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내용 바로가기하단 바로가기
상세검색
  • 디렉토리 검색
  • 작성·발신·수신일
    ~
고구려통사

6. 종교와 문화 연구

6. 종교와 문화 연구

1) 불교와 도교
고구려 불교는 전래 이후부터 왕실 및 귀족세력과 밀접한 관계 속에서 발전하였는데, 정치적·사회적 상황이 변화하고 지배세력들의 불교에 대한 후원과 인식이 달라지면서 불교의 사회적 위치와 영향력이 약화되었다고 이해되고 있다. 이러한 고구려 불교사의 전반적 추이를 4세기부터 7세기까지로 한정해볼 때, 대체로 4~5세기는 불교의 수용과 전개, 6세기에서 7세기 전반기까지는 불교의 발전과 확산, 7세기 중반대는 불교정책의 변화와 쇠퇴로 구분해볼 수 있다. 이러한 차원에서 고구려 불교사를 통시적으로 연구한 성과가 나왔다(정선여, 2007). 특히 6세기대 불교 교단의 정비를 다루었다는 점은 불교사 연구의 심화라는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다.
고구려 불교 전래에 대해서는 사료상 차이가 있어서 다양한 이견이 존재한다(박윤선, 2004; 신종원, 2006; 정선여, 2007; 표영관, 2008 등). 불교 전래와 관련하여 순도, 아도, 담시 등 다른 기록이 나타나고 있고, 그 이전 시기에 동진의 지둔도림과 편지를 주고받은 고려도인(高麗道人)의 존재도 확인되고 있으며, 안악3호분에도 불교 관련 문양이 있기도 하여 공식 전래 이전부터 불교가 유입된 상황이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고구려의 불교 수용과 관련해서는 대체로 왕권강화나 중앙집권화의 이론체계라는 성격에 주목해왔다. 고구려에서 국가통치에 불교를 이용할 필요성이 있었다는 것은 전진의 부견이 불교를 국가통치의 방편으로 보호하였다는 사실과 연결해볼 수 있다. 하지만 고구려 불교 전래를 설명할 때, 국가나 왕실이 주도하거나 적극적으로 수용할 준비가 된 상태에서 고등종교로서의 불교를 통해 중앙집권적 귀족국가로 정비할 필요성에서였다고 평가하는 것은 결과론적 해석으로 볼 여지도 있다. 특히 불교가 왕권 정당화 내지는 중앙집권화의 이론장치로 역할을 했다거나, 평양 지역의 중국계 집단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기 위해서라는 등 불교의 정치적 기능을 강조한 것에 대해서는 비판적 의견이 개진되기도 하였다. 고구려의 불교 수용은 사회 전반에 걸친 일반민과 지배세력 다수의 공감을 전제로 한 새로운 종교 내지는 문화의 수입이지, 왕권강화 목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조우연, 2011). 아울러 고구려 불교 전래 및 수용 문제와 관련해 왕권의 역할이 지나치게 강조되었음을 비판하고, 이른바 국가적 공인 이전 불교 사전의 중요성과 의미에 대해 강조한 견해도 있다(최광식, 2007).
초기 불교의 성격과 관련한 논의(門田誠一, 2001), 요동성 육왕탑과 관련한 논의(김선숙, 2004; 윤세원, 2014), 말기의 불교계와 보덕의 백제 이주에 관한 논의(김주성, 2003), 미륵신앙 연구(김상현, 2005), 승랑 연구(남무희, 2011), 고구려의 불교와 문화 등에 대한 전반적 검토(김상현, 2007), 중국 문헌 소재 고구려 불교사 기록에 대한 검토(김상현, 2005), 『삼국유사』의 고구려 불교사 서술과 그 한계에 대한 검토(정호섭, 2018)도 이루어졌다. 한편 고구려의 도교에 대한 논의(김수진, 2010; 장인성, 2015; 박승범, 2019; 강진원, 2022)도 있었다.
이러한 연구를 통해 고구려 불교사에 대한 대략적인 이해는 가능하게 되었지만, 상대적으로 고구려 불교 관련 자료가 적은 관계로 불교사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지는 못하였다. 많은 고구려의 승려들이 중국, 일본, 신라, 백제 등에서 활동한 내용이 여러 문헌에서 확인되는데, 이들은 동아시아 불교 발전에 참여하고 일정 부분 공헌하기도 하였다. 비록 자료는 불충분하지만, 향후에는 고구려 불교사의 흐름을 체계적으로 살펴보고, 아울러 고구려 불교가 가지는 동아시아에서의 위상을 좀 더 명확하게 구명할 필요성이 있다.
고구려 도교와 관련해서는 말기 연개소문의 도교 수용 및 진흥과 연계하여 주로 연구가 진행되었다(김주성, 2003; 김수진, 2010; 강진원, 2022). 도교 진흥으로 인한 불교계와의 갈등과 보덕의 이주 등과 연관하여 살펴보고 있다.
 
2) 고분벽화와 문화사
고구려 벽화고분은 중국에 38기, 북한에 80여 기가 존재하는 것으로 보아, 현재 120여 기가 넘는다고 알려져 있다. 벽화고분은 최근까지도 지속적으로 발굴보고되고 있어서 향후에 더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고분벽화는 역사자료이면서 장의예술로 고구려인의 내세관을 보여주고 있다. 고구려 고분벽화는 동아시아의 보편성과 독자성, 개별성과 국제성이 조화된 흔적을 보여주는 자료이고, 고구려 역사의 전개 과정과 관련성을 가지고 변화하고 발전하였다. 중원적 요소와 북방적 요소를 혼합하고 그것을 독자적으로 발전시켜 삼국과 일본 문화에 영향을 주었기 때문에 동아시아에서 고구려 고분벽화의 위치는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고구려 고분벽화 연구는 김용준에 의해 토대가 마련된 이후에 고고학, 미술사 분야에서 연구되다가 이후 묘실 구조와 벽화 내용을 종합하여 각각의 특점을 단순화시키고 내세관에 의한 고분벽화의 변화가 설명되었다(전호태, 2000). 2000년대 이후 고분벽화 연구는 고구려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내지는 유라시아로 보다 연구가 확장되었고, 개별 고분벽화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주변 벽화와의 비교연구, 벽화의 분포 현황이나 벽화를 통한 신앙과 제의 연구, 벽화에 나타난 기물이나 도상 연구, 별자리에 관한 연구, 생사관 연구 등이 수반되었다(공석구, 2000; 김일권, 2003; 전호태, 2004; 서영교, 2004; 강현숙, 2005; 이송란, 2005; 나희라, 2005; 박아림, 2009; 김진순, 2009; 김주미, 2009; 門田誠一, 2011; 정호섭, 2011; 고광의, 2011; 김수민, 2011; 조우연, 2012; 東潮, 2015). 아울러 미의식이나 건축, 주거, 음악, 놀이 등 다양한 문화에 대한 연구를 통해 고구려 생활문화사가 정리되기도 하였다(전호태, 2016). 고분벽화에 나타나는 묵서를 통해 묵서문화의 수용과 변용, 그리고 묵서의 기능을 밝히는 연구도 있었다(김근식, 2020).
고구려 고분벽화 연구에서 뚜렷한 한계점도 존재하는데, 120여 기가 넘는 벽화고분 가운데 전체 벽화 내용을 어느 정도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경우는 30여 기 내외로 한정된다. 대부분의 고분벽화는 일부 내용만 확인되고 있어서 전모를 이해하기 어려운 경우가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특히 벽화고분은 실견이 어려운 관계로 고분벽화에 대한 정확한 정보도 부족한 편이다. 남북 관계가 원만했을 때 북한에 있는 고분벽화를 3회에 걸쳐 조사한 경험과 거기에서 확보한 자료들은 벽화 연구에 있어 소중한 자산이 되기도 하였다(고구려연구재단, 2005; 남북역사학자협의회·국립문화재연구소, 2006; 2007). 따라서 벽화 연구의 활성화를 위해서는 각 벽화고분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세부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종합적인 데이터베이스 구축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문화사적인 측면에서의 연구도 이어졌는데, 복식이나 음식과 관련한 연구도 제시되었다. 복식에 대한 연구는 주로 문헌기록과 고분벽화를 통해 이루어졌고(김정선, 2000; 정완진, 2003; 이경희, 2012), 고구려 음식문화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기도 하였다(전호태, 2013; 박유미, 2017).
오류접수

본 사이트 자료 중 잘못된 정보를 발견하였거나 사용 중 불편한 사항이 있을 경우 알려주세요. 처리 현황은 오류게시판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전화번호, 이메일 등 개인정보는 삭제하오니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6. 종교와 문화 연구 자료번호 : gt.d_0010_0020_0030_0060