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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통사

4. 대외관계와 영역 변천 연구

4. 대외관계와 영역 변천 연구

 
1) 대외관계
고구려는 한 군현과의 경쟁과 투쟁을 통해 성장하였고, 이후 중원 왕조와 북방민족, 한반도의 여러 나라와 왜, 서역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대외관계를 맺었다. 고구려의 국가적 성장과 발전, 위기와 멸망이라는 역사적 전개는 대외관계의 추이와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 아울러 대외관계는 국가 간의 우호와 대립이라는 관계 이외에도 문물의 교류를 수반하게 된다. 고구려사 연구에서 국제정세의 변동과 이와 연동되는 대외교섭은 바로 고구려사를 이해하는 중요한 작업이기도 한 것이다. 2000년대 이후 고구려사 연구도 이러한 대외관계에 주목하여 세부적인 검토가 이루어졌다. 사료의 면밀한 검토를 통해 당시 동아시아 정세를 분석하고 이에 기반한 각 세력의 동향을 주목하면서 연구가 진행되었다. 대외관계 연구는 이전에 비해 보다 내용이 풍부해지고 진전이 많았던 주제이기도 하다.
고구려는 1세기부터 제2현도군을 축출하여 세력을 확장하고 4세기에는 낙랑군과 대방군을 한반도에서 완전하게 축출하였다. 이 시기 고구려의 대외관계와 관련하여 먼저 대신(對新) 관계와 후한 군현과의 대립은 주변의 흉노, 오환, 선비 세력의 추이와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태조왕 대 이전 선비와의 관계와 후한 말에서 삼국에 이르는 시기에 요동을 중심으로 등장했던 공손씨 세력과의 관계가 주목되었다(여호규, 2000; 박노석, 2003; 김미경, 2007; 박세이, 2012; 김효진, 2023). 위진 세력의 동방 진출에 따른 고구려와의 전쟁과 교섭에 주목한 연구(서영수, 2002; 이승호, 2012) 및 조위 관구검의 침입에 따른 대규모 타격과 손오와의 교섭에 주목한 연구(박대재, 2010; 이승호, 2015)도 있다. 서진의 동이교위부 운용에 따라 고구려의 숙신 정벌과 양맥의 귀속은 서진의 동방정책 속에서 고구려가 대응하던 모습으로 상정된다(여호규, 2000; 이정빈, 2019).
4세기에 고구려는 북중국에서 5호16국시대가 도래함에 따라 전연, 전진, 후조, 후연 등과 상쟁 또는 우호 관계를 다층적으로 맺기도 하였고, 낙랑군과 대방군을 넘어 백제와 직접 영역을 맞닿으면서 대립하기도 하였다. 전연과 백제에게 공격을 받아 상당한 국가적 위기가 있기도 하였으나, 중앙집권적 국가체제의 완비를 통해 팽창의 초석을 마련하였다. 이후 백제와의 반복되는 전투와 더불어 급변하는 동북아 국제질서 속에서 여러 국가 간의 이해관계가 얽혀 충돌하는 상황에서도 대규모 영역확장이 이루어졌고, 신라, 가야, 왜 등과도 직접적인 관계를 맺었다. 광개토왕비에 의하면, 고구려는 신라에 대해 종속적 외교관계를 수립하였고, 금관가야가 광개토왕의 남정으로 타격을 입기도 하였다. 백제 공략과 관련하여 왜와의 관계도 상세하게 보이는데, 백제와 왜가 연합하여 고구려와 갈등관계였음을 알 수 있다.
전연을 세운 모용황은 339년과 342년 두 차례 고구려를 침공하였다. 특히 342년에는 환도성을 함락시키고 고국원왕의 생모와 왕비를 붙잡아갔으며 미천왕의 무덤을 도굴해 그 시신 역시 가져갔다. 그러나 348년 그 아들 모용준 대에 전진이 발흥하자 고구려와 비교적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전연과의 갈등 및 교류 양상에 주목하였다(강선, 2003; 공석구, 2003; 김미경, 2007; 지배선, 2009; 박세이, 2012; 이정빈, 2016; 백다해, 2023). 후연과의 관계 역시 중요한 변수였는데, 고구려가 후연과의 갈등과 대립 관계 속에서도 요동을 장악해나갔음에 주목한 연구도 있다(강선, 2002; 공석구, 2005; 이성제, 2004; 김미경, 2007; 백다해, 2023). 거란, 숙신, 동부여 방면으로의 영역확장 및 지배권의 확립에 대한 관심도 있었다(강선, 2003; 박노석, 2003; 이재성, 2005). 아울러 후조·모용선비와의 관계를 중심으로 4세기 고구려의 해양활동에 대해 고찰하기도 하였다(이정빈, 2016).
이처럼 4세기에 고구려는 주변의 각 세력과 충돌하며 영역확장을 꾀하였는데, 여기에 관해서는 큰 이견이 없다. 4세기 고구려사는 대체로 서진 실패에 따른 남진으로 설명하고 대외적 좌절을 극복하기 위해 내부체제를 정비하고 이후 대외적인 재도약을 이루었다고 이해된다. 이에 대해 4세기의 유동적인 움직임만을 대상으로 대외관계의 특성을 바라보는 데 한계가 있으므로, 3세기에서 5세기에 걸친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되었다(여호규, 2007).
광개토왕 재위 시에는 고구려가 요서 지방으로 진출하였는데, 후연의 숙군성과 연군을 공격한 것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이 시기 후연과의 대외관계는 중요한 변수이지만, 광개토왕비에 후연과의 관계는 명확히 드러나지 않는다. 따라서 광개토왕비에서 대후연 관계의 흔적을 찾으려는 노력이 있었다(공석구, 2012; 井上直樹, 2012). 이후 고구려는 북연과 우호관계를 추진하였다. 북연을 멸망시킨 북위가 등장하면서 고구려는 남연과 우호관계를 유지하였는데, 백제와 북위 등을 견제하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고구려는 413년 동진에 사신을 파견했는데, 기존 연구에서는 왜 혹은 백제와 관련지어 설명하였으나, 고구려가 서북방 정세에 민감하였기 때문에 동진과의 관계 설정이 중요하였다고 보기도 한다(김진한, 2012).
장수왕 대에는 남북조시대의 개막과 더불어 남북조의 대립 국면을 이용하여 북위, 송 등과 외교관계를 유지하였다. 북위는 대북연 정책을 고려하면서 고구려의 독자적인 세력권을 인정하고 요해 이동 지역의 패자로 인정하였다(임기환, 2003). 북연의 유연과 우호관계를 유지했고, 송과도 교류하였다. 북연을 둘러싼 국제분쟁으로 풍홍이 고구려로 망명하기도 하였다. 북위와 고구려의 관계는 긴장 속에서도 상호 정면 대결을 피하려는 방향에서 진행된 측면이 있다. 이후 고구려가 송에 망명을 요청한 풍홍을 살해하고 송과 일전을 벌이기도 하였지만, 양국은 관계가 파탄에 이르지 않도록 타협하였던 것으로 이해된다. 유목국가였던 유연의 동향은 국경을 맞대고 있던 북위뿐만 아니라 고구려, 송과도 관련되었다. 유연은 고구려 및 송과 우호관계를 맺고 적대관계였던 북위를 견제하고자 하였다. 북위를 둘러싸고 고구려, 유연, 송의 국제관계는 공조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고구려는 북위와 국경을 맞대고 있고, 남쪽으로 백제, 신라와 대결해야 하는 상황에서 북위와는 직접적인 대결을 피하는 방향에서 외교적 노력을 기울였고, 송이나 유연과의 관계도 북위를 견제하기 위한 상호의 필요가 작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북위 관계(李凭, 2002; 篠原啓方, 2009; 박승범, 2017; 井上直樹, 2021) 및 송과의 관계(백다해, 2016; 김진한, 2020; 井上直樹, 2021)에 대해 고찰하기도 하였다.
백제와의 각축 및 신라와의 관계 변화도 있었다. 고구려의 남진정책 추진과 더불어 백제와 신라는 동맹관계를 맺었고, 고구려는 백제와 각축을 벌이다가 백제가 북위에 청병외교를 한 이후인 475년 한성을 함락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고구려·백제의 대북위 외교 양상과 한성 함락에 대해 살펴본 연구가 있다(김진한, 2006; 위가야, 2020). 신라는 장수왕 초반기까지의 종속적 관계를 점차 벗어나면서 고구려 세력권으로부터 점차 이탈해 나가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그 외에 5~6세기 고구려와 왜의 관계(이영식, 2006; 정효운, 2006) 및 가야와의 관계(김태식, 2006; 신가영, 2020)에 주목한 연구도 있다.
6세기 들어 고구려 내부의 왕위계승다툼 등 혼란기를 겪었던 상황에서 남조에 새롭게 등장한 양은 국력을 팽창시켰다. 고구려는 북위, 양과의 이해관계에 따라 중시 대상이 바뀌기도 하였다. 6세기 후반에 북위가 동위와 서위로 분리되고, 유연은 이 틈을 이용하여 세력을 과시하였다. 고구려도 북위의 내란을 틈타 요서 진출을 시도하였다. 고구려는 동위와 우호적 관계를 안정적으로 유지하였고, 새로 들어선 북제가 고구려 배후에 위치한 백제, 신라에 주목하면서 이전과는 변화된 새로운 양상을 보였다. 백제는 웅진으로 천도한 이후 무령왕 때 다시 국력을 회복하여 성왕 때까지 양과 교섭하며 고구려와 대립하였다. 신라는 백제와의 동맹으로 고구려 영향력에서 완전히 벗어났고, 소백산맥 이북으로 영역을 확장하였다. 고구려는 나제동맹의 대립구도 속에서 한강 유역의 영유를 둘러싸고 공방을 벌였다. 장수왕 대부터 고구려의 세력권에서 이탈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던 신라는 551~553년에 걸친 전쟁을 통해 한강 유역을 점령하였다. 이러한 신라의 한강 유역 진출을 중심으로 5~6세기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를 고찰하기도 하였다(주보돈, 2006; 박경철, 2007; 정운용, 2008; 장창은, 2014).
한편, 6세기 후반 북위가 동위와 서위로 양분되고, 이후 북제와 북주로 교체되었다. 막북에서는 돌궐의 공격으로 유연이 멸망하고 동북아시아의 새로운 강자로 등장하자 긴장관계가 조성되었다. 이 시기에 새롭게 흥기한 돌궐 및 고보녕(高寶寧)에 대한 고구려의 대응을 살펴본 연구가 있다(이재성, 2005; 김지영, 2008; 전상우, 2017). 북제는 동북방 방면으로 고막해와 거란을 격파하였고, 고구려에 대해 유인 송환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성장한 신라는 대북제 외교를 전개하고, 고구려는 남조의 제 및 진과도 외교관계를 맺었는데, 고구려와 양과의 관계(백다해, 2020), 남제와의 교섭(김진한, 2019)에 대해 살펴보기도 하였다. 한편 이 시기에 재개된 고구려의 대왜 외교에 대한 연구가 있으며(연민수, 2007; 이성제, 2009; 井上直樹, 2021), 거란과 말갈의 향방도 중요한 변수였기 때문에 이들에 대한 통제에 주목하기도 하였다(이재성, 2011).
오랫동안 분열되었던 중원을 통일한 수와 고구려는 갈등이 점차 심화되었다. 수가 자국 중시의 일원적인 국제질서를 수립하려고 하자, 그동안 힘의 균형 속에 독자적인 세력을 유지해왔던 동아시아 세계는 이에 직면하여 치열한 싸움을 전개하기에 이르렀다. 동아시아 세계는 수와 고구려, 돌궐이 주변의 거란, 말갈, 해, 습, 실위를 둘러싸고 각축전을 벌였다. 아울러 토욕혼, 백제, 신라, 왜도 국제관계에 있어 때로는 충돌하고 협력하는 등 국제정세가 급박하게 진행되었다. 이 시기 동아시아의 국제관계를 살핀 연구가 다수 나왔다(여호규, 2002; 김용만, 2007; 김은숙, 2007). 요해 지역의 동향을 중심으로 평원왕 대 고구려의 대외관계를 살피거나, 양원왕 대 고구려의 정국 동향과 대외관계에 주목하기도 하였으며(김진한, 2007), 영양왕 대부터 시작된 서역과의 관계에 천착한 연구도 이루어졌다(鄭守一, 2002).
이러한 상황에서 고구려와 수와의 갈등은 590년 중반 이후 표면화되었다. 수가 영주총관부를 설치하자 598년 고구려는 요서를 공격하였고, 이후 수의 침입으로 고구려와 수 사이에 전면전이 개시되었다. 고구려는 동돌궐, 백제, 왜 등과 교섭하며 외교적인 측면에서 위기를 타개하고자 하였다. 612년, 613년, 614년 세 차례에 걸쳐 수는 고구려 원정에 나섰다. 이는 당시 고구려와 수뿐만 아니라 주변세력에게도 영향을 끼쳤는데, 이에 대한 연구가 다수 이루어졌다(金子修一, 2002; 여호규, 2002; 윤용구, 2005; 김창석, 2007; 이정빈, 2013; 정동민, 2017). 전쟁 결과 고구려는 독자적인 세력을 유지하였고 국제적 위상도 회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연이은 전쟁으로 군사력과 경제력이 쇠퇴된 측면이 있다. 수도 마찬가지였는데, 이에 전국적으로 일어난 반란과 봉기로 혼란이 가중되어 결국 멸망에 이르렀다.
수가 멸망한 후 당이 들어서고 돌궐이 흥기하면서 동아시아 정세는 다시 급변하였다. 당도 주변세력에 대한 복속을 완료하고 당 중심의 일원적 국제질서를 구축하고자 하였다. 고구려, 백제, 신라, 왜의 경우도 이러한 국제질서의 변동에 민감하게 대응하였다. 고구려, 백제, 신라의 각축전이 치열하게 전개되었고, 백제와 신라도 당과 연결하였다. 특히 고구려와 백제는 연개소문 집권 이후 연합을 이루었다고 이해되기도 하는데, 이러한 6세기 말~7세기의 고구려·백제 관계의 단계적 변화 과정을 살피거나(윤성환, 2011), 왜의 동향이나 말갈과 거란 세력의 동향도 주목되었다(김지영, 2008).
고구려는 당과의 전쟁을 피하기 위해 여러 외교적 노력을 기울이기도 하였지만, 이전부터 진행하였던 천리장성 축조에서 살펴볼 수 있듯이 당의 침입에 대비하여 전쟁 준비도 동시에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연개소문의 정변 배경에 대해서는 대당 관계(방용철, 2011), 북방 유목민족의 동향(김지영, 2008), 신라 관계(최호원, 2020) 등 다양한 요소에 주목하였다. 연개소문 정변이 당에게 명분을 주면서 고구려와의 관계는 전쟁을 맞이하게 되었다. 고구려와 당의 관계(拜根興, 2002; 윤성환, 2011; 방용철, 2017) 및 전쟁에 대한 연구 역시 배경·전황 등 다양한 관점에서 이루어졌다(나동욱, 2009; 이민수, 2022).
고구려와 당의 전쟁 이후 당을 협공하기 위한 연합전선의 형성을 목적으로 고구려가 사마르칸트에 사신을 파견했다는 관점도 제기되었다(노태돈, 2003; 권영필 외, 2008; 지배선, 2011). 사마르칸트 아프라시아브궁전 벽화에 보이는 고구려 사절에 대해서도 주목하였는데, 대체로 고구려가 강국에 외교적 목적으로 파견한 사절이라는 게 일반적 견해였고, 그러한 방향의 연구가 지속되었다. 이에 대해 고구려인의 모습은 맞지만 실제로 파견된 사절이 아니라 강국의 세계관에 의해 표현된 고구려인의 이미지로, 당이나 돈황벽화 등에 보이는 전형적인 도상의 차용이거나, 혹은 강국의 입장에서 어딘가에서 접촉한 동쪽의 끝 나라인 고구려인의 이미지에 대한 표현이라는 견해도 새롭게 제기되었다(정호섭, 2013). 아울러 표현된 고구려 이미지는 실제 파견된 사절이 아니라 서돌궐로부터 유래된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이성제, 2019). 반면, 이러한 논의에 대한 비판도 있다(서길수, 2020).
한편, 돌궐이 세운 돌궐비에 표현된 고구려 관련 내용과 유연과의 관계를 비롯한 북아시아 유목민에 대한 연구도 진행되었다. 몽골공화국 오르혼강 기슭에 있는 8세기 중엽에 세운 돌궐 제2제국의 시조 빌게가한과 그의 동생 퀼테킨을 기린 두 돌궐비에서 고구려를 지칭하여 ‘배크리’라 기술한 것을 돌궐인이 맥구려(貊句麗)를 기술했다고 보았다. 이와 관련하여 동로마의 역사가 테오필락트 시모카타(Theophylact Simocatta)가 쓴 기록에서 아바르(Avar, 柔然)의 잔여 무리가 북제에 패배한 이후 동쪽 ‘Mukli’로 달아났다고 한 기록이나 돈황문서 ‘pelliot-tibetan 1283’에서 고구려와 발해를 ‘Mug-lig’라 기술한 예, 8세기 말~9세기 초에 편찬된 『범어잡명(梵語雜名)』에서 무구리(畝句理)를 고려(高麗)라 한 예를 통해 내륙아시아 튀르크계 사람들이 고구려를 ‘무크리’로, 즉 맥구려로 불렀음을 증명하였다(노태돈, 2003).
 
2) 전쟁과 영역 변천
대외관계사 연구는 전쟁 및 영역 연구와 궤를 같이한다. 외교관계가 잘 유지되면 평화를 유지하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는 전쟁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고구려는 중원뿐만 아니라 주변의 다양한 세력과 치열하게 각축하였기 때문에 전쟁이 끊임없이 일어났고, 이에 따른 영역의 변천도 수반되었다. 고구려는 초기부터 멸망할 때까지 주변세력과 크고 작은 전쟁을 겪었다. 주요 전쟁만 살펴보더라도 한 군현과의 전쟁, 조위와의 전쟁, 전연과 후연 등 선비와의 전쟁, 신라 및 백제와의 전쟁, 돌궐과의 전쟁, 수·당과의 전쟁 등 고구려사 전 시기를 통해 생존을 위한 수많은 전쟁을 치렀다. 고구려는 이러한 전쟁을 통해 많은 부침을 겪었는데, 비약적으로 성장하기도 하고 때로는 국가적 위기를 맞이하기도 하였으며, 수·당과는 70년간 전쟁을 치르고 결국 멸망하기에 이르렀다.
2000년대 이전 뿐만 아니라 이후에도 전쟁 관련 연구는 비교적 활발하게 진행된 편이라 할 수 있다. 고구려 초기 또는 전기의 전쟁과 영역 변천(박노석, 2003; 김효진, 2018), 광개토왕에서 보장왕 대까지 요서 진출에 한정해서 살펴보기도 하였다(윤병모, 2009). 아울러 보다 집중적으로 고구려의 대수·당전쟁이 연구되어 보다 입체적으로 전쟁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이정빈, 2013; 2018; 정원주, 2013; 정동민, 2017; 이민수, 2018; 임기환, 2022). 고구려의 대수·당전쟁 연구에서는 전쟁의 배경이나 원인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이 밖에 전쟁의 경과 및 결과, 전략과 전술, 무기체계, 방어체계 등 군사와 관련한 연구도 있다. 아울러 고구려의 부흥운동이나 보덕국 등을 다룬 연구성과도 나왔다(임기환, 2003; 강경구, 2005; 이정빈, 2009; 조법종, 2015; 장병진, 2016; 김강훈, 2018; 방용철, 2018; 정원주, 2019; 김수진, 2020). 645년 안시성전투만을 다룬 성과도 최근 간행되었다(김정배 외, 2023). 중국 학계에서도 고구려 전쟁사를 다룬 연구가 이전에 비해 많이 제시되었다. 특히 고구려와 당과의 전쟁에 주목한 논고가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전쟁 등을 통해 영역이 변화되었기 때문에 고구려의 영역과 관련한 연구도 이어졌다. 특히 고구려 유적 발굴 등을 통해 유적과 유물에 대한 고고학적 연구성과가 축적되면서 강역 연구도 새로운 단계에 들어섰다고 할 수 있다. 이를 통해 고구려의 강역을 어느 정도 구분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고구려의 강역을 구분할 수 있는 명확한 근거가 축적되고 있다 하더라도 강역을 명확하게 선으로 획정할 수 있느냐 하는 점은 여전히 문제로 남는다.
시기별 고구려 영역에 대한 논쟁도 있었는데, 특히 고구려의 북변, 서변, 동변, 남변에 대한 논의가 비교적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고구려의 서변과 북변을 이해하기 위해 가장 중요하다고 판단되는 천리장성에 대해 주목했는데, 노변강장성설(여호규, 2000)과 산성연계방어선설(이성제, 2014) 등이 제시되었다. 천리장성과 관련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고, 모든 견해가 충분히 설득력을 가졌다고 할 수는 없으며, 아직까지 확정할 수 있는 견해가 없다. 이 지역에 대한 정밀한 고고학적 조사가 선행되어야 하며, 향후 학계의 논의를 거쳐서 천리장성의 기능과 성격 등에 대해서 어떠한 방식으로 인식해야 할 것인지를 고민할 필요성이 있다. 서변과 관련해서, 요하로 한정하느냐, 아니면 서쪽 경계를 요서 일대까지 확장할 수 있느냐 하는 점(이성제, 2013; 정원주, 2014)도 논란의 여지가 있다.
고구려의 요동 진출과 이곳에 대한 지배권을 완전하게 확보하기까지, 요동 지역의 정세와 고구려의 진출 과정 및 후연과 고구려의 관계를 통해 살펴본 논의에서도, 그 시점을 두고 견해 차를 보이고 있다. 전통적인 입장에서 395년 이전에 요동 지역을 장악하였다고 보는 견해(공석구, 2012; 임기환, 2013)와 400 ~402년 무렵에야 요동 지역을 확보하였다는 견해(여호규, 2012; 이성제, 2012)로 나뉜다. 통설적인 입장에서는 『삼국사기』에 요동을 장악한 직접적인 기록이 있고, 당대 금석문인 광개토왕비 영락 5년조의 기사를 중요시하며, 모용보에 의한 광개토왕의 책봉 기사를 주목한다. 반면, 『자치통감』 기록에 따라 400년까지 후연이 요동 지역인 평주를 장악하고 있다고 보는 입장에서는 그 이후에야 요동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했다고 이해한다.
고구려의 동쪽 경계와 관련해서는 현재의 연변 지역에 해당하는 동쪽지역을 지배하고 경영하는 주요 거점으로 거론되는 책성(柵城)과 신성(新城)의 위치가 어디인지가 핵심적 사항이라고 할 수 있다. 신성, 책성 등 주요 거점성에 대해서는 대체로 학계의 의견이 모아져서 일치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듯하다. 다만 연변장성유적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어서 검토해 볼 여지가 남아 있다(김현숙, 2000; 이성제, 2009; 임기환, 2012; 박경철, 2012).
고구려 남변과 관련해서는 고구려의 한강 유역 영유권에 대한 다양한 논의가 진행되었다(서영일, 2001; 심광주, 2001; 임기환, 2002; 김현숙, 2008; 최종택, 2008; 안신원, 2010; 신광철, 2010; 양시은, 2010; 여호규, 2013; 장창은, 2014; 이정범, 2015). 고구려가 475년에서 551년 동안 한강 이남과 경기 남부 지역을 장악하여 직접적으로 영역지배를 하였는지에 대해서는 그간 논란의 여지가 있었다. 이 시기 한강 유역 영유국에 관한 논란은 해당 지역을 고구려가 영유했는가, 아니면 백제가 영유했는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세부적으로는 고구려가 영유했다면 공고한 지배체제가 구축된 직접적인 영역지배인가, 아니면 교두보 내지는 요충지 확보 차원에서의 일시적 점유인가이다.
대체로 통설적인 입장에서는 고구려가 한성을 함락시킨 이후 이 지역을 포함한 한강 이남 지역에 대한 영역지배가 가능하였다고 보아왔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반론도 적지 않은데, 한강 유역에 대한 고구려의 점유를 부정하면서 오히려 백제의 점유를 주장하기도 하였다. 『삼국사기』 지리지 고구려조는 대체로 5세기 상황의 반영이고, 475년경부터 고구려의 직접적인 영역지배가 가능한 곳이었다고 파악하는 것에 회의적이며,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고구려의 한성 점령 이후 대체로 동성왕에서 무령왕에 이르는 시기에는 한강 유역이 회복되기도 하였다는 것이다. 이 시기 백제본기에는 한강 이북 일대로 비정할 수 있는 지명이 등장하는데, 475년에서 551년 사이에 고구려와 백제의 접전지는 475년 이전 상황과 별반 차이가 없다고 인식하고 있거나, 동성왕과 무령왕 대에 한강 유역을 일시적으로 수복하였다고 보는 것이다.
이러한 학계의 분위기에서 475년 이후 이 지역에 고구려가 군(郡)을 설치하고 직접적으로 지배를 실시했다고 이해하기도 하였다. 이후에도 여러 연구자가 통설적 입장에서 한강 유역과 그 이남 지역에서 고구려의 영역지배를 재확인하였는데, 한강 이남에서도 고구려 산성과 고분 등 유적이 계속 확인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일부 연구자의 경우에는 통설에 가깝지만 다소 세부적인 입장 차이가 있는 부분도 있다. 즉 공고한 지배체제의 구축이라기보다는 군사적 요충지의 확보로 이해하거나(김영심, 2003; 문안식, 2010), 동성왕·무령왕 대 한강 유역에서의 전쟁 및 한성 영유 기사는 아마도 원래 진사왕·개로왕 대의 기사였을 것으로 짐작하기도 한다(임기환, 2002).
한편, 최근 고고학적인 발굴성과로 한강 이남 지역에서 고구려 성곽이나 고분 유적이 확인되고 있는데, 이 유적에 대한 해석에도 차이를 보이고 있다. 고구려 성곽이나 고분 유적이 고구려 직접지배를 인정하는 근거라는 것이 통설적 입장이라면, 이와 달리 전체 유적의 빈도나 규모, 문화적 양상이 미미한 점 등으로 보아 고구려에 의한 영역지배를 인정할 정도는 아니고 일시적인 점유라고 보는 입장도 있다(백종오, 2009; 안신원, 2010). 특히 충주고구려비가 있는 중원 지역의 경우만 하더라도 고구려 관계 유적과 유물의 편년은 대체로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전반경의 짧은 시기에 해당한다. 고구려가 남한강의 교통로를 이용하여 충주 지역에 안정적인 배후거점을 마련하였고, 고구려 남진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핵심거점으로 인식하였고, 짧은 기간이었으나 고구려식의 묘제가 축조될 수 있었다고 이해하고 있다. 이처럼 고구려 고분과 산성이 한강 이남 지역에서 발굴조사되면서 논의가 더욱 활발해졌다.
고구려와 신라의 각축 양상에 따른 고구려의 강역은 대체로 4세기 대에 이루어진 광개토왕의 군사활동, 5세기 장수왕의 국원 진출, 신라의 한강 유역 진출로 대표되는 북방 진출, 6세기 후반~7세기 전반의 고구려 남한강 유역 진출과 북한강 지역에서의 공방전, 7세기 신라의 북진과 임진강 유역을 둘러싼 각축전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러한 고구려와 신라의 각축과 경계가 대해서는 많은 연구가 축적되어 왔다(김현숙, 2002; 김락기, 2005; 장창은, 2014).
고구려가 소백산맥 이남의 경상도 지역까지 장악하고 있었다는 견해는 『삼국사기』, 『일본서기』 등의 문헌자료와 광개토왕비 및 충주고구려비 등 고구려의 금석문과 영주 순흥벽화고분 등 고고자료들이 확인되면서 통설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삼국사기』 지리지 기록에 대한 회의적 시각도 존재하는데, 고구려 고지는 고구려가 실제로 이 지역을 영역지배한 것이라기보다는 신라가 북진하는 과정에서 신라의 군현제를 기준으로 고구려의 군현명을 대응시킨 결과로 해석한다(임기환, 2008). 또 지리지 기사를 사료비판하면서 동해안 일대에서 지속적으로 확인되는 신라계 유물에 근거하여 5세기 중반 이후로 신라가 소백산맥을 기점으로 해서 그 이남 지역을 안정적으로 영역지배하였으며, 고구려와 신라의 경계를 강릉 이북 지역으로 설정하였다(강종훈, 2008). 이 문제에 대한 논의의 초점은 『삼국사기』 지리지에 대한 이해와 함께 근래 확인되고 있는 고고자료의 해석을 토대로 고구려가 신라를 지배한 기간과 형태에 대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특히 고고학적으로 신라 지역에서 보이는 고구려의 영향을 바로 고구려의 영역과 직결시켜 이해하기에는 해결할 문제가 아직 많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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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대외관계와 영역 변천 연구 자료번호 : gt.d_0010_0020_0030_00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