데 있어 중요한데, 부체제론은 이러한 문제를 이해하는 틀로 제시된 이후 지속적으로 보강된 측면이 있고, 부체제론을 바라보는 시각도 논자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다. 그러나 나부가 고구려 초기사에서 핵심적인 요소임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역사적 요인으로 등장하게 됐는지, 구성과 영역은 어떠했는지에 대해서는 불명확하다. 나부의 등장 배경이나 성격에 대한 구체적인 해명이 이루어져야만 나부체제의 대한 이해가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 초기의 국가 형성, 건국설화와 종족 기원, 정치체제의 구조와 변동, 정치집단, 관등제 등에 관한 연구도 이어졌다(여호규, 2005; 김현숙, 2007; 조영광, 2012; 김종은, 2015; 이준성, 2019; 장병진, 2019; 김성현, 2021; 이규호, 2021). 이러한 연구는 국가 형성과 지배체제나 정치 체제의 변동을 보다 다각화한 입장에서 연구되었고, 세부적으로는 나부의 위치 제시 등 새로운 문제에 기반하여 논의가 진전되었다. 부체제 등과 관련한 기존 논의는 더욱 확장되었고, 부체제론이나 집권체제론을 벗어나 사료 계통성에 관한 모색을 통해 바라보고자 하는 시도도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기존 논의의 틀을 크게 벗어나지는 못한 한계도 있어 보다 세부적인 모색과 구체적인 논증이 있어야 할 듯하다.
한편, 고구려 초기의 왕계는 문헌기록과 금석문기록 등을 통해 검토되었지만, 그 계보와 성립시기 등에 대해 이견이 있다(노태돈, 2000; 김기흥, 2005; 여호규, 2010; 임기환, 2016; 임기환, 2022). 『삼국지』 고구려전에 소노부에서 계로부로 왕실이 교대되었음을 기록하고 있는데,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등에 전하는 고구려 왕계에도 이러한 왕실 교체가 반영되어 있느냐에 관심을 두었다. 고구려본기에 전하는 고구려 왕계는 시조 이래 혈연적으로 단일 계보로 기술되었지만, 이는 의심스러운 면이 있고 왕실의 성씨가 해씨(解氏)와 고씨(高氏)로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종래 이는 혈통적으로 다른 두 왕계가 교체되었을 가능성을 두고 태조대왕의 등장을 왕실이 교체된 결과로 보기도 하였고, 계루부 왕실 내부에서 방계로 왕위계승이 바뀐 것으로 보기도 하였다. 아울러 태조대왕-차대왕-신대왕으로 이어지는 왕계는 형제계승으로 되어 있지만, 이들의 나이, 재위년 등을 보면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또한 중국 사서에 세 왕이 부자 관계로 기록되어 있어서 고구려본기와는 차이가 있다. 아울러 광개토왕비문에 추모왕-유류왕-대주류왕 3명의 왕을 언급하고 광개토왕을 17세손이라고 기록하였는데, 17세손에 대한 해석에 따라 왕계의 구성과 복원이 달라질 수 있다. 그래서 누락된 왕의 존재를 상정하거나 혈연관계 및 재위기간이나 생몰년을 조정하기도 하였으나, 이러한 왕계 복원 방향은 적절하지 않다.
고구려 초기 왕계의 복원 문제는 여러 자료가 서로 다른 내용을 전하고 있어서 왕계의 구성이나 성립과 관련해서 제기되는 여러 문제가 복잡하게 얽혀 있으므로 합리적 해석이 필요하다.
2) 후기 정치사
고구려 후기 정치사는 안장왕 대부터 이어지는 정국의 혼란과 귀족연립체제에서의 정국운영에 대한 다양한 의견이 개진되고 있다. 특히 후기 정치사를 국내계 귀족주변세력과 평양계 신흥 귀족세력의 대결구도를 설정하고 있다(임기환, 2004). 안장왕 대의 고구려 정국은 내부의 불안 요소, 백제와의 대립, 물길과의 대치 상황이 고구려 내부에 불안한 기류를 형성하는 요인이 되었다(김진한, 2010). 이러한 상황에서 안장왕이 졸본에 이르러 시조묘에 친사하고 구휼을 병행하는 일련의 수습책이 주목되었다. 안장왕의 시조묘 친사를 즉위의례적 성격과 순행의 목적이 반영된 것으로 보는 견해(최광식, 2007)를 넘어, 평양 천도 이후 중앙정계에서 세력기반이 위축되어 상당한 불만을 품었던 국내계 세력과 정치적 타협을 모색했을 가능성을 지적하기도 하였다(임기환, 2004; 정원주, 2013; 최일례, 2015). 또한 강성해진 귀족세력에 비해 상대적으로 위축된 왕권의 열세를 만회하기 위한 정치적 노력의 일환으로 보는 견해(조영광, 2008), 대외정책의 기조 변화를 정당화하고 이를 대내외에 선언하기 위한 의도로 이해하기도 한다(강진원, 2018).
안장왕 대 정치세력의 동향과 관련해서는 대외정책의 전개 과정과 맞물려 검토가 이루어졌다. 안장왕과 한씨녀 이야기를 통해, 한씨녀와 연관된 인사들의 수도 5부 편입은 귀족 간 갈등이나 불만을 야기하는 요소가 되었고, 안장왕의 피살과 귀족들 사이의 분쟁으로 이어졌다고 추정하였다(노태돈, 1986). 이후 연구들은 이러한 견해를 받아들여 안장왕 대의 정국을 새로운 정치세력의 유입 및 기존세력과의 갈등 구도 속에서 이해하고 있다.
안장왕의 뒤를 이은 안원왕의 즉위를 둘러싸고는 사서마다 다른 기록이 전하고 있다. 대체로 『일본서기』 계체기25년 12월조에서는 안장왕이 시해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바탕 위에서 안장왕의 피살이 국내계 귀족세력의 동향, 한씨녀 계통 인사들의 중앙 진출과 관련이 있으며, 기존에 억압받았던 대상들과 그에 연계된 정치세력, 그 후손들이 안장왕 시해사건에 관련되었을 것으로 추정하였다(노태돈, 1986; 임기환, 1992; 김현숙, 1999).
2000년대 이후에는 여기서 좀 더 나아가 안장왕의 왕권 회복 노력에 대한 낙랑·대방계 귀족들의 위기감에서 비롯된 시해로 보거나, 후계 구도와 관련해 안원왕이 먼저 안장왕을 시해한 것으로 이해하기도 하며, 안장왕이 약화된 왕권을 일신하기 위해 적극적인 대외정책을 펼치는 과정에서 자신의 정책을 지지해 줄 세력을 규합하고 새로운 지지층을 확보하여 정계개편을 시도하다가 시해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이도학, 2006; 조영광, 2008; 김진한, 2009). 『일본서기』에는 안원왕 대 정치세력으로 추군과 세군이 등장하기 때문에 두 세력의 대립에 대한 관심이 이어졌다(김현숙, 1999; 임기환, 2004; 남무희, 2007; 최일례, 2015; 이동훈, 2016; 최호원, 2020).
영류왕 대 고구려 정국에 대해서는 대외정책과 관련지어 영류왕과 연개소문의 대립축을 중심으로 논의를 해온 이후, 많은 연구자들이 양자의 대립축을 토대로 정국을 분석하였다. 보장왕 대의 정국운영과 관련해서도 연개소문 정변과 정치권력의 구조에 관심을 두고 논의가 진행되었다. 영류왕과 연개소문 간의 대립 원인에 대해서는 사료상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없다. 대체로 왕권을 강화하려던 왕의 의도에 연개소문이 장애가 되었거나, 대당외교정책에서 온건론을 중시하였던 영류왕이 강경론자였던 연개소문과 외교노선에서 차이가 있었을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특히 정국 운영의 주도권을 가진 막리지의 성격을 둘러싼 논쟁이 이어졌다. 막리지는 연개소문 정변 이후 관등과 관직적 성격을 동시에 지닌 관제로 국왕의 근시업무를 담당하는 중리태대형(中裏太大兄)이라고 이해하였다(이문기, 2003).
한편 연개소문 정변 이후 대대로-막리지 중심의 정치운영체계에 기초하는 귀족연립정권의 기반이 무너지고, 대신 태대대로·태막리지 등의 집권적 관직을 신설하고 자신의 아들들을 요직에 등용하는 등 사적 권력을 강화해 나간 것으로 파악하기도 하였다(임기환, 1992). 이와 함께 고구려 후기의 중리관제(中裏官制)에 주목하여 그 구조와 운영에 대한 연구를 함께 진행하기도 하였다(이문기, 2003; 여호규, 2016; 이성제, 2016; 이규호, 2022). 기존에는 중리계(中裏系) 관등을 국왕의 측근세력이나 국왕 근시직으로 파악하는 경향이 강하였지만(이문기, 2003), 기본적으로 관등의 일종이므로 관등제의 운영과 연관시켜 이해하였다(여호규, 20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