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내용 바로가기하단 바로가기
상세검색
  • 디렉토리 검색
  • 작성·발신·수신일
    ~
고구려통사

3. 지방통치와 관방체계 연구

3. 지방통치와 관방체계 연구

1) 지방통치
고구려 왕의 집권력이 강화되면서 중앙과 지방의 성격이 갖추어지게 되었다. 나부체제기에는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한 일원적 지방행정조직이 완비되지는 않았고, 공납을 통한 간접지배의 형태도 존재하였다. 왕권이 강화되면서 성(城), 곡(谷), 촌(村)을 중심으로 한 행정구역이 재편되어 나갔다. 성을 방어와 통치의 거점으로 삼아 활용하였고, 지방관을 파견하기도 하였다. 3세기 말에 보이는 태수, 재 등은 고구려가 성과 곡 등의 중요한 거점에 파견하였던 지방관으로 볼 수 있다. 4세기가 되면 광역 지방관으로 보이는 수사도 나타난다. 왕권을 중심으로 하여 직접적인 지배를 실현하는 방향으로 나아간 것으로 이해된다.
고구려 중기와 후기의 지방통치에 관한 연구는 1990년대 이후 본격화되었고, 2000년 이후에도 연구가 심화된 측면이 있다. 관련된 문헌기록이 매우 적은 상황에서 중국의 고구려 유적 답사를 통해 산성 연구가 많이 이루어졌고, 이에 따른 성의 분포 양상 등을 통해 지방통치의 일면을 살펴볼 수 있게 되었다. 성을 중심으로 중앙에서 파견된 지방관이 거점지배를 하거나 나아가 영역지배 내지는 권역지배로 발전하였다고 이해하고 있으나, 문헌과 금석문이 적은 상황에서 관련된 사료의 정합성 문제로 인해 이견도 큰 상황이다.
중기 고구려의 지방지배에 대해서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의 태수, 재나 금석문에 나오는 수사 등의 성격과 상호관계, 역할에 따라 지방통치의 구조를 달리 이해하고 있다. 이 외에도 지방통치의 단계별 발전 과정, 낙랑과 대방 지역에 대한 지배, 군현제 실시 여부, 옥저와 동예, 말갈 등에 대한 지배방식 등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특히 낙랑과 대방 지역의 지배에 대한 연구가 심화되어 이루어졌다(공석구, 1998; 임기환, 2004; 여호규, 2009; 안정준, 2016; 이동훈, 2016). 고구려가 낙랑군과 대방군 고지를 장악한 이후 이 지역에 대한 행정력을 수반한 직접지배방식은 취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는 이 지역의 특수성을 감안하여 지역의 토착세력 또는 망명인을 배치하여 간접지배하는 방식을 취했던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5세기 덕흥리고분 단계에 가서야 비로소 좀 더 직접적인 지배의 양상을 살펴볼 수 있다.
지방통치제도로서 군현제 혹은 주현제와 관련해서는 5세기 이후 실시 여부를 두고 논란이 있다. 북한 학계에서는 정연한 주군현제를 상정하였지만, 남한 학계에서는 대체로 긍정적으로 이해하는 선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다. 군현제 실시를 인정하는 견해에서도 주군현 조직체계는 인정하면서 행정단위의 명칭은 성이라고 했다고 이해하거나, 일시적으로 군현이란 명칭을 사용했을 것으로 보기도 하고, 군제가 시행된 것으로 이해하기도 하였다. 중국식 군현제나 주현제와 동일한 것은 아니지만, 지방통치단위인 성을 주, 군 등으로 명명하여 지방을 편제하였다거나 그 원리를 활용해서 행정단위를 조정했다고 이해해 온 것이다. 2000년대 들어서도 주군현에 대해 인정하는 연구성과가 지속되었다(최희수, 2009; 홍승우, 2011). 그런데 이와는 달리 고구려 주군현에 대해서는 구체적 사료가 명확하지 않고, 금석문에서도 확정할 만한 증거가 없어서 주군현이 토대가 된 지방제도를 부정하고 있기도 하다. 특히 중앙집권적 지방통치가 고구려 일부에서 진행되었을지는 모르지만 사회 전체에서는 불가능한 것으로 상정하고 있다(정호섭, 2019). 고구려에서 중앙집권적 지방통치의 실상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당시 사회를 어떻게 이해하는가와 밀접한 만큼 보다 미시적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6세기 들어 고구려는 내우외환을 겪으며 혼란이 지속되었는데, 지방도 영향을 받게 되었다. 6세기 이후 고구려의 지방통치와 관련한 사료의 이해를 둘러싼 논란도 계속되고 있다. 고구려 후기 지방통치에서 이견이 많은 부분은 몇 단계로 편제되었나 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제대성-제성-성의 3단계로 이해하고 있지만, 세부적으로는 약간의 차이도 있다. 그렇더라도 고구려 후기에 성을 각기 달리 위상 설정을 한 후에 중앙에서 욕살, 처려근지, 가라달, 루초 등의 지방관을 파견하여 직접적으로 통치했다고 이해하고 있는 점은 동일하다.
후기 지방통치에서 각급 통치단위의 영속관계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다만 멸망 당시 성과 주현의 수를 통해 추정하거나 당과 신라에서 그 조직을 계승했을 것으로 보고 양국이 설치한 행정구역을 통해 고구려의 통치단위 수와 영속관계 등을 추론하고 있다. 고구려 후기의 성 중심 지방통치 연구는 고구려 산성이 군사적 기능과 행정적 기능을 함께 수행한 것에 주목하여 이를 통해 방어체계와 지방통치조직을 파악하는 방향에서 이루어졌다(여호규, 1999; 나동욱, 2009; 임기환, 2015; 이성제, 2016; 이경미, 2017). 이를 통해 산성 간의 영속관계를 검토하고 고구려 지방통치의 일변을 추론하고 있다.
한편, 다종족국가인 고구려에는 고구려인과 성격이 다른 지역민들이 있었기에 그들에 맞는 지배방식을 적용하여 통치하고자 하였다. 대표적인 세력이 말갈, 동예, 옥저 등이다. 이들 지배에 관한 연구도 세부적인 내용 검토를 통해 제시되었다(김현숙, 2005; 김락기, 2013; 이종록, 2022). 말갈은 고구려인의 범주에 포함시켜 파악하면서 말갈과 고구려의 관계, 고구려의 말갈 지배 양상 등이 검토되었다. 그러나 이들에 대한 통치나 지배방식에 관한 연구는 아직까지 미흡한 실정인데, 이타인 묘지명의 발견으로 그 통치에 관한 약간의 단서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안정준, 2013; 여호규, 2017). 옥저나 동예에 관해서도 문헌과 고고학적인 자료를 통해 고구려 전기 동해안 지역 진출 과정과 지배방식, 그리고 그 지배대상인 예족사회(濊族社會)를 구성하는 남옥저·북옥저·동예와 동부여의 실체에 대해 살펴보기도 하였다(이종록, 2022). 아울러 고구려가 건설했던 한성, 남평양 등에 대한 통치에 관해서도 연구가 이루어졌다(김민수, 2003; 여호규, 2021).
 
2) 교통로와 관방체계
고구려의 자연지형을 이용한 교통로에 대한 이해는 전쟁과 관련된 사람이나 물자의 이동, 문물의 교류, 영역확장과 지방지배 등 많은 주제와 밀접하게 연관된다. 국내성시기 교통로로는 환인 방면의 졸본로, 부여 방면으로 진출하는 부여로, 북옥저 방면의 동해로 혹은 책성로, 동예나 남옥저 방면의 남해로, 평양 방면의 낙랑로 내지는 평양성로, 신성 방면의 신성로, 요동성 방면의 요동로, 서안평 방면의 서안평로 등이 상정될 수 있다. 고구려의 교통로와 관련된 연구는 전연과의 전쟁 과정에서 보이는 남도와 북도, 고구려 남진 경로, 동해안 방면으로의 진출로 등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특히 남도와 북도에 관해서는 2000년대 이후 새롭게 모색하는 논의가 있었다(공석구, 2007; 정원철, 2011; 기경량, 2016). 고구려의 남진과 관련해서도 진출 방향과 관련한 교통로에 대한 연구가 이어졌다(서영일, 2006; 백종오, 2006; 신광철, 2022; 박종서, 2022). 이와 함께 동해안 방면 진출로에 대한 논의도 이루어졌다(임기환, 2012; 여호규, 2017; 이종록, 2022).
교통로 주변에는 많은 고구려 성이 축조되었다. 만주 일대에만 200여 개 이상의 성이 확인되고, 북한 지역에서도 많이 확인되었으며, 근래 남한 지역에서도 성과 보루가 확인되고 있다. 고구려가 확보한 영역에 쌓은 성은 군사적 거점이자 지방지배의 거점이었다. 많은 침략을 받았던 고구려는 성을 중심으로 하는 입체적인 군사방어체계를 구축하였다. 하천이나 교통로를 중심으로 성곽이 어떻게 분포하며, 개별 성곽이 어떤 관련성을 가지고 유기적으로 배치되고 결합되었는지를 밝히는 것은 관방체계를 이해하는 중요한 지점이다. 고구려는 산성을 중심으로 하는 방어체계를 갖추고 있었으며, 그동안의 고구려 관방체계 연구는 이러한 성곽의 배치관계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고구려 관방체계에 대한 연구는 1990년대 중후반부터 이루어졌는데, 2000년대 이후로도 도성의 방어체계와 요동 지역의 산성을 중심으로 한 방어체계에 대해 고찰하였다(여호규, 1998; 양시은, 2013; 임기환, 2015; 정원철, 2017; 이성제, 2017; 이경미, 2017). 특히 고구려 성곽과 도성에 관한 박사학위논문(정원철, 2010; 양시은, 2013; 이경미, 2017; 이정범, 2021; 신광철, 2022) 등이 나왔다. 서북방 봉수체계가 검토되고(이성제, 2017), GIS나 위성사진을 활용한 공간분석도 시도되었다(홍밝음·강동석, 2021; 신광철, 2022; 김주형, 2023). 이와 함께 고구려 성곽축성술과 확산에 관한 연구가 이루어졌고(백종오, 2017), 중국 소재 고구려 성곽을 비롯한 유적과 유물에 대해 집대성한 자료집이 간행되어 연구기반을 크게 넓혔다(여호규 외, 2020; 2021; 2022).
고구려는 졸본, 국내성, 평양으로의 도성 변화에 따라 관방체계를 구축하였다. 요동과 국내성 지역에 구축한 성곽을 통해 군사방어체계를 구성하고 있고, 평양 천도 후 평양에 대한 도성방어체계가 재구축되기도 하였다. 특히 고구려는 평양 천도 이후 요하 유역에서 평양성에 이르는 서북 방면의 방어체계를 구축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현재 확인되는 고구려의 성은 바로 이러한 노력의 결과물일 것이다.
고구려 서북 방면의 방어체계는 중국에 산재한 고구려 성의 분포를 통해 요하 부근 최전방의 전연방어선, 요동에서 압록강 구간의 제1선 종심방어체계, 압록강-청천강의 제2선 종심방어체계 등으로 분류되고 있다(여호규, 1999; 양시은, 2013). 평양성과 관련한 관방체계는 외부에서 도성으로 진입하는 적군을 차단하기 위해 도성 외곽의 방어망도 구축하였다. 이와 관련된 북한 지역의 성들은 직접 조사하기 어렵고 발굴조사 성과도 많지 않아 그 전모를 명확하게 알기 어렵다. 한반도 서북한 지역의 고구려 성곽들은 요동 지역보다 늦은 시기에 구축된 것으로 여겨지는데, 특히 황해도 일대의 성곽들은 평양성의 외곽방어선이면서 남진을 위해 축조한 것이었다. 북한에서 고구려 산성 일부에 대한 조사성과가 제시되기도 하였지만, 현시점에서 서북한 지역의 방어체계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이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북한 지역 고구려 산성에 대한 대략적인 현황과 방어체계에 대한 연구도 이루어진 바 있다(신형식 외, 2000; 서일범, 2000; 지승철, 2005). 북한 지역의 고구려 성을 통한 고구려 관방체계에 대한 연구는 북한 지역에 있는 고구려 성곽에 대한 조사성과가 진전되어야 단계별 관방체계의 변화 양상을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고구려는 5세기에 들어서 임진강과 북한강 유역을 차지하고 475년에 백제의 한성을 함락시켜 한강 유역을 장악한 것으로 보인다. 적어도 551년경까지 고구려는 임진강과 한강 유역을 장악하였다. 고구려는 이 지역에도 방어체계를 구축하였다. 그러나 임진강과 한강 유역에서는 아직까지 대규모 산성유적이 확인되지 않았다. 이러한 남한 지역의 고구려 관방체계는 백제와 신라와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영역에 대한 지배와 관련성이 있다(백종오, 2006; 심광주, 2006; 2008; 서영일, 2006; 이정범, 2015; 윤성호, 2019; 여호규, 2020; 신광철, 2022; 박종서, 2022). 한강 유역 점유에 대한 입장의 차에 따라 한반도 중부지역까지 방어체계를 구축하였는지, 아니면 임진강과 한강 유역에 한정되었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남한 지역의 고구려 관방시설은 임진강-한탄강 유역, 양주분지 유역, 한강-중랑천 유역, 금강-미호천 유역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남한 지역의 고구려 관방시설은 사용시기가 제한적이긴 하지만, 고구려 관방시설이 초축이나 운영시기에 대해 명확한 근거가 부족하여 여러 이견이 제기되고 있어서 향후 정밀한 고고학적 연구가 더 필요하다.
고구려는 동해안과 두만강, 송화강 방면으로 진출하면서 점차 방어체계를 구축한 것으로 보인다. 평야가 넓게 발달한 두만강 유역 중심부에는 평지성을 조밀하게 축조하고, 그 주변의 교통로나 하곡평지에는 중대형 산성을 축조하였다. 말갈 지역에는 산성을 축조해 말갈을 통제하는 방어체계를 구축했다. 즉, 고구려가 두만강 유역을 중심부의 중핵 지역과 주변부, 말갈이 집단적으로 거주하는 외곽지역 등으로 구분하여 군사방어체계를 구축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여호규, 2017). 송화강 방면에도 고구려 성이 다수 보이므로, 이들 성들이 연결되어 방어체계를 형성하였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주로 유목민이나 말갈 계통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한 것으로 보고 있다.
오류접수

본 사이트 자료 중 잘못된 정보를 발견하였거나 사용 중 불편한 사항이 있을 경우 알려주세요. 처리 현황은 오류게시판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전화번호, 이메일 등 개인정보는 삭제하오니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3. 지방통치와 관방체계 연구 자료번호 : gt.d_0010_0020_0030_00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