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도성과 왕릉 연구
5. 도성과 왕릉 연구
1) 도성
도성은 역사학의 한 축인 공간에 대한 관심을 반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2000년대 들어서 도성과 관련한 논의는 문헌기록이나 금석문의 기록을 재해석하기도 하고, 오녀산성, 국내성과 환도산성, 안학궁성 등의 발굴성과를 토대로 연구성과가 지속적으로 나왔다. 초기 도성과 관련하여 졸본과 흘승골성, 유리왕 대 천도 기록이 전하고 있는 국내 위나암의 위치와 성격 등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졸본 혹은 홀본은 현재 중국 요령성 환인으로 비정되는 데 이견이 없고, 흘승골성도 대체로 오녀산성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홀본과 흘승골성, 둘의 관계를 동일한 곳으로 보기도 하고, 다른 곳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이와 함께 국내 위나암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후대에 각색하여 건도지로 재설정한 것으로 이해하면서 오녀산성으로 보거나(노태돈, 2012; 이도학, 2015; 권순홍, 2019; 강진원, 2020), 환인 지역이 아닌 다른 지역으로 보기도 하는데, 산성자산성(강현숙, 2015)과 패왕조산성(김현숙, 2017) 등이 제기된 바 있다.
또한 졸본의 평지 중심지를 둘러싼 논쟁이 있는데, 나합성(田中俊明, 2005; 노태돈, 2012; 이도학, 2015), 하고성자성(王綿厚, 2003; 박순발, 2012), 평지성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견해(기경량, 2017; 강진원, 2020) 등이 거론된 바 있다. 평지 중심지나 거점에 대한 의견도 제시되었는데, 고려묘자촌(조법종, 2007; 여호규, 2012; 김현숙, 2017; 권순홍 2019)으로 보기도 한다. 방위상의 약점이나 거리상의 약점이 있고, 고고학적인 실체 확인이나 연대 문제 등에 약점이 있다.
집안 지역에 대한 발굴 결과 평지성인 국내성과 산성자산성에서 4세기 이전의 유물이 확인되지 않았고 4세기 전반경의 권운문와당과 성벽 안쪽 토축의 기초 부분에서 4세기 초로 편년되는 토기편이 확인됨에 따라 고구려 천도시점에 대한 논의가 지속되었다. 『삼국사기』에 전하는 유리왕 22년 집안 지역으로의 천도는 인정할 수 없다는 시각이 점차 강해졌고, 이에 천도를 태조왕 대(김종은, 2003; 여호규, 2005), 신대왕 대(임기환, 2018; 기경량, 2020; 강진원, 2020), 산상왕 대(노태돈, 2012)로 보는 견해가 나왔다.
고구려가 졸본에서 국내 지역으로 천도한 직후에는 건강유적 등을 근거로 마선구 지역을 평상시 거점으로 하였다는 견해(여호규, 2005)가 있지만, 넓은 평지를 두고 굳이 좁은 곳에 자리 잡았다는 것이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있어(노태돈, 2012; 임기환, 2012) 대체로 지금의 국내성 일대를 중심지로 이해하고 있다. 방위부가 등장하는 이후에는 국내성의 6구역과 7구역에 왕궁이 있었을 것을 추정하면서 5부의 중심이 국내성 내에 있을 것으로 보았다(임기환, 2007; 여호규, 2012). 그러나 이와는 달리 국내성 내부는 중부, 나머지 4부는 성 바깥에 존재했다고 보거나, 국내 지역 전체가 5부로 편성되었다는 견해도 제시되었다(노태돈, 2012; 정호섭, 2015; 조영광, 2016). 아울러 하천 등 지형을 따라 5부가 구분되었다거나, 국내성 성벽 축조 이전에는 5부가 집안분지에 존재하다가 성벽 축조 이후 성내에 편성되었다고 보기도 한다(임기환, 2015; 기경량, 2017).
국내성의 초축 시기는 고고학적으로 3세기 중반에서 4세기 중반 사이로 상정되고 있다. 적어도 이 시기까지 국내성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환도산성의 경우 비교적 이른 시기부터 문헌에서 확인되는데, 발굴 결과 출토되는 유물의 연대와는 상당한 괴리가 발생한다. 비록 여러 차례 개축의 가능성이 있고, 일부 지점에서만 발굴하였다는 한계가 있다 하더라도 현재까지는 기와 등의 편년으로 볼 때 5세기 중반 이후의 성으로 보인다. 도성과 천도 등과 같은 논쟁은 문헌사료의 해석과 고고자료 해석상의 괴리에서 비롯되고 있는 것이다. 문헌자료의 기록이 고고자료와 일치하지 않는다고 해서 부정할 수는 없으므로, 고고자료가 비록 물질자료로서 증거가 되지만, 이것 역시 제한된 자료라는 점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아울러 국내성과 환도성이 하나의 세트로 기능한다는 점에서 고구려 도성이 산지성과 평지성의 조합으로 이루어졌을 것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근래 부정적 의견이 나오고 있다(기경량, 2017).
한편, 『삼국사기』 동천왕 대 기록에 등장하는 평양성은 집안 일대 평지성으로 보거나 북한의 강계 지역, 집안 양민 지역 등이 제기되었지만, 그 실체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확인하기 어렵다. 대체로 집안분지 일대 평지성으로 보는 의견이 우세한 편이다. 고국원왕 대 등장하는 평양 동황성에 대해서도 과거 여러 후보지에 대한 의견이 있었지만, 청호동토성(손영종, 2000), 청암동토성(장효정, 2000), 임강 지역(張福有, 2005), 안학궁지(임기환, 2007), 의암동토성(기경량, 2020) 등이 다시 제기되기도 하였다.
427년 천도와 함께 평양시기의 도성에 대해서도 논쟁도 이어졌다. 고구려가 427년 국내 지역에서 평양으로 천도함에 따라 조영한 것으로 여기는 도성이 있을 수 있고, 장안성이 축조됨으로써 후기 도성으로서 멸망할 때까지 기능을 한 것으로 보인다. 과거에는 고구려 도성이 산성과 평지성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이해하고, 대성산성과 안학궁성, 대성산성과 청암동토성을 주목하였다. 청암동토성에서는 왕궁유적이 확인되지 않았고, 안학궁성의 조영시기에 대해서는 여러 이견이 있다. 북한 학계에서는 안학궁성을 평지성유적으로 이해하면서 약수리고분벽화의 성곽도를 안학궁성으로 이해하기도 하였다. 안학궁성에서 출토되는 유물은 고구려 기와를 비롯하여 고려시대 기와까지 출토되고 있다. 전형적인 고구려 기와도 출토되므로 개와의 가능성을 지적하면서 고구려 때의 유적으로 이해하기도 한다(고구려연구재단 보고서, 2006). 반면 대부분의 기와가 고려시대의 것이므로 고구려 석실묘를 파괴하면서 고려시대 안학궁이 조영된 것으로 보고 고려시대 축조설이 제기되기도 하였다(田中俊明, 2005; 박순발, 2012; 기경량, 2017). 아울러 장수왕 천도 때 청암리토성이 궁성이었다가 안학궁성 축조 이후 왕궁으로 삼았다는 이해도 있고(임기환, 2021), 건축군 배치를 통해 북위식의 영향이 확인되므로 6세기 이전의 건축물로 이해하기도 한다(양정석, 2008). 이와는 전혀 다른 시각에서 평양 천도 직후 평지성의 존재를 부정하기도 한다(기경량, 2017; 권순홍, 2019). 대성산성이 왕성으로 기능하였고, 평지성은 존재하지 않고 청호동과 임흥동, 안학궁의 서쪽지역에서 확인된 도시유적을 중심지로 이해하는 것이다. 이 도시유적이 중심지로 기능하다가 장안성 축조 이후에서야 현재의 평양성이 도성으로 기능하였다는 것이다.
장안성은 북성, 내성, 중성, 외성으로 구성되어 있는 고구려 후기 도성인 평양성이다. 산성과 평지성의 이점이 결합된 형태의 장안성과 관련해서는 양원왕 8년 장안성을 축조하고 평원왕 28년 장안성으로 이도하였다는 기록이 전하고 있다. 장안성의 축조는 양원왕 대의 정국 전환용으로 진행되었을 가능성이 지적되었고, 불안한 정국 상황으로 인해 축성공사를 진행하지 못한 것으로 보고 있다(김희선, 2008). 양원왕 대의 장안성 축조와 달리 평원왕 대의 천도는 장안성의 초축 시기와 내성 축조 시기 사이의 시간적 간극이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평원왕 대는 정국이 안정되면서 축성사업이 본격화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평원왕 대 장안성으로의 이도는 신라의 북상, 돌궐의 위협에 대한 대비, 수와의 대결 대비 등 대외적인 정세 변화도 지적되었다(임기환, 2007). 평양성 각자성석을 통해 장안성이 552년부터 593년까지 축조된 것으로 보이므로, 이도한 이후에도 축성은 계속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장안성 축성 과정에 대해서는 내성과 외성, 중성과 북성의 축조에 있어 선후관계에 대한 이견이 있다. 가로 구획에 대해서도 여러 이견이 존재하고, 그 영향관계도 북위 낙양성과 수의 대흥성 등으로 달리 이해하고 있다(기경량, 2017; 권순홍, 2019). 이러한 국내외적 상황만으로 이도를 완벽하게 설명하기는 어렵다. 최근 평양 지역 고지형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작업(허의행, 2022; 양정석·허의행, 2023)도 이러한 문제에 새로운 인식을 가능하게 해 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도성과 관련한 문헌사료와 고고자료와의 괴리, 고구려 도성을 바라보는 다양한 시각차로 인해 고구려 도성의 실상에 접근하는 것은 대단히 어렵다. 보다 정밀한 발굴조사를 통해 유적의 전체 모습을 확인하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
2) 왕릉과 제의
고구려 왕릉에 대한 실측조사나 발굴조사가 이루어져 새로운 사실이 알려지면서 이에 관한 연구가 본격화되었다. 중국 측의 조사보고서에 대한 분석을 토대로 문헌사료와 고고자료를 결합하여 고구려 왕릉과 제의를 세부적으로 살펴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동안 문헌사적으로 피장자 문제에 대해서 검토가 충분하지 못하였다는 사실에 입각해서 『삼국사기』, 『삼국유사』, 일본 측 기록 등 문헌자료를 기본으로 하여 기타 금석문 자료에 보이는 고구려 왕호와 장지를 좀 더 면밀하게 재검토하였다. 그리고 지리적인 위치와 함께 고고학적으로 묘제의 변화와 발전이라는 맥락과 연결시켜 왕릉의 위치와 피장자 문제를 재검토해나가는 과정에서 왕릉에 대한 추정이 이루어졌다. 왕릉 축조와 관련하여 수릉이나 귀장에 대한 인식에 따라 왕릉 비정도 차이가 있었다. 근래에는 수릉이나 귀장에 대한 부정적 견해가 다수 나왔다(이희준, 2006; 정호섭, 2008; 공석구, 2008).
표1 적석총 단계의 왕릉 비정
| 구분 | 연구자 | 왕릉 비정 |
| 마선구626호분 | 張福有, 孫仁杰, 遲勇 | 대무신왕 |
| 임기환, 桃崎祐輔 | 산상왕 | |
| 정호섭 | 태조왕 | |
| 기경량 | 신대왕 | |
| 칠성산871호분 | 張福有, 孫仁杰, 遲勇 | 태조왕 |
| 魏存成, 정호섭, 기경량 | 산상왕 | |
| 임기환 | 신대왕 혹은 고국천왕 | |
| 임강묘 | 여호규, 임기환, 魏存成, 이도학, 박진욱, 손수호, 정호섭, 기경량, 강진원 | 동천왕 |
| 張福有, 孫仁杰, 遲勇 | 산상왕 | |
| 桃崎祐輔 | 중천왕 | |
| 우산하2110호분 | 손수호 | 대무신왕 |
| 張福有, 孫仁杰, 遲勇 | 고국천왕 | |
| 魏存成, 임기환, 정호섭, 기경량, 강진원 | 중천왕 | |
| 桃崎祐輔 | 동천왕 | |
| 칠성산211호분 | 왕릉보고서, 張福有, 孫仁杰, 遲勇, 임기환, 桃崎祐輔, 정호섭, 기경량, 강진원 | 서천왕 |
| 魏存成 | 서천왕 혹은 미천왕 | |
| 손수호 | 중천왕 | |
| 서대묘 | 손수호. 이도학 | 서천왕 |
| 기타 대부분 연구자 | 미천왕 | |
| 우산하992호분 | 손수호 | 소수림왕 |
| 이도학, 정호섭 | 비왕릉 | |
| 강진원 | 미천왕릉 | |
| 기경량 | 미천왕 2차릉 | |
| 기타 대부분 연구자 | 고국원왕 | |
| 마선구2100호분 | 왕릉보고서, 魏存成, 桃崎祐輔 | 소수림왕 |
| 東潮, 정호섭 | 미천왕(2차왕릉) | |
| 張福有, 孫仁杰, 遲勇 | 봉상왕 | |
| 기경량, 강진원 | 고국원왕 | |
| 이도학 | 미천왕 | |
| 천추묘 | 浜田耕策 | 미천왕 |
| 여호규 | 고국원왕 | |
| 왕릉보고서, 東潮, 魏存成, 桃崎祐輔, 손수호, 方起東 | 고국양왕 | |
| 張福有, 孫仁杰, 遲勇, 임기환, 정호섭, 이도학, 기경량, 강진원 | 소수림왕 | |
| 태왕릉 | 東潮 | 소수림왕 |
| 이도학 | 고국원왕 | |
| 여호규, 임기환, 정호섭, 기경량, 공석구, 강진원 | 고국양왕 | |
| 기타 대부분 연구자 | 광개토왕 | |
| 장군총 | 손수호 | 산상왕 |
| 關野貞, 永島暉臣愼, 田村晃一, 이도학, 여호규, 백승옥, 임기환, 정호섭, 기경량, 공석구, 강진원 | 광개토왕 | |
| 초기 대부분 연구자, 중국 연구자, 浜田耕策, 조법종, 東潮, 桃崎祐輔 | 장수왕 | |
| 우산하3319호분 | 李展福 | 고국원왕 |
| 耿鐵華 | 소수림왕 | |
| 張福有 | 전연(前燕) 왕우(王禹) 혹은 한수(韓壽) | |
| 孫仁杰, 違勇 | 최비(崔毖) | |
| 桃崎祐輔, 정호섭 | 한인관요(漢人官僚) 중랑(中郎) | |
| 마선구2378호묘 | 張福有, 孫仁杰, 遲勇, 정호섭 | 차대왕 |
| 기경량 | 고국천왕 | |
| 우산하0540호분 | 張福有, 孫仁杰, 遲勇 | 고국양왕 |
| 정호섭 | 고국원왕 | |
| 환인 용산4호묘 | 張福有, 孫仁杰, 遲勇 | 동명성왕 |
| 우산하0호분 | 유리명왕 | |
| 마선구 노호취 | 민중왕 | |
| 마선구2381호분 | 모본왕 | |
| 산성하36호분 | 신대왕 | |
| 호자구1호묘 | 동천왕 | |
| 산성하1호분 | 중천왕 |
표2 석실봉토묘 단계의 왕릉 비정
| 구분 | 연구자 | 왕릉 비정 |
| 전동명왕릉 | 東潮, 최택선, 강인구 | 동명왕 |
| 강현숙 | 동명왕(허묘) | |
| 永島暉臣愼, 魏存成, 조영현, 정호섭, 趙俊杰, 門田誠一, 강진원 | 장수왕 | |
| 기경량 | 문자명왕 | |
| 경신리1호분 | 東潮, 강인구, 주홍규, 기경량 | 장수왕 |
| 趙俊杰, 강진원 | 문자명왕 | |
| 진파리1호분 (동명왕릉9호) | 정호섭 | 안장왕 |
| 기경량 | 평원왕 | |
| 진파리4호분 (동명왕릉1호) | 永島暉臣愼, 정호섭 | 문자명왕 |
| 趙俊杰 | 조다 | |
| 기경량 | 양원왕 | |
| 진파리7호분 (동명왕릉4호) | 정호섭, 강진원 | 조다 |
| 토포리대총 | 東潮 | 문자명왕 |
| 趙俊杰, 기경량 | 안장왕 | |
| 강인구 | 문자명왕 혹은 안장왕 | |
| 강진원 | 안원왕 혹은 양원왕 | |
| 호남리사신총 | 정호섭, 趙俊杰, 기경량 | 안원왕 |
| 東潮 | 양원왕 | |
| 강인구, 강진원 | 안원왕 혹은 양원왕 | |
| 내리1호분 | 이도학 | 영류왕 |
| 강서대묘 | 關野貞, 이병도, 東潮, 정호섭, 강진원 | 평원왕 |
| 內藤湖男, 최택선, 趙俊杰, 강인구, 기경량 | 영양왕 | |
| 강서중묘 | 趙俊杰 | 평원왕 |
| 이병도, 東潮, 강진원, 기경량 | 영양왕 | |
| 內藤湖南 | 영류왕 | |
| 강인구 | 양원왕 혹은 평원왕 | |
| 최택선, 기경량 | 대양왕 | |
| 정호섭 | 비왕릉 | |
| 강서소묘 | 趙俊杰 | 양원왕 |
| 최택선, 기경량 | 영류왕 | |
| 강진원 | 대양왕 | |
| 정호섭 | 비왕릉 |
환인 지역 왕릉의 경우, 남아있는 왕릉급 무덤이 부재한 상황이고 특별한 기록이나 지리적 특성이 없어서 비정이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다. 집안 지역의 왕릉에 대해서는 많은 의견이 개진된 바 있으나, 합의점에 도달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평양권 고구려 왕릉은 대체로 대형 석실봉토묘나 벽화묘를 중심으로 비정이 이루어졌다. 중국 학계는 집안에 있는 대형 벽화묘들을 평양시기 고구려 왕릉으로 비정하기도 하지만, 이것은 다소 납득하기 어렵다. 평양 지역에 위치한 대형 고분인 전동명왕릉, 경신리1호분, 토포리대총, 진파리1호분, 진파리4호분, 호남리사신총, 강서대묘 등은 왕릉급으로 비정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들 고분에 대한 왕릉 비정도 명확한 근거에 의한 것이 아니라 무덤의 위상, 벽화 내용, 장지와 입지, 기와 비교 등에 의해 추정하는 것이다(정호섭, 2008; 강진원, 2014; 기경량, 2017; 주홍규, 2017).
왕릉과 관련한 제의시설로는 묘상건축, 제대, 배총, 수목, 능묘, 능사 등이 검토되었다(강현숙, 2009; 정호섭, 2009; 강진원, 2015). 아울러 왕릉 등에서 확인된 제의 관련 자료를 토대로 한 연구도 진행되었다(정호섭, 2009; 강진원, 2015; 조우연, 2019).
국가제사와 관련해서도 동맹 등의 제천대회, 사직과 영성, 시조묘 제사를 비롯하여 종묘제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졌다. 특히 새로 조사된 고분이나 고분벽화, 새롭게 발견된 집안고구려비의 내용을 토대로 한 제의 연구가 두드러지고 있다(박승범, 2001; 서영대, 2005; 윤성용, 2005; 이정빈, 2006; 조우연, 2010; 강진원, 2015; 최일례, 2015; 이승호, 20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